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교 10강 - 죄에 대하여
민수기 15장 1-3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한지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아멘.
오늘은 죄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공부했고,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알려면 자기 자신을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흙으로 빚어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제대로 잘 살피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진정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면 끊임없이 우리가 받는 유혹이 있는데, 그 유혹이 죄의 유혹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은 어떤 것이고, 하나님은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며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인간이 저지른, 사망으로 가는 심각한 잘못이 바로 죄입니다. 죄 문제에 걸려 영원한 생명을 잃고, 낙원에서 쫓겨나고, 황무한 세상에서 목적도 없이 유리 방황하는 인생을 살다가,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형벌로 떨어질 인생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고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죄를 통해서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렇게 끈질긴 죄의 정체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끊어놓았습니다.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은 친밀한 관계였고, 설화 속 이야기처럼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단절되었고, 그때부터 사망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끊어진 관계의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되겠지요.
그렇다고 사탄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그 중보의 다리를 끊으려고 끊임없이 죄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잘만 하면 얼마든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죄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시작
1-1. 원죄의 의미
먼저 죄의 시작을 살펴봐야 하는데,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적 견해가 있지만, 짧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타고난 죄성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죄의 본성입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은 아주 해맑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셋 키워보면서 아니라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기어 다니는 아이가 이제 막 벽을 짚고 일어서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땅바닥에 개미가 지나가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발로 개미를 밟은 것입니다. 그냥 밟은 게 아니라 밟아서 짓이긴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악한 죄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더군요. 나로부터, 나 아니면 아내에게서 왔겠지요. 그러면 제가 가진 이 죄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 아버지 아니면 우리 어머니에게서 왔지요. 그렇게 무한소급해서 올라가 보면 결국 최초의 우리 인간인 아담 할아버지에게서부터, 하와에게서부터 온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합니다.
타고난 죄성,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무리 순백의 깨끗함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원죄라고 하면 그 원죄는 아담 때문에 빚어진 죄로구나 하고 이것만 생각하고 그 죄의 본성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1-2. 원죄의 두 가지 특징
원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원죄 이전에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는데, 창세기 2장 17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냥 엄포용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지므로 영육 간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 말씀,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면 언약이 깨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깨었습니다.
보십시오. 뱀이 와서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니까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뱀이 하와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뱀이 물을 때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원죄의 시작은 말씀이 혼잡해진 것입니다. 원래 순수한 말씀, 하나님이 주셨던 원래 그 말씀에 첨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앞뒤를 바꿔놓고 이 말씀의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시작입니다. 죄의 시작은 다른 것이 아니고 말씀이 혼란스럽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그냥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였는데, 사탄이 와서 한 말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였습니다. '참으로'라는 말을 붙임으로 말씀을 의심하게 했고, 말씀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원죄의 시작은 말씀이 혼잡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지어질 때, 하와가 결정적으로 죄를 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시면 뱀의 꾀입니다. 창세기 3장 4-6절에 보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지난 시간에 인간을 공부할 때도 다루었지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교만의 죄가 들어왔습니다. '저것을 먹으면 내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내가 저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선악도 분별하고 분별력도 생기고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정신이 혼미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원죄는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죄, 말씀의 혼잡과 교만은 지금도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단들은 이 두 가지가 이단의 존재 근거입니다. 이단들은 말씀을 혼잡하게 합니다. 자기들 맘대로 해석합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그리스도를 자기라 하질 않나, 보혜사 성령을 누구라고 하질 않나, 말씀을 혼잡하게 꾀맞춥니다. 말씀이 혼잡하게 된 그 원죄가 지금까지 계속 인간의 핏속에, 인간의 역사 가운데 지금도 살아서 흘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교만이 계속 우리 인생을 괴롭히지 않습니까? 드러내 놓고 교만한 것은 아마추어나 하는 짓입니다. 진짜 프로들의 속 교만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권사님, 집사님, 누구누구 님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정말 속으로는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지 않나'하는 게 다 있잖아요. 다 마음속 깊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부부관계도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그 속 교만까지 우리의 원죄의 피의 흐름 속에 흘러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지 않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원죄의 죄성을 가지고 있는데, 말씀이 혼잡하게 되고 그리고 교만한 것, 이것이 원죄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었으면 두 가지를 깨뜨려야 합니다. 말씀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이렇다면 그냥 그런 줄을 믿고, 그런 줄 알고,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외우고, 그대로 실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순수함 회복이고 원죄의 죄성을 우리가 깨뜨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만을 제거하게 해달라고 그것을 붙들고 투쟁해야 합니다. 하나님 교만하지 않게 해주세요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번번이 일어나는 속 교만, 속에 교만이 있으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을 숨길 수 없듯이 속에 있는 속 교만도 불쑥불쑥 드러납니다. 백 마디 말을 하면 한두 마디가 말 속에 교묘한 교만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 교만은 사람을 찔러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말에 걸려 넘어져서 신앙생활 하다가 크게 다칩니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원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교만을 깨고, 그래야 우리는 사탄의 농락에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2. 원죄의 결과
2-1. 네 가지 관계의 파괴
원죄의 결과를 한번 보겠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네 가지인데, 이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들어와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 했는데, 벌거벗은 줄을 알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무엇보다도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내가 왜 그렇게 바보 같았는지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자기와의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죄를 계속 짓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내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 화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세월을 수십 년 살다가 자기를 파괴하는 인생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죄가 우리 인생에게 가져다 준 결과, 자기와의 화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때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데, 하나님이 찾는데 괜히 발이 저려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생긴 것입니다.
