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그리스도의 편지 / 전체녹취

고린도후서 특강 3 -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장)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오늘은 고린도후서 세 번째 말씀으로 3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말씀인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받았습니다. 그들이 공격한 이유는 애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이나 방문하려 했으나 그 계획을 긴급하게 수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상황이라는 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는 것인데, 그 상황을 본질과 혼동하고 착각한 사람들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질적 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 오직 "예"라고만 하신 것처럼, 자신도 본질 사역에는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른다고 했습니다. 본질 사역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위대한 은혜가 바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치 장사하는 사람들이 보증금을 받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보증이 되면 끝까지 지속적으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를 뒤흔들었던 사람들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징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징계는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용서를 전제로 하는 징계입니다. 징계를 받고 그것을 수용하면 공동체가 그 사람을 용서합니다. 용서한 후에는 성령으로 그를 위로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위로한다는 말은 말씀을 계속해서 먹이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괴로웠을 때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복음을 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는 어떻게 견디고 이겨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위대한 개선 행진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했습니다.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도 그렇게 탁월하고 특별한 개선 행진을 열어주는데, 그때 꽃가루가 날리는 향기, 사람들이 가면서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향기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이 땅의 어려운 일들을 잘 이겨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의 이야기입니다.

1. 그리스도의 편지

오늘 3장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편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내용이 1절부터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답을 제시합니까?

1절을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자천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자기를 추천하는 것입니다. 자천은 민망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추천해 주어야 하는데, 내가 나를 자천하는 것은 경우에 어긋나기도 하고 민망한 일입니다.

1-1. 종이 추천서의 한계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붙이거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굽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계속 언급하는 어떤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늘 했던 일이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래 사도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행했던 자들이라 하는데, 어떻게 바울이 사도냐, 예수님과 함께 얼굴 본 적이 있느냐, 면식이 있느냐, 바울은 정식 신학교를 나왔느냐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그런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붙이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추천서를 들고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면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 교회를 개척한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를 입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추천서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추천서의 출처가 어디겠습니까? 뻔합니다. 그 당시 초대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교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가장 권위 있는 모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세 분 있습니다. 누굽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아니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 탁월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추천서를 들고 와서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직인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러이러한 학벌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들이민 것입니다.

그런데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 참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진짜 사람을 추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잡고 데리고 가서 앉혀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얼굴과 얼굴을 보고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진심으로 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이에 그냥 몇 줄 써서 도장 찍고 직인 찍어 보내는 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하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도대체 누가 이런 추천서를 썼느냐고. 뻔합니다. "이것 좀 써주십시오, 제가 여기서 훈련받았습니다, 저는 이 교회 성도입니다"라고 하면 사도들이 안 써주고 배기겠습니까? 저에게도 일 년에 수십 통씩 추천서를 써달라고 합니다. 굳이 이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아주 친하지 않아도 이러이러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은 써줍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고 와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 살아 있는 추천서

그러니까 바울에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그럼 나도 한번 나를 추천해 볼까?" 바울이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자기가 추천서를 어디서 받아오겠습니까?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가말리엘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가서 선생님 추천서를 받아오면 됩니다. 본인과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의 추천서를 받아와도 됩니다. 그러면 유대교 율법에 정통한 추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 교회 베드로에게 가서 받아와도 됩니다. 그런데 그런 짓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2절을 보시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라는 말은 추천서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곧 우리를 추천하는 추천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누가 추천서를 어떤 식으로 써서 교회를 어지럽힐지 몰라도,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나를 입증하는 추천서다, 너희가 나를 입증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반전이고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다음에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썼다"고 했습니다. 너희의 삶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삶을 보면 내가 교육을 잘한 것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다. 너희들이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보고, 이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내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와서 내가 나임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의 삶이 나의 사도 됨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 사람들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성도들의 삶의 모양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읽힌다는 뜻입니다. 다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읽고 있다. 사람들이 다 너희들의 삶은 내 가슴 속에 이미 새겨져 있고, 너희들의 인생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읽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나를 입증하기 위해서 종이쪼가리 추천서는 의미가 없고 필요가 없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1-3. 믿음의 본이 된 성도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시그니처 단어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곧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들의 삶이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1장 7절과 8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본받습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경험하고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곧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기만 나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보디발은 불신자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종 하나가 왔습니다. 그 종을 샀습니다. 그 종은 히브리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하는 모습과 행동들을 보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심도 보디발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삶이 보디발에게는 하나님의 편지가 된 것입니다.

