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하나님의 능력 / 전체녹취

고린도후서 특강 9 - 하나님의 능력 (고후 10장)

고린도후서 10장 4-6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오늘은 고린도후서 공부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합니다. 이전에 나누었던 말씀들, 그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시고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키워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내가 누군가를 붙잡고 설명할 수 있으면 공부를 잘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하면 그 반대가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상 근심이라고 하면 대개 물질을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셨고, 결국 그 근심이 자기를 찌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는 것은 영혼을 위한 근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근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수준 높은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으면 훨씬 더 유익합니다. 풍성한 연보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나누었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0장 이야기입니다.

1. 온유와 관용의 목회

먼저 1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 말이 어떤 의미이냐 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얼굴을 보면 할 말을 못 하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떠나서 편지를 쓰면 아주 강하고 직설적으로 할 말을 다하는 나 바울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진심이 아니라 반어법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바울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편지에만 강하게 표현하느냐? 얼굴 보고는 그렇게 말 못 하지."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말을 받아서 "그래 너희가 그렇게 비난하고 비꼬고 이간질하며 설명하는 나 바울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는 곧이곧대로 읽으시면 안 되고, 어떤 문맥인지, 어떤 맥락인지,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를 좀 뜯어봐야 합니다. 살펴보고 들여다봐야 충분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진짜 어떻게 성도들을 대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한 방식이 온유와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온유와 관용이라는 것은 크게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개념을 알고 있으면 온유와 관용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이 말하는 온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말씀하신 온유는 야생동물 이야기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조련사에게만 길들여진 야생동물의 성품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온유와 관용으로 했다 할 때, 이 온유는 "나는 하나님에게만 길들여진 사람이다. 세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 너희의 상황과도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온유는 세상이 말하는 온유처럼 그냥 마음 좋고 착하고 너그럽고 하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대로 너희 성도들을 대했던 나 바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대하면 어떻습니까?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성도들이 잘못 가면 추상같이 책망하고 나무랐다는 뜻이고, 말씀의 기준대로 살아서 잘하면 칭찬하고 격려하고 긍휼히 여겼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온유는 말씀대로 했다는 뜻입니다.

관용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지만, 그러나 잘 따라주지 않는 자들을 몇 번이고 용서하고 용납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온유와 관용에 대해서 항상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 바울이 성도들을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이런 자들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동시에 바울의 대적자들에게 함께 동조하는 자들, 성도들 중에 바울을 비난했던 자들입니다.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를 거짓 중상모략하는 대적자들 그리고 거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강하게 질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직접 가면 너희들이 다 돌이키기를 바란다, 그래도 그때까지 이런 자질이 남아 있으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1-1. 강한 자에게 강하고

우리가 이 1절, 2절 말씀에서 바울이 어떤 식으로 목회했는지를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 무조건 강했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 있고 강한 자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할 말을 다 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4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하루는 안디옥교회에 예루살렘교회 지도자 베드로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왔는데,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교회에서 일단의 지도자들이 또 방문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원래 유대인들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못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이런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루살렘교회 영적 지도자입니다. 교회 리더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 중에 원탑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실 이방인 중에 있다가 회심해서 굴러 들어온 사람이고, 바울이 예루살렘교회 사람들에게도 오랫동안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나바가 계속 다리를 놓아주고 연결해 주어도 사람들은 과거 전력 때문에 바울을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이런 성품을 바울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한 자가 잘못할 때 그냥 눈 감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잘못하면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1-2.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 권력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외치셨습니까?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성전도 뒤집으셨습니다. 성전 다 뒤집어 엎고 장사하는 사람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 비둘기 파는 사람 다 쫓아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하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반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 우리 주님께서 그 가난한 중에 모든 것을 다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 먼 자 눈 만져서 혹은 침 뱉어서 두 번이나 안수해서 고쳐주시기도 하고, 나병 환자 가까이 오라 해서 만져줘서 병을 치유해 주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바울도 역시 그랬습니다. 강한 자에게 할 말 다하고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 성도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일 설교 시간에 사울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 베냐민 자손 중에 사울처럼 산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물어뜯는 이리처럼 비겁하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잡아먹을 듯이 강한 사람. 골리앗에게는 한마디도 못 하다가 정말 약하디 약한 다윗은 오랫동안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혈안이 되어서 쫓아다녔습니다. 그것은 성도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항상 약한 자를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잘못된 것은 이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도 역시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얼굴 보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고. 바울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그냥 그대로 읽으면 안 되고,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말한 반어법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2.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음

