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14 - 연보와 인사 (고전 16장)
오늘은 지난 시간 말미에 잠깐 다루었던 고린도교회 부활 신앙에 대해 바울이 전하는 바를 함께 마무리하고, 연보와 인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고린도전서 마지막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갈등도 있고 문제도 있고 그 가운데 나뉘는 일들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굉장히 많이 싸웠습니다. 누가 이 교회의 진짜 지도자인가, 바울인가 아볼로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도 다투었고, 결혼의 문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 송사 문제 등으로 굉장히 많이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뒤쪽으로 갈수록 본질을 이야기하는데, 15장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 신앙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여기에 왜 이러고 앉아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세상 모든 사람 중에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부활 신앙의 핵심
이 중에 핵심이 되는 말씀, 진짜 15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가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랑을 가끔 하긴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단언한다는 말까지는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랑하는 것 중에 최고의 자랑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는 부활 신학의 핵심입니다. 왜 바울이 죽는다고 이야기했을까요? 죽어야 다시 사니까, 죽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의미는 우리 육체의 죽음과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 신앙에서는 바울이 말한 이 죽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1-1. 날마다 죽는 삶
32절을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장소가 에베소입니다.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가서 3년간 머물렀는데, 거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와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이야기해 주고 알려줘서 바울이 거기서 편지를 써서 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편지에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했는데, 바울이 곰이나 사자나 이런 것들과 싸운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여기서 맹수는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 이방인들,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 혹은 유대인들, 그런 사람들과 바울이 계속해서 갈등하고 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싸울 때 바울이 자기 성질을 내고 자기 성질대로 갈등하면서 싸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 앞에 31절에 보니까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거기서 자기 성질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바울은 거기서 한 사람이라도 어찌하였든지 더 얻으려고, 그 영혼을 얻으려고 그렇게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가 죽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니까 반비례의 관계입니다. 내가 나타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내가 죽어야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것입니다.
1-2. 이 땅에서의 부활 신앙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부활이라고 하면 내가 죽어서 천국에서 눈 뜨는 것을 기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1차적인 의미의 부활 신앙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 땅에서 목숨을 다하고 죽으면 당연히 그 순간 천국에서 눈 뜹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살아가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사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을 살면서 부활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면서 부활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의 부활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부활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 때 죽지도 않고 자기 성질 다 부리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이 나타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어서만 천국에서 영생하고 부활의 영광을 얻겠다는 것은 굉장히 파렴치한 신앙이 아닙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진짜 너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러면 죽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울 때 내가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32절 뒤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했습니다.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같은 사람들, 부활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마시고 즐기고 흥청망청 사는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이 없다면 왜 자기를 죽입니까? 성질대로 살지요. 바울은 집안도 좋고 돈도 많고 많이 배우고 학벌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자기를 죽이고 삽니까? 부활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드러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죽어서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한 가지이고, 나는 지금 성도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는 만큼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정리하고 저녁에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자기를 돌아보면서 오늘 잘 살았다고 할 때, 이것은 지나가다가 동전 100원 주워서 잘 산 게 아니고, 오늘 횡재했다, 오늘은 그냥 이득이 있는 인생이다, 이게 아닙니다. 내가 오늘 얼마나 죽었느냐, 얼마나 내가 참고 성질 죽이고 남을 섬기고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났느냐, 이것으로 한 걸음 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부활 신앙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1-3. 깨어 의를 행하라
