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 예언과 방언 / 전체녹취

고린도전서 특강 12 - 예언과 방언 (고전 14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공부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벌써 12번까지 왔고 이제 14장을 공부하는 날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들을 바울이 다루어가는 방식을 보면 두 번 다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한 번 이야기하고 지나가고, 한 번 이야기하고 지나갑니다. 이렇게 포인트를 짚어서 이야기하는데, 유독 은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합니다.

12장에 보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종류의 은사 사용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내적인 은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도 이야기했고, 아주 화려하고 특별한 은사들도 이야기했으며, 이런 은사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바울의 방식이라면 12장을 끝으로 은사는 그냥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너희는 더욱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며,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방향 지워지고 수렴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인 줄 알았습니다. 모든 은사가 사랑으로 간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것으로 그냥 끝난 줄 알았는데 오늘 14장에 보니까 그 은사들 중에 두 가지 은사를 다시 따로 뽑아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13장 전체를 다 할애했는데,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도 14장 전체를 할애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만큼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안에 예언과 방언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앞으로 오고 올 모든 교회,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 시대 예수님 오시는 종말의 시대까지 예언과 방언의 문제는 교회에서 적절하게 잘 다루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14장은 은사 문제의 종지부가 찍히는 장입니다.

1. 사랑을 추구하며

바울이 교회 안에서 은사를 사용할 경우 특별히 추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사는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향이 중요합니다. 어떤 식으로 해야 됩니까?

1절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은사를 사용하는데 그 지향점이 사랑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추구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디오코'(διώκω)라는 말인데, '최종 목표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은사를 사용하는데 그 은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사랑이어야 됩니다. 이 말은 기본 근저에, 기본 뿌리 베이스에 사랑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며, 그것만큼 헛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1-1. 사랑 없는 은사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은사들 중에 크게 두 가지 은사를 나눴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같은 것이 있고, 화려하고 눈에 보이는 은사인 병 고침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 병 고침의 은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병 고침의 은사를 누군가가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병 고침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랑 없이 병 고침의 은사만 가지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닙니까? 저분이 아픕니다. 몸이 아픕니다.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병 고침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병 고침의 은사가 사랑으로 수렴되면 이 아픈 사람 입장에서 내가 안수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고 병 낫기를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빠져버린 병 고침의 은사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런 경우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과거에 기도원에 병 고침의 은사가 있는 분에게 집에 있는 환자를 데리고 갔더니, 병마다 다 붙어있는 메뉴판이 있습니다. 허리 아픈 데는 50만 원, 관절염은 100만 원, 메뉴판이 다 따로 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성도들에게도 들었고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목사에게 기도 받으러 오면서도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이런 제목으로 기도 받으려고 하는데 한 30만 원 가지고 나오면 됩니까?" 얼마나 황당하던지요. 제가 부목사 때 담임 목사님께 "이렇게 해서 기도 받으러 가야 되는데 얼마 정도 준비해서 가면 됩니까?"라고 물었더니 "도대체 이 기준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시기에, 저 어디 가면 기도원이 있는데 거기 가면 이런 메뉴들이 쭉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참 벼락 맞아 죽을 인간들 아닙니까?

말이 좀 심한 것 같지만 사실 병 고침의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게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사랑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고 공동체에서 몸이 아픈 사람이 있는데, 사랑의 은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그것으로 장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은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둬가십니다. 당연히 거둬가십니다.

