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 전체녹취

고린도전서 특강 2 -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고전 2-3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을 본문으로 두 번째 시간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의 제목이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오늘 공부의 절반은 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귀한 겁니까, 별볼일 없는 겁니까? 귀한 것이지요. 정말입니까? 돈보다 더요? 진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가 돈보다, 권력보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값진 것이라면, 발견하기 쉽겠습니까, 발견하기 어렵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면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을 보면 '숨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숨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고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도와 말씀으로 발견하면 교회 공동체가 거룩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제목을 잘 이해하시고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2장과 3장 내용을 함께 봅니다.

1. 바울의 고린도 사역

1-1. 십자가 복음의 결단

첫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초창기를 어떻게 회고합니까? 1절에 보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가 하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2절에 보니 그가 붙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은 결심했다는 말이지요. 왜 이랬습니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본인이 고린도에 와서는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지요. 십자가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어디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로부터도 구원받고, 죽음으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사실은 내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예수께서 달리셨기 때문에 내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이 핵심입니다. 즉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것,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가지를 쳐 나가는 것이 기독교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교회가 십자가를 얘기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활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핵심인데, 그것이 본질인데, 교회가 매일 '복 받으라, 복 받으라', 교회가 매일 '부자 되세요, 부자 되세요' 한다면 그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나가도 얼마든지 얘기하고 있는데, 서점에만 가도 서점에 깔려 있는 것이 전부 다 처세에 대한 것이고 돈벌이 수단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간증들, 교회에서 내뱉는 목회자들의 수많은 설교들이 십자가를 얘기하지 않고 죄와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아닙니다. 사이비 사교 집단이지, 결단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본질, 이 핵심, 이것이 정말 교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교회는 그냥 없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죄짓느니 차라리 자폭하고 마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1-2. 아테네 실패의 교훈

바울이 "나는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냥 관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전하다가 실패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격분'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분노를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옳습니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옳습니까? 긍휼해야 합니다. 바울이 실패한 원인, 가장 중요한 원인이 이것 때문입니다. 분노한 것입니다. 마음이 막 끓어오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분노와 헷갈리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 그 바탕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격분한 것입니다.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화를 내면 평정심이 무너지고 말이나 생각이 함부로 막 나갑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이미 격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할 때 그 시작이 격분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어떻게 변론하는지 살펴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복음 전하는데 격분한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변론이 무엇입니까?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그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가르치려 듭니까, 아니면 기도합니까? 기도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꾸 변론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르쳐도 안 먹힙니다. 자기만 잘났습니까? 아테네가 전부 다 철학자들인데, 여기에 전부 다 철학자들이요 소피스트들인데요.

18절에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사람들도"라고 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소피스트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인 스토아 학파, 쾌락주의자들인 에피쿠로스 학파, 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과 지금 무엇을 합니까? 아까 변론하다가 이제는 어떻게 됩니까? 쟁론으로 바뀝니다. 쟁론은 '공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토론하다가, 변론은 토론이거든요, 서로 토론하다가 그 다음에는 공격이 막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요? 격분했기 때문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면 공격할 수 있습니까? "아,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다. 나는 전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화내면서 시작하니까 변론하다가 그 다음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말쟁이라고 해버립니다. "말은 잘하네, 말은 잘하네." 왜 그렇습니까? 공격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논리적이고 똑똑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말쟁이가"라고 하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실패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34절을 한번 보십시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몇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단 한 영혼이라도 중요합니다. 단 한 영혼이라도 소중하고, 구원받았다는 자체가 너무나 귀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급합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 지금까지 바울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서 열심히 복음 전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한 것에 비하면 '몇 사람', 이것은 복음 전도의 실패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서 몇 사람이라면 이것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격분하고 변론하다가 공격하고 쟁론해서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쟁이가!" 그래서 몇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그 비참함을 안고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을 한번 봅시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하러 왔다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어떻게 하신다고요? 긍휼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영혼을 사랑하고 이 사람을 전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긍휼한 마음은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참 신비로운 것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정말 희한한 것인데,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이렇게 얘기해도 그렇게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분의 상황이 느껴지고, 그분이 지금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도우셔야 된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긍휼한 마음을 주십니다.

긍휼한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공격합니까? 함부로 어떻게 변론합니까? 가르치려 듭니까? 품어주게 되고, 기다려 주게 되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손 한번 꼭 붙잡아 주게 됩니다. 백 마디 말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전도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고린도로 왔습니다.

