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교 14강 - 헌금과 십일조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린도후서 9:7)
교리학교는 신앙의 울타리를 세우고 믿음의 틀을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틀을 만들고 울타리를 세우려면 땅을 파야 합니다. 땅을 파기 위해서는 고통도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과목 한 과목 지나갈 때마다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고 계속 연습하고 또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을 조금 귀찮게 해서라도 자꾸 공부하고 익힌 것을 대화하십시오. 그러면 기억이 나고 울타리가 굳게 세워지며 틀이 생겨날 것입니다.
오늘은 헌금과 십일조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분들부터 도대체 성경적 근거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분들까지 다양하게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십일조 혹은 헌금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혹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궁금하긴 한데 물어봐야 되나, 괜히 입을 열었다가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 들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특별히 헌금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헌금 항목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이걸 우리가 다 해야 되는 건지, 그리고 이 항목마다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 입을 열고 묻기 시작하면 괜히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것 같고, 그리고 괜히 나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서 혼자 망설이다가 그냥 안 하면 되지, 혹은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수십 년 신앙생활해 오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은 십일조 그리고 헌금에 관해 성경에 나타난 정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뒤쪽에 가면 질문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 그 질문하는 내용도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1. 성경의 십일조
1-1. 아브라함의 십일조
성경에서 십일조를 가장 처음 드린 이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조카 롯이 소돔 땅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소돔 땅에 분쟁이 일어나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포로로 사로잡혀 갑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자기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출해 줍니다. 전쟁을 한 것이지요.
전쟁을 하다 보면 사람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전리품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전리품을 가지고 오다가 하나님의 사람 멜기세덱 제사장을 만나서 십분의 일조를 그분에게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가장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낯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드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고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미 아브라함 이전부터 하나님 앞에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이 있는 사람의 상식처럼 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19-20)
이것이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보면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나오는데, 그다음 사건입니다.
"그 후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세기 14:21)
소돔 왕은 롯이 살고 있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소돔 왕 입장에서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해결해 주었으니까 고맙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리품은 다 당신이 가지시고, 포로만 다시 우리에게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신들메라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세기 14:23-24 참조)
"소돔 사람은 악하고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더라."(창세기 13:13)
이것이 그 당시 소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의 평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질을 자기가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창세기 14:24)
즉 실비만 제하고 나머지는 다 당신에게 다시 돌려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십일조 정신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단순한데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중에 십일조는 열심히 드리는데 사람으로서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작은 금전 거래에서 가까운 이웃에게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조금씩 조금씩 빚진 것,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혹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굉장히 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사람에게는 다시 사람에게. 그래서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위로 아래로 함께 동등하게 드리는 십일조 정신입니다. 십일조 정신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덕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정신을 잘 기억하십시오.
1-2. 야곱의 십일조
야곱은 자기 성격대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받고 싶으십니까? 야곱이 받은 축복은 나도 받고 싶은데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격과 그분의 성격, 성향은 사실상 조금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야곱의 십일조를 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창세기 28:20-21)
조건부가 붙습니다. 만약 나에게 이런 복과 이런 은총을 주시면, 그다음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세기 28:21-22)
야곱의 십일조는 즉시 한 십일조입니까, 아니면 유보된 십일조입니까? 유보된 십일조입니다.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거기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양과 소와 가축을 두 떼나 나누어서 올 정도로 굉장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살 동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내가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과 거래의 조건으로 쓰여진 십일조입니다. 우리가 그냥 단순히 생각해도 야곱의 십일조는 참 인간적이다, 사람이 이렇게 인간적일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1-3. 율법의 십일조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야곱의 십일조를 지나서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 정신은 어떠한가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서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수기 18:20-21)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몇 지파입니까? 우리가 12지파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내용상 이스라엘은 13지파입니다. 왜냐하면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요셉 지파에서 두 분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13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땅 분배는 13지파 중에 12지파에만 했습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목축도 못하고 농사도 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나는 소산을 내가 먹거나 누릴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레위 지파에게는 전체 가나안 땅을 다 쪼개서 그곳에 중요한 성읍 48개를 나누어서 레위 지파에게 분산해서 그곳에 살게 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한 이유는 레위 지파가 그곳에 살면서 그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신앙 교육을 하고 예배도 가르치고 그리고 재판도 하게 하려는 목적이겠지요.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목축도 못하고 농사도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인근 지역 분들에게 십분의 일조를 레위인들에게 갖다 주라, 그러면 레위인들이 전적으로 성전의 일을 돌보니까 레위인은 그 십분의 일조를 받아서 생활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명시된 십분의 일조의 쓰임은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뒤쪽에 가면 또 나오겠지만 레위인들이 자기 동족들이 내는 십일조를 가지고 100퍼센트 자기 생업과 자기 생활만 위해서 쓴 것이 아니고 성전 관리를 위해서 썼습니다. 성전을 맡아서 수리도 해야 되고 보수도 해야 되고 또 성전에 드나들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전 관리와 유지를 위해서 각 지파들이 내는 십일조를 사용했습니다.
