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6 - 구원의 날 (고후 6:1-7:1)
1.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1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일하는 자가 사명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또 하나님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바로 그 직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가볍게 한번 해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고 해서 '촉구하다', '간청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당신들은 반드시 이 일을 해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은혜를 의미합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말은 은혜만 받고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은혜받고 말씀대로 살고, 또 은혜받고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말씀 듣고 귀만 즐거워하고 마음만 행복해하고, 그다음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 2천 년 전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은혜받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1-1.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2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은혜를 전하고 베풀고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제발 좀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릴 때 화목제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율법에 보면 첫째는 감사제, 두 번째 자원제, 세 번째 서원제입니다. 감사제는 그날 다 먹어야 합니다. 서원제와 자원제는 둘째 날까지는 가능한데 셋째 날까지 남겨두면 그 제사가 무효가 됩니다. 소를 잡았는데 그 소를 한 가족이 다 못 먹으니까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화목제의 핵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 되심을 나만 먹고 나만 받고 은혜받고 끝내지 말고, 긴급하고 시급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왜 긴급합니까? 왜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까? 왜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초림, 그리고 우리는 지금 재림하시는 그 사이를 교회 시대라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긴급하고 아주 시급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느긋합니다.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되고, 내일 못 하면 내년에 하면 됩니다. 상대가 듣든지 안 듣든지, 되든지 안 되든지 지속적으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꼭 내 입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삶으로 자주 불신자들을 만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보이도록 그런 삶을 자꾸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귀찮으니까, 나도 내 일이 바쁘니까, 오늘 못 하면 그다음으로, 그다음으로 계속 미룹니다. 그러나 이 직분은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지 모르는 상태라서 지금 해야 합니다.
1-2. 구원의 긴급성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성으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간절했으면 뽕나무에 올라갔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고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긴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세리로서의 과거를 말입니다. "네가 지금은 회심을 이야기하지만 지켜봐야 하겠다. 내가 지금 십자가 지러 가는 길이라서 좀 바쁜데, 가서 십자가 지고 3일 만에 부활하고, 40일 동안 이 땅에 있을 텐데, 40일 후에 승천하기 전에 한 38일째쯤 와서 너의 소문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어보고 그때 구원을 주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은 긴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 저런 사람에게 구원을 저렇게 성급하게 주시나, 선포하시나 말할 수 있으나,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은 급하십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사야의 글에서부터 시작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내시가 동의하자 두 사람이 바로 물로 들어가서 세례를 베풀어줍니다. 즉시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특히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내가 도구 되어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일은 미루시면 안 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는 즉시 붙잡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서의 사명을 살아야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도입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요한복음 9장 4절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해가 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종말이 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심판이 이루어지면 다 끝나버리는데, 그때가 되면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말입니다.
종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종말이 있고, 또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은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공중의 나팔 소리로 구름 타고 임하시는 그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은 내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입니다. 어떤 종말이든지 밤이 이르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내가 지금 눈 뜨고 호흡하고 살아 숨 쉬는 이 순간, 이 자리,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기 전 이 순간, 이 자리, 기회를 주셨으니까 그 기회를 붙잡고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 합니다. 그 일 중에 가장 고귀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서 복음 전파에 도구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나가서 전도지 주고 입으로 전도하는 것만이 복음 전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까지 다 포괄하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2. 비방받지 않는 삶
복음 전도자의 직분이 비방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걸어온 길을 말해봅시다. 이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불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나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하나님을 직접 봅니까? 나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까? 나를 통해 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절,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이 직분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이 욕 먹지 않게 하려고, '야, 너 따위가 무슨 복음 전한다고' 이런 말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거리낌이 없게 하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절이 핵심입니다. 무엇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대신 경험하는 것, 간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비추는 반사경, 거울의 역할을 하는 사람, 즉 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로가 어때야 합니까? 깨끗해야 합니다. 통로가, 나라는 통로가 깨끗해야 합니다.
