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특강 7 -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고전 9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공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9장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이때까지 우리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문제 많은 골치 아픈 교회입니다. 요즘 현실 세계에서 그런 교회가 있으면 "나는 이런 복잡한 교회, 이런 시끄러운 교회 못 다니겠다" 할 정도로 심각한 교회였습니다.
일단 교회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 "나는 누구 파, 나는 누구 파"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데, 여러분 만약 우리 교회가 파가 나뉘어서 분열되어 막 싸운다면 교회 오고 싶겠습니까? 그런 갈등들이 있었고, 또 교회 안에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뭐 했다더라, 그런 이상한 일이 있었다더라" 이런 소문들이 막 있으면 교인들이 은혜가 안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결혼의 문제가 있는데, 이 결혼의 문제는 그냥 보통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한 사람,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혼한 사람, 그냥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다 차별하는 문제입니다. 차별받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나도 하나님이 부르신 게 확실한데, 그런데 내 형편이, 내 처지가 여의치 않은데 하는 갈등들이 또 있습니다. 또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해결책입니다. 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인간관계 해오면서, 결혼하고 가정생활하고 자식 키우고 여기까지 오면서, 문제 없이 1년 동안 하나도 문제 없이 그냥 살아왔다 하는 해가 있으면 한번 적어 보십시오. 있습니까? 단 한 해도 없습니다. 한 해가 뭡니까? 한 달도요, 하루도요. 단 하루도 우리는 문제 없이 살아온 하루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게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사람, 복음이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답이 없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있는데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고난 당해 본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매 맞아 본 분, 예수님처럼 모든 걸 다 버려 본 분, 예수님처럼 모든 걸 다 가져 보신 분이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시고 다 버리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다 잃어도 예수님 보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배신당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도 예수님 보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해결책인데, 이 해결책은 예수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 예수 속에 답이 있는 것을 바울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심각한 문제들이 막 있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 믿으니까, 예수 안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답이 있고, 예수님 생각하면 흥분할 것도 없고 화낼 일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주 안에서 다 답 찾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이런저런 교회 안의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런데 이 답은 생각해 보면 바울의 경험이나 바울의 생각에서 나온 답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답이었습니다. 다 예수 안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전부 성경 이야기입니다.
1. 바울의 자기 변호
이제 오늘 바울은 자기 변호를 좀 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자기 변호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변호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이 이런 이야기들을 쭉 해 가는데, 글 쓰고 있는 사람, 편지 쓰고 있는 사람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으면, 이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나 바울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기 변명, 자기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목이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입니다. 이런 말을 우리는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녀에게 앉혀 놓고 "야, 엄마 본받아" 그러면 아이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야, 아빠 본받아" 이러면 아이들이 속으로 그런 말 안 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당하게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어떤 복음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길래 이런 말을 할까요?
1-1. 네 가지 질문
9장 1절을 보시면 바울이 네 가지 부정 의문문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 네 가지를 던졌습니다. 보통 부정적으로 말할 때는 어떤 느낌입니까? 강하게 말하고 싶을 때입니다. "내가 이것도 먹을 권리가 없냐" 이렇게 말할 때는 "나 먹을 권리가 있잖아" 이런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네 가지 부정적인 말을 했는데,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그러면 나는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인이란 시민의 자유인, 나는 법을 지키는 그런 자유인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나는 사도라는 뜻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봤습니다. 어디서요? 다메섹 도상에서입니다. 그리고 또 네 번째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나의 열매가 아니냐?" 고린도 교회 성도들, "너희는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쓰고 씨 뿌린 열매가 아니냐?"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사도성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다른 사람들, 바울의 사도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넌 사도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너희는 나를 인정해 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1-2. 사도의 기준
