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1 - 십자가의 도 (고전 1장)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오늘부터 고린도전서 말씀을 14주에 걸쳐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상당히 접근하기도 쉽고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읽다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아도 되나, 이걸 과연 우리가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한번 변명을 해보면, 원래 그 장소가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문화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런 문화에서 복음이 들어갔고, 그런 문화에서 복음이 들어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세상의 문화에 종속되어 세상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우리 시대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굉장히 닮아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항상 충돌하고 있고, 세상과 교회의 문화는 항상 갈등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하면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의 문화를 선도하고 이끌며 영향력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욕하고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얼마나 세속화되었습니까? 그 세속화된 교회를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정의 문제이기도 하며, 나 자신이 하나의 성전이고 교회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 첫 시작을 함께 보겠습니다.
1. 바울과 고린도 교회
1-1. 바울의 고린도 방문
먼저 바울의 서신서를 볼 때는 서신서가 처해 있는 자리가 중요하고, 고린도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서신을 쓸 때는 거기에 가보고 나서 씁니다. 로마서를 제외하고는 그렇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가보지도 않은 상태로 편지를 썼지만,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가보고 난 이후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한 과정을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덴이 아테네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테네를 거쳐서 그다음 고린도에 갔습니다.
아테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바울이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아테네가 철학의 도시 아닙니까? 철학자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도시인데, 거기에 가니까 사람들이 철학적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거기서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철학적으로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곳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철학적 사변으로 설교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에 온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첫째는 부끄럽고, 두 번째는 민망하고, 그리고는 심기일전했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인간의 지혜로 전하지 않으리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지혜로 오직 복음만 전하리라.' 그곳이 바로 고린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바울이 새롭게 결단하고 복음을 전하기로 시작한 도시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1-2. 동역자를 만난 곳
그런데 그 일이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8장 2절에 보면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아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고 나옵니다. 브리스길라가 아내이고 아굴라가 남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고, 이들은 바울의 평생의 동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잠깐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만납니다. 5절을 보시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손으로 꼽아보겠습니다. 바울이 대장이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일생의 동역자이며, 그다음에 실라와 디모데까지 다섯 명입니다. 이 다섯 명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의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즉, 고린도는 바울에게 동역자를 얻은 곳입니다.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고 동역자를 얻었던 곳입니다. 사실 우리도 일생을 살아가다가 정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얻었던 그 장소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고린도는 일생의 동역자를 얻었던 곳입니다.
5절 말미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이것이 별것 아닌 말씀처럼 보이지만 아테네에서 실패하고 난 바울에게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단순하지요.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이렇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온갖 철학적 사변으로 계속 설교했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 아주 단순하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1-3. 열매와 체험의 장소
고린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8장 6절을 보면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대적과 비방도 있었습니다. 한편, 8절을 보면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나옵니다. 회당장도 예수를 믿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회심했습니다. 열매가 있었습니다.
비방과 대적도 있고 열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를 따라가야 됩니까? 열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비방과 대적이 좀 더 세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두려움이 생기니까 성령께서 바울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열매도 있었고 체험도 있었습니다.
10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래서 11절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나옵니다.
고린도가 이런 곳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고린도는 실패를 극복한 곳입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를 극복한 곳입니다. 둘째, 동역자를 만난 곳입니다. 셋째, 열매가 있었던 곳입니다. 넷째, 체험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는 아주 각별한 곳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특별한데 이 네 가지가 한 번에 있으니까 얼마나 각별하겠습니까?
