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전체녹취

고린도후서 특강 4 -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 4장)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오늘은 고린도후서 공부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세 번째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종이 한 장씩 들고 와서 그들이 가지고 온 추천서로 바울을 힘들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종이가 백 장이 있어도, 사람이 쓴 천 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우리가 복음으로 길러낸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사도들의 편지요, 곧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추천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꾼'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옛 언약은 곧 율법인데,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려고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결국은 그 안에서는 무력감만 느낍니다. 나의 연약함과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로구나, 내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결국 율법의 저주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성령이니, 새 언약의 일꾼 된 자들은 성령으로 일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3장에서 공부한 바입니다. 그리고 수건을 걷어내야 된다는 말씀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이 언약의 일꾼 됨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1. 새 언약의 일꾼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 된 직분을 받아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직분'이란 어떤 직분입니까? 새 언약의 일꾼 된 직분입니다. 옛 언약의 일꾼이 아니고, 율법의 일꾼으로 사는 자는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너 왜 이 율법 안 지켜? 너 왜 이 법 안 지켜?" 계속 정죄하고 계속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사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들, 그 율법의 일꾼이 아니라 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즉 성령으로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라고 했습니다. 일꾼들은 다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손들고 포기했으니까, 십자가 아래에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았으니까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즉 바울과 그와 함께한 동역자들은 모두가 다 새 언약의 일꾼인데, 긍휼을 입은 자로서 성령으로 일하는 자입니다.

1-1. 일꾼의 특징

이제 이어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성령으로 일하는 자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첫 번째,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낙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속에 가득하게 임해서 일하는 자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 '낙심하다'는 말이 나오죠. 헬라어로 엥카케오(ἐγκακέω)입니다. 두려움에 굴복하다, 용기를 잃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지 않습니까?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해서 일하면 어떤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보면 항상 입에 원망과 불평, 혹은 안 된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거 집어치워야 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은 낙심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긍휼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영이기 때문에, 죽은 자도 살리신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일하는 사람은 항상 긍정적이고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특징이 이어집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 새 언약의 일꾼 된 사람은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즉 남들 모르게 뭔가를 숨겨두고 "이건 저 사람은 알면 안 돼" 하며 비밀을 만들어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이 말은 바울이 새 언약 일꾼 된 자로 사역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숨은 부끄러운 일을 만들어둔 적이 없다, 나는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행한 적이 없다, 숨긴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 일은 이 사람에게 숨겨야 되고 저 일은 저 사람이 알면 안 되고, 이렇게 살다 보면 얼마나 복잡합니까? 나중에는 이게 꼬여 가지고 저 사람한테 이 사람 얘기를 하고 이 사람한테 저 사람 얘기를 해서는 안 될 얘기가 막 이쪽 저쪽에서 터지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도 똑똑해야 잘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명철하고 똑똑하지 못해서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숨기기를 잘 못합니다. 특히 성령은 밝히시는 영이잖아요.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속이면 됩니까? 하나님 예배하는데 감추면 됩니까? 교회가 이중장부 쓰면 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일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깨끗하게 다 보여줄 수 있고 누구나 와서 보십시오, 누구나 와서 다 열람하십시오라고 얘기할 만큼 숨은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가정을 세우시고 그 가정의 원리를 창세기에서 설명하십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성적 결합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투명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투명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나 금전 관계나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다 깨끗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 그 공동체가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일하시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데 숨은 부끄러운 일이 또다시 그 속에서 또 다른 집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숨은 부끄러운 일을 자꾸 하다 보면, 숨기다 보면 그 숨김이 나중에 남을 속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게 별로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나중에는 그게 조금 더 진도 나가면 속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일하는 새 언약의 일꾼은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혼잡하게 하다'는 헬라어로 돌로오(δολόω)입니다. 불순물을 섞다, 덫에 걸리게 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덫에 걸리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케 풀어주는 말씀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덫에 걸리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왜 시험에 드느냐? 그 말씀에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전하는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자기 욕심으로 불순물을 뒤섞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나에게 부딪혀 올 때 우리가 거기서 불순물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인간 목회자가,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거기에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그걸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버리면 이것이 시험이 되는 거죠. 거기서 걸려 넘어집니다. 덫에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력과 수준이 전하는 말씀이라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 그 불순물을 분리하고 걷어낼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덫에 걸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성령이 우리를 조명해서 그 말씀을 누구에게 가르치고 전하고 성경 공부를 하는데, 거기에 자기 인간적인 생각을 불순물로 만들어서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자기 사역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편지다, 그리스도의 편지다, 너희들이 나의 추천서라고 하면서 지금 이 말씀을 하는데, 너희는 새 언약의 일꾼인 우리로 인하여 배운 자들 아니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서 넣어서 가르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성령으로 사역했고 때문에 감춘 적도 없고 속인 적도 없다고 자기 변호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다음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성령은 진리의 영이니 성령으로 사역하고 성령으로 가르치면 거기에는 진리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1절과 2절 말씀은 새 언약의 일꾼 된 자가 어떻게 사역하는지, 어떻게 일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적용시켜 볼 수 있겠죠. '아, 내가 과연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가? 낙심하지 않고, 그다음 뭡니까?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이지 않고, 불순물을 뒤섞지 않고, 진리를 나타내고.' 그러면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아직까지 성령으로 사역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에 비추어서 나를 살펴보시면 되겠습니다.