그것만 썼느냐, 그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신명기 14장에 보면 십분의 일조는 이 동네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 전체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십일조가 쓰여졌습니다. 이것을 사회적 십일조라고 불렀습니다.
십일조의 용도가 세 가지였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해서, 두 번째는 성전의 유지 보수 관리를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사회적 십일조 즉 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을 위한 구제와 나눔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의 십일조 정신을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온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까요? 교회에서 전업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들의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관리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위해서, 성전에 오는 우리 성도들이 점심에 함께 식사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그리고 또한 아주 중요한 것은 인근 지역, 우리 교회 주변, 양산 지역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십일조가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분의 일조의 정신은 걷는 것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십일조 무용론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걷는 데만 혈안이 돼 있어서 그렇습니다. 걷는 데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십일조 하지 않으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찾아보세요. 없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본인이 죽을 병에 걸려서 당장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신 있게 없다고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분들이 강단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또 그렇게 우리는 들어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걷는 데만 혈안이 됐는데 이것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성도들이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예산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내가 드리는 십분의 일조가 정말 성경의 정신대로 쓰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교회는 공개해야 될 의무가 있고 성도들은 요구해야 될 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구하지 않으면 공개하지 않고, 공개하지 않으면 나중에 한두 사람에 의해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분의 일조의 정신은 성경에 나온 정신대로 걷고 사용하고, 철저하게 이 양자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1-4. 기원전 8세기 십일조
왜 기원전 8세기 십일조를 따로 적어 놓았느냐 하면, 성경에서 기원전 8세기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져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남유다는 사실상 자꾸만 쪼그라들고 자꾸만 살림이 못해지는 상황이었고, 북이스라엘이 굉장히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입니다.
기원전 8세기의 왕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가 북이스라엘이 굉장히 발달했던 전성기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발달했으나 영적으로는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구약 공부할 때 했습니다. 아모스, 요나가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했던 선지자들입니다.
이때 십일조가 어떻게 드려지고 있느냐 하는 내용을 보는 것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아모스 4:4 전반부)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제 짓고 멋대로 산다는 얘기입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드리며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아모스 4:4 후반부)
십일조를 굉장히 자주 드립니다. 이것은 수입이 많다는 뜻입니다. 걷는 것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전체가 그 당시에 무역도 잘했고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잘하는 것입니다. 돈은 엄청나게 많이 내는데 문제는 겉으로 죄도 짓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 그 사람의 영성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느냐 하는 책망입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이것부터 하고 그리고 십일조 드려라, 이런 말입니다.