그런데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악당들입니까?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방인들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내부의 적입니다. 내부에서 바울의 사도권,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1절에서 22절을 보면,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맥락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제자가 원래 몇 명입니까?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 누가 하나 죽었습니까? 가룟 유다가 스스로 죽었습니다. 몇 명이 됐습니까? 열한 명입니다. 그러면 열한 명으로 다니면 됩니까, 안 됩니까? 꼭 한 명 채워야 합니다. 그 한 명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요? 유대인들은 12라는 수를 완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은 하늘의 수고, 4는 땅의 수고,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더해진 7이 완전수고,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곱해진 12가 또 하나의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완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치 않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배신했고, 물론 다 배신했지만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를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안 채우면 어떻습니까? 12라는 이상한 강박, 전통의 강박에 사로잡혀서 하나를 채우는데 그 채우는 기준이 이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 올라가신 날까지"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날부터 승천하신 그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사도를 하나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맛디아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바울은 사도입니까, 사도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정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정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쪽지 적어서 베드로한테 준 것입니까? 누가 정한 것입니까? 구약 성경에 정한 기준입니까? 이 기준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네들끼리 정한 것 아닙니까? 열한 명끼리 자기들끼리 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제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도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이건 관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정한 것입니다. 이게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공동체를 정상적인 사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들의 공동체, 12명의 사도들은 어떤 의식을 가집니까? 선민의식을 가집니다. 또 바울 같은 사람에게 "너는 사도가 아니다"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때는 사울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고, 사람들이 "아이, 이 사람은 정말 살인자요" 막 그런 사람인데요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사울은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면 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택하신 것인데, 그런데 이건 사람이 정한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바울은 사도가 아닌 게 돼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승천할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출입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바울이 사도라고 자기가 전도하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막 다녔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정하지 않는 것도 누가 그렇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성장하고 은혜롭고 발전하고 주 안에서 든든하게 서 가면 모두가 박수 해 주고 또 격려하고 위로하고 해야 되는데,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교회를 공격하고 교회가 교회를 시샘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그건 과거부터 그랬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현실로부터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제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제도들이 과연 관습인가, 진짜 말씀과 성경에 근거해서 오늘의 상황에 맞게 우리가 바꾸어 가면서 적용하고 살고 있는 건가, 이걸 잘 생각해야 됩니다. 어쩌면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훨씬 더 상위법에 지금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과감하게 철폐하고 깨부수고 나가야 되는데,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가슴 답답한 심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도 "야, 너에게 복음 전하고 이 교회 개척한 사람은 원래 사도가 아니야. 가짜야. 사도라면 그럴 수 없어. 사도라면 할례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그 인간은 할례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가짜야. 너희들 할례 받아야 돼" 하고 거기 사람들이 막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쯤 와서, 고린도전서 중간쯤 와서 자기의 사도권,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권리를 부여받은 것을 아주 정중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는 말이 먹히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권리 포기
2-1. 권리를 쓰지 않음
이제 3절을 보십시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바울 서신에서 변명이라는 말은 비굴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의 어감에서 변명은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자꾸 피하고 싶어서 변명하는 것인데, 이 변명이라는 말은 변론입니다. 서로 토론하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내가 내 주장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먹고 마실 권리, 여기서 먹고 마실 권리란 무엇이냐면 후원받을 권리입니다. 사도이니 전적으로 주의 일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선교비 받고 사례비 받고 후원받고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비량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게바는 베드로입니다)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니는 권리가 없겠느냐?" 결혼할 권리가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결혼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열심히 일하면서 생업도 하고 돈도 벌어 가면서 복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그런데 바울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들은 사도라고 이야기하는 폐쇄적 공동체인데, 너희는 교회에서 전적으로 후원받고 사례를 받고 일하는 사람들 아니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이렇게 하고 있는데, 왜 너희는 나를 핍박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면서 자신의 진심을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2. 복음 때문입니다
그다음 바울이 사도가 가진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말로 '관종', 잘난 척 하려고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남들에게 주목받으려고, 혹은 남들에게 잘난 척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목적이 분명합니다.
