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특강 5 - 예수의 흔적 (갈 5, 6장)
오늘은 갈라디아서 특강 5장과 6장을 살피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함께 공부했고,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사실 서신서를 공부하는 것은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경도 알아야 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도 함께 파악해야 하며, 초대교회 당시에 주고받던 용어의 의미들도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고 불릴 만큼 복음을 변증하는 데 굉장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분노하며 갈라디아서를 시작했는데, 복음을 물타기하는 자들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경고를 했습니다. 원래 구원이라고 하는 것, 바울이 전한 구원의 은혜는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으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주의자들이 거기에 슬쩍 하나를 끼워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단순히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할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인데, 이것이 구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구원을 위한 할례라면 절대 안 된다고 바울이 목숨 걸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5장과 6장 이야기는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결론과 동시에 바울이 한 번 더 방점을 찍는 장면입니다.
1. 참된 자유의 의미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결단을 촉구합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제는 결단하자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우리를 굉장히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면 '무엇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눌림으로부터의 자유,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이 자유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려 할 때 그들의 장자가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의 사자가 그 집 앞을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있었던 것, 그것밖에 그날 밤에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사자를 달래기 위해서 그 집 앞에 커다란 제물의 향을 피운 적도 없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한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 했던 것 딱 한 가지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그냥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하지 않을 자유, 그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한 번 더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고 했습니다. 굳건하게 서라는 말은 어디에 서라는 말입니까? 이 진리 위에 서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이 안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돈도 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되고, 할례도 받아야 되고 등등의 조항들을 추가하면서 사람들을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다시는'이라는 말을 보면 과거에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 유대주의자들, 유대 율법주의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참자유를 얻었으니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1-1. 퇴행하지 말라
지난 시간 사장의 의미로 살펴보면 퇴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아닙니까?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아래서 우리는 구원받았으니까, 그런데 할례를 받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가 구원의 수단이 되면 예수님 말고 할례를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그런 논리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하느냐, 너희 열심을 통해서 구원으로 나가려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에게 그리스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도 찾고 왜 행위도 하려고 하느냐, 오직 너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필요할 뿐이지 다른 일체의 것은 구원을 위해서는 필요 없다, 이것을 한 번 더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을 적어뒀는데, 퇴행이라는 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이 말씀 때문에 민수기 14장을 적어뒀습니다. 이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멈추시고 각 지파별로 정탐꾼 한 명씩을 뽑습니다. 12명이 나왔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입니다. 그 12명을 가나안 땅에 40일 동안 정탐하라고 보냅니다.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들이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보고합니다. 그 보고의 내용입니다. 1절을 보니까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니까, 우리는 절대로 못 들어간다, 그 땅은 강하고 힘이 있다, 우리는 메뚜기 같다, 그런 보고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응이 지금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절이 결정적인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것이 퇴행입니다. 믿음의 퇴행입니다. 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들어가기가 두려우니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과거 종의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고 하는 퇴행입니다. 이런 기이한 퇴행의 행동을 보이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믿음의 퇴행을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나를 멸시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지 않는다, 불신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1-2. 멸시와 불신
내가 한다고 한들 그리스도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한다고 한들 나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내 행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행하신 거대한 역사의 대서사시를 한번 보셔야 합니다. 이집트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행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에 이집트의 최정예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수장당했습니다. 그토록 비싼 값어치를 치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까,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크고 작은 부분에서 우리에게도 자주 있습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믿음의 성장이 좀 일어나는 것 같다가 이제 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 같다가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이루기를 원하는 분이시지, 다시 원점으로, 다시 제자리로 그렇게 돌아가기를 원하는 분이 결단코 아닙니다. 성장을 원하는 분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집에 살림이 흥하고 부하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사업이 잘 되고, 이것이 믿음의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 성공입니다. 갈수록 믿음의 성장은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뒤에 가면 또 나오는데,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정의했지 않습니까? 바울이 정의하는 믿음의 정의는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능하니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내가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데, 믿음의 성장은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믿음의 업적을 자꾸 강조합니다. 그것이 퇴행입니다. 이 퇴행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생각보다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할례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을 위한 할례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할례 받는 자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1-3. 행위구원론의 함정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그리스도를 버리고 행위의 길로 이미 나섰으니까, 너 그 길로 나섰느냐, 그러면 너의 행위 100%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다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행위구원론자들이 빠지는 오류들이 있는데, 이분들은 선택적 행위를 합니다. 부분적 선택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합니다. 할례 받고 싶어서 할례 받고, 내가 봉사하고 싶어서 봉사하고, 하기 싫은 것은 또 안 합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행위구원론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려면 기왕 그 길로 나섰으면, 그리스도를 버리고 행위의 길로 나섰으면 다 해야 합니다. 다 할 수 있습니까?
