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 전체녹취

교리학교 13강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들어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지금도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비법을 배우려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려 합니다. 전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니, 눈이 번쩍 뜨이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시면 고민 없이 결정할 수 있을 텐데, 가만히 계시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아무나 붙잡고 말하고 다니면 신비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나 한 것인가요?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옛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랬고, 이사야에게도 그랬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많은 선지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이때만 잘 만났으면, 지금 이때 태어나지 않고 그때 구약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사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확률의 문제로 접근해 보면, 그 옛날 구약시대 고대 근동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 중에 정말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했던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단 몇 사람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고, 그 당시 기록된 문자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혹은 몇몇의 선지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은커녕 뿔난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마음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아마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더 했으면 되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명제입니다.

1-1. 마음이 분주함

마르다와 마리아는 누구네 가족입니까? 나사로의 가족이지요. 예수님이 정말 사랑하셨던 집안이 나사로와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집에 자주 찾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도, 예루살렘에서 내려가실 때도 항상 그 집에 가서 식사하고 말씀 나누고 가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쓰이는 가정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두 자매는 예수님이 오시면 굉장히 좋아했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면 음식 준비한다고 무척 분주하고 바빴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날도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을 보면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했고,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분주한지라"는 말은 마음이 나뉘어졌다는 뜻입니다. 갈래갈래 나뉘어진 것입니다. 몇 갈래로 나누어졌을까요? 두 가지 일을 하면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고, 네 가지 일을 하면 마음이 네 갈래로 나뉘어집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마음이 그냥 하나로 있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전을 부치고, 밥도 하고, 고기도 굽고 이러면 세 갈래로 나뉘어졌겠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는 것 하나만 하니까 마음이 나뉘어질래야 나뉘어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분주하게 다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까 화가 난 것이지요. 지나가다가 째려보고 눈치도 주고, 지나가다가 팔꿈치로 눈치 안 나게 예수님 모르게 머리도 툭툭 치고 그랬을 텐데, 그래도 마리아가 모른 척하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41절에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첫 번째가 나옵니다.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이야기를 듣고 하신 말씀이 여기는 적혀 있지 않은데, 이렇게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분주하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네가 감당할 만한 일까지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는 범위까지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서 한 말씀 하셨는데, "네 동생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발 아래서 말씀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주하게 음식 준비해서 진수성찬을 차려놓는 것이 예수님이 좋으실까요? 아니면 물 한 잔 대접받아도 그저 예수님 발 아래서 주시는 말씀 잘 받아먹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듣고 서로 대화하고 질문하는 이 아이가 이쁠까요? 후자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은 전혀 아니지만, 심방을 가서 보면 심방 가서 말씀 전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기도합시다" 하면 인기척이 납니다. 벌떡 일어나서 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실눈을 뜨고 제가 기도하면서 보면 가서 밥솥 버튼도 누르고 전기 포트도 누르고, 그거 몇 초를 못 기다려서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상합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 거 하나도 안 해주셔도 좋으니까, 반갑지 않으니까, 그냥 물 한 잔, 냉수 한 잔이라도 좋으니까 앉아서 대화하고 말씀 나누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주의 발 아래 앉아 있어야 됩니다. 좋은 편을 택해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수많은 마르다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이 수많은 마르다들이 이제 항의를 하십니다. "목사님, 저도 우아하게 가만히 앉아서 말씀만 듣고 싶습니다. 아, 그렇게 시켜주던가. 교회에서 언제는 저 마르다처럼 일하라고 그래놓고 왜 마리아 좋은 것만 이야기하십니까?"

그렇게 항의를 하십니다. 그러면 사실 목사는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속마음은,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교회 와서 밥 한 끼 안 먹어도 좋으니까, 우리가 식당에 가서 3찬 4찬 5찬 해서 배부르고 풍성하게 밥 안 먹어도 좋으니까, 식당 봉사하시는 분들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은혜 받고 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는 본질적으로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될 것,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권리를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여러 봉사 자리들을 다 권하지 않습니까. 사역 지원서를 나눠드리고 다 지원을 하는데, 권면도 합니다. "이것도 하십시오, 저것도 하십시오." 그런데 스스로 판단을 하셔야 됩니다. 내가 이 사역과 이 봉사를 하는 것이 좋은 편을 택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누가 이야기해도 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이야기해도, 거절하기 힘든 사람이 이야기해도 의연한 결단을 하고 안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 칭찬받는 길입니다. 그래도 다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운행되고 돌아가고 다 움직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좋은 편을 택하는 그 자리가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그토록 원하면서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지고 분주해져서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가 않습니다.

