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2) / 전체녹취

교리학교 2강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2)

요한일서 4장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은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누구를 믿는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른다면 그것은 참으로 허무하고 무가치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평생 알고 믿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분으로만 알고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입체적으로 다양하게,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으며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도 역사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를 복습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둘째,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며, 셋째, 우리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목만 제대로 알고 이어서 연결해 말할 수 있으면 아주 훌륭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해 네 가지를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되, 인도하시면서 한없이 말없이 그리고 잠잠히 우리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참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1. 자유의지와 기다림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을 기다리게 되셨을까요?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 만물과 다르게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연 만물과 다르게 창조하신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자유의지라는 것을 심어 주셨습니다.

다른 자연 만물은 모두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여 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속에는 또 다른 의지가 있는데, 그 의지는 하나님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의지입니다. 이 의지가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자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는 선악과 명령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 명령을 하시고 그냥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하지 말라", "하라" 이렇게 명령만 하십니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우리에게 맡겨 놓고 계십니다. 이것을 먹는 것도, 참아 내는 것도,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저것을 잘 참아야 할 텐데, 먹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인간을 하나님은 항상 눈여겨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이것은 우리가 자녀를 낳아 기를 때도 똑같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내 속에서 열 달 동안 있다가 낳은 자녀인데, 이 아이 속을 알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에게 말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고, 이렇게 하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만 할 뿐이지 이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부모에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말을 하고, 그리고 나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요? 초조하고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의지도 때로는 불쑥불쑥 솟아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도 마음속에서 솟아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합니다. 100퍼센트 이것, 100퍼센트 저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태가 좋을 때는 7 대 3, 안 좋을 때는 3 대 7, 이렇게 약간의 비율을 달리할 뿐이지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의 욕망까지도 억누르고, 그것까지도 내가 복종시키고 하나님 말씀 앞에 나올 때, 그때 우리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값지고 복된 순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프로그래밍해 놓고 "너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은 정말 참 하나님이 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지 않고 죄 짓지 않고 그것조차 복종시키고 하나님 앞에 나온 그 인간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으로 거룩하고 귀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우리 속에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일어나는 갈등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싶지 않고, 죄 짓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복종시키고 주 앞에 나온, 자유의지 가운데 가능성까지도 잠재우고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를 하나님은 얼마나 귀하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을 죽이기 전에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본 본문입니다. 창세기 4장 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죄 짓기 직전에 가인에게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죄 짓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악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달려가는 것을 우리 생각에는 발목을 부러뜨려서 못 하게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로봇에게나 하는 일이지 자유의지를 준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시고 경고하시고 그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나 계신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 말씀하시고 기다리심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이 도식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을 먼저 던져 놓고 기다려 보고 계십니다. 인간의 선택은 둘 중 하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든지 말씀대로 행하지 않아서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은 그 행위에 따라서 보응하십니다. 상을 주시고 상급을 주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아서 죄악의 길로 걸어가면 하나님은 몇 번이나 참아 주실까요? 참고 또 참고 참으시다가 어느 임계점,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그때는 심판하시겠지요.

말씀하시고, 인간은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지고, 하나님은 상을 주시든 아니면 벌을 주시든, 이런 도식이어집니다.

신명기 12장 1-3절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하시면서 규례와 법도를 쭉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을 모세를 통해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 아닙니까? 말씀을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몫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마음 다해 들어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그것을 잘 알고 들어야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행한 결과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4절에도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키는 것은 누가 지켜야 됩니까? 솔로몬이 지켜야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켰습니까, 지키지 못했습니까?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중에 두 번이나 나타나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조금 있다 보면 또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착각을 하는데, 어떤 오해와 착각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죄 짓고 살아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아도, 오늘도 내 멋대로 살고 내일도 내 멋대로, 1년 동안 내 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나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무엇을 하고 계신 시기냐 하면 기다리고 계신 시기입니다. 기다림이 조금 더 지나치면 하나님의 참음이 되고, 그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가 되고, 그 인내가 한계에 부딪히면 징계와 심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나는 징계와 심판을 향하여 얼마쯤 달려가고 있는가, 이것을 빨리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돌이키고 순종하는 지혜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래서 하나님을 잘 배워야 됩니다.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자녀에게 말을 합니다. 사사건건 뭐라고 하는 부모가 있지요. 그런데 어떤 부모는 가만히 기다립니다. 가만히 한 번씩 경고하지요. 한 번씩. 그러다가 나중에 또 두 번 경고하고, 세 번 마지막이다. 세 번째 경고에서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징계를 합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꼭 같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1-3. 참고 기다리심

말씀하시고 기다리시다가 이제 하나님의 인내를 계속 시험하는 일이 반복되면 하나님이 이를 꽉 깨물고 참고 기다리십니다.