12절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어떤 권리입니까? 사례비 받고 일할 권리, 결혼할 권리, 포도원에서 일하고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권리, 군복무하고 급여를 받을 권리—"범사에 참는 것은" 참는다고 했습니다. 나도 하고 싶으나 참는다고 했습니다. 왜 참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의 최상위 개념이 복음입니다. 바울의 최상위 복음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포커스는 다 복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전부 다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걸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저는 목회자고 중직들도 계시고 우리 성도들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그러면 나는, 내가 하는, 내 삶의 최종 목적과 포커스가 무엇이냐,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거 할 수 있는 권리도 참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인데, 당연히 내가 가져야 되는 권리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내가 안 하는 건 내가 남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주목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 믿음의 연약한 자를 혹시 시험에 들게 하면…" 바울의 포커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내고 싶은 성질 다 내고 삽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연 나의 인생은 복음에 도움이 되는가, 복음 전파에,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고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를 누리지 않고, 할 수 있는데 참으면 믿음이 어린 사람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복음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는 것,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않는 것, 힘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아십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는데 몇 곡 정도 들으면 적당합니까? 청중 입장에서 세 곡이요? 마음이 넓으신 분이시네요. 어떤 분은 "약 한 곡만 해, 한 곡만." 그런데 한 곡은 좀 그러니까 앵콜까지 봐줄게요. 그런데 세 곡을 넘어가면 짜증나기 시작합니다. 시간도 없는데 지금 내가 저 노래만 들으려고 여기 왔나 하는 마음이 막 생깁니다. 절제가 중요합니다. 마이크 잡은 사람은, 목사가 아무리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싶어도 시간의 절제가 중요합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 1시간씩 하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수요일은 이렇게 하는 거 다 알고 오니까 그런 것이고, 금요일은 우리가 금요 기도의 시간입니다. 기도 많이 해야 되니까 목사가 기도하는 시간 빼앗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금요일은 설교 시간 딱 15분, 기도 많이 하시라고. 새벽에 또 아침 먹고 출근하셔야 되니까 새벽 설교 시간 딱 10분, 11분. 그 절제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도 길게 할 줄 압니다. 길게 하고 오래하고 막 수요일 날 길게 하잖습니까. 새벽에도 길게 할 수도 있고, 주일날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절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교회 중직이고 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자리에 있으면 절제하고 낮추고, 누리지 않고 포기하고, 때로는 모른 척도 하고, 그게 복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전부 다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내 주머니 털어서 사 주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전부 복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 딱 살아가고 저녁에 누워서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 그건 자기 점검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인생, 말이나 행동에나, 돈 쓰는 거나 참는 거나, 모든 것이 복음에 합당한 인생을 살았는가, 누구도 실족시키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었는가, 이걸 생각하고 사셔야 됩니다. 바울의 목적은 복음이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거 없습니다.
3. 빼앗기지 않는 기쁨
15절을 한번 볼까요?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적당하게 쓰는 게 아닙니다. 안 쓰면 아예 안 쓰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 쓴 것 때문에 하나 쓴 건 다 쓴 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 누린 건 다 누린 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런 거 있습니다. 너무너무 귀한 것은 하나도 안 먹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대로 보관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이게 복음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 이걸 적당하게 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두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도 쓰지 않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아주 비장합니다—"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자기는 이걸 진짜 그리스도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들 앞에 "헛된 데로 돌린다" 이 말은 원문을 가지고 제대로 번역하면 "빼앗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헌신된 자기의 삶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그게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릴 것 다 누리고, 받을 거 다 받고, 권리 다 찾아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빼먹고, 원하는 것 다 하고, 그런데 남는 게 있습니까? 남는 게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 써 버렸습니다. 사람들한테 칭찬 많이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이 아끼고 아끼고 아끼고 참고 안 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런데 그건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사탄도, 세상의 어떤 권세도 빼앗지 못하고, 자기는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정말 우리가 해 본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권리를 쓰지 않고 포기하고 이렇게 하면, 그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올라오는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당회실이 없습니다. 아세요? 그거 아세요? 알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 정도는 좀 알아 줘야 됩니다. 장로님들 주일날 당회실도 없는데 여기 가서 있고 저기 가서 있고 하면, 좀 안전하게 커피도 한잔 대접하고 해 주셔야 됩니다. 여기 중등부실이, 청년부실이잖습니까. 장로님들이 오면 "장로님도 여기 왜 왔나?" 이러지 말고, "장로님들 당회실이 없는데 어디 가요? 지금 당회실이 없는데 여기 오셔서 커피도 한잔 하시고 좀 앉아 계세요" 하고, 그래야 됩니다.
