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11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장)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지난주에 공부했던 내용의 연장선에서 11장 16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주제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에는 세 가지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구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열심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을 내십니다. 두 번째 요소는 지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중도에 지치거나 기분이 상하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구원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때로는 죄를 짓고, 때로는 도망가고, 하나님을 실망케 하는 일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열심의 구성 요소는 다 거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올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 내어 주셨습니까?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열심을 언급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해 일했고 앞으로도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과 반대되는 것이 자기 열심입니다. 그것은 지난주에 살펴본 바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용납했습니다. 바울이 한탄하고 안타까이 여기는 것이 세 가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용납한 것입니다. 다른 예수를 용납했다는 것은 곧 그 당시에 유행했던 영지주의 이단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영을 용납한 것입니다. 성령 외에 다른 영은 사탄의 영입니다. 성령은 일체의 영이지만 사탄은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고 분열시키는 영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탄의 영을 용납했습니다. 세 번째로 고린도 교회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갈라디아서에도 나오는데, 다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 이외에 할례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구원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상황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따져 보면 이것은 교회도 아닙니다. 사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교회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교회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계속해서 끝까지 너희를 살려내고야 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까지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1. 바울의 자기 자랑
이제 오늘 우리가 보는 11장 16절부터 12장까지는 바울의 자기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자랑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하는구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좀 그렇네'라고 보시면 안 됩니다. 바울이 진짜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약한 것입니다.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잘생겼습니다, 이쁩니다, 나는 물질이 좀 있습니다, 나는 집이 좋습니다. 이런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지,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싶고 강점은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자랑합니다.
그 전에 해야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좀 불편한 자랑처럼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용납하라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잘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약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해야 되는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는 자랑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함께 보려고 합니다.
1-1. 분별력의 중요성
바울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어떤 전제를 두고 있습니까? 16절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왜 이런 부탁을 합니까? 자기 자랑을 시작해야 되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이 자랑은 진짜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20절을 보시면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대단히 분노한 어조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면서 그 교회를 아주 제대로 잘 세워 놓았는데, 떠나고 난 이후에 거짓 교사들을 교회 성도들이 용납해서 이런 식으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분별력. 요즘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기가 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력은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의 양이 워낙 많습니다. 알고리즘이 계속 우리에게 정보를 띄워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편향된 정보입니다.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우클릭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우로 가고 좌클릭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왼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별력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영적 분별력이란 대단히 중요한데 이 영적 분별력을 가지려면 기초가 탄탄해야 됩니다. 영적 분별력의 기초가 어디에 있어야 됩니까?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 그런데 우리는 이 영적 분별력의 기초를 사람에게 두기도 합니다. 저 사람을 신뢰하니까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절대로 100% 신뢰할 대상이 못 됩니다. 목사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떠나고 나서 온 사람들, 그들이 추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으나 예루살렘 교회 유력한 인사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종이 한 장을 믿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냥 마음을 내어 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했고, 다른 복음을 전했고, 다른 영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그것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종말의 시대에 내 신앙과 내 믿음은 내가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살아야 됩니다. 절대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인터넷을 믿어서도 안 되고 유튜브에서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들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속해서 읽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바를 계속 씹어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과정이 재미있습니까? 매일같이 말씀 읽고 그것을 파고 계속 묵상하고 이 말씀이 어떤지 비추어 보고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힘듭니다. 매우 딱딱한 음식을 씹어서 소화시키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을 계속해서 해 줘야 내 영이 건강해집니다.
손쉽게 가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요즘 세대가 보면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3분 만에 정리하기' 같은 알고리즘이 뜨더라고요. 제가 왜 그런 것이 뜨나 했더니 예전에 비슷한 영상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미술사 5분 만에 정리하기' 같은 것을 제가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계속 '3분 만에 정리하기', '5분 만에 정리하기'를 계속 띄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봤습니다. 구약 성경을 도대체 3분 만에 어떻게 정리하나 보니까, 진짜 혹하더라고요. 다 알 것 같습니다. 3분 만에 보니까.