그런데 이 돈벌이 되던 것이 돈벌이가 안 되니까 하나님이 거둬가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문 닫습니다. 가게 문 닫습니다" 이럴 수 없으니까 이제 자꾸 사람 탓을 하는 것입니다. "너의 믿음이 약하도다. 돈 봉투의 두께를 보아하니 너의 믿음이 약하도다." 이렇게 자꾸 책임 전가를 합니다. 이런 일이 멀쩡한 교회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은사를 사용하는데 사랑이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은사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최종 목적이 되어서 내가 가진 은사를 사용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을 제3자가 분별하고 보는 사람은 이것이 분별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은사를 사용하는데 저분이 진짜 사랑을 최종 목적으로 가지고 은사를 사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별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별 따위는 상관없고 내가 돈을 얼마를 갖다 주든지 병만 나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은사를 가진 분은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곧 모든 은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1-2. 지혜의 말씀과 사랑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인 지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혜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끄집어내서 섬기고 먹이고 돌보는 것입니다. 교회 목회자가 이 지혜의 말씀이라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돌보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끄집어내서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가르쳐 줘야 하는데, 사랑이 있으면 때로는 책망도 해야 합니다. 저렇게 가다가는 망하는 것이 뻔한데, 그런데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사랑이 기본이 되지 않으면, 사랑을 추구하지 않으면 지혜의 말씀을 끄집어내서 줄 때 "당신 그렇게 하다가 망합니다" 이런 말씀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설교할 때도 "복 받으십시오" 그런 이야기나 하고 천국과 지옥도 이야기 못합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의 교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가 얼마나 허무한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요.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사용하는데 사랑을 추구하려고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예언의 본질

그런데 좀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긴 하는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언이 과연 여기에 쓰여진 예언이 맞는지 정리를 좀 해야 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언, 지금까지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 책에서 읽은 것, 기억하고 있는 예언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언하고는 다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점쟁이가 때려 맞추는 예언과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구약부터 가지고 내려오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하고는 뿌리부터 다릅니다.

점쟁이가 맞추는 것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 이번 시험에 될 것이다,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을 요구합니다. 자꾸 가지고 온 것 보고 정성과 그 열정을 보고 점도 봐주고 합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 "올여름에 물조심하라." 당연히 물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조심해라, 여자 조심해라." 당연히 조심해야 합니다. "북쪽으로 가면 길하고 남쪽으로 가면 어떻고." 당연합니다. 어디 가든 조심하지 않아야 될 것이 있습니까? 어디 가든 안전한 구석이 있습니까? 요즘 세상 보십시오. 도로 가다가 차에 받쳐 죽는 세상인데 어디를 가든 다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때려 맞추고 그것을 가지고 돈벌이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점쟁이입니다.

혹시 그렇게 해서 한 사람에게 그것이 맞아 들어가면 그 사람은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계속 갑니다. 그냥 신문 읽다가 오늘의 운세를 봤는데 어쩌다 그것이 맞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신문의 애독자가 됩니다. "용하다"고 그 오늘의 운세를 해설한 보살님, 도사님 찾아가고, 그런 분도 제가 봤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에 그런 식의 인생을 사는 것이 오늘 이 시대 현대인들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첨단 과학 시대에도 무속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2-1. 말씀을 맡은 자

그런데 정말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예'(預) 자는 '맡아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금할 때 '예' 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예금할 때 '예' 자, 예언이니까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이 말은 특별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되라,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를 히브리어에서 '나비'(נָבִיא)라고 합니다. 그 '나비'는 말씀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언자가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누가 맡겼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분을 택해서 예언자를 택해서 자기 말씀을 맡기신 것입니다. 왜 맡기셨습니까? 말씀을 필요할 때 적절하게 그 말씀을 꺼내서 필요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금을 왜 합니까? 나중에 필요할 때 찾아 쓰려고 예금합니다. 그런데 예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서 남 좋은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예언자 '나비', 말씀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2-2. 가변적인 예언