그다음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 됩니까? 33절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악한 동무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여기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부활이 없으니까 마구 살아라, 그냥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기냐, 그냥 부어라 마셔라 즐겁게 행복하게 그냥 살아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깨어 있어야 될 이유, 의를 행해야 될 이유, 죄 짓지 말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죄 짓지 말아야 될 이유, 의를 행해야 될 이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내가 이 땅에서 눈 감으면 바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어디엔가 서게 됩니다. 그 어디엔가가 어디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10절, 로마서 14장 10절을 보시면 다 바울이 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라고 했습니다. 다 반드시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로마서에서는 "내가 어찌하여 내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내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했습니다. 여기도 우리가 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말은 다른데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심판대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도 계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깨어 있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살고, 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고 살고, 죄에 대해서 절제하지 않고 죄짓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우리의 목숨이, 생명이 끊어져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그 민망함과 부끄러움과 하나님이 "자, 한번 따져볼까?" 하시고, 기록된 것을 한번 돌아보자고 하실 때, 우리 행동들이 우리 행실들이 그것을 볼 때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활 신앙을 제대로 가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죄도 절제하고 의를 행하고 살고 깨어 있게 됩니다. 부활 신앙의 장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여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지금 너희가 계속 싸우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 때문에 싸우고, 은사 문제 때문에 싸우고, 예언의 은사가 최고다, 방언의 은사가 최고다, 병 고치는 은사가 최고다, 이런 것 가지고 사랑 없이 마구 싸우고 있는데,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면 그때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면 세상에 뭐 다툴 게 별로 없습니다. 뭐 그리 아귀다툼하고 막 그럴 것 별로 없습니다. 다 심판대 앞에 서면 다 부끄러운 짓인데, 요만한 것 가지고 싸우고 미워하고, 요만한 것 얻었다고 혼자 즐거워하고, 자기 혼자 먹으려고 하고 안 나눠주려고 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에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내가 죽어서 천당 간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34절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5절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사람들이 그렇게 묻겠지요. 궁금하니까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것은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알의 진리입니다. 그 밀알의 진리를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야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죽어야 거기에서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그것만 죽으신 게 아닙니다. 속상한데 속상하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저 인간 정말 욕하고 싶은데 욕하지 않으시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냥 묵묵히 가시고 거기서 그냥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고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1-4. 부활체의 영광
37절입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고 막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부활해서 어떤 형태가 되는가, 어떤 형태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꼬부랑 할머니가 105세에 돌아가셨는데, 부활하면 105세로 부활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 입장에서 나는 꽃다운 18살 나이로 부활하고 싶다고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분들, 몸에 장애가 있는 분들은 부활해서도 나는 이 장애를 그대로 가지고 부활한 채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거기에 대한 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42절에서 44절까지는 이렇게 대응 관계가 있습니다. 한 그룹이 있고 또 다른 그룹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이 대조됩니다. 썩을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육체입니다. 썩지 않을 것은 부활체입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뭐라고 확실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썩으면 영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영생하는 영생의 부활체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욕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 육체입니다. 욕된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영광스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체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약한 것은 지금 내 육체입니다.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부활체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 이것이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비로운 것이 이런 육체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죽으니까, 이런 육체가 세상을 떠났는데 천국에서는 반대로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나라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나 같은 욕되고 약하고 썩을 것, 육의 것을 심었는데 그 반대의 것이 부활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어떤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지금 성경을 읽으면서 이렇게 한번 보겠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그 사이에 무엇을 집어넣으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렇게 읽어 보겠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경험 속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입니까? 출애굽 할 때입니다. 출애굽 할 때 노예로 430년을 조상 대대로 자손 대대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이것이 아닙니까?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어디에 들어가 앉아 있었습니까? 피 안에 있었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피 안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찬란한 해가 떠오르는데, 그때 나오는 그 몸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것, 영광된 것, 살아 숨 쉬는 것, 그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면 그 부활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피만 바르고 그 안에 있었습니다. 피 안에만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원리를 잘 알아야 됩니다. 정말 우리는 썩어 없어질 육의 몸이고 욕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흙으로 빚어진 아담 같은 존재인데,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예수 안에 그냥 있기만 하면 부활합니다. 있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그 다음 이것을 밝혀야 됩니다.