그런데 그것 다 허상 아닙니까? 3분에 구약 성경을 어떻게 정리합니까? 30년을 공부해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구약 성경을 읽어도 모르는 것이 하나님 말씀인데, 여러분 그것이 다른 예수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영입니다. 성경 말씀은 시간에 비례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은 우리 수고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지만,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고의 수고와 노력과 피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 건너뛰고 5분 만에, 3분 만에.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 보십시오. 서점에 가 보면 이만큼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이 '서양고전 백선 간추린 책' 이렇게 나와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런 책 진짜 두껍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두 페이지에 정리돼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고전을 우리가 어떻게 읽지 않고, 고전을 어떻게 깊이 읽고 그것 가지고 내가 힘도 얻고 위로도 받고 막 헷갈려 가면서 보지 않고 어떻게 두 페이지 읽고 그것 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가벼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삼국지를 유튜브에서 한번 검색해 보세요. '삼국지 10분에 정리하기' 이런 것 다 나옵니다. 삼국지를 10분에 다 알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냥 휘발성이 강한 알고리즘입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시대. 이런 시대를 살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진지하게 성경 펴 놓고 '자, 한번 해 봅시다' 하고 한 절 한 절 부여잡고 파고 읽고, 이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것이 통하겠습니까?
요즘 진짜 알고 계셔야 될 것은 그것을 이 시대에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붙들고 살아가야 분별력을 가지고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성경 한 절도 안 읽었는데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3분짜리 구약 요약 듣고 구약 성경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표지도 안 열고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수고스럽더라도 성경 읽고 밑줄 치고 또 보고 또 보고 해야 됩니다. 그런 수고를 해야 우리는 미혹되지 않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이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1-2. 바울의 수고와 고난
이제 바울이 자기 혈통 이야기부터 합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 히브리인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인은 국적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할례받은 자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혈통상 나는 무결점이라는 것입니다. 추천서 가지고 와서 너희들을 미혹했던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했을지라도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서 부족하냐는 말씀입니다. 그것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바울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23절부터 27절까지인데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수고한 것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한마디로 이야기해 봅시다. 11장 초입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용어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볼 때 왜 이렇게 미친 짓을 한 것입니까? 구원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의 방향을 가지고,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지고 이것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고난을 한두 번 당하면 멈출 텐데, 구원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한다 했기 때문에 지속성을 가졌습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지금 자기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하려고 했을 것이고 진짜 전제와 같이 자기가 다 부어질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아까웠으면 못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야기를 11장 1절, 2절에 나오는 이야기로 옮기면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했다고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어떻게 구현되었느냐? 23절에서 27절까지로 구현됩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이 정도 수고를 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열심, 자기 의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한 방향을 가진다고 하지만 지속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절대 다 걸지 않습니다. 이 정도 위협 정도가 생기면 그냥 꽁무니 빼 버립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삯꾼 목자처럼.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가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3. 교회를 위한 염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 외에 바울이 가장 크게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28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라고 했습니다. 앞에 한 모든 수고는 고사하고 여전히 나는 염려되는 것이 있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여기서 이 교회를 잘 보셔야 되는데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교회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교회는 일단 건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교회를 이야기하면 먼저 자동적으로 그 교회 외관이 딱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으세요? 예를 들어 어느 교회 하면 우리가 지나가면서 그 교회를 본 기억이 있으면 그 교회가 딱 떠오릅니다. 건물이. 그리고 그 교회 다닌 성도의 얼굴도 딱 떠오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 교회를 개척할 때 건물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회를 위해서 염려한다는 말은 성도를 위해서 염려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성도. 교회는 곧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그것 다 많이 배웠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지금 이렇게 자기가 수고를 해도,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수고를 해도 여전히 구원 얻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눌리는 것입니다. 계속 그것 때문에 바울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이 외에 이런 것 고사하고서라도 이렇게 내가 수고하고 많이 애쓰고 두들겨 맞고 갇히기도 했으나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 때문에 나는 눌린다. 이것이 바울의 고민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고민이 이 고민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고민이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나의 유일한 고민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고민, 내 인생의 눌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질적 수준을 가늠합니다. 지금 나의 유일한 고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수고하고도 계속해서 눌리는 고민은 영혼 구원을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영적 수준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했고요. 갈라디아서 4장 19절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계속해서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겠다고 했습니다.
