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2 -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1:12-2:17)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오늘은 고린도후서 공부 두 번째 시간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2절부터 2장 끝까지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아주 각별하게 생각했고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전서와 후서 두 번만 쓴 것이 아니라 네 번이나 썼습니다.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했고, 추후에 또 한 번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도합 네 번 편지 쓰고 세 번 방문한 교회, 바울이 수없이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지만 이런 교회는 유일했습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마음을 쓰고 많이 방문하며 편지도 많이 썼겠습니까?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문제가 많다고 해서 자식이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떻게 버릴 수도 없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치고 고쳐서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그 뜨거운 열정으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던 마음들이 여기에 절절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지난 시간에 1장 1절에서 11절까지 '위로의 하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위로라는 개념이 그냥 곁에서 "괜찮아, 힘내, 잘될 거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 곧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복종시키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힘들 때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버텨내며 이겨냈습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 바울의 자랑
1-1. 세 가지 행함의 원리
바울은 자기 자랑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관련해서 자랑할 것 몇 가지는 항상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오늘도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라고 했는데, '너희'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행함'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행함이라는 말 앞에 있는 세 단어를 잘 보셔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직접 행동했느냐 하면, 첫째는 거룩함, 둘째는 진실함,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목회 방향이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이것만큼은 하나님께 자랑할 만하다, 너희에게 대하여 진심이 있고 자랑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하기오테스(ἁγιότης)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순수한 동기'라는 뜻입니다. 곧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을 섬김에 있어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김에 있어서 이 교회를 통해서 혹은 이 성도들을 통해서 다른 이익을 취해야겠다든지, 정말 이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 이외에 미워하는 마음 곧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절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 그 동기가 아주 순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동기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 속마음이 어떤지, 계획하는 바가 어떤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나는 순수한 동기였다, 분열되지 않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진실함입니다. 이 진실함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에일리크리네이아(εἰλικρίνεια)인데, 두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에일레(εἵλη)는 '햇빛'이라는 단어이고, 크리노(κρίνω)는 '판단하다'입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을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금이 갔는지, 얼룩이 묻었는지 보이지 않으니까 이 물건을 햇볕 앞으로 끄집어내서 바깥에서 비춰 보는 것입니다. 햇빛 아래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내 심장을 꺼내 보일 수 있다, 내 진심을 하나님 빛 안에서 보여도 나는 진실하다, 그 정도로 자신의 진실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자기 힘이나 자기 의지로 목회한 적이 없다고 바울은 자랑합니다. 순수한 동기, 하나님 앞에 일점 부끄러움도 없이 햇빛 아래에서 판단받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로 일함,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1-2. 성도의 자랑거리
사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주의 일을 감당하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모든 교회 동역자들과 성도들이 주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순수한 동기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겠지,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누군가에게 칭찬받기를 바라거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 경제적인 이익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순수한 동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분열되고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빛 안으로 내 심장을 꺼내서 한번 비춰 보십시오. 얼룩투성이일 것입니다. 그렇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경험으로, 자신의 물질로 일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바울처럼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혜로 일하고, 이것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평생 동안 교회를 섬겼습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했습니다 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래도 내가 한 교회를 40년 다녔더니 장로가 됐다"거나 "한 교회를 40년, 50년 대를 이어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됐다, 자녀들이 다 잘 먹고 잘 살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지금도 보란 듯이 살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너무 유치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랑거리가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복음의 사람들인데, 믿음의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했다, 순수한 동기로 일했다, 결과나 어떤 직분을 탐하지 않고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일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나는 순수했다, 그리고 나는 진실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일했다"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담백합니까? 깔끔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1-3. 서로의 자랑이 되자
13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만은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14절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곧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곧 종말의 날에는,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혹은 우리의 인연이 끝나는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서로 자랑할 만한 사이가 되자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 목회자를 자랑할 만한 목회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앞에 나왔습니다. 12절에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했으니, 거룩함, 진실함, 하나님의 은혜로 일함이 자랑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목회했던 사도 바울을 나중에 회고할 때, 이 교회를 설립하고 세우고 지금까지 인도하고 이끌어 주신 바울 선생님이 우리 교회를 이렇게 성장시켰다거나, 우리 교회를 천 명으로 만들었다거나, 우리 교회 건물을 이만큼 크게 지었다거나,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손 얹고 안수할 때 병마가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바울 선생님은 거룩하셨고, 진실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목회한 이 목회 철학을 잘 배우고 닮아서 거룩했고, 진실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자랑거리가 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 자랑하는 것,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인가, 얼마나 헛되고 허무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자랑할 때, 목회자를 자랑할 때, 성도들을 자랑할 때 어떻게 합니까? 질문 자체부터가 문제입니다.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너희 교회 재정이 얼마냐?" 그런 것 묻지도 말고 듣지도 마십시오.
