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 술과 신앙 / 전체녹취

교리학교 15강 - 술과 신앙

에베소서 5장 15절에서 18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들어가며

술을 드십니까? 즐겨 드시나요? 간혹 자주 술을 드신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음주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깁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은 술이 센 것을 자랑하는데 왜 우리는 음주 사실 자체를 숨기려 할까요?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술을 금하는 구절이 있습니까? 가톨릭 신자들은 자유롭게 음주를 즐기는데 개신교회는 너무 율법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하나하나 풀어봅시다.

사실 이런 질문을 저도 많이 받았고,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술을 교리적으로 금하고 있는 국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왜 유독 한국 기독교에서만 술에 대해서 그렇게 배타적인가, 가톨릭은 상당히 열려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오늘 문화적인 것도 보고 교회 역사적인 내용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이든 궁금하면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또 가장 이해하기 쉽습니다.

1. 성경의 술에 대한 정신

1-1. 금지와 부정

잠언 23장 29절에서 30절을 보시면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붉은 눈.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다 나쁜 것이죠.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이 '까닭 없는 상처'가 어떻게 오는지 다 아시죠. 내가 어디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까 여기가 한 대 맞아서 그렇게 되어 있고, 눈이 부어 있고, 손바닥에도 상처가 있고. 그건 바로 어젯밤에 술 한 잔 먹고 나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 기억나지 않는 일들로 인한 상처입니다. 붉은 눈, 항상 충혈된 눈.

그런데 30절을 보니까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잠언은 지혜서입니다. 잠언 전체는 우리 인생의 가장 올바르고 진실된 길을 가르쳐주는 지혜서입니다. 잠언을 열심히 읽으면 가장 지혜가 풍성한 사람이 되는데, 이 잠언에서 술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앙이나 근심이나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붉은 눈은 모두 다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말씀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방탕하다'라는 말은 아소티아(ἀσωτία)라는 헬라어인데 '무절제하다'라는 뜻입니다. 절제함이 없다, 끝간데 없이 그냥 끝까지 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야 되는데, 뭘 하다가도 농담을 하다가도 농담에 한계가 있어야 되고, 어디까지는 그래도 우리가 이해할 만하다 하는 한계가 있어야 되는데, 술은 사람의 한계치를 깨버립니다. 뭔가 둑을 확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아소티아(ἀσωτία), 무절제, 방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런데 이걸 말꼬리를 잡아서 어떤 분은 "취하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제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술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묘해서, 처음부터 취하겠다 하고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한 잔만, 딱 한 잔만 하자에서 나중에는 무절제한 상태까지 가버리는 거죠.

디모데전서 3장 3절을 보시면, 디모데전서 3장은 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에 대한 말씀입니다. 장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이 '즐기다'라는 말은 원어에 보면 '절어 사는', '완전히 잠겨 사는'이라는 뜻입니다. 술에 젖어서 살지 아니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에 이어 3장 8절에 보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인박힌다'하는 말은 '마음을 두다'라는 뜻입니다. 항상 저녁이 되면 술 생각나고, 고기 한 점 먹으면 소주 한 잔 생각나고, 이렇게 되면 이게 인박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집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집사는 택함받은 집사입니다.

신명기 14장을 보면 "내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포도주나 독주를 내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 결국 '인박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술을 기억하고 떠올리고 그래서 술을 찾게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금지와 부정입니다. 일단 성경은 술을 부정적으로, 또 금지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2. 긍정적 용도

그렇다면 긍정적인 측면을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104편 15절을 보시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식사할 때 함께하는 식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환경에서 술을 긍정적으로 말할 때는 특별한 용도로 쓰일 때 긍정했습니다.

그 첫 번째 용도는 식용입니다. 함께 식사할 때 옛날 그리스 문화권, 또 구약의 문화에서는 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잔칫집에는 포도주가 항상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식사자리에서 반드시 필요한 식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식용으로 사용할 때는 긍정을 했습니다.

두 번째, 잠언 31장 6절과 7절에 보면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용도는 무슨 용도입니까? 치료제 용도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잠이 옵니까? 잠을 못 이루죠. 그런 자에게 포도주 한 잔 권해서 숙면을 취하게 해주고,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극심한 고통 때문에 힘겨워하는 자에게 고통을 잊는 마취제로 독주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독주나 포도주는 특별한 치료 용도로 사용할 때 허락되었습니다. 식용, 두 번째는 치료제입니다.

