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율법에서 믿음으로 / 전체녹취

갈라디아서 특강 3 - 율법에서 믿음으로 (갈 3장)

본문: 갈라디아서 3장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공부 세 번째 시간으로, 3장을 본문으로 삼아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하나의 교회 이름이 아니라 지역 이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갈라디아라는 한 지역 벨트를 갈라디아 교회들,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하는데, 네 군데 교회를 꼽을 수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렇게 네 군데 교회를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들로 떠올리면 됩니다.

바울의 첫사랑이었고,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그 지역 교회들을 개척했습니다. 처음이니까 열정이 있고, 더 뜨거운 마음이 있고, 잘됐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2차 선교여행, 3차 선교여행에서 항상 갈라디아 지역 교회 벨트를 다니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바울이 정말 열정적으로 해산하는 고통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는데, 그만 거짓 교사들, 유대인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다른 복음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데, 원래 구원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 아닙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데, 거기에다가 슬쩍 물타기를 합니다. "물론 믿음도 중요하나,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고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믿음도 있고 할례도 받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할례를 저마다 앞다투어 받기 시작합니다. 할례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인 겁니다.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구원과 연결되는 순간 바울은 사나워집니다. 절대로 할례받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절대로 할례받지 못하게 합니다.

2장에서 살펴본 바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안디옥에 올라왔다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도망가 버린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염려합니다. 기껏 하나 되게 했더니, 기껏 복음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했더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이 올라와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지럽혔습니다. 이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책망합니다. 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쉬운 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3장은 바울이 이제 조금 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 할 만큼 교리적인 내용으로 풍부한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길을 잃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이야기를 축약해서 하고 있고, 또 아브라함 이야기도 군데군데 많이 나옵니다. 이 순서를 따라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의 책망

1-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

바울은 1장에서 다른 복음은 없다는 걸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2장에서는 베드로 책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3장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직접 책망합니다. 그 책망의 이유가 1절에 나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실에 더해서 할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 소식을 고린도에서 듣고 견디다 못해 화가 나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왜 어리석으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왜 못 박히셨습니까?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내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만한 육체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렸다시피 믿음이라고 하는 건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난 줄 알면 행위를 합니다. 이걸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믿음이라는 것은 내 행위로는 도저히 내가 구원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무능을 인정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는 자들을 위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이유가 없죠. 우리가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가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걸 보고도 너희가 너희 행위를 주장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1-2. 성령은 어떻게 받았는가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말씀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데 질문하는 겁니다. 너희가 성령받은 것이 어떤 행위의 결과로 성령이 주어진 것이냐, 아니면 그냥 선물로 받은 것이냐고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과 14절을 보면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언제 사건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 바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들을 지금까지 인도하고 이끌어 주던 선생님이, 그것도 부활하신 분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자들, 뭘 해야 됩니까?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습니까? 남은 자들은 무능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무능합니까? 이 무능한 자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모여서 한 것, 딱 한 가지 그게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언제까지 이어집니까?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모여서 또 뭘 했을까요? 놀았을까요? 기도했죠. 기도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어떤 행위가 있습니까? 그들의 무능을 인정하고 기도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할례받은 것이 있습니까? 혹은 그들이 거기에 선을 행하고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돈을 내서 구제하고 한 행위가 있습니까? 그런 것 없지 않습니까? 그냥 기도했을 뿐인데, 기도는 무능한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힘없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 기도인데, 그 자리에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선물은 내가 노력해서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4절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는 사건이 나오죠. 빌립 집사님이 그 성에 복음을 전하니 그 성이 다 복음으로 큰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 성 사람들이 다 놀라운 은혜를 입었고,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와 요한이 거기에 성령 세례를 주는 장면들을 보고, 그 성에 있었던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돈을 드릴 테니 나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아닙니다. 즉 행위로 내가 뭔가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해서 그 대가로 주어진, 서로 주고받은 결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1-3.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그래서 바울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3절 다시 갈라디아서 3장 3절로 보시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육체가 무엇입니까? 행위라는 뜻입니다. 값없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너의 행위로 일을 마치겠다고, 율법으로 끝내겠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잘했습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시작을 잘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서 시작을 아주 잘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행위로 뭔가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 생활이라는 것은 첫 시작을 잘했으면 끝까지 그걸 유지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성령의 책망과 히브리서 말씀도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3장 7절과 8절 말씀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끝까지 보라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그 중간만 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지금 이 순간 저분이 얼마나 신실한지, 지금 이 순간 저분이 어떤 식으로 교회를 섬기는지 그 순간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만 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도 그때 나에게 잘하는 것, 그것 하나 보고 믿고 덜컥 결혼했다가 평생을 땅을 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때 그 순간 그것만 보고 정말 그런 줄 알았다가 사업의 파트너로 삼아봤다가 평생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과 과정과 끝까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자기 자신을 살펴야 되는데, 사람처럼 변질되기 쉬운 존재가 없습니다. 변하고 또 변질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보여야 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목사는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됩니까? 장로님은 안 해도 됩니까? 처음에 그 초심과 그 과정과 끝을 하나님 앞에 사는 게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항상 말씀 앞에 비추어 보고, 달라지지 않으려고, 변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경주하고 또 달려가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갈라디아 교회들이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가다가 육체로 그냥 흘러가 버린 겁니다. 율법으로, 할례받아서 구원받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제 그걸 바울이 지금 대단히 책망하고 있습니다.