1-4. 고린도전서의 집필 배경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다 끝내고 3차 선교여행의 목적지는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고린도에서 세 분의 손님이 왔습니다. 바울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6장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너희의 부족한 것을 그들이 채웠느니라." 세 분이 왔습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 와서 이 세 분이 바울이 떠나고 난 이후에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명을 듣고 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것은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쓴 것이고, 세 분이 찾아오셔서 현재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설명하고, 그것을 듣고 해답을, 때로는 책망도, 때로는 달램도, 때로는 기도도, 사랑하는 마음을 잘 담아서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라는 말씀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아주 각별한 관계였는데, 그것은 앞에 말씀드린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 바울의 서두와 인사
2-1. 사도적 권위의 선언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과 고린도 교회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이것이 참 이상한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가깝지 않습니까? 바울이 고린도에 얼마간 머물렀다고 했습니까? 1년 6개월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1년 6개월 머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가장 오래 머무른 장소는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이었습니다. 그다음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입니다. 머문 기간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나머지는 6개월, 3개월 혹은 1년 미만이었습니다. 빨리빨리 복음 전하고 교회 세우고 물려주고 떠나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다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딱히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개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굉장히 격식을 갖추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어떤 느낌으로 이것을 읽으셔야 되느냐 하면, 제가 우리 성도님들 집에 심방을 갔다고 합시다. 심방을 가서 제가 첫 말을 꺼냅니다. "집사님,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이 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종 목사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심방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위기입니까? 느낌이 어떻습니까? 굉장히 무겁습니다. 그리고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이 목사가 지금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하나?'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냥 심방 가서 "아유, 집에 오늘 청소 열심히 하셨네요. 깨끗하게 잘 해놓으셨네요. 맛있는 음식 냄새도 나고. 자, 뭐 지난 시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기도 제목 보니까 아이가 시험 본다고 하는데 시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렇게 일상적인 것 묻다가 찬송 부르고 말씀 전하고 기도하고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굉장히 형식적이고 굉장히 딱딱하게 접근합니다. 이 말은 지금 긴장하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뒤에 할 말이 무거운 말이니까 긴장하고 귀를 세우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첫머리를 보십시오. 빌립보서 1장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가볍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된 바울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이 첫머리, 1장 1절만 읽어봐도 고린도 교회가 심상치 않다, 굉장히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라고 보셔야 됩니다.
여기에 소스데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분은 또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회당장은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을 왜 때렸을까요? 유대인들이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 전할 때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소스데네가 유대인이었다가 회심하고 개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에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함께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편지를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2. 수신자의 정체성
편지를 받는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2절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렇게 나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고린도는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도 있고, 빌립보에도 있고, 아테네에도 있고, 로마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고, 양산에도 있고, 해외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전부 다 큰 교회, 작은 교회, 개척 교회, 100년 된 교회,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단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고린도에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여야 되는데 고린도에 있으면서 왜 너희는 고린도 사람들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고린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데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왜 너희는 고린도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에 중독되어서 살고 있느냐 하는 책망이 여기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이방의 도시였습니다. 음란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도시였습니다. 교회 안에도 음란이 들어와 있었고, 교회 안에도 우상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왜 그러고 살고 있느냐 하는 책망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거룩해서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의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이니까 하나님이 '너 거룩해'라고 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악한 사람도 있었고, 죄인도 있었고, 못된 사람도 있었고, 전과십범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사자가 피만 보고 지나간 것 아닙니까? 그것이 칭의 아닙니까? 실제로는 깨끗하지 않고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으나 피를 보고 지나간 것입니다.
지금 여기 "거룩하여지고"라는 표현은 그냥 선언적인 의미입니다. 완료형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로 거룩하여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로 거룩하여졌으면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진짜 거룩하게 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성화를 살아야 됩니다.
그다음 나옵니다.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성도는 교회 일원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해지면 그 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대로 잘 살면 그 교회는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교회를 선언적으로 칭의의 차원에서 거룩하다고 말하고, 이제 성도는 진짜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왜 고린도 문화에 물들어 있느냐 하는 책망입니다.
사실 우리 양산중앙교회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거룩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누구입니까? 성도입니다. 내가 교회 이름에 먹칠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자체는 거룩한데, 성도가 거룩하지 않아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엉망진창으로 살아서 교회가 엉망으로 손가락질 받고 욕먹는 것 아닙니까? 목회자부터 모든 성도까지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다 하신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서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서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신앙고백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 당시 신앙고백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왜 중요했느냐 하면 그 당시는 로마 치하여서 신앙고백하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신앙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성도라면 목숨을 걸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신앙고백하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 편지 첫머리부터 굉장히 비장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뒤에 좀 혼낼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3. 은혜와 은사
3-1. 카리스와 카리스마
이제 바울이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은혜가 중요합니다. 은혜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합니다. 은사가 또 중요합니다. 은혜는 무엇이고 은사는 무엇입니까?
