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교회에 대해서(1) / 전체녹취

교리학교 7강 - 교회에 대해서 1

마태복음 16장 16-1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들어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각각 두 차례씩 공부했습니다. 이제 일곱 번째 시간으로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이 땅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성령님께서 주도하시고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교회 구성원이기 때문에 부조리와 문제가 일어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교회는 제도와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우리는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며, 세상과 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와닿는 것이 있다면 아마 각자 다르게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도록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회들도 많고,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시도하는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공부하실 때 아무리 많은 것을 공부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이 한 가지를 놓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손과 발입니다. 예수께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머리가 되려고 하는 순간, 그때부터는 그 사람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고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또 하나는 '교회는 부조리와 문제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사실 이 땅의 교회가 요즘 이 시대에 많이 본이 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여전히 하나님의 희망이라고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가 조금 더 깨끗하고 정결한,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몸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교회를 개혁하고 또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교회로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교회가 아닌 것

먼저 교회가 아닌 것을 살펴봅시다. 교회는 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또 교회는 제도가 아니다.

1-1. 건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서 앉아 있습니까? 교회에 와서 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명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건물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건물이 마치 교회인 줄 알고, 이 건물에만 목숨을 걸게 됩니다. 건물을 잘 짓는 것에만 집중하고, 또 건물에 필요 이상의 많은 물질을 투자하고, 필요 이상으로 이 건물을 우상화시키는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이지 건물이 아닙니다.

최초의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거하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임재하겠다" 약속하신 최초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성막입니다. 성막은 어떤 모양입니까? 천막입니다. 말 그대로 텐트입니다. 그런데 그 텐트는 그냥 어떤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출애굽 과정에서 광야에서 늘 메고 다녔습니다. 레위 지파 자손들이 어깨에 뻐개라 메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 시대를 다윗의 시대까지 계속해서 끌고 가셨습니다.

솔로몬의 시대가 와서야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은 다윗이 하려고 하는 것을 미루다가 미루다가,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렇게 하시다가 그냥 흔쾌히 하신 것은 아닌 것처럼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절대로 교회와 건물을 동일시시키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와 건물을 동일시하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가 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 건물로서의 교회를 강조했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히 남유다가 망할 때 성전을 그렇게 불태우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들어왔을 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린 것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성전이 곧 교회이면 하나님이 그렇게 무참히 성전을 무너지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과 교회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1-2. 제도가 아니다

또 교회가 아닌 것이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라고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교회는 어떤 제도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직제가 있잖아요. 가톨릭 교회는 교황이라는 직제가 있고 사제 서품이라는 직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수직 직제, 하이어라키(hierarchy) 구조라고 하는데, 이 수직 직제가 있고 개신 교회는 목사와 장로 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도가 교회의 뼈대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교회의 원활한 행정과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편의에 따른 제도이지, 이것이 곧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제도는 어디에 봉사하는 것이냐? 제도는 성령의 능력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됩니다. 목사도 그렇고 장로들도 그렇고 교회의 모든 직제와 제도는 성령께서 주도권을 가지시는 교회의 역사와 흐름에 봉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먼저 전제를 하고 그다음 교회는 어떤 것이냐, 이렇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2. 교회의 정의

교회란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둘째, 훈련받는 공동체입니다. 셋째,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공동체입니다. 넷째, 복음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 볼까요?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아 훈련받고, 신앙고백을 한 후에 세상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교회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보편적 교회,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훈련받고, 훈련받아 신앙고백한 후에 세상으로 나가는 공동체, 곧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건물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제도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건물도 제도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론이라는 사실을 먼저 잘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2-1. 부름받은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어디서부터 부름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장 9절을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부르다'라는 말이 '칼레오'(καλέω)라는 헬라어 동사를 썼습니다. '카라', 부르다, 건져 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름받다', '불렀다'는 말은 한자로 쓰면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소명입니다. 어디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아니 목사님, 나는 모태 신앙인데요.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녀서 죄악된 세상하고는 담쌓고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집안에 있는 탕자가 더 골치 아픕니다. 큰아들인 탕자는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 탕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자가 더 힘들어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집안에 있는 탕자였다가 하나님이 이 탕자를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불러낸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 어디에서?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나는 죄악된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안에 산다고 했는데, 사실은 돌아보니까 그냥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었지 사실은 집안에 있는 탕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집안에 있는 탕자였다는 말이지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신 분들에게 "어떻게 해서 교회에 오시게 됐습니까?" 하면 표면적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누가 나를 오라고 해서", "이 교회에 한번 가보라고 해서", "좋다고 해서", "교회 가면 건강 문제도 해결된다고 해서",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 발로 왔다는 말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신앙생활을 한참 하고 진짜 주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한번 물어보지요. 제가 심방 가서 "어떻게 신앙생활하시게 됐습니까?"라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저 같은 죄인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셔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됐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요. 그래서 그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야 '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요. 자기 발로 온 줄 안다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서 부르시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 부르시고 어떤 특정한 일들을 통해서 나를 부르셨는데, 처음부터 그것을 고백하기란 믿음이 어려서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그랬지요. 요셉이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형제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잖아요. "형님들, 나를 이리로 팔았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서 보내셨습니다. 나를 먼저 보내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과 아버지와 우리 온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고백했어요. 처음부터 요셉이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할 때, 억울하게 누명 쓰고 감옥에 앉아 있을 때 처음부터 요셉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자기가 총리가 되고 눈앞에 형들이 와서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어릴 적 꾼 꿈이 기억난 거예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나서야 "아, 하나님이 이제야 나를 왜 여기 보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시간이 한참 경과하고 그 시간의 흐름이 지나서야 내가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신앙고백,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수준 있는 신앙고백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예요.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에 두지 않고 성전에 불렀어요. 왜 성전에 불렀을까요? 집에서 그냥 요즘 리모컨 하나 가지면 TV 채널 바꿔 가며 좋은 설교 다 들을 수 있는데 왜 성전에 불렀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에 부르신 이유, 이 질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 두고 거기서 변화시키면 될 텐데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셨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짜 군인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군대로 징집을 해야 되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성전에 부르시고 우리를 콜링하신 이유는 그다음에 나옵니다. 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훈련하기 위해서 부르셔서 이 사람들을 모아 놓아야 훈련할 것 아닙니까?