바울은 또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 직분은 다 이런 맥락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 된 직분입니다. 우리는 직분이라 하면 내 수준에서 생각하니까 뭐 목사, 장로, 권사 등등 교회의 직책, 직분을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고, 바울은 훨씬 더 포괄적인 훨씬 더 근본적인 직분을 말했습니다. 즉 새 언약의 일꾼인 직분으로, 성령으로 일하는 직분을 말씀했습니다.

1-2. 사탄의 방해

이제 사탄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사탄은 언제 활동할까요? 사탄은 하나님의 일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에 함께 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을 하면 사탄도 열심히 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만히 누워 있으면 사탄도 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어 있는 교회는 사탄도 죽어 있고 다 같이 죽어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악한 사탄 마귀도 같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린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아, 내가 전도하면 사탄이 방해를 하겠구나. 내가 말씀 공부를 하면 사탄도 우리에게 방해를 하겠구나. 선한 사역에 힘쓰면 사탄도 여기 이곳에 함께 역사하고 있구나.' 이걸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속 편합니다. 안 그러면 "아니, 하나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문제가 많고 왜 이렇게 사탄의 방해가 많은 거야?" 당연합니다. 사탄이 그게 일이니까, 그게 자기 일이니까 우리가 이해해 줘야 됩니다. 사탄도 자기 일을 해야 되니까요. 근데 우리가 그 사탄의 일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되는 거죠. 그걸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복음 사역을 어떤 식으로 방해합니까? 3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어졌으면." 우리의 복음은 뭡니까? '우리'라는 말은 바울과 함께한 동역자들, 저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누가, 이런 분들이 전하는 복음이 가리어졌으면 전하는 복음이 왜 가려집니까? 누구에게?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 즉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가려진 거죠. 칼립토(καλύπτω)는 덮다, 은폐하다는 뜻입니다. 즉 덮인 겁니다. 은폐되어 있는 겁니다.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전도 아무리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 비밀과 그 재미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앉아서 한 시간 정도 성경 공부하는데,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면 그건 심한 고문입니다. 못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앉아서 듣습니까, 이 재미없는 얘기를? 밖에 나가면 재밌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한 시간을 왜 앉아 있습니까? 근데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답니다. 그게 참 놀라운 일입니다.

4절을 봅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이 세상의 신이 누굴까요?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 마귀죠. 이 사탄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혼미하게 하다'는 눈을 멀게 하다, 어둡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탄 마귀가 하는 짓이 "나 믿지 않겠다"고 하는 자들의 눈을 확 가려버립니다. 사탄 마귀가 눈을 가려서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눈을 딱 가려버리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사탄 마귀가 눈을 가립니까? 이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우린 그걸 너무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을 마귀가 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을 보면 4장 3절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이 돌이 떡이 되게 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떤 시험인지 정의하자면, 떡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빵이 필요하잖아요. 밥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물질이 필요합니다. 수고해서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돌이 떡이 될 수 있습니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능력 있다며, 그러면 과정을 생략해 봐. 이런 뜻입니다.