당회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큰 건물 짓고 공간 만들어도 공간은 항상 부족합니다. 당회실이 있다가 반 토막 냈다가 이제는 없습니다. 있다가 지하로 가서 반 토막을 했는데, 없습니다. 이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회실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 본 교회, 당회실이 제일 좋은 데 있는데,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써도 제일 좋고 제일 권세 있고 제일 전망 좋고 제일 넓은 데, 거기 가면 다 있습니다. 전부 다 각각 종류의 모든 차들이 다 있고 뭐 끝내줍니다. 안마기 있는 당회실도 제가 봤습니다. 안마기, 그냥 되는 게 아니고 그 비싼 TV 선전 나오는 안마의자 있습니다. 권세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그 교회 장로님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없습니다. 당회실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걸 자랑하셔야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는 있는 것도 자랑하고, 우리 없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당회실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당회가 없나?" 우리는 미조직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당회가 있습니다. 엄연히 있습니다. 당회가 있는데 당회실이 없습니다. "그럼 당회 어디서 해요?" 빈방 가서 합니다. 그냥 목양실에서도 하고, 그 시간에 빈자리 가서도 하고,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끝나고 임시 당회 할 건데 어디서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입니다. 그게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1. 성경이 말하는 권리
구약에서부터 권리를 이야기했습니다. 레위기 2장 10절을 보면 "소제물에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소제물 가져오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제사장들이 먹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 명시된 권리입니다.
레위기 7장 34절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영원한 소득이니라." 무엇입니까? 지금 이 율법이 제정된 시간부터 영원한 소득이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영원한 소득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권리가 구약에서부터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3절을 보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 사건이 나오는데요, 3절을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바울이 왜 친해졌는가 하면, 뭐가 같습니까?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바울은 텐트 메이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천막이라고 하면 어떤 걸 생각합니까? 큰 천막 있습니다. 뭐 20명, 30명, 옛날에 교회에서 중고등부 수련회 가면 천막 치고 하는 거, 그런 천막이 아니고, 이건 로마의 군인들이 개인용 천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개인용 천막입니다. 로마 군대가 군인들이 많습니다. 군장 꾸릴 때 개인용 천막, 1인용을 가지고 다녔는데, 군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군인들이 많으니까 천막 만드는 게 돈이 됐던 것입니다. 천막 만드는 사람도 많고, 천막 만드는 일하고 납품받는 곳도 많고, 또 문제가 되면 나중에 그걸 수리해 주는 역할도 해야 되고, 개인용 작은 천막, 그걸 군장에 항상 지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생각해 보세요. 바울 선생님이 낮에는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하고, 밤에는 그때는 전기도 없는데 천막 깁고 앉았습니다. 남자가 맨날 손에 막 바늘 찔려 가며 졸려 죽겠는데, 또 새벽부터 일어나서 또 전도하고, 굶고 배고프고, 두드려 맞고 매 맞고, 강에 빠지고 파선하고, 그러고 살았습니다. 바울이 참 부끄럽게 합니다.
4. 복음 전하는 이유
4-1. 마땅히 해야 할 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억지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득불한다는 이 의미는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요? 복음 전하는 것은 왜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까?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의무입니다.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삶으로든지, 나가서 전도지를 나눠 주든지, 아니면 선교 헌금을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왜요? 사명이니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17절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사명이 무슨 사명입니까? 시킬 사, 명 자입니다. 누가 시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시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명령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랬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도 임하고 권능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러니 해야 되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땅끝까지 가라고 많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외국어도 잘하고, 문화에도 능통하고, 열정도 있고, 패기도 있고.