전부 다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지지 않고 다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일찌감치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그 무능의 자리에 그리스도를 초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은혜가 임합니다. 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마태복음 23장 26절을 한번 보십시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이 항상 자기 행위를 강조했으니까 겉만 자꾸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 속사람을 좀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너희 내면을 먼저 살펴라. 그러면 겉도 자연스럽게 깨끗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좀 이따가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 성령과 믿음과 소망
그 다음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행위구원론자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함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추구해야 할 바는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가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이것을 그냥 한 줄에 한달음에 쑥 읽을 수 있지만, 이것을 하나하나 곱씹어 봐야 합니다. '성령으로'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계속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행위구원론자들, 할례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내 몸에 흔적이 남습니다. 내 몸에 할례라는 흔적이 남습니다. 행위를 합니다. 행위를 하고 혹은 내가 봉사를 하고 수고를 하면 사람들의 칭찬이 남습니다. 역사의 기록 한 줄도 남습니다. 교회 역사에 내 이름 석 자가 기록됩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 헌금 많이 하고 건축할 때 벽돌 10장 올리고 하면 그 행위가 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성령으로'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내적 증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나의 무능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피 안에 있으면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다 압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성령받는 것이 더 급합니다. 이것이 더 본질적이고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을 따르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으로, 그다음 믿음을 따라. 성령이 내 속에 임하게 되면 그다음 믿음을 따르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정의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절대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전부 잘난 척하는 맛에 삽니다. 모이면 전부 자기 자랑하고 자식 자랑하고 은근히 남 깎아내리며 그러는 맛으로 삽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야 "나는 이것도 못합니다, 나는 이렇게 부족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 자존심이 상해서 말 못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허세 부리게 되고 허공에 집 짓게 되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데 1년 전에 한 거짓말이 기억이 안 나서 그만 탄로 나는 사람들도 있고, 꼬이고 꼬여서 소문나고 저 사람은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나의 약함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해야 나의 가난이 그냥 부끄럽지 않습니다. 성령이 함께하면 나의 무능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가 못 배운 것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꾸 "믿습니다" 하는 믿음으로 자꾸 생각합니다. 갈수록 내 믿음이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되고, 내 믿음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되고, 믿음이 강해서 엄마가 믿음이 강해서 자식을 어디에 무엇을 보내야 되고, 부모가 믿음이 좋아서 무엇을 해야 되고, 이것은 절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이 주는,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신화적 환상이지, 믿음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속에 성령께서 일하시고 그리스도가 함께할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약한 나와 함께하셔서 주께서 일하셔서 나를 들어서 사용하셔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 아닙니까?
2-1. 바른 순서
그래서 순서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에게 무엇이 임합니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다음 성령이 임하면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 되고, 그런 자는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이 의는 누구의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 아닙니까?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가 나타나는데 그 소망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 말미에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한다. 성령이 임하면 무능과 약함을 인정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을 가진 자는 나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다.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라고 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할례받으나 무할례나 이것이 무엇이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보혈 안에 있는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하려 할 때 문설주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있었던 사람의 신분을 보고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믿음, 믿음의 정의는 외워야 합니다.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2. 사랑 안에서 참된 것
나의 무능을 인정하는 이 자리에,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일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 내 속에서 사랑으로 일이 가능해집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사람은 어떤 자이겠습니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사람은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믿음이 성장한 사람,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무슨 말입니까? 잘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지금까지 내가 가르치는 것 잘 따라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너희를 막았느냐? '막다'는 아나콥토(ἀνακόπτω), 강하게 충돌하다라고 적어뒀는데, 여기서 누구는 어떤 자들입니까? 거짓 교사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 할례론을 가르치는 악한 자들입니다.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3. 적은 누룩의 영향력
9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조심할 것을 권면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누룩, 누룩의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누룩은 곧 영향력입니다. 누룩이 아주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 말씀하실 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좋은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의미로도 자주 사용됩니다. 악한 영향력, 나쁜 영향력을 말할 때 누룩이 사용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집니다. 빵 한 덩이에 누룩이 많이 필요 없습니다. 한 덩이 부풀게 하는데 요만큼 넣으면 확 부풀어 오르니까,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정 능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바닷물에 오염물질이 좀 들어가도 자정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많다 보면 그중에 몇 명이 교회 정책에 대해서 혹은 불평, 불만, 문제 제기 이런 것들이 있어도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 안에서 자정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적은 누룩이지만 반드시 초기에 정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단 문제입니다. 지금 이런 것, 할례구원론자들, 이것이 이단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아야 된다고 했는데, 거기에 물타기해서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 믿음 인정, 그러나 할례도 더해야 한다, 이것이 이단입니다. 단 한 사람의 이단이 있어도 그때 바로 즉시 알게 되면 바로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당회가 치리회가 되지 않습니까? 당회는 곧 치리회입니다. 사랑으로 덮고 혹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전에 바로 끊어내고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 첫째가 이단 문제입니다. 두 번째, 음행, 음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물밑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아주 악한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성도들 간의 호칭 문제 그리고 서로 대화하면서 음담패설의 문제, 조심해야 합니다. 하면 안 됩니다. 음행은 처음부터 음행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환경과 분위기가 음행을 시작하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일 좋습니다. 교회 일 하는 것 좋습니다. 교회 일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은 우리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해야 하는데, 가정이 있는 남녀가 교회 일을 빌미 삼아 다른 곳에서 만나서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동의하십니까?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 일보다 가정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일은 교회에서 끝내야 합니다. 교회 일 밖에서 하는 그런 시작들이 그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져가면 그다음에는 그 덩이 하나를 다 버려야 합니다. 사탄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파고들기 때문에 결단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입니다.