2. 환란의 참된 결과

4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괴로움이 무엇일까요? 그 당시는 로마 압제 상황입니다. 기독교 공인되기 전입니다. 기독교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인터넷이 있었던 시절도 아닙니다. 편지가 자유롭게 아주 빠르게 주고받던 시절도 아닙니다. 한 사람이 편지 쓰면 두 달 뒤에 저 옆 동네에서 받고 하는 그런 시절입니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렸다 할지라도 그 칙령이 실효성을 가지고 로마 전역으로, 그 식민지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박해 때문에 사람들이 그 박해를 피해서 지하에 숨어서 놀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지상으로 나와도 된다는 말을 누가 들려 줘도 믿었겠습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로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D 313년 기독교 공인이라고 말은 하나 실제로 실효성이 선포되고, 제대로 사람들이 '아 정말 그렇구나' 피부로 느낄 때는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한 세기 이상이 지나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괴로움을 받은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은 생명을 걸고 예수 믿어야 됩니다. 그게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괴로움이 마지막에 무엇으로 끝나야 됩니까?

로마서 5장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끝이 무엇으로 갔습니까? 소망으로 가죠. 환난에서 시작해서 끝은 소망으로 맞춰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환난을 겪었는데 끝은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주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환난은 있습니다. 환경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예수 믿는 걸 계속 방해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마지막은 소망으로 끝나고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끝나야 됩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마지막 종착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들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의 끝이 행위 구원으로 가버린다면 이게 잘못된 거 아닙니까?

요즘 세상은 항상 심리적인 걸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세상이 됐습니다. 요즘 TV 프로그램을 보면 반항하는 아이들이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전문가분이 나오셔서 상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뭐 결혼지옥 같은 것을 보면 가정에 문제가 있는 분들을 이쪽 사람 저쪽 사람 상담하고 관찰 카메라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항상 나오는 말, 패턴은 똑같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과거에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유기, 학대, 정서적 결핍 등등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다 고난과 환난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다 삐뚤어지는 게 아니고, 가난했다고 해서 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못 배웠다고 해서, 내가 일자무식하다고 해서 교양 없는 사람이 다 되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의 환난이나 고난이 오늘 우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거 비겁한 거 아닙니까? 과거에 내가 너무 없이 살아서 이렇게 산다고, 그거 하나님 앞에 비겁한 변명입니다. 내가 괴로움을 겪었으니 이렇게 되었다고, 내가 고난을 겪고 환난 겪고 어려움을 겪었으니 내가 이 모양 이꼴로 산다고 말하는 거 그 자체가 비겁한 겁니다.

복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변화되면 이 환난이 나중에 소망으로 바뀝니다. 이 환난이 기쁨이 되어서 이 기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핑계 삼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은 직선적 세계관 아닙니까? 한번 시작해서 쭉 가면 끝입니다. 한 번 사는 세상입니다. 한 번 사는 세상, 언제까지 자꾸 과거 핑계하고 자꾸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살겠습니까? 한번 멋지게 살아봐야지요. 하나님 앞에서 신나고 멋지게, 과거는 잊고 그거 극복하고 살아야죠.