구약을 봐도 그렇고 신약을 봐도 그렇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언은 상당히 상대적입니다. 가변적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점쟁이들이 때려 맞히는 예언은 가변적이지 않습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예언은 가변적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예레미야 18장 7절과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이 나라 박살 낼 것이다, 뽑아낼 것이다, 부술 것이다, 멸할 것이다라고요.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여기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돌이키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본질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언자가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망할 것입니다. 뽑혀 나갈 것입니다. 부서질 것입니다. 박살 날 것입니다."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듣고 그 백성들이 돌이켰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리기로 작정한 예언한 그 말씀을 어떻게 하신다고요? 철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지자는 중간에서 무엇이 됩니까?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것을 못 견딘 것 아닙니까? 요나가 거기에서 무너진 것 아닙니까? 저 나라 좀 망해야 되는데, 저 니느웨 성이 박살나야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돌이키면 뜻을 철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9절과 10절 한번 봅시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 잘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이것은 반대입니다. 잘 될 것이다. 너 그 나라 내가 복 받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믿고 제 멋대로 살면 어떻게 한다고요? 돌이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달라 했습니다. 지혜를 구했습니다. "네 전에도 네 후에도 이와 같은 자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직접 솔로몬을 하나님이 마음껏 복 주셨습니다. 은혜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나중에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여인들과 정략결혼하면서 우상 숭배자가 되고 완전히 타락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을 버리시고, 그 유다 백성 버리시고, 유다가 나중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십니다.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 약속하셨는데 그 나라를 하나님이 그냥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11절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여기서 '너'는 예레미야입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이것이 예언입니다. "치려 한다"고요.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여기 또 '돌이키며'가 나오는 것입니다.

2-3. 회복을 위한 예언

성경 예언의 핵심은 운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핵심은 결정론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저 어디 용한 기도원에 가면 어느 권사님이, 기도원 원장님이 우리 미래 잘 때려 맞춘다고 해서 가면 그것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정론에 거기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구약부터 시작해서 신약까지 성경 전체가 말하는 예언은 가변적입니다. 돌이키면 회복하리라, 뜻대로 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그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자꾸 예언하는 사람 쫓아다닙니다. 용하다는 사람을요.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예언을 본질적으로 그 뿌리부터 근본부터 알려주고 말하는 이유는 그 교회 성도들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를 것 없습니다. 숨기고 몰래 가서 그렇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진짜 예언은 돌이키면 회복되리라,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망하리라, 그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속도 없는 분이고 하나님 자기의 말의 권위도 다 포기하시는 분입니다. 왜요? 우리가 돌이키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요. 돌이켜서 회복하면 당신이 어떤 말씀을 하셨더라도 얼마든지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본질은 하나님 백성의 회복 아닙니까? "너 죽을 것이다. 내가 너 때려 죽일 것이다" 그랬는데 그 말 듣고 무서워서 돌이키고 회개하면 그것이 예언의 핵심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예언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하나님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복 주십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 해도 그것을 꼭 붙잡고 살아야 됩니다. 교만하면 안 됩니다. 솔로몬 보십시오." 그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말씀을 맡아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다 예언자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부모가 맨날 성경 말씀 빗대서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맡아 있습니다. 예언자입니다. 목사만 예언자가 아니고 교회학교 교사도 예언자고, 정원지기도 예언자고, 구역장도 예언자고, 새 가족을 말씀으로 섬기는 분들도 예언자고, 다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의 본질이 그런 것입니다.

3. 방언보다 예언을 권하는 이유

방언보다 예언을 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방언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기도는 자기도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무슨 기도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영과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덕을 세운다는 것은 어디에 세웁니까? 교회에 세웁니다. 예언은 말씀을 맡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성도가 옵니다. 그 성도에게 맡은 말씀을 꺼내서 섬깁니다.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섬깁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예언을 하되 사랑의 은사를 가지고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예언을 하는 것이니까 섬기고 가르치고 먹이고 돌보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가요. 그러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죄악으로 가는 백성들을 권면하고 또 슬픔에 빠져있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고, 말씀을 맡아 있는 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러분 여기서 예언하는 자의 역할을 보십시오.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맡아 있는 자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3-1. 직분보다 본질

