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10 - 하나님의 열심 (고후 11장)
본문: 고린도후서 11장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오늘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제목으로 고린도후서 열 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영적 성장과 영적 전투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해서 가질 수 없습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결국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의 반대 개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자기 열심이라는 교차되는 반대 개념도 함께 살펴보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셨는지도 함께 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11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11장과 12장 전체를 보면 바울의 자기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 자랑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자랑을 좀 합니다. 11장과 12장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말씀이 가장 인간적이고 또 바울의 사적인 고백을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 곧 자기 자랑을 하기 전에 용납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그런데 자기 자랑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 자랑입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11장과 12장은 그래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 열심의 구성 요소
2절은 우리가 아까 읽었던 말씀인데,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은 우리 귀에 좀 익숙합니다. 유명한 책 제목이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하면 당장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성실하게 일하시는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하면, 하나님의 열심은 상당히 수준 낮은 별로 말할 거리가 없는 열심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열심이신가 하는 방향이지요.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열심이십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입니다. 구원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은 열심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일에 열심을 별로 내지 않으십니다. 곧 이 열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젤로스(ζῆλος)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열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당신의 열정을 불태우시는가?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모든 전력을 다하시는가? 구원입니다. 인간의 구원이겠지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모든 각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열심을 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의 방향이 구원이라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1-1. 지속성
그런데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열심이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속성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은 열심을 내시는가? 끝까지 지속적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통해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고 응답했습니다.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을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시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넘어질 때도 있잖아요. 죄 지을 때도 있잖아요. 하나님 부르신 약속의 땅에 왔는데 기근이 있으니까 애굽으로 갑니다. 다시 불러 올리십니다. 나중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무려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한 번도 찾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고 할례 언약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또 이삭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구원을 향한 방향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집요하게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함께 가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다음 시험에 듭니다. 이삭에게 푹 빠집니다.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네 아들, 네 독자, 네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가십니다. 지속성을 가지십니다.
1-2. 모든 것을 걺
세 번째가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셨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지속성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의 마지막 최종 절정은 모든 것을 다 거셨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올인입니다. 다 거셨습니다. 어디까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정도 되어야 우리는 열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방향, 두 번째는 지속성, 세 번째는 다 걸기.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의 핵심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열심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2. 바울의 열심과 자기 열심
그러면 이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이 말은 나도 하나님처럼 너희의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지속적이겠다, 포기하지 않겠다, 집요하게 너희의 구원을 계속해서 요청하겠다, 그 일을 위해서 애쓰고 힘쓰겠다, 그다음 내 모든 것을 다 걸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아닙니까?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어떤 것이 우리에게 부족합니까? 다 부족한 사람도 있고, 한 가지만 부족한 사람, 혹은 두 가지가 좀 모자란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열심을 낸다고 표현할 때, 사실은 자기 열심인데 하나님의 열심으로 포장되어 있는 가짜 열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에 대입해 보면 됩니다. 나는 방향성이 구원을 위한 열심인가? 우리 방향이 어떻습니까?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열심을 내고 있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가 교회 사역을 하고 감당하고 직분을 맡고 애쓰고 힘쓰고 있는 일이 과연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인가?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 순수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자기 의에 대한 열심이 있고, 자기 명예와 자기 체면을 위한 열심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나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 여기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닮아가고 배워 간다는 뜻인데, 이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 자기 열심은 방향이 틀려 먹었습니다. 내 영광을 위해서, 타인의 구원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자기 열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이 자기 영광을 위한 열심은 당연히 지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자기 영광을 취했습니다. 그러면 먹을 것 먹었잖아요. 그것이 끝이지요. 더 이상 열심 낼 이유가 있습니까? 자, 내 목표가 직분이었습니다. 