수도관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수도관이 녹슬어 있고 수도관에 이물질이 끼어 있으면, 원수가 아무리 깨끗해도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이 깨끗할 수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하고, 깨끗하려고 애를 쓰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통해서 나가는 복음이 비방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 개인에게 적용해서 그렇지, 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이 전하는 복음이 그분들에게 정확하게 제대로 전달되겠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거리끼게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항상 명심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직분을 감당하려면 말입니다.
2-1. 성령 충만의 능력
그래서 바울이 이제 이런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맥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꾼,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서의 일꾼입니다. "많이 견디는 것과" 이 '견디는 것'이라는 말에 후포모네(ὑπομονή)라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후포모네는 어떤 의미입니까? 승리를 기대하는 인내를 의미합니다. 견디는 것이 그냥 무작정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승리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견디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엇을 견딥니까?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 이런 것들 가운데서 자기가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견디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견딜까요? 여러분, 이 중에 하나라도 우리가 견디라고 하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매맞는 것 혹은 배고픔 혹은 자지 못함. 힘든 것입니다. 다 힘든 것입니다. 전부 다 말입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을 보면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5절 끝에 '가운데서' 그리고 7절 끝에 '가지고' 이런 어려운 가운데 살아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이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번 세어보십시오.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함 등등 많습니다. 이것 다 가져야 견딜 수 있습니까? 아니면 한 몇 가지 정도 가지면 견딜 수 있을까요? 한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을까요? 그것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타종교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타종교인들, 특히 유교 전통 가운데는 각각의 덕목이 굉장히 많습니다. 덕(德)도 있고, 인(仁)도 있고, 기다림도 있고, 개인 수양을 계속합니다. 중용, 절제,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이야기했던 수많은 덕목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덕은 있는데 중용이 없는 사람도 있고, 중용은 있는데 또 인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 평생을 자기 수양을 합니다. 타종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수양과 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단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 끝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요즘 비유로 들면 원스텝으로 다 해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번거로운 과정 없이 성령 충만 하나면 다 됩니다.
새 언약의 일꾼,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으면 성령께서 나에게 오십니다. 성령이 나에게 오면 이것이 다 됩니다.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함,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 가지는 것이 다 됩니다. 한 번에 다 됩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십시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우리가 평생 동안 나는 사랑의 열매는 맺었는데 충성과 양선과 자비의 열매는 못 맺었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 되면 다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다 맺는 것입니다. 한 번에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모든 선물을 한꺼번에 받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한마디로 바꾸면, 이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없고 그냥 다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화를 통해서 조금씩 갈고닦고 성숙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은 있습니다. 미숙하니까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은혜받으면 이것이 한 번에 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이것을 가졌다는 것은 성령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 됩니다.
