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5 - 새로운 피조물 (고후 5장)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지난 시간까지 다룬 핵심적인 단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새 언약의 일꾼'이었습니다.
새 언약이 있으면 옛 언약이 있는 것인데, 옛 언약이라 하는 것은 율법을 중심으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보아서 알지만,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 하고 율법으로 아무리 구원받으려 애를 쓰고 수고하며 노력해 보아도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안 되는 것이로구나. 율법으로는."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각 사람의 심령에 주어지는 것이 성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은 성령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꾼입니다.
성령으로 함께 일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용어에 의하면 '질그릇이 품고 있는 보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인데, 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질그릇인 나는 질그릇으로서 살아갈 뿐, 나를 통해서 빛나시는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칭찬하고, 나를 보고 잘한다고 격려한다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 된 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오직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내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 죽음이라는 것은 단 한 번의 일회적인 죽음이 아니고, 네크로시스(νέκρωσις)라 해서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새 언약의 일꾼 된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잘 기억하고 계시면 공부를 잘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이 개념을 가지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느낌을 가지고, 그다음 단계인 '새로운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1. 장막집과 영원한 집
1-1. 장막집의 의미
바울이 말하는 장막집과 영원한 집은 어떤 의미입니까?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양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뒤의 구절을 보면 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까지 보아도 별로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2절을 보니까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즉, 땅에 있는 장막집의 반대 개념이 덧입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덧입는 것.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장막집은 육체입니다. 내 육체, 내 몸. 지난 시간 끝부분에서 "겉사람은 날로 쇠한다"라고 했습니다. 겉사람, 이 육체는 쇠하지만, 내 영혼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항상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품어 안고 사는 존재인데, 질그릇은 갈수록 장막집처럼 낡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 80년 살다 보면, 한 100년 살다 보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었던 장막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쓰러집니다. 다 사라지고 누더기가 되고 병들어서 우리는 이 장막집을 벗어나게 됩니다. 벗어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2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다고 했습니다. 즉,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용어로 보면 '신령한 육체'입니다. 신령한 몸.
조금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영향을 지금 고린도 사람들은 받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이 육체는 악한 것이다. 그래서 더럽고 악하고 추악한 육체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수 있느냐 하면서 육체를 굉장히 부정합니다. 그런데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 올라가는 게 아니고 신령한 몸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떤 상태로 부활할 것인가? 내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근육도 빵빵했던 20대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또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들, 몸에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는데 천국에서도 불편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육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령하다'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가 천국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령하다'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땅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한 자를 천국에서도 그 모습으로, 그 수고한 모습으로, 몸이 힘들고 아팠던 모습으로 부활하게 하신다면 그것을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하셨겠는가 하는 질문을 거꾸로 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하는 말은, 땅에 있는 장막집은 내 육체이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덧입는다는 것은 신령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일단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장막 사상은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그러면 이 장막이 무엇입니까? 텐트를 말합니까? 육체입니다. 육체. 장막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육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만 나오는 사고가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런 사고가 있습니다. 장막은 어떤 것입니까? 특징이 옮겨 다닐 수 있습니다. 텐트니까 여기 폈다가 저기 폈다가, 접었다가 폈다가, 이 작업이 굉장히 용이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보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말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자기 삶의 정체성을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장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텐트라는 생각을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고, 내 육체도 쓰다가 그냥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고는 이 육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인데, 그런데 천국에서 신령한 육체로, 부활체를 덧입는다, 이 사고를 그들은 항상 부활 사상에 가지고 살았습니다.
1-2. 장막 사상의 적용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만 과연 장막입니까? 내 육체만?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장막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라는 건물도 장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육체가 영원할 것처럼 육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고, 너무 많이 찍어 바르고, 너무 많이 고치고, 그렇게 살 이유가 과연 있습니까? 철마다 시마다 때마다 옷 사 입고 바꿔 입고. 자기 돈으로 하는 것 뭐라 할 수는 없으나, 우리 집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는 집도 사실 그냥 불편함 없이 살면 되는데, 그 장막에 그렇게 많이 투자를 하고, 그것 때문에 죽을둥살둥 수고하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애쓰고 힘써야 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건물. 과거 성막 시절이 있었고, 성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시절의 시작은 솔로몬 성전이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정말 거대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그가 하나님께 봉헌 예배를 드립니다.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이 "야, 너 정말 잘 지었구나, 멋지게 잘 지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중에 핵심을 한번 보려 하는데, 열왕기상 9장 6절과 7절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내 앞에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봉헌 예배 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봉헌식 때 이 성전을 멋지게 지어 가지고 요즘으로 말하면 헌당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왔습니다. 구름떼같이 모였는데, 하나님이 그중에 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하는 대표인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성전을 던져버리겠다"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건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렇게 백향목으로 짓고 상아로 짓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중요한 것은 이 성전의 쓰임새다. 본질이 중요한 것이지요.
