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특강 4 -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장)
본문: 갈라디아서 4:19-20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네 번째 시간으로, 4장을 중심으로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제대로 살펴봐야 그 깊은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책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에는 하나의 교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 지역을 연결하는 곳을 갈라디아 지역, 갈라디아 벨트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러스 알파의 다른 복음, 곧 그 교회에 흘러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넘어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인정하되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바울이 황급하게, 아주 긴급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 3장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를 괴롭게 하는 종교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할례도 받고, 구제도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 것 모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열심이 그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차별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맺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해산하는 수고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결혼도 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남자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인가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깊은 뜻을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과정을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만 받아먹겠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과정까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뜻입니다.
1. 율법 아래의 훈련
1-1. 후견인과 청지기
4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큰 부잣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큰 부잣집에 주인 어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지금은 그 주인 어른이 모든 재산의 소유와 처분을 다 행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이 주인은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고, 낳은 아들이 성장해서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보시면 됩니다.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2절 말씀입니다.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후견인은 에피트로포스(ἐπίτροπος)이고, 청지기는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로서 집안 대소사를 관장하는 직무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를 통해서 이 집의 도련님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주인으로서 모든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잘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것을 배우지 않고 자기 멋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나이가 스물이 넘으면 되겠습니까? 이 집안의 복잡한 일들을, 집안의 모든 채무 관계와 채권 관계를 해결하고 해소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인사 관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후견인과 청지기가 이 도련님보다 지위가 높거나 더 나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 도련님이 주인이 될 것 아닙니까? 옛날에 세자 교육하는 것 다 보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가르치고 또 익히게 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율법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성령으로 내가 은혜받아서 나 스스로 믿음 생활을 홀로 서서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이 악한 세상을 승리하고 이겨내기 전까지는,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후견인과 청지기 같은 율법 말씀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순서가 바뀌더라도 그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 무용론자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2. 다윗의 훈련
다윗의 일대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이 어려서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으면 그 순간 무엇이 됩니까?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름병을 가지고 와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안수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왕 아닙니까? 왕이잖아요. 그런데 왕인데 왜 왕이 못 됩니까? 왕인데 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왕이었는데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누구 밑에 두셨습니까? 사울 밑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제정신이 박힌 왕이 아니잖아요. 종노릇을 하는데, 그 밑에서 종노릇하고 그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데, 제정신이 박힌 왕이 아닌 사울에게서 훈련 받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가 사울이라는 잘못된 환경 가운데서도 타산지석할 수 있게끔, 배우게끔, 거기서 훈련 받게끔 하나님이 그를 그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진짜 다윗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다윗이 훌륭한 인격의 다윗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 환경은 인적 환경이 있고, 사회적 환경이 있고, 물적 환경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환경들은 좋은 환경만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을 훈련시키는 청지기 같은 좋은 환경만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최악의 환경은 사울 아닙니까? 그런데 사울을 통해서 다윗은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그에게 율법이라는 테두리로 사용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환경 탓을 너무 합니다. 상황 탓을 너무 합니다. 환경과 상황 탓을 하기 시작하면 가장 완벽한 환경은 천국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가야 다 해결됩니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환경은 천국밖에 없는데, 또 물어보면 천국은 좀 있다가 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직, 아직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환경 탓을 하면 아버지 집에 가시면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가고 싶어하지 않고 자꾸만 환경 탓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훈련을 내가 거부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율법이라는 테두리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1-3. 예수님과 율법
얼마나 중요한지 보십시오. 4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찼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때가 차서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떤 상황 가운데 태어나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도 어떤 테두리 안에서, 제도권 안에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시대 아닙니까? 더군다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 지역 자체가, 예수님은 로마 압제 치하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버린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의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율법을 가지고 몇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중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살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 하셨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죠.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옛사람들, 모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 하셨습니다. 라가가 무엇입니까? 미련한 놈, 바보 같은 놈, 이런 식으로 욕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욕을 하고, 미련하다고 핀잔 주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자, 형제에 대하여 분노를 쏟아내는 자, 그런 자들이 다 살인한 자라 하셨습니다.
