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공동체와 성만찬 / 전체녹취

고린도전서 특강 9 - 공동체와 성만찬 (고전 11장)

오늘은 고린도전서 공부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공동체와 성만찬'입니다. 공동체와 성만찬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고,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참 답답하다, 이런 썩어빠진 교회가 있다니 내가 이런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정확히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칭찬받을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하나 나오고, 또 아니나 다를까 책망하는 장면도 하나 나옵니다. 어떤 것을 칭찬하고 어떤 것을 책망하는지,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칭찬: 전통을 지킨 고린도 교회

1-1. 전통의 의미

바울이 칭찬하는 것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칭찬하느냐 하면, 전통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태도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칭찬한다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입니다.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통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라도시스(παράδοσις)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통을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이지만, 파라도시스는 원래 '전달'이라는 뜻입니다. 전통도 윗세대에서 아랫세대에게로 전달해 준 것입니다. 고추장 담그는 방법은 이런 것이야, 김치를 담글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를 전달해 주고 전수해 준 것, 그것을 전통이라고 합니다.

1-2. 복음과 전통의 관계

고린도전서 11장은 사실 바울을 굉장히 오해하는 장이기도 한데, 그것은 전통에 대한 바울의 입장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복음이 있고 전통이 있습니다. 복음과 전통 중에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까? 당연히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이니까요. 복음이 있고 전통이 있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고 어디 위에 서 있어야 합니까?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누구나 복음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는 전통이 하나도 없습니까? 교회 안에 전통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전통도 있고 복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과 복음의 관계를 어떻게 개념 정리를 하느냐, 어떻게 이 비율 배분을 적절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읽으면 바울을 오해하기 쉬우니까 이 전제를 먼저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복음 위에 굳게 선 교회라고 합시다. 그런데 복음이라고 해서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하고, 순도 100퍼센트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이라고 하면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과 복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한 공동체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헌금 수입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고, 전도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며, 그것이 복음이다, 이렇게 하면 동의하십니까? 교역자들도 자비량으로 사역해야 하고, 교회학교도 다 집어치우고, 교회학교를 하기는 하는데 아이들에게 간식 주는 것도 영혼 구원하는 데 아까우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건물도 짓지 말고 임대도 하지 말고, 교회는 헌금 수입의 100퍼센트를 다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렇게 하면 그런 교회가 과연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런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번 봤는데, 시작하다가 흩어지는 교회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이야기할 때 뒤에 한 단어를 더 붙입니다. 무엇을 붙일까요? 자주 하는 말인데, '복음의 본질'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데, 복음에는 알맹이도 있고 껍데기도 있습니다. 그 알맹이를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감싸고 있는 것이 전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과 전통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전통은 복음의 적이 되고 복음은 전통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과 전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좋은 전통이 복음을 감싸고 있어야 합니다. 좋은 전통이 그래야 복음의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 교회가 칭찬받을 것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전한 전통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1-3. 당시 문화와 머리 덮개

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기분이 굉장히 나쁩니다. 어디가 나쁘냐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부분이 굉장히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럴 수가 있느냐, 나는 바울을 그렇게 안 봤는데 하면서 바울이 얼마나 공격을 받는지, 지금까지 욕먹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천국에서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계속 욕먹고 있습니다.

계속 읽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만 가지고 바울을 욕하면 안 됩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무엇을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여자들이 교회에 올 때는 머리에 너울을 쓰라는 것입니다. 흰 천을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것이 전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여기에 기분 나쁘시죠? 왜 내가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느냐고 지금 여기에 동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를 봅시다. 지금 이것도 계속 동의가 안 됩니다. 그런데 질문을 보십시오. 당시 교회 공동체 전통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어떤 관계로 이해되었느냐,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남성과 여성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 아닙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기분 나쁘시죠?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진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이 좋겠다, 그것을 내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일러줬는데 너희들이 그 전통을 잘 지키니 고맙다, 칭찬할 만하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1-4. 바울의 진의