1-3. 성령의 능력으로

아테네에서의 실패의 교훈을 안고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으며, 그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겠습니까?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즉 이제 고린도에 온 것입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분노하고 화를 내면 그 영향이 고스란히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실패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막 했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니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내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화를 내면, 그런데 화는 입으로만 냅니까? 아닙니다. 눈으로도 화내고, 몸짓으로도 화내고, 그 분위기로도 '나 지금 삐졌어, 나 지금 화났어' 하는 것을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자기만 손해입니다.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내 말, 내 전도함', 자기가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말했고 내가 전도했고, 자기가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무엇입니까? 철학입니다. 세상 지혜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실패합니다. 내 말로 하고,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해도 다 실패했습니다. 내 손으로 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겠다"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결단하고 기도하고 소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성령의 능력으로 한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잘 헷갈려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요. 성령의 능력으로 한다는 것은 기도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뒤에 계속 나옵니다.

2. 하나님의 지혜

2-1. 감추어진 비밀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6절에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장성하다'는 뜻입니다. 장성하다, 이제 충분하게 믿음이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철학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통치자들의 지혜가 왜 없어집니까? 로마 황제, 로마 황제가 지혜로 다스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 황제가 나타나면 앞의 황제를 다 지워버립니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 황제가 나타나면 앞의 황제의 흉상, 동상을 다 없애버립니다. 자기 이름 나타내려고요. 없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도 고작 5년 하는 대통령도 앞 대통령을 다 지우고 다 없애고 합니다. 자기 치적 나타내려고요. 고작 4년 하는 국회의원도 그렇게 합니다. 전부 다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전부 다요. 철학도 유행을 타지 않습니까?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7절에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다고요? 은밀한 가운데입니다.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왜 은밀하고 왜 감추어져 있을까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집에 100만 원짜리 수표를 함부로 그냥 던져 놓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가락만 한 다이아몬드를 그냥 땅바닥에 던져 놓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딘가 소중한 데 감추어 둡니다. 차고 다니지는 않아도 한 번씩 꺼내 보려고, 자기만족에 목에 걸어 보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소중합니다. 아주아주 중요한 비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추어져 있으면, 영영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버리면 못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찾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2-2. 말씀과 기도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언어를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언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소통하려면 어떤 언어로 소통합니까? 하나님의 언어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말씀이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성경, 선포된 말씀은 설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그러면 그 언어를 내가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요. 그러면 나는 거기에 반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기도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은 서로 정맥과 동맥처럼, 들어가는 피와 나가는 피처럼, 항상 원활하게 흘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강한 것입니다. 하나가 막혀 있으면 건강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도 원활하고 기도도 원활하고, 말씀과 기도가 서로 원활하게 소통되어야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서로 언어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활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한번 봅시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자라려면 젖을 먹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그 젖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먹어야 성장하고 자랍니다.

그런데 말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말씀만 가지고 왜 안 되냐 하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31절과 32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2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요.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수난예고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요. 마가복음 9장쯤 되면 앞에 8장까지 다 전개됐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제자훈련 하시고 기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지속적으로 선포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묻기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은 계속 듣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제자들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계속 듣는데, 체할 만큼 제일 만큼 많이 듣는데, 기도하지 않으니까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물어보면 혼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그때 예수님께서 그래도 선택하신 세 명의 제자가 다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계속해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계속 피곤해서 잤습니다.

제자들이 진짜 기도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 승천하시고 나서입니다. 승천하고 난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니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이때까지 들었던 말씀이 하나로 쭉 꿰어지는 것입니다. 구슬도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말씀을 꿰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말씀으로, 신령한 젖같이 임했는데, 우리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들추어내고 내 것으로 만들고, 그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고 교회 공동체를 덕스럽게 하고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은 듣는데 기도하지 않고, 기도는 하는데 말씀 듣지 않고, 말씀을 제외하고 기도만 하는 분들은 무엇입니까? 재료 없이 불만 잡고 붙이는 것입니다. 장작이 넓은데 불만 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꺼집니다. 어디 가서 신문지 같은 것 구해다가 태우면 금방 타버립니다. 굵다란 장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작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장작을 준비하고 기도의 불을 붙이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2-3. 영적 분별력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영적인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인데, 그것이 말씀과 기도 아닙니까?