열왕기상 11장 9-10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두 번이나 나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너무나 많이, 무척 사랑하셨는데도 솔로몬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 사후에 나라를 두 개로 쪼개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나라가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솔로몬 사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역대하 33장 10-13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므낫세가 누군지 아십니까? 이렇게 따로 떼어 보니까 이 분이 누군지 잘 모르실 텐데, 므낫세는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의 아들입니다. 남유다의 역사에서 왕이 몇 명 있는데, 그중에 히스기야는 굉장히 선했고 그 전후 유다 왕 중에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훌륭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했다고 아들의 믿음이 훌륭할까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믿음과 자식의 믿음이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므낫세도 역시 아주 악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듣지 않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가끔 이렇게 개입도 하십니다. 므낫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심에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이 역사, 이 사건은 열왕기상하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대기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와서 그를 사로잡아 끌고 가 버렸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것을 누구의 개입이라고 봤습니까?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와서는 므낫세가 회개하고 참회했습니다.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우리가 다 털어내고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한 걸음 두 걸음, 혹은 열 발짝 이상 걸어갈 때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개입하셔서 따끔하게 혼내실 때, 그때 우리를 앗수르로 잠깐 끌고 갔다가 쇠사슬로 결박해서 끌고 갔다가 다시 돌이키게 하면, 그때 회개하고 돌아와야 됩니다. 끊임없이 계속 그 길을 걸어가면 그때는 남아있는 것, 멸망과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질투하시는 하나님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주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때 가장 좋아하는, 제가 참 좋아하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 이 질투라는 감정을 가져 보지 않은 분이 과연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질투라는 감정을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분이 있을까요? 남녀 간의 관계에서도 질투는 사랑의 필수품이고, 자녀를 낳아 기를 때도 자식에 대해 느끼는 질투도 우리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질투라는 말을 자그마치 두 번이나 썼습니다. 내가 어느 상대에게 "나 지금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어 죽겠어"라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감히 어떻게 내가 질투한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혼자 생각일 뿐입니다. 혼자, 그것도 친구에게도 가장 친한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투란 내가 질투하는 순간 아주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에다 버젓이 "나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질투의 화신이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렇게 쓰신 이유는 우리 인간들에게 인간의 감정을 하나님의 감정으로도 대입시켜서 생각해 보고, 나를 질투하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절절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셨지요? 자유의지 주시고 참고 기다리셨지요. 또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하고 기다리셨지요. 자유의지 주시고 기다렸고, 말씀하고 기다렸고, 세 번째는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회심해야지, 회심하고 이 세속만 새기고 돌아와야지, 이제 사람이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회심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참고 참고 또 참는데 이 인간이 계속해서 질투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질투가 뭐가 됩니까? 소멸하는 불이 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불이 일어서 온 세상 천지를 다 태워 버립니다.

스바냐 3장 8절을 보십시오. 제일 끝에 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심해라, 이제 회심해라. 내가 이렇게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니까 어지간히 해라.

하나님이 무엇에 질투하십니까? 오늘 여기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보니까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가서 넙죽넙죽 엎드리는 것, 하나님이 그것을 눈 뜨고 못 보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 자식, 사람 등등 여러 가지 것들,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소멸하실 때 무엇부터 소멸하실까요? 하나님이 소멸하실 때 내가 엎드리는 그 대상부터 소멸하시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시니까요. 내가 물질에 엎드리면 하나님이 물질을 소멸하시겠지요. 그래야 하나님께 돌아오니까요. 내가 관직이나 명예에 엎드리면 그것을 하나님이 없애 버리시겠지요. 그래야 하나님께 돌아오니까요.

