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1) / 전체녹취

교리학교 3강: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1)

본문: 마태복음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아멘.

오늘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2주에 걸쳐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지난주에 숙제를 드렸는데 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하고 나면 한번 기록해 보시고 써보시고, 그리고 누군가를 붙잡고 30분만 내 이야기 좀 들어 달라고 하며 말씀을 나눠 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내 것이 됩니다. 내 것이 되고 마음에 새겨지면서, 언젠가 하나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기회가 있을 때 그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제 입술로 복음 전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제 입술로 전도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주십니다. 자꾸만 기회는 주셨는데 문제는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복음을 갈고닦고 연마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내 속에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왔다 갔다 좌충우돌하다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이야기하다가 끝나 버립니다.

그래서 잘 준비하고 그때를 위해서 칼을 갈아 보셔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그 칼을 한번 빼서 멋지게 써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 번 공부했는데 잘 새기고 내 것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도 단 한 분밖에 없는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증거를 듣지 않았고, 그들은 세상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한 번에 이루기 위하여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아들을 못 박으셨습니다. 사탄의 본성과 죄를 향한 분노는 아들 그리스도에게 모두 쏟아졌고, 그 대신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아야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 그리스도는 그렇게 이 땅에서 짧은 33년의 삶을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오늘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위대한 그의 영향력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들어가며를 읽다 보면 나에게 와닿는 게 아마 각각 다를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제가 쓸 때는 몰랐는데 써 놓고 나서 읽으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 '공의와 사랑을 한 번에 이루기 위하여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아들을 못 박으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밑줄을 그어 두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읽다가 마음에 와닿아 양식이 되는 것에 밑줄을 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

먼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예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듣긴 했는데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배워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궁금하겠습니까?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분의 이름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 물어보는 게 한자를 잘 물어봅니다. "한자 뜻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 한자의 뜻을 "부모님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지으셨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 집안의 가풍이 어떻고, 이 부모님이 이 자녀를 어떻게 길러 낼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이렇게 기도하며 길렀겠구나 하는 게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있고, 예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각각의 이름의 뜻을 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부릅니다.

그 이름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 이름의 뜻부터 잘 알고 있어야 이분은 이렇구나 하는 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름을 지었을까요?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아무나 그냥 막 던져서 지으신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분의 이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의지가 그 이름 속에 분명히 있습니다.

1-1. 임마누엘

먼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냥 바로 들어오는 게 없습니다. 항상 먼저 전조가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에도 전조가 있었는데, 이사야 7장 14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עִמָּנוּאֵל)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700년 뒤에 그 이름을 그대로 풀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래서 우리가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자녀를 가지면 태명을 짓잖아요.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진짜 이름을 짓습니다. 예수님의 태명, 우리끼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700년 동안의 태명, 나시기 전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도 그 태명을 기억하라 하시며, 너희들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했던 그 이름 기억하느냐 하시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옛날부터 불려진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고,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을 우리가 한번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믿기는 하는데, 믿어라 하니까 믿기는 하는데, 이것을 내가 과연 실감하고 있느냐, 실제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느냐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그'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는 로고스(λόγος)라고 불리는 말씀이고 곧 인격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까지 내용을 보니 '말씀'이라는 형태로 우리와 오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말씀 때문에 갈등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내 의지는 이렇게 가고 싶고, 말씀과 내가 안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증거가, 더 이상의 증거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증거를 은사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고 붙들고 있고 읽고 있고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믿으시면 되겠습니다.