그러면 진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11절과 12절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성경에서 접속사가 중요한데, 접속사 중에서 역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습니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이것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 말, 이것이 성경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내려온 전통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현재 우리가 지금 바울이 그 당시 복음 전할 때 그 당시 교회들에서 여자들이 예배 시간에 공동체 회중 예배 때 머리에 너울을 쓰고 있으니 이것 좀 지켜달라,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여자가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죠. 예배 시간에 말입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보면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그 당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단호하지요? 바울이 이 전통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1-5. 할례와 전통의 차이

할례를 한번 예로 들어봅시다. 바울은 할례를 가지고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할례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본질에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할례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할례 전통이라 하더라도 이 전통이 복음을 훼손하면 바울은 거기에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오해를 받아가면서, 욕먹어 가면서, 돌맞아 가면서 싸웠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예배 시간에 지켜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전통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는 위치가 어디입니까? 이방 문화, 로마 문화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로마 문화는 전 세계 패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다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전부 다 로마의 식민지 도시들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신교 문화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음란하고 굉장히 퇴폐적인 문화입니다. 우리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도 말씀드렸는데, 곳곳에 신전이 있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고기는 신전에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래서 사람들이 시중에서 고기 사 먹기가 겁날 정도로, 이것은 다 신전에서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고 나온 고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기는 신전 제사가 굉장히 성행했습니다.

그런데 신전에 가면, 이방인 신전에 가면 반드시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신전 창녀들입니다. 신전 창녀들이 거기 오는 남자들을 유혹하는데, 이방의 종교가 다 음란합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보기에 민망한 옷을 입고, 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왔는데, 예배드리러 왔는데, 공동체 예배드리러 왔는데 사람들은 그런 인식과 그런 시각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그 고린도 문화에 있던 사람들이 어제까지 신전 제사에 다니다가 오늘 복음을 듣고 전도받고 예배당에 왔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들이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예배에 집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것입니다. 구별되고 차별되고, 그들과 우리가 단정하고 다른 모습을 보이게끔 머리에 너울을 쓰라, 이것은 관례다, 이것 가지고 시비 걸지 마라,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것 가지고 말 걸지 마라,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속사정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훼손하는 것입니까, 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의 방향은 항상 복음이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자기는 자비량하고, 복음 때문에 이방인에게나, 복음 때문에 유대인에게나,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다 손해 보고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그래서 예배 시간에 여성들이 길게 내려뜨린 자기 머리를 자랑하지 말고 머리에 흰 너울을 쓰고 단정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예배당에 나온 사람들이 '아, 여기는 이방 신전 예배와는, 제사와는 다른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속사정이,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그 맥락을 다 압니다.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알고, 편지를 쓰는 바울은 너무 잘 알고, 이 편지가 회람되어서 그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갈 때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모르니까 오늘의 관점으로, 오늘의 문화적인 시각으로 이것을 읽으니까 바울이 나쁜 놈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막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이 사람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왔는데 좀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싶다, 왜 나에게 흰 너울을 쓰라고 하느냐, 그래서 논쟁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해되시죠?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고 바울 선생님을 충분히 납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1-6. 전통이 복음을 훼손할 때

