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2) / 전체녹취

교리학교 6강 -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오늘은 성령님에 대해 두 번째로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두 번, 예수님에 대해 두 번 공부했고, 오늘 성령님에 대해 두 번째로 살펴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런 분이십니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도록, 듣기만 하지 마시고 훈련하시고 연습하시며 직접 써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성령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오해하신 겁니다"라고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 성령은 선물이다

오늘은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성령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말이 나오는데, 선물은 어떤 느낌입니까?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을 받아 보시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진짜 선물은 달라고 떼를 써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는 분이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을 헤아려서, 그 속사람 깊은 것까지 헤아려서 "이게 꼭 필요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주는 것, 이것이 진짜 선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선물이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미리 말합니다. 연애하는 젊은이들은 문자도 보내고 해서 "내 생일이 언제인데 이거 해달라"고 합니다. 가끔 심방을 가서 보면 달력에 크게 동그라미를 쳐서 "내 생일"이라고 적어 놓는 분이 계십니다. 이게 무엇이냐고 여쭈니, 하도 남편이 자기 생일을 잊어버려서 크게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적어 놓으면 효과가 있느냐고 물으니,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일이라고 동그라미 쳐서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생일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뭐하지 말고 이것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받는 것이 정말 선물입니까? 이건 선물이 아니고 세금에 불과합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납부해야 되는 생존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 이날 이때 이렇게 성령 주십시오"라고 동그라미 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살펴보시다가 꼭 필요하니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하니까 주시지 않겠습니까? 별 시답잖은 것을 주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다이아몬드 반지 아주 좋은 것과 성령,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이 교회에서 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보다 돈을 추구하고, 눈에 보이는 선물을 더 하나님께 갈망합니다. "하나님, 이것 필요합니다. 저것 필요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그것보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지난주에 공부할 때 마지막에 말씀드렸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열이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으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항상 매여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한복음 16장 7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누가 보낸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나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 베드로의 설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개역개정 성경에는 "성령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고, 예전 성경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별 차이가 없는 번역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령을 아무에게나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원의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1-1. 성령 임재의 유형

그런데 성령을 주실 때 각 사람에게 각양 다른 방식으로 주십니다. 크게 한두 가지 유형 정도가 있습니다. 성령 임재 유형이 있는데, 어떤 유형으로 오느냐 하면, 크게는 바울처럼, 또 크게는 디모데처럼 성령이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을 받았던 것처럼 임하는 경우가 있고, 디모데가 성령을 받은 것처럼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도폭발 공부를 해보면 간증문을 쓰게 됩니다. 전도폭발 공부를 하면 자기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며 간증문을 쓰는데, 그때 간증문에 두 가지 유형의 간증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바울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디모데형입니다.

바울형은 어떤 간증입니까? 어쩜 드라마틱하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뭔가 사연이 많습니다. 사연이 많은 인생, 할 말이 많은 인생입니다. 바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중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할 말이 많습니다. 바울처럼 좀 유별나게 하나님을 만난 분들, 성령도 바울처럼 임한 분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형은 어떤 유형입니까? 디모데형 간증은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별로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적도 없고, 이렇게 보면 평탄하게 쭉 지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가 주가 아니시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 디모데형입니다. 성령도 디모데처럼 우리에게 임해서, 아주 물 스며들듯이 아주 자연히 조용히 임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것을 갈망하지 않습니까? "나도 바울처럼 이렇게 성령 받아 봤으면, 나도 바울처럼 이렇게 좀 유별나게 성령 체험을 했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서 5절에 보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십니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렇게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아, 저분이 예수를 만났구나, 저분에게 성령을 경험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런 유형은 처음부터 예수를 믿은 유형이 아니고, 중간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붙드셔서 완전히 돌이켜 놓은 유형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한번 보십시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디모데후서는 디모데가 믿음에 있어서 굉장히 침체되어 있었을 때 쓰인 편지입니다. 목회하다가 "내가 목회를 잘하고 있나, 내가 가는 길이 잘 가는 길인가, 나는 바울보다 너무 모자라고 부족한 것도 많은데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후서 편지를 써서 용기 내고 힘내라고 편지해 준 것입니다. 거기서 말합니다.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네 속에는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 용기 내라 하는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대를 이어서 외조모로부터 어머니에게, 어머니로부터 디모데에게 믿음이 대를 이어서 전해진 집안의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어릴 때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습니다.