원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칼로 사람을 찔러서 죽이지만 않으면 율법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그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모세를 통해서 이 십계명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정신이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제의 인격까지, 그의 영혼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에 오셨고, 율법을 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도, 율법, 그리고 틀, 공동체가 약속한 공동체 규범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안에서 은혜가 있고, 이 제도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안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무려 이분이 자그마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늘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볼 때 하늘에서 구름 타시고 재림하실 그 모습처럼 그렇게 이 땅에 딱 내려오셨으면 얼마나 화려하고 위대하겠습니까? 그러면 안 믿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제도의 틀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가끔 잘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튀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난 척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도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공동체를 휘젓습니다. 그것은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예수님보다 똑똑하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예수님보다 잘나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예수님도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예수님도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이 율법과 제도의 틀, 하나님 말씀의 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서 2절을 보겠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우리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험한 꼴 많이 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십니까? 제도 안에 계시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시험받는 것처럼 예수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사람과 똑같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과 똑같이 시험도 받으시고, 배도 고프시고, 완벽하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도 안으로 예수님이 딱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폐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은 율법 무용론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어쩌면 율법을 더 공고하게 하는 사람이고, 바울은 그 율법에 대한 오해를 깨뜨려 주고 본질을 알게 해 주려고 지속적으로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분입니다.
2. 성령의 역할
2-1. 아바 아버지
6절을 보시면 이제 전환점이 나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 아들의 영이 누굽니까? 성령, 성령입니다. 즉 우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시잖아요.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람어로 아빠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어떤 영인지 여기에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보면, 율법에는 이런 기능이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어린 도련님이 좌우로 벗어나지 않도록 가이드를 해주는 기능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보다 한 단계 혹은 몇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특별한 기능을,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여기에 적어놓았습니다.
2-2. 진리의 영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17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성령은 첫째 무엇이라고 합니까?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 아닙니까? 거짓 아닙니까? 진리는 어제 오늘 내일 영원토록 똑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 아닙니까?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서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서 선물처럼 계시면, 우리는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임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이 참인지, 어떤 것이 거짓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고 나신 이후부터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비진리는 버리게 되고, 진리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첫 번째 역할입니다.
2-3. 가르치시는 영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신다고 했습니다. 선생이 되셔서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앉아 봐, 오늘 1강, 내일 2강, 이렇게 가르친다는 말일까요? 그 말이 아니라, 가르치신다는 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해해 보면 주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재해석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면, 율법의 눈으로 저 친구를 보면 참 혼내고 싶은 것밖에 없습니다. 한 소리 두 소리 잔소리 하고 싶은 것밖에 없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저 사람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저분을 보면 긍휼함이 생깁니다. 저분을 재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눈으로 내 인생을 보면 내 인생이 재해석됩니다. 율법의 눈으로 내 인생을 보십시오.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내 인생을 보면 내 인생이 새롭게 모든 것이 해석됩니다.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성령의 눈으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상들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이 새롭게 다 해석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고 나서 그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원망이 바뀌어서 감사가 되고, 저주가 바뀌어서 축복이 됩니다. 나에게 있어서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는 영인데, 모든 것을 재해석하여 하나하나 적용시켜 보십시오. 나는 지금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존재인가?
2-4. 생각나게 하시는 영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저는 머리가 나쁘다고요? 이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성경 읽고, 설교 듣고, 성경 공부하고, 암송한 이 모든 것들이, 성령께서 나에게 임하시면 적적한 순간 생각이 납니다.