2. 바울의 진짜 자랑
2-1.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
이제 바울이 진짜 자랑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30절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를 우리가 좀 이해를 해야 됩니다. 바울이 왜 약한 것을 자랑할까요?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자기 할 이야기를 딱 던집니다. 그다음에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을 또 저 뒤에 이야기합니다. 12장에 가서. 그런데 우선 우리는 이것을 한번 보고 가야 됩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과 로마서 8장 26절을 한번 보십시오. 자세히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누가 담당하신 것입니까? 예수께서. 내가 약한 것은 누가 담당해 줍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을 누가 도우십니까? 성령이. 아까 마태복음 보니까 우리의 연약한 것을 누가 담당하십니까?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은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이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고 할 수 있는 재능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강함을 가지고 내가 나가기 시작하면 그것은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가 잘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고 힘도 있고 권세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좀 잘한다는 것이지 세상에는 나보다 돈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들이 4년 뒤 올림픽에 똑같이 금메달 땁니까? 그런 예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절정의 기량을 10년 이상 유지하는 운동 선수는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야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강함은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하면 누가 도우신다고요? 성령께서 도우시고 예수께서 나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의 약함을 주님께 내어놓겠다,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다, 나는 이것이 약합니다라고 말하겠다. 그러면 이 약함을 가지고 성령께서 나를 도우시고 일하시면 이것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아버지께 내어놓고 이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 이 폭발력이 어느 정도까지 강력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진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약점이었습니다. 바울의 진짜 자랑은. 그런데 사람들은 약점을 감춥니다. 그 약점이 우리에게 무엇이 됩니까? 일반적으로 불만이 됩니다. 불평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됩니다. 하나님 저 왜 이렇게 두십니까? 하나님 저 왜 이런 식으로 그냥 방치하십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겠다고 했습니다. 자랑하겠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2-2. 삼층천 체험과 말씀
이제 12장으로 넘어갑니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해 놓고 그다음에 바울이 결론적으로 또 하려고 12장 시작을 이렇게 합니다. 1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이것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으나 내가 한번 이야기는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자랑합니까?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자기가 본 것이 환상입니다. 자기가 들은 것이 계시입니다. 본인이 보고 들은 환상과 계시를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누굽니까? 바울입니다. 바울 본인입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삼층천 체험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울의 삼층천 체험. 천국 한번 갔다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이 정도 되면 우리는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첫째, 천국은 어떤 곳일까?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지. 십이 진주문이 있고 백합화가 피어 있고. 동양 사상에서는 천국에 복숭아가 있다고 했습니다. 손오공이 따먹었던 복숭아. 서양에서는 열두 진주문, 우리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금으로, 다양한 보석들이 다 있습니다. 화려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바울이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놓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뵀는지, 그리스도를 뵀는지, 천사들을 만났는지 등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또 들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4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무엇을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궁금합니다. 본 것이 궁금하고 들은 것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써 놨습니다. 너무 궁금한데. 이럴 것이면 말을 하지 말지, 그냥 끝까지 말하지 말지. 이것이 너무 궁금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안 할까요? 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옛날에, 요즘도 좀 그랬지만, 과거에는 그런 간증 많이 있었습니다. 천국 갔다 오신 분들 많이 들어 보셨습니다. 천국 갔다 오신 분들 뭐라고 합디까? 천국 가니까 저기 큰 집이 기와집이 있고 오두막집도 있는데 누구누구는 오두막집에서 막 살고 있더라. 누구는 저기 집에서 모든 것을 거느리고 살고 있더라. 그러면 이제 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천국에 계급이 있는가? 이런 생각도 좀 들고요. 아무튼 천국에서 나는 아주 넓은 집에서 부귀영화 권세 누리고 거기 내 집이 있더라 그런 사람도 있고, 어떤 분은 천국에 갔더니 내 집이 너무 헛간방같이 작은 집이어서 놀라서 하나님께 물어봤더니 네가 제대로 안 살아서 네 집은 이것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놀라서 깨어서 이제는 제대로 살기로 했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이야기는 제가 진짜 한 수십 년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오십 년 전에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저희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매일같이 기도원에 데리고 다닐 때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그런 이야기 듣고 나면 귀에 딱 박힙니다. 그리고 내 눈에 마치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것이 천국인 것처럼 딱 각인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천국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잘 하지를 않습니다. 다 은유적으로, 다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천국 비유. 