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12 - 확증하라 (고후 13장)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들어가는 말: 성도의 정체성
고린도후서 오늘 열두 번째 강의로 마지막 시간입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을 통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시고 또 깨닫고 느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을 보면 성도의 정체성을 다양한 용어와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기억나는 것만 한번 꼽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편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고, 또 이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도 말씀하셨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명제만 쭉 이야기하는데, 그 중간중간 내용에 담긴 의미들을 기억하시고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 12장도 그랬고 11장 말씀도 보면 우리가 연약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자, 연약한 자,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렇게 쭉 이어서 생각해 보면, 고린도후서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권을 공부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메시지를 한번 되새어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다, 성도는 이런 분이 되어야 한다라고 쭉 말씀하신 그 의미를 기억하시고 마음에 꼭 새기고 고린도후서를 마치면 좋겠습니다.
1. 바울의 세 번째 방문 예고
오늘은 '확증하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이 13장 말씀은 고린도후서 전체를 정리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12장 말씀에 연결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 회개하라는 권고
1절을 보니까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고 합니다.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바울이 첫 번째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개척할 때입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그때 처음 방문했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 해결을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문제 해결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상처를 크게 입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들려 보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이 이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것을 듣고 세 번째 가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편지도 많이 쓰고 많이 방문한 교회는 고린도교회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이 교회가 문제도 많았고, 또 그토록 바울은 이 교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하셨는데, 두 번째 대면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문제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가면,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 무슨 말입니까? 겁주는 것입니까? 협박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잔재 속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여, 회개하고 돌이키라.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갔을 때, 세 번째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질을 할 것인지 회초리를 때릴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바울이 대단히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세 가지 잘못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했습니까?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용납한 것입니다. 세 가지를 용납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다른 예수입니다.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용납했습니다. 두 번째, 다른 영을 용납했습니다.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예수란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음을 부정하는 영지주의가 고린도교회에도 그대로 있었는데, 이것을 내가 갈 때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가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영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영 아닙니까? 성령 외에 다른 영은 사탄 마귀의 영입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인데 사탄 마귀는 분열의 영입니다. 이 사탄 마귀 분열의 영이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교회가 나누어집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본 것처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예수파 해가지고 서로 파벌이 나뉘어져서 싸웁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방언파, 예언파, 병고침파, 가르치는 파 등등입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이고 하나 되게 하는 영인데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이 들어와 있으니까 교회가 사분오열되어서 계속 싸웁니다. 내가 갔을 때도, 세 번째 갔을 때도 이런 식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른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받는데, 그래 좋다, 그런데 할례도 받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 하며 할례가 복음의 다른 조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교회도 그랬고 고린도교회도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끊어내지 않으면 내가 가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이 지적하는 교회의 잘못들을 보십시오. 여기에 토 달 수 있습니까? 토 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소한 문제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나뉘어질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성령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토 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해결하라고 바울은 아주 직설적으로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를 고쳐서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끗하게 다시 고쳐 놓아야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들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합니다.
1-3. 징계가 복이다
사실 이런 소리를 자꾸 들으면 힘듭니다. "야, 너희들 잘한다. 들리는 소문이 요새 헌금 좀 늘었다며? 성도도 많이 늘었다며? 교회 건물 새로 지었다며? 땅 좀 샀다며?" 이런 이야기만 하면 서로 참 좋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만 자꾸 하니까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편 94편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까? 징벌받고 교훈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혼나는 자가 복되다는 이야기입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혼나고 두들겨 맞고 지적당하고, 그런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짜 복입니까? 시편 기자는 이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진짜 복으로 우리가 여길 수 있어야 그것이 복받는 자가 됩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을 매번 이야기합니다. 무릎 꿇음이 복 아닙니까? 바라크(בָּרַךְ), 무릎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용서 구해야 됩니다.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징벌하심이 복이고 교훈하심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관심 있는 자를 징벌하시고 혼내시지, 그렇지 않은 자, 사랑하지 않는 자, 관심 없는 자,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자는 갈 길로 내놓아 버립니다.