우리는 교회에서 자꾸 직분을 따지고 있는데, 장로냐 목사냐 권사냐 집사냐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조직과 질서와 기능을 위한 것이고 직분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인데 그것은 말씀 맡은 자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에서 14장까지 올 때까지 직분 이야기를 바울이 한마디라도 한 적 있습니까? 직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교회의 기능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맡은 자, 예언하는 자가 교회에 덕을 세운다, 성도를 위로한다, 성도를 권면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직분을 위해서, 직분을 사모하고 그 직분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속상해하고 기분 나빠하고 또한 행복해하고 그래야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맡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본질 아닙니까?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바울이 방언을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통역해서 소통이 이루어져야, 그래야 교회에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도 내가 모르고 기도하는데 어떻게 누구를 권면할 것이며 교회에 덕을 세울 것이며 누구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냥 나 혼자 뜨거운 것입니다. 방언 기도하면 시간이 빨리 갑니다. 영으로 기도하니까 빨리 가고 더 깊이 들어가고 좋습니다. 그런데 통역하지 않으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4. 소통의 중요성

그다음 소통 이야기를 합니다. 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바울이 지금 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가서 바울이 방언 잘한다고 방언으로만 막 이야기하고 "자 알아들었지?" 하고 가버리면 교회에 무슨 유익이 됩니까? 그래서 바울이 지식으로, 계시로, 지혜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바울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입니다. 왜 피곤합니까? 성도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데리고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일일이 입에 넣어줘야 합니다. 풀어줘야 합니다. 이해가 가능하게끔 해줘야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대 고린도 교회, 그 고린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권은 그리스 로마 철학의 문화권입니다. 영적으로는 음란하고 도덕적으로는 타락했고,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래서 그들에게 설득하고 지혜로, 지식으로 말씀을 풀어서 잘 가르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맡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수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음의 고저가 없으면, 음의 높낮이가 없으면, 한 가지 음만 계속해서 불고 있으면 그것이 소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가서 말릴 것 아닙니까? 시끄러워 죽겠다고, 좀 뭔가 악기를 연주하더라도 우리 귀에 듣기 좋은 것, 내가 아는 노래를 좀 연주해 달라, 음악다운 음악을 내가 좀 듣자 이러고 싶을 것 아닙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기도를 하루 종일 저렇게 하는데 끝나고 나서 "무슨 기도했니?" 그러면 "나도 몰라. 그냥 내가 하나님과 더 깊어졌어. 더 가까워져서 느낌은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잘 몰라." 허무한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들으면 "야 그게 뭐냐?" "도대체 넌 이거 기도 못하니까 따지지 마. 나중에 방언이나 하고 와. 방언 배우고 싶어?" 그러면 이제 "따라해" 하고 할렐루야 한 500번 시킵니다. 할렐루야 500번 하면 혀가 꼬부라집니다. 해보십시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그런 식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8절입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역할은 소통입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언어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교회를 향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소통입니다. 기도도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서로 외국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말씀 예언이, 가르침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4-1. 방언과 소통

그러면 방언은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이 소통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서 가장 먼저 일어난 역사가 방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방언의 역사는 서로 간의 소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8절, 42절 보시면 자세히 나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여기서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 성도들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방언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서로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방언은 소통이 된 것입니다. 서로가 다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42절이 중요합니다.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지금 이 시대가 성령 충만한 시대 아닙니까? 성령받은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 초기 역사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방언받았고 방언받고 나니까 어떻게 합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고 성령 받고 나면 자기 잘난 줄 압니다. 다들 그렇습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고 이러면 전부 다 자기 중심의 당을 짓고 이 은사가 최고다 하고 삽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 충만하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기도하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 떡을 떼며, 서로 하나가 되어서 성도의 교제에 힘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소통 아닙니까?

그래서 방언은 곧 소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방언의 소통이라는 것은 물론 은사로 따지면 방언과 통역의 역사가 서로 소통이지만, 우리가 좀 크게 폭넓은 광의의 의미로 본다면 꼭 방언뿐만이 아니고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 여러 가지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사람과 말이 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요.