2-2. 역설적 풍요로움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8절에 보면 "영광과 욕됨으로" 그리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항상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지지하는 자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광과 욕됨'이라는 것은 지지하는 자들은 박수쳤겠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거짓 선지자들과 유대인들은 그를 욕했을 것입니다. '악한 이름'으로 그에게 갖은 모욕을 다 했겠지요. 그런데 또 칭송하는 사람, '아름다운 이름'으로 박수쳐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가 나를 칭찬하거나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다음이 또 중요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받아들여집니까? 그렇게 살아집니까? 이것이 이해가 되셔야 합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나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 식구도 한 달 벌어서 먹고 살기가 빠듯합니다. 가난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내가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면 누군가를 만나서 물 한 잔 놓고 같이 대화를 나눠도 그 상대가 나로 인하여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상대가 화목하게 하는 일꾼인 나를 통해서 죽을 목숨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것이 가능합니까? 나는 질그릇 같은 육체이지만 내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으로 내가 충만한 자이기 때문에 나에게서부터 흘러나가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저 사람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어서 비실비실하고 죽어 가는 사람 같은데, 저 사람 눈빛이 살아 있습니다. 저 사람 집안의 환경과 상황을 보면 도무지 웃을 수 없는 것 같은데, 저 사람은 항상 기쁘고 같이 대화하면 행복감을 나에게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그 직분을 우리가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교회 직분은 그냥 우리가 살아 있는 현실 속 교회에서 섬기는 직분일 뿐입니다. 정말 본질적인 직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받은 자의 본질적 직분, 곧 새 언약의 일꾼이요 화목하게 하는 자의 직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직분자로서의 사명은 내가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항상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난합니다. 현실적으로 가난합니다. 그런데 드러나는 모습도 남을 부요하게 하지 못하면 내가 신앙생활을 실패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약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잘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환경은 계속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됩니다. 계속 반복됩니다.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고 롤러코스터 타듯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좀 좋을 때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좀 안 좋으면 확 꼬꾸라지고, 그것이 무슨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내 삶의 환경은 계속 변화하나 내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이 계셔서, 나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 언약의 일꾼이요, 화목하게 하는 자의 직분을 맡은 자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3.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수
이것을 교회를 가지고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에스겔 47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중요한 것은 성전에서 지금 물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에스겔 47장이 무슨 내용입니까? 에스겔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그발강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환상과 묵시 계시를 받아서 기록한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이 포로 이후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이때 남유다가 망할 때 성전이 어떻게 됐습니까? 다 불탔습니다. 박살 났습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그릇과 모든 귀중품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다 약탈해 갔습니다.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망했습니다. 위대한 성전이 흔적도 자취도 없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망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의 비전과 모습이 이것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은혜입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흘러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흘러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다 산다고 했습니다.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온 은혜의 말씀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썩은 바다도 다 살아나고 물고기도 살아나고 모든 것이 다 되살아납니다. 솔로몬 성전이 얼마나 위대했습니까? 그런데 그 성전이 망한 이유는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물이 흘러가지 않아서입니다. 오히려 그 성전에서 나오는 썩어빠진 악취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행위를 못 하도록 성전을 불태워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망한 성전, 성전이 없습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제 너희가 포로에서 귀환하고 나면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줄 텐데 그 성전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성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성전은 누구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 여기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전이니 너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말씀의 물이 너희 주변 사람들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너희는 지금 이곳에서 포로로 살고 있지만 너희들의 정체성인 성전됨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비록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부유하지 못하고 권세 없는 자로 살아도 우리는 성전됨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좀 달라야 합니다. 그런 칭찬 좀 들어야 합니다. 어디 식당에 갔는데 "아, 교회 집사님 같으시네요" 이런 이야기 좀 들어야 합니다. "아, 목사님 같으시네요" 이런 이야기 좀 들어야 합니다. 그런 풍기는 느낌,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곳을 부요하게 하고 그 생명들을 살리고 거기가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4.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너무 중요한 것이니까, 이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진심을 이야기합니다. 11절, "고린도인들이여" 바울이 이런 말 하는 것은 참 특이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부른 적이 없습니다. 진심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입이 열렸다는 것은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비난하고 무시하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꾀임에 빠져서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으나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이 '좁아지다'라는 말은 '한계를 두다', '제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한계를 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추천서가 없잖아. 너는 진짜 사도가 아니잖아." 자기들끼리 요즘 말로 하면 프레임을 딱 건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가져와 봐." 그것이 제한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13절,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마음을 좀 넓혀라. 나를 이제는 받아들이라. 마음을 넓히는 것이요,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마음이 넓어져야 사람을 많이 품을 수 있고 또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넓히는 것이 결단한다고 됩니까? "이제 마음이 넓어져야지, 오늘부터 한다"고 되나요? 안 됩니다.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마지막 장입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내 마음이 넓어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은혜 위에 있으면 됩니다. 은혜 위에 말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로부터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위에 내가 굳게 서 있으면 됩니다.