은혜는 '카리스'(χάρις)이고,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입니다. 들어보셨지요? "저 사람 카리스마가 있다." 이런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카리스와 카리스마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 곧 카리스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할 때 추상적인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카리스마입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하면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그래,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니?"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구체적으로 은혜가 구체화된 것이 카리스마, 은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은혜는 내가 구해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 것입니까? 주셔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을 얻었으니." 좋은 언변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 지식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6절에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라고 합니다.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었다는 말은 간증거리가 넘쳐났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간증거리가 넘쳐나게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각종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은혜가 은사가 되어서 언변도 좋고 지식도 많고 간증거리가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는 점입니다. 그 은혜가 은사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는 나중에 12장에 나오지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통역하는 은사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 가르치는 은사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무엇입니까? 다 은혜입니다.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2장에 나오는데 덕을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주셨습니다.
3-2. 은사의 오용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 그 은혜의 구체적인 카리스마, 은사를 가지고 자기 잘난 체하고, 이 은사가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와 은사는 그 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카리스와 카리스마는 같은 어원입니다.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다음 8절을 보면 풍성한 은혜로 주시는 은사를 통한 유익이 무엇입니까?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이 말이 무엇입니까? 흔들리지 않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구체적인 것이 은사인데, 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죄짓지 않고 교회를 잘 섬기며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또 풍성한 은혜와 구체적인 은사를 주시는 이유가 9절에 나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더불어 교제하게" 이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받은 책임을 져야 되는데, 그 은사를 가지고 누구와 교제하라고 했습니까? 우리 주 예수와 교제하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환자들, 병자들, 아픈 자들, 다리 저는 자들, 앞 못 보는 자들, 각색 병자들을 고쳐 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자기 골방에 들어앉아서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라는 말입니다. 어디 떠들고 자랑하고 다니지 말고 말입니다.
특별한 은사를 나에게 주셨습니다. 언변의 은사도 주시고 지식의 은사도 주시고 각종 간증거리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것 가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그다음 돌아와서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고 기도하고, 주 앞에서 자랑하고 주님께 회개하고 자기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것을 가지고 교회의 문제를 하나하나 처음부터 짚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 많이 보셨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은사를 교회 덕을 위해서 세우는 데 쓰지 못하고 자기 자랑거리로 쓰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기도하고 더불어 교제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만 계속하고 다니는 사람들 보셨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기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4. 고린도 교회의 분열
4-1.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이제 본격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이것이 됩니까? 되기야 합니다.
어떤 집이 이것이 됩니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가장이 있으면, 그런 아버지가 있으면 같은 말 하고 같은 마음 가지고 같은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같은 마음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척할 수 있으니까요. 누구 하나가 강력한 독재를 행사하면 전부 다 같은 말을 합니다. 전부 다 같은 마음 같은 뜻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이 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목회자 혹은 헌금 가장 많이 하시는 성도에 의해서 끌려가는 교회가 아니라, 그 기초가 그리스도가 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면 같은 말을 하게 되고 같은 뜻을 가지게 되고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지 않으니까 다른 말이 나오고 다른 생각이 나오고 다른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좋은 공동체는 치열하게 토론합니다. 각자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토론하는데, 결국 그 뿌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어느 한쪽으로 결정이 되면 철저하게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분열됩니다. 서로가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여기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짜 좋은 교회가 되려면 예수를 잘 가르치고 예수를 잘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예수님의 마음을 품겠지요. 성경을 잘 알아야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구의 뜻을 따르고 누구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서 교회가 함께 가야 됩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2. 분열의 두 양상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분쟁이라는 말을 기억하시고, 11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분쟁이 두 번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분쟁은 다 같은 분쟁인데 원어 헬라어를 보면 분쟁이 다릅니다. 10절에 나오는 분쟁과 11절에 나오는 분쟁이 다릅니다. 10절에 나오는 분쟁은 '스키스마타'(σχίσματα)입니다. 분열이라는 뜻인데, 통으로 짠 옷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상태입니다. 찢어질 것이 아니고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입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지금 분쟁이 있다는 말은 교회가 찢어져서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금 이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통으로 짠 옷이 찢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상태라면, 지금 이것을 스키스마타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미 지금 상태 이 고린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아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11절의 분쟁 '에리데스'(ἔριδες)는 교회를 찢어 먹은 사람들, 교회를 갈라 먹은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태도와 어떤 행동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여줍니다. 이단보다 더 나쁩니다. 이런 인간들은 교회를 찢어 먹고 갈라 먹은 사람들입니다.