하나님이 삼손을 너무 사랑하셔서 삼손에 대해서 질투하셨습니다. 어지간히 하라고, 그만큼 경고했는데 그만하면 좋겠다고.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경고하시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삼손이 눈으로 자꾸 범죄하니까, 삼손이 그 눈으로 여인들을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넘어지니까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를 자꾸 즐기면 곤란합니다. 질투를 즐기는 나쁜 남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하셨으니까요. 온 땅을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거기에 엎드리고 엎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소멸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경계하셔야 됩니다.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한계는 언제까지일까요? 하나님은 언제까지 기다리고 계실까요?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가 도를 넘어서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약한 하나님이십니까? 원래 질투는 약자의 감정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약한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강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 인간의 감정을 가져와서 빗대어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제 질투가 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불이 한번 붙으면 그 다음 어떻게 될까요?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자유의지 주셨고, 말씀하고 기다리셨고,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질투하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래도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는 것입니다.

3-1.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먼저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다음 남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혹은 722년경 그 어간에 심판당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을 보십시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나옵니다. 아합 하면 우리는 구약 개론을 공부한 사람들로서 연속해서 떠올라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떠오릅니까? 아합과 이세벨, 아합과 이세벨에 대항해서 예언했던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와 아합과 이세벨, 그렇게 대결했었지요. 아합과 이세벨은 굉장히 악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 악행이 멈추지 않았고, 사실 북이스라엘을 시작했던 여로보암의 죄가 흘러 흘러 흘러 들어와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죄가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22-23절을 보니까 이제 멸망할 때 이렇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이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어떻게 했습니까?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말 속에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십니까? 자유의지 주셨고, 말씀하고 기다리시고, 참고 기다리시고, "나 질투가 나 견딜 수 없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아니하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시니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북이스라엘이 심판당했습니다.

3-2. 남유다의 멸망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혹은 586년에 멸망당했습니다. 열왕기하 25장 8-9절을 보십시오.

남유다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하나님의 질투의 불이 몰아닥칠 때 여호와의 성전부터 태워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앉아서 온갖 종교 행위를 일삼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들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전부터 불태워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예레미야의 애가입니다. 이렇게 심판당했습니다.

3-3. 종말의 심판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심판과 멸망으로 가는데, 정말 끝에는 또 어떤 일이 있을까요? 종말에는 이중적 심판이 있습니다. 이중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영생으로,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은 영원한 심판으로, 그래서 종말에는 두 가지 차원의 종말이 있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 둘째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 아닙니까? 죽음 앞에서 어떤 분은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다음 삶으로 넘어가는 분이 있고, 그런데 죽음 앞에서 두렵고 무섭고 그다음으로 건너가기 힘들어서 어려워하는 분들, 발버둥 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역사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개인의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것이 역사의 종말 아닙니까? 역사의 종말이 어떤 이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끝내는 행복한 날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정말 종말의 날이 됩니다.

그것을 계시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장 19-21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우리가 계시록 공부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국가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묵시문학 전통에서 국가 권력은 로마라고 볼 수 있겠지요. 로마 권력, 로마의 국가 권력.

"또 내가 보매 국가 권력,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이시겠지요.

"짐승이 잡히고"

짐승이 뭡니까? 국가 권력입니다. 국가 권력의 괴수가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 국가 권력에 기생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꾸로 가르치던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시대나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 백성들에게 사탕발림의 말을 전하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돈 많이 버는 게 최고라고, 절대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종말은 오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 말 탄 자가 누굴까요? 말 타고 오시는 분, 재림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말 타고 오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리스도께서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음을"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뭡니까? 말씀이지요. "성령의 검 곧 말씀을 가지라."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그 모든 악을 행하던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말씀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공중의 새가 죽은 시체를 뜯어 먹고 배부르게 됐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종말에 있을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질문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성전을 하나님은 그냥 벽돌 더미라고 생각하십니다.