이 '굳게 서다'라는 말을 헬라어에서 좀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두 발을 딛고 서다라는 뜻입니다. 한 발만 딛고 땅 위에 서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흔들립니다. 균형을 잘 못 잡습니다. 금방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굳게 서려면 두 발이 다 땅에 딱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 나의 두 발을 딱 올려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는 내가 구원받은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 위에 굳게 서 있으면 좀 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5.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제 바울이 그다음 지침을 줍니다. 이제 단락이 끝났습니다. 바울이 5장과 6장 전반까지 했던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일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에는 직분이 하나 파생되는데 그 직분이 무엇입니까?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지금까지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가 어떤 직분을 구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지금까지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자, 화목하게 하는 자가 상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해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뒤에 쭉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좀 당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죽을 고생을 다 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멍에를 메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멍에를 메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소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왜 지웁니까? 밭 갈려고입니다. 밭 갈려고 멍에를 지우는 것입니다. 즉 멍에를 멘다는 뜻은 일한다는 뜻입니다. 손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같은 땅을 갈고 씨 뿌리기 위해서 땅을 개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불법의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어떻게 같은 멍에를 메고 같은 곳에서 같이 일할 수 있느냐, 이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불법의 사람들을 어떤 대상으로 봐야 합니까?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복음 전하는 대상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만들어서, 그 후에 그들과 함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와 불법이 함께 사귀고, 그리스도와 벨리알(Βελιάρ)이 어떻게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까? 그 뒤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했습니다. 일하는 것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5-1. 근본이 다른 사상들
우리가 "근본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기독교 복음과 근본이 다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입니다. 절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9세기 들어서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서 생물의 진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가설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갈라파고스 섬에 있는 여러 생태들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책을 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항상 자연과학적 지식이 세상을 한번 휩쓸고 유행을 하고 나면 이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자연과학이 사회과학으로 옵니다. 이 생물의 진화가 19세기 후반으로 오면 사회진화론으로 옵니다.
진화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진화가 무엇입니까? 다양한 종들이 있는데 그 종들이 계속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핵심은 적자생존입니다. 즉 자연에게 잘 적응한 개체만 살아남는다, 그것이 적자생존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입니다. 나머지는 다 도태되고 다 죽습니다. 즉 그러면 강한 자가 살아남고, 살아남은 개체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 자기 개체를 복제하고 발전시켜서 진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진화론자들이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사회도 똑같다, 이 사회도 강한 자가 살아간다, 이 사회도 약한 자는 알아서 도태되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강하게 사람을 훈련시키고 키우고 길러내고 경쟁을 붙이고 그 갈등 관계에서 살아남는 자를 도구로 사용한다, 그것이 사회진화론입니다.
그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자들이 누굽니까? 나치입니다. 나치와 일본입니다. 그러면 사회진화론을 우리가 수용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하고 한반도를 점령한 것이 정당화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조선은 약자였으니까요. 조선은 도태되어야 당연하고 강한 자가 여기를 보호해 줘야 하니까요. 요즘 가끔 그런 망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진화론자들에 의하면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총칼을 가지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밟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성경과 하나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사상이 기독교 복음 사상과 함께 멍에를 멜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약자들을 찾아다니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약자들에게 가서 "야, 너는 돈 없으니까 죽어. 너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냥 굶어." 예수님께서 그런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 먹이시고, 병든 자들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 쫓아내시고,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예수님인데 어떻게 적자생존을 이야기하고 정당화하는 진화론자들, 사회진화론자들과 함께할 수 있습니까? 같이 멍에를 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자체가 근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한 것처럼 의와 불법이 다르고, 빛과 어둠이 다르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적그리스도적인 것입니다.