2. 유기의 심판
2-1. 내버려두심의 무서움
징벌 중에 가장 큰 징벌은 유기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로마서 때 배웠습니다. 로마서 1장 24절과 28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유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런 일이 있어도 양심의 가책이 없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28절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그랬습니다.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버려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길 가다가 누가 떼를 씁니다. 어느 집 아이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간섭할 수 있습니까? 그냥 지나가야 합니다. 내 집 아이 같으면 내가 어떻게 하겠는데 남의 집 아이니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거기에 입을 대거나 간섭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그 부모에게 충고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내 집 식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둔다는 말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버려 둬서 내가 편한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편하고 내 육신이 편하고, 그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대단한 심판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심판이지요. 그런데 이 땅을 살면서 이미 우리는 유기의 심판을 당했고, 그것이 바로 지옥 심판입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앞에 혼나서 다리 몽둥이 부러지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가지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래야 그것이 복받는 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고 "멋대로 해라" 이러면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2-2. 마음에 찔림의 의미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계시지 않는다를 무엇으로 분별한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나중에 찾아보시면 베드로 설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설교를 쭉 하는데, 그 설교를 듣고 그 성도들이 "마음에 찔려"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에 찔림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함께 계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음에 찔림이 있고 깨달음이 오고 누군가가 나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희망을 두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설교 듣다가, 성경 읽다가, 기도하다가 가책이 오고 눈물이 나고 잘못한 것이 깨달아지고 생각나면 그러면 안심해도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찔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아무런 찔림이 없습니다. 그냥 강퍅하게 막 삽니다. 그러면 심각합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 인생을 말입니다. 길게도 아닙니다. 지난 1년만 한번 돌아보십시오. 막 살았는데 아무 일 없다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서 뺨을 좀 때려 달라고 말씀하십시오. 나를 좀 혼내 달라고, 내가 막 살았는데 나를 좀 때려 달라고,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유기의 심판처럼 무서운 심판이 없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2장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그랬습니다. 아들은 남의 아들이 아닙니다. 내 아들입니다. 우리 집 아들입니다.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왜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경히 여기면 안 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약함 속에 나타나는 능력
3-1. 증거를 요구하는 자들
이제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사도 됨의 증거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이것을 잘 읽으셔야 합니다. 2절과 3절의 내용의 행간을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막 책망합니다. 징계합니다. "내가 가면 너희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너희 다른 복음 받아들였지? 다른 예수 받아들였지? 다른 영 받아들였지?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되바라지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 정말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 맞습니까? 증거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 느낌을 가지고 보시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증거 내놔라,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증거 내놔라 그랬다는 말입니다.
유추해 보면 두 번째 바울이 이 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랬던 것 같습니다. 증거를 구합니다. 당신이 그럴 권위가 있는가? 정말 당신의 말인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들고 왔습니까? 추천서입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 교회 유력한 사람의 도장과 직인이 찍힌 추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추천장을 들이밀면서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3년을 동행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에게 "당신은 그럴 증거를 보여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처럼 추천장이 있는가? 당신은 진짜 예수와 함께 3년을 동행했는가?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서 말한다는 증거를 보여라."
