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 최고의 은사, 사랑 / 전체녹취

고린도전서 특강 11 - 최고의 은사, 사랑 (고전 13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특강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집에 적어놓고 암송하며 늘 묵상하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랑을 빼고 신앙생활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다 동의하실 겁니다.

바울이 사랑을 이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문제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고, 음행의 문제가 있었고, 송사의 문제도 있었고, 결혼의 문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 은사 사용의 문제, 성만찬 문제 등 복잡한 문제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그 문제가 일어났던 원인은 교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교회 공동체 안에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아래에서 모든 것이 녹아지고, 풀어지고, 해결됩니다.

사실 그냥 남녀 간의 사랑만 해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사랑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 말고,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약점도 보이지 않고 결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키가 작은데 저희 집사람은 하나도 안 보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괜찮다고, 멋있다고 합니다. 이상한 여자입니다. 그냥 사랑하면 다 괜찮은 것입니다. 문제가 좀 있어도 사랑하면 다 덮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깨어지고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취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취해 있어야 합니다. 약간 제정신 아닌 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실 약주 드시고 집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들이 과하게 술 취한 것 말고 약간 술 취하면 지갑이 열립니다. 그 정도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평소에 그 구두쇠에 자린고비 아버지가 약간 취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뭐든 다 주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에 취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는 것입니다.

1. 사랑 없음의 허무함

그래서 바울이 문제들을 먼저 다 이야기하고 그 문제 해결책으로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데, 바울이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굉장히 정교하게 말합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를 보면 사랑이 없는 것들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1-1. 사랑 없는 말

1절을 보시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하고 싶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랫동안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내가 알 수 있고, 게다가 그 방언의 통역의 은사까지 받으면 놀라운 비밀을 알고 그것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서 방언의 은사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굉장히 예쁜 말들이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처럼 그런 굉장히 예쁜 말들입니다. 사람들마다 그런 말을 하시는 분도 있고 투박하게 그냥 말이 툭툭 나오는 분도 있는데, "아, 나는 어쩌면 저렇게 천사가 말하는 것처럼 저렇게 예쁘게 말할 수 있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저렇게 쳐대는지 시끄럽기만 한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은 하는데 소통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같은 한국말을 쓰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집에 한 식구가 살고, 부부가 30년 40년을 함께 한 공간에 살아도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없는 말, 사랑 없는 언어, 사랑 없는 말의 특징은 교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11장 3절과 4절을 보면 바벨탑 사건인데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원래 하나님 명령이 무엇입니까? 처음에 아담과 하와 창조하시고 온 땅에 충만하라, 지면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 노아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흩어지라고. 그런데 지금 여기 바벨탑 사건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시면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 이름을 내자" 그랬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그 교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느냐? 그 하나님이 언어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창세기 11장 7절 8절을 보시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언어가 혼잡하게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서로 못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나도 교만하고 너도 교만한데, 가정에서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속으로는 다 속교만이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낫다는 속교만이 있고, 나니까 너랑 살아주지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서로 같은 언어를 써도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말은 결국은 서로 소통하지 않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시끄럽게만 계속 오간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합니다. 목사가 설교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강단에서 내뱉는 설교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기도가 없으면 성도들이 그 말씀을 먹고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진짜 양약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독입니다. 약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우리가 좋은 말을 하고, 괜찮은 말을 듣기에 좋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는 말은 절대로 성장시키는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통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서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서로 간 소통이 끊어졌다가 나중에 언어가 서로 하나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진짜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겸손해집니다. 또 겸손해야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기도하면서 내 죄를 보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을 때는 정말 교만이 하늘 끝까지 올라갔는데, 기도하면 내가 저 밑바닥까지 떨어집니다. 나를 보니까,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니까, 그래서 내가 겸손해집니다.

