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1 - 위로의 하나님 (고후 1:1-11)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오늘부터 고린도후서 공부를 12주간 함께 나눕니다. 고린도전서를 2년 전에 공부했고, 이제 2년이 지나서 다시 고린도후서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할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연이어 하면 다소 지루할 것 같아서 2년 정도 다른 책을 공부하다가 이제 고린도후서를 공부합니다.
1. 고린도 교회의 이해
1-1. 바울과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 교회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다소 어폐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랑하지 않은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개척한 교회를 다 사랑했지 않겠습니까? 어떨 때는 빌립보 교회를 특별히 사랑했다고 하고, 또 어떨 때는 에베소 교회를 너무 가고 싶어했다고 하고, 또 지금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다고 하면 그럼 바울이 진짜 사랑한 교회가 어디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숫자적으로 따져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제일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속을 많이 썩였기 때문입니다. 사연이 많으면 그 사연이 계속 쌓이다 보면 사랑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면 나중에 얼마나 절절합니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절절함을 감출 수가 없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굉장히 많이 싸우고 굉장히 많이 갈등하고 속을 너무 많이 썩였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전후서를 읽으실 때는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버릴 수 없잖아요. 내쫓을 수도 없고, 그런데 또 사랑스럽고, 또 자주 잊어버리고 그런 존재인 것처럼 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는 꼭 그런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개척했는데, 아시다시피 2차 선교여행 때 바울 본인이 원했던 목적지는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막으시고 못 가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유럽으로 갑니다. 정처 없이 갑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럽에, 현대의 그리스 지역, 그리스의 북쪽 지역을 우리는 마게도냐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마게도냐에 바울이 2차 선교 때 갔던 세 도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빌립보, 베뢰아. 그 북쪽 마게도냐 지역을 다 개척하고 돌고 나서 남쪽으로 갑니다. 남쪽이 그리스 남쪽인데 살기 좋고 경치도 좋은 곳입니다. 그쪽 지역을 아가야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아가야 지역에서 바울이 두 도시를 갔습니다. 첫 번째가 우리가 정말 잘 아는 아테네입니다. 성경은 아테네를 아덴이라 불렀습니다. 아테네에 갔는데, 아테네에서 바울의 열매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 아닙니까? 바울이 거기서 철학자들과 논쟁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교과서에서 봤던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와 논쟁을 굉장히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잘하니까 이 말쟁이를 데려다가 광장에 세워서 한번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바울이 그 사람들과 함께 가서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굉장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극소수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이 굉장히 실망이 컸고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고린도로 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쓰는데 그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만 복음을 전하겠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제는 인간의 철학과 인간의 생각으로 복음을 혼동시키지 않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래 머뭅니다. 바울과 같이 갔던 2차 선교의 동역자 실라, 그리고 바울이 2차 선교 때 픽했던 디모데, 그리고 바울의 주치의 누가, 바울의 평신도 동역자 두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납니다. 그래서 이분들과 함께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뜨겁게 복음을 전합니다. 원래 사람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 좋잖아요. 기억이 오래 남고, 그래서 바울에게는 고린도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1-2. 네 번의 편지
바울이 고린도에 몇 번의 편지를 보냈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두 번 아닙니까?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네 번 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고 속을 많이 썩였다는 것입니다.
증거를 한번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는 과거형입니다. 고린도전서 이전에 이미 쓴 편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발견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없습니다.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고고학자가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를 찾는다면 고린도전전서가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이전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이전에 편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절을 보니까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린도 교회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이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싸웠습니다. 결혼 문제도 있었고, 우상의 제물 문제도 있었고, 성령의 은사 문제도 있었고, 송사 문제도 있었고, 등등 그런 문제들이 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결책을 써서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다음 고린도후서 2장 4절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그랬습니다. 이 "썼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면 고린도후서 이전에 또 편지가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후서가 아니고요. 그 전에 편지가 또 있었습니다.
이것은 왜 썼느냐 하면, 바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니까 바울이 편지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누가 가지고 갔을까요? 바울의 심부름을 잘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도라는 사람이 그 편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가서 해결책을 들고 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오지 않으니까 바울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에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보냈는데 디도가 아직 답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심령이 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7장 6절을 보면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드디어 디도가 왔습니다.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7절에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그러고 나서 고린도후서를 쓴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해서, 기뻐서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네 번째 편지입니다. 세 번째 편지는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다. 편지를 네 번 썼는데요, 첫 번째 편지 없고 세 번째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 네 번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이 한 교회에 편지를 네 번이나 보낸 곳은 고린도 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너무 많이 속을 썩여서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편지를 네 번이나 보냈습니다.