세 번째, 시편 78편 65절에 보면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용기 잃은 군사들에게 술을 보내서 용기 내게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전쟁에서 용사들에게 용기를 주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 술입니다.

네 번째, 민수기 15장 7절에 보면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전제는 예배 드리는 제사의 일종입니다. 전제는 마지막에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마지막에 제사가 다 끝날 때쯤 되어서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제물 위에다가 붓습니다. 포도주가 불 가운데 피와 같잖아요. 이 말은 나의 피에 헌신을 이 의미로 드립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제 하나만으로는 예배가 성립되지 않고 전제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전제라는 것은 '부어 드리다', '함께하다'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 포도주를 항상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했죠. "전제와 같이 자기가 마지막에 다 부어지고"라는 말을 디모데후서 말씀에서 쓰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의 모든 피까지 다 쏟을 정도로 그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일했다고 말했습니다.

자, 그래서 성경에서 술을 긍정하고 있는 자리는 네 가지 정도 되는데, 첫째는 식사, 둘째는 치료제, 셋째는 전쟁할 때, 네 번째는 예배 드릴 때입니다. 특정한 용도가 있을 때 사용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우리가 이해를 못하면 그냥 성경 한 절만 따서 읽으면 "아, 그냥 먹어도 되는구나, 먹으라고 하는구나, 성경 자체가 술에 대해서 굉장히 개방적이구나"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특정한 용도일 때 술을 사용하라고 말했습니다.

요즘도 집에서 음식할 때 술 쓰시잖아요. 그래서 가끔 심방 가서 보면 제가 앉아 있으면 냉장고 안에 소주병이 보이기도 하는데, 뭐 괜찮습니다. 음식할 때 쓰시는 것이구나 하고 제가 이해하지, 뭐 다르게 제가 오해하는 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제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2. 성경 인물과 술

성경 인물들도 술로 인해서 실수도 하고 술을 사용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노아를 보시면 창세기 9장 20절, 21절에서 성경에서 노아가 술 때문에 실수한 대표적인 사람이죠.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술의 결과가 결국 아소티아(ἀσωτία), 아까 말했죠. 방탕하게 되고 무절제하게 되고 끝간데 없이 끝까지 가버린다 그랬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자기 체면이 있어야 되는데, 술의 결과는 자기 마지막 체면까지도 다 벗어 제끼고 맙니다. 그래서 벌거벗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들을 저주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죠. 노아는 술로 인해서 판단력을 상실하고 아들을 저주하고 자신의 인생도 결국 마지막에 오점을 남기게 된 사람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창세기 27장 25절에 보니까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감에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감에 그가 마시고." 아들을 축복하는 그 잔치 자리에서 식용으로 포도주를 마셨어요.

그런데 이건 식용이라 하더라도 저는 여기서 이삭이 포도주를 마신 행위는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지금 이 상태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거든요. 이미 야곱에게 속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야곱인지 아니면 에서인지 분별이 안 되는 상태인데, 야곱이 가장하고 속이고 어머니가 해준 고기를 가지고 와서 "제가 사냥했습니다" 하고 아버지를 속였는데, 거기서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포도주를 한 잔 먹고, 안 그래도 눈도 안 보이는데 판단력이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연약할 때에 이삭처럼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거나 내가 육체적으로 연약한 부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 때 허락된 자리라 하더라도, 식사하는 자리 허락된 자리,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허락하신 자리라 하더라도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덕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금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교훈을 이삭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나실인에 대해서 민수기 6장 20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아 받들어 올린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난 이후에 마실 수 있는 포도주입니다. 허락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한번 봐야 되는데, 예수님의 별명이 이겁니다. 누가복음 7장 34절에 보면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심에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별명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붙였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여기서 포도주를 '즐긴다'라는 말을 썼는데, 항상 식사 자리가 있기 때문에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를 하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별명을 지으면서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정황을 잘 알고 예수님을 이해해야지, 이 내용만 보면 "아,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굉장히 즐기셨구나, 예수님은 항상 옆구리에다가 술병을 차고 다니셨겠구나" 이렇게 오해하시면 곤란하다는 거죠. 이 정황적인 상황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죠.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목회를 했는데, 특히 바울이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가 굉장히 큰 교회였는데 이 교회 목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목회하다가 위장병이 나오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디모데에게 "너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약용으로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과 술을 보면 사실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술을 정상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사람들 또한 함께 있습니다. 이걸 함께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3. 한국교회와 금주

그렇다면 제가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왜 유독 한국교회는 술에 대해서 이렇게 배타적인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겠습니다. 그건 이 한국교회 초창기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가르친 그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949년도에 합동 찬송가가 나왔는데, 합동 찬송가 486장에 보면 금주가가 있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금주가. 한번 읽어볼게요.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 건강 재력 신상에 화될까 늘 두렵다"

1절 가사입니다. 그리고 후렴을 보시면 이렇게 나오죠.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 함에 있나니"

이걸 찬송가로 불렀어요.

