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교 12강 -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들어가며
오늘은 교리학교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16번 강의를 계획하고 시작했는데 오늘까지 하면 이제 네 번 남았습니다. 교리학교가 이렇게 지나오는 동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약간 어려운 것도 있고 이해가 조금 안 되는 것도 있었을 텐데, 계속 읽어 보시고 내 입으로 계속 되뇌이고 옆 사람에게 말씀을 자꾸 나누다 보면 내 것이 됩니다. 교리는 신앙의 기초와 틀과 같아서 이 틀과 기초를 잘 갖추어 놓으면 이 틀 안에서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래야 신앙이 견고해지고 튼튼해집니다.
오늘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교재 66쪽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부터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득력 있는 세상의 철학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또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만큼 세상적인 것들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자아를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믿음을 보려 합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믿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합니까? 믿음과 구원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 따로 믿음 따로가 아니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때문에 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내 믿음이 어떤 검증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지금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아니면 가짜 믿음인가, 진짜라고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한번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믿음을 검증하는 건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믿음을 굉장히 잘 판단하고 검증합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저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믿음이 좀 모자라고, 옛날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지금은 믿음이 떨어졌고..." 다른 사람 믿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잘 관리하고, 자기 믿음을 말씀에 잘 비추어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시간에 내 믿음을 하나님 말씀에 잘 달아보고 비춰보고, 혹시 내 믿음이 부족한 건 아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가지치기가 필요할 때가 됐는지를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가짜 믿음
믿음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먼저 가짜 믿음부터 보겠습니다.
1-1. 자신을 믿는 것
로마서 16장 17-18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분쟁이나 거침을 일으키는 자들, 그런데 그런 자들은 18절에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합니까?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며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는지 자신의 배만 섬기는지 어떻게 분별할까요? 교회 영적 지도자가 있는데, 저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지 자신의 배를 위하는지 어떻게 분별할까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이마에 "나는 내 배만 섬깁니다"라고 써서 다니면 좋을 텐데, 굉장히 교활하고 굉장히 교묘하게 속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이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조건 믿어주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 분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걸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어야 내가 따르고 있는 지도자가 가짜 지도자인지 진짜 지도자인지, 그리고 저분이 자신의 배를 위하는 사람인지 진실로 하나님만 위하는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보면 "너희에게 말씀을 일러 주던 자들을 기억하여 보고 끝까지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주의해서 보면 사람이 변하는 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심을 가지고 중심 그리고 끝까지 이어져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처음에는 아주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이 믿음이, 이 사람의 삶이 완전히 변질되는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도 분별해 내기 위해서는 내가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내 믿음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또 자신을 믿는 사람 이야기가 또 하나 나오는데,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이 가득 찬 창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해 소출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걸 헐고 다시 곳간을 지으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부유함과 자신의 명성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데, 지금 이 어리석은 부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를 주셨습니다. 부유함을 주셨으면 이 부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려고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도구로 살까?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주셨으면 이걸 잘 흘려 보내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려고 하신 일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지식과 지혜를 많이 주셨으면, 나는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된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지식을 흘려보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를 그저 하나님께 재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런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가 아닌데 자꾸 돈만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인생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내가 가진 재능을 나를 통해서 흘려보내는 인생을 살아야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짜 믿음을 가진, 자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1-2. 우상을 믿는 것
두 번째로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을 믿습니다. 하나님 놔두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 왕이 나오는데,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여인이 있었느냐, 3절에 보면 후궁이 700이요 첩이 300이니 합이 몇 명입니까? 천 명입니다. 이름도 다 모를 것 같은데, 아이가 열 명만 돼도 이름이 헷갈리는데 이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두가 자기 본 나라에서 섬기던 우상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나중에 우상숭배를 합니다. 7절에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도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습니다." 우상을 숭배했던 솔로몬입니다.