또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 대화가 그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대화라면, 특별히 더군다나 그 성령의 능력으로, 나도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는가, 내가 원래 이렇게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았던가 할 만큼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생각나게 한다고 하니까, 누구한테 돈 빌려주고 잊어버린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인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예수님 따라다닐 때 서기관처럼 종이와 붓을 들고 다니면서 예수님 말씀을 받아 적었겠습니까? 물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 그때 베드로가 수첩 꺼내 가지고 "주여 오라 하시니 제가 가겠나이다" 하고, 물에 빠지면서 수첩 들고 손 내밀고 "건져 주세요" 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 어떻게 그렇게 사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 길고 긴 산상수훈의 말씀과 요한복음의 그 길고 긴 설교 말씀을 다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다 생각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그것은 그들이 미리 기록해 두어서가 아니고,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그가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다 생각납니다. 그것이 역사요, 놀라운 일입니다.
2-5. 평안의 영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성령은 평안의 영이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안은 무엇으로 인한 평화입니다. 돈이 있어야 평화롭고, 자녀가 잘돼야 평안이 오고, 내가 건강해야 평안이 옵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적인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냥 마음속이 평화롭습니다. 그렇게 부산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다 뒤집어진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편안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런 기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두 단계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성령, 그 성령을 받으면 이제 이 정도가 되면 우리는 율법이 우리를 옭아매지 않아도, 율법에 우리가 가서 배우지 않아도, 이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으니까 뛰어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성령 이해와는 굉장히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으면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으면 성령의 은사가 성령 받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방언 되고, 병 고쳐야 되고, 또 남들이 하지 않은 기적과 이사를 보여야 되고.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없잖아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했고, 성령은 우리 인생을 재해석하게 해준다 했고, 성령은 우리에게 깨달음과 기억나게 해주신다 했고, 성령은 평안을 주신다 했지, 성령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서 필요하실 때 주시는 또 하나의 플러스 알파의 선물인 것이지, 그것이 본질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2-6. 영적 퇴행
갈라디아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옛날에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갈라디아 지역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몰랐을 때 그랬습니다.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성령의 자리에서 율법의 자리로 왜 내려가느냐, 아들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왜 내려가느냐, 은혜의 자리에서 속박의 자리로 왜 내려가려고 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너희가 왜 행위 구원을 또다시 이야기하느냐, 왜 너희가 할례 받아서 구원을 더럽히고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전문적인 용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퇴행이라고 합니다. 퇴행. 잘 뛰던 아이가 갑자기 뛰지 못합니다. 말 잘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을 못 합니다. 그러면 병원에 가봐야 되잖아요. 영적인 퇴행입니다. 성령으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율법으로 돌아가 버리고, 은혜로 살던 사람이 다시 저주 안에 들어가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 퇴행 아닙니까?
영적 퇴행이 안 일어날 것 같습니까? 우리에게는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영적 퇴행은 왜, 어떤 자들에게 퇴행이 일어나는가?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은 자주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한번 충만해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상태를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는데, 그 물을 찰랑찰랑 넘칠 때까지 받아 놓고 그냥 두면 그것이 충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계속 물이 공급되어 물이 흘러넘치는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아, 물 다 받았구나" 하고 꺼버리면, 그 안에서 목욕도 하고 그 물 가지고 뭐 이것저것도 하다 보면 다 마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계속해서 물이 비어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 사라지고 다 없어집니다. 그것이 퇴행입니다.