떡이 되려면 빵이 되려면 밀농사 져야 됩니다. 씨를 뿌려야 됩니다. 땀 흘려야 됩니다. 농부의 수고가 따라야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해가 내리쬐야 됩니다. 자라야 됩니다. 수확해야 됩니다. 탈곡해야 됩니다. 지어야 되고,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얼마나 많은 시간의 수고가 거기에 들어가야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식탁에 떡이 하나 올라오기까지, 빵 조각 하나 올라오기까지 우리가 수고해서 땀 흘려서 밥을 먹고 돈을 벌고 일터에서 수고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돌이 떡이 되는 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가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만들어 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이게 교회가 당하는 시험이기도 하고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결과에 목숨을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과정을 너무너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너 지금까지 보여준 게 뭐가 있어? 너 지금까지 뭘 했어? 너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손에 쥔 게 뭐가 있어? 자식이 잘되냐? 네가 돈을 많이 벌었냐?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기를 하냐? 지금까지 너의 결과를 가져와 봐. 빨리 그 결과를 달라고 해." 근데 지금 우리는 과정 중에 있는 거거든요. 여전히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열심히 빚어지고 연단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과정을 굉장히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과정과 절차를 너무너무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가 모여서 토론하고 회의하고 어떤 사람의 의견도 소중하게 받아서 함께 의논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근데 그런 것 없이 돌이 떡덩이가 되는 것처럼 그냥 한순간에 뭐가 탁톡 되고 하는 거, 그거 좋은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자꾸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두 번째 시험을 보죠. 마태복음 4장 5절과 6절을 보니까,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건 한마디로 뭡니까? 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여줘, 이런 뜻입니다. 기적을 보여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너 죽지 않을 테니까 기적을 보여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적은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죠. 성경에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못 보는 자가 눈을 뜨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매번 여러 번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어떤 과정에서 일어납니까? 우리가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기도하고 애쓰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 사건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먹일까?" 제자들이 말하죠. "해는 저물었고 장소는 빈들이니 나가서 사 먹고 오게 합시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있어야 주죠.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애를 써보라"는 뜻 아닙니까? 빌립처럼 주저앉아서 "조금씩 돈을 걷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부족합니다" 이런 소리 하고 앉아 있지 말고 좀 해보라는 뜻입니다. 뭐라도. 안드레가 막 돌아다녔잖아요. 한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 들어서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니 오병이어가 된 거지, 어떤 일도 하지 않는데 기적이 일어납니까? 이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그냥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천사가 너의 발을 받쳐줄 것이다? 아닙니다. 그대로 떨어져 죽습니다. 그대로 떨어져 죽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적만 구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기적 이전에 상식이 중요합니다. 상식의 바탕 위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근데 사탄은요 이 상식을 대단히 무시합니다. 일반적인 상식, 보편적 상식.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근데 이 상식을 매우 무시하는데, 이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리고 구하는 자에게 기적이 나타납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이 다 그렇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근데 우리는 상식 없는 기적은 그게 신비주의라고 얘기합니다. 신비주의. 그런 신비주의는 역사적으로 배격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보편적 상식과 가치 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이 있잖아요.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잖아요. 그 위에서 하나님은 때로는 초자연적 기적도 역사도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게 사탄이 이런 식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을 봅시다. 8절과 9절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물질에 대한 욕구, 탐욕을 자극하는 거죠. 지극히 높은 산에 마귀와 예수님 둘만 있습니다. 이 말은 "너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잖아. 딱 한 번만 엎드려. 저 보는 거 다 줄게. 다 줄게."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거죠. 사탄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식, 우리의 눈을 가리는 건 우리 안목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우리 눈을 가립니다. 그걸 걷어내야 됩니다.

과정을 무시하는 것, 기적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상식을 무시하는 것,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것, 물질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 이런 것들로 우리 눈을 가려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복음 사역을 방해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잖아요, 가정에서도 복음적인 일을 하고 할 때 우리 요런 것들을 조심해야 되는 겁니다. 과정을 건너뛰지 말자. 항상 어떤 과정이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지 이걸 반추하고 돌이켜보자.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식의 바탕 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혹시 우리가 탐욕에 눈이 멀어서 안목의 정욕에 눈이 멀어서 내가 너무 큰 일을 벌리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도 한번 살펴보자. 요렇게 점검하고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 마귀가 우리의 눈을 뒤덮어서 못 보게 합니다. 안 보입니다.