왜 우상을 믿을까요? 왜 우상을 섬길까요? 우상이라는 것이 뭐 별다른 게 우상이 아니고, 내 마음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제1순위로 있으면 그게 우상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이 말합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어요. 그런데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원래 5명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까지 하면 6명이잖아요. 그런데 참된 남편은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예수님만이 정말 채워주실 수 있는 세상의 참된 사랑을 갈망하면서 살아갔던 이 여인의 불쌍함을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아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내 남편으로 삼고 최우선 순위로, 최고 위치로 놓고 살아가는 삶, 이게 바로 우상이지 뭐 다른 것이 우상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우상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가짜 믿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도 가짜 믿음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1-3.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세 번째는 가짜 믿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취사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오죠. "복 주고 복 주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믿고 싶잖아요. 그런 건 무척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뭐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고" 이런 건 무척 믿고 싶습니다. 그걸 손바닥에도 쓰고 핸드폰에도 쓰고 집 현관에도 들어가고 나가며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다 씁니다.
그런데 "주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이건 별로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건 집에 써놓고 있는 분을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요. 심방을 그렇게 다녔는데, "고난 받으라, 주 예수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불 찬 자요 장차 고초를 당하리라" 이런 건 하나도 써 넣지 않았습니다. 두렵거든요. 고난이 오는 거, 누구나 다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는 취사 선택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광과 십자가 중에, 고난과 영광 중에 영광만 취하고 고난은 버리고 십자가는 버리고 부활의 영광만 취하려고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반쪽짜리 믿음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하셔야 될 것은 고난과 영광은 하나의 세트라는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 양면이 있어야 동전이잖아요. 같이 오는 것이지 절대 따로 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이 어떤 말일까요? 로마서 8장 16-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자녀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되죠.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 그게 자녀입니까? 자식이 아니죠.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아야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빼고 영광만 받으려고 하면 가짜 믿음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리하면 가짜 믿음은 첫째 자기를 믿는 것, 즉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싫어하는 것, 둘째 우상을 숭배하는 것, 셋째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이것들은 다 가짜 믿음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해당 사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하나도 없다고 자신하십니까? 조금 있죠. 그렇죠. 조금 있죠.
그러면 이 믿음을 진짜 믿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태워 버려야 됩니다. 이 불순물을 정죄하고 태워야 됩니다. 그러려면 고통이 따르고, 그걸 버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짜 믿음에서 진짜 믿음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훈련의 현장이 바로 교회이고, 훈련의 현장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그 훈련을 빨리 받고 빨리 졸업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훈련받으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됐는데도 계속 훈련 받았던 야곱이 있잖아요. 야곱이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내 나그네 길이 험악하였다"고 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요. 그가 빨리 놓아 버렸으면, 빨리 손을 털어 버렸으면 그 정도로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계속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험악한 세월을 살았거든요.
우리 믿음의 불순물을 빨리 놓고 훈련 잘 받아서, 훈련 받고 나면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쓰임 받잖아요.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이유는 써먹기 위해서 훈련하시는데, 써먹으려고 훈련하는데 말을 안 들으면 계속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냥 계속 피곤하잖아요. 우리도 하나님도 피곤하고 우리도 피곤하고, 그래서 훈련을 빨리 졸업하시고 이제 쓰임받는 백성들이 되면 좋습니다.
2. 진짜 믿음
이제 진짜 믿음을 봅시다. 진짜 믿음의 제목을 한번 보십시오. 진짜 믿음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사람이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그다음에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해야 되겠죠. 따라가면 거하게 되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해서 주님과 함께 훈련 받으면 나중에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말씀을 따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다가 변화된 삶을 삽니다. 이것을 머릿속에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2-1. 말씀을 믿는 것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믿는 것이 무엇이냐, 창세기 12장 4절에 우리는 믿음의 조상을 누구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왜 믿음의 조상이라 하느냐? 창세기 12장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우상의 형상을 따라간 것이 아니고 말씀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분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수학 선생님이 좋으면 수학이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수학적인 재능이 없는데도요. 국어 선생님이 좋으면 국어를 조금 더 열심히 해서 100점 맞습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나와요. 왜 이렇게 초인적인 능력이 나오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런 류의 믿음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그분을 따라다니는 믿음은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게 됩니다. 사람은 어느 한 부분에서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거나 마찰이 생기거나 그분이 넘어질 수 있거든요. 그러면 나도 덩달아 넘어집니다. 그 선생님을 3년 동안 짝사랑했는데, 이 선생님이 나보다 더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수학 성적이 100점에서 갑자기 50점이 되잖아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우리 학창 시절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사람 따라다니는 믿음에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믿음의 관계들이 얽히고 설켜 있고 목회자도 있지만, 절대로 사람 따라가지 마시고 말씀 따라가십시오. 절대로 말씀 따라가야 됩니다.