4-2. 성령의 사람은 소통한다

그런데 저분이 신앙생활을 정말 오래 하셨습니다. 교회 장로님이십니다.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와 말이 안 통합니다. 나와 대화를 하는데 딴 나라 이야기만 합니다. 자꾸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꼰대 중에 그런 꼰대가 없습니다. 말도 섞기 싫습니다. 귀찮습니다. 듣고 있으면 짜증나고 대화가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분이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사람은 서로 소통에 능해야 합니다. 그분의 상황을 살피고 그분의 형편을 이해하는 그런 소통에 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무엇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까? 은사는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상대의 처지를 먼저 볼 것 아닙니까?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뭘 원하는지 들여다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주장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다고요. 그런 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제일 열심히 하는 기도대장이 제일 말 안 통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러면 내가 잘못된 것인가 하고 자꾸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분이요.

그런데 진짜 기도대장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입니다. 누구하고도 말이 통해야 합니다. 초신자하고도, 오래된 분들하고도, 어린아이하고도, 교회 한 번도 안 다녀본 옆집 할머니하고도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방언이 서로 간 소통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뜻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큰 문제가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과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은 정치적인 진보와도 대화할 수 있고, 정치적인 보수와도 대화할 수 있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 나하고는 이야기하기 싫어"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와도 다 열려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성령받은 사람인가? 성령의 은혜에 충만한가? "난 저 인간하고 말도 섞기 싫어"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소통하고 대화하고 그래야 우리는 은사가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고, 이것이 다 소통입니다.

5. 영과 마음으로 기도

지금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3절 보니까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언뿐만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 모든 은사를 가진 자는 모두가 다 소통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소통해야 합니다. 대화해야 합니다.

그다음 방언으로 기도하는 순간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14절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영은 헬라어로 '푸뉴마'(πνεῦμα)입니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영과 마음을 구분했습니다.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νοῦς)입니다. '누스'는 이성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가 헬라어로 '아카르포스'(ἄκαρπος)인데, 놀고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14절,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막 합니다. 내 영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을 막 하고 있습니다. 영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내 이성은 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이성은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성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이성은 논리적입니다. 이성은 설득적입니다. 이성은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동안 이성은 놀고 있습니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은요.

그래서 바울이 그다음 해결책을 이야기합니다. 올바른 기도입니다.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영과 이성이 함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영과 이성이 함께 기도해라. 이성은 설득적이라 했습니다. 이성은 논리적이라 했습니다. 영으로는 우리가 얼마든지 여기 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그 은사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통역의 은사가 없어도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내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내가 이해하고 설득된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처럼요.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이성이 설득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절 한 절 풀어서 가르치고 듣고 배워서 내 마음이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내 이성이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이성이 기도하고, 내 마음이 기도하고, 이것이 설득되는 자리입니다.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영은 뜨겁게 기도하는데 이성이 놀고 있으면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뜻입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으로 찬송합니다. 입으로 찬송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이성으로도 찬송해야 합니다. 즉 찬양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예배 때 찬양대가 있으면 찬양대 올라오기 전에 기도해 드리러 갑니다. 기도할 때 자주 드리는 기도 중의 하나가 찬양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찬양 가사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찬양 가사가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 작사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썼을까 싶습니다. 그것을 그냥 입으로 부르고 끝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영으로 찬송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내 이성이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설득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골방에서도 올바른 기도가 이루어지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 기도가 완성됩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 삶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5-1. 타인을 위한 기도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목사에게 기도 받으러 왔습니다. 목사가 이분에게 방언으로 기도 막 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신대. 그냥 가." 기도 한 30분 받았는데 그냥 "하나님이 너 사랑하신대." 이것이 끝입니다. 그러면 이분은 감사도, 아멘도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진짜 우리가 기도할 때도 또박또박,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내 기도를 받는 사람이 충분히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기도를 들으면서도 아멘도 되고 감사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가 되는데 기도받는 사람은 아무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5-2. 예언의 어려움과 가치

바울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방언을 못했던 것이 아니라 방언을 잘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 이렇게 말할까요? 이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은사라 했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고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필요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기도합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영으로 막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오랫동안 하루 종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언의 말씀으로, 그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섯 마디 말이라도, 딱 다섯 마디 말이라도 그러면 과정이 복잡합니다.