성막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막 시절.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성막, 이 성막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들어오면, 성막에 바로 들어오면 뜰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지 않습니까.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있습니다. 다 태웠습니다. 그리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지요.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습니까. 자기 죄 다 사하고 그리고 갑니다. 그러면 이 성소의 기능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하고 은혜받는 것입니다. 예배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온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표로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께 속죄의 피로써 죄를 올려드리고 죄 사함 받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의 기능입니다. 성막 시절이나 성전 시절이나 지금 교회 시절이나 똑같습니다. 공간이라는 공간의 기능은. 그런데 이 공간을 뭘 그렇게 화려하게 지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수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그러면 그냥 끝나는 것이지 더 이상은 화려할 이유도 없고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막이니까. 그냥 그대로 장막이거든요. 있다가 없어지는 장막.
우리 육체도 그렇고, 내가 사는 집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공간인 교회도. 역사적으로, 세계사 교회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타락은 공간의 절대화로부터 일어납니다. 공간을 절대화합니다. 이방 종교를 보십시오. 이방 종교 신전 한번 보십시오. 그곳에 가야만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습니까? 이방의 신전들이 엄청나게 화려하지 않습니까. 지금 수천 년이 지나서 지진과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서 잿더미가 되어 있는데도, 그래도 그 기초와 그 기둥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마어마하게 화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간을 절대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여호와 종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 신앙은 그냥 텐트입니다. 성막 자체가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종교의 타락은 솔로몬 성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장막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 육체에 너무 많은 목숨 걸지 마. 너 몸에." 그런데 너 몸은 또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뒤에 또 나옵니다. 아무튼 이 몸이 우상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도 타락하게 되고, 공간이 우상화되면 절대 안 됩니다. 장막이라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2. 성도의 소망과 탄식
2-1. 덧입음의 의미
이 땅에 사는 성도의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벗은 자들. 이 땅에서 육체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육체로 덧입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벗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 땅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들. 그런 자들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입음은" 우리는 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신령한 육체로 덧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자들, 그들은 두 번째 죽음을 갖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요, 두 번째 죽음, 둘째 사망 — 계시록에서 말하는 둘째 사망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4절에서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 아직까지 살아 있는 우리가, 그렇지요? 아직까지 우리가 이 장막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왜 탄식합니까? 왜 짐 진 것같이 탄식합니까? 육체를 가지고 사는 우리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지요. 돌아서면 배고프고, 남들 먹는 것 보면 더 먹고 싶고, 더 잘 먹고 싶고, 더 좋은 것 입고 싶고, 내 속에 있는 탐욕이 계속해서 육체의 장막을 입고 있는 동안 나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또 늙고 병들어 갑니다. 그러면서 아픈 데가 많은 것입니다. 또 지금 이 바울 시절에는 내 육체를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앞에서 두려운 것입니다. 사실 내가 이 한순간만 잘 견디면 순교하고 천국 가는 게 확실한데, 그것 견디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냥 그만 살고 싶다, 죽어버리자,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신령한 육체를 덧입을 수 있습니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어야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고, 내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셔야지요. 그래야 우리가 덧입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죽을 것, 사망이 생명, 내가 모시고 있는 — 내 이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보배로 좌정하고 계신 — 예수가 죽음을 삼켜버렸다는 뜻입니다. 이 쉬운 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써 놓으셨으니까 읽어보면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2-2. 육체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하다가 뒤에 가서 말씀드린다고 했는데요. 로마서 8장 22절과 23절을 한번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렇지요. 피조물, 육체를 입고 있으니까 탄식하고 고통받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23절에서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 플라톤은 이데아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 모양이 작은 것, 큰 것, 맛있는 것, 맛없는 것, 비뚤어진 것, 동그랗게 생긴 것, 각양각색 사과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천상 이데아의 세계에 가면 완벽한 사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데아론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사제 간의 사랑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의 본 이미지가 천상의 이데아에 가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데아론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이원론이거든요. 철저한 이원론.