1-3. 사역의 방향

바울을 포함한 동역자들의 사역 방향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사역하는 방향을 설명했습니다. 5절을 봅시다.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건 바울의 동역자들, 바울을 포함한 동역자들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역 방향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우리를 나타내려 함이 아니다. 당연한 거죠. 당연한 건데 당연한 게 아닙니다. 정말 당연한 겁니다. 교회를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지우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이거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내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고 있기 때문에 이게 잘 안 돼요.

창세기 11장 3절과 4절을 보면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 사건의 핵심이 뭡니까? 왜 하나님이 노하셨습니까?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이름을 내고." 결국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명예욕과 권력욕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위험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개척했고, 로마교회에 편지 썼고,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개척했고, 수많은 교회들 개척했는데 거기서 자기가 주인으로 군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는 "우리는 우리 이름을 내려야 하지 않는다,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 직분자들이 항상 이거 조심해야 됩니다. 목사, 저 같은 사람 항상 강단에서 말씀 전하잖아요. 주인 노릇은 해서 안 됩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 철저하게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건 성경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금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데 오히려 이렇게 얘기하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그의 사역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 그러면 나는 예수의 종이 되는 거죠.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 몸의 지체가 되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예수의 종이 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누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그들의 사역 방향이었습니다. 종은 뭡니까? 섬기는 자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새 언약의 일꾼이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게 새 언약의 일꾼에 계속 이어지는 거거든요. 새 언약의 일꾼은 성령으로 사역합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주인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교회 머리가 그리스도이신데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가 주인 노릇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예수가 주가 되시고 나는 그 성도들을 섬기는 자로서 있는 거죠. 바울의 사역 방향이었습니다.

그렇게 섬겼는데 지금 여기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좀 야속함을 표현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섬긴 걸 너희가 모르느냐, 나는 성령으로 사역하고 너희를 섬겨주는 자로 있었는데 너희는 거짓 선지자들 거짓 사도들에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말씀이죠.

6절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취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빛이 임하면 우리는 그 빛,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얼마든지 성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성도를 섬긴다는 의미 아시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이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가룟 유다까지 발 씻어주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게 섬김입니다. 내가 섬길 수 없는 사람까지 섬기고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 그걸 사역의 방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기가 쓴 서신서 첫머리에 자기 정체성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했죠. 지금 이거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뿐만 아니라 바울은 성도들의 종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보배와 질그릇

이제 중요한 게 나오죠. 7절을 보니까 보배와 질그릇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기서 '우리는' 바울뿐만 아니고 사역자들뿐만 아니고 성도들까지 같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보배는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질그릇입니다.

왜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이 아니고? 질그릇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깨어지는 게 숙명입니다. 질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랩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자꾸 물에 이렇게 씻다 보면 그림도 예쁘게 유약을 발라서 그림 그려서 좀 구워놔도 세월이 가고 시간이 지나면 색이 옅어지고 물이 빠집니다. 그리고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다 보면 이가 빠지겠죠. 금도 가겠죠. 나중에는 박살도 납니다. 그게 질그릇의 숙명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육체 아닙니까? 원래 우리의 원재료가 흙입니다. 무쇠가 아니고 강철이 아니고 흙으로 빚어진 육체이며, 가고 깨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뭐 신음 소리 나고 들어누울 때마다 아프고 그렇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겁니다.

2-1. 유한이 무한을 품다

그런데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이 육체에 보배 되신 예수께서 들어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걸 가지고요, 초기 교회에서 논쟁이 꽤 됐습니다. 어떤 논쟁이 되었냐, 이런 식의 그 명제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는가?" 집합 관계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집합 관계에서 자연수가 실수를 포함할 수 있습니까? 갑자기 뭐 수학 시간이 됐네요. 실수가 더 크잖아요. 실수가 자연수를 품는 거지, 이게 수리 관계에서 집합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계산입니다.