2절을 보시면 "해가 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해서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절 "전국 술값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비내리"

4절 "하늘 주신 내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기체 술에 독에 빠지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틀린 말 하나도 없죠. 틀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이 금주가를 왜 찬송가에서 개편 찬송가로 바뀌면서 왜 뺐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이거 좀 불렀으면 좋겠어요. 오늘 같은 날 이거 부르면 좋잖아요. 제가 이 곡조가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한번 검색을 해봤어요. '금주가 찬송가' 이렇게 검색하면 이 곡조가 나옵니다. 검색해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실 이 내용에 보면 이게 1949년도에 합동 찬송가에 있었던 찬송인데, 그 이전에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이 어떻게 해서 금주를 했는지가 잘 나타납니다. 아까 가사를 보셨지만 자녀교육 나오죠, 전국 술값 빚 이런 내용이 나오죠.

옛날에 우리 농촌에서 집안을 패가망신 시키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가 술, 두 번째가 아편(아편은 곧 담배 피는 것이니까), 술과 또 아편, 세 번째가 축첩입니다. 술, 아편, 축첩. 선교사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고 목숨 걸고 막았던 것이 술 먹지 마라, 담배 태우지 마라, 첩 살이 하지 마라, 축첩 금지.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세 가지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학습 받을 때, 세례 받을 때 반드시 서약하게 했고, 교회 성도들 중에 술 먹다가, 어제 몰래 먹다가 걸렸습니다 하면 바로 출교합니다. 그건 교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술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배타적이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정의 파괴가 술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대에서 한국교회의 금주운동은 굉장히 시대적인 의미가 있었고, 술로 인해서 파괴된 우리 한국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잘 보시면, 찬송가 가사에 잘 보시면 '나라의 복'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술을 멀리할 때 나라가 복을 받고 술로 모으는 돈으로 학교를 세워서 자녀들을 교육하자, 이게 초기 한국교회의 금주운동의 정신이었습니다.

3-1. 선교사들의 가르침

선교사들이 가르친 성경의 교훈을 보면,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을 대조해서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이하를 다시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가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된다고 선교사들이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사람들이 술에 취했다 이렇게 오해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말을 하고 방언을 하고 하니까 저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 이렇게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을 하시면서 술과 성령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용기가 생기고 말을 많이 하게 되죠. 평상시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이 술 한 잔 먹으면 막 쏟아져 나옵니다. 말도 많아지죠. 그런데 또 술을 마셔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평소에는 가만히 있는데 순한 양 같은데, 술 한 잔 들어가면 그렇게 사람이 힘이 세지고 말도 많아지고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술은 봉인된 본능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성령에 취하게 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면, 술 한 잔 마시지 않아도 남자들도 말을 잘합니다. 처음에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던 남자들이 교회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이, 도대체 저 남자들은 남선교회를 하면 술도 한 잔 안 했는데 뭐가 이렇게 재밌어서 두세 시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요. 그런데 본인도 성령에 취하고 나면, 마치 옛날에 술 마실 때 술에 취했던 것처럼, 성령에 취하고 나면 우리의 영이 깨어나서 내 속에 있던, 눌려 있었던 영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입이 터지고 말하게 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도 입으로 나오게 되고,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됩니다.

지금 여기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두 딸의 불행한 과거도 봐야 됩니다. 간음의 문제입니다.