1-6. 주 안에 거함
예수 안에 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7절을 보면 "거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잘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포도나무 비유 아십니다. 너무 유명한 말씀인데,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또 예수님 안에 거하면, "거한다"는 말이 한자어입니다. 거(居) 자가 무슨 거 자입니까? 살 거 자입니다.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살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것을 심판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으로 보면 사람이 내 안에 살지 아니하면 불에 던져 사른다고 했습니다. 불 심판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 불에서 활활 타는 지옥 불에서 불 심판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을 부활 신앙으로 한번 이해해 보십시오. 그러면 산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집 안에 들어가서 삽니다. 우리 집에서 삽니다. 다 집에서 생활하는데 생활이 편합니까 불편합니까? 아무리 남들이 볼 때는 저 좁은 데서 어떻게 사나 해도 나는 편해 죽겠습니다. 나는 편하고 좋습니다. 그냥 좋습니다. 그냥 집에 오는 것이 좋습니다. 어디 휴가 때 좋은 데 가서, 자식들이 어디 좋은 호텔이라고 가서 자고 오라 하는데 불편해 죽겠습니다. "거한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냥 예수 안에 있는 것이 편해야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그냥 편해야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말씀 보는 것, 이것이 맨날 걸려서 삼키지도 못하고 소화도 안 되고 통하지도 못하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냥 신앙생활이 편한 것입니다. 편한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고, 믿음의 형제들 자매들 만나는 것이 즐겁고, 이번 주 복음 성경 영대회가 무척 기대되고, 아마 그냥 그런 것이 막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냥 뭐 불편한 것도 있지요. 그래도 대체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주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니 자기 부활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있으면 부활하는데 사람들은 그 부활을 의심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의심하느냐 하면, 내가 한 것도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아, 진짜 제일 황당할 때가 신앙생활 4, 50년 하신 우리 권사님, 집사님, 뭐 중직들이 목사가 임종 예배 드리러 갔는데 "목사님 저 천국 못 갈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물론 그런 마음이 들지요. 물론 후회가 되지요. 그런데 그것은 후회이고, 그런데 거했습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그 안에서 부족하나 그 안에서 살았고, 모자라지만 그 안에서 즐거웠고 행복했고 주 안에서 다 살았습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눈 뜨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부활이라는 주제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밤에 그 안에 들어앉아 있을 때, 자기 집 안에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잠자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있었을까요? 있었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새지 않겠습니까? 옆집에서 막 곡소리가 납니다. 야, 우리 집 식구가 아무도 죽지 않고 내일 밝은 태양을 함께 볼 수 있을까, 이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데 그 불안이 있다고 "야 너 왜 의심했냐 너 왜 불안해 했냐 넌 죽어야 되겠다 죽어"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피 안에 있으면 됩니다. 피 안에, 십자가 안에, 그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고 살면 그 부활이 우리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의심하니까 이단들이 설쳐대는 것입니다. 구원파 이단들, 신천지 이단들, 그런 이단들이 우리의 의심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살고 있으면 우리는 그 다음 날 찬란한 부활체로 영광을 맞이합니다.
1-7.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
45절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과 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한번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육체입니다. 우리 몸입니다. 지금 장막집은 영원합니까? 한 50년 쓰면 그때부터 조금씩, 그보다 일찍 문제가 생기는 사람도 있지만 한 70년 쓰면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고장 안 난 데가 없습니다. 다 고장입니다. 전부 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무엇입니까? 부활체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은 육체이고, 무너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소멸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바울이 여기까지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처소, 하나님이 지으신 영광의 그 집이 어떤 형태인지는 바울도 말을 못한 것입니다. 신령한 육체입니다.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는 그 신령한 육체는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체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영화로운 육체이고, 두 번째는 그러면 우리가 고민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100세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20대의 모습으로 계시면 나는 가서 어떻게 알아보지, 우리 아버지 어떻게 알아보지 하는 것입니다. 다 알아봅니다. 아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누가 거기 계셨습니까? 모세하고 엘리야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함께 갔는데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가르쳐 주었습니까? "자, 서로 통성명하고 인사하세요. 이 사람은 누구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다" 하고 서로 인사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천국에 올 정도의 수준이 되는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 안 해도 명찰 안 붙이고 있어도 다 알아보고 서로 다 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미 힌트를 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1-8. 혈과 육의 한계
5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혈과 육 입고 있습니다. 썩는 것 입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고 천국 가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그 안에 머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그 다음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안에 머무는 방식 중에 하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51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이 중요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켰는데 그 절기 가운데 나팔절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나팔절이면 전부 다 불나팔 하나씩 줘가지고 장난감처럼 전부 다 나팔을 부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 나팔절은 광야에서 나팔 분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민수기 10장에 나오는데, 민수기 10장 9절과 10절을 보면 나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대적 치러 나갈 때, 전쟁하러 갈 때 나팔 크게 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 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팔, 나팔은 제사장들이 불게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붑니다. 나팔은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300 용사를 거느리고 전쟁하러 갈 때 가지고 간 것이 세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항아리, 빈 항아리이고, 또 횃불, 나팔입니다. 나팔은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소리입니다. 즉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팔을 불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나팔을 그래서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정말 썩어 없어질 우리 육체, 약한 우리 육체, 욕된 우리 육체가 영광되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나려면, 부활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거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편안해야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신앙의 수준이 성장했다, 발전했다 하는 것은 다른 데 시금석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얼마나 나에게 편안하냐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계속해서 걸려 있는 말씀이 있다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인데, 계속 성장하려면 말씀 붙들고 살아봐야 됩니다. 부딪쳐 보고 살아보고 사랑하고,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해 보고 품어주고 해야 됩니다.
