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3 - 고난에 대처하기 (고전 4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특강 세 번째 시간입니다. '고난에 대처하기'라는 제목으로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굉장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공중에 붕 뜬 사변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어떻게 믿음으로 해결하고 풀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요즘 교회도 문제가 많지만, 사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보면 요즘 교회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고린도교회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 성질 같으면 그냥 쓸어버리고 싶은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그 교회를 계속해서 세우시고 말씀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책망도 하시고, 때로는 잘하는 것은 잘하는 대로 인정도 하십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사실 남은 잘 모르지만 내가 나를 잘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한 적이 없고, 계속해서 세워 가시고 북돋아 가시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4장 말씀은 사역자들과 교회에 대한 관계, 그리고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에 대한 이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1. 사도의 정체성
1-1. 그리스도의 일꾼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지난 시간에 사도들이 시종이라고 했습니다.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섬기는 자, 시종입니다. 같은 맥락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이렇게 나뉘어서 싸우니까 사역자들은 그냥 종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4장은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의 종이냐를 설명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여기서 '사람'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입니다. 너희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우리를,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역자들, 바울과 아볼로와 디모데 등의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휘페레테스(ὑπηρέτης), 종입니다. 지난 시간에 디아코노스를 시종이라고 말한 것처럼, 휘페레테스도 종인데 시종보다 조금 더 하등한, 조금 더 열등한, 조금 더 열심히 일하는 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일꾼 즉 종이라고 했는데 누구의 종입니까? 사람의 종입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사역자들, 바울과 아볼로 같은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인데 어떤 일을 하는 종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임무를 주셨을 것 아닙니까? 어떤 일을 하는 종들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비밀입니까?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그 사역자들에게만 알려준 비밀입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자들이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한테만 말씀하셨다. 나에게만 와서 들어야 된다. 하나님은 특별한 계시를 나에게만 주셨다." 이단이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이 세상의 종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를 하나님이 나에게만 알려 주셨다" 하면서 계속 성도들을 세뇌시키고 교육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이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다 알려진 비밀, 알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십자가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 읽어 본 사람, 읽더라도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밀입니다. 왜요? 들춰보지도 않았는데 그 진실을 알 턱이 있습니까? 들춰보고 성경을 읽었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말씀의 능력과 말씀의 놀라운 역사를 알 수 있습니까? 알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인 것입니다.
정말 신기하지요. 성경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집에 가보십시오. 여기저기 던져져 있는 성경책을 다 꺼내 보십시오. 성경책은 버리기가 마음에 좀 꺼려져서 버릴 수는 없고, 지금까지 수십 년 신앙생활하면서 모아놓은 성경책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했고,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비밀인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내고 부딪쳐보고 말씀대로 한번 투쟁해 본 사람에게는 비밀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런 것입니다. 너무너무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잘못 가르치는 이단들이 "거봐,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이라 그랬지. 그 말씀을 맡은 사람이 나 같은 사역자들이야. 너희들 일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알려질 수 없다. 나한테 와서만 배워야 된다." 그게 이단입니다. 큰일납니다. 그렇게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고 따라가는 자에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런데 먼저 깨달은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먼저 말씀을 읽고 먼저 말씀대로 살아보고 말씀에 헌신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위탁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나오죠, '맡은 자'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 관리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맡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그냥 꽁꽁 싸매어두고 자기만 알고 자기만 읽고 자기만 경험하고 "이렇게 경험하니 좋네, 내가 은혜받고 구원받았네" 하며 가두어놓고 있으면 됩니까? 안 되지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전하고 권면하고 살아보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목회자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부역장도 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도 되고, 다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와 아볼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고 먹이고 돌보는 맡은 자, 오이코노모스다, 관리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1-2. 말씀에 충성
그다음, 그런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무엇을 맡은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 비밀,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충성입니다. 피스토스(πιστός), 신실함, 진실함이란 뜻이죠. 누구에게 신실하고 누구에게 진실해야 됩니까? 하나님에게,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에게 진실해야 됩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입으로만 신실하고 입으로만 가르친다는 게 아닙니다. 사역자들은 삶으로 살아내서 보여 줘야 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딱 보여 줘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보여주어야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면 그 말씀 가지고 살아갈 용기와 동기부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이 땅에 왜 이렇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말씀에 충성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충성된다는 것은 말씀대로 앞서 살아가고 그 말씀을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지금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당연히 나타나지요. 역설의 진리가 우리 삶에 나타나고 우리 인생에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말씀에 충성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입으로만 자꾸 하고 삶이 따라가지 않고 행동이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행동은 세상 가치관을 따릅니다. 행동은 세상의 세파를 따라가고, 교회도 세상 따라가고, 목회자도 세상 따라가니 어떻게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말씀에 충성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요.