우리 예수님은 천국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천국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주님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천국은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비유로.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밭을 팔아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애매해 죽겠습니다. 다 알면서 천국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제일 좋을 텐데 그런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갖고 계신 우리 주님께서 천국 이야기를 감춰서 비밀로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 그 자체를 우리가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이 말하고 듣고 보고 온 천국 이야기를 사람들은 더 강력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자신이 말하고 싶은 논점은 나의 약함이지, 자신이 천국 보고 왔다, 자신이 계시를 들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진짜 바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지도록 유일하고 완전무결하신 계시. 모든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다 계시되어 있는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만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보다 자신이 보고 온 계시가 더 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앞서서 됩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려들어야 됩니다. 간증을 듣거나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도 가려 듣고 가려 봐야 됩니다. 혹시나 우리 중에 누군가가 성경이 말하는 표현대로 하면 비몽사몽간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 중에 들려 주시고 보여 주신 것이 있다 할지라도 조심하셔야 됩니다. 혹 내가 말한 것이, 나의 간증과 나의 고백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의 귀를 닫게 하고 눈을 닫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그것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위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이런 사람, 이제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자기 신앙을 위하여. 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천국 가서 삼층천 체험을 하면서 천국을 보고 계시를 들은 것, 그것 자꾸 떠벌리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신앙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살아야지. 그것이 나를 위한 도움이지. 나를 위하여 나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 그것 자랑하지 않겠다. 그것이 자기 신앙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경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많은 영적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 체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진리의 말씀인 성령의 검인 말씀만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는 분별력을 가지려면 말씀 붙잡고 살아가라 그 말씀입니다.
바울이 천국 갔다고 온 것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자랑하려고 했으면 그 내용을 풍성하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6절에 또 이야기합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나는 진짜를 말하니까 자랑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본 것 이야기할 수 있고 들은 것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하여" 무엇을 지나칩니까? 성경보다 더 지나쳐서 생각할까 봐.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경험을 더 높게 평가하고 거기에 더 목을 맬까 봐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정도의 수준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조그마한 것 경험하고 나면 막 그것을 막 부풀려서 이야기하고 그것 자랑하고 그것 붙들고 살고, 하나님이 보여 준 것 들려 준 것 그것 가지고 평생을 울궈먹고 삽니다. 그런데 성경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크고 깊고 놀라운 비밀의 말씀이 그 속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계시도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 나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지 그것 붙들고 평생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혹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2-3. 육체의 가시
이제 바울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나는 이런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누가? 하나님이 나를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구절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간질병이다, 육체의 정욕이다, 안질이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갈라디아서 말씀을 공부했는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유추하는 바에 의하면,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이 안질을 앓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했기 때문에 항상 안질로 고생하는 바울을 위해서 할 수 있으면 내 눈이라도 드리고 싶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안질이라고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이 빛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정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항상 글 쓰는 사람 아닙니까? 글 보는 사람 아닙니까? 사람을 만나야 되는 사람 아닙니까? 사람을 보는데 항상 시야가 흐려서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봅니다. 글을 써야 되는데 그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 라식이 있습니까? 라섹이 있습니까? 눈에 주사를 맞을 수가 있습니까? 안약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항상 걸어다닙니다. 항상 영양은 결핍되어 있습니다. 영양이 결핍되어 있으면 눈부터 시야가 흐려집니다. 이런 상태에 바울이 항상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눈곱이 끼고 힘든 인생을 계속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사역이 얼마나 방해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자기 인생에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있나? 읽을 수가 있나? 얼마나 이것이 방해가 됩니까? 그래서 바울은 옆에 두는 사람을 두고 말해 주고 쓰게 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을 쓰는데도 이것이 너무 불편하니까 바울은 그것을 가지고 세 번이나 기도합니다.