겸손한 자는 서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혼잡해진 언어는 교만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소통된 언어는 서로 겸손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나옵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렇게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여 너희들이 하는 말, 모든 말이 사랑이 충만한 말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언어 생활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내가 내뱉는 말,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합니다. 혼잣말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길 가면서 혼잣말 막 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뭐 귀에 꽂고 막 혼잣말 하긴 하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대화하는 상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소통하고 대화하는 상대가 있는데, 내가 말하는 사람,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적어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소통하는 언어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통의 언어입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실컷 말 잘해 놓고 실컷 말 많이 하는데 그 말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된다면 허무하지 않습니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2. 사랑 없는 능력

2절을 보시면,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영어로 nothing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능력이 출중합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 볼 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대한 사람입니다.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볼 때는 nothing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 없이 행하는 능력에 대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사람들은 너를 칭찬하고, 사람들은 너를 지켜 세우고, 사람들은 너를 뛰어나고 위대하다 말할지라도 그러나 내가 볼 때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말입니다.

1-3. 사랑 없는 헌신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구제와 헌신, 얼마나 대단합니까? 여러분,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계셨습니다. 이분들이 자기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판 재산 중에 얼마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했습니다. 전부를 다 팔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 중에는 한 푼도 안 내놓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일부라도 팔아서 교회에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액면만 보면 이분들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그분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거짓과 위선이 가득했습니다. 그 돈 몇 푼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사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구제와 헌신,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데려가셨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제하고 헌신하고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합니까? 그런데 봉사에 열심히 하는데 입에 항상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산다면, 원망한다면, 누구를 향한 불평과 원망만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까요. 유익이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셨는데 마르다가 열심히 일합니다. 분주합니다. 정신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에 앉아서 말씀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얘기합니다. "예수님, 내 동생을 명하사 나 일 좀 도와주게 해 주십시오. 말 좀 해 주십시오." 이미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구제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일 안 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말, 사랑이 없는 능력, 사랑이 없는 헌신, 이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바울이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2. 사랑의 15가지 정의

그다음 우리가 너무너무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입니다. 여러분, 이것 혹시 세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사랑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랑의 정의를 보면 긍정과 부정으로 나뉩니다. "뭐뭐 하며"라는 말이 있고 "뭐뭐 아니하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긍정은 적극적인 의미고 부정은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15개입니다. 다 세어 보면 15개입니다. "하며"와 "아니하며"를 다 더하면 4절에서 7절까지를 다 세어 보면 그렇습니다.

2-1. 적극적 사랑 7가지

먼저 "뭐뭐 하며"부터 한번 세어 보십시오. 총 몇 개입니까? 15개 중에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4절에 "오래 참고 온유하며" 두 개입니다. 6절에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세 개입니다. 7절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며" 몇 개입니까? 일곱 개입니다. 이 7개이고, 그러면 "하지 아니하며"가 당연히 8개입니다. 아주 비율이 적절합니다.

그러면 "하며"부터 봅시다.

4절,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사랑은 오~래 참고"해야 합니다. 숨이 넘어질 때까지, 숨이 넘어가서 이렇게 해서 한번 쉴 때까지. 그것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 이렇게 짧게 끊어서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몇 번만 참아라는 말이 아니고, 한도가 있고 한정된 참음이 아닙니다. 그냥 오래 참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22절에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490번 계산 딱 해서 490번, "그래 이제부터 세자, 장부 주고 와서 저놈이 나에게 화나게 할 때 490번"이 아닙니다. 일곱 번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서는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흔 번까지라고 하는 것은 그 무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은 그렇게 해요?" 합니다. 당연히 못 합니다. 하려고 애쓰고, 하려고 노력하고, 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하는 분도 제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암 걸려 죽어요. 그렇게 하다가 오래 참다가 한 번씩 터트려야 되지. 그러다가 암 걸려 죽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예수 믿는 사람은 방향이 달라야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상대가 나를 화나게 하고 자꾸 시험 들게 하고 어렵게 하면 그 사람을 향하여 확 터트립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박살나는 것입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전으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얘기합니다. "나는 뒤끝 없다"고. 뒤끝도 없습니다. 자기 속 편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소리 지르고 성질 다 내고. 그런데 그 성질 받은 사람은 상처가 남습니다. 상처가 나는데 "나는 뒤끝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나는 상처가 남는데 상대방은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성격이 좋다고, 막 어디 가서 "나는 뒤끝 없어, 내가 성격이 이렇게 괄괄해서. 나는 뒤끝 없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말하는데, 그런 사람 치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에 가족들부터 친구들끼리 다 보십시오. 한번 피해 다닙니다. 사람들이 웬만하면 부딪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상처받기 싫으니까요. 안 볼 수는 없으니까 말은 섞어야 되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화가 나면 그 상대를 향하여 터트리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탄원하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스트레스 받고 이쪽에서 상처 받으면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기도라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좋은 무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서 다 얘기하면 됩니다. 다 일러 주면 됩니다. 다 일러 주십시오. 미주알고주알 죽일 놈 살릴 놈 찢어지게 막 그렇게 얘기하는 것 다 고자질하고 실컷 얘기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해도 됩니다.