내 목표가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면 끝났는데, 더 이상 열심을 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패해도 열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이 꺾입니다. 그것이 자기 열심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다음,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남길 것 다 남깁니다. 그다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내 모든 전력을 다 쏟아붓지 않습니다. 마치 직장 생활 하듯이 말입니다. 직장에서 전력을 다 쏟아부으면 가정에서 내가 쏟을 힘이 없으니까, 직장에서는 한 30퍼센트, 가정에서 또 한 30퍼센트, 여가 생활을 위해서 20퍼센트, 그다음에 개인 생활을 위해서 또 얼마,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포트폴리오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다 쏟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그냥 시간 되면 퇴근하고, 시간 되면 출근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열심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점검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감히 우리 입에 하나님의 열심을 제가 담겠습니다 하는 말을 하려면 방향을 점검하고, 지속성을 점검하고, 그리고 다 걸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자기 열심입니까? 다 걸지 않았습니다. 다 내놓지 않았습니다. 자기 것인데 얼마는 숨기고 얼마만 가져왔습니다. 그래 놓고 거짓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지요. 자기 열심이지요. 자기 명예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걸지 않습니다. 그것은 복음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사역을 하거나 그가 했던 모든 구원 사역과 복음 사역은 하나님의 열심을 닮아서 "나도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대단한 자기 결단이고 대단한 헌신이요 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본받으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그 열심의 목표가 영혼 구원인데, 이 과정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열심히 내서 그 열심을 가지고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방향이, 목표가, 그 과정에서 원했던 목표는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만들어서 그리스도와 중매를 서려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 62장 5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우리 성경은 항상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그리스도가 신랑이고 우리 각자는 다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신랑을 기쁘게 하는 신부의 요건을 그리스도가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순결입니다. 거룩한 신부. 마치 세마포 옷을 입은 것처럼 그 행실이 거룩한 신부. 그것만 요구했지, 외모를 요구했다거나, 실력을 요구했다거나, 혼수 몇 가지를 요구했다거나 이런 것은 일절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위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깨끗하고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야 된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열심을 내겠다. 결국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만큼 순결하고 정결한 처녀가 되면, 그런 자들이 되면 구원받는 것이니까, 구원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니까, 난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고백이요 목표요 방향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런 교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방향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여기 다 쏟아붓고 걸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되면 가장 복음적이고 행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질투하시는 하나님
자, 그런데 출애굽기 20장 5절 말씀을 보시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질투, 하나님의 질투가 여기 두 구절을 제가 적어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지 않고 자기 열심을 내는 자, 곧 영혼 구원을 위해서 애쓰지 않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게 엎드리고 무릎 꿇는 자를 하나님은 질투하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런 자를 하나님은 소멸해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바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3절 보시면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라고 합니다. 자, 여호와를 위한 열심,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도록 뱀이 가만히 둡니까? 사탄이 가만히 둡니까? 우리가 복음을 위한,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지고 지속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걸도록 가만히 둡니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은 그것을 중간에서 계속 방해합니다. 그것을 지금 말씀하는 것이지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그 마음이 부패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어떻게 유혹합니까? 진실함과 깨끗함을 어떻게 어지럽힙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습니다. 그 순간 하와의 마음에 딱 떠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 선악과 먹지 말라 그랬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는데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 금지된 한 가지가 전부인 것처럼 하와의 마음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불신이 생깁니다. "아, 하나님 나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 그것이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원망거리가 들어오잖아요. 우리가 지속성을 가지고 복음을 위한, 구원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쭉 나가는데, 그때 우리가 흔히 시험에 들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때 원망이 들어옵니다. "아, 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그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금지된 것 말고 허락된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그 반대의 것들을 말입니다. 만약에 하와가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을 그때 입으로 읊었을 것입니다. 뱀에게 말입니다. "야, 하나님은 사과도 먹으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딸기도 먹으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감도 먹으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다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다 누리라고 하셨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 말고는 나에게 99.9퍼센트 다 허락하셨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부심도 생기고 원망이 떠나갑니다. 이미 나에게 허락된 것들, 감사한 것들을 떠올려야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뱀이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먹어 버린 것이지요. 이 교만이 진실함과 깨끗함을 어지럽힙니다. 교만. 이 교만이 굉장히 위험한 죄잖아요. 우리가 이사야서 새벽기도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열방이 심판받은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쳐버리십니다.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겸손한 자는 세우시고 교만한 자는 눌러 주십니다. 자, 그래서 사탄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셔야 됩니다.