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성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을 섬기라고. 그래서 양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셨습니다.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고. 그래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시키니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존심이 없어서, 바울이 못 배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떤 착각을 하면 안 됩니까? "저 바울이, 저 아볼로가 우리에게 마치 종처럼 하네. 다 섬겨주고 다 해주고 다 도와주니까 마치 내 종처럼 자기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종인데, 그리스도의 일꾼인데, 말씀에 충성되어서 저렇게 하는 것이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목회자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은 말씀에 충성하는 목회자를 봐야 합니다. 자기 밑에 두려고 하고, 자기 휘하에 두려고 하고, 마치 오늘날 교회 목회자를 그냥 기업의 CEO처럼 부리고 고용하고 내쫓고 자기 입맛대로 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것은 기업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1-3. 하나님께 판단받음
그다음 바울은 누구에게 평가받는다고 말합니까? 3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무슨 말일까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이런저런 입을 댈 것 아닙니까?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잖아요. 말씀에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 입맛에 맞을 턱이 있습니까? 좀 강하게 보일 때도 있고,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고, 타협이 없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부드럽고 유들유들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렇게 살면 좋겠는데, 너무 경직되고 너무 딱딱하고 너무 원리원칙대로 하시니 불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바울에 대해서 이런저런 판단을 하고 말을 하는데, 바울은 "판단받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너희 성도들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 왜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나는 말씀대로 살고 말씀에 충성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4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 스스로 책망할 것은 하나도 없다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아무리 자책해도 자기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주시라." 왜요? 그리스도의 종이니까, 예수님의 종이니까 예수님이 판단할 것 아닙니까? 충성되었는지 충성되지 않았는지, 무엇에? 말씀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즉 종말의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참 바울 같은 사람이 참 특별한 사람인데요. 여러분,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이렇게 일하려고 할 때 욕먹는 것 걱정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욕 좀 먹어도 됩니다. 욕먹는 것 가볍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 말씀대로 하다가 오해받고 욕먹을 수 있지요. 나는 욕먹기 싫어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서 뭘 못하고 안 하면 사탄이 그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욕먹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말씀에 충성된데 욕 좀 먹으면 되지, 그까짓것 괜찮습니다.
욕먹는 것을 목회자도 겁내면 안 되고, 중직들도 그렇고,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욕먹는 것 겁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에게 책망받고 사람들에게 판단받는 것 겁내기 시작하면, 하나님 일 하나도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반대자가 있었고, 모세도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바울도 매일같이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뭐라고 100% 지지를 다 받으려고 합니까?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보십시오. 50% 넘어서 대통령 되는 사람이 많이 있던가요? 지금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절반도 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통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일에 충성되고 하나님 말씀에 충성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면 정치하지 왜 목회합니까? 세상으로 나가지 왜 교회에서 일합니까? 정치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 말씀에 충성되어 사는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판단받는 것, 그까짓것 괜찮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것하고 구원하고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2. 교만에 대한 경고
2-1. 말씀의 선을 넘지 말라
6절로 넘어가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아볼로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친 내용을 바울이 간단하게 한 줄로 딱 정리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선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선을 넘지 말라. 말씀의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대적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꾸로 교만하니까 말씀의 선을 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아주 강한 사람인데,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가려고 할 때 에베소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계속 못 가게 하십니다. 어디로 오게 합니까? 유럽으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꿈에 환상 중에 나타나서 유럽으로 건너오게 하십니다. 바울이 철저하게 딱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선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고집이 어마어마하게 센 사람인데 선을 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니까, 기록된 말씀, 들려주시는 말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의 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떻게 합니까? 자꾸 선을 넘게 만듭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가서 선악과 먹으라 그러지 않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 그게 선입니다. 말씀의 선입니다. 그런데 사탄, 뱀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에 그려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먹어버립니다. 선을 넘지 않는 것, 말씀의 선을 넘지 않는 것, 이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말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고,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얘기입니다. 말씀은 곧 그리스도요,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까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자기 교만이 있으니까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투고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2-2.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
7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교만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게 뭐가 생략되었습니까? 누구에게 받지 아니한 것? 하나님에게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이 말입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자기 능력으로 다 가진 것처럼 막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인데, 물질도, 건강도, 지혜도, 지식도, 가족도, 자녀도, 기업도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인데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이죠. 그게 교만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선 넘는 것입니다.