1-3. 세 번의 방문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를 몇 번 갔을까요?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 고린도를 몇 번 방문했을까요? 상식적으로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갔죠. 개척을 위해서. 한 번 간 것 아닙니까? 그것이 사도행전 18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4절까지 있고, 거기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11절을 보니까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년 6개월 머물렀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방문입니다.
두 번째 방문은 언제 갔느냐? 고린도후서 2장 1절을 한번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미루어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다는 말입니까? 안 갔다는 말입니까?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갔을까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간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갔는데 해결 했습니까? 못하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그다음 바울이 결정한 것이 이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문제 해결 다 됐으니까 세 번째 방문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 몇 번 썼습니까? 네 번. 방문은 몇 번 했습니까? 세 번.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두 번 방문했고 쓰고 나서 또 갑니다. 세 번 방문합니다. 바울이 한 교회를 세 번 방문한 것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도 세 번 방문했습니다. 1차, 2차, 3차 때마다 다 갔거든요.
갈라디아 지역 교회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개척했던 교회들입니다. 네 교회를 한번 읊어 볼까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는 바울의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2차 선교여행 갈 때도 그 길을 방문했고 또 3차 선교여행 때도 또 갑니다. 첫사랑이니까요. 그 외에 세 번 방문한 곳은 고린도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네 번 편지 쓰고 세 번 방문한 교회입니다.
1-4. 타락한 도시 고린도
그렇다면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코린티아조마이(κορινθιάζομαι)라는 말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고린도화하다', '고린도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적으로 타락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사전에 정식으로 올라 있는 단어입니다. 도시가 어땠다는 뜻입니까? 성적으로 굉장히 타락하고 굉장히 문란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어가 있을 만큼 고린도는 굉장히 성적으로 문란했던 도시입니다.
그 이유가 이제 뒤에 나오는데요. 원래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로마가 이곳을 정복해버린 것입니다. 고린도를 황폐화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가 기원전 44년에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지역 아가야 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시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 아닙니까? 로마를 발전시킨 위대한 황제 중 하나인데 이분이 이 도시를 재건한 이유는 이 도시가 항구를 두 개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으로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습니다. 겐그레아 들어보셨습니까? 바울이 서원이 있어서 머리를 깎은 항구입니다. 겐그레아 항구를 가지고 있고요. 또 왼쪽으로는 레기온 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도시에 큰 항구가 두 개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개발한 것입니다. 겐그레아에서 배를 띄우면 오른쪽, 동쪽으로 가겠죠. 동쪽으로 가면 터키를 만납니다. 아시아로 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띄워서 겐그레아 항구에서 에베소 지역으로 금방 갑니다. 왼쪽에서 배를 띄우면 아드리아 해를 지나갑니다. 아드리아해를 지나서 위로 가면 지중해를 만납니다. 그럼 어느 나라를 만날까요? 로마를 만납니다.
그러면 고린도라는 도시를 정복하고 거기를 개발했다는 것은 여기를 아가야 지역의 거점 도시로 삼아서 아시아와 무역을 하고 유럽과 연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에서 배 타고 오면 어디로 오는 것입니까? 레기온으로 오는 것입니다. 레기온에서 육로를 거쳐서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면 터키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개발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상인들이 많이 오겠죠. 전 세계에 배타는 상인들이 이곳으로 개발되었으니 얼마나 많이 올까요? 상인들이 오면 뭘 합니까? 장사합니다. 상인들이 물건 사고팔고, 물건 받고 합니다. 그러면 돈이 거기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그 돈을 쓰고 가게 해야 합니까? 안 합니까? 쓰고 가게 해야지 상인들이 거기서 물건을 팔고 돈을 받았는데, 그러면 그것을 들고 가면 이 도시에 남는 것이 없잖아요. 세금밖에는. 그러니 이 도시가 부강해지려면 돈을 쓰고 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가 상인들은 다 남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이 도시가 타락한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아크로고린도 사진을 보면 아래쪽에 누워 있는 돌들이 있고요, 위에 아스라이 보이는 돌산 같은 것이 보입니다. 여기를 아크로고린도라고 부릅니다. 아크로폴리스 들어보셨습니까? 아테네에 가면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는데, 고대에 '아크로'라는 말이 붙으면 '높다'라는 뜻이고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들어 놨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입니다. 지금 고린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여기를 개발하고 나서 아크로고린도 저 산꼭대기에 신전을 지었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을 말입니다. 아프로디테가 뭐의 여신입니까? 미의 여신입니다. 미의 여신이 거하는, 미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이 아크로고린도 꼭대기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었습니다.