주간에 보면 자세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각 기관 모임을 한꺼번에 하는 주간에 보면, 예배 시간에 이렇게 메모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문자도 넣는 분도 계십니다. 다 보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어디 모여서 모임을 해야 되니까, 끝나고 다 모여야 되니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나뉘어져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1-2. 처소를 더 사랑함

두 번째입니다. 엘리 제사장입니다.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 이야기인데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옛날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요즘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 시대가 악해서 그런 것 같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성경의 단서 하나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추리를 하게 만듭니다. "점점"이라는 말은 엘리가 옛날에는 꽤 잘 보고 들었다는 말입니다. 엘리가 망해서 그렇지, 이 사람이 영안이 어두워져서 그렇지, 옛날에는 꽤 잘 듣고 잘 보던 나름대로 괜찮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점점"이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어두워진 영안, 어두워진 영성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처소가 어딥니까? 성전입니다. 제사장은 성전이 곧 자기 처소고, 성전과 자기가 한 몸이어야 됩니다. 제사장에게 있어서 성전은 곧 내 잠자리요, 성전은 곧 내 삶의 터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절대 꺼뜨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등불을 켜고 관리하는 책임을 레위 지파 제사장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웃긴 것이, 이 제사장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등불을 맡은 책임을 다 도외시하고 자기 처소에서 다 누워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등불을 누가 관리하고 있느냐?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등불을 맡은 책임을 감당하고 성전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이상은 누구에게 나타날까요? 직분이 제사장이라고 해서 엘리에게 나타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은 껍데기입니다. 그게 제사장이든 목사든 장로이든 그건 껍데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세우신 그 자리에 있느냐 떠나 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에게는 점점 이상이 사라지고 눈이 희미해져 버렸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이상을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엘리는 자기 처소를 성전보다 더 사랑해버렸습니다. 그러니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 앞에 자주 나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주 인사하고, 엎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 제가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며 자꾸 낯을 보여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삼 년에 한 번씩 와서, 가끔씩 나타나서, 자기 답답할 때만 와서 이야기하면 하나님도 낯선 것입니다. "얘가 누구더라, 얘가 뉘 집 아들이더라." 하나님은 더 낯선데 어떻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1-3. 여호와께 묻지 않음

세 번째입니다. 사울입니다. 역대상 10장 13절과 14절에 보면 사울이 죽은 이유가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사울의 묘비명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상상한 것입니다. 사울의 묘비에는 사람이 쓴 묘비명이 아마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쓰신 묘비명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그래도 왕이었으니까 얼마나 자기 업적을 묘비명에다가 휘황찬란하게 썼겠습니까? 사울이 죽고 나서 다윗이 애통해 하고 울었습니다. 시도 지어서 헌사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사울을 높이면서 진짜 묘비명을 잘 써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사람이 쓴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너는 이래서 죽은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판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범죄의 이유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

하나님이 그를 죽이신 이유가 이렇게 나온다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묘비명을 이렇게 쓰신다면 우린 얼마나 두렵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을 판단하실 때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단 한 줄로, 단 두 줄로 "이 사람 아무개 누구누구는 하나님께 이런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건 대단한 극찬 아닙니까? 대단한 칭찬 아닙니까? 바로는 요셉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칭하는 한 줄의 말이 있는데, 사울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버렸습니다.