1-4. 우리도 그리스도의 편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인생은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처럼 다 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을 주시고 내 삶을 주장하시고 알려주셨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편지답게 다 보여지는 삶인데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산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부자 되고 거드럭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보여지니까, 편지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은밀한 편지가 아닙니다. 개인 간의 편지는 내밀합니다. 그것을 접어서 봉투에 넣어서 풀 붙여서 보내고, 누군가가 이 편지를 뜯어보면 정보통신법 위반이 됩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누구에게나 다 보여지는 편지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알려지고 다 볼 수 있는 편지가 나라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좀 살다 보면, 수십 년 살다 보면 평판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평판은 사실 거짓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한순간은 오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와 악연 때문에 얽혀서 그 사람은 나를 이상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평판은 대체로 그 사람의 삶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그 평판이 나에게 잘 들립니까? 잘 안 들립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관심 있는 이들만 있어서 좋은 이야기만 해주기 때문입니다. 평판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평판을 듣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수용하고 수정해야 올바른 인격이 됩니다.

1-5. 그리스도의 사람을 기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궁극적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3절에 "너희는"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바울과 바울 일행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즉 우리의 수고로 인해서 우리가 너희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가르치고 복음 전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 성도들의 정체성을 딱 규정해 주었습니다. "너희는 바울의 편지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편지라고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목회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이 사람을 믿고 성장시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죽고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린도라는 도시의 주변 정황을 다시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시간에 공부했듯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음란한 도시입니다. 상업적으로 굉장히 활발하고 발달한 도시입니다. 항구 두 개를 다 끼고 있습니다. 아시아로 가는 항구, 유럽으로 가는 항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상인들의 돈을 거기에 묶어두기 위해서 아프로디테 신전을 아크로고린도 언덕에 만들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아크로고린도 아래에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아폴론 신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전이 많습니다. 아주 어마어마한 신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음란한 도시,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불신자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기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나 상황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주변 환경 때문에 내가 잠깐 나를 숨겨야 합니다, 내가 나를 좀 감춰야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린도에 사는 성도들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편지로 드러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1-6. 가서 제자 삼으라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여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이 마지막 장입니다. 이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갑니다. 제자들이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이 제자들의 삶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편지여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세례를 받을 만큼 이분이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분에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내가 배울 만큼 이분의 삶이 괜찮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 동안 그렇게 훈련하셨습니다. 제대로 훈련시켜서 그리고 내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넣으시고, 그들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하나하나 써놓으시고 "너 이거 가리지 마, 이거 숨기지 마, 여기에 일점일획도 너희들이 다르게 행동하지 마"라고 하시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를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절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확신일까요? 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족'이라고 표현했는데, 조금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자격' 또는 '적합성'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즉 다시 읽어보면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입니다. 어떤 자격입니까? 사도성의 자격입니다. 우리의 사도로서의 적합성은 사람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다, 종이쪼가리의 추천서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에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된 것입니다. 이분은 3년 동안 기간 채워서 일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추천서 받아서 일꾼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따라서 이분이 일꾼이 된 것입니다. 즉, 그러면 바울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바울 자기가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길러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내가 말씀을 먹이고 돌보고 섬기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길러내고 있습니까? 내 입에 맞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도록 길러내야 합니다.

2. 새 언약의 일꾼

이제 바울이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포함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6절에 "그가 또한 우리를" 즉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적합하게 하셨으니, 자격 있게 하셨으니라는 뜻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이 있다면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옛 언약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헷갈리는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이분법적인 용어를 자주 씁니다. 죽이고 살리고, 옛 언약과 새 언약, 폐기해야 될 것과 새롭게 해야 될 것,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율법과 복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식에는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고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무조건 수용해야 할 것이라는 도식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울 신학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2-1. 새 언약의 약속

한번 보겠습니다. 이 새 언약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이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2절을 보면 이것은 옛 언약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날이 이르면 새 언약을 맺는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남유다가 망하고 기록된 것입니다. 남유다가 망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새 언약을 맺겠다.