4-3. 분열의 원인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왜 분열했습니까? 왜 교회가 이렇게 찢어졌습니까? 이유가 나옵니다. 12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네 파가 있었는데, 사실 뒤에 세 번째, 네 번째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이고, 그리스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파, 아볼로파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입니다. 개척목사 아닙니까? 두 번째 목회자가 아볼로입니다. 즉 개척 목회자와 2대 목회자 사이에 파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을 따르는 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제3의 사람들은 "나는 바울도 아볼로도 따르지 않고 저기 예루살렘에서 목회하시는 베드로 사도를 따르겠다" 이런 소수파가 또 생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으니 나는 예수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또 생긴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바울파, 아볼로파가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은 다 기질이 다르고 성향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는 뜨겁습니다. 뜨겁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목회자는 이성적입니다. "나는 뜨거운 사람이에요.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저 목사님이 좋아요. 나는 이 목사님이 좋아요." 그래서 서로가 내 기질과 성향을 따라서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조그만한 불씨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니까 파벌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근거에, 뿌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뜨거움도 있고 냉철한 이성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아주 차가운 지성도 있고 불타오르는 열정도 있습니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데 예수님은 다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기도도 하시고 말씀도 전하셨고, 기적도 행하셨고 또 기적을 따라가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은 다 가질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 상황에 맞게 성령께서 초창기 개척 목사님으로는 바울 목사님을 보내주신 것이고, 지금은 아볼로 목사님이 가장 필요하니까 우리 교회에 보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시기와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분과 함께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이분과 함께 믿음 생활하면서 나의 약한 부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뜨거웠던 분을 따르다가 냉정한 분이 오고 이성적인 분이 오면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 기회에 내가 잘 배우고 따라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 연약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 그리스도가 있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 뿌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마음의 뿌리에 없기 때문에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따라서 분열하고, 그러다 보니 당을 짓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끼리 모여서 비방하고, 그 소리가 귀에 들어가니까 우리가 세력이 좀 더 약하다고 사람들을 더 모으고, 그래서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이 당 짓는 것 아닙니까? 당 짓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패거리 형성하고 누구 뒷담화하고 그래서 자기 편을 모아가는 것, 이단들이 교회 들어와서 하는 짓들, 사탄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4-4. 아볼로는 어떤 인물인가
아볼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사도행전 18장 24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언변이 좋다, 성경에 능통하다. 일단 이성적이라는 것이 와닿습니다. 체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한의 세례만 알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26절에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사님들께서 성경공부 잘 시켜서 이분을 고린도 교회의 2대 목회자로 보낸 것입니다. 이분의 기초는 철저한 성경이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아볼로를 통해서 답답함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파가 나눠진 것입니다.
