2강 -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전체녹취

갈라디아서 특강 2 -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장)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갈라디아서 1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또 배웠습니다. 갈라디아라는 곳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지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북부 갈라디아가 있고 또 남부 갈라디아가 있는데, 남부 갈라디아의 네 도시를 갈라디아 지역 벨트라고 합니다. 네 도시가 어디인지 기억나십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입니다. 이 네 도시를 갈라디아 벨트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을 1차 선교 여행 때 가서 개척했습니다. 사실 첫사랑의 지역이 바울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에 2차 선교 때도 갔었고 3차 선교 때도 그곳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고, 동시에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린아이들처럼 이 복음 안에서 자라야 되는데 오염된 자가 되면 안 된다는 간절함과 애통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1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바울이 지금 고린도에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편지를 쓰면서 감사도 생략할 정도로 아주 긴박하게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 복음을 물타기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건 한 가지로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주로 고백함으로 얻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였습니다. 사실 할례라는 것은 받아도 그만이고 받지 않아도 그만인데, 바울이 할례에 이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것을 구원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지 않습니까? 그 후에 우리는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좀 모호하게 잘 알지 못했는데, 바울이 바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갑니다. 이 말은 사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묵상하고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죠. 이 3년의 기간이 지나고 예루살렘에 올라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15일 동안. 거기까지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1.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1-1. 계시를 따른 여정

이제 그다음 이야기를 봅니다. 1절을 보십시오.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장이 14년 후라고 했는데, 이 14년이 되는 기점은 1차 예루살렘 방문으로부터 14년이 경과한 후입니다. 과거에 가서 15일 동안 사도들과 교제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갔습니까?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갔습니다.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갔다는 것이 두 가지 의미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지금 현재 바울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과 같이 막 섞어서 하니까 사도행전 말씀을 잘 모르면 좀 헷갈릴 수가 있고,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동행하는데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 하면 안디옥 교회에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왔고 그 핍박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수리아 지역에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첫 번째 목사님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혼자 목회하지 않고 고향 다소에 가 있던 바울을 데려다가 함께 목회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갔다는 것은 현재 바울의 상황이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던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것 이해되시죠.

그리고 또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유대인입니다. 즉 할례로 따지면 바나바는 할례 받은 사람이고, 디도는 헬라인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할례로 따지면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을 데리고 갔고 한 사람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헬라인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루살렘에 가면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말고 방문자들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오면 반드시 가는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딜 갑니까? 성전을 가겠죠. 유대인들은 당시 헤롯 성전인 그 성전을 반드시 방문하려고 합니다. 가고 싶기도 하고, 과거 옛날 솔로몬 성전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 성전 DNA가 유대인들 속에 아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올라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성전에 못 들어갑니다. 지금 이 문제가 여기에 첨예하게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가벼운 책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보고 이 1절을 보시고 그다음 2절을 봅니다.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계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계시는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계시가 오는 것인데 바울은 지금 어떤 계시를 구체적으로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14년 이후에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다가 할 일 없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계시를 받아서 올라간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 가운데는 디도를 데리고 가는 것도 이 계시에 포함된 것입니다.

자 올라갔습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하는 복음을."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딱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오직 믿음,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그것 위에 모든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지금 이방에서 전하는 복음 아닙니까?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그들이 누굽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바울이 말합니다. "유력한 자들에게." 유력한 자들이 누굴까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유력한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즉 베드로, 야고보 같은 지도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사사로이 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적인 교제를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바울이 지금 이방인들에게 전했던 자신의 복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회당에 사람들 모아 놓고, 혹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 운동장에 모아 놓고 설교했다는 뜻이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두고 그들에게 사적으로 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래야 됐을까요? 보십시오.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달음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하는 이 사역입니다.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적은 교회일 때가 많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바울이 지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하는데, 안디옥 교회를 지금 목회하고 있잖아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입니다. 뿌리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이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세력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14년 동안 견디다가 바울이 바나바와 헬라인 디도를 대동하고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유력한 자들, 그들에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틀렸느냐고, 논리로, 이것은 그냥 싸움이 아니고 바울은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에게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계시로 인한 것이다. 지금 이것을 2장 주두에 명확하게 선제적으로 선포하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1-2. 디도와 할례 문제

