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 / 전체녹취

고린도전서 특강 5 -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 (고전 7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특강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지난 시간의 맥락을 가지고 읽어야 충분히 이해가 잘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실 문제가 굉장히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첫 번째 다룬 문제였는데,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사실 게바파나 그리스도파는 소수였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초대 개척 목사인 바울과 2대 목사인 아볼로파, 이 두 파가 나뉘어져서 굉장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아볼로는 그런 갈등을 자기가 조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성도들끼리 '나는 바울이 맞다', '나에게는 아볼로가 맞다' 이러면서 자기들끼리 계속 나누고 갈등한 것입니다. 그 문제를 지적하고 그 문제를 해소하고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을 바울이 제시했습니다. 4장까지가 그랬습니다.

지난 시간 5장과 6장 이야기는 교회 안에 있는 음행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음행과 세상 송사에 대한 문제였는데, 교회 안의 음행은 그저 한 가지 사건으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라는 그 지역 전체의 음란한 분위기, 그런 세상적인 것이 교회로 그대로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앞서가는 교회라는 명분으로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야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교회만 이걸 막는다고 되겠는가" 이런 논리로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을 정면으로 책망한 내용이 지난 내용입니다. 거기에 연결해서 오늘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맥락을 가지고 그 느낌을 가지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1. 결혼 제도의 목적

1절입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그 당시 고린도 사회, 고린도 교회가 아닌 고린도라는 사회, 이방 사회는 자기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요즘처럼 성적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너희가 왜 문제냐?' 이런 분위기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즉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음란한 문제, 음행의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제도를 십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요즘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요즘도 만만치는 않으나 요즘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람들을 속박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하지도 않고, 결혼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매이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음란한 문제,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 제도를 가지고 오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1-1. 부부 상호 간의 의무

3절을 보시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이래서 위험한 책인데, 만약 이 4절 말씀만 그냥 그대로 똑 떼서 오면, 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똑 떼서 오면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것 아닙니까?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는 내가 주장한다. 그러니 너의 머리 스타일은 내가 말하는 대로 해야 되고, 너는 옷도 이렇게 입어야 되고, 너는 어디 가서 다른 남자와 말도 해서도 안 되고, 성경에 그렇게 써 있잖아. 여자는 남편이 주장하는 거다. 너도 나를 주장해라. 아내도 남편을 주장한다." 그런 식으로 논리가 가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맥락을 전혀 무시하고 고린도전서 성경 전체를 전혀 무시하고 그냥 떠드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맥락에 의해서 보면 여기 '주장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통제 아래 두다, 통제하에 두다라는 말입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부부가 서로를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이 교회의 심각한 상황이 음행의 문제 아닙니까?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에 고린도 사회의 분위기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 분위기를 우리가 깨뜨리고 교회가 음행의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서로 묶여서 서로가 서로를 주장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고린도 교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당시의 맥락을 배제하고 그냥 읽고 그냥 마음대로 적용하면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전하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1-2. 성적 의무의 예외

부부의 성적 의무가 잠시 예외를 얻을 때는 언제입니까? 5절입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의 성적 의무가 잠시 면제되는 기간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적 의무의 면제에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기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부부 간의 성적 의무까지도 면제받을 만큼 기도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집중하고 모든 일에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방점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2. 결혼과 독신의 은사

그다음 바울이 말하는 결혼과 독신의 다양성을 말해보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바울이 들어가기 시작하는데요. 7절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어떤 상태입니까? 독신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의 상태입니다. 결혼했다가 끝난 게 아니고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총각입니다. 독신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바울은 독신을 은사라고 본 것입니다. 독신을 은사라고요. 은사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은사의 전제는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독신을 은사로 받습니다. 즉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아주 유익하고, 아주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2-1. 독신 은사의 기준