예수님 시절에 예수님께서 전통과 말씀, 전통과 복음을 가지고 굉장히 논쟁을 심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내신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9절과 10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십계명에 나옵니다.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복음이고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전통을 지키려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7장 11절과 12절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고르반, 아시지요?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전통에 의하면 자기 집에 가장 귀한 것이 있으면 고르반이라고 외쳐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에 먹을 것이 있습니다. 아주 맛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르반이라고 해버리고 성전에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전에도 100퍼센트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먹고 자기 자식 주고 부모는 공경하지 않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고르반이라는 전통으로 다 수렴시켜 버리고 말씀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자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할례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니까 목숨 걸고 싸웠고, 우리 예수님도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복음의 본질과 말씀을 훼손하니까 예수님이 이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1-7. 복음을 위한 전통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 내용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혹은 좋은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복음을 뒷받침하고 복음을 감싸고 복음의 싹을 틔우는, 그런 것들은 찾아서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 좋은 전통,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교회 초신자들에게 그것을 계속 알려주고 가르쳐 줘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수많은 교회들이 중직들을 임직할 때 헌금을 받습니다. 아시지요? 중직을 세울 때 헌금을 받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정해 놓습니다. 장로님은 얼마 내세요, 권사님은 얼마 내세요, 안수집사님은 얼마 내세요. 그것이 좋은 전통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한 부부가 그것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고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드리고는 싶은데 교회에서 일정액을 정해 가지고 딱 내려오니까 그것을 가지고 집에 가서 부부가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이런 더러운 교회 나는 앞으로 안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 사춘기 아이 이야기,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제가 경험하고 제가 만난 아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의 결정은, 그 전통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그 아이의 신앙과 그 공동체성을 전체 다 훼손해 버린 것 아닙니까? 그것이 전통입니까? 그런 전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부숴야 합니다. 바울이 할례 가지고 목숨 걸고 싸웠던 것처럼 그것은 깨부숴야 하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누가 와서 그것을 가지고 난리를 치더라도 박살 내야 합니다. 그런 것에 끌려가고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데 우리가 딸려가면,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모두가 조용한 동조자, 우리도 다 한편이 된 것입니다. 나는 낼 만하니까, 나는 뭐 할 만하니까 하면서 굳이 별나게 말하지 않으면 다 나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전통은 많습니다. 좋은 전통대로 우리가 세워 가면 됩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 새가족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는 장로님들을 그렇게 막 부려 먹어도 돼요?" 그래서 "제가 장로님을 부린 적이 없는데요"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토요일 날 오실 때마다 우리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비전센터 계단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논슬립 테이프 붙이는 것을 보고, 또 그다음 주에 오니까 지하에서 무엇을 먹어가면서 막 청소하고 하는 것을 보고, 야 딱 두 번 교회에 토요일 날 왔는데 딱 두 번 우리 장로님들이 일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제가 딱 두 번 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옛날부터 원래부터 우리 장로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시고 그것이 전통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전통이 됐으니까 해야지요. 그렇게 전통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가고 그 전통 안에서 복음이 싹틉니다.

성경에 장로들이 교회에 와서 청소하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경에 없는데 자꾸 와서 나보고 중직자라고 교회에서 청소하라 그러고, 맨날 클린 사역하라 그러고, 설거지하라 그런다"고 짜증내고, "성경에 어디 있냐"고 막 이렇게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전통이 복음을 감싸는 껍질이 되어서 복음의 싹을 틔웁니다. 새가족이 그것을 보고 은혜를 받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런 전통은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좋은 전통은 이어가고, 되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복음을 깨뜨리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전통은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머리에 흰 너울을 쓰고 있으면 이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런데 내가 머리에 흰 너울을 쓰고 이 불편한 것이 오늘 이 교회에 초신자로 처음 나온 사람, 지난주까지 저 옆 신전에 비너스 신전에 가서 제사 드리던 사람이 와서 "여기는 좀 다르네" 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열 개 아니라 백 개라도 뒤집어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바울이 부탁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너희들이여, 지금까지 책망할 것만 많았는데 이것 하나 참 잘했구나, 그런 칭찬이라도 하나 받아야지요. 우리가 바울을 오해하시면 곤란하고, 바울은 그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서도 공동체에서는 좋은 전통은 만들어 가고 나쁜 전통은 깨부수고, 그렇게 해야 복음이 계속 드러나는 법입니다.

2. 책망: 주의 만찬에 대하여

2-1. 모임이 해가 되는 교회

이제 주의 만찬에 대하여, 성만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7절입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제 책망하는 것입니다. 11장은 칭찬하는 것 하나, 이제 책망하는 것 하나입니다.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모였는데 해롭다고 합니다. 왜 해롭습니까?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분쟁이 있습니다. 왜 분쟁이 있었습니까? 파벌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는데, 게바파와 그리스도파는 소수이고 사실은 제일 큰 파벌이 바울파와 아볼로파입니다. 이 큰 두 파벌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파벌이 생기면 그 파벌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교회 안에 당이 생기면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듭니다. 저 누군가를 흉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그 사람을 집중적으로 헐뜯고 집중적으로 성토하게 됩니다. 그렇게 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불만이 있으면 그 불만을 가지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울을 추종하는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파당을 만들고, 아볼로를 따르는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파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2-2. 성만찬 자격이 없는 자들