잠언 21장 17절, 23장 21절에 보면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해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이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진리 아닙니까? 술 마시고 술 마시는 걸 즐겨 하고 잔치 좋아하는 사람들 치고 부자로 돈 모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빼앗깁니다. 호세아 4장 11절에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빼앗기면 그다음에 빼앗기는 게 뭡니까? 몸이 따라가게 됩니다. 마음이 먼저 빼앗겨야 그래서 몸의 타락은 바로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타락을 일깨우는 가장 첫 시작은 술로부터 시작된다고 선교사들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술은 음행을 굳게 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마음을 빼앗는다. 절대로 술 마시지 마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1900년대 초기에 우리나라 정부 문서를 보면, 조선시대 후기잖아요, 조선시대 후기의 한 관리가 황해도 지방에 파견을 받았는데, 그때 본인이 가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저는 차라리 관직을 포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황해도 그 지방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많이 활성화된 지역이었거든요. 그래서 거기 가면 본인이 고을 관리로서 돈도 받아서 챙기지 못하고, 술자리 대접도 못 받고, 그리고 사람들을 토색질도 못 하니까 자기는 차라리 관직을 내놓겠습니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증거가 우리 한국교회 초기 선교 현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4. 술 취한 자의 특징과 결과

4-1. 술 취한 자의 특징

하박국 2장 5절에서 6절을 보면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라고 했습니다. 거짓, 교만. 술 취한 사람은 자기를 과시하죠. 원래는 요만큼밖에 없는데 술 취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침소봉대뿐만 아니라 거짓이 굉장히 많고, 그리고 교만합니다.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술 취하면 욕심이 넓어지고,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이 나왔죠. 거짓, 교만, 욕심이 넓어지고, 만족한 줄을 모르고. 이것이 술 취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아까 읽었던 내용인데, 방탕, 끝이 없다 그랬습니다. 술 취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전도서 2장 3절에 보면 끝에 보십시오.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라고 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판단력이 상실되니까 당연히 어리석어지겠죠.

특징들이 나오죠. 거짓, 교만, 욕심이 넓어지고, 만족을 모르고, 방탕하고, 어리석고. 사람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혹시 이렇게 하면 우리 주변에 술 좋아하시는 사람들 중에 "아, 이 사람은 이렇구나, 이렇구나, 이렇구나." 나도 혹시 과거에 술을 즐겨 했으면 내가 옛날에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술 좋아하는 분들, 술 취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4-2. 술 취한 인생의 결과

그런데 이 술 취한 인생의 결과가 더욱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세아 7장 14절에 보면 "진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술 취한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진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니까" 술 취하면 노래나 부르지 하나님 부르겠습니까? 술 취한 인생의 결과는 가장 우선적 결과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술 취하면 일시적으로 망각하게 되고 또 기분이 좋아지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신명기 21장 20절과 21절에 보니까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자식이 우리 아들이 말을 듣지 않아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서 성읍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해요.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다." 아버지가 내놓은 자식입니다. 그럼 이 자식을 어떻게 합니까? 돌로 쳐라.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 말은 결국 술 먹은 사람의, 술 취한 사람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인간관계도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뭐 요즘도 그렇죠. 돌로 쳐 죽이지 않아서 그렇지, 술 취한 사람 반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술 취하고 찾아가면 즐거워하고 또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가족조차 싫어하는데, 자식은 벌써 도망가고 없고, 부인은 좋아합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관계가 전부 다 끊어져 버리는 그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잠언 20장 1절에 보면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0절에 보니까 특히 10절을 보십시오.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여기 보니까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남을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를 동급으로 묶고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도적과 같은 급이에요. 남의 물건을 속여 빼앗는 사람과 같은 레벨이고, 탐욕을 부리는 자와 같은 레벨입니다. 왜냐하면 술 취하면 이 모든 가능성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면 술 취한 입으로 남을 모욕하지 않겠습니까? 술 취해서 용기가 백 배가 되어서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지 않겠습니까? 술 취하면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결국은 술 취한 자의 마지막 결론은 자기 영혼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래서 술을 그냥 문화적인 의미로 그냥 뭐 우리가 그냥 식사하면서 조금씩, 그것도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5. 금주를 권하는 말씀