그러면 독신의 은사를 이 사람이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나는 사실은 진짜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안 했어요." 그런데 뒤로는 온갖 나쁜 짓 다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나는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짜 독신의 은사입니까 아닙니까? 바울이 지금 여기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에게 이르노니" 여기 생략된 게 있습니다. '이르노니' 다음에 '하나님께 받은 은사라면' 즉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남자든 여자든, 과부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 혹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여러분이 하나님께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나처럼 그냥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다음 구절입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할 수 없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절제할 수 있으면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이고, 절제할 수 없으면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주 명확한 기준을 딱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절제할 수 없는데 지금 고린도 지역의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나는 절제하기 싫어요, 절제할 수도 없고, 그래서 결혼하지 않아요. 왜? 자유 연애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해놓고 교회 들어와서는 "나는 독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의 기준은 굉장히 명쾌하고 실용적입니다.

3. 결혼과 이혼의 대원칙

부부 결혼 이행의 대원칙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은 이제 예수님이 정한 원칙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예수님이 한 말씀이라고 딱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것이 명확한 원칙입니다. 이것은 대원칙입니다.

마태복음 19장 9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음행을 하면 이혼의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혼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갈라서지 말라는 것이 원칙입니다.

3-1. 갈라선 자들에 대한 목회적 인정

그런데 이 원칙 이외의 이야기를 바울이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갈라섰습니다. 여기 11절에 나옵니다.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그러면 지금 바울은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 현실을 목회적으로 바울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서 갈라선 사람, 이혼한 사람을 목회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하신 대원칙 그 아래 "만일 갈라섰으면" 이 말 속에는 교회에는 이런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4. 불신자 배우자와의 결혼

이제 그다음에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줍니다. 12절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은 믿는데 아내가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신앙의 이유 때문에 그 여인이 불신자라고 해서 이혼하지 말라, 그대로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왜 그럴까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시 너의 아내나 혹시 너의 남편이 너로 말미암아 구원받을까 봐, 거룩하게 될까 봐, 그때를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나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영혼 구원을 위한 너의 가족의 영혼 구원, 특히 아내와 남편에 대한 영혼 구원에 대한 너의 열망과 그 마음을 결단코 포기하지 말라. 나도 포기하지 않으니 너희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4-1. 라합의 교훈

여호수아 6장 25절을 보시면 이 라합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 한 사람이 하나님 믿었습니다. 소문 듣고 여리고 성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기생 아닙니까? 그런데 멀리서 사람들이 와서 그 집에 드나들면서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 이야기도 들려줬고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집트의 그 강한 군대를 깨부수고 다 홍해에 수장시키고,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걷는 일, 그리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그 하나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니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라합 한 사람이요. 그런데 그 라합이 자기 목숨을 걸고 정탐꾼 두 사람을 숨겨줬습니다. 그때 라합이 나중에 이 여리고 성이 망하는 그때 나와 내 가족을 건져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붉은 줄을 맵니다.

그런데 라합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라합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들었더라도 믿음도 없고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 한 사람 때문에 그들이 다시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다 무너지고 그들이 다 멸망하는 그중에 라합 한 사람 때문에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노아 한 사람 때문에 노아의 아내와 노아의 세 아들과 노아의 며느리 세 명, 노아를 포함한 여덟 식구가 다 방주에 탔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요.