일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묵상해 보셨습니까? 묵상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살피고 돌아보는 과정, QT하고 깊이 들어가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랫동안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가지고 한번 실험을 해봐야 합니다. 누구에게요? 나에게 실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것 아닙니까? 실험해 봐야 합니다. 내가 마루타가 되어서 말씀을 나에게 적용시켜서 살아보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면 확신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이라도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하는 사람들을 바울이 귀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요? 묵상해야 되고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내야 되니까요.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생들이여, 교사들이여, 목회자들이여 제발 예언하는 자는 이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 아닙니까?

목회자가 강단에 서서 한마디 말씀을 전하기까지 이것은 묵상도 해야 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봐야 되고 부딪쳐야 되고 깨어져야 되고 안 되는 것도 경험해 봐야 되고 되는 것도 해 봐야 되고 그리고 나서 확신 있게 전하는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이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서 교회 덕을 세우려면 이런 선생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그냥 말만 하는 선생 말고, 혼자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으로 기도로 골방에서 하는 사람들 훌륭하지만 그런 분들보다 사람들을 세워가기 위해서는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과정을 한번 해볼 사람들이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6. 교회 안팎의 은사

방언과 예언은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집니까?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안 믿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 보면 굉장히 신기하게 여깁니다. 할머니가 막 영어 방언을 막 하고, 학교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이 러시아 방언을 막 하고, 중국어 방언을 하고 하면 신기합니다. 너무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으면,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하고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이분들이 교회 공동체에 왔다 합시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에 이분들이 왔습니다. 그러면 이분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부터는 예언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예 믿음 자체가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야 여기 앉아봐라" 하고 "오늘 고린도전서 14장을 공부하자" 이러면 다 도망갑니다.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재미있는 것 천지인데요. 안 믿는 사람들을, 믿음 없는 사람들이 오늘 여러분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이 자리에 1시간을 앉아있는가, 재미도 없는데요. 요즘 유튜브나 소셜미디어 같은 것 보면 다 짧은 것이 대세입니다. 숏폼, 다 짧은 것이 대세입니다. 1분 안에 다 끝나는 것입니다. 전부 다요. 그런데 50분씩, 1시간씩 이렇게 막 성경 공부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요? 예언의 말씀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관심이 있어서 은사를 보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 오면 방언 때문에 "아 신기하네, 놀랍네" 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교회 오면 자기가 알아듣는 말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왔는데 온 교회가 다 방언으로만 합니다.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나도 못 알아듣고 갔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반응이 "미쳤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통용되는 언어들 있습니다. 단어들이요. 교회 처음 발 디딘 사람에게 얼마나 낯설겠습니까? 방언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도무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려고 앉아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열정이 넘쳐서 우리 중등부 아이들에게 설교하겠다고 갔다 합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 재울 것입니다. 제가 작년 가을에 우리 교회 중등부, 고등부 연합예배 그리고 청소년부 그리고 청년부 설교하러 갔습니다. 그때 한다고는 했는데 걱정이 되더군요.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저희 아이들이 그랬습니다. "아빠 딴 거 말고 짧게 끝내면 된다고. 잠잘 틈을 주지 않고 빨리 끝내면 된다"고요. 제가 잔마귀가 틈 탈 틈을 주지 않고 빨리 끝냈습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더군요. 그것이 안 되면 이것이라도 빨리 해야지 길게 한다고 좋아하겠습니까? 아이들이 듣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여기 교회 안에 서로 소통되는 통용되는 언어와 통용되는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요.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전도하는 데는 은사가 유용할지 모르나 전도하러 온 사람에게는 예언의 말씀을 들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에 숨은 것들이 드러납니다. 죄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7. 공동체의 질서