금주를 권하는 성경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들에게 레위기 10장 8절에서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하리라"고 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 먹고 회막에 들어가면 어떻게 된다고요? 죽인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자손들에게 술 먹고 회막에 들어가면 내가 너 목숨을 빼앗아 버릴 것이다. 무서운 약속이시죠.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 특히 성직을 가진 사람들은 분별력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결정을 해야 되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교회가 죽고 살고, 성도들의 영혼이 살고 죽고 하는 문제가 영적 지도자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정신을 흐지부지 하지 마라. 이건 비단 술뿐만이 아니고 비단 담배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함께 포괄하는 말입니다. 정신을 빼앗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그렇게 판단을 잘못해서 다른 영혼들을 사망의 음침한 길로 끌고 가느니라면 내가 너희를 죽여버리겠다. 왜냐?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왕과 방백, 왕과 방백 또 지도자들이죠. 잠언 31장 4절, 5절에 보니까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두 번 반복했습니다. 중요하니까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겠습니까?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왕은 주권자, 방백들은 술이나 독주를 마시지 마라. 왜냐하면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곤고하다'하는 말이 있죠. '곤고하다'라는 말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백성들은 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들, 눌린 사람들, 힘든 사람들이 모두가 왕과 방백들에게 나와서 "나를 도와주십시오, 정확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하고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왕이 술에 취해 가지고 있다 보면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갈까 두렵기 때문에 술 먹지 마라. 두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입니다. 민수기 6장 2절, 3절에 보면 나실인은 구별된 사람을 말하죠.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여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포도 자체를 입에 대지 말라. 왜 그랬을까요? 유혹이 되니까요. 포도를 먹다 보면 포도즙을 마시고 싶고, 포도즙을 마시다 보면 포도주를 마시고 싶고, 포도주를 마시다 보면 독주를 마시고 싶어서 사람이 유혹이 되니까, 아예 입에 대지 말고 쳐다보지 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예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구별된 자들, 우리는 다 저마다 구별된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해서 성별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세운 자들인데, 직분이 있잖아요. 우리가 목사의 직분, 또 장로, 권사, 집사 직분이 있잖아요. 직분을 받았다 하는 것은 우리가 다 구별된 사람들인데, 그 구별된 일을 하는 기간 포도주, 독주를 가까이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라. 그런 뜻입니다.

광야 백성들입니다. 신명기 29장 6절에 보니까 "너희에" 여기 '너희'라는 것은 광야 길을 걷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광야 길을 걷고 있는 백성들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자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훈련 중에 있는 광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포도주와 독주를 주지 않았습니다. 왜? 훈련받아야 되니까. 훈련받고 있는 자들은 항상 정신을 맑게 하고 있어야 되잖아요. 언제 비상이 걸릴지 모르니까. 언제 출동해야 될지 모르는데 술과 포도주에 절어서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는 광야 백성들인데, 하나님께서 훈련하고 계시니 광야 백성들로 살아가면서 우리도 포도주나 독주를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고 살아가야 되는데, 훈련받는 중에 너무 많이 취해 있지 않은가. 술과 포도주 아닌 혹은 다른 것들에게도.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1장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뜻을 정했다'는 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유다에 살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잖아요. 포로가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주는 거 먹고, 자라고 하는 데서 자고, 살라고 한 집에서 살아야죠.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나를 더럽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뜻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환관장에게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정한 다니엘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때 다니엘 말고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갔던 다른 친구들은 다 마셨어요. 다니엘과 그 친구들 외에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가 먹느냐 먹지 않느냐, 사회적으로 다 먹는데 너도 한 잔 해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어떤 방향으로 뜻을 설정하느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뜻을 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나의 뜻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상황, 환경 아무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뜻을 정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 1장 8절 이후에 보면 다니엘이 뜻을 정했어요. 뜻을 정하는 건 다니엘이 정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환관장에게 다니엘로 하여금 은혜를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다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세상의 지혜와 꿈과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아는 모든 은혜를 그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뜻을 정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동역입니다.

나가며

술 문제는 이렇게 접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술의 문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는데, 사실 짧은 내용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체를 함께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 정신은 술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식사, 치료, 전쟁, 그리고 예배 이 네 가지 이외에는 술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가져와서 내가 필요로 하는 데, 내가 원하는 데 가져다가 내 임의대로 "성경에서 술을 먹으라고 했다" 해서 써버리면 이건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고 자기 임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예수님의 대적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욕하기 위해서 지었던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그리고 술로 인한 인간의 파괴를 살펴봤는데, 술로 인한 인간의 파괴는 결국 마지막에 자기 영혼의 파괴입니다. 그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잘 지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영혼을 잘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귀한 영혼을 주시고 육체를 주셔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도 넘어지기 쉽고 쓰러지기 쉬운 이 세상인데, 항상 술에 취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잘 기억하고, 우리 영혼을 잘 지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술을 멀리하는 지혜로운 인생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술에 취하지 않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대로 살아가는 좁은 길을 결단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