이 가시를 한번 봅시다. 헬라어로 스콜롭스(σκόλοψ)라고 합니다. 가시 혹은 말뚝. 가시라고 하면 우리는 손톱 밑에 들어간 작은 가시를 생각하는데 그런 가시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서 하는 육체의 가시는 말뚝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강합니다. 여러분 육체에 말뚝이 박혀 있다. 그런 상상 한번 해 보셨습니까? 내 육체에 이만한 말뚝이 박혀 있다. 바울은 그것이 항상 자기 육체의 고통이고 본인 복음 사역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인생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내 육체의 말뚝을 하나 박아두셨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자기 인생을 이미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 해석이 나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8절에 보니까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삼이 완전 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수이기 때문에. 왜 굳이 삼을 이야기했느냐? 하늘에 닿을 만큼 많이, 오래, 열심을 다해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도하고 끝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닿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할 만큼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2-4.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뚝을 뽑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누가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 누구의 은혜? 아버지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누구 입장에서 족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너의 은혜는 지금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우리는 은혜를 내 입장에서 항상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 은혜 좀 주세요. 저는 지금 은혜가 부족해요. 그리고 우리는 또 그렇게 판단합니다. 나 은혜 충만히 받았습니다. 이야기합니다. 항상 우리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이 다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족하다는 것입니다. 족하다, 족하지 않다는 하나님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왜? 은혜는 누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주시는 분이 충분히 줬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끝난 것입니다. 이미. 그런데 자꾸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울 입장에서 은혜를 달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병 낫기를 구한 것 아닙니까? 이 안질의 말뚝을 뽑아 주십시오. 계속 그것을 구했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너 말뚝 그것 꽂고 사는 것이 그것이 더 은혜야. 이미 나는 너에게 이 말뚝이라는 은혜를 줬어,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충분하단다. 그것으로 넉넉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누구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역사를 하려면 너의 약한 부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니? 너 약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해지니까 나는 너를 병 낫게 해 주지 않는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머물다', 헬라어로 에피스케노오(ἐπισκηνόω). 장막을 치다, 덮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 장막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머물다, 장막을 치다. 텐트 치는 것입니다. 텐트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있다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은 좀 영구적인데 텐트 치고 천막 치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 텐트 쳤다가 내일 다른 데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여기 바울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다. 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다른 데 옮겨 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렀다가 딴 데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약해져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계속 나는 약한 채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약한 채로 계속 내 육체에 가시라는 말뚝을 받고 살아야, 그것을 내가 족하다고 여겨야 이 부족한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빼버리는 순간, 이 병이 나아 버리는 순간, 나는 이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때 하나님의 능력은 텐트를 옮겨서 다른 집으로 가 버립니다.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아, 그렇군요. 하나님 약한 데서 하나님은 일하시는군요"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약한 데서 일하시는 하나님.
