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2) / 전체녹취

[교리학교] 4강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2)

본문: 민수기 21장 8-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1. 목적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보통 사람들은 '목적'이라고 하면 나의 목적, 나의 뜻을 먼저 떠올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꿔 말하면 무엇 때문에 사시고, 왜 사시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솔직한 대답이 있고, 조금 각색된 대답이 있을 것이고, 아주 많이 각색된 대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생은 하나님의 목적만을 생각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1-1. 아버지의 뜻, 상함과 십자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을까요? 이사야 53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시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상함'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의 상함을 원할까요? 우리 육체의 아버지 중에는 자식의 상함을 원하는 분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서 아들의 상함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상함을 원하시는구나, 나는 상해야 되고, 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어야 되는 존재이며,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기억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10절 끝에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할 이로다"라고 나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의 상함,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때가 되면서 자신의 목적을 가끔씩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난 예고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세 번 하셨는데, 그중 한 번이 마가복음 8장 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나옵니다. '비로소'라는 말을 보니 첫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도, 공생애 이전 30년의 개인적인 삶을 사시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계셨고, 공생애의 삶을 사시면서도 그 분주하고 바쁜 가운데에도 "나의 유일한 목적은 십자가 지고 죽는 것이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1-2. 때를 분별하시는 그리스도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동생들이 아직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거듭남을 경험하기 전이었습니다. 이 동생들이 예수께서 환자들도 고치고 오병이어도 행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니, 우리 형님이 이 시골에 붙어 있기는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 지금 초막절 잔치가 다가오니 여기 계시지 마시고 예루살렘 수도로 올라가셔서 거기서 당신의 이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마음껏 보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7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의 때는 어느 때입니까? 인기 얻고 유명하게 되는 것, 지금 초막절에 올라가서 환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때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누가 옆에서 부추겨도, 누가 옆에서 바람을 잡아도, 자꾸 정당성을 부여해 주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분명한 때가 있다면 그 시기와 그 목적이 있다면 사람들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걸려 넘어지고, 사람들이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고 바람을 잡으면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1-3. 말씀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마태복음 21장 2절에서 4절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는 그 예언이 구약 성경 스가랴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예언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 나귀를 타야 되겠다, 나귀를 풀어 와라"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 끝 4절에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예언된 구약의 말씀을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빠짐없이 다 성취시키고 이루기 위한 삶을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도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 상함, 죽음, 십자가, 고난, 부활 아닙니까? 이대로 나는 간다, 기록된 대로 간다, 말씀에 있는 그대로 나는 간다. 우리 주님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1-4. 기도와 말씀으로 뜻을 아는 삶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아버지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실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대로 사셨을 텐데,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 같은 아들이 아니고, 나는 평범한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인데, 나도 목적을 알면, 하나님이 나를 향한 목적을 알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살 텐데, 나에게는 도무지 뭘 하라고 하는 건지 알지 못하겠다, 나는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힌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향한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 줄기를 꽉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원하시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늘에서 한 분이셨는데 당연히 아시죠. 그런데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본을 보여 주시려고, 우리 이 미련하고 연약하고 모자란 인간들이 이런 질문을 할까 봐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 뜻을 알까요?" "나는 어떻게 비전을 발견할까요?" 이런 질문을 할까 봐 우리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7절,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에 대응하시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두 번째 시험도 이렇게 이기셨고, 10절에도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 하시며 우리 주님은 말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사탄의 시험도 이겨내고,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잘 이루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삽니까? 여러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지금 인생의 중반 혹은 후반, 종반을 걷고 계신데 하나님은 나에게 뭘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됩니까?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 그 안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비전은 보는 것입니다. 그냥 내 임의로 본다는 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들려주신 것을 보고 깨닫고 듣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놓치지 말고 꼭 붙들고 있어야, 우리도 돈을 쫓아가는 그런 인생 말고, 사람 쫓아가는 그런 인생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뜻을 쫓아가는 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제자를 키우시는 그리스도

이제 우리 예수께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는데, 자기 혼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끝난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주님이 키우신 제자는 이 땅에서 몇 명입니까? 영향력을 끼친 제자는 엄청나게 많죠.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께서 훈련시킨 제자는 몇 명입니까?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실패했습니다.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께서 키워서 그들이 예수 닮은 제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까지 쓰임받은 제자는 열한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대형 교회를 목회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으셨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군중들을 자랑하셨습니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수많은 무리들이 모였을 때,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을 '무리'라고 표현해 버렸습니다. 군중, 무리, 이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존재들입니다. "예수에게 가서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예수께 가서 배고픔을 해결할까? 예수께 가서 병을 고침받을까? 예수께 가서 내 인생 문제가 해결될까?" 여기에만 목적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때 제자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들, 그런 제자들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열한 명이나 길렀습니다. 그 한 명 한 명이 대형 교회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베드로가 한 일을 보세요. 요한이 한 일을 보십시오.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 한 명 한 명이 아주 위대한 교회가 됐습니다.