그러므로 플라톤 사상에 의하면 우리 육체는 더럽고 추악한 것입니다. 육체를 감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천상에서 자유롭게 거닐던 영혼이 죄를 지어서 천상의 지도자에게 버림받아서 육체로 유배를 왔다, 이 땅에. 그래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무엇입니까? 해방입니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것이 무엇이냐? 전쟁입니다. 전쟁터에 가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라, 그러면 너희는 해방되어서 천상에 다시 영혼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 이데아론이 그 당시 헬라 사상을 다 지배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에 의하면 천상으로 돌아가는 그 영혼은 육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육체는 그냥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더럽고 추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육체가 감옥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더럽고 추악한 육체로 오셨다?" 이것이 그들에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안 믿는 것입니다. "이 육체는 더러운 것인데, 이 더럽고 추악한 육체에 신이 오셨다고?" 안 믿어! 그 사람들을 우리는 영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가현설을 말하지 않습니까. 가현설. 가짜로 나타나셨다, 거짓으로 나타나셨다. 그런 초대교회 이단이 아주 심각했던 것이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문제 가지고 평생을 싸웠는데, 요한일서 4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 이단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당시 이단을 분별하는 것, 영지주의자들을 분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속에 오신 것을 인정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서 1장 7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분명하지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부인하는 자, 예수는 그냥 영이다, 이런 자는 다 적그리스도요 다 영지주의 이단들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이단이었습니다. 요즘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신천지, 통일교, 이것은 비유도 안 될 정도로 아주 심각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빈 무덤이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영의 부활입니까? 육체도 함께 부활하셨습니까? 육체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히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만져보라, 넣어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를 버리고 영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 이 땅에 사는 우리는 —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질그릇인데, 질그릇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디모데에게 "주인의 집에는 여러 그릇이 있다.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는데, 주인께서 쓰시기에 가장 좋은 그릇은 무엇이다? 자기를 비워서 깨끗하게 하는 그릇이라"고. 우리는 질그릇이 은 그릇, 금 그릇 되려고 거기다가 금칠 은칠 할 필요 없습니다. 아닌데 그런 척하고 살 이유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해야 될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육체의 성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보배로 거하시기에 우리 주께서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주님을 충분히 모실 수 있는 내 육체의 성결, 순결,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딴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공부했지 않습니까.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있느냐? 포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저 안에 거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러니 우리 같은 유한한 육체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하시려면 우리는 깨끗하게 자기를 비우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그릇은 언젠가는 사라질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깨끗하게 하면 되지, 거기에 사치를 하고 영원히 여기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또 우리가 사는 공간을 장막이 아닌 영원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마라. 쓰러지고 없어지고 사라질 곳이다. 그 본질을 중요하게 여겨라.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 담대한 삶의 비결
3-1. 성령의 보증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성도들을 돕고 인도해 가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5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 이것은 구원이지요, 그렇지요? 우리가 신령한 육체를 덧입는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 아라본, 선불금이라고 했지요.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영이라고 하셨으니까 이것은 그냥 기억하시면 됩니다.
3-2. 주를 기쁘시게 함
그다음,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6절에서 9절을 보면, 이제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이 육체를 깨끗하게 성결하게 하고, 이 육체가 깨끗하게 성결하게 되어야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 우리가 몸으로 있다는 말은 아직 육체의 장막이 있을 때이지 않습니까. 이때는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가지 않았으니까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전입니다. 그러면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담대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죄가 나를 유혹할 때 담대해야 되고, 유혹에 대해서도 담대해야 되고, 핍박에 대해서도 담대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7절에서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 땅에 살면서 우리 눈이 항상 보는 것이 유혹이 되고 두려움이 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음으로 행하고 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렇지요? 우리 소망은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신령한 육체를 덧입고 천국 가는 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 즉 이 땅에 있든지 장막을 벗고 천국 가든지 —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여러분,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보다. 요즘 새벽에 아가서 말씀을 나누는데, 신부의 자격 중에 최고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술람미 여인이 "게달의 장막같이 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왕이 그 신부를 좋아합니다.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신부의 자격은 순결입니다. 신부의 자격은 "내가 시집갈 때 이것도 가져갈 수 있고, 저것도 가져갈 수 있고, 저 돈 많이 있습니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신랑 되신 분은 예수님이시지 않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 된 자들입니다. 이 세상 만물 모든 것을 다 통치하시고 창조하시고 지금도 관리하시고 다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고나 물질이나 이런 것들 기본적으로 원치 않습니다. 진짜 원하는 것은 우리의 순결입니다. 영적 순결.