바울이 지금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진짜 헛됐느냐고, 너희가 이렇게 고난받았는데 이렇게 끝내려고 이런 고난받았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을 겪었지만 주를 본받는 교회가 되었는데, 너희는 왜 이 모양 이꼴로 행위 구원자로 전락하고 말았느냐는 책망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 그 다음 쭉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창세기 말씀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그거 정돈 안 하고 이어 보면 헷갈려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3-1. 하나님의 부르심

아브라함 이야기 시작이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신기하죠. 뭐 이런 것 때문에 불렀다 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건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입니다. 우리를 선택한 것과 똑같습니다. 이걸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얘기합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렇게 순종합니다. 창세기 12장 4절을 보세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포기한 게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그랬습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 이거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 따라갔습니다.

크게 얘기하면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가시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가시적입니다. 사람이 가시적인 걸 따르고 싶지 비가시적인 걸 따르고 싶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땅 좋아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물려받을 유산 좋아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군 내 영토, 내 농토, 내 사람들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그거 다 포기하고 비가시적인 하나님 말씀 따라갔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선택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였습니다.

3-2. 불완전한 믿음도 의로 여기심

아브라함은 소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 낳고 싶은 소원, 후사에 대한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후사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합니다. 자기 집에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는데, 이 종이 내 후사가 될 겁니다, 그에게 내 재산을 다 물려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에 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세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랬습니다.

물어봅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때 몇 퍼센트 믿었을까요? 100% 확신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순서가 중요한데, 이 15장 사건 이후에 바로 뒤돌아서서 16장에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까? 하갈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 버립니다. 아직까지 자기의 유능함이 살아 있는 겁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게 살아 있는 겁니다. 나 아직까지 남자로서 안 죽었다 하는 게 살아 있습니다. 나 아직까지 생산할 수 있다는 생산의 의지가 살아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 15장에서의 이 믿음이 순도 100% 믿음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의로 여기셨습니다. 신비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걸 의로 여기셨습니다. 100%가 아닌데, 돌아서 가지고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 낳을 걸 하나님은 뻔히 보고 계시고 그 가능성조차 알고 계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100% 믿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악함을 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불신하면서 믿고 싶고, 믿으면서 불신하고,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여전히 자기 의와 자기 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살아 있고, 여전히 자기 힘이 시퍼렇게 펄떡거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싶었고, 또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걸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 할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할례받아서 행위로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다는 말이 있습니까? 할례는 언제 나옵니까? 17장을 보십시오. 17장 10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신 것이 15장,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이 16장, 할례 사건이 17장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순서상 옳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죠. 이걸 지금 바울이 주장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이걸 로마서에서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작은 로마서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순서를 머릿속에 딱 넣고 계셔야 됩니다.

3-3. 진정한 믿음의 탄생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제 진짜 믿음이 생겼을까요? 창세기 18장 10절과 11절을 봅시다. "그가 이르시되"—그는 누구냐면 아브라함 집에 찾아온 하나님과 두 분의 천사들입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인 줄 모르고 영접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99세입니다. 내년 이맘때니까 100세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습니다. 그럼 이때 사라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열 살 차이니까 89세입니다.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웃었죠. 나중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믿을 구석이 없는 겁니다. 이때 이게 진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믿을 구석이 없을 때, 나를 의지할 구석이 하나도 없을 때, 그때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믿는 겁니다. 나는 못 믿겠지만,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고, 남자는 남자로서의 힘이 다 사라지고 없고, 내 주인은 늙었고, 나는 여성의 경수가 끊어졌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거든요.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믿음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믿음입니다. 조금 잘난 사람은, 뭐 좀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게 안 되는 겁니다. 평생 동안 너무 잘나서, 팔방미인이어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세기 순서를 따라서 쭉 설명했고 그 얘기를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게 창세기 몇 장입니까? 15장입니다. 할례받기 전입니까, 후입니까? 할례받기 전입니다. 그러니 할례가 의로움을 가져다 주고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논증은 틀렸습니다. 유대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이걸 기억하시고 보시면 됩니다.