1-5. 포로기 이후 십일조
포로기 이후는 아시지요? 기원전 587년에 남유다가 망했습니다.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잡혀 갔습니다. 70년 동안 포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귀환합니다. 한 대 얻어맞고 정신 차리고 들어왔으니까 스룹바벨이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나서 그 성전에서 드리는 십일조는 제대로 드리는 십일조를 드릴 것 아닙니까? 그리고 특히 느헤미야, 에스라 같은 분들이 십일조 정신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또 처음 익은 밀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소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느헤미야 10:37)
아까 민수기에서 보았던 십일조 정신이지요.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줘야 됩니다. 이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포로기 이전에도, 포로에서 갔다 와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십일조를 못 받고 생활이 안 되니까 레위인들도 생활 전선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성전을 지키지 못하고 생활 전선에 나가면 성전은 어떻게 될까요? 관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기도해 줄 분이 없습니다. 또 재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를 집례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영적 생활도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이후, 포로기 이후에는 십일조부터 제대로 다시 드려라, 그래야 레위인들이 생활하고 성전이 제대로 돌아가고 깨끗해지고, 그래야 그다음에 영적 생활이 제대로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자기 봉급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봉급을 받으면 레위인들은 이 받은 봉급에 십일조를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갈리기 시작합니다. 성도들이 자기가 십일조를 드린 것 아닙니까? 그 십일조를 레위인이 받았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십일조 합니까, 안 합니까? 하라 그랬습니다. 성경에 민수기 18장에도 당연히 하라 그랬고, 그리고 느헤미야도 그 얘기를 또 합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느헤미야 10:38 전반부)
입회를 하라 그랬습니다. 정확하게 얼마를 받는지를 보라, 제대로 주는지, 그리고 너는 받는 것을 제대로 관리하는지.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느헤미야 10:38 후반부)
즉 자신이 받은 수입의 또 십분의 일을 따로 떼라 그랬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둘지라."(느헤미야 10:38 후반부)
레위인들이 많습니다. 많은 레위인들이 성전을 관리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레위인들의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 다시 성전을 풍요롭게 아름답게 꾸미고 관리하라 하는 말입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느헤미야 10:39 전반부)
십일조를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가져가지 말고 성전을 윤택하게 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성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런 포로기 이후의 십일조 정신이 계속 이어졌을까요? 계속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시대 때 예언했던 말라기 시대를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8-10)
온전한 십일조가 무슨 말일까요? 이것 때문에 논쟁이 많습니다. 온전하다라는 말을 찾아보면 히브리어로 '콜'(כֹּל)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콜'이라는 말은 전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받는 수입의 전부를 드리라는 뜻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내가 백을 받으면 백을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물질이 누구 것입니까? 다 하나님 것입니다. 원래 모든 헌금은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를 주셨는데 이 물건이, 물질,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내가 믿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정하신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콜'의 의미의 전부, 온전을 드리라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세전이냐 세후냐 뭐 이런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세전 세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가, 이것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고백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땀 흘리고 내가 수고해서 내 노력으로 내 실력으로 내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얻은 것인데 드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죽겠는데 드리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드리면 이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나는 공로 없는데 하나님이 다 주신 것입니다 하는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드리는 것이면 그것은 '콜' 즉 모든 것을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절의 사람들은 그런 의미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도둑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십일조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굶어 죽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세계 만물이 다 하나님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온전하다 하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6. 신약의 십일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전반부)
우리가 여기까지만 보면 정의와 믿음과 긍휼만 하면 되는구나, 십일조는 좀 대충 해도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예수님이 그럴까 봐 뒤에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 후반부)
둘 다 하라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너희 마음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이것도 저것도 함께하라 말씀하셨습니다.
2. 헌금의 정신
이제 헌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십일조 정신을 한번 정리하면, 아브라함과 야곱을 봤는데 야곱은 좀 얄밉지 않습니까? 유보된 십일조 말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사람에게 줘야 될 것, 정리해야 될 것 사람에게, 그 정신을 꼭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십일조 정신은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인의 생활을 보장하고,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관리하고,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 십일조로 약자들을 돕는 일에 철저하게 사용하라 하는 뜻입니다. 그 이후에 십일조 정신이 많이 변질되고 사람들이 타락했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십일조 정신은 민수기와 신명기가 말하는 이 세 가지 정신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손에 돈 쥐고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태어날 때 옷 입고 태어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벌거벗은 몸으로 적신으로 이 땅에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것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역대상 29:14)
많이 드렸다고 칭찬받을 이유 없고, 우리 소득이 적어서 적게 드렸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없고, 중요한 것은 주께 받은 것 다시 주께 드립니다 하는 신앙고백이 헌금의 정신, 가장 근저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헌금의 세 가지 원리입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질, 우리 집, 직장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나에게 주신 이유는 관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2-1. 청지기 원리
헌금의 정신 첫 번째는 청지기 원리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까워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전부 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임시로 맡겨 주신 것이다 생각해야 드릴 수 있습니다.
2-2. 공동체 원리
"그들이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그들은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로마서 15:27)
이방인들을 어떻게 섬기라고 합니까? 육적인 것 즉 물질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방인들에게 나눠주고 섬기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만 우리 공동체가 아니고 이 땅에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공동체 식구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가 나누어 주고 함께 베풀어 주는 삶이 필요합니다.