이런 유형이 사실 "내가 성령을 받았느냐, 내가 성령이 임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헷갈립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것이 성령 임재의 확신이냐, 내가 어떨 때 성령이 나와 함께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은 뜨거운 체험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이 지정의로 역사하시니까, 알고 싶을 때, 감정이 뜨거워질 때, 의지가 생길 때, 그때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나를 깨닫게 하시고 평안도 주실 때, 그때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는 그렇게 성령이 임해서 서서히 성령이 그 속에서 자라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제일 처음에 우리 마음속에 떨어질 때, 디모데처럼 이렇게 떨어질 때는 아주 작은 씨앗처럼 떨어집니다. 바울처럼 들어올 때는 어떻게 떨어집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전봇대 내려가 꽂히듯이 그렇게 떨어집니다. 그러면 지진 나듯이 땅이 울립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고 "아, 이 심령 속에 전봇대가 꽂혔구나, 아, 이렇게 성령이 임했구나" 알게 됩니다. 그런데 디모데형에게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냥 씨를 뿌렸는데, 이미 그 마음밭에는 누가 자리 잡고 있습니까? 사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미 그 마음밭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씨앗처럼 떨어졌는데, 그 씨앗처럼 떨어진 성령이 성장하고 자라야 될 것 아닙니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성령이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하는데, 성령이 충만하게 성장하고 자라서 나중에는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검은색 깃발 단 마귀를 쫓아낼 수 있을 정도까지 자라야 합니다.

1-2. 성령이 임하시는 때

그것을 위해서 성령은 언제 임하시는가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내 마음속에 임한 성령이 자라서 악을 물리치도록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령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8절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 끝 부분인데,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주 앞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항상 우리는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담아두면 안 됩니다.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했고, 그 성령이 성장하고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려면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말은 주님 앞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 매일 나를 비춰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 여기 얼룩이 묻었으니까 예쁘게 닦아야 되고, 이 머리에 새치가 있으니까 잘라내야 되고, 옷매무새도 좀 예쁘게 해야 되고, 털어내야 되고" 항상 자기를 돌아볼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 앞에 주님 아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닮고 싶어집니다. 돈이 우리 눈앞에 있으면 돈을 닮고 싶어지고,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그 사람을 닮고 싶어집니다. 하루 종일 어떤 친구와 함께 있다 보면 그 친구가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흉내 내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흥얼거렸던 노래를 나도 흥얼거리며 따라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되니 최적의 조건이 됩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장 14절과 2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성령의 성장을 위한 좋은 환경은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에 힘쓰다 보니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마음속에 씨앗 같이 작은 성령이 성장해서 충만히 자라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기에 힘쓰면 우리는 성령과 함께 동행하게 되는 것이니, 기도하기를 애써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도행전 5장 30절에서 32절을 보시면, 그중에 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어떤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순종할 때 갑자기 성령이 임합니다. 진짜 우리 마음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싸우지 않습니까? 창을 들고 머리에 뿔이 나 있는 악당 마귀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고, 하얀 마음이 또 있지 않습니까? 흰 마음과 검은 마음이 항상 싸우는데, 순종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미세한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돈이 너무 아까운데, 이 물질 아까운 것을 아끼지 않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미치지 않고서야 이 아까운 돈을, 성령께서 말씀하시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지 그 돈을 그런 데 쓰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성령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을 따라서 순종하면, 성령이 내 영혼 속에 자라서 내 영혼을 지배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순종해 보십시오. 믿으십시오.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사탄을 누르는 역사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로 성령은 언제 임하는가, 사도행전 8장 17절에 보니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것을 우리가 잘 인지해야 합니다. 안수에 대해서 여기 안수는 누가 누구에게 안수한 것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에, 빌립 집사님이 가셔서 전도를 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이 복음으로 흥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마리아까지 왔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성도들에게 안수해 주니, 성령이 그곳에 충만하게 역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 인격과 내 신앙을 맡길 만한 분에게 안수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그와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 내가 저분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데 가서 그냥 머리만 들이민다고 해서, 머리를 드린다고 해서 내가 성령 충만하게 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을 보면 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고넬료의 집에 하루는 베드로가 성령께서 이끄셔서 갔습니다. 그곳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말씀을 잘 전하니 말씀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말씀 들을 때 우리에게 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순간도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 25절에서 26절에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때 성령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리고 자기들을 맨 것이 다 풀어져 버렸습니다. 성령은 찬송할 때, 기도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성령을 소멸할 수 있습니까? 성령을 소멸한다고요? 성령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소멸할 수 있습니까? 감히 하나님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성령을 우리가 소멸한다고 해서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내시는 삼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우리가 소멸한다고 해서 소멸될 분도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소멸한다는 말을 원문에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로막다, 방해하다, 불을 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불을 우리가 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불을,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 생명을 위한 일입니다. 삼위 하나님,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있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보혜사로 함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마귀의 앞잡이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 죄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도하는 것,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일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살아가는 이유, 성령 충만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결국 주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땅끝까지"를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방해하는 악한 영의 세력들을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죄이고, 성령을 방해하는 죄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들, 그런 일들을 방해하는 자리에 내가 서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도 일조하는 자가 되도록 꼭 애쓰시기 바랍니다.