3절을 보시면,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바울을 흠집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삽니다. 육신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혈과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혈은 피고 육은 살입니다. 혈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산다는 말은 피의 뜨거움을 따라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내 피의 뜨거움을 따라서 갑자기 확 열이 오릅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는 것을 들으면 그 피의 뜨거움을 따라서 그냥 행동하고 말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살아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이 육신을 따라 싸우는 것입니다. 또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누군가가 한 대 때리면 나는 두 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지만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겠다고. 육체를 따라 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기왕에 싸웠으면. 그러면 내가 더 강해져야 합니다. 혈기가 더 세야 합니다. 피의 뜨거움이, 그리고 주먹이 더 세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피의 뜨거움이 세지 못하거나 주먹이 더 세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야비해져야 합니다. 수를 써야 하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주먹이 세든지 수를 써서 야비해지든지, 그것이 육체를 따라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세상의 법칙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육체를 따라 싸우는 것이 다 이런 싸움들 아닙니까? 거기에다가 그것이 안 되면 또 현대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돈이 엄청 많거나, 그것이 권력이 되어서 사람을 짓눌러 버리거나, 그것이 육체를 따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육체를 입어서 사는 존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 진짜 싸움의 대상

그러면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에베소서 6장 12절을 보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체는 혈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합니다. 우리 싸움의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백성들의 싸움의 대상 말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들, 거짓 선지자들, 그런 자들과 바울이 싸우면 주먹이 세든지 아니면 야비해지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과 직접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 배후에 있는 어둠의 영들, 악한 영의 세력들을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그 어둠의 영들, 악한 영의 세력들은 이런 식으로 바울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어지럽힙니다. 성도들을 계속해서 꾀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와해됩니다. 영적 지도자인 바울과 고린도교회가 분리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고 복음이 힘을 잃고, 그것이 악한 영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이제 성령시대가 이 땅에 오면서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서 살아가라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영, 악한 영의 세력은 교회를 무력화시킵니다. 힘을 잃게 만듭니다. 그 힘을 잃게 만드는 가장 좋은 것이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 성도들 사이에 신뢰를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어떤 문제가 생겼다 하면 이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과 싸우려고 하지 말라, 이 문제의 본질과 배경과 이 일이 일어나는 어둠의 영의 세력을 파악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2. 문제의 본질을 보라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방어기제가 있는데, 어떤 상황이 생기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뭐 이런…" 이런 말이 먼저 나오고, 또 조금 더 만만한 사람이면 "저게…"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막 쏘아붙입니다. 말로, 행동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러고 나면 이미 악한 영들에게 걸려가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가 코가 딱 끌려 가지고 계속 끌려갑니다. 계속 사탄의 종노릇 하면서 끌려다닙니다. 질질 끌려다닙니다.

나도 모르게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가정을 괴롭게 하고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그렇게 삽니다. 자기 논리는 있습니다. 자기 이유는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다 지나고 돌아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노릇 한 것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종노릇 하고 살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잃게 만들었으니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상황이 생기면 우선 심호흡을 하고 판단을 중지하고, 그리고 이 문제의 본질을 좀 봐야 합니다. 바로바로 입에서 생각나는 대로 뱉어버리지 말고,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어둠의 영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기도해 봐야 합니다. 기도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 동역자들에게. 그래야 우리는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상대해서 서로 죽이고 서로 물어뜯다 보면 다 죽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혈기가 나서 누군가를 내 말로 짓밟았습니다. 속 시원합니까? 기분 좋습니까? 이겼다고 사람들이 막 "너 대단하다"고 칭찬해줍니까? 그때부터 내 주위에 사람이 떠납니다.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습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기쁨이 아니라 공허가 찾아옵니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사탄의 종노릇 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혈과 육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영들을 상대해서 이 문제의 본질을 알고 우리가 이것을 잘 극복해냈다면, 그때는 말할 수 없는 편안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서 샘솟아 오릅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

