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13 - 부활의 소망 (고전 15장)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해 가는 방식을 보면 갈수록 중요한 것을 뒤에 남겨 둡니다. 마지막 16장은 인사와 마무리인데, 그 전에 사실 15장이 절정입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들을 지적했고, 자신을 본받으라는 이야기도 했으며,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인 사랑, 그리고 은사 중 매우 중요한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이제 부활 이야기를 해야 마무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해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회는 세상 안에 발을 딛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철학이나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교회가 영향을 받고 있었고, 성도들이 영향을 받고 있으며,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매듭을 지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부활이 조금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때, 부활이 정말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숙지하면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고, 알기 쉽게 이야기했으며, 필요한 이야기들을 아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클라이맥스입니다.
1. 복음과 부활의 근거
1-1. 복음은 곧 구원이다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먼저 전제를 하나 세우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말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 현실 가운데서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냥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다가 돈이 생기면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몸이 아픈 사람이 병이 낫는다고 하면 그것만큼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자녀 문제로 머리가 아팠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질 문제가 현실적으로 해결이 되어도 그 문제가 영원토록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까? 1년 뒤에는 또다시 물질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계속해서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사람 문제도 그렇고, 관계 문제도, 물질 문제도, 건강 문제도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지 않습니까. 영원히 살았습니까? 또 죽었습니까? 성경에 나사로 장례식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런데 또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영원히 산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다시 살리셨지만 그는 다시 또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병이 나았지만 다시 병들 수 있고, 내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그 문제가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이라는 것은 반복되는 문제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를 꺼내 주는 것, 끄집어내 주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 문제 때문에 고통받지 않고, 다시는 이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이 진짜 기쁜 소식 아닙니까?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까? 복음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옛날 그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었는데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소식이라면 그것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동일하게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가 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은 곧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복음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곧 구원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가난으로부터 구원입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병으로부터의 구원, 관계의 어려움으로부터의 구원, 우리는 갖가지 구원들을 다 소망하는데, 그런 종류의 구원들은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진짜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도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곧 구원인데, 그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1-2.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제 진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3절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대로'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구원 아닙니까? 나를 위해서, 내 죄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니까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이고, 예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으니까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주장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서 베낀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 8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고 이야기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풀과 꽃은 마르고 시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구원하셨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사망을 건지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1-3. 부활의 증인들
5절에 보니까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라고 합니다. 게바는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열두 제자에게,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성경에 야고보가 여러 명 있지요. 이 야고보가 누구입니까? 초대 교회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있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런데 추정컨대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쨌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습니다.
5절에서 8절까지 계속 반복되는 것은 '보이시고 보이시고 보이시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 성경대로입니다. 둘째는 증인입니다. 보이시고, 그 보여 주신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베드로,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주의 형제, 야고보, 사도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본 사람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본 자들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는 자들 아닙니까?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지금 이것은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붙들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나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공식입니다. 너무 신비로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이유는, 지금도 살아서 원동력이 있어서 꿈틀거리는 이유는, 그냥 화석화된 말씀이고 여기 있어서 끝나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 붙들고 살아 보면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경험하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여기 계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말씀이 나에게 나타난 것을 한번 말해 볼까요라고 하면 밤새도 다 그렇습니다. 전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믿는 사람들, 믿음의 백성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대로 보이셨다는 사실을, 기록된 대로 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변질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변질된 신앙인데,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꾸 이상한 것을, 사람을 믿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기록된 것을 믿고 따라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을 안 보려고 합니다. 공부를 안 하고 싶어 합니다. 귀찮아하고 그냥 목사님이 알려 달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야기하면 그냥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목사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믿어 주는 것은 고마운데, 목사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면 다 망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성경대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그대로 살아갈 것 아닙니까? 그래야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넘쳐나야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그랬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이 원리를 알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누구에게 보이시고 누구에게 보이시고, 그러니까 부활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는 증거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 아닙니까?