그다음 일들입니다. 3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자, 헬라인 디도가 그들 앞에 딱 있습니다. 바나바와 디도가 딱 대동해서 좌청룡 우백호로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상상해 보십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세 분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세 명의 기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이 세 분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유력한 자들입니다. 이분들을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만났습니다. 그러면 이 세 분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생각할 때 누가 걸립니까? 지금 디도가 걸리는 것입니다. 디도가 뼛속 깊이 유대인들인 이 세 분은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그리고 이 교회에 세 분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바울도 바나바도 디도도.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 지도자들에게 "저놈은 할례도 안 받은 헬라인 아닌가, 저놈이 할례도 안 받고 여기를 얼쩡거리나" 하고 자꾸 그 이야기를 입에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도자들이 한번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분위기 좋을 때, 밥 먹는 자리에서, 바울 성질을 아니까 "야, 그냥 온 김에 디도도 할례 받게 하고 성전도 한번 구경하고 가면 좋잖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아니냐, 한번 해라. 그냥 네 말이라면 디도가 들을 것 아니냐." 이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억지로는 할례를 받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려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려고 왔습니다.

왜 할례 받는 것이 어떻고 받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고린도전서에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7장 18절에서 20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십시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왜 아무것도 아니라 할까요? 구원과 아무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고린도전서 공부를 이미 했는데, 고린도전서 7장이 무엇을 다루는 장입니까? 결혼을 다루는 장입니다. 결혼하고 안 하고 가지고 교회 안에 말이 많으니까요. 여러분, 우리도 교회 안에서 좀 젊은 처녀 총각 보면 "왜 너는 장가 안 가니, 너는 시집 안 가니" 제발 그런 것 좀 묻지 마시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뭐 생각하는 것이야 죄겠지만. 그런데 결혼을 하건 말건 그것이 구원받는 것하고 신앙생활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런 것입니다. 결혼하건 결혼하지 않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할례를 받건 할례를 받지 않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할례 받지 않았는데 굳이 할례 받으려고 애쓰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과 하등에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가 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없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것 이해 되십니까?

이제 그런 맥락으로 바울은 할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도에 대해서만은 할례를 절대로 받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구원과 연결만 안 시키면 디도가 받고 싶으면 받는 것이고 받고 싶지 않으면 안 받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 할례 받아야 진짜 구원이야, 믿음으로도 구원받지만 할례도 구원의 한 증표가 되니까 할례 받아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바울이 "그렇다면 받지 마라, 목숨 걸고 받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단어를 바꿔서 이야기해 볼게요. 교회에서 새벽 기도하는 것,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하고 싶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 상태가 되고 내 삶의 상황이 되면 새벽 기도 할 수도 있고 안 되면 못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는 거짓 교사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받아, 근데 새벽에 정성을 드려야 해, 한 천일 정도 새벽 기도를 해야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면 저는 칼을 쓰고 새벽 기도 폐해 버릴 것입니다. 하지 마라고. 아예 하지 마라고. 나오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과 연결된다면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지점의 차이를 우리는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내가 하고 힘쓰고 애쓰고 있는 것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는 것을 그것을 구원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바울이 칼을 쓰고 디도 데리고 다니면서, 할례 받지 않는 디도를 일부러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보라고. 사람들 보라고. 이것이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입니다. 억지로 할례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사도행전 16장 1절에서 3절을 봅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런 바울의 모습을 이해를 잘 못 하는데요.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아니, 디모데는 할례 받지 않았는데 이미 그를 데리고 떠날 때 할례를 받게 했다고요. 바울이 디도는 할례 못 받게 하고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는 이 이중잣대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바울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까?