5-2. 공산주의와 성경
또 한 가지, 이제 공산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공산주의가 성경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근거는 사도행전 2장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유무상통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고, 그리고 서로 떡을 떼고 교제하고, 바나바도 자기 것 다 팔아 가지고 다 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다 갖고 와야 한다, 그것이 사회주의고, 그것이 성경에서 왔다, 그래서 공산주의와 성경은 원래 뿌리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그 근원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성령이 있었습니다. 성령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탐욕적입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기 재산, 자기 물건 하나 나누고 베풀고 쓰는 것, 그것이 쉽습니까? 절대 안 합니다. 학생들을 보십시오. 자기 연필 한 자루라도 친구에게 안 줍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다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은혜받은 자가 자발적으로 나누고 베푸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의 정신입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계급투쟁을 통해서 무산계급이 유산계급과 혁명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싸워서 빼앗는 것입니다. 공장도 빼앗고, 땅도 빼앗고, 토지도 빼앗아서 다 나눠서 다 같이 잘 살자, 그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것과 교회가, 성령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성령을 배제하고 성령 없이 이야기하는 그들과, 하나님의 성령 충만해서 내 것이든 네 것이든 다 유무상통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5-3. 자유와 복음
자유 이야기를 또 하나 해봅시다. 우리는 자유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르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자유 의지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 의지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그 안에 내포된 것입니다.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그냥 우리 인간에게 프로그램을 딱 심어 놓으셔서, 하나님은 식물에게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어뜨리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끝없이 마음속에 갈등합니다. "선악과, 저것 따 먹을까 말까, 먹을까 말까?" 오늘은 안 먹어도 내일 또 "먹을까 말까?" 맨날 갈등하고 맨날 마음속에 하얀 마음과 까만 마음이 싸웁니다. 매일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진짜 순종이니까, 그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신 위대한 선물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녀 관계에서 사랑할 때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핸드폰 검사 다 하고, "너 몇 시에 뭐 했냐? 어디 갔냐?" 막 물어보고, 막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평생 엮이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공산주의를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공산주의 안에 자유가 있습니까? 공산주의 안에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안에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과 기독교 복음이 같이 멍에를 멜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제대로 전해 가지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돌아와서 그들의 사상을 갈아엎고 다시 하나님 앞에 거듭난 자가 되면, 그때 멍에를 같이 메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항상 우리 시대에 이 분별을 잘하셔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와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6. 거룩하라
16절,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는 멍에를 메는 자를 잘, 같이 일할 수 있는 자를 잘 살펴야 합니다. 같이 일할 수 있는 자, 나와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동역의 백성들도 나와 같이 똑같이 한 하나님을 모시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같이 멍에를 메고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이제 믿는 자는 어디에 거해야 합니까? 17절, "그러므로" 이제 앞의 말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빛과 어둠이 한 멍에를 메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그들이 무엇입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와 근본이 다른 자들에게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이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무엇입니까? 구별입니다.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거룩은 믿지 않는 자들과의 하나님의 구별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출애굽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집트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벨리알을 섬기는 자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녀가 되는 시내산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말씀입니다.
이제 7장 1절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거룩하게 하신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온전히 이루다, 원어로 에피텔레오(ἐπιτελέω)입니다. '완료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습니다. 그들과 함께 거하지 못하게, 같이 멍에를 메지 않도록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까? 성화를 통해서입니다. 칭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셨다면, 우리는 그다음에 삶을 통해서 성화의 삶을 통해서 그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2장 10절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11절,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이것은 출애굽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 우상의 자리에서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성막을 멨던 자들입니다.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거룩한 자들이니까요.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즉 우리가 결단만 하면 됩니다. 결단하고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쨌든 출애굽했습니다. 결단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이 그들을 이끌고 인도해 가십니다. 아말렉을 만나도 하나님이 처리하시고, 목이 마르면 물을 주시고, 배가 고프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고 작정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 언약의 일꾼으로, 또 새로운 피조물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기억하시고, 근본이 다른 자들과 같은 멍에를 메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 삶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고 은혜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자 화목하게 하는 자의 직분을 받은 자로서 멍에를 멜 자를 잘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근본이 다른 자들과 함께 일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