2. 은혜와 수고의 원리
2-1. 가장 작은 자의 고백
9절을 보시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왜 작은 자라 할까요? 뒤에 이유가 나옵니다. 염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이 상당히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자기 수위를 낮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9장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님이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두 번이나 예수님이 바울을, 당시 사울이었을 때 이분을 처음 찾아가서 하신 말씀이 두 번이나 "네가 나를 박해한다"입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예수님을 박해하였으므로"라고 쓰기가,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마음이 상당히 무겁고 미안했을 것입니다. 염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것이 진짜 맞는 말입니다. 왜 맞는 말이냐 하면,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바울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3년을 사실 때 바울과 만난 적이 있을까요? 우연히 만난 적, 스쳐 지나간 적은 있을지 몰라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직접 예수님께 돌을 던지거나 창을 찌르거나 예수님을 박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박해했습니까?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옥에 넘겨주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와해시키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쨌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의 핍박이 곧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시험에 들게 하고 예수님을 직접 공격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 아닙니까? 교회는 예수께서 정말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 아닙니까?
반대로 말해 봅시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그 교회를 위해서 내 몸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나는 네가 사랑하는 예수다"라고 하실 것 아닙니까? 반대로, 이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박해했다, 교회를 핍박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든 내가 무언가 틈을 메울까라고 고민하고 또 마음을 다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가 위하는 것입니다.
2-2. 은혜가 먼저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래서 가장 작은 자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 아닙니까? 전적인 선택 아닙니까? 이렇게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선택이 어디 있습니까? 다메섹 도상으로 혈기가 충만해서 기세등등해서 올라가는 사울을 예수님이 딱 꺾어 가지고 바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도구 삼지 않았습니까?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전적인 은혜 아닙니까? 생각하니까 은혜입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어떤 원리입니까? 은혜가 먼저입니까, 수고가 먼저입니까?
지금 보십시오. 은혜가 있고 그다음 무엇이 있습니까? 수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다음 수고가 있고, 그 수고를 자기가 수고라고 이야기합니까? 또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 수고, 은혜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은혜 받아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고를 자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다시 은혜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수고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 일을 할 때,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며 여러 가지 각 부서에서 곳곳에서 주를 섬길 때, 은혜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은혜가 먼저 있어야 그다음 수고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은혜가 없는데 수고가 나옵니까? 은혜 받은 자가 수고하는 것이지, 은혜가 먼저 되어야 수고가 되고, 그 수고는 다음에 다시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받지 않은 자를 수고롭게 하니까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은혜가 없는데 수고롭게 하니까 지치는 것입니다. 피곤한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데 교회에 성도들이 왔습니다. 은혜가 고갈되어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합니다.
아예 은혜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분들에게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냥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서 교회 왔는데,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전에 인격적으로 만났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은혜가 다 밑바닥입니다. 은혜가 방전되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바닥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수고하라고 일을 주고 일을 맡기고 수고를 강요하면 그것이 진짜 자발적인 수고가 됩니까?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수고했는데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수고가 원망이 되고, 그 수고가 불평이 되고, 그것이 다시 은혜로 하나님께 승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원리는 은혜와 수고와 다시 은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보면 보이는 분도 있고 보이지 않는 분도 있는데,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은혜가 없어요." 그런데 그 원리 가운데에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제가 은혜 충만히 받을 수 있도록 저를 좀 배려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잘못 이용해서 은혜 충만히 받겠다고 해 놓고서는 예배도 안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원리는 그렇습니다. 은혜와 수고와 은혜가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내가 수고하고 나서도 그 수고를 사람들에게 찾지 않습니다. 알아 달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아직까지 나는 갚을 것이 너무 많은데, 그것을 사람에게 왜 받습니까?
받은 은혜가 너무 큰데, 하나님께 갚을 것이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안 알아주는 것이 아무 상관없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수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것을 다 갚아도 못 갚는데, 만 분의 1도, 10만 분의 1도 못 갚는데, 나는 만 달란트 빚진 자였는데, 그것을 아직 갚으려면 멀었는데, 그것을 사람에게 왜 찾고 있습니까? 은혜가 없으니까 사람에게 찾는 것입니다. 안 알아준다고 자꾸만 투정하고 원망합니다.