바울이, 다윗이 시편에 그렇게 했습니다. 짓밟아 죽여달라고 그랬습니다. 다윗이. 와,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래 참는데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치가 이만큼 차오르고 임계점이 오면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 오늘 날 잡았구나. 내가 오늘 힘든데, 내가 들어줄게, 들어줄게" 하시며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와서 펑펑 울고 이야기하고 쏟아내면 압력이 쫙 빠집니다. 그러면 또 참을 수 있습니다. 또 참아줄 수 있습니다.

한번 이전에는 한 대 맞으면 열 대 때려야 되는데, 이제는 열 대 맞아도 그냥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터트리면 되니까요. 그것이 방법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래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참냐? 그런 신랑하고 어떻게 평생을 사느냐?" "하나님이 계시니까 사는 것이지, 그냥 여기다가 터트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지."

"온유하며." 민수기 12장 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가 온유합니다. 모세가, 모세가 사람 때려죽인 사람입니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 가지고 사람을 때려서, 그것도 모래에 그냥 파묻어 버린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살인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그러면 그 범죄가 그 죄가 엄청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온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온유라 했는데, 온유는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성품입니다. 원래는 와일드하고, 원래는 거치고, 원래는 못됐고, 원래는 자기중심적이었는데 주인 만났습니다. 임자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임자 만나서 하나님에게 길들여진 것, 그것을 우리는 온유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것이 사랑입니다. 타고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세상적으로 "저 사람이 사랑이 많아, 저 사람 곁에 가면 먹을 것이 많아, 저 사람한테 가면 항상 밥을 사줘, 항상 커피를 사줘, 자기가 돈을 내" 그것은 그냥 타고난 성품입니다. 그런데 진짜 성경이 말하는 사랑, 온유라는 뜻은 하나님에게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모세 보십시오. 지금 모세 얘기합니다. 모세가 사람도 때려 죽이고, 열 받아서,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지팡이 가지고 반석을 두 번이나 때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온유하다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 말씀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그러면 나는 온유한가? 하나님 말씀에 길들여졌는가? 나는 착한가,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착하고 타고난 성품이 사람들을 잘 용납하는가, 이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길들여졌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점검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래 참는 것, 오래 참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방향을 하나님께 돌려서 기도할 수 있는가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기 점검. 나는 온유한가? 하나님 말씀에 길들여져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다음 6절을 보시면 세 번째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입니다. 여러분 언제 기쁘십니까? 언제 막 행복하고 기쁘십니까? 일단 생각지 않았던 돈이 들어올 때 너무 기쁩니다. 그것은 만국의 언어입니다. 생각지 않은 돈이 생길 때, 단돈 몇 푼이라도 생각지 않은 돈이 들어오면 너무너무 기쁩니다. 횡재했다고 생각하니까 기쁩니다. 또 뭐 자녀들이 잘 되고, 자녀들이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고, 뭐가 다 잘 되면 다 좋습니다. 기쁩니다.