여기 보십시오. 다시 3절 보니까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 유대인들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면서 할례 받으면 사역하기가 편하니까, 그로 인해서 불필요한 논쟁이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할례 받게 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는 왜 할례를 못 받게 하느냐? 지속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안디옥 교회에 들어와서 유대인들이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을 우리는 이 구별을 잘해야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물타기 하는 자들, 만약 그런 식으로 들어온다면 그것 안 하는 것이 맞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끊어 버려야 됩니다.

2. 복음의 자유

2-1. 변질된 전통과 본질

비슷한 예인데, 한국 교회에 옛날에는 좋은 전통이었다가 악한 전통이 되어 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교회 중직을 세울 때 임직자들이 옛날에는, 교회가 다 먹고 살기 힘들고 교회가 너무 가난하고 어려울 때, 그때는 임직 받는 분들이 "야, 우리가 십시일반 해 가지고 조금씩이라도 돈 좀 거둬서 교회 시계라도 하나 달자" 그런 시계 보셨죠. 그 시계에 "몇 년 임직자 일동" 이렇게 가지고 큰 괘종시계 있잖아요. 그런 것도 달기도 하고, 또 조금 더 형편이 좋아졌던 1990년대는 그때 한창 교회 봉고차가 유행했는데 "우리 임직자들이 조금씩 십시일반해서 교회 봉고차를 하나 사 드리자." 얼마나 좋은 전통입니까? 다 좋은 전통이잖아요.

그런데 이 좋은 전통이 악습이 됩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고 어디 돈이 나올 데가 없으니까 이제 임직을 하는 것입니다. 일꾼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헌금 뽑아내려고. 그래 가지고 강매하는 것이죠. 장로님 얼마, 권사님 얼마, 안수 집사님 얼마, 돈을 부과를 합니다. 그래서 돈을 걷습니다. 저는 이것을 헌금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돈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돈입니다.

자 그러면 마음이 선하신 분들, 또 임직이 되신 분들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잖아요. 그것을 맞춰서 어떻게든 적금도 깨고 보험도 깨고 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자녀들의 신앙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모습을 보는 우리 아이들의 신앙은 "우리 아버지가 돈으로 직분을 샀다" 이야기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돈으로 직분을 샀다." 그것이 중세 시대에 면벌부, 면죄부 파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식으로 교회가 썩어 가고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중간에서 변질되어서 내려오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고 하면 이것 끊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강력하게 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절 우리 임직자들 오해받을 헌금 못 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보에 이름 나는 것 있잖아요. 장학 헌금하고 감사 찬조, 이름 나고 하는 것 못 하게 합니다. 오해받을까 봐 일절 아무것도 못 하게 합니다. 한 푼도 못 하게 하고. 그것이 좋은 전통인데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례 받아도 되죠. 이방인들이 왜 할례 받으면 안 됩니까? 자기 자유인데 할례 받을 수 있잖아요. "아, 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 됐는데 나도 할례 받고 싶어, 유대인들처럼." 받으면 되죠. 그런데 그것 왜 받으면 안 되느냐?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지고 거니까 칼을 쓰고 바울이 디도 데리고 다니면서 억지로 할례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 교회가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이 처해 있는 것입니다. 작금의 상태도, 이 시대에 교회의 상태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을 쓰고 그런 것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연결시키고, 직분을 산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넣어줄 때는 철저하게 이것을 끊어 줘야 됩니다. 철저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2-2.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다음 중요한 말씀 보죠.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가 어떤 자들입니까? 복음에 물타기 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죠.

자, 여기 자유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유. 할례 받을 자유, 받지 않을 자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있는 존재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잖아요. 구원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법에서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복음이 우리를 다른 조건을 가지고 구원을 걸어버리면 그것은 종 노릇이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단 집단들 보세요. 이단 집단은 항상 구원에 믿음 말고 다른 것을 요구를 합니다. 이것이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신천지 이단, 14만 4천, "너희들이 헌금 다 갖고 와, 집 팔아서 갖고 와, 함께 모여서 공동생활 해야 돼, 정성을 내라, 그 14만 4천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지금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열심히 봉사해라, 열심히 충성해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것이 신천지 이단 집단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자유입니까? 자유가 아니잖아요.