요한복음 4장 23절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했고,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변치 않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말씀입니다. 영은 무엇입니까? 성령이지요.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이시니까 우리도 영으로 예배드리라는 것,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과 소통하라는 뜻입니다. 예배도 말씀과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여기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전도가 영적인 일입니까, 육적인 일입니까? 영적인 일이지요. 영혼을 다루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이 영적인 일을 기도하고 했습니까, 아니면 자기 분노로 했습니까? 자기 분노로 했습니다. 그러니 실패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 전도하는 것은 영적인 일로 분별하라, 즉 전도라는 이 영적인 일은 기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전도부가 전도하러 나갑니다. 나가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도부의 기도, 나가서 이 양산 지역의 악한 사탄의 영과 대적해서 싸워 이기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 말입니다. 영적인 일이니까요.

전도가 영적인 일이면, 예배는 영적인 일입니까, 육적인 일입니까? 영적인 일이지요.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서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장과 일터에 나가서 돈 벌고 땀 흘리는 것, 이것은 영적인 일입니까, 육적인 일입니까? 그것을 육적인 일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영적인 일입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직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직업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것은 내가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거룩한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도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모든 일이기에 영적인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학교 가는 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을 위해서요. 중요하니까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값지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분리주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 따로, 육의 일 따로, 딱 분리하는 것이지요. 이원론자들입니다. 분리하는 사람들은 세상 일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돈 버는 일을 자기 지혜로 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합니다. 교회 와서 하는 것만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일은요.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어리석게 볼까요? 계약을 앞두고,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기도하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로비 해야지!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있으면 그 계약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에게 가서 돈도 주고 접대도 하고 술도 먹이고 밥도 먹이고 로비 해야지. 그것 예배당에 앉아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금요일 날 부르짖고 새벽에 기도하고 눈이 빨개져서 하루 종일 피곤하다고 돌아다니는 것!" 그것이 미련한 짓이라고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적인 일이라고 보니까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모든 일이 영적인 일이니까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승리하면 값진 승리 아닙니까? 그것이 간증 아닙니까?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터에서, 세상에서, 육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일을 영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세상 가운데 나가서 승리하는 경험 한두 가지만 해 본다면 그들이 재미를 느낍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재미있고, 직장생활도 재미있고, 학교도 재미있고, 다 재미있습니다.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되네!" 그러면 그 아이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세상 방식이 이러니까 어떡하겠니? 그런데 너무 멀리 가지는 마, 너무 깊이 가지는 마"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영의 일과 육의 일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 밥 먹는 것도 영의 일이고, 잠자는 것도 영의 일이고, 다 영의 일입니다. 그래서 잠도 잘 자야 하고, 밥도 잘 먹어야 하고, TV 프로그램도 다 함부로 아무거나 보면 안 됩니다. 다 영의 일이니까요.

그 다음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자, 지혜자이지요.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된 자는 모든 것을 판단, 즉 분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내가 신령한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넌 미련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를 지혜롭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 교회 공동체의 문제

3-1. 시기와 분쟁

그 다음 페이지입니다. 이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책망합니다. 3절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왜요? 고린도 교회가 왜 육신에 속한 자입니까? 왜 영에 속한 자가 아닙니까? 왜 하나님의 지혜에 사로잡힌 자가 아닙니까?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에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요"라고 합니다.