헌금의 정신은 꼭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교회에 내는데 우리 교회 공동체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그 이웃 공동체, 사회적 공동체를 위해서도 나누고 또 그들에게도 충분히 베풀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헌금이 제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 나라 원리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한일서 3:17)
하나님 나라는 고통당하고 어려워하는 형제와 자매와 이웃을 보면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8)
행함의 뜻입니다.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의 정신은 베풀고 나눔에 있습니다. 헌금 많이 내는데 도대체 이 교회가 나누지도 않고 베풀지도 않고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면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헌금의 목적
헌금을 드리는 목적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8:13-14)
바울이 이런 일은 잘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다니면서 헌금을 거뒀습니다. 그 당시는 연보라고 했는데 연보를 다 걷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과 기근이 와서 거기에 큰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 다니면서 다 내라 그랬습니다. 일부러 편지를 써서 경쟁을 붙였습니다. 저쪽 교회는 정말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 열심히 냈다 하는데 내가 너희들을 기대해 봄이라 이러고 경쟁을 붙였습니다. 그래도 걷기가 어려웠는데 자기가 그것을 다 걷어서 예루살렘에 가서 전달하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헌금을 드리는 목적은 균등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을 쓸 때 마르크스가 이것을 가지고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이 균등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가져왔다 해서 굉장히 우리를 곤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균등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억지로 빼앗아서 균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빼앗아서 어떻게 합니까? 지주를 처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가서 때려 부숴 가지고 그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아 왔지만 요즘에는 합법을 가장해서 돈을 빼앗아 옵니다. 그렇게 해서 균등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균등은 그게 아니라 자발적인 균등입니다.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주시고 이 물질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부를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참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이래서 자발적으로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등한 세상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 보세요. 많이 기부하는 분들, 사회적 기부를 많이 하시는 분들. 거기서 어디 그렇게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빼앗아서 그렇게 해서 억지로 균등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어디 있습니까? 다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고 그런 자발적 나눔과 헌신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 균등은 공산주의적 균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균등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헌금을 드리는 목적은 자발적 균등을 위함입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쳐나게 하나니."(고린도후서 9:12)
헌금을 봉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봉사를 몸으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물질이 있으면 이 물질로 내고 드리는 것도 중요한 봉사입니다. 그래서 이 봉사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채웁니다. 헌금의 목적 첫째 균등, 둘째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도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립보서 4:18)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가지고 바울에게 영치금을 넣어 줬습니다. 바울이 나는 감옥에 있지만 풍족하다, 풍성하다, 넘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너희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헌금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헌금 드려서 누구를 기쁘게 하고 누구에게 뭔가의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 헌금의 목적입니다.
4. 헌금의 태도
헌금을 드리는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린도후서 8:5 전반부)
헌금은 물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아벨이 자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하나님께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는 태도가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만 던지는 것이 아니고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헌금 준비할 때 잘하셔야 됩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500원짜리를 집회 있을 때 그것을 다리미로 다려 가지고 성경에다가 이렇게 끼워 가지고 날을 세워 가지고 왔습니다. 손이 이렇게 스치면 손가락에 베어서 피가 날 정도로 돈을 정성껏 준비해 가지고 드렸습니다. 그런 정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지가 아니십니다.
아이들이 교회 갈 때 "엄마 헌금" 이러면 주지 마세요. 주시면 안 됩니다. 엄마한테 받아서 생각 없이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은 절대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신앙을 망치는 길입니다. 자기가 철저하게 아까울 정도로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정성껏 드리도록, 작은 액수라도 자기를 드리는 훈련과 연습을 자꾸 시켜야 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린도후서 9:7)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명 안 해도 아시겠지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린도후서 8:2)
헌금을 드리고 기뻐해야 됩니다.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아까워 죽고 속상해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지 마세요. 넘치는 기쁨으로 드려야 됩니다.
이렇게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헌금을 내는 사람, 즐겨 내는 사람, 기쁘게 내는 분들이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사람들이 계산합니다. 아이고 아까운데, 이것 너무 아까워서 못 드리겠네 하면 하나님도 헤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계산하지 않고 기쁘게 드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쁘게 누르고 흔들어 후히 되어 차고 넘치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5. 헌금을 사용하는 공동체
현대 교회는 헌금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직접 필요한 곳에 드리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헌금을 드리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받아서 적절하게 집행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 것은 당회가 하고, 그리고 제직회가 하고, 교회 공동체가 합의에 의해서 성경의 정신에 의해서 헌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정신을 가져야 되는데 드리는 것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에도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됩니다. 정말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정치 제도는 제직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회가 입법기관이면 제직회는 예산을 심의하고 결의하는 기관입니다. 제직회에서 "이 돈 못 씁니다, 당회에서 결정 잘못하셨습니다" 하면 못 씁니다. 한 푼도 못 씁니다.