1-9. 부활의 승리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5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습니다. 왜요? 승리가 무엇입니까? 썩어 없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하는 것이 최후 승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로 말미암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주 예수 안에 있으면 됩니다. 바울이 굉장히 정교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 그래 열심히 노력해, 주의 일에 힘써, 봉사 열심히 해, 그래야 부활의 이렇게 보면 안 됩니다. 그보다 강조점이 앞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이것이 강조점입니다. 이단들이 흔들어 댑니다. "야, 부활 없어. 그런 거 너 봉사하고 열심히 일하고 뭘 해야지"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해야 될 것처럼 말합니다. 그게 아니고 그냥 그 안에 있으면 됩니다.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 정말 중요합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연보와 인사
연보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정리하면 바울이 모금을 굉장히 잘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런데 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 끌어모으는 데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쓰려고 바울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자비량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헌금해라, 연보해라 이 이야기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굉장히 잘한 사람입니다. 아주 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자기 생각대로 한 게 아니라 성경의 원리대로였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왔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교회입니다.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흉년을 맞이했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전도해서 세운 교회들에게 다니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돈을 거둬서 모금을 해서 그것을 전달하려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이야기를 마지막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하는 것입니다. 내 헌금 좀 해라, 좀 돕는 이야기 하라고 그 이야기입니다.
2-1. 헌금의 원리
1절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 한마디로 말하면 요즘으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구제입니다. 구제 연보입니다. 헬라어로 로게이아(λογεία), 목적을 가진 모금이라는 뜻입니다. 목적을 가진 모금입니다.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이미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이것을 명령을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쓴 서신에 보면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다 공부한 사람들이니까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지 않고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느 한 지역의 한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다녔던 그 지역이 갈라디아 벨트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네 교회가 갈라디아 벨트입니다. 바울이 그 네 교회를 다 합쳐서 통틀어서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은 그 네 교회들에게 보내는 회람 서신인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했습니다. 너희들에게도 명한다고 했습니다. 2절입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어서 내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에 헌금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헌금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매주 첫날"이라고 했습니다. 매주 첫날, 헌금을 할 때 정한 날을 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정해라. 어떤 날이든지 나를 정해라. 두 번째 "수입에 따라" 했습니다. 형편에 따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형편에 따라 지나치지 마라. 시험에 들 정도로 하지 마라. 수입에 따라 형편에 따라입니다. "내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무엇입니까? 바울이 가서, 바울이 가서 헌금을 이야기하면 바울을 보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발적으로입니다. 정한 날 나를 정하고, 형편에 따라 하고, 자발적으로 하라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원리입니다.
2-2. 십일조의 정신
그리고 "성도를 위하는 연보"라는 내용이 1절에 나와 있기 때문에 십일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형태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 내라는 이야기가 곳곳에 나옵니다. 그런데 목적이 분명합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목적이 첫째 목적은 성막이나 성전을 보수하고 수리하고 거기에 소요되는 기타 비용을 충당하는 데 십일조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구제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 구제 안에는 레위인들이 들어갑니다. 레위인들은 분깃이 없습니다. 성전 안에서 일합니다. 레위인들 그리고 또 성전 주변에 오가는 나그네, 고아, 과부, 또 그 밖에 거하는 그 인근에 거하는 동네의 연약한 사람들, 그런 자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성도를 위하는 연보는 십일조 정신의 두 번째 정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신명기 말씀 한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8절, 29절을 보면 이 두 번째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매 삼 년 끝에," 3년 이야기는 제가 좀 있다가 하겠습니다.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입니다. 농사 지으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 지어서 매 3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다 내어"라는 말은 예외 없이 모든 성도들은 다 내라입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레위인 나오고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안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배부르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배부르게입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의 두 번째 정신입니다.