그런데 여기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런데 돈이 들어왔습니다. 생각지 않은 돈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내가 수고한 돈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내가 수고하지 않은 물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물질의 정체에 대해서 내가 의심을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 그냥 일이 잘 됩니다. 그러면 이 일이 잘 되는 것의 정체를 의심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마냥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요한삼서 1장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의 편지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장로 가이오에게 편지하면서 사도 요한의 자녀들은 흩어진 성도들입니다. 요한 공동체에서 복음 듣고 말씀 듣고 다 흩어져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 소문이 막 들려옵니다. 요한에게 들려오는 소문, "자 그 성도가요, 지금 저기 어디어디 사는데 이번에 돈 벌어서 집 샀대요. 그 성도가 자녀가 이번에 잘 돼서 뭐 어떻게 어디에 취직했대요." 이 말보다, "흩어져 있는 내 자녀 같은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진리 안에서 행하다가 망할 수 있습니다. 복음대로 말씀대로 살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핍박받고 고난 당하고 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왜요? 진리 안에 행하니까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제일 기쁩니까? 이것이 사랑이라 했습니다.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의 본질. 우리가 사랑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본질을 바울이 상세하게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를 이것으로 달아 보는 것입니다.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하느냐, 아니면 진리 상관없이 그냥 세속적인 성공과 세속적인 출세와 세속적인 기준에 충족하면 그것이 기쁨이냐. 앞으로 내가 기뻐해야 될 일은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어제 일렀다가 오늘 절했다가 내일 또 변하는 것이 진리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이 서리라" 했습니다.

심지어 과학적인 사실도 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저 산꼭대기 해발 1000미터 산꼭대기에서 물 끓여 보십시오. 끓는점이 낮습니다. 100도씨보다 낮은 데서 물이 끓습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지, 상황에 따라 다르고 환경에 따라 다르고 다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 있는 진리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그 말씀을 근거해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그래야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이 있는가? 나는 사랑의 사람인가? 이것은 민감하게 다뤄보셔야 됩니다. 아주 예민하게.

그다음 7절은 세트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것은 바울의 얘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요? 예수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뭐라 했습니까? 오직 복음이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입니다.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은 다 복음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자기 자전적 고백에서 얘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28절까지가 그 고백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로마법이 40대는 못 때립니다. 그래서 39대까지 때릴 수 있는데, 이것을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에도 이런 것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모든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다고 했는데, 그 염려가 곧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교회를 위한 사랑, 복음을 위한 사랑. 바울의 자전적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나서 다시 이 7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뭐 때문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그 복음은 십자가고, 그 십자가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이런 것들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왜요? 왜 기뻐합니까? 내가 이렇게 견디고 이렇게 참고 바라고 소망하고 이겨내면 이것이 곧 복음이 되고, 이것이 곧 복음 전파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만큼 드러나니까 그래서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복음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견디는 것. 예수님 때문에 참아내는 것. 예수님 때문에 소망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7가지를 근거로 나는 얼마나 사랑이 있는가 한번 자기 점검을 해 보셔야 됩니다. 7개 다시 보십시오.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오래 참고"했고,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사랑이십니까? 나는 사랑을 너무 좁게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폭이 좁게. 그런데 이런 사랑은 진짜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지금 글로 배웁니다. 머리로 배웁니다. 그런데 이것이 삶으로 한번 다가와 보십시오.

오래 참아지나요? 정말 오래 참아지나요? 참아지던가요? 안 참아집니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사랑이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길들여졌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2-2. 소극적 사랑 8가지

그다음 "뭐뭐 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이것은 8가지라고 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시기하지 아니하며." 시기는 질투 아닙니까? 시기하지 아니하며. 시기하는 사람 하면 딱 생각나는 사람이 누굽니까? 성경에 이 질투하다가 망한 인간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여러분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18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나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그 말이 뭐냐면 7절에 보면 나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어디 가나 여인들이 문제인데, 여인들의 이 노래가 사울의 귀에 들린 것입니다. 그 말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심히 노했습니다.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뭐 그냥 그럴 수 있다고 넘기면 되는데,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 "주목했다"는 말은 그의 성장을 봤다는 말이 아니고, 질투의 눈을 가지고 그를 봤다는 뜻입니다. "그 이튿날" 바로 그다음 날입니다. 질투의 눈만, 그다음 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질투하고 시기하면 사탄이 틈타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질투하고 시기하며, 그래서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내 마음속에 일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것, 누가 잘 되고 나와 경쟁하고 누가 더 뛰어나고, 이것 때문에 내 마음의 평정심이 무너지고 시기 질투가 요만큼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탄이 내 마음속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 가라지를 뿌리면 그것 뽑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지 아니하였다" 했습니다. 가라지가 마음속에 떨어지고 이것이 자랍니다. 그러면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랍니다. 잡초 보십시오. 얼마나 끈질긴가요. 그래서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시기하지 않으려면 남하고 말 안 섞고 모른 척하고 혼자 살아야 됩니까? 시기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내 입을 이용해야 됩니다. 그냥 축복해 줘야 합니다. 그냥 그냥 그 선포해 버려야 합니다. "좋겠다, 축하한다." 계속 그런 얘기해 줘야 합니다. 잘 됐다고, 축하한다고, 잘한다고 인정해 버려야 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시기하는 것 굉장히 위험합니다. 사울이 이때부터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이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는 왕입니다. 다윗은 아직까지 애기입니다. 그냥 애기입니다. 그냥 거기에서 막 성장하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새싹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런 존재를 시기하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합니다. 그래서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그때부터 악한 사탄 마귀가 집을 짓고 씨를 뿌리고 그를 흔들어 대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한다는 말은 원어에 찾아보면 '부풀리다', '허풍을 떨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허풍 떨고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풍 떨고 부풀리는 것, 뭐 그것도 문제인데 자랑 그 자체도 문제는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 사람들이 사는 삶은 다 다양합니다. 너무너무 다양한 공동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모릅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말을 안 하니까요. 저분이 어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자랑하고 싶습니다.