그다음에 무기 이야기를 합니다. 4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무기가 있어야 싸웁니다. 어둠의 악한 영들과 싸우려면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육신에 속한 것이 무엇입니까? 혈기, 육체, 돈, 내 권력. 내가 가지고 총동원할 수 있는 나의 지식, 말빨, 인맥, 학연, 지연 등등. 수많은 것들.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어둠의 영들을 상대할 때는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의 무기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애매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무기가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는데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나도 가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6장 13-17절에서 바울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 여기까지 우리가 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공부한 것입니다. 방어용 호신무기입니다. 내 몸을 방어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이런 것만 가지고 전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병사들 전쟁터에 내보낼 때 총 한 자루 없이 그냥 내보냅니까? 투구 쓰고 방패만 들려서 내보내면 됩니까? 그러면 적들이 계속 화살만 쏘면 그 방패 가지고 맞고만 있어야 합니까? 칼도 한번 못 휘둘러보고 말입니다. 마지막에 유일한 공격 무기가 성령의 검입니다.

3-1. 말씀을 영접하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가지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 이 데코마이라는 말씀은 영접하다라는 말입니다. 영접이 무엇입니까? 따져보고 따져보고 받아들일 만하면 받아들이고, 따져보고 내칠 만하면 내치는 것이 영접입니까? 그것은 선별입니다. 등급을 나눠 가지고 우리 집에 들일 것인지 노숙시킬 것인지 선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바울도 자주 말씀하셨는데, 나그네를 선별하라 하셨습니까? 나그네를 영접하라 하셨습니까? 영접하라. 이 말은 나그네면 따지지 말고 묻지 말고 무조건 집에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선별했습니까? 영접했습니까? 영접한 것입니다. 그냥 모셔다 드린 것입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냄새 날 것 같아. 여기 계세요." 이것이 아니고 무조건 영접해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데코마이하라, 영접하라. 이 말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판단과 너의 지혜와 너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네가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그것이 능력 있는 성령의 검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말씀은 막 적습니다. 손바닥에도 적고 외우고 차에도 붙여놓고 냉장고에도 붙여놓고, 제가 심방 가보면 아파트 출입문에도 막 나가는 데 붙여놓고,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오만 데 다 붙여놓는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런 것 붙여놓은 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비정한 말씀은 아무도 안 붙여놓습니다.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도 타협을 하게 되어서 심방을 가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런 말씀이나 읽어주고 옵니다. 그래야 서로 좋으니까요. 심방 갔는데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십시오. 거룩한 진리의 투쟁을 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도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모든 말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따져보고 받아들이고 하면 그것은 취사선택하는 것이지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데코마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기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하다. 영접은 무엇입니까? 오셔야 영접하고, 주셔야 영접합니다.

이 말씀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는 것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을 주세요" 기도합니다. 내가 영적 전투를 할 때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부르짖고 애통해하고 엎드리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의 생각하고 다릅니다. 내가 원한 말씀하고 다릅니다. 그러면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전투에서 못 이기는 것입니다.

3-2. 여리고성의 교훈

한번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 여리고성 전투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문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수아 6장 말씀 우리가 금요기도회 때 매번 보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그 앞에 엎드립니다. 기도합니다.

지금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니까요. 혈과 육의 싸움이라면 우리의 육체를 따라 싸우는 것이라면 기능 있는 사람들을 모을 것입니다. 전투력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전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영들, 악한 영의 세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영접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마지막 날 나팔 불고 일곱 바퀴 돌아라. 이 말씀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검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말씀이 너무 같잖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말입니다. 이것이 뭔가? 이것이 검 같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해서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영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못 이깁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영접했습니다. 따지지 않고 영접했습니다. 주신 말씀 그대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되게 우습지만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그리고 말 같지도 않은데 마지막 날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주일 동안 하는 것입니다. 월요일, 화요일은 돌 수 있다 칩시다. 수요일쯤 가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것이 돌았지. 이렇게 한다고 이것이 되냐고." 지나가면서 주먹으로 거기 벽도 한번 쳐보고, 그리고 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것 기어 올라가도 올라가겠는데"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고, 여호수아에게 가서 "야간 기습 작전을 해봅시다. 공성전을 해봅시다. 사다리 만들어 봅시다." 이런 이야기 왜 안 했겠습니까?