교회에 예배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고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회의하고 거기서 차 마시고 거기서 얼마든지 의논할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고 함께 하루의 삶을 나눠야지, 무엇을 그렇게 먹고살고, 무엇을 그렇게 죽을 일이 있다고,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절대로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바울이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11절에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리낌이 제거되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진심입니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하고 피 터지게 싸웁니다. 이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것을 타협해버리면 쉬웠습니다. "야, 할례는 그냥 저들의 문화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다 알잖아. 그런데 할례 받으라고 하니까 싸우기 싫으니까 그냥 할례 받자. 저 사람들이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자, 그냥 다 받아." 이렇게 해버렸으면 싸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평화를 원했으면 그러면 박해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십자가의 거리낌이 아예 없다."
2-4.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바울이 왜 그렇게 했는지 예수님의 음성을 한번 들어봐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 동의하십니까?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쫙 갈라졌습니다.
따르는 자도 있고 돌 던지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고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을 돌 던져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적대하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진리와 복음을 이야기하면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야 정상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 그것이 가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는 자가 그것이 적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히틀러를 보십시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 민족들이 다 좋아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다 보면 부딪히기 싫어합니다. 갈등하기 싫어합니다. 나이 들수록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그냥 그렇게 하고 넘어가자 그럽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있고 그렇게 하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복음에 대해서,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는 부딪치고 갈등하고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투사가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에 물타기 하는 자가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화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8장 15절에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은 위선입니다. 율법주의의 누룩입니다. 헤롯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음행, 음란의 누룩입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지도자에 있는 사람이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세례 요한이 외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처음부터 끊어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첫째 이단, 두 번째 음행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3. 자유와 종 노릇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아까 5장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 구원받은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 아닙니까? 그 믿음을 가진 자는 자발적인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종 노릇 하면 안 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서로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3-1. 육체와 성령의 갈등
그 뒤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종 노릇하라. 그다음 이제 6장에서 그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먼저 이것 한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17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기 전에 우리 마음은 누가 지배하고 있었습니까? 육체의 소욕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갈등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갈등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능대로 사니까, 남들 사는 것처럼 본능대로 사니까 갈등이 없습니다. 갈등이라고 하면 남들처럼 못 사는 것이 갈등이지, 마음속에 내적 갈등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19절에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을 맺습니다. 그냥 육체로 살다 보면 이런 것들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하나하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온 가족 새벽기도회 때 새벽마다 한 달에 한 번씩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여기 열거하고 있는데, 성령의 열매라고 하니까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 그냥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 무능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자에게 마음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갈등하고 싸웁니다.
3-2. 성령의 열매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영적 기본생활을 하면 육체의 소욕이 물러갑니다. 육체의 소욕이 떠나가고 성령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충만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 9가지 열매는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 앞으로 사랑의 열매 맺어야지" 백날 해봐도 안 됩니다. "나 앞으로 충성의 열매 맺어야지" 한 3개월 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어떤 한 나무가 열매를 맺는 과정을 한번 보십시오. 농부가 농사 열심히 지어서 그 나무가 잘 자라면 열매는 따라오는 것 아닙니까? 열매를 위해서 농부가 할 일은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잡초 잘 뽑아주고 병충해 예방 잘 해주고 땀 흘리고 수고하고, 그러면 열매는 알아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열매에 집중합니다. 믿음의 법칙은 그런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되길 원하고 우리 마음속으로 바라는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면 교회는 본질에 충실하면 됩니다. 교회다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애쓰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도를 사랑하고 아끼고 말씀 양육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목회자는 심방 열심히 하고 성도들 서로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그것 외에 더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무리 세상의 트렌드가 바뀌고 문화가 별별 문화가 다 들어와서 목회 전략이 어쩌니저쩌니 해도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의미가 있습니까?