신부 된 자로서 죄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영적 순결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발 씻고 죄를 털어내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힘써야 합니다. 거룩한 영적 순결이 담보되지 않고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거기에 많은 수고와 애쓰는 것과 주의를 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세상에 많고 많은데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그런 순결한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심판대
4-1. 드러남의 의미
그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언제 어디서 드러나느냐?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러분, 이 말씀 아주 무겁게 받아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다 반드시"라고 했습니다. '다'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 '반드시'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꼭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어디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나타나다'는 말이요, 헬라어로 파네로우(φανερόω)입니다. 파네로우. 실상이 낱낱이 공개된다. 그런데 어떻게요? 공개적으로.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천사들과 거기 서 있는 둘러싼 증인들 앞에서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들이 다 낱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이 땅에서 살아왔던 모든 것이 그 앞에서 낱낱이 공개될 때 나는 낯이 뜨거워서 고개를 들 수 있을까?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 과연 당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4-2. 선악의 참된 의미
이렇게 말하면 뒤에 또 나오지요.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면 이것이 행위 구원인가 공로주의인가 이렇게 볼 수 있는데요.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기 '악'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악의 두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파울로스(φαῦλος), 또 둘째는 카코스(κακός) 혹은 포네로스(πονηρός). 이것이 악의 두 가지 용법인데요. 지금 여기서는 도덕적인 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선악간에 할 때 '악'은 파울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잘 쓰지 않습니다. 사실은 잘 사용하지 않는데, 무가치한, 아무 쓸모없는 것, 그것을 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악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해코지를 하거나 때리거나 사회적인 통념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거나 그것이 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악은 무가치하고 쓸모없고 어디 달아도 무게도 하나도 나가지 않는 것 그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장 우리 머릿속에 싹 지나가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시편 1편 4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라고 말씀했을까요? 바람에 나는 겨가 우리에게 무슨 해롭습니까? 사람을 죽입니까? 바람에 나는 겨가 나보고 뭐 잘못되라고 빈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과 대비되는 말씀이 시편 1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거기에 깊게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 말씀을 길어 올려서 수고하고 애써서 열매를 생산하거든요. 그것이 선입니다. 그것이 선이에요. 열매 맺는 인생이 선한 인생입니다.
누구를 돕고 내가 착하게 살고 선한 말을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인생이, 그것이 선이라고요. 그런데 그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는가? 시냇가에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깊게 뿌리 내려서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원치 않아도 그 뿌리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에 집중하지 않아도 뿌리에만 집중하면, 내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닿아 있으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열매는 자동적으로 따라옵니다. 그런데 바람에 나는 겨는 뿌리내리지 않지 않습니까. 말씀에. 말씀과 상관없이 살지 않습니까? 마구 날아다닙니다. 자유롭습니다.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온 세상 구경 다 하고 다닙니다. 그런데 무가치합니다. 쓸모없습니다. 열매가 없으니까. 그것이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여기서도 악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는 것이 이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너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느냐? 너의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내려가서 너의 인생이 과연 열매 맺는 인생이었느냐?" 나무가 열매 맺어서 나무가 좋습니까? 나무는 좋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 먹습니까? 나무가 열매 맺어서 좋은 것은 첫째 주인이 좋고, 두 번째 주변 사람들이 좋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누가 기뻐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주변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잘했다 칭찬받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도덕적인 선과 악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구원을 말하려고 이 말씀을 적어둔 것이 아닙니다.
4-3. 뿌리의 점검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뿌리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을 합니다.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하루에 저 같은 사람 얼마나 많이 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할 때 항상 "내가 이 말을 왜 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뿌리입니다. 뿌리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뿌리가 누군가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러면 그 말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악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스스로 저녁에 집에 가서 잠들기 전에 그냥 조용하게 오늘 하루 내가 한 말 한 행동들을 한번 적어보세요.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가? 그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열매 맺습니다. 좋은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잘 기억하세요.
그다음 11절을 보시면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 바울이 왜 두려움을 안다고 했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되니까. 반드시.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 "사람들을 권면하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졌으니 또한 너희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라노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 여기서 '우리'라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 쓰는 바울과 동역자들입니다 — 그러니 너희도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기를 바란다, 이런 뜻입니다.