심판과 사랑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사람입니다. 심판도 사람이, 사랑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4.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냥 그대로 끝, 이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지만 심판 후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습니까? 회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완전한 종말이 오기까지는 심판과 회복이 반복됩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홍수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아를 통해서 무지개 언약을 주셨지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또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유다 백성들을 70년 동안 포로 생활하게 하셨다가 다시 회복시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나중에 마지막 최후 심판의 날, 최후 종말의 날에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마지막 개인의 종말, 죽음이라는 것이 있고 이 지구상에도 역사의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대비해서 우리에게 계속 종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4-1. 마른 뼈의 환상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봅시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유다의 선지자인데, 선지자들 중에는 어떤 선지자들이 있습니까? 망하기 전에, 살기 좋을 때 예언했던 선지자가 있고, 망하고 나서 포로로 잡혀간 이후의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주로 그런 분들 중에는 여기 에스겔, 제2이사야가 포함됩니다.

에스겔을 봅시다. 에스겔 37장 4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데요, 뼈밖에 남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회복시키겠다고 작정하시면 못 회복시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 앞에는 절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될 것 같은데요? 하나님, 우리 집이 잘 되겠습니까? 우리 회사 잘 되겠습니까? 이 나라 이것 다시 회복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도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마음먹으면 반드시 회복시킨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5절에 보니까요,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 생기는 어떤 생기입니까? 창조 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티끌, 먼지로부터 사람을 이렇게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 생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시려면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면 그는 회복이 됩니다.

6절에도 계속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그래서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 가시 이렇게 걸어 다니고 밥 먹고 경제활동 하고 돌아다니는데, 하나님의 생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있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셔야 우리는 그때부터 산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거듭났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로만 살아있는 것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잘못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에게 마른 뼈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영이 없으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생기를 너에게 불어넣어 줄 테니 그때부터 너희들은 산 사람이 된다."

회복은 무엇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의 생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을 바라신다면, 우리 인생의 참된 회복과 부흥과 무너져 있는 것들이 새롭게 세워지기를 바라신다면 하나님 앞에 생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생기를 주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우리 가정에, 일터에, 내 인생에 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야 그제서야 진짜 사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생기만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포로귀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약속하신 대로 포로귀환이 됩니다.

4-2. 귀환과 회복

예레미야 25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0년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돌아옵니다. 에스라 1장 1-2절 말씀에 나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도 감동시키시고, 지금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열강들의 지도자들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십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감동시키셔야 그제서야 일이 되고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4-3. 새 하늘과 새 땅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이제는 종말로 가면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 역사의 종말에 심판이 있고 난 이후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21장 1-2절에 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종말을 소망하고 기대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이때가 그제서야 이 땅의 모든 악이 물러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만 잘하고 있으면 심판이나 종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빨리 이 험한 세상 다 지나가고 주님께서 오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할 것 아닙니까?

옛날에 어른들이 부르시던 찬송가 가사 중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이 찬송 아시지요? 저희 할머니가 늘 이 찬양을 부르셔서 제가 어릴 때부터 들었는데, 참 구슬프고 나서 가락이 애잔합니다. 그런데 고생 많이 하신 분들이 부를수록 그것이 굉장히 무게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 풍진 세상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데, 그럴수록 종말을 빨리 기대하고 주께서 오시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얼른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이 땅에서 믿음 생활 잘하고 살아야 됩니다.

5. 사랑의 하나님

마지막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창조하신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과 전지하신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운 것부터, 자유의지를 주시고 참으셨고, 말씀을 주시고 기다리셨고, 그다음에 참고 기다리셨고, 질투하시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시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다음에는 심판하셔야지요. 그런데 그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끝나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요?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데, 그 회복의 가장 단초,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속에 들어와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다 통틀어서 보니까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5-1. 메시아의 약속

사랑의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니까 임마누엘(עִמָּנוּאֵל)의 약속이 나옵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사야가 예언했던 시대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데 계시고 인간은 낮고 천한 이 땅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그랬지요. 하나님이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증거로 주신 것이,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장막입니다. 성막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내가 여기서 너와 만나 주마",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겠다"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그 이후로도 사람들은 성전 시대를 지나면서도 의심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임마누엘" 하셨고, 나중에 예수께서 오셔서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을 보니까 메시아의 약속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평화와 나음, 히브리어로 무엇일까요? 평화는 샬롬(שָׁלוֹם)이고, 나음은 라파(רָפָא)입니다. 여호와 라파, 들어 보셨지요?