이 말 중에 그가 죽은 이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 이유를 보면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오지요. 마음이 나뉘어지고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두 번째가 여기 엘리 제사장처럼 성전에 자주 출입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 처소, 자기 일터로 마구 헤매고 다니고, 세 번째 여호와께 묻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해당되는 것이 없습니까? 마음이 온전히 말씀 듣는 데 향해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다니는 이 처소나 내 삶의 자리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나에게 우선순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또 사울을 거꾸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항상 문제가 있으면 나와서 묻고 기도합니까?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과 언어를 알아야 되겠지요.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 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직접 계시하셨습니다. 선지자들에게 지금도 직접 계시가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직접 계시는 끝났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신학적인 논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있다, 없다" 이 논쟁을 가지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와 방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2-1.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아들이십니다.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 말씀을 누구의 말씀으로 들어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들었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듣고 그걸로 끝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하고 상관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다른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싶어 합니다. 경우의 수에 따라서 예를 들어 우리가 판단해야 될 때, "하나님, 제가 이 집을 팔까요? 가지고 있을까요? 좀 가지고 있으면 오를까요? 내릴까요?" 이것만 가지고 계속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닐까요? 그만둘까요? 지금 그만두는 게 나을까요? 계속해서 다닐까요?" 청년들은 "하나님, 내가 이 남자하고 사귈까요? 저 남자하고 사귈까요?" 하나님이 그런 거 왜 대답해야 됩니까? 누구랑 사귀든 말든, 집을 가지고 있든 팔든, 왜 대답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은 거기에 대답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가 그 순간 판단하는 선택의 근거대로 판단하면 될 뿐입니다. 선택은 그 당시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내 선택이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선택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을 보면, 롯의 선택은 불신앙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을 입증할 뿐,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참견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수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린 그것을 수용하거나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절에 보니까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까? 선지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누구를 통하여?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종말의 때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그 옛날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옛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오늘날 성경의 구약이 되었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복음서가 되었고, 그 아들을 믿는 사도들의 기록이 오늘날 서신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아들과 아들을 경험한 증인들의 기록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2-2. 성경을 통하여

두 번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읽으시면 안 됩니다. "잠이 안 올 때 읽으면 수면제다"라는 그런 자세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비몽사몽하고 항상 오락가락한 상태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가장 맑은 정신으로,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가장 정결한 마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내가 읽는다"라는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런 느낌으로 읽으셔야 됩니다.

저희가 새벽 기도 때 성경을 한 절씩 교독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왜 소리 내어서 교독하느냐 하면,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귀로 듣고 그러면 한 번 읽는 것이지만 세 번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만 성경을 읽으면 한 번밖에 읽지 않는 것인데, 소리 내어서 성경을 읽으면 세 번의 효과가 있습니다. 눈과 귀와 입이 함께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니까요. 꼭 그렇게 소리 내어 읽어보십시오. 사람 이름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읽다 보면 지명도 꼬이고 어렵고, "내가 한글을 이렇게 못 읽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성경을 읽다 보면 아마 발견하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17절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성경 66권을 말하지요. 이 66권의 모든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감동,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자꾸만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17절에 "온전하게 하며"라고 했는데, "온전"이라는 것은 모자란 것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자기 스스로 좀 "나는 모자란다" 생각하는 분들은 성경을 읽으셔야 됩니다. "나는 뭔가 좀 부족하다" 생각하는 분들은 성경을 읽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남들이 볼 때 "저 사람은 너무 넘친다" 하는 분들도 성경을 읽으셔야 됩니다. 그래야 둥글둥글해지고 온전해집니다. 성경은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을 읽으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스탠바이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2-3. 양심과 성령을 통하여

또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양심과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공부할 때 이 말씀을 드렸는데,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공기청정기나 정수기의 1차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2차 필터 혹은 3차 필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심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 가다가 누군가가 쓰러져 있으면 "쓰러져 있는가 보다"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내가 사회에 해악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누군가의 돈을 설쳐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금기를 깨었고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내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을 때 찔림을 받습니다. 누군가 쓰러져 있는데 그를 돕지 않으면 하루 종일 생각이 납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그 길바닥에 이 추운 날에 누워 있었을까?" 자꾸만 성령이 나를 찔러서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꾸 내가 뭔가를 해야 될 것 같고,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마음의 갈등이 심하게 올라옵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차적으로는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2차적으로는 성령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4. 자연 만물을 통하여

네 가지 정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 한두 가지 정도 더 플러스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가 두 가지 정도 더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자연 만물을 통해서입니다. 이건 시편에 자주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천지가 다 생겼습니다.