바울은 똑같은 패턴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과 20절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자기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교회를 목회했으니까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 말은 사람이 곧 교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공부할 때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2. 본질과 비본질
2-1. 바울의 계획 변경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 15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은 비본질과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15절을 보면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를 잘 해석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원래 바울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거쳐,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다시 고린도로 왔다가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이유는 연보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 때문에 너무나 핍절한 상태에 있었기에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을 돌면서 연보를 거두어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계획을 수정합니다. 17절에 "이렇게 계획할 때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충분하게 기도하고, 충분하게 계산하고, 충분하게 계획하고 너희에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계획대로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다. 못 지켰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바울의 대적자들이 물어뜯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누구입니까? 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원래 사도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그와 함께 다녔던 사람을 사도라고 하는데, 바울은 그렇게 따지면 사도가 아니다. 정식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라며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을 물어뜯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동조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봐라, 바울이 거짓말쟁이잖아. 온다고 했잖아, 두 번이나. 그런데 그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하고 오지 않았으니까 그가 전한 복음도, 그가 전한 말도, 그가 전한 설교도 다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무조건 심정적으로 바울 편이니까 바울 편을 들고 싶겠지만, 그 현장 속으로, 2천 년 전 현장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보십시오. 목회자가 편지를 먼저 썼습니다. 내가 두 번 너희에게 가겠다고 기별도 했습니다. 그런데 못 갔습니다. 못 간 것이냐 안 온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한 논쟁들이 있을 것입니다.
2-2. 본질을 분별하라
그런데 이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냐 비본질적인 것이냐를 말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에 관련된 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왜 비본질적인 것이냐 하면, 연보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북쪽의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을 돌고, 남쪽 아가야 지역 교회인 고린도 교회를 다니면서 연보를 거두어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도권에 대한 문제 말입니다. 한번 갔다가 시끄럽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가는 것보다 편지 쓰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물어뜯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문제 삼고 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8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이 말을 갑자기 왜 하느냐 하면,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은 사실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하고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지금 못 가면 다음에 또 가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아니요'라고 한 적이 없다, 다 '예'만 했다, 지금까지 100% 다 순종했지, 내가 순종하지 않은 적이 있더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도의 입장에서 믿음 생활을 쭉 하면서 교회를 바라볼 때, 목회자를 볼 때, 또 서로 성도끼리 바라볼 때 비본질적인 것은 다 양보해도 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의 선후가 좀 바뀌는 것, 그것은 양보해도 됩니다. 그래서 내가 좀 손해가 보면 좀 참아도 됩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련된 것,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심에 관련된 것,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심에 관련된 것, 죄를 죄라고 하는 문제에 관련된 것, 그런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붙들고 지켜 나가야 하고, 그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맞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것을 누가 아니라고 하면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에서 밥을 먹느냐 국수를 먹느냐는 본질이 아닙니다. 무엇이라도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7시에 하느냐 7시 반에 하느냐, 이것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면 사탄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사람을 통해서 신나게 일하는 것입니다. 신나게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앞잡이 노릇을 하고 살면 나중에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싸운 것밖에 없습니다. 투쟁만 남습니다. 원래 싸우면 할수록 점점 더 싸우게 됩니다. 계속 싸우면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집니다. 사나우니까, 싸우니까,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자꾸 물어뜯으니까 말입니다.