3. 은사란 무엇인가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은사는 무엇인가? 앞서 말씀드렸는데, 은사는 집을 지으면 실내 장식 같은 것입니다. 등을 달고, 벽지를 바르고, 가구를 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골격 같은 것입니다. 골격, 골조공사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뭐 좀 아쉬운 대로 벽지 없어도 이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집에 침대 없어도, 허리 아파도 살 수 있습니다. 식탁 없어도 땅바닥에 밥을 놓고 먹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반을 이루는, 가정을 이루는, 또 집을 이루는 데코레이션, 장식 같은 것입니다.

은사는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장 4절에서 6절을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은사 때문에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성령도, 주도, 하나님도 같지 않습니까? "나는 방언하는 은사, 너는 예언하는 은사, 또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를 가졌는데, "이것이 제일이고 저 은사는 별 볼 일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필요한 은사이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편을 가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하나님이 각양 다양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에 가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은사를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어디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란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은사를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참 신기한 것입니다. 아주 작은 개척교회에도 그 교회에 꼭 필요한 분들이 계십니다. 수십, 수백 명의 성도가 모인 교회에도 꼭 필요한 분들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공동체에 필요한 은사를 그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꼭 필요한 분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에도 큰 교회를 이끌어 가기에 꼭 필요한 분들을 하나님이 은사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준 것입니다. 그것을 거꾸로 바꾸어 말하면,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데 은사를 마구잡이로 사용해 버리면, 그러면 하나님이 은사를 거두어 가십니다. 은사를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3-1. 은사의 종류

은사의 종류를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10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이 말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를 말합니다.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은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3-2. 최고의 은사