욥기 1장 21절과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어떤 맥락에서 이 말씀이 나온 것입니까? 욥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였습니다. 물질도, 가족도, 부귀영화, 권세 다 가졌는데 한순간에 다 날아갔습니다. 다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때 욥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오니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절대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전입니다. 이제 본전인 것입니다. 다 잃고 나서 본전인 것입니다. 욥은 왜요? 어머니 모태에서 나올 때 벌거벗은 적신으로 나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고백은 정말 위대한 고백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요. 우리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정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입으로는 할 수 있어도 진짜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억울하고 분하고 화나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교만이라고요. 그래서 바울이 교만의 정의를 굉장히 높여 놓았습니다. 수준을요. 전부 다 하나님 것이라 했습니다. 전부 다요. 왜요? 생명이 하나님 것이니까요. 근원 자체가 하나님 것입니다. 호흡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그다음 주어지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맞지요?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가져가시면 억울하고 분하고 잠 못 자고 견딜 수 없고 미칠 것 같고 그렇게 됩니다.
2-3. 왕으로 고백하라
성도들을 비꼬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즉 사역자들 없이도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비꼬는 것입니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왕 노릇해라." 지금 교회 성도들을 비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진짜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왕 놀이입니다. 자기 인생에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오가면서 신앙은 내 마음에 왕으로 자리하는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의 생활상, 사사시대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정치적 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무슨 말입니까? 다 자기가 왕이었단 말입니다. 자기가 왕 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집에 신상 만들어 놓고 그것을 부어 섬기는 사람, 제사장을 집에 두고 사는 사람, 제사장이 돈에 미쳐서 다 버리고 떠나는 사람, 전부 다 자기가 왕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축약적으로 하는 말씀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진짜 기뻐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즐거워하셨던 때가 언제 가장 기뻐하셨을까요? 그렇죠,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너무 잘한 말씀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이 어딘가요? 가이사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이 빌립보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가 헤롯에게 선물로 준 도시입니다. 나중에 헤롯 빌립 2세라는 사람이 그 도시를 리모델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짜 가이사의 도시로 황제의 흉상과 황제의 동상과 황제의 신전을 가득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랴라는 도시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항구입니다. 그 항구와 구별하기 위해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이렇게 사방으로 다 둘러보면 전부 황제의 우상입니다. 황제의 신전도 있고, 황제의 동상도 있고, 황제의 흉상도 있고, 전부 다 황제 도시입니다. 거기에서 왕은 누구다? 로마 황제입니다. 물론 전체가 로마 황제이죠.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사니까요. 그런데 그 도시는 특별히 로마 황제를 위해서 특화된 도시입니다. 황제에게 진상된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 가서 예수님이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 "그런 것 필요 없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얘기하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예수님 당신은 왕입니다" 이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제사장입니다, 이 중에 가장 위대한 고백은 "당신이 왕입니다"입니다. 여기 이 흉상의 주인이 왕이 아니고, 여기 이 가이사가 왕이 아니고,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고, 당신이 왕입니다, 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예수님이 받고 너무너무 기뻐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어부 베드로를 불러다가 예수님 제자로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켜서 중간고사를 치른 것입니다. "자, 중간고사 한번 쳐보자. 문제 하나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난 누구니?" 거기서 정답을 쓴 것입니다. 100점짜리 정답을요. 물론 그 정답대로 베드로가 살지 못해도 예수님은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걸 이해가 깨달았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시죠. 마태복음 16장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신약 성경에 최초로 나오는 교회 언급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베드로가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했습니다.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교회 지어 보셨습니까? 교회 지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어릴 때 우리 시골 마을에서 벽돌 져 나르고 흙 나르고 돌 쌓고 교회 지어 봤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제가 교회 짓는데 건축헌금을 열심히 했습니다. 교회 지었습니다." 물론 교회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교회를 짓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신앙고백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순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순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겠습니다 고백하는 순간, 그때 교회를 짓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너희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 자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교회 짓는 것입니다.