그러면 고대의 로마 시절에는 이 신전을 지었다는 것은 그 신전에 사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을 저기에다 지었으면 거기에 예쁜 여자들이 신전 참기로 거기에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을 벌었습니다.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저기를 기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계단으로 해서 다 올라가서 거기서 "돈 벌게 해주신 신이여, 앞으로도 돈 벌게 해주신 신이여" 하고 제사하고, 그리고 나서 신전 참기에게 돈을 다 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어마어마하게 그런 도시입니다.
로마는 이곳을 이런 콘셉트로 개발한 것입니다.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사회, 짬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질서가 있습니까? 무슨 질서가 있어요. 돈 많은 사람이 질서인 것입니다. 로마의 칼과 로마의 권력이 이 질서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의 일들이 뒤엉켜 돌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돈이 흘러가서 고대 고린도 도시를 다 음란하고 추악하게 만들었던 도시, 그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시지프스 들어보셨습니까? 시지프스 신화에서 돌멩이 밀고 산꼭대기까지 막 올라가면 다시 돌이 굴러떨어지고 또 올라가고, 평생 동안 이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면 신화에 의하면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시지프스라는 사람은 고린도를 건설한 왕이었답니다. 고린도를 건설한 왕인데 이 왕이 신들을 속였답니다. 신들을 속인 죄로 형벌을 받아서 아까 우리가 본 사진에 아크로고린도 꼭대기 있잖아요. 거기로 큰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면 신이 다시 발로 툭 차서 굴러떨어지면 다시 기어가서 다시 돌 굴려 가지고 또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형벌을 받았다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스의 신화로 소설을 써서 재해석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인간의 부조리, 똑같은 일을 권태롭게 반복하고, 우리가 도대체 무슨 벌을 받길래 매일 가서 일하고 맨날 돈 벌고, 똑같이 이 돌덩이 메고 맨날 아크로고린도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이 시지프스 신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아크로고린도, 아까 봤던 그 돌산, 높은 산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입니다. 고린도가 좀 느낌이 오십니까?
1-5. 복음의 능력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음란하고 타락하고 말도 안 되는 도시에 교회를 세웠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왜 거기다가 교회를 세웠을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거기다가 교회를 짓고 싶습니까?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까?
바울이 거기다가 교회를 세운 이유는 카이사르의 눈과 똑같은 것입니다. 항구가 두 개나 있잖아요. 아시아로 뻗어갈 수 있고 유럽으로도 뻗어갈 수 있거든요. 터키도 갈 수 있고 로마도 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 누가 거기에 터를 잡았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거기에 들어가면 '고린도가 되다', 즉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하다는 것은 다 복음 아래 다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거기다가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서지 못할 곳이 있습니까? 복음이 전파되지 못할 곳이 있습니까? 항상 여기는 피해가야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저 집은 안 되고, 이 지역은 안 되고,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항구 두 개를 가지고 거기를 도시를 개발했고 바울은 거기에다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이지,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에 물드는 것은 복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내가 모자란 것입니까? 내가 모자란 것입니다. 복음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복음은 강합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복음이 전해지고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거기에 성도들이 모이고, 물론 문제가 많죠. 그 문제도 해결하고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린도가 그런 곳입니다.
2. 본문 강해 (1:1-11)
2-1. 사도 바울의 정체성
이제 오늘은 1장 1절에서 11절까지 함께 봅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1장 1절을 보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그냥 읽으시면 안 되고요, 좀 비교해서 읽어봐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은 바울이 이런 식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럼 고린도전서는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 1절을 보니까 똑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랬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뒤에 이제 쭉 나오는 내용인데요, 바울이 가장 많이 공격받았던 것이 자신의 사도권이었거든요. 바울의 일평생에 자신의 아킬레스건이었고 유대인들의 공격의 무기였습니다. 그것이 왜냐하면 그 당시 사도라는 것의 통용되는 개념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사람, 그것을 사도라고 했거든요.