목사가 되었다고 신앙생활 하지 않고, 직분 받았다고 기도 생활하지 않으면 영적 퇴행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성장해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성장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 그리고 영적 기본생활인 기도, 찬양, 예배, 이 기본적인 것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공급받지 않으면 금방 퇴행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사탄이 권세잡은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지역 교회 성도들이 충만했지만 꾀임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멈췄다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멈춘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단이 들어오고, 이들에게 할례주의자들이 들어오고, 이들이 거기에 넘어가서 다른 복음을 쫓아갔다는 것은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직분이 끝이 아니고, 은퇴가 끝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영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열심히 하다 왔습니다. 열심히 말씀 읽고 말씀대로 살다가 왔습니다" 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2-7. 바울의 육체의 가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개척할 때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약함, 아시죠.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질, 요즘 말로 뇌전증이라 하고, 또 어떤 분은 다메섹에서 빛을 너무 강하게 봐서 안질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바울이 혼자 살았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장 가까운 답이 여기 나옵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예를 들어 이것이 안질이라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시력이 약해서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눈이 나빠서 사람을 잘 못 알아봅니다. 그 사람이 눈앞에서 지나가도 아는 척을 안 하고 인사를 안 합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겠습니까? 좀 외향적인 사람은 "선생님 저 모르십니까?" 하고 딱 붙들고 물어보겠지만, 소심한 사람들은 혼자 온갖 상상을 다 합니다. 온갖 상상을.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내가 어제 저 청을 거절해서 저분이 나를 무시하시나."
그 순간 또 바울의 육체의 가시, 사탄의 가시, 육체의 약함이 뇌전증이라 한다면, 설교하다가 갑자기 거품 물고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그러면 이것이 은혜가 됩니까? 그 당시에 약도 없는데, "자기 병이나 제대로 고치지, 저러고 다닌다"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것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영접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그 자체를 받아들인 것이지, 이 육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분을 쓰시는 것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네 병이나 고치고 전하라"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몸이 약하고 이분이 연약해도, 이분이 보잘것없어도, 이분이 매일같이 쓰러져도, 이분이 앞을 제대로 못 봐도, 그래도 하나님이 이 연약한 육체를 쓰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했습니다. 좋은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보십시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이것을 보면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안질이라는 설이 훨씬 더 타당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제 눈 빼서 드릴게요. 제발 좀 잘 좀 보고 다니세요." 이 성도들이 그만큼 사랑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자기 인생을 해석하는 바울의 태도입니다. 아까 그랬죠. 성령 받으면 성령이 가르친다 했잖아요. 성령이 가르친다는 것은 재해석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은혜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분이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나는 이 길이 아닌가 보다. 나는 이것도 못 해 먹겠구나. 하나님, 내가 복음 전하는 사람인데 왜 제가 이런 병에 걸려 가지고... 하나님, 저는 지옥 백성입니다." 그러다가 원망하다가 하나님 저주하다가 그냥 끝나 버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령 받고 나니까, 성령의 은혜가 있으니까, 자기 인생을 성령께서 재해석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보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닙니다. 꿈보다 해몽이 아닙니다.
내 인생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매달린 결론이 바로 이 결론입니다. 자기 인생 문제를 가지고, 자기 인생 문제를 가지고 바울이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세 번 간구했다고 했잖아요. 그 세 번이라는 것은 횟수로 세 번이 아니고, 유대인에게 삼은 하늘의 수거든요. 하늘에 닿을 만큼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성령이 자기에게, 성령께서 이 인생을 새롭게 비춰 주시고 조명해 주시는데, "그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야. 그것은 사탄의 사자야. 너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성령께서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인생은 원망, 저주, 불평, 이딴 것들은 입에서 다 떠나야 합니다. 내 인생을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새롭게 비춰 주시는데, 거기에 원망이 왜 들어 있고, 거기에 저주가 왜 들어 있고, 거기에 낙심이 왜 들어 있습니까? 그래서 처절하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붙들고. 여기에 율법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해석 못 합니다. 율법으로는 이것을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받은 자, 성령으로 은혜받은 자는 충분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설교하다가 자빠져도, 혹은 앞이 하나도 안 보여도. 8절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바른 열심
3-1. 이간질의 위험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17절을 보세요. "그들이" 그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말했던 그들입니다. "너희에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간시킨다. 즉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간질입니다. 이간시키다 나오죠. 클레이오(κλείω)는 내쫓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의 접두어는 분리 접두어입니다. 분리하다. 그 이간시키는 것의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간질입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갈라디아 교회들이네 교회가 있잖아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거기에 거짓 교사들이 쫙 깔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 "야,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만 구원 못 받아. 할례 받아야 돼." 그러면 사람들이 쫙 갈라질 것 아닙니까? "아니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그랬어. 바울 선생님이. 우리도 그것을 믿어." 또 어떤 사람들은 "야, 그것은 뭐 할례도 받으면 좋은 것 아니야?" 편이 쫙 갈리는 것입니다. 편이.