헌금 많이 해서 교회 짓는 것, 돈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회의에 빠지고 시련에 빠지고 낙심합니다. 왜요? 건축하는데 나는 헌금 못 하니까, 가난해서 내 자식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교회 헌금 하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는 맨날 헌금하라 그럽니다. "맨날 평생 살면서 이런 기회가 한두 번 오는 게 아닙니다" 뭐 어쩌고저쩌고 맨날 헌금하라 그러고 맨날 그럽니다. 미치겠습니다. 갈등됩니다. 그러면 자기 절망에 빠집니다. "내가, 나는 교회도 짓지 못하고 하나님의 교회 짓는 데 한 푼 보태지도 못하면 나는 신앙의 패배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 가서 기도 못하고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주어졌습니다. 어쨌든 그러면 거기에 가기가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왜요? 나는 여기에 기여한 것이 없으니까. 나는 이 건물 벽돌 하나 기여한 것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기여하고 다른 사람이 헌금 많이 한 것으로 내가 이 건물에 발디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스스로 정죄 의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워낙 목회자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 우려먹어서 죄책감 많이 갖게 하는 것이죠. 예배당이 너무 화려해서 여기에는 내가 발 디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 아픈 것 아닙니까?
진짜 교회는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신앙고백으로 짓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헌금 많이 해서 교회 지었습니까? 신약 성경에 교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이것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얼마나 기분 좋으셨으면 이런 말씀 하셨을까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교회 짓는 것입니다. 그것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몇백만 원, 몇 천만 원 내지 못해도 우리 그것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왕으로 모셔보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 아버지다, 나는 말씀 붙잡고 살겠다, 그러면 내가 교회 짓는 것입니다. 한 번에 안 됩니다. 매일매일 벽돌 쌓아가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평생을 한번 멋진 성전 지어 보십시오. 그 멋진 성전에 내 자녀들이 살고, 그 아름다운 성전에 내 가정이 다 거기 살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비꼽습니다. 너희가 왕이라고? 다 교회 안에 모여 살면서 서로 다 잘났다고, 다 왕 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자기가 잘났다고요.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교회가 아닙니다. 진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면 내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런 교회 한번 세워 봅시다. 그래서 전부 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그런 멋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 달린" 자기 이름의 교회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돈으로 짓는 교회 말고요.
3. 사도들의 고난
3-1. 끄트머리의 자리
사도인 바울과 동역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제 여기서부터 이 사도들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고난이 나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건대" 자기가, 바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음이니 우리는 세상에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것은 그 옛날에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가 싸우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자들 막 나올 때 예수 믿는 사람들 쭉 줄 세우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 제일 불리합니다. 끄트머리에요. 사자들 밥에 딱 좋습니다.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요. 도망가도 앞에 있어야 빨리 도망가야 되는데 제일 끝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인 우리가 끄트머리에 있다" 나오죠. 하나님이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너부터 먼저 죽어라 하면서 하나님이 사도들을 원형 경기장 거기에 제일 끝에 두신 것입니다. 짐승들 탁 나오면 사자의 밥이 제일 먼저 되라고요.
10절,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계속해서 바울이 비꼽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요.