그런데 문제는 20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런 사람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할 권한이 없고, 권리가 없고, 자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떡을 뗀다고 하니까 맨날 시루떡, 인절미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빵입니다. 그 당시 빵은 하나의 큰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성만찬 할 때 제가 빵을 들고 이렇게 중간에 찢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의 공동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몸에 지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다 그 빵입니다. 다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미 교회가 나뉘어졌습니다. 이미 교회가 파벌로 나뉘어졌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로 나뉘어졌는데 어떻게 한 그리스도, 한 교회 공동체에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파당이 있는 교회는 성만찬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당 짓기에 그렇게 힘쓰고 당 짓기에 그렇게 골몰하고 애쓰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성만찬에 그렇게 참여하느냐, 하지 마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룩한 성도의 교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 나뉨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몸이셨는데 그 몸을 찢어 가지고 우리 각자에게 주셨는데, 그것을 받고 다시 나누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하나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치열하게 논쟁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되,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논쟁하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결론이 나면 거기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면 거기에 순종하고, 내 의견과 타인의 의견이 다를지라도 서로 감싸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2-3. 초대교회의 만찬

그런데 그 당시 초대교회의 성만찬은 지금 우리가 하는 제도화된 형식화된 성만찬이 아니고 식사였습니다. 그냥 모이면 빵 먹고 포도주 마시는 식사였습니다. 그 원형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주의 만찬,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모이면 항상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1절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바울파가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먹거리를 이렇게 숨겨 놓습니다. 빵을 숨겨서 바울파가 오면 이렇게 주고 아볼로파가 오면 없다고 합니다. 아볼로파가 열받습니다. 그다음 주에 자기네들이 먼저 와 가지고 빵을 먹고, 혹은 '우리가 오늘 다 오자, 빨리 와서 다 먹어버리자' 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도 다 마셔 가지고 취할 정도로 마십니다. 바울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주의 성만찬이, 주의 만찬의 식사가 이런 식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만약 우리 교회에서, 우리 시온 교구 식구들이 김 목사님을 추종하는 시온 교구 성도들이, 김 목사님과 홍 목사님이 서로 약간 다투는 것을 봤다고 합시다. 아니, 홍 목사님 나이도 어린데 김 목사님한테 대들고, 우리가 본때를 보여주자, 그래서 우리 식구들이 빨리 와서 밥 다 먹고 교회 밥 다 먹어버리자, 다 먹어버렸습니다. 우리 것으로 있을 수 없다. 안디옥 교구, 이제 우리 홍 목사님을 지키자, 우리가 와서 다음 날 밥 다 먹어버리자. 이것이 교회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먹어서 배 터져 죽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 먹어서 시장합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이렇게 파벌로도 나누어져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가 종도 있고 자유인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교회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올 수 있습니다. 팔자 좋은 자유인은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밥 먹으러 일찍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은 일이 끝나야 올 것 아닙니까? 실컷 일하고 배고파 죽겠는데 왔더니 다 먹고 없습니다. 이것이 먹는 것 가지고 얼마나 마음 상합니까?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이것이 무슨 성만찬이냐, 이런 식의 만찬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막 나무라는 것입니다.

2-4.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

우리 교회에서도 사실 우리는 매주 주의 만찬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만 해서 이것이 주의 만찬이 아니고, 식당에서 밥 먹는 것이 주의 만찬입니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먹어야 합니까?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줄이 막 길게 서서 출입구 밖에까지 나가 있는데 나는 다 먹었는데도 그대로 앉아 가지고 커피까지 마시고 있으면 안 됩니다. 다 먹고 빨리빨리 일어나야지요. 빨리 자리 비켜주고요. 그리고 거기 보면 조그마한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안쪽 자리부터 채워서 앉아주세요.' 바깥에 앉아 가지고, 식판 든 사람이 안으로 못 들어가게 밖에 있으면 자리가 저 안에 한두 개가 남아 있는데 길 막고 앉아 있으면 곤란합니다. 나랑 아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밥 먹으려고 그렇게 길에서 있으면, 길 막고 있으면, 오늘 그런 모습을 바울이 봤으면 "너희는 길도 터주지 않고 너희끼리 이야기하고 먹는다고 배고픈 사람 세워 놓고 있느냐" 뭐 그럴 것 아닙니까? 비슷한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하는 사람들은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식사하고, 교회에서 차 마시고, 교회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고, 어른들이 오시잖아요, 노인들이 오십니다. 노인들이 어떻게 허리 구부정해서 줄 서서 식판에서 밥 받아서 드십니까? 어른들이 계시면 앉아 계시라고 하고, "제가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앉아 계시라고 해야 합니다. 새가족이 오면 새가족들에게 배려하고, 그것이 배려하고 섬김입니다.