4-2. 바울이 자랑하는 것
복음 전도자 바울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그러면 바울의 상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급여도 못 받고 일하는데,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이게 상이라 그랬습니다. 값없이 전하고, 대가 없이 전하고, 그리고 권리를 다 쓰지 않는 이것이 자기 상이라 그랬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올해 들어서 새롭게 막 다시 시작한다는 표어로 시작한 게 많습니다. 그중에 우리 30·40 하이공동체가 새로 시작된 거 아십니까? 처음에 한 20명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제 40명이 넘었습니다. 배가 했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66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주 의미 있는 결정을 했습니다. 아시죠? 어떤 결정입니까? 재정을 독립시켜 줬습니다. 우리 30·40 하이공동체에다가 우리 30대, 40대 청년들이 거기에 십일조하고 감사 헌금하고 헌금하고 하는데 알아서 쓰게 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지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30대, 40대 청년들이 자기네들이 직장생활하고 하니까 거기서 십일조도 가게 하고 다 하고, 물론 명단은 교회에서 봅니다. 연말에 해 줘야 될 서류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원칙이 중요합니다. 그냥 "헌금 받아서 알아서 쓰세요" 이러면 안 되니까 원칙이 중요합니다. 원칙을 정해 오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거기서 의논해서 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토론 끝에 정해 온 원칙 중에 몇 가지 중에 제1원칙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공동체는 교회 돈으로 밥 먹지 않는다. 교회 돈으로 차 마시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저는 진짜 은혜 받았습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권리 아닙니까? 청년들이, 우리 청년들이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 시대 청년들, 30대, 40대가 없습니다. 집에, 교회에, 다른 교회 가 보세요. 전부 노인들만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30대, 40대 청년들이 귀하니까 교회에서 배짱 튀기고, "해 달라" 그러고, 요구하고, "우리 어디 가는데 뭐 주세요" 하고. 그런데 이 청년들이 자기들이 원칙을 정해 온 것입니다.
아니, 교회에서 그냥 있을 때는 이 친구들 십일조도 안 하다가, 자기들끼리 모아서 공동체에서 헌금 알아서 쓰라고 그러니까 뭐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감사헌금도 열심히 하고, 선교 헌금도 내고. "목사님, 선교비 모았는데 이거 어디다 써요? 어떻게 해요? 방향 주세요." 뭐 이러고. 한 40명 공동체가 마땅히 밥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마땅히 자기들이 낸 헌금으로 커피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자기 주머니에서 다시 내서 다시 쓰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회개하고 배워야 됩니다. 교회 예산, 교회 재정 가지고, 교회 예산 가지고, 교회 재산 가지고 우리가 밥 먹고, 우리가 커피 마시고, 전부 다 흥청망청 쓰고, 우리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게 권리입니까? "내가 이 교회에 이만큼 헌금하고, 내가 이만큼 봉사하고 이만큼 수고하는데 그것도 내가 못 하냐고?"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런데 김밥 한 줄 먹으면 어떻습니까? 모여 가지고 우리끼리 재밌게 김밥 한 줄 먹고 있는데. 교회 우리 카페 가면, 가나의 혼인잔치 가면, 혼인잔치는 다 공짜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커피, 차 다 공짜입니다. 거기 가서 커피 마시고, 거기서 차 마시고. 교회 밥 다 공짜니까 교회에서 밥 먹고, 그러면 됩니다.
다 우리 어른들이 배워야 됩니다. 마땅히 할 권리가 있는데,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는데, 교회 돈으로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의미 있는 일을 합니다. 그 일로 중요한 일을 합니다. 선교하고. 이번에 그 친구들이 모은 선교비로, 그 친구들이 청년 때, 20대 청년 때 저기 청양에 선교하러 그때 개척교회 갔다 왔는데, 그 교회 목사님한테 그 교회가 필요하다고 해서 탁구 용품 보내 줬습니다. 선교비로. 그 친구들이 모은 걸로. 자기들 밥 안 먹고, 커피 안 마시고, 선교비 해 가지고.
그런 게 복음입니다. 그게 복음을 위한 삶입니다. 우리가 뭐 배부르게 비싼 거 먹고 그래 가지고, 그게 복음을 위한 삶이 되겠습니까? 교회 돈 축내 가면서. 어른들이 본받고 배우고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저는 30대, 40대 우리 하이공동체에 진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4-3. 느헤미야의 모범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느헤미야 5장 14절에서 15절입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제32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누구입니까?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황제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 있다가 유다의 총독으로 갔습니다. 성벽 재건과 성문 달러 갔습니다.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12년 총독으로 있으면서 자기는 거기에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이게 돈 많다고 되는 일입니까? 이게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이게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우리가 하나님 사람들이니까. 복음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누가 돈 좋은 줄 몰라서 그럽니까? 누가 이건 누리지 못해서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이 돈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보임을 당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5.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바울은 그가 가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으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자유롭습니다. 자유인이니까요—"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렇습니다. 이게 매여 있는 삶입니다. 맨날 천막 꿰어야 됩니다. 맨날 천막 만들어야 됩니다. 터져 가지고 반품 오면 맨날 다시 만들어서 다시 수리해서 줘야 됩니다. 매여 있는 것입니다. 왜 매여 있는 것입니까? 왜 종이 된 것입니까?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의 최종 가치, 최고 가치는 복음입니다. 전도, 복음, 전도.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정도로 복음에 미치지 않으면 영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 안에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에게, 약한 자들. 22절을 보시면 끝에 보세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복음이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의 삶은 복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초점이 딱 복음입니다.