3-2. 바울의 대답
이때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3절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예수님이 강한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예수님이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약합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실망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전복시키고 유대인들을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약한 것입니다. 그냥 끌려가서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한마디 하지 못하고 가서,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끝나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이 너무 약한 것입니다.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가진 그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저항하고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한마디도 저항하지 않으셨으니까 사람들이 볼 때 약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를 살리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약한 이유는 왜 약한 것입니까? 능력이 없어서 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약해졌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강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과 같이 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랬습니다. 온전히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어디에 달려 죽기까지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낸 그 자리에 누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죽은 예수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예수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 같은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나에게 증거를 보이라고 하는데, 추천장을 보이라고 하는데, 증거가 무엇이냐고 그렇게 따져 묻는데, 나는 보여줄 것이 내 약함밖에 없다고 합니다. 나는 보여줄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약해지셨으니 나도 나의 연약함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가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시 말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눈이 약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만나느라 그 빛을 보느라 안질에 걸려서 글씨도 틀리고 글도 잘 못 읽고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눈에는 눈물이 자꾸 흐르고 눈에는 눈꼽이 자꾸 끼고, 내 병도 못 고치면서 사람들 병 치유한다고 돌아다니고, 내 육신은 이 꼴인데 늘 전도한다고 돌아다니고, 이것이 나의 약함이다. 그런데 이 약함을 가지고 내가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라고 말입니다.
내가 약한데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에게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추천장 따위가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한 사도의 외부적인 지표가 증거가 아니라,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그 능력이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어렵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했던 것과 연결되고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3-3. 약함에서 온전해지는 능력
바울은 예수님처럼 사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힘이 없어서 약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니까 약해진 것이고, 그 약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던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을 한번 봅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가시 제거해 달라고 하니까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 전에 다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이 강함이 어느 정도까지 뻗치는 것 같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비워서 연약한 모습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내 속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러면 그 일하는 능력의 폭발력이 어디까지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능력 안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강함으로 일하면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학벌, 지식, 지혜 이것은 그 한계가 딱 있습니다. 그 한계만큼 일할 것이냐? 그 한계를 벗어나서 뛰어나서 더 위대한 능력으로 일할 것이냐? 내 능력으로 일할 것이냐?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일할 것이냐? 뻔한 것 아닙니까?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은 큰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일해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자신을 잘 드러내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나는 낮아지고 철저하게 나는 죽고 예수의 능력을 더 입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7절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합니까? 나를 낮추어 전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명하게 드러나려면 내가 낮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드러나려면 내가 약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더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나의 존재감이 싹 사라지고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래야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막 놀렸을 때, 비아냥거렸을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엘리야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까 "저가 엘리야를 부르는가 보다. 지켜보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해 주나 보자" 했습니다. 그때 만약 예수님께서 그 말에 막 화가 나셔 가지고, 요즘 말로 자극받으셔서 너무 화가 나셔 가지고, 우리 주님이 하늘의 천군 천사들 불러다가 "야, 저들 다 잡아가라. 나를 여기서 끌어내려라"라고 하셨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고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굴려지고 군인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내 손에 못 자국 만져 보라"고 하시고 "내 옆구리에 창 자국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시고, 그래야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역설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내가 자꾸 뒤로 물러서고 하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바울이 끝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4. 높아지려는 자들의 결말
4-1. 미리암과 아론
그런데 출애굽하다 보니까 자기를 자꾸 나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민수기 12장 1절과 2절을 보니까 미리암과 아론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비방했다는 말이 등 뒤에서 이야기하다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뒷담화하다는 것입니다. 등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뒷담화한 것이 아닙니다. 의도가 있었습니다. 등 뒤에서 아론과 미리암 두 사람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2절을 보니까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왜 모세만 최고 리더십, 탑 리더십의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미리암도, 아론도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데 나도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백성들에게 계속 하고 다닌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높아지려고, 스스로 높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과는 미리암이 나병에 걸립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물하신 것은 탑 리더십의 자리가 아닙니다. 나병이었습니다. 나병이 무엇입니까? 격리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자 그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철저하게 순종하게끔 하셨습니다.