오늘 여기 아브라함 뒤에 나오는 사람이 있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은 누구와 함께 갔습니까?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양과 소의 목초 문제로 관계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버렸잖아요. 잘 아시잖아요.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사람을 따라가니까 롯은 중간에서 실종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가서 믿음을 완주했습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무리 좋은 사람이 있어도 절대로 사람 따라가지 마십시오. 말씀만 따라가면 그 사람이 좀 실망스러워도 아쉽기는 해도 그냥 조금 가슴 아프다가 끝납니다. 그런데 오로지 사람 따라가면 그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너무너무 힘듭니다.
그리고 말씀 따라가니까, 창세기 15장 4-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이르시니라" 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을 따라가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겠죠. 그래서 그다음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말씀과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분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갔다는 건 하나님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 7-9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을 증거하지 못한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포악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조롱거리가 됨이니이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선포해야 됐습니다. "이 나라가 멸망할 것입니다." 아니, 그 선포를 듣는 왕이나 고관대작들이나 백성들이 그걸 좋아하겠습니까?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데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고문도 하고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고 때로는 불러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너무 수치와 조롱과 모욕거리가 되니까 이제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다짐을 또 다짐을 해도 마음속에서 열정이 솟아나오는 걸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9절에 이렇게 말하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말씀을 따라가면 이런 열정이 생깁니다.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그 말씀이 나를 자꾸 불같게 만들어서 말씀을 증거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도 오늘 여기 예레미야처럼 되어야 합니다.
2-2.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이렇게 말씀을 따라가면 그다음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가복음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함께 있게 함입니다. 제가 베드로 설교할 때 말씀드렸죠.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은 함께 있자,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거든요. 함께 있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지만 주님은 우리가 부담스러워하건 말건 계속 같이 있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는 포기하고 같이 있어야 됩니다. 자꾸 도망 다녀도 자꾸 따라오시는데, 아무리 도망 다녀도 함께 있자고 따라오시는데 이제는 포기하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같이 삽시다" 하고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근데 예수님과 같이 살려면 뭘 내려놓아야 됩니까? 예수님께 내 삶을 보여 줘야 되잖아요. 내 삶을 보여 주면 부끄럽잖아요. 사실은 내 삶을 보여 주려면, 식구들끼리는 속옷바람으로 있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죠. 손님이 오면 속옷바람으로 있으면 부끄럽잖아요. 그럴 수 없잖아요. 예수님을 손님으로 여기면 안 되고 식구로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7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같이 살자는 말입니다. 그냥 같이 사는데 허물이 있습니까? 부끄러울 것이 있습니까? 죄악도 드러내고 더러운 성질도 다 드러내고 부끄러운 모습도 다 토해내고 그냥 그렇게 어울려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너무 내외하지 마시고 그래서 주님께 내 속마음도 털어놓고 함께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그 안에서 변화가 됩니다. 같이 다 드러내면 때로는 주님이 눈꼴셔서 못 볼 정도가 되면 책망하실 거 아닙니까? "너 그러면 안 된다"고 혼내실 거 아닙니까? 그리고 때로는 주님이 감싸주시거나, 아니에요, 같은 식구니까 감싸주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그렇게 주와 함께 거하면서 나는 변화받습니다.
2-3. 변화된 삶을 사는 것
그래서 우리는 말씀 따라가서 주와 함께 거하면 그다음 변화가 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 아까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시인한다는 말이 나오죠.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시인한다는 말을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요즘은 세례 받을 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하면 "예 고백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기로 결단하십니까?" "네 결단합니다." 이렇게 쉽게 말하죠.