4. 고린도교회의 세 가지 잘못
자, 그다음 4절 보시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떤 잘못을 했습니까? 자, 바울은 참 바울이 말하는 것을 보면 간단명료한데, 그 간단명료한 것을 풀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세 가지 잘못을 했어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비꼬는 것이지요. 그러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 가지를 용납했습니다. 첫째 다른 예수, 둘째 다른 영, 셋째 다른 복음.
4-1. 다른 예수
그러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이것을 밝혀야 되잖아요. 우리가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것을 다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첫째,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할 때 용납했습니다. 다른 예수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초대교회 상황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데, 이것은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이단 중에 가장 주류가 되었던 이단이 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 이 영지주의 이단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셨음을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까지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이런 이단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는 바로 이 이단들입니다. 예수께서 몸으로 오셨음을 부정하는 이단.
그런데 그들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요? 자, 우리 몸을 보면 더럽잖아요. 안 씻어서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냥 추악합니다. 생각하는 것. 내 손은 항상 죄짓는 데 사용되고, 내 발은 죄를 향하여 달려가고, 이 몸뚱아리는 항상 죄의 도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악된 육체에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니, 거하신다니, 이것을 이 사람들은 못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더러운 육체에는 오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가짜 가(假) 자, 나타날 현(現) 자 아닙니까? 마치 우리 몸에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눈속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가현설 이단들인데,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단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이 됩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온몸이 찢기시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오고 피 흘리고 돌아가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이 됩니까?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눈속임의 쇼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이단들이잖아요. 심각한 이단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단들, 그런 가짜 복음, 우리가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우리 육체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이 생깁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방향도 그런데, 어차피 버린 몸, 어차피 더러운 몸, 그냥 방임해 버립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자들이 생깁니다. 어차피 육체는 타락했으니까, 더 이상 정화될 것도 없고 더 이상 깨끗해질 것도 없고,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타락한 대로 방임하고 살잖아요. 마구 죄짓고 말입니다.
또 두 번째 방향은, 이 육체가 더러우니까 막 금욕합니다. 자기를 찌르고 채찍질하고 피도 내고. 양 극단이 생깁니다. 금욕주의자 내지는 쾌락주의자. 교회 안에 이런 양 극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질그릇 같은 이 육체 속에 보배가 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내 연약하고 더럽고 추악한 내 몸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보배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복음인데, 그 복음을 버리고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인 것이에요. 그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4-2. 다른 영
두 번째,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영. 그러면 바울이 전한 영은 무엇입니까? 성령이지요. 성령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성령은 평안을 주는 영입니다. 성령은 내 속에 진짜 성령이 임하면 내 환경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이 찾아오고 자리잡습니다. 그런데 거짓 영이 들어오면 평안이 없어요. 항상 불안해요.
또 성령은 일치의 영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를 일치시켰던 것처럼 우리 가정을 다 일치하게, 하나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거짓 영은 분열시킵니다. 잘못된 영은 항상 사람을 나누게 하고 분열시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둠의 영에게, 거짓 영에게 내가 사로잡혀 있는가? 나 때문에 계속 모든 것이 분열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거룩한 분열이 아니고 계속해서 내가 자꾸 공동체를 나누고 분열시키면 그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 하나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영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여 버린 것이에요. 분열의 영, 거짓의 영을 말입니다.
4-3. 다른 복음
세 번째,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할례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다른 복음이잖아요. 우리가 갈라디아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고린도 교회가 다 받아들였습니다.