2-3. 본질에 순종하는 자의 복
19절을 보십시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없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거절하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기까지 기도하셨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절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을 본받는 나는 본질에는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두 번 가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고 편지 쓴 것이 본질이냐 비본질이냐?"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질에 충실하고 본질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21절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본질을 꼭 붙잡고 사는 자,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사는 자를 첫째 굳건하게 세워 주십니다.
둘째,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기름을 붓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직무를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굳건하게 세우시고 직무를 맡기십니다. 왜 직무를 맡기실까요? 본질적 사역을 하니까 "너 그러면 일해라" 하시며 기름을 부어서 "너는 이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라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셋째, 인치신다고 했습니다. 도장을 딱 찍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일꾼이다, 너는 나의 종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 보증의 헬라어가 아라본(ἀρραβών)입니다. 이것은 상업 용어입니다. 거래 대금의 일부를 미리 주는 선금입니다. 여러분, 어떤 큰 거래를 하면 먼저 선금을 받습니다. 10%를 받든지, 5%를 받든지, 20%를 받든지, 큰 공사 계약을 하면 선금을 받지 않습니까? 그 선금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반드시 이 계약은 내가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꼭 붙들고 사는 자에게 직무를 맡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부어 주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도장 찍어 주시고, 그리고 "나는 너를 끝까지 사용하겠다, 너 본질을 붙들고 살면 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같은 선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상업 용어로 바울이 사용한 아라본이라는 단어인데, 굉장히 탁월한 성령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성령을 받게 됩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가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선금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무를 이 삶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4. 기드온의 사례
그 증거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구약의 기드온은 무엇을 하다가 하나님께 부름받았습니까?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다가 부름받았습니다.
밀은 원래 넓은 들판의 타작마당에서 타작해야 하는데, 포도주 틀은 포도를 집어넣고 발로 밟아서 포도즙을 밑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소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미디안의 압제가 극심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밀을 넓은 들판에서 타작하다가 걸리면 다 빼앗기니까, 이 사람이 자기 처자식과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내 꼴을 봐도 한심한데 무슨 큰 용사입니까? 이 사람은 큰 용사가 아닙니다. 이 소심에 빠진 인간이 무슨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다는 말입니까?
의구심을 참아내니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염소를 잡아서 고기를 만들라 하시고, 무교병을 굽으라 하시고, 국을 끓이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과 염소 고기 위에 국을 부으라 하셨습니다. 그 국이 막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 바위에서 불이 나와서 무교병과 국에 잔뜩 적셔져 있는 고기를 다 태워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정말 이 사람이 본질을 붙들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테스트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진짜 본질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진짜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테스트하셨습니다.
사사기 6장 25절과 26절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이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소심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집에 바알의 제단이 있고 아세라 목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사람이 본질적인 사람인가,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인지를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기드온이 27절에 보면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했습니다. 혼자 했습니까, 종들 데리고 했습니까? 종들 데리고 했습니다. 당당하게 했습니까, 숨어서 했습니까? 했습니다. 어쨌든 한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못 하니까 종들 데리고 가서 야밤에 몰래몰래, 아버지가 다 잘 때 한밤중에 가서 다 때려 부수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도 두려워하고 동네 사람도 무서워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것입니다. 누구를 더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은 본질적 사명에 온전히 헌신된 자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다음 일어나는 일이 놀랍습니다.