그런데 이 당시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에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형의 제목이 뭡니까? 외도라고 아십니까? 예수님은 정치범입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의 명패입니다. 그 당시 왕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로마 황제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 했잖아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딱 한마디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것만 물었습니다. 그것만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거든요. 빌라도가 그것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방금 말하였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 예수를 따르는 사람도 같이 예수와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같은 당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여기 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들어 있잖아요. 예수가 왕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잡히면 죽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의 십자가형처럼 똑같이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또 로마의 형벌에 보면, 이렇게 해서 정치범으로 잡히면 시체 있잖아요, 시체와 얼굴을 이렇게 마주 대고 꽁꽁 묶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죽은 시체에서는 체액도 나오고 벌레도 나오고 쥐가 나와서 파먹기도 하고 새가 와서 쪼아 먹기도 하잖아요. 그러면 시체와 같이 밧줄로 꽁꽁 묶어 두면 산 채로 같이 죽어갑니다. 그런 형벌을 로마에서 줬거든요. 굉장히 무서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그냥 오늘 우리가 편안하게 앉아 가지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구원 얻는 진짜 믿음은 믿음이 행함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믿고 행하면 하나님이 아시겠지, 행하면 나중에, 이게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해서 내가 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내가 잡혀서 시체와 함께 꽁꽁 묶여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기필코 시인해서 그리스도를 구주라 고백하겠다 결단하고 말하는 것, 여기까지가 이것이 참된 믿음, 진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제 좀 이해가 되죠. 왜 몸을 드리라고 하는지. 바울이 여기 "몸을 드리라"고 하는 것, 그냥 우리가 오늘 교회 와서 몸에 땀을 좀 흘리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그 정도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요. 죽음을 각오, 굉장히 도전적이고 굉장히 무서운 말씀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믿음과 행함"이라고 같이 병렬해 놓았거든요. 믿음과 행함,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고 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지금 여기 야고보서 2장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여기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얼굴을 맞대고 밥도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살았던 예수님의 친형제입니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권위가 있겠죠.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평소 사고 사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책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러면 믿음 안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이 행함을 전제로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행함과 믿음을 분리시키는데, 그러면 그건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서 "그냥 너는 믿음이 있으니까 행하면 나중에 해도 돼, 너는 믿기만 하면 돼, 일단 믿고 행하면 나중에 해라, 환경이 되면, 시간이 되면, 나중에 그때가 되면, 여러 가지 여건이 무르익으면 그때 해라" 이렇게 쏙 분리시켜 놓거든요.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는 것, 죽은 믿음을 만드는 것,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절대 분리될 수 없고 원래 하나였습니다. 원래부터 믿는 순간 당연 행함이 나가죠. 이건 마치 뭐가 되냐 하면 내 입에 음식이 들어오면 동시에 맛을 느끼잖아요. 음식이 오늘 들어왔는데 내일 와서 "아 그거 참 달았어"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내가 오늘 음식 맛을 보면 지금 이 순간 동시에 맛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동시에 함께 행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 이 말 자체가 이미 틀린 말입니다. 그냥 믿음입니다. 그냥 믿음은 당연히 입으로 시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걸 끊임없이 분리시키려 합니다.
우리는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서 공부하는 건 좋아합니다. 우리가 지금 학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기도학교, 예배학교, 교리학교, 옛날에 못 다닌 학교 지금 열심히 다니고 있잖아요. 학교 열심히 지금 다니고 있는데, 학교만 열심히 다닌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학교 다녀서 공부를 했으면 써먹어야 되잖아요. 학교 다니고 배우고 깨달았으면 자꾸 가져다가 써먹어야 됩니다. 써먹고, 그냥 학교는 학교, 써먹는 건 따로 이러면 안 되고, 같이 배우고 써먹고 행하고, 그게 참된 믿음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도 있습니다. 왜 믿음이 크고 작은 게 있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때 이 여자는 누구냐 하면, 마태복음 15장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되어 있고요, 마가복음 7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자녀에게 줄 떡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개들이 먹습니다." 그걸로도 전 족합니다, 그랬습니다. 자기 자신을 개라고 인정해 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큰 믿음이라고 한 것, 예수님이 그랬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은, 진짜 큰 믿음은 자기의 자아가 하나도 없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예수님 앞에,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내세울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돈이 많거든, 내가 세상에서 학식이 높거든, 내가 세상에서 어떤 권력을 가졌거든, 내가 옛날에 뭐 회사의 중역이었거든, 거기에 뭐가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받아 먹겠다는, 개가 되는 자세로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그런 자세로 살아야죠. 그게 큰 믿음입니다.