5. 바울의 교회 사랑
여러분, 이런 교회가 만약 오늘 이 현실에 있다면, 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희망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 교회를 거들떠보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라면 전 짐 싸서 도망갈 것 같습니다. 보따리 싸서 말입니다. "아, 도저히 희망이 없다, 여기는." 아니, 이단들이 들어와 있잖아요. 이미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있고,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고 다른 영이 들어와 있고, 다른 복음이 들어와 있는데, 거기서 목회 어떻게 합니까? 그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도 열심을 내노니"라고 했습니다. 고쳐 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끝까지 집요하게 투쟁해서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또 하고 또 해서 끝까지 쫓아가서 구원을 향한 열심을 내서 회개시켜서 정결한 신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겠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분이 무서울 정도로 놀랍고 집요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데 모델이 있어야 되잖아요.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내가 이 교회를 사랑한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 봐야, 교회가 필요한 곳에 내가 서 있는 것 아닙니까? 섬기는 것, 봉사하는 것. 보이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교회가 필요하다는데 내 몸의 수고와 물질의 헌신과 수고를 하는 것. 그런데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피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동역자가 되는 것.
바울이 이런 열심을 내면, 지도자가 이런 열심을 내면 해 볼 만 하잖아요. 함께하는 사람들, 디모데도 있고 실라도 있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같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해 보자. 이 교회를 한번 다시 세워 보자." 그렇게 이제 하는 것이에요.
6. 겸손과 복음 전파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5절 보시면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이 조금 낯설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 누가 딱 떠오르십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내가 지극히 커, 나는 대단한 사도들이야,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야, 별 볼 일 없어"라고 말한 것이 아니에요. 우린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바울을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서 그들의 거짓 추천장을 받아서 와서 이 교회 성도들에게 미혹한 사람들이 "야,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 한번 비교해 봐라. 상대가 되는가?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3년 동안 따라다녔던 분들인데, 바울, 예수님 본 적 있냐? 예수님과 한번 대화라도 해 봤어?" 이런 식으로 계속 중간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보다 부족한 것이 나는 조금도 없다."
6절.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자, 바울이 말에는 부족하다고 했는데, 제가 밑에 적어 두었습니다. 이디오테스(ἰδιώτης). 부족한, 세련되지 못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말이 세련되지 못했다. 동의하십니까?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바울의 말이 직설적이거든요. 복음을 전할 때 상당히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지 않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시간이 없잖아요. 바울이 뭐 거기서 앉아 가지고 1년 6개월 동안 데리고 앉아서 한 사람 가르치겠습니까? 정확하고 직설적으로 바로 꽂아넣어야지요. 그러니까 그 말이 거침없기 때문에 세련되지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열매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과를 봐라. 내가 전도하고 복음 사역을 한 그 열매, 그 일을 봐라. 이런 뜻입니다.
7절.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나의 겸손이 너희에게 죄냐? 이런 말입니다. 이것도 직설적이지요. 사실 이런 식으로 성도들에게 잘 표현하지 않는데, 그런데 바울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이제 겸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되는데요. 바울은 7절에 그랬습니다.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했다." 복음이 전해지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스탠스가 중요합니다. 한없이 낮아져야 됩니다.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려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은 자기를 한없이 낮췄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없이 자기를 낮췄다고요.
우리 올해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140주년 되는 해인데,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복음을 들고 들어왔지 않습니까? 그때로부터 140년입니다. 이런 논쟁도 있어요. 4월 2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부산에 정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3일 후에 인천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사실 부산 땅에 먼저 복음을 갖고 온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인데, 뭐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3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날이 부활절이었다는 사실. 1885년 4월 5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주일에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이래 140년이 이제 지났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조선에 선교하러 오신 선교사님들의 자세를 한번 보세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섬겼는가? 자기 본국에서 의사였습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빵에다가 버터 발라 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와 가지고 화장실도 수세식이 없습니다. 학질, 각종 전염병, 이게 너무 참혹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여기 와서 이 조선의 결혼식대로 혼례, 전통 혼례도 올렸습니다. 여기서 선교사들끼리 결혼하는데 전통 혼례를 올립니다. 신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볼거리 준다고 가마도 타고 다녔고, 다리 긴 사람들이 땅바닥에 앉아서 생활했고, 조금만 앉아 있어도 다리에 쥐가 내려 가지고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분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그냥 그대로 낮아진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우리와 똑같이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 전했던 것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학벌을 자랑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지식과 사고를 자랑하면 복음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한번 실패했잖아요. 아테네에서 철학적으로 아뢰고 해서 설교하다가 한번 실패하고, 바울은 그때 이후로 고린도전서 1장을 쓸 때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철저하게 낮아집니다. 철저하게 말입니다.