왜 3년을 이야기했느냐 하면 크게 보면 7년 텀으로 돌아갑니다. 3·3·1입니다. 왜 3·3·1인가 하면, 첫 번째 해 십일조는 성전이나 성막의 유지보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두 번째 해 십일조도 똑같은 목적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매 3년 끝에 해 십일조는 구제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면 또 다음 그 처음에 첫째 해, 두 번째 해는 또 이렇게 3년 한 사이클이 끝나고 또 첫 번째, 두 번째는 성전 성막의 유지보수와 수리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또 그 다음 세 번째는 구제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7년째는 안식년입니다. 안식년, 수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십일조 정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십일조 하세요, 하세요, 하세요, 물론 우리 교회는 한마디도 한 적도 없지만, 하세요, 하세요, 하세요 계속 이야기하는데, 십일조 정신대로 교회가 이것을 사용하고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전 국민들에게 작정 헌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 모아졌습니다. 전부 다 전리품들을 전부 다 모았습니다. 백성들은 와서 노력으로 봉사했습니다. 자기가 할 만큼 수고하고 열심히 벽돌 나르고 일하고 수고했습니다.
교인들이 모든 교인들이 십일조 정신에 따라 십일조를 열심히 내기 시작하면 건축헌금이 뭐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살림을 잘 살아서 성전의 유지보수도 하고 필요한 것 건물도 짓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3년에 두 번이니까, 3년에 두 번이니까 66.7% 아닙니까? 그것을 성전의 유지보수와 모든, 그 유지보수 안에는 뭐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우리 친교도 들어가고 다 들어갑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도 건물을 짓는 일도 건물을 세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3분의 1은 구제를 위해서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십일조 정신대로 정말 우리 교회 헌금의 3분의 1을 구제를 위해서 다 풀고 다 쓰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나눔장고를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서, 아직까지 정말 얼마 되지 않지만 3분의 1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러나 그 시작한 것이 정말 귀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옳으니까, 차츰차츰 늘려서 열심히 쓰고 열심히 나눠줘야 됩니다. 성경이 그 정신을 이야기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일조 정신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이 헌금의 전부여야 됩니다. 너무 많습니다. 헌금이 종류가 무슨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제가 새 가족을 담당하는 목사였는데 저한테 봉투를 쫙 가지고 와 가지고, 목사님, 자기가 10만 원을 꺼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봉투가 13개 정도 됐습니다. 13개 봉투를 갖고 와서 목사님 비율을 정해 주십시오, 비율을 어떤 데는 천 원 넣어도 되고 어떤 데는 2,000원도, 어떤 데는 만 원 넣고, 10만 원의 비율을 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제가 그런 것 다 필요 없습니다, 전부 그냥 구약의 십일조 정신 잘 기억하고 교인들이 십일조 열심히 내고 하면 그렇게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곁가지를 치고 또 곁가지를 치고 이렇게 이렇게 되어 가느냐, 그것은 여러 가지 그 안에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욕심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거두기는 하는데 어떻게 쓰는지, 나눠주는 것 이야기하는 것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십일조 정신대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꼭 그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 바울이 성도를 위한 연보, 이것이 십일조 정신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것이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에 바울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에 거두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으로 해야 돈 갖고 와, 가난한 사람이 있으니까 도와줘야 돼 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은혜를 나눔
3절입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여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성도를 위한 연보를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예루살렘에 연보 가지고 간다고 했습니까? 돈 갖고 간다고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 "너희의 은혜를"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니고 성도들이 모아 준 그 은혜를 가지고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방편이 헌금입니다. 십일조 정신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다, 돈을 주는 게 아닙니다.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 환란 당한 이웃을 나눔장고를 통해서 베푼다,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나도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5절입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리라.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 주게 하려 함이라." 가서 좀 너희와 함께 교제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7절입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하루 이틀 지나는 길에 보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함께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2-4. 동역자들
10절입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11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디모데를 먼저 보낸다고 했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왜 디모데를 멸시할까 봐 걱정했을까요? 디모데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를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디모데가 나이가 어렸습니다. 또 소심한 사람이고, "네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했습니다. 위장병이 자주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서 디모데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낼 텐데 무시하지 마라, 나이 어리다고 연소하다고 무시하지 마라, 극진히 대해 주라고 했습니다.
12절입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아볼로는 왜 안 가려고 했을까요? 지금 여기 이 교회에 분파가 바울파, 아볼로파입니다. 아볼로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아볼로가 그래서 피하는 것입니다.