육 일 동안 돌았는데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조금의 금이라도 가야지. 뭐 좀 흔들림이라도 있어야지. 마지막 날 일곱째 날, 이제 오늘 마지막이다. 여섯 바퀴 돌 때까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일곱째 바퀴 돌 때 어떤 마음일까요? "그러면 그렇지. 미쳤지 내가. 이런 짓을." 욕만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그냥 했습니다. 닥치고 영접하고 했습니다.

나팔 불고 외치는데 이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야, 이것이 진짜 성령의 검이구나. 이것이 진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로구나."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면 평생 그렇게 살 것 같지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 말씀을 붙잡고 살아서 승리한 경험 했습니까? 했습니다. 다들. 그런데 그다음부터 그렇게 살게 됩니까?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약함이고 우리의 악함입니다.

우리는 어둠의 영들을 상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말씀을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합니다. 힘이 듭니다. 먹고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말씀은 딱 생각나는 것이 그것입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낼 것이다." 그것만 붙잡고 주구장창 기도하는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말씀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이럴 때 어떤 말씀 붙잡아야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그때 주시는 말씀이 진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기는 내가 꺼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4. 세상의 이론을 무너뜨림

다시 4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능력은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멋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은 좀 외워도 됩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

세상에 이론이 참 많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학자들이 많고 역사가 길어지니까요. 그 이론 위에 또 다른 이론이 집을 계속 짓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 살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안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원칙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시장경제가 돌아가는 원칙들 말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배웠던 것,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있습니다. 가격이 결정되는 것, 물가가 결정되는 것, 공급이 많고 수요가 적으면 당연히 가격은 떨어지는 것이고,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으면 당연히 물가는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론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사과가 두 알밖에 없습니다. 먹고 싶은 사람은 10명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어떻게 됩니까? 자본주의 원리에 의하면 시장경제에 의하면 돈 많은 사람이 그것을 사 먹는 것입니다. 내가 사과를 먹어야 내 병에 도움이 되고 이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약한 사람이 이것을 먹어야 합니다. 비타민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돈이 없으면 못 먹는 것이 이론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이론입니다.

4-1. 하나님 나라의 법칙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0명이 있으면 가장 약한 자를 먼저 찾습니다. 그리고 힘센 자와 건강한 사람이 그것을 포기해줍니다. 먼저 섬겨줍니다. 약한 자를.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법칙이 교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이 교회에 그대로 통용되고 세상과 교회가 똑같다는 것은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약한 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는 교회에서도 버림받고, 세상에서 약자는 교회 와서도 약자가 되고, 세상에서 권세 있는 자는 교회 와서도 여전히 대접받고 권세 있는 자가 되고,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건물만 교회이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론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들이 다 회피되고 모든 이론들이 다 무너져야 합니다. 공산주의의 이론도 자본주의의 이론도 다 무너져야 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진리만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서 역사하는 곳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수많은 일들, 우리 주님이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일하셨습니다. 배 타고 이쪽 갔다가 저쪽 갔다가 굉장히 바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배 타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갔다 왔다 한 것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이방인 지역이 따로 있고 유대인 거주 지역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거주 지역에 가시기도 하고 유대인 거주 지역에 가시기도 하고. 복음서를 보면 오병이어 사건도 있고 칠병이어 사건도 있습니다. 칠병이어, 오병이어, 똑같은 것이라고요? 떡 두 개만 더 있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오병이어는 유대인 지역에서 행하신 기적이고 칠병이어는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일하셨던 분입니다. 한 군데 치우침 없이 우리 주님은 혈통을 따라 산 분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는 모든 이론이 다 무너져야 합니다. 모든 장벽들이 다 무너지고,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이론이 맥을 추지 못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4-2.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5절,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복음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세상의 권세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여리고성 무너뜨리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성 돌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들이 다 있습니다. 그 생각을 사로잡아 말씀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즉 말씀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5. 외모가 아닌 본질을 보라

이제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해야 보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무릎 꿇어야 보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내면과 그 문제의 이면에 담겨진 영적 전투를 보려면 기도해야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엎드리지 않고는 그 문제의 본질을 찾아낼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볼 수 없으면 처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적절한 처방을 제대로 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외모만 보는 것입니다.