3.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
3-1. 영지주의의 영향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교회에 부활이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그 당시에 이것은 그 당시 초대 교회 당시 철학과 문화의 영향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있는 자리가 이방인의 땅 아닙니까? 그 당시 문화 철학이 그리스 로마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1세기 교회 아닙니까? 무려 1세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교회입니다.
1세기 그리스 로마의 문화 철학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던 이단들이 있었는데, 교회를 괴롭혔던 이단들 많이 들어 보셨지요. 무엇입니까?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들입니다.
영지주의가 무엇입니까? '영(靈)' 자가 신령하다 할 때 영 자입니다. '지(知)' 자는 지식할 때 지 자입니다. 신령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즉 영적인 지식, 신령한 지식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이 신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 영지주의는 나중에 마니교로 흡수됩니다. 4세기에 마니교 들어 보셨지요? 불을 숭배하는 마니교, 조로아스터교로 그렇게 흡수됩니다.
어쨌든 그 당시 플라톤 철학이 굉장히 영향을 끼쳤는데, 신구약 중간사 때도 말씀드렸고 여러 번 말씀드린 것인데, 이분들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말입니다.
그래도 그럴 만한 것이, 여러분들 내 몸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육체가 깨끗합니까? 목욕 안 하고 이런 것 말고, 그런 것 말고, 안 씻으면 더럽습니다. 냄새나고요. 그런데 그것 말고 이 몸이 원수 아닙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픕니다. 하루 세 끼 먹어도 저녁 되면 또 배고프고, 남의 것 보면 또 빼앗아 먹고 싶습니다. 이 눈이 원수 아닙니까? 눈이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우리 몸이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각종 정욕도 있고, 여러 가지 욕망투성이 아닙니까? 이 몸이 죄짓는 기계입니다. 하루에도 몸이 짓는 죄가 수백 가지 아닙니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몸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플라톤 철학입니다. 몸은 더럽습니다. 우리 육체는요. 그런데 저 이데아의 세계에, 신령한 세계에 아주 순수한 영혼이 살고 있었습니다. 순수한 영혼들이 천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고 플라톤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순수한 세계의 영혼들이 살다가 거기서 죄를 지었답니다. 무슨 동화 같지요? 죄 지어서 어떻게 됩니까? 천상의 신이 노해 가지고 지상의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감옥이 우리 육체랍니다. 그러니 더러운 육체가 천상에서 죄지은 영혼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영혼이 깨끗하게 정화될 때까지 여기 가둬 놓는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그것이 30년이 되건 50년이 되건, 그러면 그 당시 철학에 의하면 오래 사는 것이 죄입니까, 복입니까? 죄인 것입니다. 그 당시는 왜 그런 철학이 정당화되었을까요? 왜 철학자들은 그런 철학을 가져왔을까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많이 합니다. 창 들고 나가야 되고 칼 들고 나가야 되고 싸우러 나가야 되는데, 전쟁하고 싸우는 데 사상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많이 보내 줘야 됩니다. 그런데 가서 명분 있는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면 너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해서 즉각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미친 듯이 전쟁터에 가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전쟁해서 국가를 위해서 죽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하고 독배를 마시지 않습니까. 그냥 죽습니다. 그 죽음을 정당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천상에서 나에게 내려진 이 감옥의 시간이 끝나고 해방되어서 저 천국으로, 천상으로 내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플라톤 철학입니다.
그 플라톤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고, 거기서 지금 이 사람들에게 계속 영향을 주니까 육체는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입니다. 육체는 더럽고 추악한 것입니다.
3-2.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
그런데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셨습니다. 우리 육체에 말입니다.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들이 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입니다.
이분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 오기 전에 신앙을 가지기 전에 이미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면서 교육받았는데, 이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이 육체는 추악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령한 것이 올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육체에 담아서 보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단입니다.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시지요?
