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 7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2-16)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우리는 고린도후서 공부의 절반을 넘어서서 그다음 절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여러 가지를 공부했는데, 그중 두 가지 개념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운 피조물이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존재입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신 사명이 있으니, 곧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는 네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첫째로 직분자는 본인이 정결해야 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직분자를 보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를 통해서 은혜를 받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행실과 옳은 행실로 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실천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도 마음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즉 한마디로 성령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단번에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가 부요하여 흘러넘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는 부요한 자입니다. 물질이 없어서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하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복을 누리는 은혜가 우리에게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넷째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진 자는 근본이 다른 자와 하나님의 일에 멍에를 같이 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가 될 수 없고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도무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주의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아니라 복음 전도의 대상자입니다.
이 네 가지 화목하게 하는 자의 직분을 잘 기억하시고, 이 느낌을 가지고 7장으로 넘어갑니다. 7장부터는 교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바울 개인의 이야기, 이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 이야기가 나오고, 8장과 9장으로 넘어가면 연보를 부탁하는 이야기 등이 함께 이어져 나옵니다.
1. 진심으로 영접하라
2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이 "마음으로"라는 말을 조금 더 정확하게 옮기면 "진심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짜 진심으로 너희가 우리를 영접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린도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힘들었습니다. 중간에 끼어든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부화뇌동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이 사절을 보냈고 눈물로 쓴 편지까지 썼습니다. 회복되고 난 다음에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너희가 이제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갔으니 진심으로 우리를 영접해 달라"고 말하면서, 바울이 지난날 이 교회를 섬길 때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바울과 함께했던 동역자들은 사역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불의를 행하다"는 부당하게 대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성도를 부당하게 대했다는 말은 차별했다는 뜻입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종과 자유인, 로마 시민권자와 그렇지 않은 자 등을 차별해서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해롭게 하다"는 오염시키다라는 말인데, 복음을 그대로 전해야 오염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그 복음에 불순물을 타 버립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속여 빼앗다"는 이기적으로 이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성도를 이용해 먹는 것인데, 그런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을 가지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하게 차별 대우한 적이 없고, 아무에게도 복음 아닌 다른 것을 전해서 오염시킨 적이 없고, 아무에게서도 내 목적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성도를 이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사역자라면, 목회자라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그 시절이나 지금 우리 시대나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런 말을 써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역설적으로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쓴 이유는 지금 너희를 찾아와서 나와 너희 사이를 갈라놓는 거짓 교사들, 바로 그런 자들이 꼭 이런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온 이리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1-1. 함께 죽고 함께 살자
3절을 보시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함께 죽고 함께 산다. 이 앞에 좀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함께 죽는다. 누구와 함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를 목회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것처럼 자신도 이 교회를 위해서 정말 목숨을 내어놓고 죽는 것처럼 열심히 일했고, 그러니 너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회 철학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목회 철학을 누구에게서 가져왔을까요? 예수님에게서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 이야기를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양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실제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처럼 자기도 목숨을 버리는 심정으로 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살아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우리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자기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죽어야, 그래야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그랬고 너희도 그렇게 살아달라. 그 부탁을 바울이 했습니다.
1-2. 신뢰와 자랑
이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말합니다. 4절에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이 "담대한 것"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옮기면 "신뢰하는 것"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하는 것이 많다.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다."
바울과 고린도교회가 추억이 많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목회하면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으니까, 서로 간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오가면서 추억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쌓인 신뢰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맺었던 관계 가운데 신뢰도 있고 자랑할 것이 많다.