주의 만찬은 그래야 거룩한 성만찬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성만찬, 만찬에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하고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식당에 와서 밥 먹다가 마음 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성찬식 할 때만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 우리는 거룩한 주의 만찬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성만찬, 그리고 그런 것들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하나의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2-5. 주의 만찬의 기원

주의 만찬의 기원을 말해 봅시다. 23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내가 지어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빵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축사, 예수님이 빵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오병이어가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만찬은 최후의 만찬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벳세다 들녘에서 한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 거룩한 식사를 우리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식사하는 것은 반찬이 없어도 맛있는 것입니다. 국수를 줘도 맛있고 그냥 밥하고 김치만 줘도 맛있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입니다. 들녘에서 그 빵과 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고 배부르고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그래서 맛있는 것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최후의 만찬 때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진짜 제자들만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성만찬은, 아닙니다. 벳세다 들녘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 여자 노인 어린이 합하면 수만 명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까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는 말은 오고 올 모든 인류,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빵을 떼고, 함께 떡을 떼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2-6. 나를 기념하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 '기념'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꼭 헬라어 중에 한 단어만 기억하라고 하면 저는 이 단어를 추천하고 싶을 만큼, 왜냐하면 이 아남네시스는 플라톤도 굉장히 중요하게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기억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러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밥 먹을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마다 말입니다. 여러분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카페에서 커피 마실 때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떠올리십시오. 별로 안 떠올리시죠?

예수님을 떠올리라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최후의 만찬에서, 벳세다 들녘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 수만 명을 먹인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요? "예수님, 해가 저물었습니다. 들녘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가서 자기들이 알아서 사 먹고 오게 하십시다" 그랬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든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하든지 대접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 혼자 이 자리 차지하고 오랫동안 이 자리에 앉아서 밥 먹고 남들이야 줄 서건 말건 그런 마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한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제대로 먹이고 잘 먹이고 잘 섬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 카페 이름이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름을 너무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잔칫집에 와 가지고 돈 내고 밥 먹는 사람 봤습니까? 요즘은 부조하고 먹으니까 그렇지만, 진짜 잔치는 그냥 먹는 것입니다. 그냥 와서 축하해 주고 먹고, 혼인잔치입니다. 가나요. 차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잔칫집처럼 우리 성도들이 다 십시일반해서 헌금해서 거기에서 다 대접하고 섬기는 것, 그것이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어떻게든 먹이고 어떻게든 섬기고자 하는 마음,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떼주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억하라" 이 말은 너희들이 앞으로 나를 전도하고 전할 때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전하고 나누고 먹이고 입히고 목자의 심정을 가져라, 그 말씀입니다.

25절입니다. "또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역시 '기념하라', 아남네시스,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잔을 마실 때마다, 교회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교회에서 커피를 마시고 차를 마실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그것 꼴랑 1년에 몇 번 있는 성만찬 때, 그 거룩한 의식에만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 초대교회 성만찬의 식사, 공동 식사, 공동 식사할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26절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금까지 행한 주의 만찬은 그들에게 왜 죄가 됩니까? 27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 짓는다고 했습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기념하라고 했는데, 기억하라고 했는데 기억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는데, '바울파 왔어, 우리끼리 다 먹어, 아볼로파 주지 마',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취해버립니다. 그다음 주는 아볼로파가 더 일찍 와서 다 먹고 마시고 취해버립니다. 종들은 늦게 와서 밥이라도 하려고 왔는데 팔자 좋은 사람들이 와서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기억하는 것입니까? 그 성만찬이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게요. 예수님을 기억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든지 먹이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든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빵 하나라도 물고기 하나라도 더 나눠 주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교회는 항상 밥 먹을 때마다 예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안 됩니다.