사도행전 1장에 나옵니다. 사도의 자격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우리 가운데 출입하던 자, 그것이 사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던 그날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이 사도의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누가 정한 것입니까? 자기들끼리 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입니까? 자기네들끼리 정한 것입니다. 왜 정했느냐 하면 가룟 유다가 죽었잖아요. 열한 명이 남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항상 12라는 수에 강박이 좀 있거든요. 12가 완전수입니다. 우리 계시록 갈 때 이야기했죠. 하나가 죽어 없어졌으니까 열한 명만 가지고는, 열한 명 해도 되는데 열한 명만 가지고는 찝찝하니까 불편하니까 하나를 더 채우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자격으로 사도를 채울 것이냐 그때 자기네들끼리 정한 기준이 그것입니다.
그 기준에 의해서 제비를 뽑았거든요. 맛디아라는 사람이 뽑힙니다. 맛디아가 들어오죠. 그 사람이 유다의 자리를 채웁니다. 그런 기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사도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닌 것입니다. 그 기준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셨잖아요. "너는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사도 된 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혈통을 따름이 아니고, 시간을 따름이 아니고, 누구의 뜻을 따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평생 동안 사도로서 살 수 있었던 내적 동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도 된 것, 내가 직분자가 된 것,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내 의지로 된 것이라면 내 의지가 사라지면 우리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내가 섬기고 봉사하고 일하고 직분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역하게 하고 주의 일을 하게 하는 내적 동기가 되어야 됩니다. 무슨 세상의 간판이 중요하고 시간을 보낸 횟수가 중요한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좀 이제 느낌이 오십니까?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봤잖아요. 우리가 고린도에 있는 어떤 교회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세속 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세속 도시에 영향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죠. 그런데 영향을 받기만 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영향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 도시에 영향을 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이 세속 도시와의 관계 가운데서 영향을 받아서 잠식당하느냐 아니면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그랬잖아요. 고린도라는 어지럽고 타락한 도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니까 하나님이 주인 아닙니까? 우리는 내가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데, 그런데 그렇게 살아내면 고린도도 변화되고 우리 이 지역도 변화되고 이 나라도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2-2. 은혜와 평강의 출처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2절 보니까 바울이 공식처럼 말하는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누구로부터입니까? 이것이 바울의 시그니처 인사인데요. 2절 보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너무 많이 이야기하니까 좀 식상한데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누구로부터입니까? 하나님, 또 예수님입니다. 출처가 하나님과 예수님인데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어디로부터입니까? 아래로부터입니까? 위로부터입니다. 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됩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출처는 될 수 없으나 은혜의 통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됩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 나의 이 순결한 마음과 깨끗한 영을 통해서 나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은 내가 은혜의 출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너에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면 그래서 다 사람들을 해롭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거든요.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데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말이 타인에게 은혜가 되어야 하고요. 내가 사용하는 물질이 은혜가 되고, 그 은혜를 흘려보내서 은혜의 통로가 된다면, 나의 이 예쁜 말을 통해서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자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고 은혜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은혜의 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시작과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시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자식들한테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이제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자식에게 준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통해서 너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나는 통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버림받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2-3. 십자가로 이룬 평강
두 번째 평강을 이야기했습니다. 평강이 너무너무 중요한데요.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셨잖아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서워서 문들 다 닫고 꼭꼭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입니다.
아니 평강하지 않은데 무슨 평강을 준다는 것입니까? 평강을 주려면 저 로마 사람들이 다 죽어야 되고 빌라도도 죽어야 되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위험 요소가 제거되어야지 그것이 평강인 것이지 제자들이 생각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강을 선물하셨거든요.
이것이 예수님이 너무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평강이 언제 깨졌습니까? 평강이 깨어진 자리를 찾으셔야 됩니다. 우리 옛날에 많이 했는데 죄 이야기할 때 창세기 3장에서 평강이 깨집니다. 창세기 3장 이전까지 1장과 2장까지 평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평화로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같이 잘 지냈잖아요. 행복했잖아요. 아담과 하나님 사이 좋았잖아요.
죄가 들어오면서 평강이 깨집니다. 그런데 평강이 깨진 것은 네 가지 차원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찾는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데 아담이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강이 깨졌습니다. 화평이 깨졌습니다.
또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집니다. 아담이 뭐라 합니까? 추궁하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한 이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강이 깨집니다. 또 내게 수치심이 찾아온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나와 나 사이에 인격의 분열이 옵니다. 네 번째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자연 사이에 평강이 깨집니다.