그다음을 보십시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도" 사역자로서 겪는 환란이 있습니다. 바울이 겪는 환란, 고통, 고난, 어려움. 이런 환란을 겪고 있지만 "너희와 맺었던 신뢰와 자랑할 것 때문에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나 힘들어, 지금 내가 복음 전하는데 매우 힘들다, 사방으로는 우겨싸움을 당하고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든데, 그런데 너희와 맺었던 신뢰와 너희를 통해서 자랑할 것들만 생각하면 나는 힘이 난다. 그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굉장히 와닿는 말씀입니다. 진짜 믿음 생활하는 성도들은 교회가 믿을 만하고 교회가 자랑할 만하면 힘이 납니다. 내 삶이 좀 힘들어도, 먹고 살기 힘들고 자랑할 것이 별로 없어도,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 교회가 자랑스러우면 내가 이 교회에 대해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정말 좋은 교회야. 우리 교회는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고, 이 교회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교회고, 영혼들이 소성케 되는 교회야. 이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아름답고 목회자가 다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다." 이렇게 자랑할 수 있으면 우리는 살 만합니다.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삶이 어려워도 교회 공동체가 행복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야, 나는 너희 교회를 생각하면, 이 성도들을 생각하면 나는 기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 사업이 잘 되고, 가정에 문제가 없고, 내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 교회만 오면 맨날 싸워요. 교회만 오면 매일 분쟁이에요. 교회만 오면 골치가 아파 죽을 것 같아요. 주일날 와서 예배는 드려야 되니까 오긴 오는데, 그러면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그런 교회를 다녀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러면 매우 힘듭니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참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합니다. 내 사업이면 내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우리 집이면 내가 어떻게 고쳐보겠는데, 내 자식들이면 매질이라도 해보겠는데, 교회가 이러니까 감당이 안 됩니다. 영적으로 눌려서 너무 힘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공동체에 들어와서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나면 회복되고 은혜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나야 되는데, 다 좋았는데 여기 오니까 눌리는 것입니다. 다 좋았는데 여기 오니까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못 삽니다. 영적인 존재들은!
바울이 내가 큰 어려움을 당해도 너희가 믿을 만하고 너희들을 자랑할 만하니까 내가 위로가 있고 기쁨이 넘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서 점심 식사 대접 잘해주고 시설 멋지게 해주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화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은혜로워야 되고, 교회가 복음이 살아서 숨 쉬어야 되고, 예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그를 통해서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살 만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런 책임감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탄은 자꾸 교회의 화평을 깹니다.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힘을 잃거든요. 그 공동체가 위로가 없고 기쁨이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사탄의 도구가 되면 안 됩니다.
1-3. 바울의 고통
고린도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5절에 보니까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란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4절 뒤에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 너희 교회가 평안하고 행복했을 때 나는 위로받았고 기뻤어. 그런데 이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그들의 꾀에 넘어가고, 나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교회가 거짓 복음에 물들어 갈 때 나는 편안하지 못했다."
여기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여기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그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로마에 연금당했습니다. 그래도 빌립보서 기쁨의 서신을 써서 보낸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서 배 타고 로마로 넘어올 때까지 그 날들을 갇힌 자로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려우니까, 교회가 분열을 겪고, 교회가 문제가 생기니까 바울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도들을 힘나게 하는 것은, 교회가 화평하고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
6절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오므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디도가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이 한 번 갔다가 실패하고 왔습니다. 분쟁 해결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도를 통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제목이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좀 발견되면 좋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그 편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회심시켰을까? 그들을 돌이키게 했을까? 매우 궁금한데 아쉬운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온 것뿐 아니오 오직 그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히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하므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이 위로를 받았는데 그 위로는 세 가지가 다 더해진 것입니다. 사모함, 애통함, 열심히 있음.
그런데 이것들 각각 하나하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처음에 좋은 교회였습니다. 신뢰할 만했고 자랑할 만했습니다. 아주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 고린도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나옵니다.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예수님처럼 "우리 함께 죽자 그리고 함께 살자"라고 말하며 앞서서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1년 6개월 동안 목회할 때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잘했다는 말입니다. 기본기를 잘 다져 놓았다는 뜻입니다.