6. 예수님의 초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초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였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예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수님은 목적을 달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봅시다.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잘 읽어 보세요. 복음서, 서신서.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십자가에 달려 용감하게 죽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합니다. "아니, 뭐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 것이니까 죽는 게 뭐가 겁나?" 아닙니다. 왜요? 스스로 부활할 능력이 있으면,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실 능력이 있으면 죽는 게 일도 아닙니다. 하루에 12번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야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확신과 신뢰가 없으면 못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이 한 푼도 안 받았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먹이실 것이라는 전적인 확신이 없으면 이건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것이라는 전적인 은혜가 없으면, 그 믿음이 없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람 아닙니까? 입으로만 "나는 하나님 사람이라"고 말하면 무엇 합니까? 뒤로는 맨날 목사님들은 다 준비해 놓고. 그러니 이게 복음의 은혜가 됩니까? 이게 복음의 은혜가 됩니까? 내가 죽으면, 내가 모든 것 권리를 포기하고, 누릴 만한 권리가 있는데 다 포기하고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이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으니까 복음이 맨날 힘이 없고, 그게 없으니까 복음이 영향력이 없고, 전도가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목사들부터. 한국교회 문제는 전부 목사들 문제입니다. 뭐 다른 거 어디 있습니까?
6-1. 예수님 동생들의 제안
요한복음 7장 2절에서 4절을 보시면 예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 중에 예수님의 동생들 이야기입니다. 초막절이었습니다. 초막절 때입니다. 요한복음 6장 사건은,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로. 그런데 이 오병이어 사건을 예수님이 벳새다 들녘에서 하셨습니다. 벳새다 들녘은 갈릴리입니다. 시골입니다. 어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동생들이 보니까 한심한 것입니다. "우리 형님이, 아니 이렇게 위대한 능력을 이 형님이 갖고 계시면, 이 형님이 유대 땅 예루살렘, 수도, 서울에 가서, 한양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면 2만 명, 3만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모인 데서 이 능력을 행하면 당장 일약 톱스타가 될 텐데. 근데 왜 이러고 계시나? 나타내기를 원하면서 묻혀 지내는 사람이 없다" 그랬습니다. "올라가라"고, "빨리 가시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초막절에 돌아가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셔야 됩니까?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의 포커스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 간 것입니다. 안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과 예수님의 포커스는 항상 하나님에게 딱 맞춰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니까. 초막절 어린 양이 아닙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기부터 상징성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양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피를 죽음의 사자가 보고 지나가고,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있고.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포커스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6-2. 우리의 포커스
그러면 우리의 포커스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동생들은 유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이 유명해지면 덕 좀 보려고. 그런데 우리의 포커스,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돈 버는 것입니까?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자식 잘 되는 것입니까?