인간은 유한하지 않습니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가라는 명제였습니다. 있을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없잖아요.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면요. 근데 지금 여기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한한 그것도 못나고 깨어지고 부서진 질그릇 같은 유한한 존재인데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었습니다.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굉장히 공격했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은 대단히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런 철학과 그런 수학적인 데는 능통하고 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을 몰랐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 한번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여기까지 보세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내가' 누굽니까? 예수님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그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거한다는 말이 뭐예요? 산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산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데요. 이거 예수님이 직접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합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다? 없다? 있습니다. 있어요. 이게 역설이에요. 이게 초대교회의 굉장한 역설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인간이 품고 싶다고 품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품을 수 있는 거지, 예수께서 결단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결단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게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나 같은 모자란 질그릇 안에 무한하신 예수께서 보배로 좌정해 계신다, 이 은혜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면 나는 참 이도 빠지고 금도 가고 색깔도 다 퇴색되어 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질그릇입니다. 그 속에 보배가 없다면, 예수가 없다면. 근데 그 속에 예수를 품으니까, 예수를 내가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봅니까? 빛나는 보석을 품은 그릇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해요? "아휴 잘한다"고 칭찬하고 "이쁘다"고 하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한다"고 "수고한다"고 하고 등 두드려주잖아요. 그러다 보면 인간이 어떻게 돼요? 자기가 보배인 줄 알아요. 이게 문제입니다. 자기가 자기가 보배인 줄 안다니까요. 거기서 선을 넘으면, 사람들의 칭찬이 거기서 이어지고 잘한다고 축복하고 수고한다고 하면, 그건 사람들이 보배를 보고 나를 칭찬하는 건데 질그릇을 보면 칭찬할 게 하나도 없는데, 이런 모양으로 예수 없이 내가 산다면 어디 가서 사람 대접받고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이라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예수를 보배로 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내 속에 좌정해 계시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고 사람 대접 받는데, 그런데 그걸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질그릇 박살나는 거죠. 뭐 혼나는 거죠. 예수님 그 경계를 넘어서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2-2. 능력은 하나님께

그래서 그 뒤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에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다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누구에게 있고요? "하나님께 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를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잖아요. 그렇죠. 나를 통하여 빛나잖아요. 그러면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 이름을 우리가 찬양하고 영광을 드려야 되지, 자기가 중간에서 영광 다 가로채 먹고 자기가 예수님인 척 자기가 보배인 척 그러고 살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 둡니다. 절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거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다 같은 이 육체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고, 그래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거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고 말합니다. 맨날 바울이 자기 간증 하잖아요. 나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나는 과거에는 사람을 잡아다 옥에 넘기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맨날 얘기하잖아요. 자기 질그릇 시절의 자기를 그거 기억하셔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29절을 이렇게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것이 다 질그릇 들이니까요. 질그릇 중에 질그릇이 거기서 거기지 뭐. 질그릇 중에 학벌이 좋다 해봐야 그것도 질그릇이에요. 질그릇 중에 권세가 좀 있다 해봐야 조금 조금 더 예쁘게 잘 색칠된 질그릇입니다.

솔로몬도 질그릇입니다. 아닙니까? 질그릇이죠. 근데 솔로몬이라는 질그릇이 세월이 한참 가고 가고 가고 가고 해서, 요즘 우리 새벽기도 때 전도서 나누는데, 전도서를 보면 인생 말년이 되니까 "나나 농부나 다 똑같다" 그래요. "지혜자나 우매자나 다 똑같다" 그래요. 솔로몬이. 왜냐하면 자기도 질그릇인데 색깔 다 바르고 이 빠지고 나니까, 가문 좋고 문벌 좋고 자기 아버지 다윗이 돈 그렇게 많았고 처첩이 천 명이나 된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하나님 앞에 가야 되는 질그릇인데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거 자랑하는 것 정말 헛된 것 중에 헛된 일입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이걸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질그릇들을 택하사"라고요. 질그릇 중에 정말 연약하고 모자란 그릇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질그릇은 자랑하면 안 됩니다. 질그릇인데 자랑해 봐야 질그릇인데요.

3. 보배를 품은 질그릇의 능력

이제 보배를 품은 질그릇이 어떤 강력한 힘이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유가 뭘까요? 보배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질그릇으로는 답답하죠. 힘들죠. 못 견딥니다. 그런데 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이 친히 임해 계시기 때문에 우겨쌈을 당해도 아무런 염려나 걱정이 없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겠죠. 풍랑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8장 24절, 25절을 보니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근데 제자들이 어떻게 했어요?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잘한 게 뭡니까? 예수님 깨운 거예요. 예수님은 풍랑이어도 걱정 없습니다. 주무시는 거예요. 근데 제자들은 죽겠는 거예요.