2-2. 훈련받는 공동체

하나님의 훈련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크게 한두 가지를 먼저 살펴보면,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훈련이 있습니다. 예배나 교육이나 봉사나 친교나 선교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직접 훈련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모아 놓으면 자기들끼리 훈련이 되요. 모아 놓으면 그렇지 않아요? 교회에 모아 놓으면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도 제가 이렇게 보니까 각양각색의 분들이 다 모이셨는데, 여러 모양의 분들이 다 모이셔서 각진 모양이 깎여서 동그라미가 되어 가는 거지요. 뭐든 모양이 다른 것이 둥글게 되어 가는 겁니다. 서로 같이 모여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부딪히며 사는 거예요.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고, 모아 놓지 않으면 독불장군으로 그냥 신앙생활을 해 가지고는 훈련되지 않습니다.

성전에 모아 놓아야 그래야 부딪히기도 하고, 저 사람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도 나고,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훈련받는 거에요. 그러다가 혼자 용서하고, 용서했다가 또 용서 안 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하루에도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참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이만큼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자라 있는 거지요. 훈련 아니겠습니까?

집 안에서 혼자만 무교회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세요. "나는 상처 주기도 싫고 상처받기도 싫다, 혼자 성경 읽고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좋은 데 헌금하고 봉사하면 되지" 하는 분들. 그런데 대체로 보면 이런 분들은 원만하지 못한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스스로 깎이지 못하고, 톱니바퀴가 자꾸 맞물려 돌아가지 못해서 그 성격이, 그 기질이 신앙 성장을 가로막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훈련은 직접 하기도 하시고, 모아 놓고 자기들끼리 부딪히게 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봅시다. 이제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무엇을 하십니까? 훈련하시겠지요. 강하게 훈련하십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기서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본문과 연결시켜 보면 부름받은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다 찍어서 "이리 와라" 하고 부름받은 사람들이에요. 부름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마다 자부심이 있습니다. "나는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쫄래쫄래 그냥 뒤따라 온 사람들은 그런 자부심이 없는데요, 모셔 온 사람들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 배우는 일이에요. 그런데 훈련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초대교회 성도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이 사람들은요, 지금 여기 사도행전 2장 42절 오기 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했어요. 방언도 했고 은사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이분들은 더 훈련받기 위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훈련받기 위해서는 배워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누가 가르쳐 줘? 내가 왜 배워? 남은 다 아는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교만도 없어요. 세상에 죽을 때까지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꾸 배우고 또 배우고 그래야 훈련받을 수 있습니다.

2-3. 신앙고백하는 공동체

잘 훈련받는 이유는 세 번째입니다.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공동체이다. 왜 훈련받을까요? 아무것도 아닌 정말 초심자를 하나님이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직접 훈련도 하시고 자기들끼리 연마하게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훈련받게 하는 일차 목적이 무엇이에요? 일차 목적은 주인 바꾸기입니다.

주인 바꾸기가 무엇일까요? 원래는 내가 주인이었어요. 인생의 주인이 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했듯이 내가 주인이에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다 돌아가요. 나를 중심으로 물질도, 시간도, 인간관계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득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만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훈련을 받고 교육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면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들어오고, 나는 주변으로 밀려나요. 예수 중심이 된다니까요. 그것을 바꾸는 거예요. 신앙 훈련의 첫 번째 목적이 그것입니다. 주인 바꾸기.

주인을 딱 바꾸면 내 인생에 하나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런데 축복하시고도 주인 바꾸기를 안 하는 분들이 계셔요. 숨 넘어갈 때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에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 그러면 그 인생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내가 기껏 내 열매를 맺어 봐야 어떤 열매를 맺겠습니까? 내가 주인 되어서 사랑하는 열매 맺어 봐야 그 열매를 통해서 누가, 어떤 사람이 얼마나 풍성하게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아래로 내려가고 내 인생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야지요. 그래야 나의 인생은 그리스도 때문에 열매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그 작업이 훈련의 목적이에요.