그런데 제직회에서 너무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이 예산이 쓰여지고 있는지, 어떻게 나뉘어지고 있는지, 관리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와 헌금들이 아까 말씀드린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지, 그리고 혹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살펴야 될 의무가 다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목사에게, 장로님들에게, 이것은 교회 중직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입니다. 굉장한 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얼마나 큰 책망을 받겠습니까? 성도들도 잘 관리하고 잘 지켜보셔야 됩니다.
6. 타락한 예
요한복음 2장 13절에서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한번 뒤집어 놓으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가는데, 성전에 올라가서 짐승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당시 썩어빠진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거기에서 가축 파는 사람들에게 세를 받고 자꾸만 자꾸만 성전 가까이 가까이 하다가 나중에 성전까지 소나 양이나 비둘기 파는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돈 받고 그러고 나니 그들이 그 돈 나중에 다 빼먹어야 되고, 그러니 사람들이 가지고 나오는 그 물건들, 소를 가지고 나오면 괜히 흠집 잡아서 트집 잡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썩어빠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분노하셔서 다 뒤집고 내쫓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드리라 그래서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정결한 마음으로 진실되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도 성전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이렇게 썩어 빠져 있으면 그 헌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정화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 6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향유를 붓는 여인 마리아에게 유다가 책망을 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한복음 12:5-6)
자기 용도대로 가룟 유다가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정말 순수한 의도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돈도 가져오고 헌금하고 하는 사람들의 이 물질이 이렇게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새고 있으면 이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누가복음 16:13 전반부)
이 두 주인은 하나님 하나, 재물이지요. 교회 안에서도 맘몬이 우상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 물질을 관리하고 맡은 분들이 오로지 돈 돈 돈 돈 하기 시작하면 그러면 교회는 물질이 우상이 되는 교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질을 잘 활용하고 잘 관리해서 성경이 말하는 정신에 의해서 사용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지켜봐야 할 분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7. 헌금에 대한 성경의 예
가인과 아벨의 예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예물은 왜 받으셨는데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세기 4:4-5)
제물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려야 됩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을, 그런데 가인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물 드릴 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정결한 예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보겠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도행전 5:1-3)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시지요. 두 분이 자기 땅을 팔았는데 "우리는 형편상 절반은 우리가 써야 되고 절반은 교회에 드리겠습니다"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다 드리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분을 책망하시고 강하게 책망하시니까 그때 심장이 멎어서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이전에 바나바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아주 유명하게 된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소유를 팔아서 교회에 내놓으면 자기들이 유명하게 뜰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헌금을 목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헌금을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절대 어떤 목적도 있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만 쓰면 됩니다. 이것을 내가 드려서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하겠다, 내가 이것을 드려서 내 이름을 내겠다, 이런 의도는 하나님이 굉장히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8. 질문과 답변
십일조는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만 드려야 됩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기준은 세전입니까 세후입니까?
제가 이 질문 많이 받았습니다. 이전에도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어떤 의사 분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옛날 대학 때 선교 단체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그 선교 단체를 계속해서 도왔습니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도요. 그런데 한 10년 정도 이상을 돕다 보니까 본인이 돕는 십일조가 그렇게 계속 전부 그것이 다 된 것입니다. 본인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는 큰 교회고 내가 여기 안 해도 이 교회는 잘 운영될 것 같으니까 거기다가 십일조를 계속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교 단체에서 홈커밍 대회를 하는데 다들 지금까지 수고한 분들을 다 모셔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때 가 보니까 자기 자리가 위에서 다섯 번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기분이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10년 이상 여기다가 드린 돈이 얼만데, 내가 여기다가 갖다 준 돈이 얼만데, 내가 여기 위에 있는 네 명보다 훨씬 더 많이 낸 것을 나도 알고 있는데 왜 내 자리가 다섯 번째 자리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곰곰이 자기를 돌아본 것입니다. 내가 헌금을 했는데 왜 나는 여기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서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어떤 일에 내가 목적을 갖고 돕기 시작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잊어버려야 되는데 잊지 않고 행사하려고 하고, 그리고 주인 노릇 하려고 하고, 나중에 가면서 거기에서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헌금한 것 전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전부 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자기 인생의 죄성을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고백하고 그 공동체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고쳤다는 얘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 하는 게 옳으냐 아니면 다른 단체에 하는 게 옳으냐 이 문제를 따질 것이 아니고, 문제는 이 십일조나 헌금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것을 어디에 내든지 주인 노릇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내는 분들도 주인 노릇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인데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줘, 왜 나를 이렇게 대해 이런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교회마다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내느냐 교회 밖에 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를 가지고 헌금을 가지고, 액수가 크고 작음의 문제를 가지고 주인 노릇 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 가져가라, 네가 지금까지 낸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디에 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세전 세후는 따질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의,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서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은 종류의 헌금 봉투가 있습니까? 참 고민입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예전 교회에서 새가족 담당을 했는데 어떤 새가족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저를 보셨습니다. 제가 새가족 목사니까요.