이런 상태로 요한복음 20장까지 왔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평강을 뭐라고 부릅니까? 샬롬(שָׁלוֹם)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반갑다는 인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평강을 이루어 내셨다는 뜻입니다.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다시 회복했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다시 회복했으며,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게끔 했으며, 또 인간과 자연 사이도 회복합니다. 그것이 평강입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인간이 줄 수 있습니까? 이 놀랍고 위대한 평강을, 그 평강의 출처도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은 우리가 생각할 때 그렇죠. "아 나 가난해요. 좀 돈만 있으면 평강할 것 같아요. 나에게 샬롬이 올 것 같아요." 그런데 돈 또 떨어지면 또 다시 불안합니다. "아 나 좀 몸만 좀 안 아프면 평화로울 것 같아요." 그런데 안 아프고 안 아프고 갑자기 세상 떠나면 제일 좋은데 자꾸 아프잖아요. 삐걱삐걱 하잖아요. 몸도 아프고 계속 그렇잖아요. 그러니 어떤 요소가 결여된 것이 채워져서 평강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의 평강은 죄와 죽음의 근본 원인이 해소되어야 평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은 누구로부터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야, 내가 너에게 평화를 주는 거야" 이것은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핵무기가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우리에게 평강을 줄 수 있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용어를 지속적으로 쓰는 것은 "나는 이 교회 설립자이니까 내가 너에게 은혜를 주겠다, 내가 너에게 평강을 주겠다" 이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통로야, 나는 그 도구로 지금까지 쓰임받았을 뿐이야" 그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것은 인간의 도구됨입니다. 자기가 그냥 쓰임받는 것입니다. 몇 년도 안 됐는데 주인 노릇 하려고 하지만 바울은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것을 우리는 배우는 것입니다.
2-4. 위로의 하나님
여기서 이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했습니까?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이제 바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위로를 이야기하거든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위로, 위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거의 버림받기 직전까지 갔거든요. 다른 유대인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막 무시했고 "저 사람은 가짜야, 자격도 없어, 저 사람은 정식 신학교도 안 다녔어, 저 사람은 사도도 아니야, 너희는 잘못 배운 거야" 그런 말을 자꾸 하니까 사람들이 헷갈려 가지고 "그런가 보다" 하고 바울을 막 멀리했거든요.
그런데 바울이 그것 때문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봉변 당하고 쫓겨났죠. 그래서 다시 편지 써서 디도에게 줘서 보냈죠. 그래서 해결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위로의 의미가 무엇이냐 보시면, 위로하다, 위로, 명사로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죠. 우리가 헬라어는 몰라도 하도 많이 들어 가지고 비슷한 것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보혜사가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중보자, 위로자입니다. 즉 성령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이 위로 사역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위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울고 있으면 손수건 주고 눈물 닦아 주고, 배고파하면 데리고 와서 밥 사주고, 돈 떨어졌다 그러면 돈 좀 주고, 심심하다 그러면 같이 놀아 주고, 그것이 위로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 그렇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위로 자 있습니다. 같이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성령의 위로는 보세요, 요한복음 15장 26절 계속 보시면 "내가(여기서 나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즉 하나님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 그랬습니다. 즉 위로자 성령의 본질이 "진리의 성령"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진리로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진리는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천 년 후나 똑같은 것이 진리입니다. 100년 전에 이랬다가 오늘 이게 좀 바뀌었다가 내일 또 다르게 바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물은 100도에서 끓습니다.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왜냐하면 해발 600m 고지에서 물 끓여 보세요. 100도보다 낮은 점에서 끓습니다. 기압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냥 과학적 사실인 것이지 진리는 0.1도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장래나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사에 그런 진리 있습니까? 사랑이 진리입니까? 변하잖아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요. 변하고 움직이고 퇴색하고 타락하고 사랑했다가 미워 죽겠고 뭐 그런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랑도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죠. 진리가 무엇입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 무궁토록 있도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면 위로하시는 성령의 사역, 성령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느냐?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이 위로입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쓰러져 있으면 날카로운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서 우리를 위로합니다. 일어서라고 책망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야, 지금 상태가 저런데 죄를 책망하면 안 되지." 그런데 성령께서는 널부러져 있는 사람을 막 책망하기도 합니다. 일어나라고, 자빠져 있지 말라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이렇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로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닙니까? 다시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살게끔 하는 것 아닙니까? 쓰러져 있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다양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때로는 불꽃 같은 말씀으로, 때로는 따뜻한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 같은 말씀으로, 때로는 "좀 괜찮다고, 괜찮다고, 여기 울고 좀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도 위로하시고, 다양한 형태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말씀이 위로라는 사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라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2-5. 말씀으로 버틴 바울
그러면 다시 바울로 돌아가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랬잖아요. 내적인 고통, 자신의 사도권 때문에 힘들었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랬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기간을 어떻게 버텼다는 말입니까? 말씀으로 버텼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버텨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둠의 긴 터널을 보낼 때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사람 아무리 찾아다녀 봐도 사람은 잠깐 같이 있을 뿐입니다. 딱 한 시간. 그 사람이 나랑 1년 있어 줍니까? 10년 있어 줍니까? 바쁘다고 갈 텐데요. 또 밥하러 가야 되니까요, 집에.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을 위로한 것입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고 견디게 하고 버티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정말 어둠의 긴 터널을 보낼 때 사람 찾지 마세요. 말씀 읽고 말씀으로 위로받고, 동시에 진짜 어려운 인생을 사는 자에게는 말씀이 위로가 되기를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말씀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내는 것이 진짜 위로입니다. 그래야 힘을 받고 위로받습니다. 그것이 진리거든요.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5절 보시면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러면 나오죠. 이 위로는 무엇입니까? 말씀이라 그랬잖아요. 이 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했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위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축복송 불러주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래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서 위로하십니다.