3-4. 할례의 참 의미

예레미야 4장 4절을 한번 봅시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러면 할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왜 필요합니까? 여기 나왔죠.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마음 가죽을 베는 겁니다. 할례는 사실 육체에 포피를 베어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하시기를 할례의 진짜 의미는 마음 가죽을 베는 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결단이라는 말입니다.

할례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이 결단 한 번 하고 끝내면 됩니까? 어떻게 합니까? 매번, 매 순간, 하나님 말씀을 매번 들을 때마다, 매 순간 매 순간 결단하는 것이 그게 할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육체의 할례 한 번 행하고 끝,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유대인들처럼 육체의 할례 한 번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 되고 구원받을 것 같으면 그거 못 받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 가죽을 매번 베어야 됩니다. 매번 결단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는 매번 악한 것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걸 결단이 무엇입니까? 끊어내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 1절과 2절을 봅시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 교만이, 힘 빼고 하나님 앞에 살라, 자꾸 뭔가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교회는 자꾸 뭘 시키잖아요. 여러분들에게 뭘 해라고 자꾸 얘기하죠. 그런데 이 시편 기자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해서 너희가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성전에 올라오면서 구원받을 자가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은혜만 필요한 사람들이지, 내가 행위로써 할례 등등 할 일이 없습니다.

4. 종교성의 위험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가 왜 이렇게 다른 복음에 쉽게 빠져 버렸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교회가 할례받는 거, 그거 남자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 외과 수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있어서 받아라 받아라 해도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거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해도 그거 계속 할례받고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들,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걸 조금 더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그 열심이 있는 사람을 나쁜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종교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성. 종교성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구원은 내가 열심 낸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열심에 나를 맡길 뿐입니다. 둘째, 그 열심이 다른 사람과 나를 차별화하게 만듭니다. 구별시킵니다. 그게 종교성입니다.

할례받아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할례받았어, 내가 저 사람보다 봉사를 하나라도 더 많이 했다, 이게 구원을 향한 열심이 된다면,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셔야 됩니다, 보통 이렇게는 말하지 않죠. 그런데 이제 세상 떠날 때쯤 돼서 목사가 심방을 갑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이 병상에 누우셔서 그런 말씀하세요. "목사님, 제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그거 듣는 목사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런 말 듣는 목사는 그 분과 보낸 수십 년의 세월이 도대체 뭐였나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정리할 수도 없고, 막 위로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억장이 무너지죠.

사실은 뭔가 해서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른 사람과 나를 차별하게 된다고 했죠. 그게 종교성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 기도 열심히 나오는 사람은 그들의 눈으로 성도들을 봅니다. 안 나오는 자와 나오는 자, 딱 두 종류의 성도만 교회에 있습니다. 왜 안 나올까? 도대체 밤에 뭘 할까? 저 인간 겉으로는 교회에서 하는 말은 많고 밥은 두 그릇이나 먹네, 뭐 그런 눈으로 자꾸 보는 거죠.

또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은, 교회 봉사 뭐 세 개 네 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하지 않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교회를 왜 저 인간은 교회 와서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갈까? 교회 와서 왜 뭐 하나라도 하지 않을까? 저래서 구원받을까? 계속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분들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고, 방언 기도하는 사람은 방언 기도 못하는 사람이 성도 같지 않아 보이고, 교회가 힘들 때 어려울 때 교회 헌금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이 못하는 줄 모르고 그 사람 정죄하고, 그런 겁니다. 그게 종교성입니다.

이게 얼마나 나쁜지 아세요? 그런데 이 당시 갈라디아 지역 벨트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원래 다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을 바울이 가서 복음 전해 가지고 교회 교인으로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원래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전에 뭔가를 갖다 바쳐야, 그래야 자기가 신과 가까워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전 사제들이 그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하고 괴롭히고 애먹이는 겁니다. 뭘 갖고 오라고 자꾸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를 입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와 가지고 이걸 한번 탁 건드리니까, 이걸 자극하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그런 겁니다. 이게 종교성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복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이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믿음은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내 무능을 인정하는 거라 그랬죠. 아니,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는 자기 잘난 걸 계속 자랑해야 살아남는데, 천국 가려고 하니까 잘난 것 자랑하지 말래요. 나 잘났는데, 나 너무 자랑하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거 많고, 뽐내고 싶은 거 많고, 돈도 많은데, 교회에서는 일절 그런 말 하지 말래요. 돈으로도 못 간대요, 천국을. 그러니 너무 어려운 겁니다. 이게 미치겠는 거죠.