근데 참 놀라운 게 예수님이 타신 배도 제자들과 함께 탄 배가 풍랑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탔다고 해서 배가 그냥 편안하고 안전하고 무사히 그냥 가는 게 아니에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 모시고 사는 가정이라고 해서 문제 없겠습니까? 갈등도 있고 문제도 있고 사건 사고 터지고 자녀들 속썩이고 그렇습니다. 근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질그릇, 우리는 질그릇인데 내 속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야 돼요. 그게 기도 아닙니까?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 질그릇 같은 인간 속에 함께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여, 일어나셔서 저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해주십시오, 예수님께 부탁해야 됩니다. 왜 그거 부탁하지 않습니까? 나와 예수님 함께하는데.

26절 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곧'이라는 말 보십시오. 곧 일어나사. 기도하면 예수님이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니까 어떻게 돼요?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풍랑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있는 가정, 우리 개인 다 문제 있습니다. 근데 그 문제 가운데 우리는 보배 되신 예수님을 항상 잘 활용하셔야 됩니다. 엎드려 구하고 깨우고 일하여 달라고 움직여 달라고 날 위해서 지금도 일어나서 우리 인생의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해달라고 부탁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질그릇은 흔들릴지언정 난파되지 않습니다. 바람과 풍랑이 우리를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우리가 기도하면 절대로 배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그거 기억하고 계속해서 깨어서 기도하셔야 됩니다.

3-1.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그랬어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이 '죽음'이라는 말이 참 특별한데요. 죽음의 두 가지 헬라어가 있는데요. 네크로시스(νέκρωσις)라는 말이 있고 또 타나토스(θάνατος)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는 점진적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과정으로서의 죽음입니다. 계속해서 죽어가는 거예요. 지금 여기는 네크로시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타나토스는 한 번 딱 사건 일어나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타나토스가 쉽습니까? 아니면 네크로시스가 쉽습니까? 타나토스가 훨씬 깔끔합니다. 한 번에 그냥 딱 가버리는 거. 근데 지금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라 할 때 이 죽음 네크로시스라는 말, 이 단어, 이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여기 딱 한 번. 과정으로서의 죽음, 서서히 죽어가는 거예요. 서서히.

이게 이 죽음을 끔찍한 형벌로 우리가 이해를 좀 하셔야 되는데, 제가 옛날에 로마서 공부할 때 한번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 그 고대 로마 사회에서 사람을 사형에 처하게 할 때, 특히 흉악범을 사형에 처하게 할 때 어떤 식으로 했냐 하면 시체하고 같이 묶어뒀어요. 시체하고. 사람이 죽어서 시체가 되잖아요. 부패하지 않습니까. 근데 살아 있는 사람을 시체와 함께 꽁꽁 묶어둡니다. 밧줄로.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될 거예요? 그게 죽어가는 거죠. 내가 같이, 일단은 끔찍하고 일단은 내 피부 세포 세포마다 그 벌레와 그 미생물이 함께 나에게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죽어가는 거예요. 그걸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같이 죽어가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같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어요. 죽는 건 예수님 일이에요. 살리는 건 누구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이에요. 예수님은 스스로 부활할 능력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죽기 위해서 오신 거지 내가 부활하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지고 죽는 것까지가 예수님의 몫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면, 이 말은 우리도 예수처럼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한 번에 그냥 딱 죽는 게 아니고, 한 번만 내 자존심 꺾고 한 번만 내 욕심 꺾고 한 번만 내가 저 사람 앞에 딱 엎드리고 사과하고 그렇게 죽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날 동안 계속해서 예수의 죽으심을 매일매일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여러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거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성령께서 내 속에 계셔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람으로선 못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속에서 일하셔야, 성령께서 함께 움직여주시고 성령께서 주인 되어주셔야 그래야 나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우리가 죽었어요. 이렇게 우리가 매일매일 죽어요. 매일매일 죽는데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신비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일매일 못 박고 자기 의지를 부인하고 죽는 건 내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자기 부인을 해보십시오. 자기 십자가를 져 보십시오. 오늘도 내가 하고 싶은 말 꾹 참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여 보고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한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다시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같은 맥락이고요.