2. 기초 공사의 중요성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본기를 잘 다져 놓았기 때문에 잠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고린도교회를 막 뒤흔들었지만, 바울이 편지를 써서 그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 것입니다. 만약에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돌아갑니다.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다시 기본으로 되돌리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없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가르쳐야 되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유지보수합니다. 오래 쓰다 보면 건물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유지보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지을 때 부실하게 지어 놓으면 여기 손대면 여기 무너지고, 여기 좀 손대려면 옆에 또 무너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돈 쓰느니 차라리 다 갈아엎고 새로 짓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한 번에 돌이키게 한 이유는 그가 처음에 기초 공사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아이들이 사춘기 지나고 청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좀 방황하기도 합니다. 세상으로 가기도 하고 신앙을 좀 등한시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기초공사를 믿음으로 잘 해놓은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옵니다. 금방 돌아오고,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신앙생활 열심히 잘합니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에 기초공사하는 것.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자기의 폼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기가 잘 되어 있는 선수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금방. 그런데 기초가 안 되어 있으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데, 기본이 없는데요.
그래서 교회는 어릴 때 교회학교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어린아이들 신앙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잘 가르쳐 놓아야 합니다. 교회 처음 오신 새 가족들, 아예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분들, 그분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잠깐 다른 데 갔다가도 다시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된 이유가 그의 초창기 열심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8절, 오늘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를. 그 편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았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성도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근심했습니다. 매우 많은 근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괜히 썼나?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잘 썼다.
9절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오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근심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했습니다. 바울 자기가 한 말입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근심에도 레벨이 있는데, 제일 최상위 레벨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3-1. 하나님의 뜻이란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두 가지만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과 베드로전서 3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베드로전서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이 발견됩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 둘째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 가지고 근심해 보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정말 근심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서 영혼 구원받게 해야 되는데, 이것 때문에 내가 근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자식을 위해서 근심하는 것만큼 그분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근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고 싶어, 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을 위해서 나는 내 물질 문제보다 더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 없지 않습니까? 사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심각해지지 말고.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지 않으세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 그것이 진짜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최상위 레벨의 근심.
3-2. 세상 근심의 결말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근심합니까? 돈 때문에 근심합니다. 다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근심의 끝은 무엇입니까? 나를 찌르는 것입니다. 자기 공격입니다. 마치 자가 면역 질환이 자기 면역세포가 나를 파괴하는 것처럼, 물질을 향한 수많은 근심은 결국 나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그런 근심을 우리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근심을 죽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을 위한 근심.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애쓰고 힘쓰는 근심이어야 되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근심. 그것이 진짜 근심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경험한 것입니다. 사송 지역에 하나님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교회에 땅을 주셨습니다. 그 어려웠던 기간 동안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했는데, 우리 교회 성도들 중 많은 분들은 그 기간에 저기에 종교 부지를 우리 교회가 얻었다고 돈을 내고 샀다고 모르시는 분들도 대다수입니다. 왜냐하면 작정 헌금한 적이 없으니까. "저기 종교 부지가 있는데 우리가 저것을 위해서 헌금합시다" 해서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 어려웠던 기간 동안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했고, 밥 먹지 못했고, 교회학교 아이들 모여서 교회학교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 땅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 땅을 주셨으면 저 땅에다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데, 아니 우리가 이전에 쓰던 비전센터가 너무 낡아서 안전진단 결과 불날 수도 있다고, 위험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그래서 저것보다 우리 아이들 안전이 더 급하니까 우리 옆에 비전센터를 지은 것입니다. 비전센터 지을 때 얼마 들었는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가지고 이 비전센터를 완공할 수 없으니까, 그 어려웠던 기간에 우리 성도들에게 작정헌금하게 할 수 없으니까 교회가 부채를 안았습니다. 은행 부채를.
그런데 그러면 저 땅은 어떻게 합니까? 저 땅에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데. 그러면 이제 목사부터 시작해서 우리 장로님들, 당회원들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돈 문제가. 그 어려웠던 기간에 은행 금리가 6%가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29억 빚을 안았습니다. 그러면 대충 계산하면 나옵니다. 1년에 우리가 얼마를 이자로만 내야 되는지.