세 번째, 3장 12절에 보면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인간과 인간 관계의 막힘이 있는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던 그 아담의 고백이 이제는 '이 여자가 나에게 줌으로 내가 먹었습니다'라는 책임전가를 하고 있잖아요. 죄를 지으면 서로 남 탓하기 바쁩니다. '내 탓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남 탓하기 바쁩니다.
네 번째, 창세기 3장 18-19절에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요즘 자연 파괴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환경 파괴가 얼마나 극심합니까? 오늘도 미세먼지가 많았잖아요.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죄로 인한 결과 네 가지는 이것입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모두가 죄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네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이 됩니다. 예수께서 오셔야 이것이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나 자신도 용서가 되고 회복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깨어졌던 관계도 다리가 놓여서 건너갈 수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담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둘이 하나가 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어 줍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 인생에게 오심으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나중에 종말이 이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서 이런 것들이 단번에 회복이 됩니다. 죄는 이런 결과를 주었고 예수님은 여기서 새로운 회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2. 가정의 불행
이뿐만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결과는 가정의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인지라" 죄로 인해서 그 가정이 에덴에서 쫓겨났지요. 이제 들판에서 살면서 가정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죄로 인해서 부모와 자식이 쫓겨나서 그 죄로 인한 결과로 가정의 또 다른 불행의 싹이 피어났습니다.
2-3. 온 인류의 불행
네 번째, 이 가정만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원죄로 인해서 온 인류가 불행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죄는 이렇게 놀라운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죄는 이렇게 놀라운 영향력이 있습니다. 죄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가정에 문제가 생겼지요. 그리고 그 죄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어왔지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개미를 밟아서 짓이겨서 죽일 만큼 죄성이 그들에게 들어왔지요. 이 죄성은 가만히 두면,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면,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온 인류가 그 죄성 때문에 다 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죄는 성장합니다. 죄는 굉장히 무섭습니다. 죄는 발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의 본성 중에 아주 특별한 것은 죄는 성령을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성령을 공부할 때 성령이 임하는 두 가지 비유 중에 겨자씨처럼 성령이 임하는 유형을 말씀드렸잖아요. 성령이 마음속에 말씀으로 씨앗이 딱 뿌려지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나면, 성령이 씨앗처럼 뿌려지고 그 위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잘 공급하면 성령이 잘 자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죄를 누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도 성령과 똑같이 성장합니다. 죄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자꾸 공급하면, 죄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면 죄도 삽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죄가 지금 온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죄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단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있을지라도, 어떤 문제와 어떤 아픔이 있을지라도 잘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결단이라고 말하잖아요. 결단,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잘라내는 결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끊고 잘라내어 버려야 합니다.
3. 인간이 짓는 죄
3-1. 예배 공동체를 떠나는 죄
이제 인간이 짓는 죄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원죄 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원죄는 말씀이 혼잡해졌고 그리고 교만의 속성이 있는 것이 원죄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씀 혼잡과 교만의 속성 가운데 있는 인간이 짓는 죄가 어떤 죄입니까?