우리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사람들과 만날 때도 "샬롬" 이렇게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샬롬이라는 인사는 굉장히 무거운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샬롬 앞에, 평화 앞에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대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샬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피 흘려서 살이 찢기고 피가 다 쏟아부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가 바로 샬롬입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피 값으로 누리는 평화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 어른들이 6.25 전쟁을 거쳐 가며 피 흘려서 지킨 이 나라, 한반도 아닙니까?

우리가 이 평화를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얻었는데 잘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이 평화를 함부로 넘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대가 없는 평안은 결코 없습니다. 평화는 반드시 대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치료받았습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치료하셨는데 어떻게 주셨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예수께서 대신 맞으므로 우리는 나았습니다.

이것이 메시아 약속입니다. 장밋빛 약속이 아니라 피눈물 나는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약 700여 년 전에 주신 약속입니다.

5-2. 아들을 버리심

시편 22편은 메시아 노래입니다. 메시아 노래를 보면 시편의 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장차 아들을 버리며 내 사랑을 표현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22편 14-15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어쩌면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시편 저자가 마치 본 것처럼, 마치 그리스도처럼 잘 표현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때부터 이렇게 메시아를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은 우리가 표현할 때, 아들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자유의지 주셨지요. 참고 기다리셨고 또 견디고 또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회복시키는 대신 누구를 버렸습니까?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서 천국의 빛나는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이렇게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 때문에 아들을 징계하셨고,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아들에게 채찍을 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 어떻게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꾹꾹 누르고 누르고 또 짜면 딱 하나, 한 단어가 떨어질 텐데 그 단어는 사랑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정신은 사랑입니다. 누구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를 위한 사랑입니까? 나를 위한, 우리라고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 전체에 다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 제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입니다. 원래 인간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시각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휘장이 곧 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그래서 이 화목 제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화목제물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다섯 제사 가운데 화목제가 있는데, 이 화목제는 소나 큰 짐승들을 잡는 것입니다. 소를 잡았는데 화목 제물의 소는 그날 당일에 먹지 않으면 그것은 무효가 됩니다.

소 한 마리 잡았는데 우리 식구가 열 명인데 하루에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아침에도 소고기, 점심에도 소고기, 저녁에는 소머리국밥 먹어도 하루아침에 다 어떻게 먹습니까? 온 식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눠야 됩니다. 온 동네가 다 나눠서 그것을 하루아침에 다 먹어 치워야 화목 제물이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나만 구원받고 끝내면 됩니까? 안 됩니다. 나만 먹고 배부르고, 나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성찬받고 끝내면 안 되고 나눠야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누리에 전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화목제로, 이 놀라운 사랑, 이 위대한 사랑을 자꾸자꾸 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화목 제물을 드리는 사람으로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공의와 사랑은 양립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없는 나를 무조건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세요?"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냥 웃고만 계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마치며

과제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두 번에 걸쳐 배운 내용을 한번 종이 하나 꺼내 놓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십시오. 제목만 이어서 정리를 하시고, 이 제목이 정리가 되면 그다음 소제목까지,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한번 되새김질해 보십시오. 그리고 옆에 사람 하나 앉혀 놓고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복음 제시가 됩니다.

둘째, 새롭게 깨달은 내용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기록해 봅시다. 이것은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셨군요. 저와 똑같군요. 나도 질투의 화신인데 하나님도 질투하시는군요."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 고백을 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언어로든지, 자기 말로 두 줄을 쓰든 세 줄을 쓰든 한번 기록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고 이 하나님에 대한 과를 정리하겠습니다. 다음 주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다음 주에 들어가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또 하나님의 그 기다림을 끊임없이 목 매고 기다리게 하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은 심판하셨다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배웠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무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사랑 되게 여기지 못하고 지금도 죄악된 길로 달려가는 우리 불쌍한 영혼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는 그런 귀한 주의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매일의 삶 가운데 나의 혈기대로 살지 않게 하여 주시고, 내 속에 있는 정욕을 언제나 누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내 육체로 체화되며 성육신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