자, 보십시오. '말미암아'라는 말하고요, '안에서'라는 말이 대비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이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리석습니다. 여기 '말미암아'는 헬라어 전치사 디아(διά)라는 것을 쓰는데요, 디아는 '통과해서'라는 뜻입니다. 완전히 관통해서, 통과해서입니다. 저게 무슨 말이냐? 나는,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기 전에는 나는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바울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관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서 통과하고 나니까 아, 나도 모르게 내가 바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요. 이 엔(ἐν)이라는 말은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지금 여기서 엔은 '수단으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수단으로요. 엔, 수단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아서 지혜롭게, 교회 안에서 예수를 수단으로 삼아서 돈벌이하고, 예수를 수단으로 삼아서 사람 사귀고, 그런 사람 많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바보가 되었고 너희는 그리스도를 발판으로, 수단으로 삼아서 지혜롭게 되었네" 비꼬는 것이죠.
3-2. 그리스도를 통과하라
"우리는 약하나" 여기 빠진 게 뭡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를 통과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과하니 약해져 버렸습니다. 원래 강한 사람인데 바울이요. 너희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아서 더 강해지고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과하니 비천해졌는데,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수단으로 삼아서 존귀해졌구나!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비천해지고,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바보가 되고 약해지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아서 더 강해지고,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아서 더 높아지려 하십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약해지고 내가 비참해지고 내가 비천에 처해도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될 것 아닙니까? 여기 그리스도를 통과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통과하고 예수 제대로 만나면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멍해지고 바보같이 되고, 누가 뭐라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냥 손해 보고 바보같이 살고요.
11절과 12절,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왜요? 무엇 때문에요? 그리스도를 통과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관통했기 때문에. 그래서 저 사람이 진짜 십자가를 관통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내가 혈기가 없어서 성질 못 부리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에서 정말 똑똑하지 않아서 잘난 체 안 하는 게 아니고, 입이 없어서 말 안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참고 바보처럼 믿고 견디고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 만나고 십자가 통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 영혼이라도 전도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평안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오해받더라도 사람들 영혼들을 살릴 수 있으면, 그게 값진 것 아닙니까?
4. 본받음의 권면
4-1. 복음으로 낳은 자녀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14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어떻게 권하는 것입니까? 너희도 그리스도를 통과하라. 그리스도를 이용해 먹지 말고 제발 좀 예수님 이용해서 교회 안에서 돈벌이하지 말고, 예수님 이용해서 잘난 척하지 말고, 예수 이용해서 자꾸 세상처럼 높아지려고 하지 마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뒤에 얘기하죠.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아비의 심정으로 지금 책망하는 것입니다. 왜요? 개척 목사니까, 피눈물로 이 교회를 개척했으니까요.
바울은 이 교회만 가지고 이렇게 얘기한 게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과 7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이라는 것 기억하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할례 때문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한 교회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다 갈라디아 벨트입니다. 그런데 그 갈라디아 지역에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가서 복음 전할 때 "할례받지 않아도 너희들 구원받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온 유대인들이 "할례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다 할례받는 것입니다. 다 유대교 형식주의로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떠나서요.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따른다,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너희를 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말하느냐? 갈라디아서 4장 19절과 20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어조를 바꾸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요?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어조를 바꾸려 한다. 왜요? 복음 안에서 너희를 낳았으니까요. 그리스도 안에 일만 선생은 많습니다. 스승은 많죠. 가르치는 사람은 많죠. 그런데 아비는 많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 안에서 너희를 낳았기 때문에,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면 내가 다시 가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너희와 싸워가며 다시 복음을 전하겠다, 이 결단입니다.