시기와 분쟁,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면 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하면 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지고 바울파, 아볼로파로 나눠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도 사라지고 기도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생기면 딱 한 가지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있으면 그 안에 용광로처럼 단련해 버립니다. 문제가 좀 있어도, 좀 서운해도, 목사님에게 섭섭한 것이 좀 들어가도, 서운한 것 있고, 기분 나쁜 것도 있고, 불편한 것 있어도, 기도하다 보면 다 녹아집니다. 거기에 말씀 듣다 보면 다 이해됩니다. 저 권사님, 저 장로님, 저 집사님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도 기도하다 보면 내가 보입니다. "내가, 나는 더한 사람이다. 내 꼴이 보인다"고요. 그러면 다 용서되고 다 이해됩니다. 이해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싸웁니다. 사나워집니다. 바울이 분노하고 격분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3-2. 메시지와 메신저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메시지와 메신저를 구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메신저를 주목합니다. 메신저, 말하는 사람입니다. 잘하는 사람, 메신저가 카리스마가 넘치고 설득력 있게 말을 하면 그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멋있습니다. 그냥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신저가 조금 모자라고 부족해도 메시지의 내용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냐, 이것이 복음이냐. 말을 조금 더듬어도, 조금 느려도, 좀 재미가 없어도 메시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메시지를 보지 않고 메신저를 본 것은 이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 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냥 내 편 네 편 나눠져서 싸우는 것입니다.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역자라고 하지요. 저도 사역자 아닙니까? 우리 목사님들 다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사역자의 본뜻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섬기는 자, 시종이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자, 시종, 종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종입니다. 우리 교회의 큰 종이요, 저 뒤에 작은 종들이 좀 계시고,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고요, 성도들을 섬기는 종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자꾸 종을 떠받들어 주고 잘 대우해 주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아서 하나님 밀고 서고, 성도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서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종이 감히 종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가 주인 노릇 합니다. 그 종은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입니다. 가장 심하게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종 중에도 가장 큰 종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 발 씻어 주시는 것을요.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라는 직분, 그것이 무엇이라고 어깨에 힘들어가고 목이 빳빳해집니까? 목사,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다 종들입니다. 전부 다요. 제일 열심히 뛰어다니고 제일 열심히 섬기고, 목사는 말씀으로 섬기고 심방으로 섬기고 상담으로 섬기고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사 위한다고 "목사님 바쁘신데, 시간 없으신데" 합니다. 뭐, 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할 것 다 하고 삽니다. 그래도 종을 그렇게 부리면 안 됩니다. 뺑뺑이 막 돌리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이 종들이 천국 가서 칭찬 받습니다. "넌 뭐 하다 왔냐?" 그러면 책망만 받지 뭐 하겠습니까? 성도들이 버릇 잘못 들여서 종들을 떠받들어 성도들 버릇만 나빠지게 만들어서 종이 상전인 줄 알고, 세상에 큰일 날 일입니다.

지금 바울이 바울파, 아볼로파 갈라먹고, 저 사람 추앙하고, 아볼로 따르고 바울 따르고 하니까, "야, 우리는 다 너희 섬기는 종들이다. 우리가 너희를 섬기는 종들인데, 왜 너희가 우리를 높이고, 왜 너희가 우리를 떠받들고, 교회가 갈라지고 비방하고 시기하고 다투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면 큰일 납니다. 우리 교육 전도사님들부터 안 됩니다. 바울이 그 정체성을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3-3.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목사가 별볼일 없는 설교하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은혜를 주셔서 성도들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것도 모르고 심방하고 돌보고 섬기고 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성장하고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부 다요.

그리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때와 시기도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었으니까 당장 자라기를 바랍니다. 물 주니까 빨리 자라라고 코앞에 바짝 앉아서 계속해서 재촉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일입니다. 우리 자녀들, 심고 물 주면 하나님이 때가 되면 자라게 하십니다.

열심히 물 주고 열심히 심고 한국 교회가요, 옛날 60년대, 70년대 농촌교회에서 심고 물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고, 도시 교회로 다 옮겨오게 하셨고, 도시교회가 부흥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도시 교회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배당 지은 것 빼고요. 그것도 자기들이 지었습니까? 성도들이 피땀 흘린 헌금으로 지었지요. 하나님이 다 하신 일입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8절에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한 가지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일한 대로, 일한 대로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심고 열심히 물 주면 사역자들, 종들은 자기가 일한 대로 상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동역자들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교회입니다. 성도들, 고린도 교회는 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합니다.

4. 사역자의 책임

4-1. 터를 닦는 자

사역자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는 터 닦는 사람입니다. 터를 닦아두는 것이지요.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합니다. 11절도 읽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터를 닦았습니다. 심고 터 닦고 갔는데, 그 터는 바울의 터가 아닙니다. 바울이 자기 철학으로 터 닦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닦으려고 하다가 아테네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닦은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입니다. 그 위에 누가 집을 짓습니까? 아볼로가 집을 짓는데, 바울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시면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볼로, 너 조심해서 집을 지으라는 말입니다. 왜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세우는데 그리스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아볼로라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리스도만 드러나도록 사역자들은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은, 목회자들은, 종이 주인보다 더 유명해지면 됩니까? 종이 주인보다 앞설 수 있습니까? 종이 주인의 영광을 가로채 올 수 있습니까? 맞아 죽을 짓이지요.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아볼로에게 슬쩍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4-2. 불의 시험