2-8. 자기를 살피라

28절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살피다, 자기를 살피다, 헬라어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남을 조사하는 것 잘 아십니다. 상대방 분석하는 것 잘하십니다. 저 사람 오늘 말투가 이래, 저 사람 오늘 행동이 나한테 이래, 내 남편 조사 잘하고 그것으로 막 추리도 하고 막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보면 작가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다음 줄거리 만들어 가지고요. 남을 살피고 이웃을 살피고 되지도 않는 것 자꾸 살피는 것은 잘하시는데, 나를 살피는 것은 잘 못합니다. 나를, 내가 주의 전에서 성만찬을 하기에 합당한가, 나는 오늘 이 식당에 들어가고 이 카페에 들어가는데 예수를 기억하고 들어가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주방에서 직접 음식을 하시는 분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하고, 섬기는 분들도 그렇고, 드시는 분들도 그렇고, 자기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가 있는가,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가 있으면 성만찬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요.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성찬식이 다음 주에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죄짓지 말고 자기를 살피고 경건한 생활하고 오십시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좁은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먹거나 마시거나 다 자기 안에 예수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조사해 봐야 합니다. 예수가 있는지. 예수님이 없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구하고, 주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고, 그 상태에서 밥 먹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차 마시고, 그 상태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임재해 있는 상태에서 밥 먹으면 식사하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 우리 교회 식당에서 배식 받는데 저 위에 성경 말씀 써 있는 것 보셨습니까? 밥 먹느라 바빠 가지고 무엇이 있는지 보지도 않으셨지요? 제가 그것을 써놨습니다. 제가 그것을 써서 붙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왜 써놨겠습니까? 그것 하도 말이 안 이뻐서요. 우리는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칭찬하는 이야기요.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여름에 땀 흘리고 겨울에 춥고 설거지하고 봉사하고요. 그러면 밥 먹고 나가다가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짜, 이게 뭐야" 하면 확 집어던지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다고요. 집어던지고 싶다고요.

저도 그것을 느껴봤는데, 1년에 한두 번 집에서 설거지할까 말까 하는데 설거지했더니 "물이 튀었네" 뭐 이러니까 "내가 안 한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집에 아내가 열심히 밥하고 설거지하면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해야지, 그런데 잔소리하면 밥도 못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이제 갈수록 잔소리가 좀 줄고 있는데, 그런 것입니다. 먹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우리 속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가 있는지, 그리고 성찬에 임하라고 했습니다.

29절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먹을수록 죄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밥 먹으면 한번 또 죄 짓고, 내 속에 예수 없이 밥 먹으면 또 죄 짓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1년에 52주 죄 짓는 것입니다. 잘 살펴야 합니다.

2-9. 서로 기다리라

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 다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저기 철수네 집에서 지금 종살이하고 있는 영수가 올 때까지 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바울을 좋아한다 할지라도 아볼로파의 누구누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 먹고 다 기다리라, 서로 기다리라 그랬으니까 서로 모이면 함께 먹어라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라."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 가지고 다 먹어 치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굉장히 실질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하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먹는 문제 때문에 이것이 아주 식당 질서가 엉망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저는 바울이 하는 말이 무섭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가서 식당 질서를 잡겠다, 그때 두고 보자, 이 말입니다. 가서 내가 이렇게 지금 편지 써놓고 이렇게 편지 쓴 대로 너희가 하는지 하지 않는지 내가 갈 때 바로잡을 텐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밥 먹는 것 질서 잡아라, 그 말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전통과 복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회 안에서 공동체 식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잘 실천해서 교회가 더 복되고 행복하고, 복음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힘을 주고 복음의 본질 안에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본질 붙잡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본질을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아름다운 전통, 잘 채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좋은 전통 만들어 가고 계승하도록 도우시고, 복음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전통은 그 어떤 것이든지 누가 만들었든지 과감하게 부수고 파괴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전달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떡을 떼거나 함께 모이고 먹고 마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이 자리에서 더 나누고 더 베풀고 더 섬기셨을 텐데, 예수님이라면 감사하다고 인사하셨을 텐데, 우리를 잘 살펴서 예수님이 있는지 내 마음속을 조사하고 살피고 함께 식탁 공동체 교제에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은혜로운 교회, 복된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 만들어 가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