뿌리가 튼튼하고 그 뿌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뿌리라면 열매는 알아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에 집착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영적 생활, 매일매일의 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면 세월이 가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도 신앙생활 4, 50년 한평생 했는데 열매가 없다면, 이런 열매들을 한번 보십시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충성, 온유, 절제, 자비 등등의 열매를 보시면 이것 전부 다 추상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집 두 채 이런 것 있습니까? 없습니다.
땅 몇 평 이런 것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자꾸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신앙생활 이만큼 했으면 좀 열매가 있어야지, 너 남은 것 뭐야, 집 한 칸 샀어, 정말 그런 말은 너무너무 부끄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장 실패한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이런 추상적인 열매를 남기면 사람들이 다 압니다. 내가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내가 온유의 열매,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다 압니다. 오늘 집에 와서 물어보십시오. 기분 나빠하지 않을 테니까.
나에게 정직하게 말해주오. 집에 가서 부부끼리 물어보십시오. 오늘 밤에 잠 못 드는 밤이 될지라도 물어보십시오. 내가 신앙생활 이만큼 오래 했는데 내가 이런 열매 진짜 맺었는지,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잘 압니다. 열매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첫 시작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받고 그 성령으로 투쟁하고 내 믿음으로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렇게 되면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4. 공동체와 짐 나눔
그다음 6장으로 한번 넘어가 보겠습니다. 6장에서 이제 중요한 이야기 몇 가지 하겠습니다.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이것 아까 우리가 5장에서 읽었던 말씀과 통하는데, 서로 종 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유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가 너무너무 큰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공동체에서 서로 종 노릇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을 위해서 섬겨야지, 나는 이 공동체를 위해서 일해야지, 이 공동체의 약한 부분이 이것이네, 내가 짐을 스스로 져야지, 그런 것입니다. 이 짐을 져서 구원을 받으라, 이것이 아닙니다. 자유케 하는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자발적으로 서로 종 노릇하며 짐을 지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짐 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을 위해서 짐 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 '각각'이라는 말을 계속합니다. 자기의 짐을 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는 말,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 있는데 그 교회들 안에 공동체로 우리가 있다는 것은 그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쓰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쓰임을 발견하고 짐을 좀 지라는 뜻입니다. 내가 짐을 한 개 지지 않으면 옆 사람이 몇 개 져야 됩니까? 두 개, 세 개 져야 합니다.
내가 이만한 짐을 던져버리면 그 던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또 다른 사람이 10개, 20개의 짐을 져야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공동체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을 보시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짐을 지는 것은 기본입니다. 동시에 상대가, 다른 성도들이 지금 그의 짐을 지고 잘 따라오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분이 짐 지기를 어려워한다면, 왜 그런지를 살피고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그것이 성도들이 함께 가는 공동체 아닙니까?
4-1. 경험의 공유
그 공동체성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용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목사님들이 이야기합니다. 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으면 목사 생각 좀 하세요. 어디 좋은 데 가면 목사 생각 좀 하세요. 그런 맥락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 말씀을 가르치는 자,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이 말은 서로 짐을 지고 공동체 경험을 공유하라는 뜻입니다. 같이 고생한 사람들 있습니다. 같이 여행이라도 좀 다녀와서 같이 좀 고생한 사람들은 그 공동체성이 오래갑니다.
왜냐하면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한 공동체인데 우리가 예를 들어 교회에서 대청소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면 저분이 걸레 들고 교회 와서 교회 바닥을 밀고 닦고 청소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음식을 먹어서만 좋은 일이 아니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이 좋은 일, 그것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경험을 같이 하고, 길거리 나가서 전도하는 경험을 같이 하고, 말씀을 나누는 경험을 같이 하고, 예배 은혜의 자리에서 말씀 듣고 위로받고 찬양하면서 위로받고 기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같이 하고, 이것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깊어지고 오래갑니다. 밥 한 끼 먹는다고 얼마나 깊어지겠습니까?