그럼 우리는 바다를 보면서 그냥 바다를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저 바다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하늘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길쌈하지 않아도 수고하지 않아도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왜 걱정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하늘에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는 것이지요. "먹이시는구나, 입히시는구나. 그런데 왜 내가 걱정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다 책임진다고 하셨구나."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지요. 이건 굉장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은 영성을 가지면 온 세상 만물을 보고 거기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시편과 예언서 여러 곳에 "하나님이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바다를 보면 "낭만적이다, 겨울바다 아름답구나, 첫사랑이 생각난다" 이렇게만 생각하시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다를 보고 "하나님이 경계를 정하셨구나, 오늘도 이 바다가 넘실넘실 넘어와서 우리에게 쓰나미를 안겨다 주지 않음이 하나님의 돌보심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바닷속에서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2-5. 다른 사람을 통하여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하나는 여러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때로는 나에게 찔림이 되는 말을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툭툭 던집니다. 기분 나쁜 말이기도 하고 화가 나는 말이기도 한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식들을 통해서, 때로는 내 남편 내 아내를 통해서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적인 민감성이 있어야 되고, 안테나가 높이 뽑아져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한 여섯 가지 정도, 그리스도 아들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양심, 성령, 자연,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꿈에 "짠" 하고 나타나서 "아무개야" 하시는 것은 확률이 지극히 낮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편적인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자세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자세는 어떠해야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관계가 좋아야 그 말씀이 들릴 것 아닙니까? 관계가 나쁜데 누가 말을 하면 "내가 저 말을 믿으라고?" 이렇게 됩니다. 나하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와서 막 말을 하면 일단은 듣기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가 있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일단은 잘 듣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어야 됩니다.

3-1. 죄 문제 해결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뒤에 나오는데 미리 말씀드리면, 죄 문제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걸 걷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죄가 사이에 끼어 있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져 있는데, 들리지 않습니다.

3-2. 순종의 자세

두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자세는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하십시오. 말씀만 하시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겠지요. 그런데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일단 해보십시오. 일단 해보시면 제가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하고, 들지 않으면 하지 않겠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왜 말씀하시겠습니까? 순종할 생각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의도를 다 뚫어보고 계시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려고 하는지 듣고 말씀을 튕겨내려고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백 번의 번제와 숫양의 기름으로 드리는 예배보다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왕이시여!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3-3. 하나님의 뜻 행함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룩함", "음란을 버리고"라고 했는데, 여기 음란은 무엇일까요? 그냥 성적 방종과 성적 타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음란한 행위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마음에 품는 것이 영적 간음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음란을 다 버리고 너희의 거룩함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너 사이에 죄의 문제를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하신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영의 사람들은 죄가 마음에 가득 차 있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죄 문제부터 해결이 돼야 됩니다. 그래야 좀 "아휴" 하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하나님과 영적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면 하나님이 너무 이쁘게 보십니다. 정말 이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겠지요.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자에게입니다. 원망, 불평, 불만, 짜증, 사람을 욕하는 것, 참소하는 것, 당 짓고 모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돼지에게다가 진주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하시지 않으시지요. 내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귀한 음성을 들으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뜻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입니다. 전도하는 사역,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난이 돌아오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아 이제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시겠구나" 이렇게 기대하시면 됩니다.

3-4. 일치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또 하나 기대해야 될 것이 일치입니다. 여기서 일치는 가정의 일치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를테면 가정에 너무너무 이쁘게 키우는 금지옥엽 자녀 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아이를 판사를 만들고 싶고, 엄마는 이 아이를 의사로 키우고 싶어요. 아버지는 교회 가서 기도할 때마다 "판사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엄마는 "좋은 의사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서로가 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비전을 봤다고 기도 제목을 다 적어냅니다. 하나님 그럼 누구 편 들어야 됩니까? "다 사짜니까 목사 돼버려라" 뭐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뭐 할 수 없지요.

가정에서는 이 영의 일치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고넬료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인데 이렇게 했습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제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베드로는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는 목회자입니다. 초대형 교회에 다니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고넬료가 가서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으니 당신 우리 집에 와서 말씀 전해 주십시오" 한다고 베드로가 올까요? 황당하지 않습니까. 사실 고넬료가 "그러면 올까요?" 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감동시켜 놓았다."

같은 시각 베드로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저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보자기에 보니까 못 먹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하는 불결한 음식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못 먹겠습니다." 이것을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보니 이건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받은 환상이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어서 고넬료에게 말씀하셨으면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서로 의심 없이 만나지요. 가장 황당한 청년들이 있는데, 제가 청년부에서 사역할 때도 그랬는데요. 어떤 한 형제가 자매에게 가서 "하나님이 당신하고 결혼하라고 했으니까 당신 나하고 결혼해야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나에게 말씀하셨으면 그 분에게도 말씀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마음 약한 자매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그때부터 금식기도 합니다. 밥을 한 일주일 굶다 보면 이게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헷갈립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 뜻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좋다" 하고 결혼하자 이래서 인생 망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치의 영이십니다. 일치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게 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고 길을 찾고 강구하고,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같은 마음을 주십니다. 다수결로 투표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러면 하나님이 일치하는 마음을 주시고, 같은 마음, 같은 은혜로, 같은 성령이시니까 그렇습니다.