이게 반비례하거든요.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믿음은 커지고, 나를 세우면 세울수록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자아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자아를 부수고 낮추면 우리 주님 앞에 "아 큰 믿음을 가졌구나" 이렇게 인정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앞에 와서도 자꾸만 자기 가슴에 있는 명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주님이 그러실 것입니다. "그거 가져서 어쩌라고? 네가 그런 명함 가지고 옛날에 어떻게 살았건 그건 지금 내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옛날에 교회 다닐 때 그런 노래 불렀잖아요.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돈으로 지식으로 되게 합니까? 믿음으로 가는 것이죠. 거듭나야 가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30절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렇게 또 믿음이 작다고 하셨습니다. 왜 믿음이 작습니까? 먹고 살 걱정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 걱정 때문에 피가 마르는 사람들, 그런 걱정하지 말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들풀도 입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먹이시기 때문에 너희들 먹고 사는 건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건 염려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우리 주님이 고마운 건요, "믿음이 없는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이 작다" 해주시니까 작아도 있는 건 있는 것이잖아요. 아예 없다고 하면 우리는 좌절할 것인데, 믿음이 작다고 하시니까 키워가면 되니까요.
야고보서 2장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까 말씀드렸죠. 믿음과 행함은 절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그 안에 행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트입니다.
질문입니다.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가짜 믿음에서 진짜 믿음으로 옮겨가는 것은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십니다. 어떻게? 훈련시킨다 그랬잖아요.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불순물을 빼도록 진짜 믿음을 가지도록 훈련시킵니다.
훈련인 줄 알고 훈련 잘 받아야 됩니다. 훈련에는 어떤 훈련이 있습니까? 사람을 통한 훈련이 있죠. 그쵸. 그래서 그런 사람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내 주변은 왜 이런 사람들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훈련받을 게 많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꺼번에 이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수없이 이상한 사람들만 붙여가지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깎이고 깎이고 또 깎이고 연단되어서 이제는 완전히 둥글둥글해지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훈련시켜 가십니다.
또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만 만나는지 모르겠다. 산을 넘으니까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건너니까 강이 나오고" 그러면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켜서 믿음의 순수함을 가지고 진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훈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훈련을 피해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도 안 됩니다. 정면돌파하셔야 빨리 끝납니다.
3. 믿음의 정의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길지만 핵심은 딱 한 가지입니다.
3-1.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의 실상
먼저 믿음의 정의를 보시면, 뭐든지 정의가 중요합니다. 정의가요, 수학 공부를 잘하려면 정의를 알아야 되고, 삼각형의 정의를 알아야 삼각형 문제를 잘 풀 수 있습니다. 정의도 모르고 대뜸 문제만 풀면 나중에 정의를 묻는 문제가 나오면 다 틀립니다. 믿음도 정의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생략된 주어가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 누가 바랍니까? 여기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이 말이 됩니까? 내가 바라는 것들은 신념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념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강한 사람을 분리하셔야 됩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굉장히 독한 사람입니다. 신념 강한 사람 많이 보셨죠. 교회 안에서도 이 믿음과 신념을 혼동하면 그런 분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꺾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자기를 잘 꺾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몰랐는데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내가 틀렸더군요. 아 하나님 말씀을 비추어 보니까 제가 그때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아주 유연한 사람이 됩니다. 말씀 앞에서요.
근데 신념이 강하면 죽어도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심장에 내 눈에 흙이 들어와 봐라 나는 절대 변하지 않겠다" 이건 신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들이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바라시는 것,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무엇을 바라실까? 내가 어떤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들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게 믿음입니다. 그 말입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꺼꾸로 오해해서, 잘못 이해해서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이렇게 오해하면 그건 신념이죠. 신념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 거기에 내가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 각자를 통해서 바라시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걸 찾으셔야 됩니다. 기도하시고 물어보셔야 됩니다.
"하나님, 짧게는요, 짧게는 하나님, 새해가 다가오는데 새해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걸 제가 믿음으로 실상으로 이루어 보겠습니다." 이제 한 달 정도 남았잖아요. 작정하고 기도해 보세요. 그럼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너 일터에서는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게 이거고, 교회에서는 내가 네게 바라는 게 또 이거다" 이렇게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하시면 됩니다. 그게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봐야 되거든요.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내 도구로 삼아서 내 욕심을 채우는 걸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죠. "주여 주시옵소서, 주여 주시옵소서" 맨날 그렇게 하죠.