"내 부모는 나에게 재산 한 푼 남겨 준 적이 없어요. 내 부모는 나를 항상 학대하고 때리고 핍박만 했어요. 내 부모는 나에게 항상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상대방이 나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유산을 많이 받았다"고 그것을 막 자랑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그분의 자랑이 나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상처 준 일도 없는데 혼자 상처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처 준 사람이 나쁩니까? 상처 받은 사람이 나쁩니까? 이것이 뭐 참 애매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요즘 시집 장가가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도 가정에서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 저런 자랑거리들, 내가 정말 자랑하고 싶은 자랑거리들, 하나님에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 자랑하고 싶으면 감사나눔 헌금 하십시오. 옆에 이름이 이렇게 써 가지고 그러면 교인들이 이렇게 보고 "아 이 집에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 또 축복하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자랑하고 내가 말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마음의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제해 주는 것, 그래서 그냥 끊어주는 것. 자랑도 잘해야 됩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은 두 방향입니다. 이 교만은 죄 중에 가장 오래된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교만에 대해서 이름을 붙였는데, '족보 있는 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족보가 있습니다. 죄도 족보 없는 죄가 있고 족보 있는 죄가 있습니다. 족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상당히 깊어서 그렇습니다.

왜 족보 있느냐? 이 교만의 죄는 에덴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그것 먹는 날에는 너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러자마자 바로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이 교만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교만. 그래서 교만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많으면 그것은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교만은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면 어디까지요? 하나님까지. 자기가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또 교만은 사람을 향합니다. 사람을 향한 교만도 문제인데, 이 교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울이 얘기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을 한번 보시면 바울이 이랬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어떻게 여기라고요? 낫게 여기고."

여러분 겸손의 본질이 뭡니까? 겸손, 교만의 반대말이 겸손 아닙니까?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세상의 겸손입니다. "아유, 전 이거 못합니다. 제가 뭘 합니까? 뭘 합니까? 저까짓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것이 이제 세상의 겸손이고, 하나님 나라 성도의 겸손은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려울까요? 상대를 높이는 것이 어려울까요? 상대를 높이는 것이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기분 나쁩니다. 하기 싫습니다. "오늘 저분의 머리가 너무너무 잘 됐어요. 나도 머리하고 왔는데, 난 기분 나빠. 잘 안됐어. 이제 돈을 비싸게 쓰고 왔는데." 그런데 내가 봐도 저 사람 머리가 너무 잘 나와서. 그러면 "야 정말 오늘 머리 잘 됐는데" 이 말을 해야 되는데, 괜히 트집 잡는 것입니다. 괜히 괜히 심술 내고. 괜히 심술 아니면 말하고 말하지 않고,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인정하기 싫어서.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대우해 주고, 그래야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무례히 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인생에 내 삶에 나를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사람 성격마다 다른데, 피해 다니고 싶다, 다음부터는 안 만나고 싶다, 또 두 번째는 나도 똑같이 무례하게 해주고 싶다, 뭐 등등.