그러면 단순하게 생각하면 저 종교 부지를 붙여서 팔아서 그 돈 갚아서, 그 돈 가지고 여기 이 땅, 이 건물 붙여 갚으면 끝납니다. 그러면 깔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합니다. 왜 못합니까? 저기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땅에서 딱 서서 금정산을 보면 거대한 부처님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어마어마하게. 데시앙 아파트 102동, 103동, 104동. 제가 심방 가서 거기서 10층에서 창문을 쫙 열면 날씨 좋은 날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햇빛에 반사가 되어서 보이지가 않습니다.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바로 마주보는데 너무 잘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 땅을 어떻게 팝니까? 그 땅을 팔아서 우리 아이들이 예배드릴 공간을 어떻게 마련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헌금해서 우리 아이들이 예배드릴 공간을 만드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교회가 서야, 거기에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서야, 영혼 구원을 위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근심해야 되는 것은,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근심해야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을 우리가 할까를 근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빚을 갚을까를 근심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 돈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까를 근심하다 보면 그것이 나를 찌릅니다. 그래서 나만 찌릅니까? 내가 찔리면 화가 나서 남도 찌릅니다. 서로 찌르고 찌르다 보면 우리 다 죽습니다. 전부 다 죽어버리고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와해됩니다. 돈 걱정하다 보면.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들, 교회가 걱정해야 될 일은 영혼 구원 문제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핵심이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교회가 섰습니다. 그 교회가 섰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고민하고 또 기도했더니, 우리가 저 교회를 지을 능력이 됩니까? 우리가 여기도 빚을 얻어서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회를, 서울 영락교회 80주년 때 마침! "때마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이라고 했는데, 그때 마침 하나님이 그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거기서 교회를 지어준 것입니다. 저기 들어간 돈이 자그마치 교회 짓는 데만 43억입니다. 목사관까지 기자재까지 거의 50억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 능력으로 백날 천날 돈 문제 가지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울어봐야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문제를 가지고 근심하고 고민하니까 돈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고민을 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될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이지, 우리 앞에 닥친 물질 문제, 이 돈 문제로 근심하다 보면 그것이 나를 찔러서 나도 죽고 다 죽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근심하십시오. 좀 원대한 근심을 하시고, 좀 품위 있는 근심을 하시고, 수준 높은 근심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이고 성도의 품격입니다. 믿음 생활 수십 년 했는데 아직까지 돈 문제 가지고 근심하고 아직까지 교회가 성도들 돈 가지고 계속 들볶고,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교회가 본질적인 근심을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십니다. 놀라운 방법으로. 모릅니다. 우리도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해결해 주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진짜 본질적인 고민을 하면 그 나머지는 신묘막측하다는 말이 그때 쓰이는 말입니다. 신비롭고 묘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거리가 되고, 그것이 이 말씀이 진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확신 있게 그 말씀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역사를 보여주면 성도들은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 가정에서도 이것을 가지고 모범 답안으로 삼습니다. 나에게 이 답안이 생겼으니까 이 답안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그런 역사들이 각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일터에서 일어나면 그것을 또 널리널리 전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역사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해보지 않으니까 알 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합니다.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매일같이 딴 근심하지 말고.
4. 회개에 합당한 열매
세례 요한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10절을 보면 8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10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와서 딱 한 가지 주제의 메시지만 거의 선포했습니다. 회개입니다. 회개.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모두에게 "회개하라.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했습니다. 거기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번째 메시지가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가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이 첫 취임에서 하는 첫 메시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그렇고,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의 경제와 정치, 국방 전부 다 좌지우지하는 미국 대통령이 첫 메시지 내는 것을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오셔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이 하신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 회개를 촉구했을까요? 언제 종말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매 순간 회개하고 자기를 정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언제 예수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스탠바이 상태로 딱 회개하고 딱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단들은 회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공동체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 물질 쓰는 것 그것 다 필요 없으니까 다 팔아서 다 가지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일상생활 열심히 하고 살되 매일같이 발 씻고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열심히 살되 회개 열심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매 순간.