첫째, 예배 공동체를 떠나는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교만하면 예배부터 드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창조주를 찾습니다. 내가 부족하고 오장육부 몸과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절대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교만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예배를 잘 드리지 않습니다. 물질 문명이 우리 인생을 지배한 후로는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차츰차츰 예배당을 떠나갑니다. 예배 드리는 데 핑계거리가 많아집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을 핑계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핑계들을 잘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내가 교만해서 빚어진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예배를 드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전에 지진이 한 번 일고 나니까 그다음 날 새벽에 많이 오셨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지평을 이렇게 살짝, 하나님이 크게도 아니고 살짝 흔들어 놓았는데 새벽에 얼마나 많이 들어 오셔 가지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찌나 불안하셨는지, 사실 저도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다 쥐고 계신데 우리 교만한 인생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계시다가 살짝만 흔들면 예배당이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전국 방방곡곡 예배당이 다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잠깐만 예배하러 오면 미련한 인생이지요. 그러기 전에 교만을 내려놓고 예배 공동체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즉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예배 드리지 않는 자들과 함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3장 12-13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예배 공동체를 떠나서 소돔 땅으로 가버린 사건입니다. 모두가 다 교만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3-2. 원망과 불평
또 인간이 짓는 죄가 원망과 불평입니다. 왜 원망이 생기고 왜 불평이 생길까요? 말씀이 혼잡해져서 그렇습니다.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원망할 힘도 없고 불평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진다 하셨으니까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구하지 않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 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탄이 자꾸 말씀을 혼잡하게 하니까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혼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망하고, 그러니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 원망과 불평은 결국 우리 인생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원죄 아래에 있는 우리 인간이 말씀이 정돈되면 원망도 사라지고 불평도 사라지고, 대신에 우리 입술에는 감사의 열매만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 있으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날이 아니라, 감사의 예물은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입술로 하나님께 늘 감사한 것들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주일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입으로 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감사한 것들을 좀 낯간지럽게 혼자서 걸으면서, 운동하면서 자꾸 말씀하세요.
운동하는데 전화기 붙들고 한 시간 내내 전화하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요즘은 귀가 아프니까 블루투스로 계속 전화 하시는데 멀리서 보면 무슨 약간 정신이 나가신 분들처럼 이렇게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전화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계속 하세요. 올 한 해 감사했던 것, 고마웠던 것, 이런 것들을 입으로 말씀하시면 말씀이 정돈됩니다.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이 다시 정돈된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3-3. 목적을 잃고 멈추는 죄
세 번째, 인간이 짓는 죄 중에 아주 심각한 죄가 목적을 잃고 멈춰서는 죄입니다. 원죄 아래 있으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인데,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 1-3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광야 생활을 가는 동안 멈출 때는 자기 마음대로 멈출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사인을 주어야, 구름 기둥이 딱 멈추어야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이 다시 떠나면 쉬고 싶어도 떠나야 합니다. 삼십 분을 쉬고 삼십일 만에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합니다. 그냥 아무리 떠나고 싶어도 한 달 내내 멈춰 있으면 멈춰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라는 말은 구름 기둥이 멈추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임의로 멈췄다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멈추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한지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하지 않고 멈추니까 음행이라는 죄를 지었습니다. 음행이라는 죄, 그다음 죄를 가져옵니다. 어떤 죄입니까?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우상숭배가 그냥 처음부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일단 멈추었고, 그다음에 여인들이 유혹을 했고, 유혹에 넘어갔고, 넘어간 이후에 여인들이 식탁으로 초대를 합니다. '우리가 식사 대접할게요. 가서 먹어요.' 먹으면 술이 따라오겠지요. 술을 마셔요.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여기는 우리 신전인데 다른 것 필요 없고 무릎만 한번 꿇어 주시면 됩니다. 절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지요?' 이렇게 하면 그가 삼겹살에 한잔 술 한잔 먹고 기분 떠오르고 호기롭게 이방의 신전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가 처음부터 그냥 우상숭배가 되는 게 아니고, 가던 길을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데도 자기 멋대로 멈춰 서면 그러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멈춰 서고, 그리고 죄 짓고, 우상숭배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겠지요.
죄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그냥 확 다가오는 게 아니고 이렇게 단계적으로 차츰차츰차츰차츰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쉬어야 되겠다.' 목회자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이제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쉬겠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억겁의 시간 아래에서 보면 우리 인생의 100년이라는 시간은 점 하나나 찍힐까요? 거기에,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에 점 하나 찍힐 시간입니까? 티끌 만도 못한 시간 아닙니까? 이 티끌 만도 못한 시간에 쉬면 얼마나 쉬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야지요.