5-1. 껍데기만 본 제자들

껍데기만 본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입니다. 마가복음 13장 1-2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이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예수님 시절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어떠하다'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감탄문입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What a…! How…!" 이런 것입니다.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합니까?"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합니까?"라고 말했던 제자는 무엇을 본 것입니까? 외모만 본 것입니다. 껍데기만. 그 건물의 화려함만.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보신 것입니까? 이 성전의 내면을 보신 것입니다. 썩어빠진 성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성전을 보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장사하고 거기서 돈벌이 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남이 남을 죽이기만 하는 그 더러운 성전의 쓰레기 같은 모습만 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만 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요.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막 달라고 외치는 것은 기도의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이고,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을 보고 이 성전에 썩어빠진 모습들도 발견하고, 그래서 우리는 외모만 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상황이 생기면 그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그 문제를 보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외모만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기도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세상을 봅니다.

5-2. 사무엘에게 하신 책망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을 보니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다윗 집에 간 사무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죠. 껍데기를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6. 세우려는 사명

이제 8절 한번 보십시오. 바울은 사도로서 주께 받은 권세로 어떤 일을 하는가? "주께서 주신 권세는" 주께서 누구에게요? 자신에게, 이 사도인 바울에게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일차적인 사명이 이것입니다. 무너지게 하는 사명이 아니라 세우는 사명. 우리 교회 올해 표어가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람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못하게 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살리는 것. 살려서 숨 쉬게 하고 일하게 하고 꿈꾸게 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살리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역의 목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리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도려내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돋아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본질을 볼 수 있는 능력과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외모만 보면 안 되고, 껍데기만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가 다 성숙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절,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절, "그들의 말이" 그들은 대적자들입니다. 바울을 비방하고 교회를 어지럽혔던 대적자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아까 1절에서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바울을 이런 식으로 비난했습니다. 편지는 힘이 있다, 담대하다. 그런데 몸으로 대할 때는 시원치 않다, 약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11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바울은 동일했습니다. 똑같았습니다. 바울이 말에나 글에나 행동에나 얼마나 강한지 우리가 압니다.

사도행전 17장 말씀은 아레오바고 설교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 전하다가 거기서 대적자들에게 거의 몰려가지고 죽임당할 데까지 가서 바울을 피신시켜서 베뢰아로 갔다가, 베뢰아에서 다시 배 타고 아덴으로 갑니다. 아테네입니다.

아테네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라고 새긴 제단을 보고 바울이 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막 전합니다. 혼자서. 아테네가 어떤 곳입니까? 소크라테스가 활동했고, 플라톤이 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고, 거기 소피스트들이 있고, 철학의 도시입니다. 우상의 도시입니다. 거기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이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을 대해서 일대일로 말로 복음을 전해서 져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원치 않다고 말합니까?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냥 이 정도로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맙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비난했으면 어떻겠습니까? "저 사람은 별 볼 일 없어. 글은 그냥 그럴듯하게 쓰는데 만나보면 그 사람 외모도 별로고." 바울은 머리가 벗겨졌거든요. "외모도 별로고 말솜씨도 시원치 않고 사람도 약하고 별것 없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러면, 직접 만나서 한번 말로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혈과 육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7. 주 안에서 자랑하라

12절,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우리는 사도들입니다. 또 우리는 성도들입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자기들끼리 서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칭찬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추천서 써주고 자기들끼리 잘난 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지혜가 없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꼭 이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만하면 나는 괜찮지 뭐. 신앙생활도 잘하고 경제활동도 잘하고 건강하고 우리 집도 다 괜찮고." 그런데 지혜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7-1. 그리스도까지 자라라