"이 언약은" 즉 이 새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이 언제입니까? 출애굽입니다. 한마디로 그때 맺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시내 산 언약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시내 산 언약의 핵심이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이 나중에 펼쳐진 것이 모세오경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즉 다시 32절을 읽어보면, 이 새 언약은 출애굽 당시에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남편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신부입니다. 신부가 남편인 신랑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무엇으로 깼습니까? 음란으로 깬 것입니다. 우상숭배로 깬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즉 모세오경으로부터 비롯되고 십계명으로부터 비롯된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김으로 폐기된 것입니다. 이미 거기에서는 희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희망을 두시지 않고 북이스라엘 멸망시키고 남유다 멸망시켰습니다. 그것이 옛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가지고는 도무지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니 그들이 멸망당한 것입니다.

2-2. 율법의 한계와 새 언약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옛 언약에서는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을 통해서 검증받고 구원받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물론 율법의 정신을 알면 되는데, 율법으로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이 누굽니까?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을 한번 봅시다. "그러나 그 날 후에" 즉 나라가 망한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속에 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그들의 속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해서 너희들에게 주었더니 너희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망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그날이 오면 새 언약은 너희들 마음속에 두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하는 말씀이 누굽니까? 성령입니다. 이것은 성령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언제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 받습니까? 그냥 막 산에 가서 방방 뛰면 성령 받습니까? 성령은 회개해야 성령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친히 임재하십니다.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임하는 유형이 있고, 디모데처럼 점진적으로 성령이 씨앗처럼 임해서 성장하고 자라게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혹은 디모데처럼 그렇게 성령이 내 마음속에 성장하고 자라고 성령이 나에게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말입니다.

2-3. 율법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고 성령이 중요하고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이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발버둥치고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는데 됩니까? 안 됩니다. 안 되니까 거기서 나의 무능을 보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봅니다. "아, 나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힘쓰다가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져서 북이스라엘 망하고 남유다 망해버린 것처럼, 우리는 율법 지키려 애쓰다가는 망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마지막은 죽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그 무능을 경험한 자들이 결국 누구를 붙잡습니까?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이, 예수 없이 한번 내가 구원받아보겠다고 율법 붙들고 살아본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한번 버텨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결국은 그리스도 아니면 안 됩니다.

이 율법에 다른 것을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구원받아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권력으로 구원받아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돈과 권력과 나 자신으로 내가 성공하고 구원받아 보겠다고 한 사람들이, 그것이 안 되니까 결국 그 끝은 멸망이니까, 거기에서 나의 철저한 무능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습니다. 예수 붙잡고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 그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2-4. 영은 살리는 것

그러면 성령이 임하면 그 성령은 우리를 살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은 절대 무시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무능을 철저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이 과정을 지금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25절까지 말씀은 성만찬 말씀인데, 25절을 보시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잔,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에 의지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율법 잘 지키는 자야, 바리새인처럼 율법 잘 지켜서 나는 구원받을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나는 제사장 가문이니 나는 유대인이니 나는 할례 받았으니 구원받는 것은 문제없다"라고 했던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기 무능을 깨닫고 예수의 피 앞에 와야 합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된다는 말은 율법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 사이의 연결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성령의 시대로 넘어가는데 예수를 폐기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예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깨달아야 성령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중보자라는 뜻은 연결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율법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를 연결하는 새 언약의 중보자,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5. 징계와 용서, 율법과 은혜