그러면 친했던 사람인데, 아주 친했던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할례주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할례주의자가 아닌 그냥 순수 복음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거짓 교사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간질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이들은 "야, 나는 이 공동체 못 있겠어" 하고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간질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간질이 내쫓다는 뜻이라 그랬잖아요. 본질적으로. 그런데 이간질은 굉장히 어감이 안 좋습니다. 우리말 어감이. 그런데 진짜만 말하는 것도 이간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만 말하는 것도요.
C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A 아는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C에게 또 B에게 또 전해 줍니다. 안 전해줘도 되는데 사실인데, 사실을 전해 주는데 그것이 이간질이 되어서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집니다. 말 옮기는 것 자체는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그 사람을 내쫓게 만듭니다.
공동체에서 굳이 나가지 않아도, 교회 공동체는 절대로 진정으로, 정말 중요하게 가져야 될 가치 중에 하나가 말 조심입니다. 내가 사실을 이야기해도 이것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간질이 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당 짓고 분열함은 육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7절에서 19절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즉 종말의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분열, 갈라서서 내쫓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이간질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성령이 있는 자들은 절대로 이 말 저 말 옮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가만히 있으면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되게 하는 것은 힘써야 합니다. 입이 근질근질한데 입을 꽉 깨물고 힘써야 합니다. 정말 힘써야 합니다. 분열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말하는 것이 정의라 하더라도, 정말 내가 말하는 것이 정의라 하더라도, 이 정의가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이라면 그 순간은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3-2. 하나님의 열심
아까 17절을 보니까 "그들이 너희에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열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18절을 봅시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좋은 일에 열심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면 어떤 일이 좋은 일입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입니까? 지금 거짓 교사들이 와 가지고 열심히 이간질하잖아요. 네 교회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평갈이하게 하고,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하고. 그것도 열심입니다. 그런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진짜 좋은 열심이 무엇이냐?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호와의 열심, 이것이 진짜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심 하면 딱 생각나는 사람이 아브라함이어야 합니다. 왜요? 아브라함 한 인간을 하나님이 포기하려면 진작에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가나안 땅에 데려다 놨더니 하나님과 상의하지도 않고 이집트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부인을 빼앗길 뻔했는데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은금 물건 잔뜩 줘서 데려다 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늘의 별을 보이셨습니다. 짐승들 쪼개놓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아서자 창세기 16장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얼마나 배신감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티를 내지 않으십니다. 다시 17장에 할례 언약을 맺으십니다. 다시 18장에 이삭을 주십니다. 그 집에 방문하셔서.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
거기에 열심을 내야 되는 것이지, 이 말 저 말 여기 옮기고 저말 저쪽으로 옮기고,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열심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열심히 해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열심은 제발 멈춰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열심이 좋은 일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3-3. 바른 지식의 열심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바울이 이전 사울 시절에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는데, 이것은 잘못된 열심입니다. 이 열심을 담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도 열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열심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2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누군지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사울 시절에 열심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자기 혼자 천방지축 뛰어다니니까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집어넣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그 열심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그것을 알아야, 그것을 제대로 알 때, 그 열심의 방향이 바로 잡히고 빛나는 열심이 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 자기네는 열심입니다. 옛날 바울처럼, 옛날 다메섹 이전의 바울처럼.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열심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4. 해산하는 수고
4-1. 다시 해산하는 수고
19절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이제 바울의 목소리가 좀 포근해졌습니다. 이전까지도 목소리 확 높여 가지고 막 나무라다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다시'라는 말 때문에, '해산하는 수고'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이 시대 우리는요, 사람들이 첫 시작과 과정을 다 생략하고 결과만 뽑아 먹고 싶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다 그래요.