6장 33절과 34절을 보시면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더니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여호와의 영이 언제 임하셨습니까? 이때 임하신 것입니다. 본질적 사역에 충실하게 임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라본으로 보증으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끝까지 너를 붙들어서 승리하게 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은 이럴 때 임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서 할렐루야를 빨리 백 번 해서 성령 충만한 것처럼, 방언받은 것처럼 한다고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본질적인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셔서 그 일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영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고린도후서 1장 뒷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비본질과 본질이 얽혀서 나오고,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가 있으면 이것이 본질인가 비본질인가, 이것이 복음인가 그냥 놔둬도 되는 것인가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막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덤비고 덮어놓고 싸웁니다. 주로 언제 싸웁니까?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보임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니까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좀 손해 보고 내가 좀 무시당하는 것은 참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본질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까 말입니다.
덮어놓고 싸우면 성령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성령과 함께하는 자가 되어 성령의 보증을 받으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항상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3. 징계와 용서와 위로
3-1. 바울의 계획 변경 이유
이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23절에 보니까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게 하노니"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바울이 말하겠습니까? 내 진심을 몰라주는 너희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가서 얼굴을 대면하며 자꾸 너희와 얼굴 붉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보다 편지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2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가는 것보다 편지 쓰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보냈습니까? 디도를 통해서 보낸 것입니다. 방법은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는 것보다 편지 써서 보내고,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바울이 가면 됩니다. 세 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해서 연보를 거두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2. 문제 해결의 세 단계
그다음, 바울에게 큰 눌림과 걱정을 안겨 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면합니까? 큰 눌림과 걱정을 안겨 준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외부에서 온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가짜다, 봐라 그가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잖아,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하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큰 눌림과 걱정을 주는 사람들은 그들의 부추김에 놀아나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계속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 내는데, 거기에 같이 넘어가서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5절입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절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징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약간 멈칫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6절에서 7절로 넘어가는 것을 잘 읽으셔야 합니다. 징계를 철회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징계를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읽으십니까?
여기서 접속사를 잘 보셔야 합니다. '그런즉'을 잘 보셔야 합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가면 징계를 철회하라는 말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말은 징계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징계하고 그다음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용서하라고 합니다. 그다음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위로하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한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첫째 징계, 둘째 용서, 셋째 위로입니다.
징계 없는 용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가 징계를 하는데, 징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용서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용서를 전제로 깔고 징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을 문제 삼으면서 교회를 큰 회오리 가운데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면 징계가 필요합니다. 마땅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치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치리를 하고 그다음에 용서합니다. 용서의 전제가 무엇일까요?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에 대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의 잘못을 그대로 수용하고, 공동체 앞에서 회개하고,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의 징계 기간을 성실하게 잘 수행한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뛰쳐나가 버리면 용서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 용서, 위로입니다. 위로는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위로 사역은 진리의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위로는 진리입니다. 가르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징계하고, 징계를 잘 받은 자를 용서하고, 그다음에는 다시 앞에 일대일로 앉혀 놓고 복음의 진리부터 시작해서 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다시 짚어 주고 복음 위에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단계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합니까? 저도 못 합니다. 징계하면 다 떠나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서 못 합니다.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못 합니다. 그래서 자괴감을 느낍니다. 굉장히 자주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3-3. 사탄에게 속지 말라
징계가 필요하고, 이 징계를 수용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하고, 그 회개하고 징계를 받아들이면 당연히 공동체는 따뜻하게 껴안고 용서해야 합니다.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가르치고 위로하고,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말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무엇에 대해서 순종하라는 말입니까? 지금 이야기한 것, 징계, 용서, 위로입니다. 이것을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너희에게 썼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이제 디도편에 보낸 편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세 번째 편지에도 이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쓴 것 아닙니까?