그런데 무례히 행하는 것이 왜 나쁜가 하면 상대방을 죄짓게 만듭니다. 내가 무례하게 행하면 상대가 그 무례함을 보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상대의 신앙생활도 파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신앙생활도 파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의를 지켜줘야 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을 만큼의 예의. 예의라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이 갖춰야 될 기본적인 도덕과 기본적인 말투 등등입니다. 이것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이타적인 것이니까 당연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남의 이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먼저 챙겨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 부활주일에는 계란 나눠주고, 추수감사주일에는 떡 돌립니다. 그런데 평생 떡도 한번 못 먹은 사람들처럼 그 떡에 목숨 걸고 그 떡 몇 개에, 전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런데 상대방부터 먼저 챙겨주는 것이 그것이 기본 아닙니까? 내가 우리 교회, 이 교회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성도라면, 그러면 낯선 사람이나 교회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에게 더 가져가라고 챙겨주고. 그런데 아니, 권사님들이 자기 가방에 자기 식구들 것부터 먼저 챙겨 놓고 먼저 다 넣어놓고 그다음에 이제.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다 나눠주고 없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왜 내가 가져갈 것이 없어야 됩니까? 왜요? 이만큼 많이 준비했는데도 성도들이 이만큼 많이 와서 이만큼 다 가져가야, 그래야 기쁜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식당에서 밥이 없습니다. 그러면 식당에서 봉사하시는 권사님들이 밥을 적게 했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하는 만큼 열심히 하셨습니다.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밥이 없어서 내가 못 먹었습니다. 화딱지가 납니까? 기분 나빠 죽을 것 같습니까? "내가 이 교회 헌금했는데 난 오늘 왜 밥을 못 먹어?" 기뻐해야 됩니다. 왜요? 이만큼 우리에게 성도들이 많이 와서 밥이 없다니 너무너무 기쁘다, 나는 오늘 한 끼 안 먹어도 너무너무 기쁘다.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이익을 구하는 것, 그것을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밥 떨어질까 봐, 오늘 예배당에 보니까 사람들이 꽉 찼고 주차장에 차가 많네, 먼저 가서 먹어야 돼, 오늘 고기 반찬이라 그랬는데."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넌 참 사랑이 없구나 이 인간아, 많이 먹어라" 그러실 것입니다.

그다음, "성내지 아니하며." 야고보서 1장 20절을 보시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사람이 성내면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성질 한번 부리면 지금까지 잘 쌓아왔던 하나님의 의로움이 한 방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어떻게 할까요? "야 여기가 이 포인트야, 여기서 네가 한번 화를 확 내줘야 사람들이 앞으로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너의 존재감을 각인시킬 기회야, 지금 한번 부르짖어, 지금 한번 소리쳐, 지금 이때야, '네네네' 이것만 하지 말고 지금 한번 소리 지르라고." 사탄이 계속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의가 확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내가 애써 쌓아 올렸던 공든 탑이 그냥 와르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생각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부터 악한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집을 짓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갑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과 서로 상충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면 불의를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불의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진리 없는 것이 불의입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다 불의입니다.

15가지 다 했습니다. 적극적인 것, 소극적인 것. 그래서 이 15가지를 기준으로 자기를 달아보십시오. 한번 하나하나 점검해 보십시오.

3. 영원한 것과 폐할 것

그다음 질문으로, 하나님에 대한 것, 타인에 대한 것, 자신에 대한 것을 찾아보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다 하나님에게, 타인에게, 나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의 은사,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에요? 유익하기 위함이라. 어디에요? 교회에. 교회 유익하다는 것은 첫째 나에게 유익하고, 둘째 타인에게 유익하고, 셋째 공동체 전체에게 유익하고.

"오래 참고"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 참으면 누구에게 유익합니까? 나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우선 오래 참으면 타인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또 오래 참으면 교회 공동체에 유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15가지가 다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매일같이 자기 점검을 하십시오. 그냥 사랑이라는 것이 난 밥 사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시기하지 않고 등등 다 사랑입니다.