3-2. 죽음이 생명을 낳다

그다음 12절이 참 신비롭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이 말은 그런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역자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역자들, 바울을 비롯한 디모데와 실라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누가가 항상 죽었잖아요. 항상 네크로시스 했잖아요. 매일같이 예수님처럼 죽는 훈련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생명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너희 안에서 역사하였다"고요. 너희가 누굽니까?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였다고요. 사역자가 죽으니까,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일꾼들이 죽으니까, 그 매일같이 예수님 닮아서 죽으니까 공동체가 생명으로 살아나더라,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은데 예수님이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네크로시스 하면, 매일같이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면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열매 맺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정이,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들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되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성도들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되고, 교회 중직자들이 죽으면 교회가 그 열매를 누리고 그 생명이 거기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공동체는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아무도 아무도 손해 보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죽는 사람 없고 내가 보배라고 자기 목 뻣뻣하게 쳐들고 자기 영광 받으려고 하니까 거기는 생명이 안 나타나죠. 당연히.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흥하고 기쁨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는 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매일같이 죽는 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죠.

우리 교회에도 매일같이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니까 교회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가. 우리는 항상 이런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나를 보고 공동체를 봐야 됩니다. 이게 새 언약의 일꾼의 사역입니다. 힘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4. 겉사람과 속사람

14절 한번 보세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누굽니까? 제가 그랬죠. 죽는 건 예수님의 몫이고 살리는 건 누구의 몫이라고요? 하나님. 나오잖아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 예수님 살렸어요, 하나님이. 그러면 우리도 예수를 닮아서 항상 예수의 죽으심 그 네크로시스를 몸에 짊어지고 살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는 것까지만 잘하면 됩니다. 잘 죽어야 돼요. 매일같이 성질 죽이고 매일같이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매일 죽어야 돼요. 그러면 '아,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 안 해도 돼요.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실 텐데. 그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도 살립니다.

그러면 이 말은 예수와 나를 같은 자리에 놓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예수님도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어요? 아버지. 우리도 하나님을 뭐라고요? 아버지.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뭐가 됩니까? 예수님을 우리 자매님들은 오빠라고 부르고 저는 형님이라고 부르고, 형제가 되는 거예요. 가족 관계가 같은 반열에. 놀라운 영광입니다. 이거. 예수님과 감히 우리가. 그래서 잘 죽기만 하면, 잘 죽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놓아주십니다. 그거 탐나지 않습니까? 그거 욕심내야 됩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건 욕심내지 말고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죽읍시다. 잘 죽어야 됩니다. 열심히 잘 죽어야 됩니다.

바울이 또 이런 얘기를 하죠. 16절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낙심 얘기 또 나오죠. 1절에 아까 우리가 봤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 된 분들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면 내가 죽어도 살리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그렇죠. 바울이 고생을 워낙 많이 해서, 바울이 복음 전한다고 하도 많이 맞아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아서, 항상 매맞고 항상 감옥가고 해 가지고 고생 너무 많이 해서 겉사람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느니라." 왜요? 하나님이 살리니까. 내 영혼은 날로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 우리가 보는 건요, 보이지 않는 걸 봐야 됩니다. 보이지 않은 걸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 큰 영광을 바라봐야 됩니다. 이 땅의 것, 보이는 것 기껏해야 돈 몇 푼 아닙니까? 기껏해야 넓은 집 아닙니까? 좋은 땅 아닙니까? 그거 누리고 천년 만년 삽니까? 저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걸 마치 보는 것처럼 붙들고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성령 충만해서 잘 죽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새 언약의 일꾼은 성령으로 일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일하는 자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남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주를 그리스도로 부르고 예수의 종 되고 성도를 섬기는 종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런 인생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다 같이 모두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보배 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친히 좌정하여 주셔서 우리를 빛나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저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덕보고 사는 존재이니 신령하고 놀라운 하늘의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자로 항상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십자가에 지고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한 번 죽고 끝내지 않게 하시고 매일같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네크로시스의 삶을 살아가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그리하여 우리는 잘 죽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역사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게 하여 주시고, 내가 죽어서 가정이 잘되고 내가 잘 죽어서 교회가 잘되며 이 나라 이 민족이 생명이 나타나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