7. 기도와 성령 충만
그래서 그 이야기를 창세기 11장과 사도행전 2장을 제가 밑에 적어 두었는데,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자, 바벨탑 사건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탑을 쌓아 가지고 높이 높이 쌓아 가지고 이 건축가로서의 이름을 내가 내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탑을 쌓는 사람들은 전부 다 딱 한 가지 목적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내는 것. 자기 이름을 서로 내려고 하니까 그 탑을 쌓는 사람들끼리 언어가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 유명해지고 싶으니까. 서로 다 전부 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으니까 자기 설계도대로 하자고 할 것 아니에요. "내가 하는 방식대로 해야 이것이 옳다. 그래야 내가 나중에 내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서 패가 갈라져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언어의 혼잡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이름을 내고 싶어 합니까? 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 합니다. 다 자기가 유명해지고 싶어 합니다. 다 자기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서로 언어가 소통이 안 됩니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 같은 언어를 쓰는데, 그런데 서로가 똑같은 말을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 말을 듣습니다. 그 본질,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요. 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서 그런 것은 똑같지요. 교회 안에서도 또 목사님들이 모인 곳에서도 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 하니까 목사님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 아니겠어요? 교회가 분열하고 다투는 것도 자기 이름을 내고 싶으니까, 대화는 하는데 대화가 안 되는 것이에요. 소통하는데 이것이 언어의 혼잡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의 혼잡이 언제 풀리느냐? 성령이 임하시니까 풀리지요. 성령이 어떻게 임합니까? 사도행전 2장 1절에 보니까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기도했지요. 마가의 다락방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이래서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우선 기도하면, 제대로 기도하면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기도는 제대로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요. 제대로 하는 기도, 정상적인 기도. 정상적인 기도는 자기를 돌아보게 합니다. 나를. 나를 돌아봅니다. 나를 돌아보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리의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합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남을 정죄하고 남을 보는 기도가 잘못된 기도고, 제대로 된 기도는 자기를 돌아보는 기도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면 죄인 중에 괴수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하고, 나 같은 것 직분 주시고 살게 하시고 호흡 주시고 오늘도 나에게 직장과 일터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렇게 겸손해지는 것이에요. 기도하다 보면 겸손해집니다. 제대로 기도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는 무릎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겸손하게 되거든요. 나는 한없이 낮고 연약하고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자,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언어가 하나가 된 것이에요. 내가 낮아지고 겸손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나에게 왜 충만하게 임하지 않느냐?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니까. 내가 너무 시퍼렇게 눈 뜨고 내 자아가 살아 있으니까 성령이 나를 주관하고 이끌고 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려면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가지고, 허리를 꺾어 가지고, 무릎을 딱 꿇려 가지고, 목을 꺾어 가지고, 그것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그렇게 덮어놓고 고난 주고 싶어 하는 분이 아닙니다.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요. 그래서 기도하고 내가 없어지고 내가 모자라는 존재라는 것이 인정되면 그때 내가 비워지잖아요. 그 자리에 성령이 오시는 것이에요.
성령이 오는 원리는 이렇게 단순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러면 언어가 통합니다. 왜? 내가 내 주장을 하지 않으니까. 내 이름을 낼 이유가 없으니까. 내 목소리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언어가 소통이 되는 것이에요.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못 알아듣는 말 하는 것이 방언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말이 서로 소통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에요. 저분의 말을 내가 충분히 납득하겠고, 그 말을 내가 이해하고, 그분의 마음을 내가 알아듣겠고, 그것이 방언이에요. 그것이 방언 통역입니다. 과거에 나누어졌던 분열, 언어가 혼잡해졌던 것이 기도하고 겸손해지면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잖아요. 다시 7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했다"고 했잖아요. 복음 전할 때는 자기가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의 주제인데, 하나님의 열심의 목표, 방향성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을 다 걸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죽여야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계속 낮춰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열심, 복음 사역, 구원 사역에 내가 제일 걸림돌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세요? 영혼 구원을 위한 사명에 내가 걸림돌이 된다니까요. 그것이 걸림돌로 끝납니까? 조금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사탄의 앞잡이가 되는 것인데, 영혼 구원을 위한 자리에 내 자아가 살아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적어 둔 것입니다.