진짜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자유롭게 섬기고 자유롭게 헌금하고 자유롭게 봉사하고 자유롭게 하나님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잔치가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항상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 물론 그렇죠. 이제 신앙의 연수가 좀 오래 되고 또 직분이 좀 시간이 지나고 이러면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것도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담임 목사잖아요. 주일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 오늘 가기 싫어" 안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안 가버리면 안 갈 자유가 있다고 안 가버리면 구원의 여부와 상관없지만 이 강단은 누가 서겠습니까? 와야 되잖아요. 그런 것은 있죠.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 걸면 안 됩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자유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마음속에 새기고 사셔야 됩니다.

2-3. 행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로마서 4장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런 이야기를 하죠.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에 가면 또 나오는데 행위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행위가 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행위가 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나, 이것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자, 89.5점이 90점입니까, 아닙니까? 맞습니까? 아닙니까? 반올림하면 안 됩니까? 반올림해서 90점 줬다 합시다. 89.5 받은 사람을. 그러면 89.4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반올림 말고 수학에 올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89.1점, 좀 올려 주세요." 아까 또 마음이 좀 약해 가지고 이 채점하는 채점자, 교수님이 "그래, 뭐 0.1점, 0.3점 차인데 올려 줄게." 그러면 88.9 맞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이 애매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로서의 구원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해야 구원이라는 조건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그 헌금에 만족하실까요? 얼마나 내가 새벽 기도 열심히 나와야 천국 갈 만큼 도장 찍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내가 전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아흔아홉 명이면 됩니까? 그럼 또 물을 것 아닙니까? "그 아흔아홉 명 중에 10년 뒤에 몇 명 남았냐?" "두 명 남았는데요." "그러면 세 명 전도해서 두 명 남은 사람하고 아흔아홉 명 전도해서 두 명 남은 사람하고 누가 더 의로우냐?" 이런 것 따지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행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로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골치 아파 가지고 이 소원 수리 다 듣고 이것 규정 다 만들고.

교회가요, 은혜가 사라지면 교회 규정집이 이만큼 두꺼워집니다. 은혜가 사라지면요. 그런데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있으면 다 하나님 은혜 아래서 규정집 필요 없고 그냥 보편적인 상식으로, 믿음의 상식으로 다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 규정집이 왜 갈수록 두꺼워질까요? 은혜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날카로워지고 그것 가지고 디테일한 법을 계속 따지고 들기 때문에 또 만들고 또 만들고 또 만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이 현실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절대 못 따라갑니다. 사람들의 삶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법은 저만큼 뒤에 있습니다. 절대 못 따라갑니다. 그래서 행위로서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 기준으로 가면요.

3. 바울의 사역 인정

이제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 뒤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6절 보십시오. 바울이 이제 성과를 얻은 것이 있는데요.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유력하다는 이들, 바울이 약간 비꼬는 느낌이 있죠.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 같은 사람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적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7절부터 중요합니다. "내가 무할례자에게." 무할례자는 이방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즉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이것이 중요하죠. 베드로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바울의 역할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바울이 지금 계시를 받아서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14년 후에 여기 올라왔잖아요. 그래서 판을 짰습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와 함께 앉아 가지고 판을 짰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바울, 너의 사역을 인정하노라. 너의 이방인 사역을 인정하노라. 마치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정받는 것처럼 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인정하노라." 이것을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아, 대단한 성과이죠. 9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어디의 기둥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여기 야고보는 주의 형제 야고보, 게바와, 게바는 베드로,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누가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친교의 악수, 인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가운데 일치를 추구하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의 엉뚱한 인간들을 우리가 단속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가지 않도록 우리가 책임지마, 그 이야기입니다. 친교의 악수를 했다는 것은. 이것 이해되시죠?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 아름답게 해결이 잘 된 것처럼 보이죠.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제 두 교회가 한 가지 일에 같이 동역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구제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들이라 하면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자금을 모으고 기금을 모으고 구제금을 해서 함께 돕자, 이제 여기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올라온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은 큰 집에서 작은 집을 인정한 것이고요, 개척한 교회에서 개척된 교회를 인정한 것이고,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서로 동반자 역할,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함께 가겠다는 역할을 인정한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종속적인 교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하죠. 대형 교회가 소형 교회를 종속한다 가지고 있다, 혹은 개척한 교회가 개척된 교회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서로 동등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는 것입니다. 서로 그 안에서 함께 동역하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애쓰는 것입니다. 성도 수가 얼마나 모이건, 그 교회 재정의 차이가 얼마건,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들이 많이 모인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고, 성도들이 적게 모인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교회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4. 베드로의 실수와 책망