사도 요한도 영지주의 이단과 굉장히 많이 싸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진짜 성도라는 것입니다.
3절 한번 봅시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이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초대 교회의 아주 심각한 이단입니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적 그리스도가 말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것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분별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전제로 하고 이것을 다시 보십시오.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러면 이 부활은, 이 사람들이 부활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부활이 없다는 것은 육체로서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영은 당연히 부활하실 것이고, 죽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 부활입니까, 육체 부활이 아닙니까? 육체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육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그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드셨습니다. 고기 잡아서 구워 가지고 같이 드셨습니다. 육체로서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어떤 육체인가는 뒤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로서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로 오실 리가 없다고 단정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육체는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물을 것 아닙니까?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얼마든지 우리를 눈속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육체는 가짜 육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현설(假現說)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가짜로, 거짓으로 현현하셨다는 가현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고통도 인간이 당한 고통이 아니고,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가짜로 현현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완전히 폄하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단 아닙니까?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나중에 사도행전에 보면 두 부류가 생기는데, 철학자들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도 있고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극기주의자들입니다. 육체를 더럽다고 생각하고 막 괴롭히는 것입니다. 피도 내고, 칼로 찌르고, 육체를 괴롭혀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자들입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육체를 쾌락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버린 몸, 어차피 더러운 육체, 그냥 갈 때까지 가자, 놀 때까지 놀자, 그래 봐야 영혼은 그냥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스토아 학파들, 에피쿠로스 학파들입니다. 그것이 이단들 아닙니까?
3-3. 부활이 없다면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부활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에서 19절까지를 보면 '만일'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만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입니다.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이 말을 보면 부활이 없으면 무슨 말입니까?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신앙 체계는 모두 다 헛되고, 모두 다 거짓입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왜 그렇습니까? 지금 절제하고, 지금 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지금 이 식민지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불쌍한 사람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먹고 마시고, 저 영지주의자들처럼, 에피쿠로스 학파 저 쾌락주의자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다 죽으면 되지, 이렇게 우리가 사는 것이 가장 불쌍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부활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대로 보이시고, 하나님의 말씀 그 성경에 기록된 것이 사람에게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4. 사망과 부활의 대비
4-1.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신 것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20절에 "그러나"라고 나옵니다. '만일' 어쩌고저쩌고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는 앞에 말을 뒤집는 역접의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다음 열매도 있고 또 그다음 열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면 그다음 열매는 또 누가 되고 또 누가 되고, 우리도 순서대로 또 부활하고 또 부활할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을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사망과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설명을 정리해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21절), 누구로 말미암았습니까? 사망이 누구로부터입니까? 아담으로부터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누구로 말미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입니다.
여기 아담은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이기도 하고, 인간의 대표 명사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 없이 그냥 인간 뜻대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원래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흙이라는 뜻입니다. 먼지,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흙, 먼지, 티끌입니다. 그냥 존재 자체가 흙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냥 먼지가 됩니다. 가루가 되고 재가 됩니다. 화장해서 태워 보십시오. 가루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흙과 먼지 같은 존재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된 것 아닙니까?
"사망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22절)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죄 지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는 대신 죽었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23절),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차례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첫 열매가 되셨으니까 우리는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 계속 차례대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이 땅에서 눈 감는 순간 천국에서 눈 뜨는 것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24절) 순서대로, 차례대로 우리 순서, 우리 차례가 곧 온다는 뜻입니다.