1-2. 예수

임마누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고, 이제 예수님의 본 이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 오늘 우리가 읽었는데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왜 흔한 이름이었느냐 하면 예수님 시절에는 옛날에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가 짓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의 구약적 이름은 여호수아입니다. 예수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위대한 출애굽의 영웅 아닙니까? 예수아(יֵשׁוּעַ)는 스룹바벨과 더불어서 성전 재건을 했던 위대한 인물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예수아라는 이름에서 예수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당시 예수님이 사셨던 그 동네에도 예수라는 이름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지어 주셨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구원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만 봐도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실 일과 사역이 딱 보입니다. 무엇을, 왜 오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해 주는 것이잖아요. 건져 주는 것이잖아요. 나중에 우리가 인간을 다룰 때 함께 공부하게 되겠지만,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인간들을 "내가 너 구원해 줄게" 할 필요는 없거든요. 잘 살고 있는데, 문제가 없는데, 우리 인간의 상태가 도대체 어떤 상태이길래 우리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을까요?

지금 여기 '죄'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죄에 묶여 있어서 죄의 종 노릇을 하잖아요. 그 죄에 묶여 있으면 그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지으면 죄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인간이 헤어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죄, 그리고 죄의 결과인 죽음,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와 사망,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까?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모들, 육체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어떻게 불렀을까요? "예수님", "예수야", "예수 그리스도님", 어떻게 불렀을까요? "예수야" 이렇게 불렀겠지요.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지어서 부르라 하셨는데, 그 가정의 어린 자녀로 자랐기 때문에 "예수야"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그 동네 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1-3. 그리스도

그런데 뒤에 붙어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붙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렇게 붙어 있는데, 이 그리스도는 누가 붙인 겁니까? 도대체 누가 붙인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모들은 처음에 예수님에게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붙인 것입니까? 최초로 붙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을 고백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은 원래 하나의 문장입니다. 문장이라는 말은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축약해서 딱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원래 원형으로 말하려고 하면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원래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에서는 메시아(מָשִׁיחַ)입니다. 메시아라는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기름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우리 예배학교 할 때 제사장의 위임식 할 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출애굽기 29장 7절에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라고 나옵니다. 관유가 무엇입니까? 여기 '관(灌)' 자가 '붓다' 하는 글자입니다. 한자에 물 수변을 써서 '붓다' 하는 관자인데, 관유는 붓는 기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감람나무 기름, 감람유, 올리브 나무 기름입니다. 올리브 나무 기름에다가 각종 향기 나는 것들을 같이 모아서 관유를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을 위임할 때, 제사장을 세울 때 관유 즉 감람나무 기름을 부었습니다.

제사장만 기름을 부어 세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6절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엘리야에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너는 가서 내가 정한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워라. 내가 정한 사람을 선지자로 기름 부어 세워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그러면 왕 세울 때 기름 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나옵니다.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선지자를 세울 때도 기름을 부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 때 기름을 붓는 직책이 세 직책이 있었는데 성경에서 딱딱딱 나옵니다. 제사장 세울 때, 왕 세울 때, 선지자 세울 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통칭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했는데, 메시아가 그리스도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신 고난 이후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증거를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이 신앙고백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문장으로 세 문장으로 풀 수 있겠지요.

첫째, 예수는 왕이십니다. 둘째, 예수는 제사장이십니다. 셋째, 예수는 선지자이십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냥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 안에는 사실은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왕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치하시지요. 그런데 그 왕은 폭군이십니까? 아니면 선왕이십니까? 선한 왕이시지요. 무엇으로 통치하십니까? 법정, 왕의 법장이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왕 중의 왕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시는데, 제사장의 역할은 죄를 지어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을 제사를 이렇게 받아서 하나님께 어필해 주고 연결해 주는 역할입니다. 중재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선지자는 당연합니다. 말씀을 주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언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왕 되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에게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당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요. 다 기도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저는 당신이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의 뜻은 이러합니다. 질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답을 드렸지요. 베드로가 시작했고,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초대교회의 공동체로 이어졌습니다. 원래는 사도신경을 우리가 지금 예배 때도 공예배 때도 함께 암송하지만 옛날에는 사도신경이 없었잖아요. 초대교회의 첫 신조, 한 문장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 한 문장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2-1. 성령으로 잉태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먼저 세례 요한이 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1장 36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예수의 오심을 먼저 예고하고 예비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과 20절을 보시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을 했는데, 정혼 기간 동안에 마리아의 배가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남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여인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조금 전에 성경에는 그냥 나오는 법이 없다, 전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 시대의 예표와 전조가 있었는데, 기억이 나십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을 때 이와 같은 형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을 때 자신의 육체로 낳은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자녀를 주겠다" 했잖아요. 주겠다 해 놓고 하나님이 주려고 한 것입니다. 네가 낳도록 하나님이 너를 도와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진짜 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남자로서의 기력이 다 끊어지고, 사라의 월경이 다 끊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요. 하나님은 "그런 자식 100명 나도 네 자식 아니다, 인정할 수 없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인간적 소망이 끊어지고, 사라에게도 모든 소망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녀를 주셨습니다.