4-1. 안디옥에서의 사건

자, 그다음 이제 또 다른 단락이 시작됩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서로가 협력하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11절, "게바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자, 이제 상호 방문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예루살렘 교회 갔으니까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 온 것입니다. 답방 형식이죠. 이제 한번 온 것입니다. 자, 베드로라고 하면 예루살렘 교회 같은 유력자이니까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극진히 섬기고 대접했겠습니까? 한번 만나보고 싶고 베드로 설교도 들어보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온 것입니다.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베드로가 책망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노라." 이제 구체적으로 내용이 나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쓰긴 했는데, 이 야고보가 지금 안디옥 교회에 있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일단의 다른 무리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 이방인, 안디옥 교회 이방인들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과 식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함께 먹다는 동사가 과거형도 아니고 완료형도 아닙니다. 미완료형 동사입니다. 즉 이 말은 지속적으로 먹는 행위를 반복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안디옥 교회에 설교하러 와서, 이 교회 방문하러 와서 머무는 동안 이방인들과 만나서 자주 식탁 교제를 했습니다. 그 이방인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또 바울도 바나바도 디도도 "이제 드디어 진짜 이분들 우리 교회를 인정하고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구나"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일단의 무리들이 오자마자 베드로가 도망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왜 도망갔을까요? 이것이 유대인의 본능입니다. 본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마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마라."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다는 의미는요, 레위기 11장에 금지된 음식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 그것을 함께 먹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경험이 있죠.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 사건이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와서 "일어나 잡아먹으라" 음성이 계속 들리지 않습니까? "주여, 저는 절대로 이런 음식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괜찮다, 일어나 잡아먹어라." 그러고 환상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 전하고 그들에게 세례 베풀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마 베드로도 도망가면서 "내가 왜 이러지" 도망가 놓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송하고 낯을 들 수 없고, 뭐 이제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쨌든 상황은 벌어졌고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4-2. 영적 지도자의 책임

바울이 열 받은 것입니다. 진짜 바울이 이것 넘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덮고 넘어갈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쓰잖아요. 여기. 자, 그런데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는데 13절 보세요.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매." 안디옥 교회에 유대인들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베드로가 음식 먹다가 일어나서 도망가 버리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도 같이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또 거기 누가 있었습니까?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니라." 바나바도 같이 도망갔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는 것이죠.

지금 여러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향력입니다. 영향력. 이것이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지도자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성도가 아니잖아요. 지도자입니다. 영적 지도자입니다. 이 영적 지도자가 한번 이렇게 해버리니까 다 따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그 영향력에 사람들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다닌다고요. 바울같이 독한 사람 말고 바나바도 넘어가 버리고 유대인들도 현혹돼 버리고 다 가버린 것입니다. "아이고, 이것이 뭐가 잘못됐나 보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와 자리가, 야고보가 그랬죠. 선생 되기 좋아하지 마라고. 높아지는 것 좋아하지 마라 그랬죠. 이 본능도 가 억제하고, 이 본능도 내가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깨어서 살아야 되는데,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이 순간의 유혹, 이 순간에 이 찰나의 순간에 자기 자신을 못 지킨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뭐라고 변명할 것입니까? 이것 변명할 수 없다고요. 사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14절 보세요.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조용히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바울이 베드로 찾아가 가지고 "이러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되셨으니 잘못된 것을 사과하시고 그때 상황을 설명해 주십시오"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라 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처럼 율법에 매여 살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잖아요. 이방인 음식 막 다 먹잖아요. 그러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 너 이율배반이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는 사도성을 인정받았고 바울은 사도성을 인정받지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나이도 훨씬 어립니다. 권위에 있어서도 베드로의 권위에 미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망합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해야 될까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오래 참는 것이라요. 그런데 왜 여기는 적용하지 않습니까? 왜 오래 참지 않습니까? 오래 참을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자기 공동체를 지켜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이 공동체, 안디옥 교회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있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이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만든 공동체라고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15절 말씀을 보시면 바울이 교회론을 이야기했죠.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둘이 하나가 됐잖아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런 공동체를 지금 꾸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 잘되고 있습니다. 이 인간만 아니면.