4-2. 고라 일당
민수기 16장 3절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할 때 그들은 고라 일당입니다. 고라 일당, 잘 아시죠?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이 말만 딱 떼서 생각하면 그럴듯한데, 고라 일당도 리더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고라 자손 이들도 그냥 레위인으로서 회막 안에서 봉사하는 자로만 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좀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향로 하나씩 들고 다 모이라" 그랬습니다. 향로에서 불이 나서 다 타 죽습니다. 땅이 갈라집니다. 땅이 그들을 다 삼켜 버립니다. 높아지려고 했는데 땅으로 꺼져 버렸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가장 낮고 낮은 저 땅바닥이 아니라 지하 몇천 미터 밑으로 그냥 삼켜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땅이 입을 열어서 그들을 삼킵니다.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4-3. 광야의 원망
민수기 20장 3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모세와 왜 다투었을까요? 물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진심은 아닙니다. 죽고 싶다는 것이 진심인 것 봤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모세의 리더십에 대한, 물이 없음을 허락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끊임없이 원망하는 이들에게 불뱀을 보냅니다. 독사입니다. 독사가 물어서 독이 온몸에 퍼져가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 아닙니까?
가정에서도 누군가가 한 알의 밀처럼 죽어서 희생하면 거기에 열매가 맺히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법칙도 그렇습니다. 일터에서 저마다 자기 시간, 자기 건강, 자기 것을 계속해서 주장하면 그 공동체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안 됩니다. 누군가가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 썩어지고 죽어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하도 법이 이상해져 가지고 사람들이 "법대로 하라" 그러면 이것이 참 웃긴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데, 집합으로 따지면 A집합, B집합, C집합이 있으면 A와 B의 교집합, B와 C의 교집합, C와 A의 교집합, A B C의 교집합이 있습니다. 그러면 A B가 다 같이 열심히만 하면 가장 먼저 A B 교집합이 제일 먼저 차야 합니다. 그 자리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은 B가 하겠지, 이것은 C가 하겠지, 이것은 A가 하겠지" 이러니까 자기 것은 채워지는데 그 교집합이 안 채워집니다.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닙니다.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썩기는 뭘 썩고 죽기는 뭘 죽겠습니까?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썩으니 교회가 되겠습니까? 가정이 되겠습니까? 회사가 되겠습니까? 사업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 위치가 있습니다. 당신의 위치가 하나님의 아들 지존자 아닙니까? 지존자로서의 위치와 그 자리를 지키려고 했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 알의 밀이 되어서 그냥 사람처럼 낮아지시고 완전히 죽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어떤 식으로 돌아가거나 그것은 우리가 상관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다 이기적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 좋은 대로 사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의 이기적임이 교회까지 들어와 가지고 교회를 세속화시킵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권리 자꾸 주장하고 교회에서도 자꾸 자기 이야기, 자기 위치 주장하고 그러면 아무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수고하라고 하신 일에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희생의 자리에서 씨앗이 떨어져서 열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어떻게 열매가 되겠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손해 의식을 자꾸 줍니다. 우리에게 말입니다. "네가 미쳤느냐? 너 왜 그러느냐? 넌 돈이 안 아깝느냐? 넌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넌 집에 가서도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는데 교회에서 이것이 웬일이냐? 하지 마라. 너 주위를 둘러봐라. 누가 하느냐?" 이러고 있습니다. 사탄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내가 은혜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사탄이 주는 말이 곧 말씀인 줄 알고" 거기에 은혜 받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자꾸 흘리고 흘리고, 그것이 원망이 되고 불평이 되고, 그것이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 반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 우리가 조금 더 희생하자. 우리가 조금 더 손해 보자. 우리가 조금만 더 봉사해 보자. 내가 조금 더 수고하자. 예수님처럼 내가 조금 더 헌신하고 그리고 남을 좀 더 섬겨 주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꾸 번져가야 그것이 되는 집안입니다. 집이나 가정이나 우리 직장이나 교회나 이 나라나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5. 믿음 안에 있는가
5-1. 시험하고 확증하라
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시험하고 확증하라.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다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본질을 알기 위해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어떤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 가서 화성에서 광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광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요렇게도 시험해 보고 저렇게도 시험해 보고 요렇게도 테스트해 보고 이렇게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페이라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요렇게도 저렇게도 계속해서 달아보고 테스트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테스트해 봐라. 그리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그랬습니다. 확증하다는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입니다. 확정하다는 것은 시험을 해본 것입니다. 페이라조 했습니다. 시험을 거쳐서 "아, 이것이 진짜입니다" 또는 "이것은 가짜입니다" 하고 승인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페이라조하고 도키마조되었는데 진짜 믿음으로 확정받아서 하나님의 도장이 딱 찍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항상 내가 달아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페이라조해 봤는데 가짜라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해 봤는데 도키마조 했는데 하나님이 "야, 이것은 도장 못 찍어, 가짜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페이라조해 보니까 도키마조, 도장을 딱 찍어 줍니다. "진짜다" 그러면 뿌듯한 것입니다. 된 것입니다.