바울이 말했잖아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 저를 써 주십시오, 어떻게든 저를 써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써주시면 제가 일을 하다가 망가져서 죽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이렇게 쉬어서 마치려고, 좀 쉬어서, 그렇게 쉬다가 구름 기둥이 멈추라고 하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멈추다가 음행하겠지요. 이방의 신전에서 엎드려 절하겠지요. 그렇게 패가망신한 인생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시는 때, 이 땅에서 생명을 거두어 가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됐다'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마지막 숨 쉬고 그리고 졸업하면 됩니다. 그전까지는 어쨌든 '하나님이 저를 써 주십시오, 제가 쓰임 받겠습니다' 전도지를 돌리든지, 찬양하든지, 예배를 섬기든지, 그 어떤 것이라도 이 몸뚱아리로 할 수 있는 것 하게 해주십시오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불현듯 우리 인생에 올라탑니다. 순식간입니다.
3-4. 다윗의 예
똑같은 예가 다윗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를 보시면, 다윗은 십계명을 몇 가지나 어겼습니까? 간음, 살인, 이웃의 아내를 탐낸 것. 열 개 중에 세 개를 했지요. 야구에서 3할 타자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 다윗은 십계명 열 개 중에 한 번에 세 계명을 어기면서 30%, 야구로 치면 3할 타자입니다. 대단한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범죄가 아주 갑작스럽게 오지 않았습니다. 보시면 사무엘하 11장 1절입니다.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함께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미처 읽지 않아요.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면' 왕들이 가야지요.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됐는데 자기가 뭐라고 한 것입니까? 아마 다윗 생각에는 이제 통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통일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까 '이제 나는 이 정도 전쟁 쯤에는 안 가도 되겠지, 요압이 하라' 하고 요압을 보낸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부터, 자기가 가야 될 때 안 가니까, 왕궁에 머물러 있으니까, 사탄이 그때를 틈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아직까지 호흡을 주셔서 할 일을 많이 남겨두셨는데, 왕들이 가서 그 전쟁에 참여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선한 목자가 되어서 백성들 앞에 서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왕이 왕궁에서 거닐며 낮잠 자고 어슬렁거리고 저녁에 옥상이나 산책하고 있으니까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보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죄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전까지 다윗의 위치는 누군가를 보낼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보낼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두 신발로 많이 쳤습니다. 보낼 위치가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보낼 위치가 되었을 때, 그다음을 봅시다.
죄의 발전이 있는데요. 사무엘하 11장 3-4절에 보니까, 역시 성경이 이렇게 말하지요.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또 보냈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풀어 쓸 수 있을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다윗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4절 보십시오.
"아침에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라"
요압에게 편지 써서 보냈습니다. 우리아를 제일 앞에 내보내어서 맞아 죽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언제 더 조심해야 될까요? 권력이 생길 때, 돈이 생길 때, 누군가를 시킬 수 있을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내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오고 가고, '예' 하고 순종할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는 태만과 교만이 우리에게 한꺼번에 찾아옵니다. 사탄은 이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항상 몸을 게으르게 해서는 죄가 쉽게 찾아옵니다. 몸을 자꾸 쓰고, 내 몸을 움직이고, 뭐라도 하려고 하고, 자꾸 걸으려고 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자기 손으로 뭔가를 짓고, 허리도 쭉 피고,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몸뚱아리가 녹슬지 않도록, 그래야 죄 짓지 않습니다.