그래서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불신자와 함께 있는데, 믿지 않는 자와 한 가족인데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이 믿게 될지, 남편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믿게 될지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구원의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런 마인드를 갖고 살아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지막 가능성이다. 이 집에서, 우리 집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가능성이다.' 이것을 항상 가지고 살면 행동도 그리고 내 영향력도 내 마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 신세 한탄하고 "나는 왜 이런 집에 시집와서 나 혼자 예수 믿고 우리 형님 동서 아무도 예수 안 믿고 전부 다 나 혼자" 이렇게 원망하고 절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보기 나름입니다. 라합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다 기회를 다시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5.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그다음 오늘의 핵심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무엇을 나눠주셨습니까? 은사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맥락이 독신의 은사를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독신의 은사를 나눠주셨으면 독신의 은사대로, 독신의 은사를 주지 않고 결혼의 은사를 주셨으면 결혼한 대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상태가 어떤 상태에서 부르셨습니까? 다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한 상태에서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독신인 상태, 미혼인 상태에서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한 상태에서 불렀습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서 이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에 그런 분들 보시죠, 처참하고 마음과 생각과 육체까지 다 절망으로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원칙을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5-1. 대전제와 현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결혼에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아까 본 것처럼 예수님이 정하신 대전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이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미 갈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이혼한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 안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혼한 사람들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버렸습니까? 그분들을 하나님이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너는 지옥 가라' 하고 하나님이 가혹하게 내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부르신 그 상태로 인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독신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에게 독신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맨날 권사님들이 "넌 언제 시집가냐", "넌 언제 결혼해 가지고 애 낳고 사냐"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런 말 하니까 저도 할 말이 좀 없는데 저도 그런 말 자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전제가요.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하나님은 그 전제를 깨는 사람이 있어도, 그 전제를 깼어도, 깬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저 절망, 저 끝에서, 밑바닥에서, 이혼한 상태에서 '나는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5-2. 교회 안의 상처

그런데 그분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떤 두려움입니까? 은혜는 받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 상태에서 불러주셔서 내가 은혜 받은 건 확실한데,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니까요.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니까요. "애기 아빠는 뭐해요? 어디 살아요?" 자꾸 물어보니까요.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나 나이 50인데 혼자 사는데" 왜 결혼 안 했냐고요. 별난 권사님들 있습니다. "아이고 색시가 흠이 있나 보다" 하고 그것도 큰 소리로 뒤에서 다 들리게 "저 남자 저렇게 멀쩡해 보여도 저거 흠 있는 놈이라고" 막 이런 식입니다.

교회는 획일화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를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 부르심의 자리를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는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가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폭력입니다. 굉장한 폭력입니다. 이 말 한마디 하는 것이요. 그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아니 요즘 다문화 사회 아닙니까? 요즘 우리나라 우리 사회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피부색 다른 분들이 교회 오고, 이 나라에 와서 자녀를 낳았는데 우리와 피부색은 다른데 사투리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를 불러놓고 계속해서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 그 부르심의 자리를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가해자로 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교회마다 자기가 세우고 복음 전하는 교회마다 그런다고 했습니다.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나눠주신 은사대로입니다. 나눠주신 대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그것을 왜 인정 못합니까? 그것이 인정이 돼야 됩니다. 누구는 그냥 먼저 사별한 분도 있고, 누구는 이혼한 분도 있고, 누구는 미혼인 분도 있고, "나는 비혼주의자다"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 앞에다가 "요즘 인구절벽 시대에는 결혼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고, 시집가서 애를 셋을 낳아야지 이게 뭐냐고, 이 건강한 놈이" 이런 말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바울이 지금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3. 할례의 비유

바울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예로 할례를 말합니다. 바울의 논리가 굉장히 치밀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논리에 딱 들어오면 못 빠져나가게 합니다. 할례를 예로 드는데 18절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강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보면 할례받은 자는 육체의 할례받은 자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무할례자가 됩니까? 이미 할례받았는데 무할례자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네가 이미 유대인이냐 그러면 유대인 아닌 이방인처럼 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미 네가 유대인이고 네가 복음을 받았고 네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평생 살아라, 그렇게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무할례자냐?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았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요.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은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이방인들 다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받은 것이 구원의 표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할례 받으려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주장하는데 거기에 할례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앞에 말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혼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느냐? 억지로 결혼하려고 하지 말라. 교회 공동체에 편입되려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의식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려고, 그들이 자꾸 입을 대고 그들이 자꾸 말하니까 너 억지로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라. 너는 독신의 은사를 받았느냐? 독신의 은사 받았습니다. 독신의 은사 받았는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뭐라 합니다. 그 소리 듣기 싫어서 결혼하지 말라. 너는 그대로 지내라. 지금 그 맥락에서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복음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구원받고 그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왜 할례 받아 가지고요. "굳이 각 사람을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얼마나 자유합니까? 복음은 원래 이렇게 자유로운 것입니다.