10절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그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사탄은 어떻게 우리를 속일까요? "야, 교회가 사랑이 없어? 그냥 덮어. 그냥 따지지 말고 무조건 덮어. 그런 것 징계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 저 사람이 헌금을 얼마나 하는데 교회 나가 버리면 어떡할래? 덮어." 사탄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그런데 또 사탄은 반대로도 이야기합니다. "징계해야지. 세게 해야지. 용서는 무슨 용서? 저런 인간은 절대 안 변해." 용서가 없는 징계를 사탄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징계가 없는 용서를 계속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어떤 고리를 노리느냐 하면, 그 교회 공동체의 약한 고리를 노립니다. 이 교회에 대가 센 사람들이 좀 없으면 맨날 용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두 사람이 교회를 어지럽혀도 누구 하나 제어를 못 하는 것입니다. 교회법이 살아 있고 교회에 질서가 있고 공동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아, 우리는 사랑이 많은 공동체야." 소위 진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징계 없는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이것이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고 사탄의 계략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탄이 그런 식으로 일합니다.
징계하고 용서했으면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는 사탄의 놀이터로 전락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것을 못 하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누구를 공격할까요? 사탄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감히 공격할 수 있습니까? 판이 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교회의 지체 된 성도를 공격합니다. 교회가 무너져야 사탄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순간 영적 전쟁입니다.
교회가 평안한 것 같습니까?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선택의 순간마다, 매순간 영적 전쟁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이니까, 정말 좋은 교회는 교회 된 지체인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바른 성도들이 되고, 그 성도들이 모퉁이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그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건물 크게 짓는다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땅 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진짜 강하고 진짜 견고한 교회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견고하고, 어떤 사탄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에 서 있는 교회가 견고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사탄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아주 단순하게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준다는 말은 참 다양하게 쓰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한 고리를 파고든다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많은 교회, 엄격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를 하지 말라고 계속 가르칩니다. 계속 그 교회는 법입니다. 법대로, 법대로 합니다. 그런데 좀 선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 공동체는 사탄이 계속 용서하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틈입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향기
4-1. 바울의 고백
바울은 해결되지 않은 근심 때문에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2장 12절과 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름에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직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이었습니다. 세 번째 편지를 가지고 간 디도가 답신을 가지고 오기 전이었습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 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눌려서 복음을 마음껏 전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솔직한 표현입니다.
이 정도로 바울이 지금 눌리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바울이 스트레스받고 눌리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이런 어려움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14절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이것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인데, 자신이 이것 때문에 눌려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전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는 굉장한 실패입니다. 자괴감이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으니 하나님 앞에서 죄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찌하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내가 이 고린도 교회 문제에 발목 잡혀서, 언제까지 저 인간들 때문에, 본질과 비본질도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에 근심하고 염려해서 진짜 해야 하는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것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그가 찾은 정답입니다.
4-2. 개선 행진의 비유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기게 하다, 이기다의 헬라어 트리암보(θριαμβεύω)가 중요합니다. 영어 'triumph'의 그리스어인데, 개선 행진을 이끌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때 묵상하다가 딱 떠올린 장면이 있습니다. 로마 장군이 개선하는 개선 행진을 떠올린 것입니다. 로마 장군이 적진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로마 시내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격이 조금 엄격합니다.
내전 상황에서 이긴 것은 안 됩니다. 다른 나라를 복속시키고 와야 합니다. 적어도 5천 명 이상은 죽이고 와야 합니다. 전리품도 정해진 양이 있어서 많이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영토도 일정 영토를 확보하고 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령관을 로마 시내에서 개선 행진시켜 줍니다.
어디를 행진하느냐 하면, 로마 포룸이라고 포로 로마노, 로마 공화정의 심장, 쉽게 말하면 로마 시내 한가운데를 행진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캄피돌리오 광장이라고 로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시청 청사가 있는 그곳까지 행진시켜 줍니다.
행진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제일 앞에 로마의 관리들과 원로원이 섭니다. 원로원 의원들이 먼저 행진합니다. 그다음 그 뒤를 나팔수들이 따릅니다. 나팔을 불며 승리의 나팔을 울립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자들은 전리품을 들고 따르는 종들입니다. 이만큼 많은 전과를 올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쓰인 무기를 사람들이 들고 갑니다. 만약 해전에서 이겼다면 그 배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 가지고 들고 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로마의 제사장들이 따릅니다. 제사장들과 함께 따르는 무리 중에 화동도 있고 여자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사장과 함께 다니면서 꽃을 뿌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향을 피웁니다.