이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과 통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교회를 어지럽힌 사람들을 어떻게 하라고요?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징계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징계가 있어야 진정한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가 있고 난 이후에 진리로 가르치는 위로의 사역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통해서 내가 찔림을 받고, 율법을 통해서 나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그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깨달아집니다. "나는 율법으로는 안 되는구나. 그럼 난 어떻게 구원받아? 내가 이렇게 죄가 많은데,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나의 무능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나는 이 많은 법조문을 지키지 못하고 망하는 인생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 내가 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고개 뻣뻣이 쳐들지 않고, 거기서 납작 엎드리고 그 피의 공로를 내가 덧입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은혜를 내가 입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입니다. 율법은 폐기되고, 이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못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제시 같은 것 할 때, "자,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합니다." "지금껏 모든 죄는 다 용서받으셨습니다." "네, 용서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을 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할렐루야.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끝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기쁨으로 감격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와서 결신자 이름 쓰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값싼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값싼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런 복음을 이야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닫고 경험하고 발버둥치고 노력하다가 안 된 사람이 십자가 앞에 기어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독이 막 퍼져갑니다. 그런데 끝까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떻게든 버텨볼라고, 살려고. 그런데 마지막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이제 안 되겠구나,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봅니다. 그때 사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율법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율법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은혜로만 살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법도 없고 기준도 없습니다. 무조건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율법을 가지고 투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쳐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쾌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기준도 없습니다. 법도 없습니다. 그냥 다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유형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못하고 은혜로 나아가지 못한 유형입니다. 여전히 율법에 머물러 있는 유형입니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야기하는 것이 계속 기준과 법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둘 다 글러먹었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밟아가야 하고, 아직까지 자신의 무능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주님께서 그것을 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사랑하신다면, 그때가 내 인생이 박살나는 날입니다. 내 인생은 박살나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날입니다.

2-6. 율법 조문과 영의 직분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이라는 말이 좀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7절에서 11절을 보시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과 8절에 "영의 직분"이 구별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조문의 직분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 즉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가 했던 일이고, 영의 직분은 그리스도를 통과한 후의 직분입니다.

또 '정죄의 직분'은 율법을 가지고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통과하기 전의 직분입니다. 율법으로 사람을 마구 난도질하는 직분입니다. '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통과한 후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철저하게 이분법이 됩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은 나쁜 것이고, 그 이후에 영의 직분과 의의 직분만 좋은 것이고. 그런데 율법 조문의 직분도 필요하고 정죄의 직분도 필요한데, 이 과정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과해서 영의 직분으로, 의의 직분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드린 말씀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7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죄가 아닙니다. 율법을 통과해야만 내가 죄를 깨닫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했습니다. 언제 이렇게 한탄하는 것입니까? 내가 율법을 그렇게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죄가 가득하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정욕이 가득하고 내 발은 죄의 길로 달려가고 있구나, 나로서는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저 밑바닥 인생의 고백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는 성령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22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차별 없습니다. 이전에, 그리스도 이전에 율법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차이가 있었고, 종과 자유인이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고 나니 차별이 없습니다. 막힌 담이 다 허물어졌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2-7. 살리는 영

성령은 아까 살리는 영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힘 있는 사람들이 자주 끝까지 가다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되게는 못해도 너 안 되게는 할 수 있어." 사실 무서운 말입니다. 열 명이 있는데 한 명이 죽어라 하고 주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공동체 평화를 위해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은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으로 한번 살아보려고 그리스도 없이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는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고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했으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이해하게 됩니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이것이 다 통과된 사람들은 다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합니다. "난 도대체 저 인간 이해가 안 된다"라고. 그러면 아직까지 나는 그 과정을 다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보듬어 주게 됩니다. 이해가 되면 기다려 주게 되고, 그것이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임하면 우리는 살리게 됩니다. 이 과정을 다 통과하고 나면,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다 지고 나니까 다 이해가 되니까 제자들도 찾아가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찾아가시고, 예수님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도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과정을 다 통과하고 나면 품이 넓어지고 폭이 넓어져서 살리는 영이 우리 속에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판을 뒤집지 않습니다. 살리는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파괴하는 자가 아니고 말입니다.