공동체가 모일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보십시오. 2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어디에? 교회에. 은사들이 다양하게 있는데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데 합당한가 판단하라는 말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이것은 그 당시에 교회의 예배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예배 형태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은혜 받은 사람이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방언을 합니다. 두 번째 사람도 방언으로 합니다. 세 번째 사람도 10명이 방언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많아야 두세 사람만 방언으로 하고 끝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통역자가 있어서 그 방언 기도를 통역해 주라는 말입니다. 만약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 기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고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고 소통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여서 공동체에서 말씀 나눔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내가 은혜 받고 계시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또 전합니다. 그러면 어느 누군가가 분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나옵니다. 보십시오. 14장 31절입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 지도를 받아야 된다는 뜻인데요.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제재를 받는다는 말은 지도받는다는 뜻입니다. 아까 우리 보셨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사건 가운데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말씀을 맡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말씀을 해석해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지도를요.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이 말씀을 맡은 자가 또 다른 말씀을 맡은 자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이것은 여기까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가운데 질서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7-1. 올바른 해석의 중요성

우리가 사무엘서 공부할 때 제가 짧게 말씀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는데,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동성애적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현대 신학자들 중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회자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서 가르치고 이것을 이렇게 이 방향과 틀을 잡아주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와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습니다" 하고 이상한 책들을 참고해서 성도들을 모아놓고 "자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적 관계였습니다. 교회 안에 동성애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윗도 요나단도 그랬습니다" 이래버리면 이것은 교회가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되고 해석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7-2. 잠잠하라의 의미

그다음 우리가 바울 선생님을 또 미워할 만한 구절이 또 나옵니다. 여자들 이야기입니다. 아이고 참, 이런 것 나올 때마다 참 곤란한데, 여자들이 대부분인데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러면 발언권도 안 줘야 합니다. 재직회에서 이 말씀 읽어놓고, 이 말씀을 재직회 시작할 때 목사가 이 말씀 딱 읽었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5절에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자, 들으셨습니까? 말하지 마십시오. 남자들만 발언하십시오. 집에서 남편에게만 물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그 당시에 맥락이 있다고요. 그 당시의 맥락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이 편지를 받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은사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여성들입니다.

예언의 문제와 방언의 문제로, 예언을 하는데 말씀을 가르치는데 자기 마음대로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적 관계입니다" 이런 식으로 배우지 않고 질서대로 하지 않고 화평이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는 여성들, 방언을 하는데 통역의 은사는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방언해서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잠잠하라 이런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게 보면 바울이 좀 이해가 됩니까? 화가 좀 덜 나지요?

8. 품위와 질서

그래서 이제 결론은 그런 것입니다. 39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예언도 방언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전제는 무엇입니까? 소통입니다. 예언을 사모하라 했습니다. 뜨겁게 사모하라 했습니다. 왜요? 교회에 덕을 세우니까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품위와 질서, 좋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 이런 것입니다. 뭘 해도 품위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청소를 해도, 주방에서 일을 해도 품격이 있고 품위가 있는 사람이 있고, 뭘 해도 품위가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뭘 해도요. 왜요? 질서 없이 하면 그렇습니다. 무질서하게 하면요. 그러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뭔가 하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힘들어합니다. 질서를 흐트러뜨리니까요. 무질서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품위와 질서는 이것은 은사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덕목입니다. 내 행동이, 내 말이, 내 언행이 품위가 있는가? 질서 안에 있는가? 이 질서라는 것은 사람이 정한 질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영적 질서 안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가, 이것을 항상 들여다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12장, 13장, 14장을 아울러서 은사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은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또 품위와 질서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은사는 특별히 해야 되고 필요한 일인데 과연 우리가 이것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 그 말씀이 나를 구원하고 그 말씀이 타인을 이롭게 하며 권면하며 위로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 말씀을 나누어 주는 은사를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를 살리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역을 하기 원하오니 주여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모두가 다 예언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언은 교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 식구들 그들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혜의 말씀을 적절하게 나눠주게 하여 주시고 그 말씀이 우리 가정을 살리고 죽어가는 주변 이웃들을 섬기며 살리는 능력의 말씀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품위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