바울이 그것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냄새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냄새가 로마 시내 전역에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 뒤에 제사장과 화동의 뒤에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에 사령관이 앉습니다. 승리를 가지고 온 사령관입니다. 그리고 그 사령관의 마차 뒤에 사령관의 가족들이 따릅니다. 이것이 개선 행진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개선 행진을 바울이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싸우는 전쟁에서 적국 영토 좀 확보하고 왔다고 이 땅에서 이 정도 행진을 해 주는데, 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사탄의 권세에서 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1차 선교 여행, 2차 선교 여행, 3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수많은 악한 사탄 마귀를 땅에 떨어지게 하고, 결국 하늘 아버지께 영광 돌린 하나님의 전사가 아닌가?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 정도 개선 행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선의 행진이 저 하늘에서 열리고 있을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4-3. 향기를 풍기는 삶
이것을 깨닫게 되니까 지금 이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간의 복잡한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느낌 아십니까? 우리가 삶의 자리가 힘겨울 때, 참 버티기 어려울 때, 맨날 누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맨날 거기에 휘말려서 죽느냐 사느냐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살 때 이런 것을 상상하십시오.
"내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나를 개선 장군처럼, 하나님의 백마에 나를 태우시고, 하나님께서 천국의 열두 진주 문을 통과하게 하시고, 유리바다 같은 바닥 같은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시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기에 눌려 있다가 눌려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복음 전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는 쓸데없는 나, 연민에 찬 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그 향기를, 나는 이제는 앞으로 가는 곳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해결되고 말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본질적으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 성령이 나에게 보증이 되셔서 끝까지 나를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여기서 이 그리스도의 냄새,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하나님의 향기, 우리가 이 땅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망하는 자들에게도 구원받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향기였습니다.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죽을 때까지 안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향기가 16절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나 아니면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것처럼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눌려 있을 여력이 없다. 다시 일어나서 복음 전하는 자가 되겠다.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여기에 마음이 쏠려서 복음 전하지 못한 자기를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이 일을 다시 감당하겠다고 결단합니다.
로마의 사령관이 그 빛나는 행진을 한 것,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의 개선 행진을 기대하고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희망을 보입니다.
4-4. 바울의 결단
17절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게 하다는 말이 카펠로스(κάπηλος)입니다. 구매자를 속여 모조품을 파는 잡상인을 말합니다. 참 바울이 단어 선택도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잡상인처럼 팔아치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잡상인은 구매자를 속여서 모조품을 파는 사람,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자기 이속을 취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자기 권력을 더 키우려고 하는 사람들, 그것을 가지고 치부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것을 가지고 권세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의 결단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이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통로입니다. 그 아래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통로가 되어서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순전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순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도 순전한 말씀을 전해야 하고, 혼잡하지 않은 말씀을 전해야 하고, 삶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고 다시 한번 살피시면 좋겠습니다. 조금 복잡한 말씀이고 어려운 말씀인데, 한 번 더 또 읽어 보시고 살펴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비본질과 본질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이 본질, 진실로 이 본질을 부여잡고 비본질은 모든 것 다 양보해도 괜찮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질적 사명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셔서 우리가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성령 충만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사탄에게 속지 않겠습니다. 공동체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 징계와 용서와 가르침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에 어떤 눌림이 있어도 그 눌림에 쓰러져서 본질을 외면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 천국에서 우리를 아름다운 영광의 문으로 인도하실 그 개선의 행렬을 기억하며 기대하며, 이 땅의 자그마한 분쟁들에 마음 쓰지 않겠습니다.
승리하게 하여 주시고, 승리를 이미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