그때 그 교회가 헌금함에 비치하고 있는 봉투가 8가지가 됐는데 다 보았어요. 저한테 물어요. "목사님 천 원씩 맞나요? 내면 주일에 8천 원인데요." 그분은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입니다. 이것 어떻게 다 합니까? 제가 선후를 정해 주시고 첫 주는 이거 하고 둘째 주는 이거 하고 셋째 주는 이거 하면 되는지 알려달라고 그랬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우리 성도들이 수많은 봉투들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도 드리지 않아도, 하나도 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해도 괜찮고, 하나님이 하나도 내지 않는다고 우리를 벌 주시고 책망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 안 믿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다 낸다고 복 주시고 다 낸다고 백 배의 복을 주시면 그 하나님도 가짜 하나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면서 '아 이 의미가 이런 거구나, 이 봉투에 있는 것은 이런 거고 이 헌금은 이렇게 쓰여지는구나' 충분히 납득이 되고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내 믿음의 크기까지 다다르면 그때 헌금하시면 됩니다. 각 형편과 상황에 맞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부담을 갖고 힘들어하고 묻지 않고 교회에서 발걸음을 끊어 버린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봉투를 자꾸 두고 교인들을 시험에 들게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헌금함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 처음 왔는데 정말 초신자인데 교회 처음 와서 앉아 있는데 성가대에서 노래 잘하는 분이 아주 멋진 소프라노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헌금함이 돌아옵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노래 듣고 내가 동전 하나 넣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불쾌합니다. 나는 교회에 처음 왔는데, 그런 헌금은 강요된 헌금입니다.
그렇게 헌금함 돌려서 만약 헌금이 늘고 돌리지 않아서 준다면 그것이 우리 신앙의 수준입니다. 차라리 헌금이 주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어떤 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해서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발걸음을 끊어 버린다면 헌금이 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이 복음적입니다.
헌금을 사용하는 절차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헌금을 내면 교회는 여러 지출 항목들이 있습니다. 교회학교, 찬양대 등 여러 항목들이 있습니다. 그 항목의 의뢰해서 지출을 요구합니다. 그 부서에서요. 그러면 그 요구한 것에 따라서 지출을 해드립니다.
그런데 매년 연초에 공동의회라는 것을 합니다. 공동의회는 예산과 결산에 대한 공동의회를 합니다. 공동의회는 만 18세 이상의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꼭 참석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렇게 살펴 보시면 '아 작년에 우리 교회는 세입이 얼마였고 어떤 항목에 얼마가 지출됐구나, 살림을 잘 살았나 좀 못 살았나, 올해에는 이런 예산을 세웠구나' 그것을 보시고 질문도 하시고 물어보시고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고 따지기도 하시고 "올해는 이렇게 하셨으니 내년에는 이렇게 좀 반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의견도 개진하시고 그렇게 하면 공동의회에서 통과가 됩니다. 그것을 당회에서 매번 결의하고 제직회에서 결의해서 매달마다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공동의회에도 참석하셔야 되고 제직회도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배운 내용들을 정리해서 꼭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예산과 결산에 관심을 가지고 제직회에 적극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제직회 안에서 아무리 많이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링 위에서 권투선수가 싸워야지 링 밖에 나와서 싸우는 것은 반칙입니다. 제직회에 출석도 안 해 놓고 밖에 나와서 "교회 예산 이렇게 사용된다는 데 저렇게 쓰인다는 데" 하면 반칙입니다. 제직들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다 교회 안에서 정해진 링 안에서, 제도와 절차 안에서 묻고 질문하고 또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래야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 생활과 십일조 생활을 말씀해 주시고 헌금과 십일조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는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땀 흘려 드린 이 수고의 헌금, 십일조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악한 사탄과 영이 틈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한 푼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마음을 드리며 내 정성을 드리며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헌금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