5-2. 믿음의 기준
이제 여러분은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무엇으로 확정합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 나는 믿음이 크다, 믿음이 괜찮다를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그런 말 자주 합니다. 많이 합니다. "아, 저분은 믿음이 참 좋아. 저분은 믿음이 참 순수해. 저분은 믿음이 별로야. 저분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어. 알고 봤더니." 이 근거가 무엇입니까?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있고 없고 좋고 나쁘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그다음에 새벽 기도 열심히 나온다. 왜냐하면 새벽 기도는 하기 어려운 것이거든요. 나는 못 하는 것을 저분은 열심히 하니까요. 또 봉사 열심히 한다. 교회 봉사 이곳저곳 해서요. 또 헌금 생활 열심히 한다. 그리고 남들에게 험한 말 하지 않는다. 예쁜 말 쓴다. 기도 열심히 한다 등등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정하는 근거가 되는가? 너무 가볍지 않으십니까?
만약 그것이라면, "저 사람은 3대째 신앙인이고 아버지가 목사님이야. 3대째 장로야. 형제들이 다 장로님이야. 그래서 저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야. 저 가정은 매일같이 가정 예배드린대. 믿음의 가정이야." 그것은 드러난 외형일 뿐입니다.
여러분, 진짜 믿음이 있고 없고를 성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말할 수 있지만 딱 세 가지만 말해 봅시다.
6. 믿음의 세 가지 확증
6-1. 말씀을 따라가는가
첫째, 아브라함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창세기 11장 말미부터 12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거쳐서 하란 땅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불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그랬습니다. 답사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4절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면 됩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간다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상황을 따르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75세입니다. 그때가 75세인데,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75세면 얼마를 산 것입니까? 175를 2로 나누어 보십시오. 87.5 정도 나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절반 정도 덜 되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절반 정도 덜 되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100세 시대라고 하면 요즘으로 치면 한 45, 46세 정도를 산 것입니다. 100세를 기준으로 보면 말입니다. 40대 중반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요.
그런데 자기 고향, 친척, 아버지, 집, 자기 산업 다 놓아두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조카도 있습니다. 자기 집엔 자녀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대 시대에 자기 집,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여정입니다.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상황보다 말씀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따라갔습니다.
따라갔으면 무언가 있어야 했는데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면서 내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웃기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과 6절에 나옵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 따라왔는데 자식이 없습니다. 자식처럼 여겼던 롯은 이미 소돔 땅으로 가 버렸습니다. 상황은 엉망진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별을 보여 주시면서 어쩌면 황당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도 없는데 무슨 하늘의 별입니까? 무슨 바다의 모래입니까? 하나나 제대로 주고 나서 이야기하시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 그랬습니다. 상황을 보지 않고 말씀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매 순간 달아봐야 합니다. 나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상황과 믿음이 부딪칠 때, 상황과 말씀이 부딪칠 때 무엇을 선택합니까? 상황 때문에 말씀을 버립니다. 상황 때문에 말씀을 접어 버립니다. 상황이 너무 무게가 크니까, 무서우니까요.
그런데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이 말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테스트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상황이 부딪힐 때 그 상황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갈 수 있는가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매 순간 그렇게 하십니다.