12절에서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스스로 우리를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이 왜 고린도후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 때문이지요. 그들이 유대 예루살렘에서 추천서 한 장 들고 와 가지고 바울을 막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 추천서의 권위, 외모로 자기를 자랑하는데, 바울은 "나의 추천서는 너희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들이 우리를 좀 자랑해 다오, 내가 우리가 어떤 사역자인지. 그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요, 잘 기억해야 할 것이 자기 입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자기 입으로 자랑하지 않고 "너희 입으로 우리를 좀 자랑해 다오. 너희가 우리가 어떤 사역자인지 말해 다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언 27장 2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칭찬을 내가 스스로 하면 어떻습니까? 대단히 궁색하고 유치합니다. 대단히. 그런데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분들 앞에 있으면 내 표정이 어떻게 됩니까? 표정관리 잘 됩니까? 표정관리 잘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들이고, 그런데 그렇게 자찬하고 자화자찬 막 할 때 또 이렇게 같이 박수 쳐주고 맞춰주는 분들은 진짜 사회생활 1등 너무너무 잘하시는 분들인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자화자찬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우리 일을 하게 되면, 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선, 선은 헬라어로 아가토스(ἀγαθός)거든요. 아까 선악 할 때 아가토스, 즉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면, 그 열매를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열매의 낙을 누리는 주변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내가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는데 너희가 우리를 자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5. 대표성의 원리
5-1. 그리스도의 사랑
13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한 동역자들입니다 —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바울이 미쳤다는 오해를 너무 많이 받았거든요. 보십시오.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함에, 즉 자기를 변호한 것입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은 이런 것 개의치 않습니다. 내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해도 너희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하다'라는 말씀이 헬라어로 수네코(συνέχω)라는 말입니다. '지배하다'라는 말입니다. 수네코, 지배하다. 즉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시는도다."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지배하니까 내가 그 사랑에 겨워서 일하니까 사람들이 볼 때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랑을 입어서 그 사랑을 견딜 수 없어서 전하고 달리고 복음 전하는데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저것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니까 나는 그 강권함에 겨워서 하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오해하는도다. 그 말씀이지요.
5-2. 한 사람의 죽음
그런데 여러분 그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14절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잘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 누굴까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사람은 오고 올 모든 인류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대표성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고린도전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였음에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임했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우리 모든 태어나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는데 그 죽음은 그 한 분의 죽음이 아닙니다. 모두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하셔야 할 것이, 예수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이 되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모두의 죽음을 이루는 것이 됩니까? 무슨 말이냐? 사실 내가 죽어야 됩니다. 내가, 내가 죽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제가 죄를 지었으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이니까 내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죽어 없어진 것이라니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 과거에 죄 짓고 자기 멋대로 살고 자기 욕망대로 살던 우리는 이미 죽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오해하고 그것을 팔아먹는 인간들은 "아유 고맙네. 내가 죽음을 면했구나. 나 대신 죽어서 참 고맙네" 그리고 나는 그냥 내 옛날 모습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의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이를 위한 죽음인데, 그 모든 이의 죽음에 내가 속하려면 나는 옛 자아를 십자가에, 나도 죽어야 합니다. 나도. 그것이 중요합니다.
5-3. 함께 죽음의 의미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나도 죽은 것입니다. 이미 나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렇지요? 죽었는데 어떻게 삽니까? 과거에 나는 없어졌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런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가 거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거하는 것이 아니고요. 과거의 내가 없어진 자아 속에 그리스도가 거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 정말 중요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
그러므로 우리는 — 나는 —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사탄은 어떻게 할까요? 자꾸 과거의 나를 살게 합니다. 과거의 나를. 이미 죽었는데 자꾸 과거의 나를 깨웁니다.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 지난 시간에 배웠지 않습니까. 그 일회성인 죽음이 아니고 계속해서 죽어야 된다고. 계속해서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냅두면 우리는 계속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사탄이 우리를 충동질하고 우리도 자꾸 과거의 옛 자아가, 성질이 자꾸 나타납니다. 그것을 계속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집안의 식구들이 나에게 잔소리한다고 그것이 죽어집니까? 더 불붙지요. 잔소리하면 더 열받지요. 다 태워버리지요. 그것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계속 말씀 앞에 나를 노출시키고 말씀으로 나를 비추어 보고, 말씀의 능력이 나를 죽이는 것이지 내가 나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자, 이 대표성의 원리를 이렇게 또 설명합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서 6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대표로 예수님께서 슬픔을 당하는 것이지요 —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실은 내가 징벌을 받는 것인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렇지요? 우리의 대표로 예수께서 찔렸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와 함께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평화가 오고 우리가 나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 이야기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잘 다니면 구원받는다." 교회 안에 있는 것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가 다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 북한 땅에 지하교회, 아직까지도 복음을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 모여서 못하는 분들,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그런 분들은 교회 안에 있지는 않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구원이 없습니까? 구원이 있지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교회 안에 있다고 구원이 담보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교회 안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리스도 안이 안전하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나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6. 새로운 피조물의 사명
6-1. 새 피조물의 정체
그다음. 자,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 또 나오지요?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렇지요? 아까 이 말씀드렸지요?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 자아로 사는 것이지 않습니까 —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우리도 죽어버려야 합니다. 이것 잘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육신은 무엇입니까? 옛 자아로 사는 사람.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제는 우리가 과거의 옛 자아는 죽었다. 잘 기억하십시오.