2-1. 부르심 - 소명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를 키워오셨는데, 어떻게 키워오셨는가? 첫째, 제자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불러야 되죠. 이것을 콜링(calling)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콜링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명과 사명은 구별해야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마가복음 3장 13절에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원하는'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누구 추천받은 적도 없고, 다 불러놓고 번호표 나눠주고 시험 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보시고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꼭 필요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입니다. 그 열두 명의 면면을 보세요.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4절을 쭉 보면 어부도 있고, 세리도 있고, 그들의 친구도 있고,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죠.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르실 때 특정 계층의 사람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아주 고결하고 깨끗하고 누가 보더라도 "저 사람은 천국 백성으로 훈련받아서 잘 쓰임받을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만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질이 급한 베드로도 부르셨고, 우뢰의 아들이라고 하는 보아너게도 주께서 부르셨고, 가슴에 늘 칼을 차고 다니던 셀롯인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돈을 항상 도둑질하는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불러서 이 자리에 모인 공동체 아닙니까? 교회 안에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있겠습니까? 열두 제자도 얼마나 싸웠습니까?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 하고 싸우고, 예수님 가시는 길 위에서도 싸우고, 서로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분열로만 가면 안 됩니다. 그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부대끼지만 서로 용서하고 서로 격려하고, 이런 모습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또한 "나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우리가 예수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누가 돈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나와 있습니까?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는 그 능력의 힘에 이끌려서 홀연히 정신 차려 보니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제정신으로는 나와 있을 수 없는데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증거이고, 나를 보면 주께서 오늘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 가르침과 본

제자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소명을 주셔서 불러놓고 그다음 주께서 뭘 하실까요? 불러서 차근차근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교회로 모인 우리는 배워야 되겠죠. 세상 지식 자랑하고 "나는 다 압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누가 나왔습니까?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무리들이 많은데 예수께 배우려고 나온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그때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가르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팔복 아닙니까? 팔복으로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굉장히 수준 높고 굉장히 어렵고 달성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간혹 짓궂게 질문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에서 6절에 보면 빌립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자만 5천 명, 여자 어린아이까지 하면 약 2만 명 정도가 구름떼같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주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이것은 예수님이 빌립의 성향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빌립을 시험하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갑자기 던지는 퀴즈 같은 것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르고 생각이 빠르고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성에 의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깊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적이나 초월적인 것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가 계산한 대로 대답해 버립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떡이 부족하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면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200명이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 수 있는 임금입니다. 그만큼의 돈이 지금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가 한 번에 해결해 주겠다"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불러서 성경 공부도 시키고, 그 사람의 인간적인 약점을 아시니 질문을 하시고, 보여 주시기도 하시고,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3장 34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라고 합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잘 모르니까요. 천국 가 봤습니까? 안 가 봤잖아요. 제자들이. 그래서 천국 이야기를 하실 때는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해서 기도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식적인 가르침으로 끝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진짜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되잖아요. 선생이. 그래서 선생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 말하고 가 버리는 사람은 쉬운데, 1년 이상 학생들과 부대끼고 서로 호흡하는 사람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혹은 십수 년, 수십 년을 함께 가르치는 사람은 여기에서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 입으로 하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본인이 한 말대로 살지 못하니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뭐 저렇게 사는데, 우리 선생도 저런데 나라고 뭐" 하고 뒤로 자빠지는 것이죠. 그런 인생들이 너무나 많은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을 보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더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 9:35-36) 어떻게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직접 주님은 가르치고 고치기도 하시고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선한 목자"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어떤 목자입니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절정이 어디입니까?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왜 목숨 버린다고 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10장에 그렇게 말씀해 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안 죽고 도망가 버리면, 그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따를 수가 없죠. 죽지 않는데. 본인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했으면 버려야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본으로, 삶으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2-3. 보내심 - 사명

불렀고, 가르쳤고,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이쯤 되면 제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이제 감동을 좀 받겠죠. 자기도 사람이라면 그쯤 되면 마음이 좀 뜨거워지고, "아 이번엔 좀 다르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감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렇게 됐을 때 예수께서 가르쳐서 뭘 하시려고 했을까요?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냥 가르쳐서 데리고 있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께서 자기 졸개 만들려고 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만드신 목적은 자기 졸개, 자기는 왕초 하고 졸개 만들려고 한 게 아닙니다. 앵벌이 시키려고 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요? 세상으로 보내서 세상에 나의 사랑을 전하고 전파하고, 또 전해서 세상을 변화시켜라, 너희가 작은 예수가 되라, 그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보내시잖아요.