처음부터 시작해서 같이 고생해 가지고, 같이 실패도 해 보고, 같이 성장도 해 보고, 같이 고민도 해보고, 기도도 해 보고, 그래서 나중에 성공하면 얼마나 할 말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런 과정은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매는 누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입니까?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가는 공동체 아닙니까? 내가 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나중에 시간이 20년 30년 지나서, 지금 우리가 이제 한 몇 년 뒤에 7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데, 30년 뒤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목숨을 여기 붙여 놓으실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교회가 100년이 되었을 때, 그때 내가 이 교회에 수고의 한 모퉁이도 감당했다고 담담하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수고해야 합니다. 수고를. 그 과정이 없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맨입으로, 열매 받을 때만 쏙쏙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까? 수고해야 합니다. 문제가 터지면 "저 집은 무슨 저 집이야" 하면서 욕하고, 뭐 교회일 하다가 오해받고, 그런 것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다 하기 싫습니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가서 엉망진창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 처음부터 똑같이, 처음부터 똑같이 너희를 위한 복음의 과정을 새롭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도 가고, 3차 선교여행 때도 가고, 계속해서 이 지역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려고요. 그냥 그 교회 잘 서 있으니까 가서 맛있는 음식 대접 받으러 한 것이 아니고, 바울이 그것 때문에 간 것입니다.
4-2. 과정을 함께 하라
우리는 수고를 함께 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자녀 키울 때 그렇죠. 부모가 해산하는 수고, 낳았다고 다 내 자녀입니까? 길러야 되잖아요. 내가 열심히 책망도 하고, 같이 울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하고.
대체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지분이 별로 없잖아요. 돈만 벌어다 줘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아서요. 그런데 함께 웃고, 함께 뒹굴고, 함께 키우면 그것이 나중에 지분이 있잖아요. 뿌듯하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과정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어떤 일을 하든지 열매만 누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수고로움을 충분히 감당하고, 이것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도 조금이라도 떳떳할 수 있습니다.
4-3. 언성을 높임
20절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일 자격이 됩니다. 왜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니까. 그럴 지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충분히 얼마든지요.
4-4. 두 아들의 비유
아브라함에게 있는 두 아들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21절부터 31절까지는 아브라함과 또 갈라디아 교회를 대비해서 비유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잖아요. 하나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 하나는 사라가 낳은 이삭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낳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86세 때 낳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낳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그 집에 왔습니까? 이스마엘이 먼저 왔죠. 연수로 따지면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훨씬 더 선배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신앙의 연수가 우리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교회 50년 했다, 내가 대대째 신앙인이다, 우리 집안이 어떠어떠하다, 이것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을 유업으로 받지 않으면,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약속, 아까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주시기로 약속한 보혜사 성령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잖아요.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자손이라 칭하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아닙니까? 그 약속의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결국 여기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 그리고 오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너희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 육체를 따라서, 너희 열심으로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4-5. 여종을 내쫓으라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여종의 아들을 내쫓으라 했죠. 내쫓으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율법 안에, 율법 안에를 따라서 사는 마음을 내보내라는 뜻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유함을 얻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겠다는 마음,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종교성의 굴레를 내보내라, 내쫓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렇죠. 성령 받았으니까요. 아까 성령 받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가르치시죠, 진리의 영이시죠, 기억나게 하시죠, 평안이 우리를 함께하시죠.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4장 말씀이 쉽지 않은데, 한번 더 살펴보시고 또 읽어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결과만 가지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게 혼란스러워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여, 우리에게도 해산하는 수고의 본질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향하여, 우리도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는 자들로 온전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율법에만 머물러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율법은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도우시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유업으로 이어받아,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새롭게 도약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는 은혜와 지혜와 능력 또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