5. 복음의 본질
5-1. 형식과 본질
이제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합니다. 상당히 직설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왜 바울파가 생기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당연히 목회자가 세례 베푸는 것은 의무입니다.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세례를 이야기한 것은 세례가 형식적인 행위의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세례는 형식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가 비전 센터를 지어서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본질입니까? 건물은 형식입니다. 건물은 그냥 돈 있으면 다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본질입니다. 복음에 기초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 가르치고 전하고,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낼까 하다 보니 그 부산물로 건물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건물은. 저 건물이 우리의 자랑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와 복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본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와서 내가 세례 몇 명 베풀었느냐, 그것은 내 자랑이 아닙니다. 세례를 내가 몇 명 주고 나에게 세례받은 사람은 내 편이고, 아볼로 목사님이 와서 아볼로가 세례 베푼 사람이 몇 명이고 그 사람은 아볼로파가 되고, 그것이 어떻게 본질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들, 구원받은 자들, 복음이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진짜 안타까운 것은 직능별로 모임들이 있어서, 사회에서 하는 직능별로 모이는 것입니다. 모여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친교하고 다 좋습니다. 운동 좋아하시는 분들은 운동으로 모이고,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 직업의 범위대로 다 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진짜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거기에서 기초해서 그다음 나오는 모든 것은 다 부산물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5-2. 십자가의 도
바울이 교육을 다시 합니다. 십자가를 다시 전합니다. 옛날에 다 전한 것인데 까먹어 버리고 사탄에게 팔아먹어서 다시 전합니다.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구원 아닙니까?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항상 '~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건지는 것입니다.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죄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날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 십자가에 내가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그냥 달려 계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박차고 나와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인간의 가장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멸망하는 자들은 본질적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뒤로 자꾸 미룹니다. 멸망하는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 벌기 위해서 계속 죄를 짓습니다. 돈 벌기 위해서 죄를 자꾸 쌓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해결해야 되는데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야, 너 죄인이야'라고 말하면 먹히겠습니까? 그것이 듣기 싫은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도소 선교를 했습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 교도소 사역을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교도소 가서 설교했는데, 저는 처음에 가서 이분들이 죄인이니까 죄인 설교를 하면 잘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항이 대단했습니다.
교도소에도 전체 집회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성경공부 모임이 있는데, 전체 집회는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불교, 천주교, 무교 다 옵니다. 거기에 맛있는 것을 주고 잠깐 자유로운 시간이니까요. 그 시간에 그 이야기 했다가 저는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합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자들은 죄를 계속 짓습니다. 돈 벌려고, 조금 더 한 단계 더 올라가고 출세하려고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너를 건져줄게' 하는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그 사람들에게는요.
그런데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내가 입으면 거기서부터 이 능력은 '뒤나미스'(δύναμις)입니다. 뚫고 나가는 힘이 있는 능력입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폭발적인 힘입니다. 이것을 가지면 그다음에 다 해결됩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을 내가 가지면, 죄가 해결됐고 죽음의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인생의 해결할 숙제가 다 해소된 것 아닙니까? 죄와 죽음의 문제 해결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그때부터는 힘 있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폭발력 있게요. 그래서 이것이 다이너마이트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5-3.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그다음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전도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바울 시대의 전도는 압축적인 복음입니다. 옛날 한 100년 전 그때의 복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진짜 전도의 날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하다, '무리아'(μωρία)는 불합리하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를 넣으면 적어도 하나가 나와야 됩니다. 조금 더 합리적인 것, 매력적인 것은 하나를 넣으면 둘이 나와야 됩니다.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 비례하든지, 인풋보다 아웃풋이 조금 더 많든지,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그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조금 일하고 돈 더 많이 벌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입니다. "아니, 죽은 사람을 내가 왜 믿어?" 자기 죄, 자기 죽음,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합니다.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많이 찾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이 맨날 떡 달라고 하고 맨날 기적 베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바 그대로입니다. 성공하는 것, 돈 조금 더 많이 버는 것, 남들보다 조금 덜 일하고 더 많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한 것입니다.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 스캔들의 어원입니다. 거리끼는 것, 올가미, 덫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에 이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거리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 왜 저주받은 자를 자꾸 믿으라 그래?' 그런데 이것이 진짜 내로남불입니다. 그 저주받아야 될 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에 달릴 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짓고 내가 정말 나쁜 짓 많이 해서 나무에 달려서 죽어 마땅한 나 대신에 예수께서 대신 저주받은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지면 그때부터는 하염없이 눈물이 날 것 아닙니까? 그것이 깨달아지는 순간, 그것이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순간, 그때가 우리가 은혜받고 구원받은 시간입니다. 그것을 지금 바울이 다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분열되고 나뉘어져 있으니까 그 기초인 그리스도가 없으니까 그리스도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뉘어지고 분열되고 당 짓고 저 사람 미워하고,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찢어지고 분열되면, 다시 그리스도부터 들어가야 됩니다. 다시 예수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는 예수님은 죽어버렸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인데 여기 왔다 가셨고,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이것 우리 인정하시지요?