5-4. 예루살렘 회의

그런데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과 2절을 보면 그 분위기가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여기 형제들은 안디옥 교회 형제들입니다. 유대는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바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런 소리 듣고요.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이래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린 것입니다.

이때가 언제냐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파송을 받고 1차 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할례라는 말 자도 꺼낸 적이 없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너희들 십자가만 믿으면 된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를 구원한다." 그것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어떻게 할례를 가르치지 않느냐. 아브라함이 할례받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우리는 이방인들이 할례받아야 구원의 백성으로 편입이 되는데 왜 할례를 가르치지 않느냐"고요. 그래서 지금 싸움이 난 것입니다.

5-5. 고넬료 사건

그런데 이 야단법석을 누가 정리합니까? 베드로가 정리합니다. 베드로가 그 이전의 경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과 45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설교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집이 누구 집입니까? 고넬료 집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이달리아 부대의 백부장, 즉 로마 군대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유대인들이죠. "이방인들에게도" 즉 이방인이라는 것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할례받지 않아도 성령이 임합니까, 임하지 않습니까? 임합니다. 할례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논리입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러면 이혼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임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러면 그분은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정죄합니까? 왜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자꾸 괄호박을 이야기하고 자꾸 그럽니까?

사업 파산한 상태에서 예수 만날 수 있습니다. 완전히 망해서 알거지가 된 상태에서 예수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망했대, 사업 망했대요" 하니까요. 그래서 교회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옮긴다고 달라집니까? 교회 다 똑같습니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다 손가락질하고 그렇습니다.

교회는 다양성이 있어야 되는데 바울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결혼이라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결혼을 정하셨습니다.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여러 가지 상황과 여러 가지 변수들이 다 공존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법칙대로 못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에덴에서 왜 범죄하고 왜 쫓겨났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이라는 범주를 깨뜨리고 나가고 엉망진창으로 사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립니까? 아닙니다. 만나주고 사랑해 주고 하나님의 은혜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교회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런 분위기가 돼야 됩니다. 교회가요. 그래야 자유롭게 와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 상처를, 내가 입은 상처를,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 교회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5-6. 종의 신분

또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한이 맺혀가지고요. 바울은 다시 종의 신분을 말합니다. 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고린도 교회에 종들도 있었습니다. 종으로 살다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종에서 종의 신분을 벗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이용하라. 그러나 억지로 종의 신분을 벗으려고 그렇게 노력하지 말라.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왜 부끄럽습니까? 너는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교회 공동체에 왔는데 그러면 "나는 누구의 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불렀습니다"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이것이 은혜되지 않습니까? 나는 종인데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몸은 종이지만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5-7. 값으로 사신 자

지난 시간에 나왔던 말씀이 또 나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것은 이제 이혼했다가 이혼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독신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바울같이 진짜 독신이고 미혼인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고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값이 누구의 값입니까? 무슨 값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이것이 얼마짜리입니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환산할 수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정말 엄청나게 어마어마한 그 비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교회가 정한 그 법의 종이 되지 말라. 매이지 말라. 사람들의 시선의 종이 되지 말라. 사람들이 너를 이상하게 보더라도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 왜 거기에 상처받고 왜 거기에 얽매이고 왜 거기에 종 노릇하고 살아가느냐 그러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사람들의 종이 아니다. 자유하라. 당당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원래 자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론 이혼을 앞둔 분들은 고민 많이 해야 됩니다. 기도 많이 해야 되고요. 이것을 끝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 많이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최초의 말씀이 있으니까요.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을 붙들고 씨름하고 고민하고 자기 자녀 문제, 이 가정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매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돼야지요.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사람과 함께 거하지 말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6. 바울의 개인적 견해

이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여기서 진짜 하고 싶은 말, 바울의 의견을 말하는데요. 바울은 가끔씩 자기 나름에는 위트라고 말하는데 우린 별로 웃기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냐면요, 25절을 보십시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없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내 의견이다, 참고만 해라는 말입니다.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바울이 진솔한 태도입니다. 자기는 처녀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계명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사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성경이 아닌 자기 생각을 마치 성경처럼 거짓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직한 것입니다.