그래서 매일 저녁에 잠들기 전에 오늘 하루를 돌아봐야 되고, 또 하루 눈 뜨고 하루를 살아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할 때 말씀으로 나를 돌이키고.
4-1. 신앙 성장의 척도
신앙생활이 더 깊어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처음에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절기 교인부터 시작합니다. 절기 교인 아시지요? 부활절에 계란 받으러 오시고, 추수감사 주일에 떡 받으러 오시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카드 받으러 오시고. 이제 1년에 딱 세 번 정도 오시는 절기 교인들. 그런데 그 절기 교인들은 이 텀이 너무 깁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진도가 나가고 성장하면 이제 주일 교인이 됩니다. 거의 매주는 안 오시더라도 격주 혹은 3주에 한 번 정도 오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조금 더 깊어지면 매주일은 오십니다. 네 주일 오셔서 교제하고 가십니다. 식사도 하시고 남선교회 여전도회 식구들 만나고 친구들 만나고. 아 여기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네 즐겁네, 착한 사람들이 모였네 이러고 이제 가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신앙이 좀 더 깊어지면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것으로는 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 이 자리에 계시고, 금요일 와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새벽기도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기간과 텀이 갈수록 촘촘해집니다. 그러면서 그 촘촘해지면서 자기를 매일 돌아봅니다. 매주일 성전에 못 나오더라도 가정에서라도 매일같이 말씀을 통해서 나를 돌아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점점 그 범위와 폭이 짧아지는 것. 그래서 내가 지금 신앙 성장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이것으로 한번 판단해 보셔도 좋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전도입니다. 전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회개와 증인됨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해야 합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서 내가 회개해야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위해서 근심하라 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그 두 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첫 말씀과 마지막 말씀이니까.
4-2. 세상 근심은 사망이라
이제 또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아까 세상 근심 보았습니다. 세상 근심의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돈 문제. 그것 가지고 계속 근심하다 보면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왜? 나를 찌르니까. 똑같습니다. 말씀이 나를 찌르니까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돌이킵니다. 회개입니다.
사사기 2장 2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것만 읽으니까 잘 모르시겠지요. 이 맥락을 설명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옵니다. 여호수아를 필두로 해서 들어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정복할 때 내린 명령이 무엇입니까? 다 쫓아내라 했습니다. 그들과 언약 맺지 말고 통혼하지 말고 다 내보내라. 그런데 못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너졌습니까? 기브온 사람들과 조약 맺는 것부터 무너집니다. 여호와께 묻지 않아서입니다. 금요기도회 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의 잔당이 거기에 다 그대로 잔존해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이 있을 때는 그들을 눌렀지만 힘이 없을 때는 못 누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전 이스라엘 군대가 다 일어나서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가나안 잔당들을 다 몰아내라.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들과 언약을 맺고 이렇게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있느냐. 제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2장 4절과 5절.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아까 하신 그 말씀입니다. 책망하는 말씀.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지라"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잘못한 것 아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 아니까.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보김"이라는 뜻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는 자들. 그 지명이 그때부터 보김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러분 그다음 어떻게 되었을까요? 울었습니다. 책망받았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예배 드렸습니다. 그다음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울고 회개하고 그리고 예배드리고 끝. 집에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가지고 같이 정군 출격, 이런 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까?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까?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에 이르게 한다" 했습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그냥 금요기도회 때 나와서 혹은 새벽에 나와서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 깨달았으니까 "하나님 헌금이라도 할게요" 해서 하나님께 감사헌금 드리고 그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돌이켜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 모이자 해서 모여 가지고 가나안 잔당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전쟁해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뭐라고 합니까? 그냥 그냥 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우는 자들. 그래서 그 보김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들을 때마다 "울고 끝낸 인간들, 진정한 회개의 돌이킴이 없었던 자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면 웁니다. 울었습니다. 울고 나서 그다음 뭐라도 하나 바뀌어야 합니다. 뭐라도 하나. 바꾸려고 애를 쓰고 힘을 쓰고 실천하고 노력하고 분투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냥 우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콘서트 가서 노래 부르고 울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우는 것이나 금요기도회 때 와서 우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그러면 똑같이 자기 감정에 카타르시스밖에 더 됩니까? 드라마 보고 은혜 받아서 울고, 우는데 그다음 돌이킵니까?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냥 감동받고 우는 것이지, 그냥 내가 좀 촉촉해지는 것이지, 내 메말랐던 감정이 영화 한 편 보고 드라마 보고 감정이 촉촉해지고, "아 그냥 나도 이 나이에도 그래도 눈물이 있네" 이러고 그냥 스스로 위로하고 끝내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는 자들이 되면 안 됩니다. 비록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아도 마음에 찔림이 있으면 그러면 가서 그대로 하면 됩니다. 눈물이 우리의 회심의 증거가 아닙니다. 손 들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회심의 증거가 아닙니다. 내 삶의 변화가 증거가 되어야지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4-3. 회심한 자의 증거