6-2. 정죄감에서 자유한가
두 번째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두 번째는 정죄감 속에 살고 있는가, 자유함 속에 살고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을 한번 봅시다.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어디 안에 있는 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가 예수 안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다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 가운데 삽니다. 다윗도 다 회개하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때문에 살면서 자녀들 교육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믿음 안에 있지 않아서 여전히 내 속에 죄책감과 정죄감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해야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셨는데 왜 자꾸 죄책감 가운데 살면서 인생을 허비합니까? 그것을 우리가 달아보는 것입니다.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 그런 식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6-3. 한계를 넘어서는가
세 번째,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누가복음 8장 49절과 50절을 한번 보셔야 합니다. 이것이 야이로 이야기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회당장 야이로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어떤 상황입니까? 누가복음 8장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중 구조 이야기인데,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12년을 길렀습니다. 12살 난 외동딸입니다.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내 딸 고쳐 주십시오." 갑니다. 누가 예수님 옷에 손을 댑니까?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손을 댑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함께 대화를 시도합니다. 오래 걸립니다. 거기서 여인의 사연을 듣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간증을 합니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가장 괴롭고 가장 견디기 힘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어차피 이 여인은 나았는데 빨리 우리 집에 가서 내 딸 고쳐 줘야 했는데 예수님이 시간을 계속 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인이 온 것입니다.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끝난 것입니다. 끝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랬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언제 생깁니까? 우리의 믿음이 언제 박살납니까? 그래도 내가 믿음 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믿음이 언제 깨지고 박살나고 처참하게 무너지는가? 내가 정한 시간이 넘어 버렸을 때 깨집니다. 나는 이 시간 안에 이것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간이 넘어가거나 횟수가 지나가면, 그러면 그때는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나를 시험하는 것은 이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큰 믿음입니다. 사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항상 나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 나오는가? 헌금 생활 열심히 하는가? 봉사 생활 열심히 하는가? 이런 것도 중요한데요. 본질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귀한 본질은, 이것이 되면 신앙생활 그다음은 다 됩니다. 좀 전에 이야기했던 것은 다 됩니다.
시편 17편 3절을 한번 보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신다" 그랬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요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시험하시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밤이라는 것이 진짜 물리적인 밤을 이야기할까요? 아닙니다. 불시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불시에 주께서 내 마음에 찾아오셔서 나를 시험하십니다. 이 사람이 진실로 믿음 안에 있는가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불시에 시험합니다. 상황을 던져 주고 그 상황을 말씀과 병치시키고 상황보다 말씀을 붙잡는가를 봅니다. 아브라함처럼 또 한계 상황을 주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테스트합니다. 사탄이 계속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데 그것도 테스트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불시에 찾아와서 나를 막 시험하는데 내가 도장을 딱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상무. 이 사람의 믿음은 검증되었음, 확정되었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내 믿음을 이렇게 확정해야 합니다. 1년에 52주 출석하는 것으로 확정하는 것은 교회학교 어린 학생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내 믿음을 도장으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입니다. 바울은 그 수준 높은 믿음의 확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7. 진리를 위하는 삶
7-1. 진리를 위할 뿐이니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울과 함께 일하는 복음 전도자들입니다.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나오면 제가 가끔 이야기했는데 무엇으로 바꿔도 된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말씀입니다.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과거에 이랬다가 오늘 저랬다가 내일 또 달라지는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그랬으니까 그것이 진리입니다. 변함없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진리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에서 진리라는 말이 나오면 그 진리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혹은 말씀을 넣어서 읽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우리는 말씀을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말씀을 위할 뿐이니" 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할 뿐이니" 이런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고 내 이름을 온 천하 만국에 떨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는 사역입니다. 그 말씀입니다.
7-2. 성도의 온전함
9절입니다. "또 우리가 약할 때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바울이 진짜 바랐던 것은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위를 따라 엄하게 하지 않으려 함이라"
먼저 준비하도록 함이라는 뜻입니다.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글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먼저 회개하고 준비해라, 내가 가서 지난번 두 번째 방문처럼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런 뜻입니다.