8. 복음에 빚진 자
자, 이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또 이런 이야기도 좀 합니다. 좀 깨달으라고 말입니다. 8절.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너희가 누굽니까? 고린도 교회이지요. 고린도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헌금을 받아왔다는 이야기에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탈취한 것이라." 참 좀 당황스럽지요.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막 해요. 탈취했다.
이것이 좀 잘 봐야 되는데요. 이것이 헬라어로 술라오(συλάω)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것이 군사 용어입니다. 갑옷을 벗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 군인들에게 갑옷이 무엇입니까? 군인들이 갑옷 벗기면 어떻게 돼요? 무장해제되잖아요. 그것이 곧 죽음이거든요. 군인들은 무기는 잃어버려도 갑옷은 벗지 않습니다. 무기는 싸우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고, 칼이 잘릴 수도 있고, 화살을 다 써 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입고 있는 갑옷은 내가 죽어야지 상대편이 와서 내 갑옷을 벗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의 전리품으로 가져가겠지요.
바울이 '탈취한 것이다'라고 한 이 말은 그들에게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긁어왔다는 뜻입니다. 너희를 섬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걷어서 온 것이 아니고 그 교회 뿌리까지 다 뽑아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한 것이에요.
그러면 어느 교회에서 가져왔습니까? 9절에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 세 교회가 떠올라야 된다고 했습니다. 어디입니까? 데살로니가, 빌립보, 베뢰아.
빌립보 교회는 좀 형편이 나아요. 빌립보 교회는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을 보시면 빌립보 교회는 이렇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자, 주고받는 일에 마게도냐를 떠나서 어디로 갔어요? 아가야로 갔잖아요. 그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다 줬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바울이 그것 말고요. 여기 나오잖아요. 9절에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고린도 교회를 목회할 때였다는 이야기예요.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비용을 줬어요. 선교비를. 가서 쓰라고. 가서 열심히 복음 전하는 데 보태 쓰라고.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고 했어요. 마게도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가 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뭐 나올 것이 없어요. 거기는 아무리 파도 털어도 먼지밖에 안 나오는 교회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갑옷까지 벗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그 교회와 바울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 성도들이 선교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진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 진심을 알기 때문에 성도들이 복음 사역을 위해서 자기들 갑옷까지 벗어서 다 준 것입니다. 뿌리까지 다 뽑아서 준 것이에요. 이제 이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말이에요? 너희는 빚진 자라는 뜻 아닙니까? 너희 빚진 자가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똑같이 돈 걷어 가지고 갑옷 다 벗기는 것처럼 해서 다시 줘야 됩니까?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은 "너희가 복음에 빚진 자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전하지 않은 예수를 용납하지 말고, 내가 전한 예수만 받아들이고, 내가 전한 하나님의 영 성령만 받아들이고, 내가 전한 복음만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살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그것이 빚 갚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각 사람은, 우리 다 빚진 사람들 아닙니까? 누구에게든지 우리는 다 빚졌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고 목회자로 사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빚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들 따라다니면서 "그때 저한테 얼마 주셨으니까 제가 이자 쳐서 갚을게요." 그것이 진짜 빚 갚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제가 빚진 존재니까 열심히 복음 위에서 집 짓고 살면 그것이 빚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진 자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살아야 그것이 진짜 빚 갚는 것이에요.
우린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은 존재다. 그러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야 된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더럽히지 않고, 제대로 살아야 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도 기쁘시고 그분들도 은혜가 되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 교회가요. 많은 교회 돕잖아요. 도왔습니다. 많은 목회자도 돕고,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우리가 뭐 돈 받으려고 도왔습니까? 교회가 든든히 서 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기쁘잖아요. 그 교회가 잘된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그냥 밥 안 먹어도 배부르잖아요. 그런 것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하는 것은 "똑바로 살아라. 제발 똑바로 살아라." 그 말씀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10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아가야 지방, 이 지방에서 계속해서 이 자랑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12절.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자, 무슨 말일까요?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내가 해 온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지금까지 해 온 것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계속하겠다. 곧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방향성. 영혼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지겠다. 두 번째 지속성. 세 번째 모든 것을 다 걸고 하겠다. 그다음에 현실적으로는 자비량 목회하겠다.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 그 말씀이지요. 그 두 가지.