그 다음 나오지요. 에베소서 4장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은 분열의 영이 아니십니다. 왜 가정을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남편과 아내를 갈라지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왜 교회를 하나님께서 갈라지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이 문제를 놓고 사심 없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같은 마음을 주십니다. "아 내가 잘못됐구나, 당신이 옳았습니다." 이렇게 감동을 주십니다. 그래야 함께하고 같은 걸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넬료에게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3-5.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요. 먼저 고난 받는 이유를 몇 가지 적어뒀는데, 사람들은 고생하고 고난을 구별을 잘 못 합니다. 보통 고생 앞에 동물 이름을 하나 붙이지 않습니까. 그건 왜 그렇습니까? 왜 개고생합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죄 지어서 자기가 잘못한 것을 왜 고난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과 동격으로 놓으면 안 됩니다.

내가 평생을 흡연을 했습니다. 폐병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고난입니까, 고생입니까? 고생인 것이지요. 내가 맨날 텔레비전 볼 때 삐딱하게 앉아서 자세 이상하게 있다가 허리가 아픕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제가 주의 일 열심히 해야 되는데, 이렇게 허리가 아픈데." 이게 고난입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이지요. 자기가 그건 그래도 싼 것이지요. 자기 몸 잘 관리하고 잘 고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지요. 바른 자세로 운동 열심히 하고, 생활습관 바로 하고 그런 것이지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자신의 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죄를 심으면 악을 거두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심으면 내가 그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난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유혹이 무너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혹이 왔을 때 흘려보내야 되는데, 이것을 잡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까? 왜 이것을 스스로 고난이라고 말합니까? 그건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받는 죄값인데, 이것을 구별하셔야 됩니다. 옆에서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듣게 타일러 주셔야 됩니다. 따끔하게 나무라 주셔야 됩니다. 남들은 잘 못 합니다. 가족이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남편이 이야기해주든 부모가 이야기해주든 "너 그건 고난이 아니라 개고생이라고, 한번 된통 당해봐야 그래야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해 주셔야 됩니다.

진짜 고난은 어떤 것이냐? 그 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고난이 있지요. 욥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런 고난 받을 이유가 없는데, 천상에서 사탄하고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를 욥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욥이. 이래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 이것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훈련도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하였으니." 사랑하니까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시험도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적어도 이 정도 되어야 고난의 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받는 자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제가 적어놓은 시편 32편, 10편, 18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32편의 배경은 다윗의 죄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답답해진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찍어 누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굉장히 찍어 누르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 즉 내 입으로 죄를 시인하지 않을 때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죄 짓고 고백하지 않으니까 뼈가 마르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눌렀습니다." 심한 심리적 압박을 겪는 것이지요. 다윗이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래서 다윗은 항복합니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죄를 토설하라고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닥칠 때 한번 내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깊이 있게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계속해서 눌리고 또 눌릴 때, "하나님, 제가 이런 것도 하나님께 잘못했고, 돌아보니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은 일도, 은밀한 죄의 낙도 누렸습니다" 하고 토설하면 하나님이 다 사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십니다.

시편 18편을 보면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당한 환란은 사울로 인한 환란도 있었고, 아들 압살롬으로 인한 환란도 있었고,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고난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19절을 보니까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건져주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건 "내가 너에게 고난을 준다. 부르짖어라. 입을 벌려 기도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고 건져주겠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흑암 가운데 있을 때 다윗이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힘을 주시니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즉 고난을 통해서도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죄를 토설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고생과 고난을 구별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며

오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두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있으실 것입니다. 저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직접 계시가 유효한지 생각해 봅시다. 이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것은 이런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고,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대에 말씀하시는 방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그 음성을 잘 듣고 분별하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성경을 통해서, 양심과 성령을 통해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지 않고 마음이 분열되고 나뉘어져 있습니다. 엘리처럼 처소를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하나님께 나와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서 청하기를 거절하지 않았던 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주의 말씀 앞에 새롭게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오니 주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순종하는 결단으로 주의 말씀 듣겠사오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 손해가 되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100퍼센트 순종하기를 원하오니 이 순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 즐겨 듣고 행하며 말씀과 함께 동행하는 유익을 누리는 주의 백성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