마가복음 6장 7절, 8절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행연습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미리 연습을 시킨 것이죠. "한번 해 봐, 너희 둘씩 한번 가 봐. 혼자면 위험하고 혼자면 두려운데 둘이면 할 수 있으니까 2인 1조, 여섯 조 만들어서 한번 가 봐" 하고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 연습도 시키시고, 그리고 진짜 실전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셨습니다. 가라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승천하시면서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끝까지 이르러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목적은 애초에 부를 때 목적이 무엇입니까? 보내려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디로? 세상으로.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잘 구별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정 목사가 자기 졸개 만들려고 하는지 아니면 예수 제자 만들어서 세상으로 보내려고 하는지 이것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니까 맹목적으로 목사에게 충성하고, 맹목적으로 자기 예배당 교회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질되고 타락하고 교회가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열한 명을 불러다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자기 졸개 만들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배워야 되는데 교회 안에서도 줄 세우기 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밑에 줄 세우고, 나를 따라다니라고 하고, 굉장히 나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줄 서면 안 됩니다. 사람에게 줄 서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고, 이 사람 따라다니면 뭔가 나올 것 같고, 이 사람 따라다니면 직분이 생길 것 같고, 그러면 같이 망합니다. 같이 망해요.

우리는 다 예수의 제자이지 사람의 졸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현혹되지 마시고 우리는 다 거룩한 예수의 제자입니다. 누구의 명령도,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면 아니라 할 수 있고, "그런 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님 말씀대로만 따라가서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야죠. 왜 자꾸 좁은 교회 안에서 갇혀 가지고 서로 짓밟고 싸웁니까?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만이 아니라 사람을 불러서 훈련시켜서 보내신 것, 그렇게 하고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변에 질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 가운데에 왜 열두 명만 제자로 택하셨는가? 이 열두 명도 사실은 굉장히 많은 숫자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한 명 한 명이 대형 교회보다 더 강력한 파워가 있다고요. 교회 반쪽 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목사 졸개 만든 교회를 보시면, 한번만 살짝 사탄이 지나가도, 폭발 한번 불듯 지나가도 반쪽 납니다. 흔들립니다. 다 박살납니다. 그렇게 해서 무너진 교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정말 반석 위에 굳게 선 제자가 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 따라다녔기 때문에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 따라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는 무엇이 다른가? 아까 말씀드린 바 그대로입니다. 무리는 자기 욕심을 따르고, 제자는 그리스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3.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해방이라고 하면 우리는 언어적으로 무엇을 생각합니까? 먼저 포로 된 것을 생각하겠죠. 묶인 것을 생각하겠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광복절 하면 일제로부터의 독립 아닙니까?

그래서 이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가 우리 인간들을 무엇으로부터 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죄로부터. 죄의 값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그것을 무엇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이 제목 아닙니까? 죄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무엇을 통한? 십자가를 통한 해방.

이것을 머릿속에 넣으셔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 한 가지 테마, 주제는 해방자이신데,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죽음으로부터 풀어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십자가 안에서 죄도 풀어주시고, 십자가 안에서 예수께서 죽음도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3-1. 죄로부터의 해방

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 사건은 출애굽 사건에 있습니다. 첫째로 민수기 21장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매고 다니다가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무지하게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니, 불 뱀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뱀에게 물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이 퍼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긴 장대에다가 놋으로 뱀의 모양을 만들어서 높이 달아라. 이것을 본 자마다 살아날 것이다."

장대에 달린 뱀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 아닙니까? 죄로 인해서 온몸에 독이 퍼져가는 우리 인생이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이것은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수 조건입니다. 무조건 봐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돌려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죄로부터 살 수 있습니다. 독이 막 퍼져가는데 그것이 딱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사망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때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3-2.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두 번째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열 번째 장자 재앙입니다. 장자 재앙을 막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피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가 그 십자가 안에 있기만 하면 죽음의 사자가 감히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지나갈 것 아닙니까? 유월절, 패스오버(Passover), 지나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두 가지 사건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장대에 달린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십자가에 묻은 피, 이것이 죄로부터의 구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 십자가의 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능력입니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사망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 능력, 놀라운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이 다 해결됐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이 두 가지 아닙니까? 죽어라고 밥 먹고 열심히 돈 벌면 먹고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것 이룰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내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 속에서 자라나는 육체적 인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이루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매여 있었는가? 죄와 사망인데, 이것을 구체화시켜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에 매여 있었다, 물질에 매여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들에 매여 있었다.