자, 그거 됐다 칩시다. 그러면 그다음은 또 무엇입니까? 그다음 다 됐다 칩시다. 수백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 칩시다. 그러면 그다음은 무엇입니까? 죽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다음 허무합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래서 우리의 목적도 영생입니다. 우리는 부활입니다. 영생, 부활,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되면 하나님하고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고 천국에 들어가야 되는데, 정리할 때 수치 당하면 너무 민망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옛날에 목욕탕 한 달에 한 번씩 갈 때 있었습니다. 옛날에 목욕탕 한 달에 한 번씩 가는데, 저희 어머니가 저더러 목욕탕 가기 전에 좀 씻고 가래요. "아니, 목욕탕 가는데 왜 씻고 가야 되냐고? 내가 목욕탕 가는데 가서 씻으면 되지." 더러워서 부끄럽다고. 목욕탕 가는데 어린데, 그때 아유 막 추운데, 부엌하고 물 뒤집었는데 하고 같이 쓰는 부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뭐 그런 아파트고 입식 이런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등짝 벗겨 놓고 발가벗겨 놓고 등 밀고. "아니, 목욕탕 가는데 왜 그러고 있냐?" 부끄러워서.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동네 사람 만나면 때 밀면 때 많이 나오면 부끄러울까 봐.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렇죠, 구원받았는데, 그런데 하나님 만나면 좀 부끄럽습니다. 사실 너무너무 지연재가 많으면, 너무 돈만 밝게 살았으면, 너무 인생의 정욕만 쫓다가 왔으면, 가기 전에 초벌 때는 좀 벗기고. 옛날 엄마들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게. 가기 전에 초벌은 좀 하고 가야지. 그래야 좀 덜 부끄럽지.
7. 푯대를 향하여
7-1. 달음질하라
바울이 복음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요, 24절 보세요.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걸어라도 아닙니다. 달음질하라, 뛰어가라 이런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바울은 달음질하는 것입니다—"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아니하며." 무슨 말입니까?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음. 그게 바울의 목적입니다.
항상 목적이 분명하니까 좌우를 안 돌아보는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뭐라 하든지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람들하고 잘 싸우는 사람들은요, 목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길 가다가 남의 일에 간섭 많이 하는 사람들, 시간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에 가서 여기 가서 간섭하고 저기 가서 시비 걸고, "이건 왜 이렇게 비싸요?" 아주 뭐 이런 사람 있습니다. 시간 많으니까. 여러분, 시간이 없으면 갈 길, 자기 갈 길 가기 바쁜데 언제 거기서 시비하고 있습니까? 바빠 죽겠는데. 그런데 바울이 자기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남들하고 다툴 일도 없고 갈등할 일도 없습니다.
7-2. 영적 긴장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게 무엇입니까? 바울의 믿음이 없어서 이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영적 긴장입니다. 항상 우리는 영적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바울이 그 뒤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니,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받은 것입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은 받았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성화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화 차원의 구원은 영적 긴장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복음 전하고 살았는데, 혹시 내가 버림받을까 봐 두렵다." 이 긴장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게 영적 긴장을 갖고 살아야 그나마 죄짓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흘러가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의 자기 결단입니다. 자기 결단.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7-3.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빌립보서 3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을 잊는 게 쉽습니까? 나이 들수록 업적 자랑을 많이 합니다. "옛날에 내가 이랬는데…" 왜 그럽니까? 업적 자랑을 많이 하는 분들은 앞에 일에 별 소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앞의 일에 해야 될 일이 많으면 옛날 지나간 일 그거 언제 따지고 앉아 있습니까? 바빠 죽겠는데.
그래서 바울은 이미 지나간 일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거 잡으려고. 그 앞에 것이 무엇입니까?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천국입니다. 천국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뜀박질, 복음을 위해서. 복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천국.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향방 없는 것 같이, 목적지 없는 것 같이 달리지 말고, 방향을 정확하게 정해서 달려갑시다" 이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우리도 바울처럼 그런 믿음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또 성경 공부한 첫날이니까, 제가 마침 기도 하고 축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본받기 바랍니다" 고백한 바울처럼, 주여, 우리도 복음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믿음의 후배들에게 "나를 본받으십시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자식들입니까? 그것들을 이루고 난 그다음은 또 무엇입니까? 그저 죽음밖에 남아 있지 않은 우리 인생,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너무 추하지 않도록, 부끄러운 구원, 민망한 구원 받지 않도록, 주여, 우리가 이곳에서부터 잘 정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명자로 살게 하여 주시고, 주여,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여 주시고, 교회의 목적이 복음 전하는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이 복음 전하는 것이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목적이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바라보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을 위해서 물질도,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도 다 포기했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 길 걸어가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역사 교통 위로하여 주심이, 바울처럼 우리도 복음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고, 복음 너머에 푯대인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소원하며,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의 후배들에게 "나를 본받으십시오"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결단하는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 머리 위에, 가정 위에, 일터 위에, 우리가 살아가는 복음에 합당한 삶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