그런데 베드로가 와 가지고 이 공동체를 엉망으로 만들었거든요. 바나바도 따라가고 유대인들도 따라가고, 기껏 둘이었던 것을 하나로 만들어 놨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무색하게 하고 다시 두 조각 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너의 이 모순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그대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이 덜 돼서가 아니라, 바울이 못나서가 아니라, 자기 공동체를 너무 사랑하니까 염치 불구하고 체면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3. 관계보다 본질

자,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사회적 관계가 더 많아지잖아요. 그것이 노련해지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정치화된다고 합니다. 본질보다, 핵심 가치보다 관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관계를 먼저 생각했더라면 이런 말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본질을 먼저 생각하니까 이 관계를 뒤로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 보면 관계라는 것이 생기잖아요. 인간관계라는 것이. 목사와 장로님들과 관계가 생기고 권사님들과 관계가 생기고 성도들끼리의 관계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 관계가 지나쳐서 그 관계가 공동체를 쪼개고 나누는 지경까지 간다면, 복음의 본질과 진리를 훼손하는 자리까지 간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해야 됩니다. 다시 얼굴 안 볼 생각하고 해야 됩니다. 가슴 아파도 그 관계를 잃어버릴 생각을 하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평소에 너무 친하지 마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아실 텐데, 뭐 저도 많이 들어요. 교회 안에서 우리 성도들끼리 뭐 "오빠야." 이 오빠야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 안에 진짜 오빠입니까? 직분을 불러야지. 집사님이고 권사님이고 장로님이지. 오빠야가 어디 있습니까? 오빠야. 평소에 오빠야 동생아 언니야 친구야 이러다가 진짜 관계가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 오빠의 얼굴에 침 뱉을 수 있습니까? 그 동생에게 "이것 본질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요.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배웠잖아요. 거리 두기 필요합니다. 좋은 의미에서. 성도들 간에 지나친 터치, 지나친 친밀감, 언어적 친밀감. 그러나 그 이상과 그 단계를 넘어가시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가립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리를 어지럽힙니다. 교회를 사적 사교 집단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바울이 모자라서 베드로에게 이런 소리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교회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사셔야 됩니다. 그래야 진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5. 믿음의 본질

5-1. 전적 무능의 인정

사람은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그 위에 제가 "화 있을진저" 막 적어 놨는데 이것은 읽어 보시면 되니까요. 무섭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화 있을진저, 네 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읽어 보시고요.

16절 한번 보세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별 감동이 안 됩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읽은 이유는, 감동이 안 되는 이유는 하도 많이 들어서입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율법의 행위로써는 구원 얻을 육체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잘난 사람이, 자신 있는 사람이 행위를 주장합니다. 왜요? 자신 있으니까.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시험을 기다립니다. 왜요? 시험 봐야 자기를 뽐낼 수 있으니까. 운동 좀 하는 아이들이 체육 시간을 기다립니다. 저는 옛날에 체육 시간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림 좀 그리는 아이들이 미술 시간을 기다립니다. 저는 미술 선생님이 아프시기만을 기도했습니다. 그렇잖아요. 행위 좀 하는 아이들이 행위로 뭔가 하려고 합니다. 잘난 사람들.