'주께 받은 계명은 없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자기 의견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처녀라면 결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의견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자기 의견입니다.

6-1. 임박한 환란

왜 임박한 환란을 이야기할까요? 지금 이 시대는 바울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시대는 고린도전서를 쓰는 시대는 로마 제국 시대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다 식민지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환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환란이고 고난입니다. 그 자체가 목숨을 걸고 내어 놓아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너희들 눈앞에 있으니 그 일 견디기도 힘드니 결혼하지 말라. 그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자기 사견임을 전제로 합니다.

자, 그다음 계속해서 자기 사견입니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하면 육신의 고난이 있답니다. 와닿으십니까? 처절하게 와닿으십니까? 사실 우리 여자분들은 출산을 해야 되니까 육신의 고난이 있습니다. 출산으로 끝납니까? 아이를 키워야 됩니다. 먹여야 됩니다. 돌봐야 됩니다. 남자들은 땀이 흐르고 뼈가 부서지는 수고를 해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요새는 남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부부가 함께 일해야 겨우 자식들 공부시키고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요. 육신의 환란, 고난이 있으리라는 말입니다.

7. 종말 시대의 삶

자, 그다음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을 또 합니다.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에 우린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29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것" 때가 언제입니까? 종말의 때입니다. 종말의 때가 단축하여진 것, 속히 오리라고, 이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다섯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7-1. 다섯 가지 원칙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아내 있는 자가 없는 자같이 하라? 지금 종말의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이 임박한 이 시대에,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지 모르는 이 시대에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나 결혼 안 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이 아니고 가정에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선순위가 말씀이 되고 복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에는 목회자마저도 가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교인들도 그것을 다 이해합니다. "목사님도 가정이 우선이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짜 두 가지만 딱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와 가정 중에 목회자가, 여러분의 목회자가 제가 교회와 가정 중에 가정을 먼저 선택한다면 여러분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요. 교회와 자녀 그리고 아내 중에 그 가정을 먼저 선택해 버린다면, 성도의 가정에 심방하는 이 우선순위와 가정에 일이 있어서 가는 우선순위 중에 만약에 가정을 먼저 선택한다면 그것을 목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목사가 아닙니다. 어떻게 목사라고 말합니까?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바뀌어져도 말씀은 항상 살아있는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결혼한 자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에, 임박한 종말의 때에 우리가 선택의 순간에, 결정적인 선택과 결정적인 기로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해야 됩니까? 복음을 선택하고 말씀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 지난 주일날 제가 말씀 전할 때 잠깐 인용한 말씀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 아버지 세베대를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선택의 순간입니다. 종말의 순간,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복음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이어야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정이 먼저가 될 수 있습니까? 이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요.

그렇다고 가정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종말의 순간,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은요, 매 순간 연습함으로써 결정적일 때 그것이 딱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매 순간 매 순간 내 머릿속에 항상 내 아내가 먼저 들어가 있고 내 남편이 먼저 가 있고 내 새끼 내 자식이 먼저 들어가 있으면, 교회보다 자식 공부시키고 자녀 유학 보내고 그런 일에 먼저 마음이 쓰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다 문제 생기는 것 아닙니까? 교회 재정을 함부로 쓰고 그래서 교회가 문제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러겠습니까? "목사들도 신부들처럼 결혼하지 말아야 된다고, 가정이 없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겠죠. 독신의 은사 안 받았는데 어떡할 것입니까? 그런 문제들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결단하지 않으면 선택의 순간에, 작은 것부터 결단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큰 사고 칩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다음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울 일이 많습니다.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탄식하고 항상 울 일입니다. 돈 없어서 울고, 몸 아파서 울고, 자녀 때문에 울고, 내 신세 보니까 한심해서 울고, 울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곧 종말이 오니까요. 곧 예수께서 너의 눈물을 닦아주시니까요. 역사의 종말이 오든 개인의 종말이 오든 임박한 종말이 너희 앞에 있으니까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즉 거기에 매이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기쁩니다. 기쁠 일이 많습니다. 행복한 일이요. 그런데 그 기쁨이 내 믿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매매한다는 말은 좀 있는 것입니다. 돈이요. 무엇을 사고 팔 돈이 있는 것입니다.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무엇을 사고 팔 게 많습니다. 그런데 '없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 돈 있는 것을 자랑하고 거기에 매여 살면 종말의 때에 너 그것 때문에 패가망신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되라."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쓰지 못하는 자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니까요.