누구 자식입니까? 아브라함 자식입니까? 사라 자식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나중에 이삭을 바칠 때 그때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 이게 내 자식이 아니고, 나에게 내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 자녀구나." 이것을 깨달았으니까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지금 예수님도 이 과정에 똑같이 오셨습니다. 구약의 예표대로 똑같이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을 통해서 태어난 자녀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고, 동시에 구약의 예표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그 예표를 보여 주신 바가 있는 사건입니다.

2-2. 복잡했던 시대 상황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면 동방 박사가 헤롯을 찾아갔는데, 헤롯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왕의 별을 보았습니다. 왕의 별을 따라왔는데 왕이 어디서 나시는지 알고 계시면 알려 주십시오." 헤롯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에돔 사람 헤롯은 로마에 가서 많은 돈을 들여서 권력을 샀잖아요.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받아 왔잖아요.

그런데 진짜 왕이 났다고 하니까 이것을 해결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나중에 동방 박사가 헤롯에게 가지 않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해서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신하셨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 헤롯이 화가 나서 그 인근의 2세 미만의 아이들을 다 사육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국제 상황, 정세가 이렇게 복잡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태어나기 전에 먼저 오신 분도 있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탄생하셨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시대 상황은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3. 열두 살의 예수님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새총 갖고 장난치다가 남의 창문도 깼다, 이런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말씀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은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46절에서 47절, 이 사건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라면 요즘 우리 나이로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는 아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특성을 아시지요. 제멋대로 하고, 연예인 좋아하고, 텔레비전 좋아하고, 부모한테 대들고 화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땠는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없어지셨습니다. 부모가 사흘 길을 돌아 돌아 돌아가 보니까 성전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는 게 이 말이 참 의미가 있지요.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계셨는데 무조건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듣는 것을 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어 주시고 그리고 말씀하시고, 듣고 말하고, 예수님은 항상 어릴 때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을 잘해야 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해야 그다음 말할 수 있습니다. 듣지 않고 무작정 말만 하면 그 관계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이렇게 하셨습니다.

공생애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성경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3.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이제 공생애로 넘어가야 되겠지요. 공생애로 넘어가 보면 공생애에서 예수님의 모습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중보자입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려면 여러 가지 생각하시지 마시고 제목을 한번 보십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과 인격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여기서 '사람과 인격'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란 뜻입니다. 나와 내 인격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네 가지 중보의 역할을 잘 수행하셨던 분입니다. 중보라는 게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화해자 아닙니까? 서로 싸우는 이 두 사람에게 "야, 너도 이리 와 봐. 너도 이리 와 봐. 자, 둘이 손 잡아.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해. 약속해. 도장 찍어." 이것이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단순한 중보자 역할을 주님은 감당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심으로? 자기를 내어 주심으로 우리 주님은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3-1.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이사야 53장 5절과 6절은 우리가 지난주에 하나님 공부할 때도 읽었던 본문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완벽, 완전, 온전, 정의, 깨끗함 아닙니까? 죄는 비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그 죄를 아들,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채찍의 징계를 받음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아들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졌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샬롬(שָׁלוֹם)의 평화, 라파(רָפָא)의 나음, 이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누구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계속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 주신 주님, 그런데 제가 그 연결에도 불구하고 또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 더 하나님께 말해 주세요."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로 나아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3-2.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중보자 그리스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연결합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너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너희는 멀리 있던 너희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그리고 복음 안에 있는 자들과 복음 안에 있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너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엇으로 가까워졌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방인과 유대인은 원래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행동이나 유대인들의 하는 행동을 보면 정말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성향이 조금 달라도 "아, 저 사람 나하고 너무 다르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질이 조금만 달라도 "야, 저 사람하고는 1년을 두어도 될 수가 없겠구나. 원래부터 다른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도 중간에 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오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의 피를 진심으로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의 능력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화평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과 14절을 보니까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남편도 죽고 아들 하나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잘 키워 놓은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너무너무 슬프게 우는 그 어머니 때문에 주께서 가슴 아파하시고 청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예수가 중간에 들어오니까 죽음의 권세가 사라지고, 아들을 잃었던 어머니와 죽었던 아들이 새롭게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도 예수가 들어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저 사람 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예수께서 저 사람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 그것 하나를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3-3. 사람과 자연 사이