그런데 우리가 사모해야 할 은사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 말은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이 끝나고 13장이 시작되는데, 13장 1절에서 3절까지가 사랑에 대한 말씀이고, 4절에서 7절까지가 우리가 잘 아는 사랑에 대한 아주 축 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3장 1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이 말은 이런 놀라운 은사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들, 이 능력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이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 마음에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사실은 예수님의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랑함이 없이 방언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도를 처음 배우는 새가족이 옆에 있습니다. 처음 기도를 배우는 새가족이 옆에 있는데, 그분에게 내가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욕심으로 방언 기도를 크게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날 오늘 기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를 망치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병 고치는 은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병 고치는 은사를 활용하고 발휘하고, 그래서 고침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두 번 기도하면 얼마를 내야 되고, 널 위해서 세 번 손을 얹으면 더 많이 가져와야 되고, 안 낫던데요? 그러니까 너 믿음이 부족하니까 돈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이야기하고, 사랑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러면 돈받고 기도해 주고, 물질을 통해서 병 고치는 은사를 허락해 주고, 이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사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두어 간 줄 알면서도 계속 거짓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망하게 하십니다. 분명히 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반드시 교회에 덕을 세워야 되고, 은사에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그 기초에 모든 은사의 기초에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가르치는 은사도 그렇습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잘 만드는 우리 권사님들이 계신데, 사랑하는 마음, "내가 이 음식 만들어서 우리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고, 오늘 주일날 예배 드렸는데 식당에서 참 행복한 점심을 준비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랑의 은사로 가득한 식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은 사랑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시작했는데, 이 사랑의 자리에 예수님을 한번 넣어 보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곧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주님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주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누가요? 주님이 그대로입니다. 주님을 넣으니까 딱 맞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은 제자입니다. 이 사랑대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3-3. 방언과 예언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을 좀 드려야 하는데, 바울은 좀 특별하게 고린도전서의 부록처럼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글을 써 두었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14장 1절에 보면,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우리가 신약을 공부할 때 다루었는데, 여기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점치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아 있는 것, 말씀을 맡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개념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 선지자들을 히브리어로 나비(נָבִיא)라고 했습니다. 예언자들을 복수형으로 표현하면 느비임(נְבִיאִי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비, 느비임의 원뜻이 "말씀을 맡아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렇게 잔뜩 맡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있다가 적절할 때 이 말씀을 끄집어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이 예언자였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그들의 심령에, 그들의 머리에 말씀을 맡겨 주셨습니다. 직접 맡겨 주셨다가 환상을 통해서도 맡겨 주시고, 꿈을 통해서도 맡겨 주시고, 깨달음을 통해서도 맡겨 주셨다가 "이제 이때 너에게 맡겨 준 말씀을 전해라" 하면 이것을 끄집어내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자 나비, 느비임들이 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런 구약적 전통에서 예언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예언은 우리가 말씀을 많이 맡아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저장소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또 되새기고, 까먹으면 또 보고, 계속해서 통독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 암송 대회도 하고, 성경 퀴즈 대회도 하는 것 아닙니까? 1등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고, 상 주려고 하는 게 아니고, 말씀을 많이 맡으라고, 많이 마음속에 간직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들이 끝나고 나서 "나는 얼마나 말씀을 많이 맡아 있느냐, 나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내 영적 탱크에, 저장소에 가득 채우고 있느냐" 이것이 우리 영적 성공과 실패의 가늠 때가 됩니다. 맡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때가 되면 끄집어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 이것 때문에 힘들어요"라고 이야기하면, "야, 요즘 유망한 종목이 이건데 여기 한번 투자해"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고, 맡아 있던 말씀을 어떻게 합니까? 끄집어내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래 있으니까 이렇게 한번 해 보라"고. 자녀들에게도, 이웃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예언자들처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과 5절에서도 보시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 곧 말씀을 맡아 있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이렇게 보면 이해가 되십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하는 자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통역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방언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어떤 기도를 하는지 아니까요. 막연히 느낌 말고, "이럴 것이다"라는 것 말고, 분명한 통역의 은사도 주십시오, 그렇게 구하십시오. 이것이 덕을 세우는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19절을 보면,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아 있다가 끄집어내 주는 것 아닙니까?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예언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지고 있다가 다섯 마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 끝에 보면, "모든 것을" 예언을 하든 방언을 하든 병을 고치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덕은 어디에 덕입니까?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은사라 해도 덕이 안 되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덕이란 무엇입니까? 모두가 행복하게 되기에, 모두가 교회가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하고 기쁘고, 질서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14장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은사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다 보면 질서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그 은사는 질서 있게 사용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은혜를 받으시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시고 세우십니다.

마치며

우리가 배운 성령님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해서 말해 봅시다. 지난주에 배웠던 것, 이번에 배웠던 것을 잘 정리해 보십시오.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근거를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한번 적어 보십시오. "나는 성령 받은 사람인가?" 질문을 하고 멈춰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고 적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음 주, 또 그다음 주는 교회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임재해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바울처럼, 어떤 이에게는 디모데처럼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으로, 기도로, 찬양으로 성령을 굳건하게 하며,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좌정하시도록 우리가 자리를 내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회개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온전히 내 주장하셔서 악한 영의 세력을 물리치고 온전한 성령 충만을 이룰 때까지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여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권능을 받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그 흘러넘침으로 말미암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나누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면, 그 받은 은사를 교회의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하도록 주께서 도우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맡아 있는 자로, 예언하는 자가 되어서, 예언의 말씀을 주변 이웃들과 자녀들, 가족들에게 나누며 살 수 있는 풍성한 예언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