3. 수건을 벗은 얼굴로

바울이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라"(고후 3:12) 이 같은 소망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이셨으니까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지 아니하노라"(고후 3:13)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돌판을 받아왔습니다. 두 번째 돌판을 받아온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 받으러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돌판 받으러 가서 내려왔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모세 얼굴에 광채가 나서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는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왜 이러지 하니까 얼굴에 광채가 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1.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

다시 13절을 보면,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 장차 없어질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그 광채는 영원하지 않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지 아니하노라" 14절에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수건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율법이라는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 율법이라는 수건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지금 이미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리스도 이전의 그 수건을 뒤집어쓰고, 그 세계관으로, 그 인생관으로, 그 가치관으로 자꾸 사람을 보고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 그것을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 수건 벗겨내자. 그 수건 벗겨내고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람을 살리는 자로 살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수건들 많이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내 방식들, 내 세계관들, 가치관들, 인간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상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운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그냥 철학이 아니고 종교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북쪽 사람들이 저렇게 되어 있는 것은 종교쯤 되니까 저렇게 3대 세습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사상이면 그냥 무너지는데, 종교적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니까 저러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3-2. 세계관 교육의 중요성

그래서 그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 수건을 뒤집어쓰고 세상을 보면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히 우리 청년들에게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제대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정말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상한 세계관과 이상한 세상의 가치에 그들이 물들지 않도록, 곳곳에 팽배해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공산주의적 사고가 그들의 가슴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것 한 번 그 수건이 뒤집어 써져 있으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잔소리 같지만 계속 부모는 가르치고, 교회도 가르치고,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토요일날 우리 교회 한번 와보십시오. 교회 비전센터 한번 쭉 돌아보십시오. 꼬맹이들이, 우리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 유치부 아이들이 제자반 훈련받는다고 교회 막 바글바글합니다. 각 방마다 난리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계관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 교육이고, 어릴 때부터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 안 가르치고 학교 가면 진화론 가르치고 유물론 가르치고, 세상의 영상들 보고 이런 것 보면 전부 다 그것이 나도 모르게 다 학습되는 것입니다.

그 뒤집어 쓰고 있는 수건들을 쓰지 못하게 벗겨내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전에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 제자반 훈련 열심히 하고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투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상한 사고방식에 휘둘리지 않고, 내 영혼을 좀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절에서 12절을 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 율법을 가지고 붙들고, 내가 율법으로 그것 지키고 구원받으려고 했던 것은 이제는 의미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3-3.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 말씀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열심히 살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나의 무능을 느꼈습니다. 내가 그것 안 되는구나, 처절하게 자기 존재의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니 성령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그런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하고 이전 것 다 생략하고 하나도 없고, 그냥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것만 가지고 "왜 이 공동체는 이렇게 자유롭지 않으냐,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지 않느냐" 이것은 방종입니다.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과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는 가만히 놔두어도 죄 짓지 않는 자유입니다. 가만히 놔두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합니다. 그런 자들은 이것을 잘 통과해서 주의 성령이 나에게 임해서 성령이 주는 진리의 자유를 경험한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꾸만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3-4.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봄에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화하여'라는 말이 헬라어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입니다. 메타모르포오는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또 '성화되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화입니다. 성화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영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성화와 영화는 성령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 말씀입니다.

3-5. 구원의 순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율법 조문, 그것 지키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되던가요? 안 됩니다. 그래서 누가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죄를 구속하시고 회복시킵니다. 그런 자는 주의 영, 즉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로 회개가 일어나고, 그 회개한 자는 참 자유를 얻습니다. 그 자유한 자가 성화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성화는 영화로 이릅니다.

그래서 이 순서를 외우셔야 합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 조문, 이것은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41절을 보면, 37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하나님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찔립니다.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 마음이 막 찔려서 견딜 수 없을 때, 괴로울 때, 그때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못 지킵니다. 그것 어떻게 다 지킵니까? 십계명 열 개까지 다, 모세오경 거기 나오는 계명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으로 못 지킵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선물로 성령을 받은 후에 우리는 성화와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한 꼭지와 또 '율법의 조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성화와 영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또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바울은 종이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목양하고 길러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의 추천서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길러낸 우리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힘써 양육한 우리 믿음의 2세대들이,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봉해지지 않은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전히 노출되어 있으니, 믿는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율법으로는 구원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까" 이렇게 절규했던 사도 바울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율법의 조문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을 통해서 성화에 이르고 영화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런 존재로 온전히 모든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을 품어 안고 섬기는 존재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