11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그런데 이것의 앞에 목적어를 하나씩 넣어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진리에 간절하게 하며."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진리에 대해서 간절해져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간절함이 더 불붙어야 합니다.
"또 얼마나 복음을 변증하게 하며" 복음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회개하고 나면 진리에 간절해야 되고 복음을 내가 변호하게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나면 변화된 나는 얼마나 죄에 분하게 하며 얼마나 죄 짓는 일에 두렵게 하며" 회개했으니까 죄 짓는 일이 두려워져야 합니다. 죄 자체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옛날에 회개하기 전에는 죄의 은밀한 낙을 즐겼는데, 이제 회개하고 났으니까 죄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얼마나 진리를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복음에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잘못된 자들을 벌하게 하였는가." 이것이 회심한 자의 증거입니다. 회개하고 나면 이렇게 내가 변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 앞에 목적어를 싹싹 다 빼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적용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5. 사랑으로 다스림
12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불의를 행한 자.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에 놀아난 자들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그냥 나는 누구를 타겟으로 삼아서 그를 목적으로 삼아서 누구를 혼내려고, 누구를 공동체에서 찍어내려고 쓴 것이 아니다. 너희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눈물로 편지를 쓴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2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그대로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서 교회를 어지럽혔던 사람들. "벌받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벌하라고 했습니다.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이것은 징계가 없는 용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2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징계하고 그다음에 용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위로가 있습니다. 위로는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이 위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교회 안에서 용서하는 방식이 이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교회가 치리하고, 그다음에 용서하는데, 용서한 이후에 진리로 그들을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이 순서를 한 번 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무작정 눈 감아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치리하고 용서하고 제대로 가르치는 것. 이것이 다 사랑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즉 디도가 가지고 온 편지로 말미암아 우리가 큰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15절 "그가" 디도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사실 디도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디도가 편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디도도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바울의 특사로 갔는데, 내가 이 편지를 들고 가서 이 편지를 전해주고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이 회심하고 돌이켜야 되는데, 이것 못하면 어떡하지? 고민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런데 디도가 가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디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디도가 너무 기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디도가 와서 바울에게 전해줘서 나는 더 기쁘다.
16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이제 처음의 신뢰보다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이 신뢰는 더 깊어진 신뢰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큰 어려움과 위기를 바울과 디도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잘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그 신뢰가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그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잘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항상 수준 낮은 근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믿음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문제를 염려했으며 물질 문제가 우리 문제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을 두고 근심하겠습니다. 선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위하여 근심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가 드러날까? 어떻게 하면 내가 화목하게 하는 자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이 근심이 우리의 근심의 주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근심의 결과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회개는 그저 입으로만, 눈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의 삶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한 결과 하나님 앞에 그 회개를 열매로 보이게 하여 주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첫 번째 하셨던 가장 중요한 말씀이 우리의 삶에 열매 맺고 꽃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