3. 약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약한 데서 일하시면 내가 너무 약하고 부족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를 내가 가늠할 수 있습니까? 그 한계를 내가 알 수 있냐고요? 모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내 연약함을 돌보시고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면 그 도움이 어디까지 뻗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을 가지고 일하면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나의 이 약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자란 것이 수치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 막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 손에 안드레의 손에 도시락이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자리에 정말 사람들이 전부 다 빈손으로 왔을까요? 김밥 한 줄이라도 싸 왔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빵 한 쪼가리라도. 그 어린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실은. 하루 종일 설교 듣는다고 말라 비틀어진 생선 두 마리. 그리고 하루 종일 설교 듣는다고 이미 상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보리떡 다섯 개.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것을 못 내놓는 것입니다. 왜? 부끄러우니까. 우리 집안 살림 밑천이 다 드러나니까. 나 이렇게 산다는 것 보여 주기 싫으니까. 아, 그것 감추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것 못 보여 줍니다. 부끄러워서. 그런데 아이는 그냥 보여 준 것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을 내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들어서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시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 먹었습니다.
약한 것을 자랑해야 됩니다. 약한 것. 약한 것을 드러내고 주님 손에 올려 드려야 그 올려 드리는 그 순간 어떤 역사가 나타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약한 것을 자꾸 감추려 하고 이것 자꾸 없애고 싶어 합니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뒤로 숨기려고 합니다. 우리 집안에 일어났던 불행한 과거들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만약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의 그 눈에 어떤 눈빛이 나올지 뻔히 아는 문제들 있습니다.
저 한번 망했어요. 이런 이야기하면 남들이 박수 칠까요? 저 사업하다가 완전 한번 망했어요. 이러면 상대방이 반응이 "어휴 어떻게 해요?" 좀 이상해집니다. 그런 것 아니까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편이 이래요, 저희 집에 아무개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지금 이런 병으로 고생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한 부분인데 그것을 약한 것을 나타내야 그 약한 부분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해서 거기서 강함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놀라워서 강한 자와는 손잡지 않습니다. 하나님 강한 자를 들어서 절대 일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강한 자와 일했습니까? 능력 있는 자, 세상에 권세 있는 자, 이름 있는 자와 하나님께서 손잡고 일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우리 주님은 바울과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그때 그를 들어서 사용하셨지. 그것이 주님의 역사고 일입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충돌합니다. 그가 삼층천 체험을 한 것과 내 육신의 병이 낫지 않는 것과. 바울이 손을 대면 병자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가 손수건만 던져도 바울의 손수건만 던져도 환자들이 나아 일어납니다. 설교 듣다가 떨어져서 죽은 줄 알았던 유두고, 바울이 그를 살렸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났는데 자기 병은 못 고칩니다. 이것이 자기 병은. 그러니 사람들이 말할 것 아닙니까? "네 병이나 고치라고. 맨날 그 눈 껌뻑거리고 살지 말고 사람도 못 알아보고 그것이 뭐냐고. 넌 네 눈에 안수해 가지고 그것 못 낫게 하냐고." 대적자들이 얼마나 바울을 손가락질했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역설 아닙니까? 자기 병은 못 고치는데 남의 병은 고치고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그것은 자기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잘 살아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 능력이 있어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 탁월하고 특출하고 예수 믿는 집에 자녀들은 좋은 데 가야 되고 좋은 데 취직해야 되고. 그것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아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사업은 망했는데 내가 기도하면 그 중보 기도가 잘 됩니다. 이것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이 해석이 딜레마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내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쓰임받아야 됩니다. 나를 통해서 주께서 일하시는 능력을 보라. 나를 통해서 주님이 일하시는 능력을 보는 대로 우리는 그렇게 쓰임받아야 됩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높은 데 세워 가지고 네가 잘나서 이 일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의 연약함을 통해서 내가 일하겠다. 그래야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니까요. 여러분, 그것이 주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우리 교회 약한 부분 많습니다. 시설도 열악하고 그렇습니다. 주일날 오면 복잡하고. 그런데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랑이 나타나고 은혜가 흘러가면 그것은 교회 시설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봐야 됩니다. 그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바울이 발견한 진리가 그 진리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그것 다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다 약한 것인데.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나는 약한데 누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바울 같은 사람도 이렇게 기도 빡세게 해 가지고 하늘에 닿을 만큼 자기 인생 문제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 인생 문제가 있으면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 붙들고 엎드려야 됩니다. 그래야 이것이 깨달아집니다. 안 그러면 나의 약한 부분과 약점은 평생 원망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거리고 그것 때문에 나는 제대로 인생을 못 산다고 맨날 원망하고 저주하고 자기 인생 학대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이런 역사가 나타납니다.