4-2. 맨 나중 원수 사망
종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종말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종말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왕 노릇 하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권세는 끝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권세는 끈질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부활이었다는 말은 사망의 권세가 그만큼 끈질기다는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람은 두렵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에게 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고 타박하지 말고, 옆에서 도와 드려야 합니다. 옆에서 임종 잘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기도해 드리고, 찬송 불러 드리고, 힘을 넣어 드리고 그렇게 해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사망의 무서운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죄와 죽음이 두 가지 무기 아닙니까? 사탄의 무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죽음으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은 원수가 갖고 있는 것을 빼앗아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그것을 빼앗기려고 하겠습니까? 사탄이 말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그 두 가지를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고, 신앙 고백 한번 했다고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계속해서 넘어지게 하고 계속 죄짓게 합니다. 죄짓고 나면 또 그다음 후유증이 생깁니다. 그 후유증이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다. 그 죄책감을 계속 자극해서 또 쓰러지고 또 넘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갑니다. 사망, 죽음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많은 사역들 중에 경조부가 있는데, 경조부 사역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지금도 상중입니다. 우리 한 분 안수 집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계속해서 장례가 있는데, 슬픔 당한 자를 성도들이 가서 위로하는 사역이 경조부 사역입니다. 참 좋은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분들을 위로하는 것은 2차적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자주 가 봐야 합니다. 거기 가서 그냥 조문만 삐쭉이 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려 봐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 보면 그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큰 은혜가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터까지 한번 따라가 보셔야 합니다.
어제까지 나와 같이 신앙생활 하셨던 믿음의 동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서 저 화장터 화구에 들어가서 1시간 반이 지나니 한 줌 재가 되어서 나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계속해서 보고 수시로 느끼고 기억하고 깨달아야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망을 이기는 힘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천국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가는 것인데, 사람이 그렇게 떠나가는 것인데, 내 영혼이 천국에서 눈 뜰 수 있다면 이 사망의 권세 뿌리치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경조 사역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끈질긴 것입니다. 이 사망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27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8절)
이것은 그냥 문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5. 잘못된 관행과 바른 신앙
다음에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관행이 나오는데요. 이 관행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하면, 29절에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즉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고린도 교회 안에 잘못된 관행이 있었는데요. 대리 세례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떠났습니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문제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중에 죽은 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대신 내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를 하나님이 좀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건져서 천국으로 좀 인도해 주실까 해서 말입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는데도 대신 받는 것입니다. 내가 받았는데도 또 세례받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 식구들 중에 세례 안 받은 사람을 불러다가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신 세례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의 관행이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을 만큼 열심인데, 그것은 곧 부활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리 세례라는 말도 안 되는 관행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자의 부활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관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정말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세상을 떠난 자를 위해서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합니까, 안 합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례는 왜 합니까? 장례는 산 자를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 개신교에서 장례는 산 자를 위한 장례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으로 세상을 떠났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건 장례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살아 있는 자, 지금 그 가족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우리가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말입니다. 그분이 세상을 살 때 우리는 모르지만, 남몰래 신앙생활을 했을지 안 했을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분이 마음으로, 저 깊숙한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였을지 그렇지 않았을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구원의 여부는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산 자를 위해서 장례하고 기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누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 저 양반 천국 갔을까?" 우리끼리 말입니다. 장례 끝나고 이렇게 나와 가지고 "와 내가 보니까 교회 한두 번 온 것 같아. 저 사람이 작년 성탄절에 오고 재작년 부활절에 한 번 오고, 세 번은 채워야 천국 가지 않을까? 두 번은 뭐..."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로하면 됩니다. 열심히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보면 됩니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떠날 것인가?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돌아가신 이의 가족을 위로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잘못된 관행, 대리 세례까지 받아 가면서 하는 것을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다음 주에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15장 뒷부분과 16장 마무리까지 하고 고린도전서를 모두 마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우리 삶에 그대로 임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시고,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기록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 오늘 우리 삶에 말씀이 능력이 되고 말씀이 역사가 되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라가도록 도우시고, 그 말씀이 은혜가 되고, 은혜 받은 우리가 수고하고, 그 수고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은혜와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시고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는 자 되도록 도우시고, 우리는 또 그다음 열매, 또 그다음 열매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이 우리의 참 소망이 되고, 사망 권세, 세상의 사탄 중에 권세 잡은 사탄이 죽음과 사망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는 그 권세를 뿌리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