또 세상에는 항상 편 가르기 많이 하잖아요. 세상에는 무슨 클럽, 무슨 클럽 보세요. 저는 백화점을 잘 가진 않지만 가보면, 저는 백화점 갈 때 주차를 한 지하 4층 정도에 해야 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냥 아무 데나 차 대고 갈 수 있는 분들이 계세요. 도대체 저분들은 어떤 분들인가, 뭐 1년에 얼마 이상씩 써야지 그게 아무 데나 주차해도 막 그냥 알아서 차 대 주잖아요. 그런 분들의 클럽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 분들의 라운지가 따로 있는 겁니다. 세상은 얼마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끼리의 사교 모임을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는 겁니다. 그게 편한 거예요, 그분들은.

그런데 보세요. 종이나 자유인이나 뒤에 나와요.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도 다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니까 이게 미치는 거죠. 종교성으로 따지자면 자꾸 편 가르기하고 갈라내고 쳐내고 우리끼리, 우리끼리, 우리끼리 해야 되는데, 그걸 못 하게 하니까 괴로운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못 하는 게 복음입니다. 이걸 다 통틀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하는 게 종교성을 깨뜨리는 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반복음적이고 현대 사회에서도 유대주의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편 가르기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편 가르게 하는 거 진짜 위험한 겁니다. 좀 있는 사람들이 끼리 모여 가지고 개인 모임하고,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뭔가 하고, 쟤는 끼워 주지 말자 하고, 무슨 모임, 무슨 모임, 무슨 모임 그래서 그들끼리 하나의 카르텔을 만드는 것, 그건 정말 반복음적인 겁니다.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겁니다.

뭐 그런 얘기 제가 많이 들어갔어요. 어떤 목사님이 "우리 교회는 오시는 구성원들이 다 좋은 분들이라"고, 그 좋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어떤 의미에서 좋다고 하는 건지, 세상에서 권세 있는 분들이 많이 와서 좋다고 하는 건지, 헌금 많이 하시는 분들이 많이 와서 좋다고 하는 건지. 교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배운 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 와야 됩니다. 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용광로가 돼서 다 같이 가져야 됩니다. 전부 다. 그게 복음입니다. 편 가르기 하고 차별하고 구별하고 끊어내고 쳐내고 수십 갈래 수만 갈래로 갈라치기 하는 거, 그거 교회가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가 가진 종교성이 교회를 멍들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5. 율법의 한계와 역할

5-1. 율법 아래의 저주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보시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바울은 한마디로 얘기했습니다. 저주 아래에 있다고요. 왜 그럴까요? 시지프스 신화 아시죠. 바위를 저 산꼭대기까지 올려 놓으면 밀려내고, 올려 놓으면 밀려내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게 그런 겁니다. 행위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제가 얘기했죠. 지난주에 90점 이상이면 구원받는다, 그럼 89.5점은요? 반올림은요? 그럼 올림은요? 그럼 그 아래는요? 이런저런 행위로서 구원받는 거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그게 저주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엇일까요? 11절 우리가 오늘 읽은 구절인데,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믿음이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자기 무능을 인정하고 그 무능을 인정한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해야 됩니다. 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끝까지 자기 주장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가 좀 어렵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인정하고 나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5-2. 율법의 참 정신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7절을 보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맞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쓸데없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고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율법이 변질된 거죠.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의 원형인 십계명을 주셨을 때, 그때 하나님은 그 십계명을 어떤 마음으로 주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살고,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면 도둑질할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면 간음할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면 살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우상을 섬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의 율법이 수백 가지 율법으로 변질되고, 이것이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니까, 이건 중간에 바리새인, 서기관들, 율법학자, 대제사장들이 잘못 가르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참 정신을 제대로 가르치신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에서 40절을 봅시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입니다—"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입니다.