4. 고린도 교회를 향한 당부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풍성한 연보를 요청했습니다. 내가 갈 때 이미 연보를 준비해 두어라. 가서 너희들 서두르지 마라. 연보를 준비하라 했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연보 거두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너희가 필요한 것이지, 물질은 너희가 준비한 대로 내가 받아가면 된다. 이미 디도를 보냈고 디도와 함께하는 두 사람을 보냈으니까 나는 너희를 보고 싶다. 오해하지 마라. 그 말씀입니다.
16절, 하여간 이제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입니다. 어떤 이의 말이, 어떤 이 거짓 선지자 속이는 자들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바울을 이간질했습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울더러 교활한 자라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7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바울이 누구 보냈습니까? 디도 보냈습니다. 디도와 함께하는 두 사람 같이 보냈습니다. 그들이 이득을 취하는 적이 있더냐? 18절.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냐"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령은 동일한 영입니다. 성령은 일체의 영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것 디도와 함께한 사람들이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엇박자를 내지 않습니다. 하나의 일직선의 영을 가집니다. 성령의 역사는 서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자주 이야기합니다. 청춘 남녀가 연애도 할 수 있는데 성령을 빌미 삼아 가지고 어떤 한 남자 형제가 자매에게 "내가 어제 성령 받았는데 너더러 결혼하라고 하더라." 이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흔들리고 그런데 속아서 결혼하는 사람 여럿 봤습니다. 성령께서 그러면 왜 나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결혼만큼 중요한 것. 자기 인생이 달린 문제인데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그러면 이 형제에게 이야기했으면 저 자매에게도 말씀하셔야 됩니다. 너무너무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성령은 일체의 영이고 동일의 영이지 나뉘어지거나 분열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제 19절.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의 진심입니다.
이제 바울이 걱정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갈 때에 너희가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게 볼까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서로 만날 때 서로에게 실망스러운 존재가 될까 봐 두렵다. 그 무슨 뜻일까요? 너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런 말입니다. 서로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지 말자.
그다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너희가 아직까지 그런 상태로 있을까 두렵다. 내가 갔을 때 너희의 믿음의 온전함을 보여 달라.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이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죄 지은 자들 회개하고 돌이켜라. 여전히 그 죄 가운데 빠져 있지 말라. 고린도전서를 이야기할 때 바울이 음란에 대해서도 지적했습니다. 다양한 죄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그것 회개하고 돌이켜라. 나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 그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영접하는 방식은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숙소를 마련하고 좋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교회 개척 목회자이니까 "내가 갈 때 나는 이런 오성급 호텔을 준비해 줘야 되고 내가 갈 때 나는 이런 이런 음식을 좀 먹고 싶고 너희들 돌아가면서 음식을 좀 준비해 달라" 그것이 아닙니다. 너희의 성숙된 믿음을 보여 달라.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달라. 그 부탁입니다. 그것이 이제 12장 마지막입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이 쉬운 말씀은 아니지만 그 전개 과정을 잘 이해하시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잘 기억하시고 다음 시간에 13장으로 고린도후서 마지막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울의 자기 자랑은 자신이 천국을 본 것도, 계시의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내고 그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의 약함이 무엇입니까?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나의 약점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이 약함이 주님 보시기에 귀하게 쓰임받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숨기지 않고 주 앞에 드러내게 하시고, 나의 이 연약함을 통해서 지금도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오직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하셨사오니 계시와 환상을 말씀보다 앞세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의 말씀이 가장 앞서게 하옵시고 그 말씀 통하여 우리가 분별력을 얻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