왜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기가 막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죄를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저 인간을 심판해야 됩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다 쏟아부으신 것입니다. 한 분을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 그것이 예정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공의도 한 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6. 너희 부르심을 보라
26절에서 28절을 보면, 바울이 이 구절에 제목을 붙인다면 '너 꼴을 알라'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아, 너희 꼴을 한번 봐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너희들 중에 잘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미련한 자들이다.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약한 자들이다.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너희가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들이었다, 이 말입니다.
너희의 원래 꼴, 그런 너희들을 택해서 구원시켜 주었더니, 너희 뿌리인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교회를 갈라 먹고 편 가르기 하고 나누고 서로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싸우고 그러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택하심이 참 묘합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 읽으면서 마가복음 10장에 소경 바디매오가 생각났습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시끌벅적합니다. 온 성이. 바디매오가 막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이니까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조용히 하라 하고 겁을 주고 동냥 그릇 뺏고 난리였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어디 여기서 소리 지르느냐고요.
그때 바디매오가 어떻게 합니까? '아유, 이러다가 한 번 더 내가 소리 질렀다가 맞아 죽겠다' 그리고 입을 닫았으면, 그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오라"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겉옷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맞아 죽을 줄 모르고요. 미련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권세 있는 자들, 배운 자들,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눈 뜨게 하셨습니다. 본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미련한 자들을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다윗과 골리앗, 누가 강합니까? 당연히 골리앗이 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셔서 골리앗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골리앗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 많습니다. 라합, 룻, 천하고 멸시받던 이방 여인 아닙니까? 여관집 주인 아닙니까? 가난해서 남의 집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 주우러 다녔던 여인들 아닙니까? 과부의 두 렙돈, 그 주인공인 과부, 부자들이 하나님 성전에 와서 자기 부를 과시하면서 금덩이 은덩이 성전함에 올려놓고 집어넣고 던져 놓고 갔던 그 자리에 부끄럽게 두 렙돈, 동전 2개 떨어질 때 소리는 또 좀 요란합니까? 그런데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요. 우리는 미련하고, 우리는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던 자들 아닙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았고, 그 은혜의 증거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써야 되고, 그 은사 받은 자가 은사 주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기도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 우리 의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편 가르기 하고, 은사 없는 사람 모욕 주고 무시하고, 교회에서 함부로 말하고, 교회를 갈라 먹고 찢어 먹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꼴을 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원래 어떤 인간들이었는지 그 은혜를 기억하라.
7. 주 안에서 자랑하라
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제 자랑은 무엇으로만 해야 됩니까? 예레미야 말씀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9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부자가 돈 자랑하고, 용사가 힘 자랑하고, 똑똑한 자가 자기 지혜 자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을 자랑합니까?
24절에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딱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지혜 주신 하나님 자랑하고, 용맹 주신 하나님 자랑하고, 물질 주신 하나님 자랑하라는 말 아닙니까? 나 여호와는 이 일을 기뻐한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 해 보십시오. 더 많은 복 주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돈 자랑하는 것 듣기 싫어 죽겠어요." 그러면 앞으로 누가 돈 자랑하면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큰일 났다. 저 사람 이제 큰일 났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저 사람이 자기 자녀 잘 되는 것을 막 자랑하면 불쌍히 여기셔야 됩니다. '큰일 났다. 저 사람.'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됩니다. 진짜 그것이 진심이건 진심이 아니건, 입발린 소리건 아니건,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생각이 그렇게 갑니다. 또 자꾸 그렇게 고백해야 됩니다. 자꾸만 잘 안 되어도요.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을 봅시다.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합니다. 31절에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 나누어지지 말라. 분열하지 말라.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이 굉장히 긴데 오늘 숨 가쁘게 빨리 했습니다. 집에 가셔서 천천히 한 번 더 잘 살펴보시고, 그리고 한 번 더 돌아보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마시고 나를 말씀에 적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고린도 교회의 약함과 그들 사이에 있는 인간적인 갈등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시고 은사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은사를 가지고 자랑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초는 그리스도이니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뜻을 품고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한 교회 되게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우리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복음의 기초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건물이 교회의 본질이 아니고 물질이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그 복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그 복음이 교회의 본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질에 충실한 교회, 본질에 충실한 성도로서 온전히 기쁨과 감사함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