이제 사역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나오는데요.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여기서 '누구든지' 할 때 누구는 사역자들, 종들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했습니다. 여섯 가지 재료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여섯 가지 재료가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어떻게 갈라집니까? 금, 은, 보석이 A 그룹, 나무, 짚, 풀이 B 그룹입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B 그룹을 보십시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즉 사역자들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라고 했습니다. 불을 한번 질러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요. 불을 한번 탁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는 것은 무엇이 탑니까? 나무, 풀, 짚 다 타고 없어지는 것이지요. 다 타고 없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금, 은, 보석으로 터 위에 집을 지으면 상 받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사역자들은 이렇게 심판 받는 것입니다. 나무와 풀과 짚 다 타버리면 자기가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봐 주십니다. 하나님이요.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허전하게 비참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즉 없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것. 사역자가, 목회자인 제가 우리 교회에서 목회하고 기도하고 사역하면서 없어지지 않을 금과 은과 보석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자기 스스로 믿음 생활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어떤 불 시험에도, 우리 성도들의 시험하는 어떤 불 시험에도 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남을 금과 은과 보석 같은 것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과 기도밖에 되어 있습니까?

4-3. 자녀를 위한 기도

우리 성도들 삶의 자리에 시험들이 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시험을 없애 달라고, 저한테 오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피하게 해주세요"라고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살다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저 깊은 수렁까지 내려갈 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내버려 두십니다. 그런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너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어 놓으면 우리 성도들 거기서 다 타버립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이 종들이 말씀과 기도로 성도들을 세워 놓으면 사망의 불 시험을 잘 통과합니다.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그것을 하라는 얘기입니다.

자, 이것이 목회자에게만 적용됩니까? 우리 가정의 부모님들, 자녀들에게 너무나 풀이나 짚, 아기돼지 삼형제 집 짓는 것처럼요? 벽돌로 집 지어야지, 불면 날아갈 지푸라기, 때리면 부서질 나무, 그런 것으로 집 지으면 안 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것으로 우리 자녀들에게요. 부모가 영원토록 평생토록 지켜줄 수 있습니까, 이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내 아이들, 내 손주들,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지요. 그 아이들에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그 말씀 붙잡고 견뎌내고 이겨내고, 그 아이들에게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영롱한 것들을 우리가 남겨 줘야지요. 그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돈은 이따가도 없는 것이고요. 사업 한번 하다가 망하면 끝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것 남겨줬다고 나 할 일 다 했다? 정말 어리석은 부모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할 일이 남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숨 다하는 날까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성도의 정체성

5-1. 하나님의 성전

그래서 심판을 경고하다, 바울은 이제 성도로 갑니다. 이것을 잘 보세요. 바울이 교회 얘기했지요. 그런데 이제 성도 한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왜요? 성도 한 사람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저는 견딜 수 없는 것이요, 우리 교회 마당으로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담배 물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가서, 제가 쫓아가서 뭐라고 합니다. "여기 교회인데, 여기 예배당 마당인데 불 끄시라고, 이쪽으로 이렇게 지나다니시면 안 된다"고 제가 막 쫓아가서 얘기합니다. 싸우자고 달려드는 분도 있고, 그냥 끄고 가시는 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담뱃불 피워서 막 다니면 안 됩니다. 성전 안에 들어와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성전 안에 들어와서 음주 가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요.

그런데 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인데 이 성전에 담배 연기를 집어넣고 알코올을 집어넣고, 하나님의 성전을 함부로 막 대합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살아가는 환경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니까요.

5-2. 기도하는 집

그러면 이 성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마태복음 21장 12절과 13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성전 안에 매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돈벌이 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 정화 사건, 유명하지요.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성전의 본질입니다. 기도하는 집.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성전이 이 꼴이 되니까 예수님이 다 쫓아내고 뒤집어엎으셨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성전에는 무엇이 살고 있습니까? 내 마음 중심에는 강도가 몇 마리쯤 있습니까? 강도가, 탐욕의 강도도 있고, 음란의 강도도 있고, 하나님 아닌 강도들, 도둑들이 이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다 쫓아내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해야지요.

이 성전이,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켰는데, 내가 곧 성전이니까 내 영을 정결한 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고, 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즉 내 몸을, 내 영을 더럽히면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결하게 잘 지켜야 합니다.

5-3. 어리석은 자가 되라

성도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역설이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누구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는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 그러니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 것인데 왜 자랑하고 뻐기고 그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이렇게 정리됩니다. 잘 기억하시고, 그냥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또 설명 들었으니까 집에 가서 다시 읽고 또 은혜 받고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