5-3.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이제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봅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오기 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매였다'는 말이 부정적인 말이죠, 우리가 볼 때는.

그래서 여기 원어를 보면 프루레오(φρουρέω)라는 말인데, 사실은 '보호하다, 지키다'입니다. 그 절을 다시 읽어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 아래에 보호받고 있었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율법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진짜 참 율법이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잘못 가르쳐져서 그렇지, 참 율법은 우리를 지켜 주는 율법입니다. "말씀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

그다음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 옛날 성경에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는데 생각나십니까? 초등교사라 했는데요. 몽학 선생이나 초등교사나 그 의미는 좀 뭐하긴 한데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원어로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로 되어 있습니다. 이 파이다고고스, 몽학 선생, 초등교사로 번역된 사람은 누구냐면 주인의 아들을 등교시키는 수종자, 종이었습니다.

옛날에도 과외 선생님이 계셨거든요. 수사학을 가르치는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그러면 돈이 있는 주인들은 자기 자녀를 좋은 선생님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어린아이를, 이 험한 세상에 주인이 그냥 내놓겠습니까? 항상 종이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고, 그걸 도맡아서 했습니다. 그걸 파이다고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걸 초등교사라고 불렀고 몽학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런 겁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우리를 등교시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수종자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누구에게로 나아갑니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하나님 율법을 잘 지키면 그걸 통해서 제대로 그리스도에게로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즉 율법과 그리스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하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잘못된 나쁜 사람들이 끼어들어서 이 율법을 천하의 나쁜 율법으로 만들어 버렸잖아요. 가르치는 사람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쥐었다 폈다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겁줄 수도 있습니다. 두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 이단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얼마나 농락합니까? 그들의 전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잘못 사용되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시종 역할을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될 이유가 여기 있고, 전하는 자는 정말 잘 전해야 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5절에서 "믿음이 온 후로는"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렇죠. 이제 율법의 세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세계로 넘어갔으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6. 복음 안에서 하나

28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까 제가 드렸던 말씀이 다 정리돼 있는데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게 무엇이라고요? 복음이라고요. 이게 종교성을 극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차별하고 나누고 당기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유대인, 헬라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할례받고 받지 않고 아닙니까? 할례받은 유대인이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을 손가락질합니다. "너 이거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러는 순간 교회는 분열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방언받지 않은 사람에게 "너 방언받아야지 하나님께서 널 사랑하는 증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교회는 분열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원치 않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너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너 사랑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미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주의 일을 제대로 잘 못하는 사람에게 "너 그래서 구원받겠냐"고 말하는 순간 그 교회는 종교성에 젖은 교회요 집단일 뿐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육체가 없습니다. 뭘 자랑합니까? 그래서 힘든 겁니다, 신앙생활이. 자랑을 못 하니까요. 입 열고 싶은데, 너무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 못 하니까요. 저 대나무 숲에 가세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교회를 자꾸만 나눕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절대로 사람이 교회를 나누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죠. 일단 이 사람을 저 사람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건 그 사람을 욕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욕하는 거 그거 참 위험한 겁니다. 그러면서 자꾸 보이지 않는 벽들이 자꾸 생기는 거거든요.

결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지 보았습니다. 사람은 종교성이 아주 강한 존재입니다. 사탄은 종교성을 가지고 일하거든요. 그런데 이 종교성을 복음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열심을 내는 게 복음이고, 그 열심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내 열정이고, 거기 못 따라오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탄의 도구가 된 겁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종교성을 가진 종교적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이거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바울이 그것 때문에 목소리를 높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설교할 때 아테네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하여 말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뭐라도 갖다 바쳐야 구원받을 것 같고, 자기가 있는 것 다 갖다 바치고 들여야만 화를 면할 것 같은 종교성 가진 자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교회 일원이 되었는데, 그들을 충동한 유대인들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시 종교성 공동체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분열되지 않고 나뉘어지지 않고, 누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분열이 있지 않게 하시고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을 위해서 그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 하셨사오니, 부족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 할지라도, 의심하면서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 할지라도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후에도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가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무능을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인정한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