하나님이 다 주셨는데 자꾸 달라고 하니까, 다 주셨는데 이제 주고 줄 것도 없는데 탈탈 털어서 다 가져가 놓았잖아, 또 달라 하고 또 달라 하니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욕심에 진절머리가 난다" 그러실 것 아닙니까? 이제는 준 거 가지고 좀 살아라, 너도 내가 너에게 달란트를 줬으니까 네 것 좀 쓰고 살아라, 제발 너도 좀 내 도구가 되어서 배풀고 살아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자꾸 달라고 합니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지 말고, 이미 받은 것 도구가 되어서 쓰십시오. 사용하시고 실상에 이루어가십시오.
그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지금은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도구가 되어서 열심히 살아가고 실상이 되도록 노력하면 보입니다.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 증거가 나타나면 손에 잡히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우리는 그 증거를 보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럼 내가 뭐가 됩니까? 증인이 되죠. 그 증인으로서 말하는 모든 말은 간증이 됩니다. 증거, 증인, 간증, 이 전부 다 하나의 흐름 안에 있는 것이죠.
이게 정의입니다. 이 정의를 오해하면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 아벨이니 뭐 에녹이니 노아니 아브라함, 사라, 모세 이런 사람들의 믿음이 전부 다 오해되거든요. 이 정의를 제대로 하셔야 됩니다.
3-2. 창조를 믿는 것
가장 중요한 믿음은 뭐냐?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 "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안다. 우리는 언제 "안다"라고 말합니까? 배워봤죠. 공부를 해봤죠. 배우고 깨닫고, 그리고 어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는 만나서 그 사람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고 이름도 물어보고 차도 한잔 마시고 밥도 먹고, 그러면 안다고 말하잖아요. "안다"는 말은 경험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죠. 배웠거나 만났거나, "안다"는 건 반드시 경험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걸 봤습니까? 창조 시에, 이 자리에 우리 중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그때 있었던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도 하와도 창조 이후에 나타난 사람들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는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밖에, 삼위일체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걸 자연 과학적 지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걸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들은 많지만, 가설들은 많지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다? "믿음으로" 그래서 전제가 뭡니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과 앎, 이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앎은 경험을 전제로 하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창조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성경 창세기 1장 1절을 넘어가느냐 넘어가지 않느냐가 좌우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선언입니다. 선언.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과학책으로 만약 우리가 받아들였다면 아마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증명을 했을 것입니다. 증명, 가설을 세우고 이 가설에 따른 증명을 하고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 다 생략하고 1장 1절이 뭡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거든요.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다음 성경을 읽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는 믿음의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설명해도 설명할 수 없고,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고, 이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그다음에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가지고 설명하실 생각도 없었고 설명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믿음의 영역으로 던져 두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좀 배웠다 하시는 분들, 또 많이 들었다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스티븐 호킹은 대표적인 과학적 무신론자입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기는 하지만 과학적 무신론자입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 보니 하나님의 존재는 허상이다" 이렇게 선언하셨거든요. 잘 아시는 분 리처드 도킨스 같은 분도 과학적 무신론자들입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논증하는 결과는 "하나님은 없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브리서 11장 3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1장 1절을 믿음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그다음은 한 자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이 믿음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셔야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 믿음을 받으셨고, 이 때문에 우리는 그런 거 별로 의심하지 않고 "아 믿어지는 거야"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다 넘어가서 이것만 알면 뒤에 쭉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히브리서 11장이 끝났습니다.
마치며
오늘이 시대의 과학적 무신론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알아보자는 건 지금 이 시간에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연구 과제로 남겨 놓겠다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제가 이걸 가지고 공부를 한번 할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이 말한 것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고 창조 신학을 세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이것도 우리 젊은 세대들을 위해서는 아주 필요한 과제입니다.
오늘 믿음에 대해서 배운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뭘 배웠습니까? 가짜 믿음, 진짜 믿음,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의 정의, 창조 신학에 대한 믿음, 이것을 배웠죠. 이것을 머릿속에 딱 놓고 정리하시고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과제입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더 나은 믿음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깊이 생각하고 반성도 하시고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로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이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믿음을 가짜 믿음으로 흘려 보내지 않게 해주시고, 진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변화되어서 입으로 시인하는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내가 바라는 신념을 믿음이라고 착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온전히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라 말씀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 된 삶을 살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닫고 배우고 회개한 것들 온전히 기억하게 해 주시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