그리고 집안 좋은 사람들. 아버지도 장로님이 할아버지도 목사님이 우리 4대째 4대 위의 할아버지는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받아들여서 교회를 손수 지으신 분들. 이런 분들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그런데 그것이 구원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결단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세리의 기도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아시죠. 누가복음 18장에.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든요. 세리는 잘난 것이 없거든요. 내세울 것이 없잖아요. 내세울 것이 있어야 행위를 뭔가 해 가지고 이것을 건덕지 삼아서 "이것 했으니까 구원 얻게 해 달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을.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보다 돈 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나보다 더 뛰어난 인재 있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전적인 무능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전적인 무능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능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기대자,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뭐 좀 할 수 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곳이 너무 재밌지 않으세요? 저는 교회를 보면 어릴 때부터 다녔지만 너무 재밌어요. 왜 재밌냐 하면 너무 줄타기 하는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우리 교회 올해 예산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경상 예산 20억입니다." 20억. 그런데 웃긴 것이 각 부서별로 막 예산을 분배해 놓잖아요. 1월 달부터 막 예산을 막 타 가요. 그런데 너무 재밌는 것이 20억 쌓아 놓고 1년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교인들이 헌금을 해서 헌금이 들어와야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뭘 믿고 예산을 20억을 세웠지, 내가 미쳤는가 보다, 내가 이 교회 담임 목사인데 내년이 어떻게 될 줄 알고, 막 그런 생각을 한 번씩 하면 등골이 서늘해요.

저는 경제적인 것도 잘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금리도 잘 모르고,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제 이름으로 전세 계약해 본 적도 없고 집 사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몰라요. 바보예요. 바보. 그런데, 그런데 이 교회가 굴러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짜 교회가 되는 것.

여러분들 가정을 한번 보세요. 가정 경제 어떻게 꾸려 갑니까? 돈 쌓아 놓고 사는 집 있습니까? 없잖아요. 나갈 때는 지금 뭐 이 아이가 이제 막 여자 친구 데려올 것이고 와 가지고 난리인데 갖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또 참 신기한 것은 아이들 시집장가 다 가고 그것 또 지나가요. 그렇죠. 그것 은혜 아닙니까? 우리의 전적 무능을 인정해야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옵니다. 우리가 좀 잘났다고, 안다고, 그것 계산하고 따지기 시작하고 그것 가지고 뭔가를 하기 시작하면 그것 은혜가 어떻게 들어옵니까? 그것 은혜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안 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를 부정하고 나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행위를 믿는 것은 나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고 삶을 영화롭게 만들어 줍니다.

5-2.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자, 그다음 아주 중요한 말씀,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절 말씀인데요.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무엇입니까? 내 행위, 내 행위를 자랑하던 내 옛 자아,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랬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안에는 누가 산다고요? 그리스도께서.

그런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어떤 식으로 사느냐? 요한복음 15장 7절을 보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방식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바꾸어 읽으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계시는 것이라."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계시면 우리는 말씀대로 행동해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아직까지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내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숨쉬지 않고 내 자아와 내 욕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율법의 의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래서 팔복의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내 마음을 비우라는 뜻입니다. 비우면 그 자리에 말씀이 들어오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다스려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사시는 방식은 말씀으로 사시는 것이니까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좀 전에 말씀드린 바에 의하면 자신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산다, 그래서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렇게 외친다고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과 무능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 무능을 인정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들어오시고 말씀이 나에게 들어와 살아 숨 쉬니까요.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2장 말씀 진짜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말씀이니까 지속적으로 묵상하시고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것 이외에 할례 등의 다른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안에서 온전한 자유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방식이 오직 믿음으로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율법의 의를 주장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기껏 조금 헌신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그것 가지고 자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나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셨사오니 나의 약함과 무능을 인정하고 그 약함의 자리에 그리스도를 초대하게 하옵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살아 숨 쉬고 꿈틀거리는 놀라운 역사를 누리고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진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내 자아로 살지 않으며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만 살아 숨 쉬는 참으로 복된 존재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