17절 "그런즉" — '그런즉'이 무엇입니까? 앞에 말을 다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런즉', 즉 그리스도가 죽을 때 나도 죽었으니 이제 옛 자아의 나는 없어졌으니 — "누구든지 그런 자는"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같이 죽었으면, 그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으면 — "새로운 피조물이라." 왜? 같이 죽어야 같이 부활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새로운 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옛 자아가 죽어야, 옛 모습이 죽어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입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과거 내가 좋아했던 것 계속 좋아하고 싶고, 과거 내가 매여 살았던 그 죄에 계속 은밀한 죄의 낙을 누리고 싶고, 과거 내 성질머리 그대로 계속 살고 싶고, 그래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누구든지"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라 그랬지. "그래 아무나, 아무나" — 아닙니다. 절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을 "교회 안에 있으면"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버린 자, 그런 자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을 너무 가볍게 보지 마세요. 이 말씀하려고 지금까지 16절까지 계속 한 것입니다. 이 말씀하려고.
6-2. 화목하게 하는 직분
이제 새로운 피조물 된 자에게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쉽게 설명드릴게요.
자,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가 원래 친밀했습니다. 에덴에서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죄라는 놈이 중간에 들어오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멀어졌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시니까 인간을 가까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화목 제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화목 제물.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는 화목 제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레위기를 우리가 공부했는데, 과거에 레위기에 보면 화목 제물, 화목제사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제는 그날그날 드리는 고기를 다 먹어야 합니다. 소를 잡았습니다. 다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식구만 먹어서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소 한 마리를 다 나눠줘야 합니다. 다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화목제를 드렸다 그러면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것 제발 먹어주세요. 이것 제발 먹어주세요" 부탁부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나와 싸운 사람에게도 빌어야 합니다. "제발 좀 먹어주세요. 그래야 이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먹어주지요. 그러면 이 제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서원제, 자원제는 이틀까지는 유효한데 3일째 되는 날까지 남아 있으면 그 제사는 파기됩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예수께서 이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나누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꾸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자꾸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시급합니다. 하루 안에 안 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이틀 안에는 해야 합니다. 사흘까지 두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긴박합니다. 아주 긴박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백성들이, 교회가 복음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 1차적인 사명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은 미루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화목 제물이니까. 계속 나누고 베풀고.
그래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누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전해서 육신의 장막에 갇혀 사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주자. 그것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6-3. 화목하게 하는 말씀
19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말씀'.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도 그대로 입에 가지고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받았는데, 화목하게 하기는커녕 불화하게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나의 언행과 나의 이 모자람과 부족함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오는 다리를 끊어버리고, 그렇게 살면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입니까?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는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의 정과 욕심을 완전히 죽여버린 자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전도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 아닙니다.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내 삶을 통해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저 여의도에 계신 국회의원 중에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는데, 그분들만 보면 한숨만 나고 화가 나고, 뭐가 전도가 됩니까? 그분들이 선거철만 되면 교회 찾아가는데,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가 됩니다.
20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우리가 받은 사신이 되었다 —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 너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지요 —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바울이 받아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가 누굽니까?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우선 공의에 의해서요. 심판이 있고 공의가 있고, 그다음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를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달려 돌아가시게 한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움을 온전히 더하여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 된 자의 사명입니다.
맺는 말
고린도후서는 어려운 책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책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순절의 기간을 보냅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게 되어 선악간 우리의 행한 일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쓸모없고 무가치한 존재로, 공중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두고 열매 맺어서,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모든 사람이 함께 죽었다고 했는데 여전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과거의 내 자아가 살아 있고 욕심이 살아 있고 여전히 사람을 미워하는 악한 영이 우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것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온전히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그 일을 온전히 전하며 나타내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 순간 매 순간 내 속에 있는 과거를 사탄이 들추어냅니다. 다시 한번 과거를 부활시킵니다. 주님, 그때마다 우리는 내 정과 욕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밖에 없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