왜 지혜가 없습니까?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의 자람의 대상이 누구여야 합니까?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자화자찬하고 나는 여기서 괜찮다고 자기 스스로를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경주하고 또 경주해야 하는데,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도 닮기 원한다"고 찬양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시하게 "나는 저 권사님처럼 되고 싶어. 저 장로님처럼 되고 싶어." 그러면 그 권사님이 무너지고 장로님이 무너지고 목회자가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에까지 나를 계속해서 복종시키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약하여 넘어질 때는 긍휼히 여겨 주면 됩니다. 기도해 주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잠언 1장 20-21절을 보시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잠언 새벽기도 말씀할 때 나누었는데요. 지혜는 광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혜를 얻으려거든 세상으로 나가라는 뜻입니다. 여기 머물러 있지 말고 자꾸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고 그리스도에게서 지혜를 찾으라는 뜻입니다. 즉 훈련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성장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맞습니까? 아닙니까? 좋은 교회 맞습니다. 당연히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교회를 위해서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되었지"가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완전한 교회, 더 좋은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큰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닮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고난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모든 것 다 버리고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교회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고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저부터 우리 장로님들부터 계속해서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고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 좋은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 성도가 되면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저 옆 교회보다 우리가 좀 좋으니까 괜찮으니까, 그것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말씀에 비추어서 고치고 또 고쳐 나가야 합니다.

7-2. 분수대로 자랑하라

13절,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바울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했는데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니 무엇입니까? 자랑한다는 말입니까? 안 한다는 말입니까? 한다는 말입니다. 하는데 사실만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만 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 속에는 실패도 있습니다. 자기 연약함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자랑한 것 많습니다. 잘난 것 많이 자랑했습니다. 잘된 것. 그런데 바울은 실패도 자랑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기 실패를 이야기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솔직합니다.

자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약함도 자랑해야 합니다. 내 실패담도 자랑거리가 됩니다. 있는 그대로이니까요. 하다가 안 되면 실패하는 것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잘된 것도 자랑하고. 경험에는 실패 경험도 있고 성공의 경험도 있고, 교회가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더라 하는 경험도 있고, 우리가 이렇게 교만하니까 무너졌더라 하는 경험도 있고. 그것이 왜 부끄럽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한다." 이것은 로마서 15장 20절 말씀을 봐야 하는데요. 바울은 로마서 15장 20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즉 바울은 이미 교회가 있는 곳에는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그다음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그래서 고린도에는 교회가 없었기에 내가 그래서 고린도까지 온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자기 자랑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7-3. 주 안에서 자랑하라

17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다.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만 자랑하라. 주 안에 있으니까 주 안에 있는 자가 자랑하면 그것이 주님이 자랑하는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는 것입니다.

둘째, 있는 그대로를 말하라.

셋째, 실패도 말하라.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의미입니다. 주님만 높임 받아야 되고, 더 보태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되고,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 안에 있는 자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패를 잘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실패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잠깐 넘어진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왜? 내 자녀는 나의 업적이니까. 내 자녀는 나의 얼굴이니까. 거기서부터 내 인생의 고단함이 시작됩니다. 내 인생이 결국 그 자녀와 엮여서 평생 그렇게 끌려갑니다. 그들의 실패도 자랑할 수 있어야 되고 그들의 성공도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그러면 결국 그리스도만 영광받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시편 20편 7절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9장 24절 말씀을 보니까,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 했습니다. 두 번째,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이것을 자랑하라 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물질, 권력, 혈과 육. 그것은 다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주님을 자랑하고, 있는 그대로를 자랑하고, 나의 약함도 자랑하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이 또 나옵니다. 바울이 같은 서신서, 또 다른 서신서에서 비슷하게 혹은 다른 표현으로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가 가장 자랑거리입니다. 왜? 나는 죽어서 천국에서 눈 뜰 수 있으니까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돈 가지고 천국에서 눈 뜰 수 있습니까? 권력 가지고 천국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로마 시민권 가지고 천국 시민권 살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최고의 자랑거리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나에게 천국 열쇠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진짜 우리가 자랑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진짜 자랑이 무엇인가 이것을 바울이 10장에서 말씀합니다. 그것을 자랑하면 그 자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영들을 상대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영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해야 된다고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을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주셨던 말씀, 그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말씀이셨지만 가장 강력한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곧 그 성을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그대로 영접하겠습니다. 그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여 우리의 싸움이 결국은 어둠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주 안에서 자랑하겠습니다. 실패도 자랑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만 말씀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랑거리 십자가만 나타내겠습니다. 우리는 뒤로 감추어 주시고 십자가가 능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