죄는 갑작스럽게 오지 않습니다. 내가 사람을 시킬 수 있을 때 그때 죄가 순식간에 태만이라는 놈으로 찾아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5. 다윗의 심판
다윗의 죄의 결과와 심판을 보십시오.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받았느냐. 사무엘하 12장 10절에 보니까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으니 이제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서운 저주입니다. 12장 11절에 보니까 중간에 보시면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들을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후궁을 빼앗겨서 백주에 동침하는 비극을 맛보았습니다. 12장 14절에 보니까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그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라"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아이가 죽었지요. 이런 큰 벌을 받았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죄 다루심
4-1. 기다리고 참으심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죄 지으면 즉결심판 하십니까? 하나님은 잘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보십시오. 첫 번째, 기다리고 참으십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보니까요.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노하기를 더디하고'라는 말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요. 그런데 성경은 '언제까지'라는 기한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데 세 번만 참아줄지, 네 번만 참아줄지, 다섯 번째 때리실지 모릅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너무 급해서 '이놈은 한 번만 참고 두 번째 그냥 딱 때리겠다'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것을, 언제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이 날아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4-2. 경고하심
그런데 하나님이 반드시 그전에 경고하십니다. 보시면 예레미야 20장 4절에 보니까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경고를 확정적인 예언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모든 예언은 '돌이키면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고를 듣고 돌이키냐? 그래, 그러면 이거 없던 걸로 해 주마.'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 성에 경고하셨잖아요.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이라' 하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가서 막 선포했었지요. 왕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다 회개했잖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말씀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했으니까 없던 걸로 다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경고하시나요? 하나님이 설교 들을 때 말씀이 뜨끔뜨끔하게 찔림으로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또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나에게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 가정에 어떤 사건들로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하는 것으로 나에게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캐치하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안테나가 좀 제대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인지 아닌지 압니다. 이 경고를 다 무시하고 지나가고 나중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돌아 생각해 보면 '아 그때 그것이 경고였구나, 그때 그것이 나에게 깨달으라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었구나' 예언보다 후회가 되고 말겠지요. 그때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알아듣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4-3. 심판하심
경고가 계속해서 날아가는데 알아듣지 못하면 그다음 하나님의 카드는 심판입니다. 열왕기하 25장 6-8절에 보면 남유다의 멸망을 말합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서 바벨론으로 끌고 가는 장면, 그리고 남유다의 모든 성이 다 불타고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무엇보다도 성전이 도둑맞는 것입니다. 성전의 모든 그릇들이 다 도둑맞잖아요. 성전도 다 불타버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경고하셨습니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백 년 동안 경고하셨습니다. 수백 년 동안 참고, 견고하고, 인내하고, 또 참고, 또 견디고. 그런데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기다렸는데 돌이키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결국에는 심판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열왕기하 25장 13, 16절 보면요.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바벨론으로 다 빼앗겨 갔습니다. 전부 다요. 얼마나 비참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눈앞에서 도둑맞다니.
4-4. 용서하심
그런데 이렇게 다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그다음 회개하면 어떻게 해 주십니까?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속도 없지요. 하나님이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호세아 6장 1-2절 보면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가자'는 말은 회개하자는 말이지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부모 같아서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용서를 구하고 잘못했다면 자식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품어 줘야지요. 우리 하나님은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크고 위대하셔서 반드시, 분명히 용서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에서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어떤 하나님인지, 어떤 여호와인지 알아야 됩니다. 돌이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돌이키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돌이키면 하나님이 용서하고 받아주십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야 네가 어떤 인간인데 내가 너를 용서하냐' 이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니까, 입장 바꿔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이키면 용서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5. 죄를 짓지 않는 방법
5-1. 피하고 버리라
그렇다면 죄를 짓고 나서 돌이키는 게 나을까요, 아예 안 짓는 게 나을까요? 안 짓는 게 낫겠지요. 그렇지요. 예, 짓고 나서 돌이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이것은 좀 비겁한 방법인데요, 사실 비겁하지 않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잖아요. 36계 뭡니까? 줄행랑이잖아요. 안 되면 도망가는 게 상책입니다. 뭘 거기서 버티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장사라고 사탄하고 맞짱 떠서 이길 힘이 없으면 어떡해요? 도망가야지요. 피해야지요.
보십시오. 창세기 39장 10절에 보니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여인의 유혹이 한 번으로 그치면 좋았을 텐데 사탄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작심하고 보디발의 아내가 한 번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멋진 말로 요셉이 물리쳤잖아요. '내 주인이 나에게 모든 걸 맡기셨으나 당신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큰 죄를 범하여 내 주인과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면서 멋진 말로 물리쳤습니다. 한 번 이겼잖아요. 그러면 사탄이 멀리 도망가야 되는데 그다음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이것은 사람 죽이는 것 아닙니까? 날마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듣지 아니하며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피했다는 말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것을 어설프게 한 번 싸워서 이겨 보겠다고 있다가는 백 번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2-2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목회서신입니다. 바울이 목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젊은 목회자였으니까요.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청년의 정욕을 맞서 싸워라'가 아니라 어떻게 합니까? '피하라' 피해야 합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공동체 백성과 함께 따르라 했잖아요. 피하고 따라가라. 그래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우리는 피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번 해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덤볐다가는 백 번 필패할 것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2. 적극적인 신앙생활
둘째, 적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은 지난 시간에 불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할 때 언급했던 것인데, 불교는 비움의 종교라 했잖아요. 자기를 비워내고 참선을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걱정들, 삶의 짐들을 다 비워내는 것이 불교의 수련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채움의 종교입니다. 비우고 채우지 않으면 더 악한 것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우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되고 채워야 되는데,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가 중요하지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기본 생활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보시면 신명기 6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 '다하고 다하고 다하라'라는 말은 소진하다는 뜻입니다. 소진하여 없어질 때까지 힘과 마음과 뜻, 힘과 뜻과 마음을 온전히 다 소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내 힘과 뜻과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는 남아도는 힘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죄에 씁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삽니다.