세 번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우리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땅이 무엇을 내었습니까?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 이것은 자연이 저주하는 것이거든요.

그 마른 땅에서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아무리 땅을 갈아도 기름진 옥토가 되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만 계속 내고 농사가 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시면, 하나님이 정말 가시떨기와 엉겅퀴만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타락하고 난 이후에 자연과 인간이 서로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자연이 회복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이사야 65장 25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맹수가 탈출했다가 사살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을 볼 때마다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아직까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면 자연과 인간이 다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우리는 자연을 마구 써도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잖아요. 하나님이 지구도 만드셨고 강도 만드셨고 바다도 만드셨고 이 자연 만물을 다 만드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안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트병 같은 것을 줄여야 되겠고, 종이컵 같은 것 덜 써야 되겠고,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할 수 있는 최대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사랑하고 아껴야 될 의무가 우리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3-4. 사람과 인격 사이

그다음 단계 보시면 사람과 인격입니다. 우리 속에는 또 다른 인격이 있습니다. 내 속에는, 사람은 누구나 이 분열된 자아를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왜 그랬는지,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해서 지금 이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과거의 자기를 용서하지 못해서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시면 죄 가운데 살았던 우리 인격을 치료하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뭐예요?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 병자에게 주께서 하셨던 말씀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죄는 어떻게 자기가 사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 앞에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지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세리와 죄인은 창기들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창기들을 함께 식사 자리에 많이 초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만큼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분들이 없거든요. 창기로 사는 것을 좋아서 그렇게 살겠습니까? 세리로 사는 것을 기뻐서 그렇게 살겠습니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그 관성에 의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죄를 사해 주시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집에도 주께서 들어가시고, 많은 사역들을 통해서 죄인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시면 과거에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인격이 용서되고 치유가 됩니다.

맺음말

중보자 그리스도, 네 가지의 중보 사역을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둘째, 사람과 사람. 셋째, 사람과 자연. 넷째, 사람과 그 인격입니다. 네 가지의 중보 사역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명절에 가셔서 토론을 한번 해 보십시오.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요? 이런 토론을 아주 심각하게 한번 해 보십시오. 나중에 우리가 이 구원에 대해서 다룰 때 그때 한번 충분히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오시기 전 구약 시대 사람들, 혹은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돌아가셨던, 이 땅에 오셨다가 죽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또 다른 대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하시고, 충분히 토론도 해 보시고, 묵상도 해 보시고, 생각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말씀을 배웁니다. 귀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역을 오늘 우리의 삶에 새롭게 되새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시고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자를 욕하지만 우리도 종교다원주의를 오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주님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섬기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들, 사람과 사람, 또 사람과 자연, 우리와 우리 인격을 중보하신 그 주님의 중보 사역에 기대어 오늘도 하나님께 나아가며, 우리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과 화해를 도모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를 사랑하며, 내 인격을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