8. 바울의 마지막 기도
8-1. 평화의 권면
11절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2절입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8-2. 삼위일체 축복
그런데 좀 특별한 기도가 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이것을 잘 보시면 우리가 지금 축도하는 형식과 똑같습니다.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을 가지고 저도 매 주일 축도할 때 바꿔서 늘 변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역사, 교통, 위로, 충만하게 인도하심이"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을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이렇게 끝냅니다.
여기서 꼭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삼위일체가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하나님은 사랑을, 성령은 교통을 말씀합니다.
저는 옛날에 어릴 때 목사님께서 축도하실 때 교통 이야기하셔서 저는 교통이라고 알아들었습니다. 도로에 나가면 있는 교통, 교통순경 말입니다. 왜 자꾸 성령은 자꾸 교통을 이야기할까? 그런데 그것을 묻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혼날까 봐서입니다. 아무도 안 가르쳐 주는데도 묻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집에 가서 혹시 모르니까 아이들한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교통순경 할 때 교통이 아니다, 이 교통은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다, 교제, 소통이다 라고 말입니다.
8-3. 받은 은혜를 나누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은혜는 내가 주는 것입니까, 내가 받는 것입니까?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랑은 내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는 것입니까?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끼리 은혜를 받았으니까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받았으니까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서로 간의 소통과 교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여전도회나 남선교회 한번 보십시오. 교회 공동체 보십시오. 여전도회를 봐도 나이만 비슷하지 너무 다릅니다. 너무 다릅니다. 성격 다르지요? 살아온 환경 다르지요? 생각하는 것 다르지요? 가정 환경 다르지요?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서 교제가 일어납니까?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참 특별한 곳인 것이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은 기적입니다. 왜 기적입니까?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기도, 바울의 마지막 기도, 이 축도, 축복 기도를 들을 때는 항상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그러면 우리가 받을 그릇을 준비하면 됩니다.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받았으면 성령께서 일하셔서 제가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그 축복 기도만 받고 끝내면 안 됩니다. 은혜도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를 이야기했습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말입니다. 받은 것은 절대로 그냥 가져가지 마라. 나누어라. 베풀어라. 죽어가라.
9. 아론의 축복 기도
구약의 아론의 축복 기도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4-27)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마르고 닳도록 들었습니다. 구약의 복은 무릎 꿇음입니다.
지금 여기 아론의 축복에 보면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구약의 전통입니다. 아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 기도에 '여호와의 얼굴'이 나오고, 이것을 다윗이 받아서 다윗의 시편에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겠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여호와의 손과 상호 보완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능력의 팔'과 '오른손'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다. 그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부귀영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은 일절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복이 없어도 됩니까? 우리는 사실 그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여기 아론의 축복 기도에는 '여호와의 얼굴'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니 너희는 그 앞에서 무릎 꿇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복이 되려면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항상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복은 무릎 꿇음이고 여호와의 얼굴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것은 다 부가적인 것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나가는 말
이제 우리 고린도후서 말씀을 다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보다 후서가 조금 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하나하나 잘 살펴보면 훨씬 더 깊이가 있고 훨씬 더 은혜가 됩니다. 한번 시간 나실 때마다 들춰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우리 안에 함께 머물러 있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요, 보배를 품은 질그릇이요, 새 언약의 일꾼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며, 우리는 연약함을 자랑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성도의 정체성을 잘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믿음 안에 있는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확정시켜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진실로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진실된 믿음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보실 때 밤에 불시에 찾아오셔서 나를 달아보시고 시험해 보셔도 우리는 하나님의 도장을 받을 수 있는 확증된 일꾼으로 서기 원하오니 주여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으로 교제로 나누며 베풀며 살기 원합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성령 충만한 역사 허락하셔서 베풀고 나누고 교제하는 성도의 교제가 풍성해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