3-1. 사랑만 영원하다

그다음 은사 중에서 그치고 폐하는 것과 영원한 것을 말해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이 말은 사랑은 계속 있는 것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러분이 예언이라는 말을 바울이 쓰고 있는데, 다음 시간에 다시 살펴볼 것이지만 지금 살짝 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예언은 그냥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언은 미래를 때려 맞추는 것입니다. 점쟁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바울신학에서 예언은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예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돈을 맡아 있는 것. 예금. 은행에 예금합니다. 돈을 맡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아 있다는 말이 뭘까요? 말씀을 내가 맡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책에 지금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 말씀을 내가 맡아 있는 것입니다. 외워서 맡기도 하고, 이해해서 내가 알고 있기도 하고, 또 그 말씀을 충분히 잘 스토리로 풀어줄 수 있어서 내가 맡아 있기도 하고. 말씀을 맡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황이 되면 끄집어내서 쓰려고 맡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누군가가 왔을 때 말씀을 꺼내 줄 수 있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예언자입니다. 말씀을 맡아 있는 사람이니까요. 말씀을 꺼내서 먹여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교회학교 교사 선생님들 예언자입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말씀을 맡았다가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말씀을 먹여주는 성경 교사들, 그런 분들은 말씀을 먹이는 자니까 예언자입니다.

여기 보면 "예언도 폐한다" 그랬습니다. "지식도 폐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그친다" 그랬습니다. 어떤 것은 폐하고 어떤 것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방언이 그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둬가시면. 방언 옛날에 잘했는데 갑자기 방언이 안 됩니다. 하나님 은사를 거두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과 지식은 폐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폐하느냐? 그 뒤에 나옵니다. "폐한다"는 말은 문 닫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압니까?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 다 알까요? 다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시된 것만 아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만큼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 다 안다 합니다. 그러면 100퍼센트 이단입니다. 무조건 이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기가 다 어떻게 알아요? 하나님 말씀 어떻게 통달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만큼. "온전한 것이 올 때." 온전한 것이 올 때가 언제입니까? 종말의 때. 예수님이 오심이거나 내가 천국 가거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제는 이 땅에서 목사가 전하는 설교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가서 하나님 만나면 궁금한 것 다 물어보면 됩니다. 내가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나면 내가 궁금했던 것 다 물어볼 수 있습니다. 폐하는 것입니다. 이제 종말의 때가 되면 예언은 폐하는 것입니다. 지식도 폐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 닫는 것입니다. 진짜가 왔는데 이제까지 희미했던 것, 더 이상 필요 있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아직까지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누구의 얼굴요? 하나님의 얼굴과 내 얼굴, 예수님의 얼굴과 내 얼굴, 먼저 가신 사도들의 얼굴과 내 얼굴.

누구 얼굴 보고 싶으세요? 천국 가면 하나님 얼굴 한번 만져보고 싶으세요? 얼굴 한번 만져도 됩니다. 하나님, 예수님 얼굴 한번 쓰다듬어 봐도 됩니다. 뭐 그런 말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해보십시오.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종말의 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면 예언이 필요 없습니다.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네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얕은 지식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 척, 다 아는 척, 그것을 전부인 양 으스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종말의 때, 곧 얼마 가지 않아서 그날이 오면, 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그날이 오면 네가 지금 자랑하는 모든 지식은 다 폐한다. 방언은 하다가 하나님이 거둬가실 수도 있다. 유익하게 하지 않으면. 그러니 너의 성령의 은사가 그것이 뭐가 의미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3-2.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영원히 종말까지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소망, 그 소망의 주체가 누굽니까? 내 직장의 소망입니까? 내 인생의 소망이고 내 남편 내 자식의 소망입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소망입니다. 또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맺음말

교회의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이 15가지 사랑의 정의를 너희가 충실하게 하려고 애쓰고 발버둥 치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문제는 그 안에서 다 해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이것이 어디 교회에만 적용되겠습니까?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우리 가정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은 사랑이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사랑을 주옵소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그리하면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하셨사오니, 사랑은 우리가 구하고 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더하여 주시고, 15가지 사랑의 정의에 부합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매 순간 매 순간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사탄은 끊임없이 사랑을 깨려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깨려고 다가오는 사탄의 세력을 우리가 이기게 하여 주시고, 뜨거운 사랑,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품고 세상을 이기며 악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