왜 그렇게 하느냐? "기회를 찾는 자들이" 기회를 찾는 자들은 누굽니까? 거짓 선지자들. 여기에 침투하려고 계속해서 노리고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에 우리와 같이 인정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나와 그들이 차별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을 전하는 자와 거짓 교사와의 구별, 그 차별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9. 선한 목자와 삯꾼
그들은 자기 열심으로 일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이 채워지면 떠납니다. 지속성도 없습니다. 자기 것을 다 걸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이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목자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을 한번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압니다. 각각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각각이라 그랬습니다. 자, "양들아 풀 뜯어 먹으러 나가자." 이것이 아니에요. 각각이라 그랬습니다. 양들이 수백 마리 있어도, 수천 마리 있어도 똑같이 생겼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 같고 다 똑같잖아요. 그런데 목자는 그 양들을 다 압니다. 우린 똑같이 뚱뚱한데 목자가 볼 때는 저놈은 좀 홀쭉이에요. 저놈은 조금 더 뚱뚱이고. 우리가 볼 때는 똑같은데 목자는 알아요. 그것이 우리 예수님이셔요.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지 않는 삯꾼 목자, 거짓 선지자는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관심이 없으니까. 그들이, 성도들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그들이 지금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들이 지금 어떤 가슴 아픈 일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관심이 없어요. 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니까. 나에게만 관심이 있거든요. 나만, 내가 먹는 것, 내가 누리는 것, 내가 여기를 통해서 이 양들의 젖을 내가 먹고 양고기를 먹고 양털 깎아서 그것 팔아서 돈 벌 궁리만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선한 목자가 아닌 삯꾼 목자가 그것을 알 턱이 있습니까? "저 양털 빨리 깎아야지." 그것만 생각하지. 알 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4절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두 번째, 선한 목자는 앞서갑니다. 왜 앞서갑니까? 양들이 시력이 좀 안 좋으니까 앞서서 가야 양들이 목자의 뒷모습을 따라올 것 아닙니까? 중간에 이리가 나타날지 위험이 닥칠지 어떻게 합니까? 선한 목자는 항상 양보다 앞서 갑니다. 미리 갑니다.
그런데 삯꾼 목자는 느긋합니다. "양 몇 마리쯤 뭐 늑대가 물어가거나 어디 도망가거나 없어지거나, 내 것 아닌데 뭐." 관심 없어요. 그것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열심으로 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12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해치느니라."
하나님의 열심의 마지막이 뭐라 그랬습니까? 다 건다고 했지요. 올인. 목숨을 버렸습니다. 선한 목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삯꾼은 결정적일 때 도망가 버립니다. 지금 여기 나오잖아요. 자,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목자를 보면 똑같이 생겼어요. 목자예요. 똑같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 목자가 진짜 목자인지 가짜 목자인지 알 길이 없거든요.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 삯꾼 목자에게 속고 있었잖아요. 바울이 지금 이것이 책망입니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왜 거기 속고 있었느냐? 그들은 자기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는 자를 찾아내고 분별하는 사람이 되거라." 그 말씀입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공부하고요. 이제 16절부터는 사실 12장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거든요. 기탄없이 자랑합니다. 그래서 16절부터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배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지셨고, 지속성을 가지셨으며,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겠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열심으로 충만한 적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디 하나님의 열심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높이지 않도록 도우시고, 복음 사역에 스스로 낮아져서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낮아지고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어서 오직 전하는 복음만 드러나고 나타나고 온 누리에 널리 전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높이지 않도록 도우시고, 겸손하게 낮출 때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들어 올리시는 놀라운 은혜도 함께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