지금 바울이 같은 마음으로 고린도교회에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선생이 아니라 아비다. 복음을 위하여,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으니까 이렇게 너희가 사는 것을 나는 보고 견딜 수 없다. 제대로 내가 다시 가르쳐 주마. 바울이 그렇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 영혼을 향한 마음입니다. 진돗개처럼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살든지 말든지 자기야, 지옥 가든지 말든지, 저렇게 살다가 죽든지 말든지, 나도 이제 피곤하고 지치고" 이런 마음 가지시면 안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바울처럼 계속 지속적으로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계속해서 또 가고 또 가고 또 물어뜯고, 사탄이 이 인간하고 도저히 두려워서 못 하겠다고 사탄이 도망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런 분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요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4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1장 1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립보서 3장 17절에도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이 본받으라 한 것,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통과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고요,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요. 그러면 여기 본받으라는 말의 핵심, 그리스도를 통과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고난받으라는 뜻입니다. 고난 받으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제대로 받으면 흐물흐물해집니다. 고난을 제대로 받으면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자식들에게 고난 받으라고 말합니까? 고난 좀 안 받으면 좋겠다 생각하죠. 고난 좀 받지 말고 그냥 편하게 예쁘게 우아하게 귀하게 살기를 원하죠. 그런데 진짜 자녀로 사랑하면 십자가 져라 해야 합니다. 거룩한 십자가 져라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바울처럼 이렇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고난의 길을 부모가 나서서 막아주면 그것은 구원을 막는 것입니다. 큰일납니다. 그런 짓 하면 큰일나요.
4-2. 하나님 나라의 능력
그다음 페이지 넘겨서 17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디모데가 갔습니다. 먼저 바울이 지금 못 가고 디모데를 먼저 보냈습니다. 디모데 숙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리라."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용해 먹는 너희여, 그리스도를 통과하게 할 것이다. 디모데가 가서 그 사명을 가지고 가서 다시 고린도교회를 복음 위에 세우는 것이죠.
자 19절,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이제 디모데가 갔습니다. 그다음 여건이 되면,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진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아보겠다. 겁주는 것입니다.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여러분, 능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그래서 말만 막 번지르르하게 하고, "우리 집에 뭐 있다, 뭐 있다, 뭐 있다" 뭐 이게 뭐가 의미가 있습니까? 능력이 나타나야지요. 진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절과 32절,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 하나님의 나라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했습니다. 그것과 연관시켜보십시오. 겨자씨 한 알이라 했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 하나가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 있어 보입니까? 겨자씨 한 알이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인데,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인데, 사람들은 겨자씨 하나를 주면 "에이, 그래요. 이거 뭐야" 이럽니다. 이거 돈 따발 주면 좋아하지만 겨자씨 하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능력입니다. 왜요?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고, 사람들이 그 밑에 그늘을 가지고 쉬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이라는 말은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그게 능력입니다. 돈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건물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건물은 콘크리트입니다. 그냥요. 돈은 그냥 종이조각, 휴지조각입니다. 그런데 겨자씨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내가 보잘것없고, 내가 무능하고,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디아, 통과해서 지나가면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게 능력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말이 아니고요. 그게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시간이 가면 겨자씨처럼 쑥쑥 자랍니다.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그 생명,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인간들은 죽어도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명 못합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면 절대로 목회 성공 못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면 그 안에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통과해야 합니다. 그냥 불시험을 통과하고 십자가 통과하고 그냥 닥치는 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디아,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나오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그게 능력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부흥하는 것입니다.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한번 더 책망하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분기점이 되는 말씀인데, 특히 이 사도들의 역할, 사도가 누구의 일꾼이냐 하는 역할,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상태, 스스로 왕 노릇하고 스스로 왕 놀이하고 있는 인간들, 그런데 진짜 왕이 누구냐, 그리스도를 통과해라, 이 말씀 꼭 기억하시고 한번 더 집에 가서 복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그를 통해서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서 나타남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스스로 왕 노릇하고 왕 놀이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평생 동안 교회다운 교회를 지어가게 하옵소서.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돈만 있으면 짓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을 하나하나 벽돌 하나하나 쌓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자,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아름답고 견고한 교회 세워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천국 가서 "하나님 아버지, 멋진 교회 짓고 왔습니다. 그 교회 안에 우리 자녀들이 거하고 우리 후손들이 믿음의 교회를 세워 가고 있습니다"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삼지 않도록 도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우리 속에 생명이 넘쳐나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있게 거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