시편 1편과 관련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정의한다면,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나무는 자기 마음대로 못 다닙니다. 그냥 뿌리를 내리고 거기 평생 영원히, 나무가 생존하려면 그것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있을 게 아니라 말씀으로 대변되는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매여 있는 것 같고 부자연스러운 것 같죠. 항상 교회 중심, 예배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게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귀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4. 인간의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가야 될 분이 되시겠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고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버렸습니까? 버렸습니다. 삶의 목적이 된다고 했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가 죽으러 갔습니까? 못 갔습니다. 한 번 실패했는데요. 나중에 결국 성령의 은혜를 받고 베드로도 도마도 본인이 이렇게 공언한 대로, 신앙고백한 대로 삶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로 두고 그렇게 삶을 마쳤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한낱 썩어 없어질 물질 같은 것에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고 사시기 바랍니다.

4-1.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가 예수가 되시는데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게 있었는데요. 도대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고 하면 가능한 얘기인가 불가능한 얘기인가? 불가능한 얘기잖아요. 불가능한 것을 성경에 왜 써 놓았을까? 되지도 않을 일을, 하지도 못할 일을, 맨날 이렇게 등락을 거듭하는데, 잘하기는커녕 자꾸만 까먹고 많이 잊는데,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 만약에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목적을 어디에다 두고 살겠습니까? 내가 닮아야 될 어떤 믿음 좋은 아무개 장로님, 권사님, 목사님, 뭐 이런 사람들을, "저 분처럼 내가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라고 삶의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굉장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분이 넘어지면 나도 같이 넘어지니까요. 사람은 절대로 따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따라다니면 안 됩니다. 절대로 따라다니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목적이 되시니 그리스도를 좇아 따라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죽을 때까지 우리는 호흡이 끝날 때까지 예수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부족하겠죠. 그래도 어렵겠죠. 그러나 노력하고 애써야 됩니다.

4-2. 따름의 요구

다시 복음으로, 우리가 따라가야 될 그리스도는 사도행전 1장 11절에 보니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우리도 천국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부활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영혼이 부활 얻는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따라야 종국에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따름을 요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가볍게 가겠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무엇인가, 이것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이것을 잘 찾으시고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때 십자가가 무거워야 제맛 아닙니까? 가벼운 게 그게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는 "아 가볍다" 그것은 십자가 아닙니다. 질 만한 것은 십자가 아닙니다. 무거워서 너무 져야 십자가입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파지고 박살이 나야, 그래야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만한 십자가를 상상하시는데 질 만한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행용 가방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매 맞고 또 넘어지고, 그래서 도저히 안 돼서 옆에 한 사람 시켜 가지고 대신 지게 할 만큼 무거운 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가벼이 생각했다면 생각을 다시 하셔야 됩니다. 지금 내 몫으로 얻은 십자가가 가볍다 그러면 그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 나에게 어떤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입니까?" 이것을 잘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그것을 지고 따라가야 우리는 예수의 제자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그럼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답이 있겠죠. 따르고 있다면 어떤 면에서 따르고 있는지, 따르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면에서 따르고 있지 못한지, 어떤 면이 나오면 무엇을 고쳐야 될까? 잘 생각해 보시고 집에서 신랄하게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의 교회를 보시면 또 우리 교회를 보시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겠습니까? "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아" 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오늘 이 시대의 교회들, 오늘 이 시대의 우리 교회를 보시고 주께서 하실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시고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칭찬 한 가지는 있어야죠. 한 살아가죠. 혼나도 그 한 가지 칭찬만큼은 있어야죠. 칭찬받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5. 그리스도와 이단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2천 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오늘은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최신판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정리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을 때,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첫째 "웃기고 있네" 그냥 듣지도 않는다. 둘째는 "저런 신성모독" 셋째는 "미쳤구나" 뭐 이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얼마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중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승천해 버리셨습니다. 다 보라고 다 모아놓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증거를 보여 주시려고. "너희들 본 그대로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람들에게 40일 동안 계시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죠. 왜 그러셨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보이고 입증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초대교회에 정말 많았습니다. 여기서 초대교회 초기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약 400년에서 600년까지를 말합니다. 약 400년 이상까지 계속해서 예수와 관련된 이단들이 창궐했습니다.