6절 "우리가 환란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로입니다. 그 위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볼까요. 이사야 40장 1절과 2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라는 말씀이 나오죠.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랬습니다.
위로 사역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말씀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2절이 바로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 그랬습니다. 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것이 선포입니다. 말씀의 선포가 그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3절 말씀,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서 외칩니다. 그것이 말씀이 전해지니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 하니까 딱 생각나는 분이 누굽니까? 세례 요한 생각나죠. 방금 우리가 이 말씀 읽으니까 세례 요한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소리다"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복음 말씀을 잘 알고 있는데요, 세례 요한이 원래는 제사장 가문이었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 잡아 먹고 석청 따먹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로마로, 예루살렘으로 다 몰려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혼자 거꾸로 광야로 갔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외치는 음성을 들으러 그리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이 뭘 합니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갔을까요? 세례 요한이 외쳤던 말씀은 그들에게 따뜻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회개하라" 강력한 선포의 말씀이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로가 되거든요. 그들에게 말씀이, 내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받으려면 옛날 흘러간 7080 노래 들어봐야 위로 안 됩니다. 옛 친구 만난다고 위로 안 됩니다. 내 심령을 찔러 쪼개는 추상같고 불꽃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야, 그래야 위로가 됩니다. 위로의 목적은 이렇게 세우는 것이니까, 다시 일어서야 되니까 그렇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어디 있어도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힘들 때일수록 말씀 꼭 붙잡고 견뎌야 됩니다. 그것이 위로입니다.
2-6.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그다음은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 8절 한번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더니" 9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5장 32절을 보니까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가령 내가 사람처럼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맹수라고 표현했는데요. 바울이 진짜 콜로세움 같은 데 들어가서 사자와 싸웠을까요?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맹수는 자기를 물어뜯는 사람들, 유대인들, 자신의 사도성을 가지고 자꾸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심한 고난, 이것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격,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히려 하는 유대인들,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붙잡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견디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이야기입니다.
10절 보세요.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그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 혹은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같이 큰 사망에서, 즉 내가 죽을 것 같은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랬습니다.
이미 나는 건짐 받았습니다. 말씀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닥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는 또 말씀을 붙잡고 위로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나를 건질 것입니다. 또 건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현재도 함께 하시고 미래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여기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2-7. 기도의 부탁
그다음 11절 보시면 부탁을 합니다. 이제 성도들에게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여러분, 성도가 지도자 즉 목회자, 바울 같은 목회자를 도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움은 기도입니다. "간구함으로 우리를 도우라" 그랬잖아요. 간구, 헬라어로 데에시스(δέησις), 청원, 부르짖음입니다. 기도해서 나를 좀 도와달라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은사는 선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해서 얻은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져서, 응답되어서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 줬습니다. 힘내시라고. 힘내요, 말씀 붙잡고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 기도가 응답됐구나."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되고, 그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도 성도들끼리 서로 기도해 줘야 되고, 그것이 가장 큰 위로입니다. 말씀 앞에 세워 주시는 것이 또 큰 위로입니다.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또 한번 살펴보시고 다음 시간에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린도후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세속 도시인 고린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에 교회가 세워져서 그 교회가 거대한 영향력을 줍니다. 주여,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이후로 68년을 지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살펴보고 회개합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으로부터 덧입습니다.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평강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주여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겸손하여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으니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강력한 말씀으로 드러누워 있는 우리 각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용기 내어서 세상으로 나가게 하시고, 주의 일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