이 다섯 가지가 종말이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야 할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다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전부 다요. 그럼 무엇만 남습니까? 말씀만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것만 남습니다.

7-2. 자족의 비결

바울은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빌립보서에서 하는데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게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것, 배부른 것입니다. 자, 일체의 비결,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배부르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풍부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뻐해도 기뻐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매매해도 없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나눠주라는 말입니다. 풍부하면 내 먹을 게 나는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두 개 있으면 그것 하나 나눠주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자꾸 쌓아놓고 살지 말고 자꾸 퍼주고 자꾸 나눠주라는 말입니다. 자꾸 언제 예수님 오실지 모르는데 자꾸 쌓아놓고 무엇 할 것입니까? 그것 자꾸 나눠주고 퍼주고 베풀고요. 배고프면 '아이 그때 쌓아놓을 걸' 그것이 아니라 배고프면 견디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하나님이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베풀어줄 은혜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있을 때는 나눠주고요. 있을 때 없을 때를 대비해서 쌓아놓고 살다가 그것 나중에 만나가 나중에 다 사라지는 것처럼 썩어 문드러지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 말을 지금 합니다.

7-3. 복음에 집중하라

종말의 시대 성도가 염려 없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결혼 생활이든지 지금 결혼 생활을 지금 예로 들어서 그렇지 물질, 결혼, 그다음에 자기 명예, 부 등등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에서 42절까지 그 뒤쪽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매의 집에 방문하셨는데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화딱지가 내니까 예수님께 말합니다. "동생을 명하여 나를 좀 도와주라 하십시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나눠졌다는 말입니다. 전부 다 마음이 나눠지지 말고 종말의 때가 될수록 하나에 집중하라, 즉 복음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혼해도 복음에 집중할 수 있어야 되고, 독신으로 살아도 독신의 은사가 있으면 복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도 독신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자꾸 음행하러 돌아다니고 자꾸 교회 어지럽히고 공동체를 혼란시키고 세상의 풍조를 자꾸 가지고 들어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35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7-4. 결혼과 독신

종말이 될수록 자, 38절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슬쩍슬쩍 자기가 독신의 은사를 받았으니까 "너희가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는 굳이 결혼하려고 애쓰지 마라. 더 잘하는 거다. 이 임박한 종말의 시기에"라고 말합니다.

39절입니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주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바울이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8. 결론

그래서 이 7장 이야기는 그냥 단순한 결혼과 성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제도, 그 제도를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지키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라고 하나님이 그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대를 부르셨습니다. 부름 받은 그대로 행하라. 교회는 그대를 수용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여라. 그 교훈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보고 오늘 우리의 완악함도 봅니다. 한 가지 아니라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완악함. 하나님이 성경에 정하신 그 첫 번째 계명, 결혼의 원리대로 살지 못하면 모두가 정죄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죄악된 가운데도 부르시고 종 된 자의 자리에서도 부르시고 갈라선 자리에서도 부르시고 병든 자의 자리에서도 부르셨습니다. 각양 다양한 모양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게 하옵시고 교회는 그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임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모든 성도를 함께 사랑하고 용납하고 함께 하나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임박한 종말을 맞이하여 복음에 우선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에 우선하는 자 되도록 도우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물질과 건강과 우리의 생업이 복음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주여 우리를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 복음에 헌신된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