2-5. 네 가지 명령
지금 네 가지 명령을 찾아보십시오. 마지막 권고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여러분 이것은 단계입니다. 단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날 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금방 일어나서 일하러 갑니까?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깨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머물러 있다가, 그냥 널브러져 있다가 깨라,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야 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잠자리 이부자리 개고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어나는 것이, 서는 것이 어디에 섭니까? 믿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일단 정신 차리고 믿음 위에 서고, 그다음 "남자답게 강건하라." 여기는 그냥 남자 여자 자연적인 성별의 남자 여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군사답게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담대하게 하라, 강건하라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행동을 해야 되는데 그다음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사랑으로 행하라."
순서입니다. 깨고, 서고, 방향을 잡고, 사랑으로 행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4단계 권고입니다. 깨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행합니까? 깨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 없이 사랑이 나옵니까?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사로 우리가 행할 것 한 가지 무기는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모든 문제는 사랑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사랑으로 행하라" 했습니다.
2-6. 수고한 자를 알아주라
15절입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여러분, 이 말씀은 참 재미있는 말씀인데, 스데바나라는 사람이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교회가 사는 지방입니다. 고린도는 도시이고 아가야는 지역입니다. 양산시가 고린도교회라면 아가야는 경상남도입니다. 그래서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고린도교회의 첫 번째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요? "순종하라" 했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에게 순종하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오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이분은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교회가 66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40년, 50년 지켜오신 분들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크고 작은 풍파가 왜 없겠습니까? 교회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를 지키고 기도하고 이겨내고 견디고 여기까지 오신 분들 인정해 드려야 됩니다. 그분들의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됩니다.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이 세 분이 오신 것입니다. 사실은 에베소에 이 세 분이 고린도교회 대표 자격으로 오셔서 교회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고 고민을 다 털어놓으니까, 바울이 편지를 써서 이분 편에 보내준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참 바울이 인간적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도 누가 좀 인정해 줘야 됩니다. 사실은 우리는 그냥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누가 정말 수고했으면 집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에 집사님 하신 일이 정말 대단합니다, 인정해 줘야 됩니다. 좀 알아주라 했습니다. 바울이 이 세 분이 에베소까지 왔습니다. 그 당시 기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여기까지 와서 이 교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답을 얻어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것을 뭐하러 갔다 왔어, 그게 뭘 나왔다고 그게 그 먼 데까지, 이런 이야기 들으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알아주라, 인정해 주라,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왜요, 요만큼 요만큼 잘못된 것만 자꾸 트집을 잡으니까요. 이만큼 잘한 것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하고 잘한 건 당연히 잘하는 것이고 요만큼 못한 것 가지고 뭐라 하니까요. 알아줘야 됩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수고했다고 해야 합니다.
19절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아굴라 브리스길라도 나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바울의 일생의 동역자들인데, 이분들은 고린도교회에서 첫 번째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에베소 교회를 먼저 개척하러 가셨고, 에베소에서는 로마 교회를 개척하러 가셨습니다. 바울에게는 정말 둘도 없는 동역자들입니다.
21절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를 시켜서 쓴 게 아닙니다. 직접 썼습니다. 바울이 참 용감한 말도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가 만약 이런 말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한테 여러분들이 부디 주님 사랑하십시오, 주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습니다 이러면, 저 목사 미쳤나 그러겠지요.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당당하게, 왜냐하면 저주받으면 안 되니까요. 이분의 그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저주 받으면 안 되니까, 큰일 나니까 바울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할지어다." 이렇게 하고 고린도전서를 막을 내립니다.
마무리
여러분들 14주 동안 고린도전서 공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들인데 심심하실 때마다, 잠 안 오시는 깊은 밤에 불면의 밤이 오실 때마다 틀어놓으시면 잠이 잘 올 것입니다. 틀어놓고 들어보시고 또 되새겨 보시고 그러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우리의 무능과 연약함과 부족함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썩어 없어질 육체였고 욕된 몸이었고 또 육체의 소욕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었고 약한 존재였고 악을 달고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 아래, 십자가 권세 아래 머물렀을 때 우리를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그 놀랍고 귀한 은혜 기억하며 주 안에 살게 하옵소서. 주 안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하셨사오니 부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모두가 부활의 영광에 함께 일어서 훗날 천국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며 함께 해후하며 즐겁게 찬양하는 그 아름다운 날을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