물질, 하나님 기뻐하시는 데 쓰지 않으면 내가 기뻐하는 데 쓸 것 아닙니까? 나를 위해 쓸 것 아닙니까? 나를 위해 애쓰다 보면 내가 왕이 되니까 그것은 죄 짓는 데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시간을 쓰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가면 그 시간으로 죄의 종로 달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과 시간과 뜻과 정열을 다 써야 합니다. 그래야 죄 짓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지요. 제자가 되면, 누가복음 5장 10-11절에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버릴 때 '요것은 남기고 요것은 나중에 와서 찾아가고 요것은 땅에 묻었다가 나중에 물려주고' 이래 가지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마음 한 켠에 다른 것들을 숨겨 두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100%를 예수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죄 짓지 않습니다.
5-3. 자기를 잘 알아야
그리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내가 어디에 약한가.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약점 잘 아시지요. 자기 약점. 그런데 그 약점은 나만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내 약점을 잘 아시고, 무엇보다도 사탄이 내 약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넘어진 죄에 또 넘어집니다.
'나는 이것 한번 넘어졌기 때문에, 이 문제 한 번 넘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다음에는 면역이 생겼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많이 쓸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넘어지지요. 또 넘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 바보 같은 게' 이렇게 욕을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욕하지만 나도 똑같습니다. 똑같은 죄에 또 넘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사사기 14장 1절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삼손의 약점은 눈입니다. 눈,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삼손의 약점입니다. 14장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 여자 때문에 한번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는데, 16장 1절에 가니까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또 봤습니다. 그러면 이전에 보고 문제가 생겼으면 자기 문제가 눈에 문제, 안목의 정욕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찌 되었건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나는 눈이 문제입니다. 이제 앞으로 눈을, 내가 내 손으로 뽑을 수는 없고 안대를 하고 다니겠다' 하든지 아니면 기도 부탁을 하든지 뭐 그렇게 특단의 조치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기 눈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사기 16장 21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를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마가복음 9장 47절에 답이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에 비춰보면 하나님이 삼손을 사랑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셨지요. 사랑하셨으니까 눈을 뽑아 버렸지요. 자기 눈을 관리를 못하니까.
그래서 우리가 내 약점이 있으면 그 약점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아시고, 사탄도 압니다. 사탄이 지독하게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 약점을 가지고 이렇게 눈을 뽑아 버리는 특단의 조치를 하기 전에, 내가 고쳐야 합니다. 내가 내 약점을 잘 아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주 사단이 납니다. 문제가 심각하게 생깁니다.
마치며
첫 번째 과제, 죄에 대해서 배운 내용을 잘 정리해서 말해 봅시다. 제가 항상 교리학교 끝날 때마다 누구 사람을 세워서라도 전도하게 하라 했잖아요. 이 죄는 좀 친한 사람 아니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속인 이야기니까요. 듣다가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아주 친한 사람한테 '죄는 이런 것이다, 죄는 이렇게 들어온다, 원죄는 이렇다, 너 눈 관리 안 하면 뽑아버린다' 이런 이야기까지 아주 친한 사람끼리 그렇게 잘 나누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과제, 당신이 지은 치명적인 죄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서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혼자 적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남편한테도 부인한테도 보여 주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혼자 잘 적어 보십시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잘 생각해 보시고, 우리 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인지 잘 생각해 보시고, 죄 짓지 않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해서 죄 짓고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또 죄 짓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원죄가 우리 인생에게 들어왔습니다. 말씀이 혼잡해졌고 혼탁해졌으며, 교만의 죄가 우리 인생에게 들어와서 그 죄로 수많은 죄를 양산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중보의 주님을 기억하며 죄에서 떠나기를 원합니다. 죄를 피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며 우리의 연약한 것을 깨닫고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죄에서 자유한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이 온전히 승리할 그날을 기대하며 살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