좋은 식사 한번 대접한다고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깊어지겠습니까? 그런 차원 낮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고생도 같이 하고 기쁜 일도 같이 하고 같이 울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하고 함께 뒹굴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해야 이 공동체가 단단해지고 여물어집니다. 그 말씀입니다. 7절을 보시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뒤에 말씀과 같이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들 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입으로만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만 뒷짐 딱 지고 해서 남 시키는 것 정말 잘합니다. 그것이 탁월한 의사입니다.
입으로는 진짜 잘하는데 이마에는 땀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일 많이 했다고. 그런 맥락으로 보십시오. 다시 7절을 보십시오. 입으로만 일하면서 스스로 다 했다고 속이지 말라,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 다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이 나중에 결론 나는 지점이 언제입니까? 심판 날 결론 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거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4-2.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입으로만 한 사람들은, 수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은 백성인데 그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스스로 서로에게 종 노릇하고 자기 짐을 서로 져야 하는데, 그래야 나중에 열매가 있고 그 열매가 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될 텐데 그것 하지 않으면, 입으로만 하고 스스로 했다고 착각하는 자, 나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에 쥐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합니다, 나는. 그런데 저 옆에 있는 저 사람은 입으로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막 저 사람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낙심됩니다. 기분 나쁘고, 나는 열심히 하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고, 나는 어두운 자리에서 남들이 몰라주는 데서 열심히 하는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낙심됩니다. 그런데 말씀합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정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정직합니다. 열심히 땀 흘리고 수고한 자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주십니다. 시편 126편을 적어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둡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씨 뿌리지 않고 말로만 하는 자 절대 거두지 못합니다.
5. 예수의 흔적
이제 바울이 마지막 당부를 한 번 더 합니다. 이제 할례주의자들 때문에 바울이 참 견고한 사람이고 또 어찌 보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 대한 걱정이 좀 많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첫사랑이라 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 지역에 대한 사랑이 많아서 여러 번 이야기하고 또 못 미더워서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떤 식으로 말합니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글씨를 크게 썼다는 말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해서 그런 말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핍박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할례받아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말 따르지 마라.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그다음 14절 한번 보십시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 다른 것이 만약에 구원의 수단이 된다면 그것을 자랑했겠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것 몇 가지 한번 꼽아볼까요? 첫째, 가문 베냐민 지파입니다. 두 번째 학벌. 세 번째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말빨. 바울이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열심, 누구도 따르지 못할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구원으로 이끄는 통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딱 한 가지.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끈 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5-1. 유일한 자랑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은 것 딱 한 가지는 가장 귀한 가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다음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서 할례가 막 유행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것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됐습니다.
5-2. 스티그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할례받은 사람입니다. 난 지 8일 만에. 그런데 바울이 지금 말합니다. 지금 이 할례 때문에 이 갈라디아서를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바울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 나는 할례받았노라가 아닙니다. 예수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스티그마(στίγμα), 여기 적어놨습니다. 주인의 관할 구역을 떠나지 못하도록 종에게 새긴 주인의 인장입니다. 불로 지지는 것입니다. 종의 팔 등 혹은 허벅지 등에 주인의 인장 도장을 새겨버리는 것입니다.
불로 지져서, 옷을 찢어버리면 거기에 주인의 인장이 있어서 관할 구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존재다. 예수를 통해서만 나는 구원받은 존재다. 할례? 그따위 것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으로 구원 이야기를 하지 마라. 너희 모두가 다 예수의 흔적을 지닌 자니 예수의 흔적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 말씀입니다.
맺음말
갈라디아서는 대단히 치열한 서신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싸워야 했고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게 들어온 할례주의자들과 다퉈야 했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끊어내고 잘라내야만 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또 2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 베드로 일행이 외식하는 것, 그것을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바울이 이 치열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복음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는다. 그 자유를 우리에게 이야기했고, 절대로 구원에 있어서 퇴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머무르면 성령이 너희와 함께하시고, 성령은 너희의 무능을 인정하고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때 성령께서 너희 안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실 것이며, 그 성령을 따라 일하면 너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런 자들은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고 교회를 섬기라, 그 말씀입니다. 이것 꼭 기억하시고 갈라디아서가 우리 인생의 믿음에 지침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다른 것은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의미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속에 앉아있는 것 이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종도, 그들의 과거도, 그들의 현재도 구원에 아무런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예수로만 자랑하고 예수로만 구원받고 예수로만 사랑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 원하오니 아버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믿음의 퇴행을 경험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믿음의 진보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믿음의 연수가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의 약함과 무능을 인정하도록 도우시고, 나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예수의 능력으로 주께서 친히 일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어가게 하시며, 이 열매가 주변 사람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되게 하시며, 기쁨과 감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