5-1. 초대교회 이단

그중에 첫 번째는 영지주의입니다. 영지(靈知)는 영적인 지혜입니다. 신령(神靈)할 때 영(靈)자입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가 더럽지 않습니까? 추악하고, 우리는 손만 뻗으면 죄짓고, 생각만 하면 죄짓고, 밖에 나가면 죄의 오물을 뒤집어쓰는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 아들 예수가 어떻게 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올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습니다. 가짜 가(假), 나타날 현(現), 가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진짜 육체가 아니다, 진짜 육체라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가현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뭐가 문제가 생길까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뭐가 되죠? 하나의 대단한 쇼가 됩니다. 그냥 피 흘리는 척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가짜로 죽은 척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 이단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100년 혹은 200년 혹은 300년까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번째는 양자론입니다. 이것은 에비온주의자들, 에비온파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말 그대로 양자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반듯하게 잘 자랐습니다. 하는 것을 보니 너무너무 괜찮은 청년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의로움이 있습니다. 세례받을 때 하늘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들었습니다. 그때 양자로 택함받았다, 그때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양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양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인간인 것만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간인 것만 믿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참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죠. 이단이죠. 그 당시에 우리가 살았으면 우리도 양자론자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는 네스토리우스파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서기 400년 이후에 나타난 사람인데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출신입니다. 이 사람은 역시 양자론자들처럼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했습니다. 신성도 조금 인정하긴 했는데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만 강조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되었겠죠.

이단으로 정죄되니 사람들이 일단 동쪽으로 넘어갔습니다. 페르시아로. 그 페르시아 사람들은 낙타 타고 교역을 하던 사람들이잖아요? 낙타 타고 교역을 하고 다니다가 어디까지 갔느냐면 당나라까지 왔습니다. 당나라 태종을 만났습니다. 당태종 아십니까? 당나라에 와 가지고 당태종이 이 종교를 받아들이고 경교(景敎)라고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경(景), 빛의 종교라고 그럴듯하죠? 빛의 종교라고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나중에 이 당태종이 받아들였던 이 경교가 통일신라시대 선덕여왕 2년에 신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라시대 경주에도 가면 여기 경교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경교의 십자가 문양들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셨습니까? 많이 들어보셨죠?

아무튼 이런 이단인데, 네스토리우스파는 여기 영지주의나 양자론자들에 비해서 훨씬 더 완화된 이단이었습니다. 삼위일체는 부정했으나 그러나 훨씬 더 완화된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당나라로 그리고 신라로 들어왔을 때는 거의 거의 하나님, 예수님, 성령까지 언급하고 있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5-2. 현대의 이단

현대의 기독론 이단입니다. 기독론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수님을 가지고 이단들이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말 그대로 여호와만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은 하나의 선생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둘째, 몰몬교입니다. 몰몬교의 원래 본 명칭이 무엇입니까?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라고 들어보셨죠. 이게 몰몬교의 공식 명칭입니다.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인데, 몰몬교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고, 그리고 영혼이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그대로 이 땅에서의 지식과 이 땅에서의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산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영혼이 도덕적으로 살았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낙원과 지옥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행위 구원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몰몬교는 크게 이단입니다.

셋째, 안식교입니다. 안식교는 제7일 안식교로, 토요일날 집회를 합니다. 그런데 토요일날 집회한다고 해서 이단이라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토요일날 집회한다고 해서, 토요일날 예배 드린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이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식교를 중간에 크게 부흥시켰던 엘렌 화이트라는 여성이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보다 이 여인의 계시를 더 상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분의 계시로, 그분이 말한 것, 그분이 환상 중에 봤던 것을 예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이단이죠.

그리고 이들은 죽으면 영혼이 그대로 소멸한다고 믿습니다. 죽으면. 그래서 지옥이 필요 없다, 지옥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안식교도 이단으로 정죄받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이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많습니다만 이 정도까지 하겠습니다.

과제

성경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에 걸쳐서 공부를 했는데 혼자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 번, 세 번 반드시 읽고 혼자서 정리해 보시고, 옆에 사람 앉혀놓으시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쭉 풀어서 말씀을 쭉 해 보세요. 그래야 내가 정리가 됩니다. 예수 30년 40년 믿었는데 예수에 대해서 정리해서 말하지 못하면 그건 제대로 믿은 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정리하고 전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히 잘 기억하시고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를 우리가 믿고 받았으니,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그 예수를 믿었으니,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따라오라 하시니, 우리 몫으로 얻은 십자가를 지고 담대히 주님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세상의 헛되고 썩어질 물질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예수만 믿고 따라가는 참된 복음의 전사들이 되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훗날 천국에서 주님 만날 때 "수고했다, 애썼다, 잘했다" 칭찬받는 훌륭한 천국의 백성들이 될 그 위대한 소망 한 가지 가지고 이 땅의 험한 세상 이겨내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