군대가 훈련시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집에서 맨날 게임만 하고, 엄마가 쓰레기 좀 버리라 그러면 "좀 있다 학교" 하고 말 안 듣는 사람들을 군에 잡아다가 거기서 훈련시키면 사상 개조가 되잖아요. 정신 개조가 어떻게 됩니까? "야!" 하면 "이등병 아무개!" 하고 갑자기 군기가 막 들어가지고, 뭐 시키지 않아도 자기 눈에 내무반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눈에 보이고 또 이것을 다 하잖아요. 그래서 훈련시키는 이유는 먼저 정신 개조를 시키는 거예요. 그 의식 가운데 국가와 이 나라를 내가 지켜야 된다는 의식을 심어 주는 거에요. 그래야 유사시에 그 자리를 지키지요.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그 자리를 지킬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시키는 첫째 이유는 신앙고백입니다. 주인을 바꾸라. 주인 바꾸고 나서 우리 입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 무엇이다? 신앙고백이에요. 베드로가 그 신앙고백을 아주 위대하게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예수님 공부할 때 이 고백 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메시아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러면 구약의 메시아는 삼중직을 갖고 있다, 있지요. 첫째는 왕, 둘째는 제사장, 셋째는 선지자. 그렇다면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주님,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무엇이 됩니까? 나는 신하가 되는 거지요. 백성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왕이 아니고요,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거에요. 주인이 바뀌었지요? 지금까지는 내가 왕이었어요. 그리스도는 내 심부름꾼이었어요. "예수님 내가 이것이 지금 필요한데 좀 주세요." 세상의 많은 종교가 그렇고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신을 부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신을 섬깁니다, 자기를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 왕이 운영하시는 대로,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고 살아갑니다. 왕은 자기 멋대로 시키지 않아요. 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시지요.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다름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왕이 되시고, 둘째는 제사장 - 하나님과 나와를 연결해 주는 제사장. 나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지자 - 말씀하시고 내가 듣겠다는 말 아닙니까? 이것도 주인이 바뀌었지요. 이 신앙고백이 신앙생활 훈련의 첫째 목적이에요. 입으로만 이렇게 고백하면 곤란합니다. 선택은 신앙고백입니다. 선택이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의 신앙이 어디에 있느냐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고백하니까 예수께서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반석이 무엇입니까?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무엇이 섰어요? 교회가 섰어요. 그렇다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명백해지는데, 내가 주인을 바꿔서 "예수님,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 내가 곧 무엇이 돼요? 교회가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가 되면 나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되겠지요. 교회답게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내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욕도 하고 함부로 세상 쾌락을 즐기며 살겠습니까? 나는 교회답게 살아야 되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신앙고백을 하고 났으면,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서 훈련시키는 일차적인 목적이에요.

2-4. 세상으로 나가는 공동체

그러면 그다음 목적이 무엇일까요? 복음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공동체이다. 이제 우리가 교회가 됐으면 이 교회는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돼요. 그다음 어떻게 해요? 세상으로 나가야 돼요. 내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붙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럼 세상으로 나가야 되지요.

마태복음 5장 13-14절에 보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소금인데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고요,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은 빛인데 어디를 비추는 빛입니까? 세상을 비추는 빛이에요.

우리가 교회라면 세상과의 관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성도들은 교회 안에 가두어진 사람들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공적 신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고백을 했어요. 그때부터는 내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붙어 있다니까요. 나를 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이 복음의 공공성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공공성, 복음의 공공성 때문에 교회는 자기 교회 원하는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교회는 세상과 유리된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내리는 결정이 이 주변의 이웃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주는지 함께 고려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동의한다고 세습할 수 있다? 세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단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동의한다 하더라도, 주변의 이웃들과의 관계에,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 이것이 소금의 역할이 안 되고 빛의 역할이 안 되면 교회는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복음의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가 하고 있는 변명들 중에 "우리 교회가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남들이 왜 상관이냐" 그러면 안드로메다에 가서 살아야 돼요. 그 교회는 그냥 그대로 털어내서 아무도 살지 않는 다른 데 가서 자기들끼리 살아야 돼요. 이 땅에 뿌리박고 있는 교회는 공적 기능과 공적,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교회가 그렇고,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에 내가 그 역할과 그 생각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여기 계속 말하지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은 소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게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회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가라고 했습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자꾸 나가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셨고, 왜 부르셨습니까? 훈련하려고. 무엇으로, 어떻게 훈련하시려고요? 주인 바꿔서 신앙고백시키려고. 주인 받고 신앙고백시키면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딱 달리는데, 이 십자가를 가지고 어디로?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

다섯 번째로 교회는 무엇이다? 유기체이다. 유기체라는 뜻은 먼저 에베소서 4장 15절에 보니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유기체는 자랍니다. 우리가 유기체 아닙니까? 우리는 자라요.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런데 수적 성장만 생각하면 곤란해요. 사람이 계속해서 자랄 수 있습니까? 저만큼 자라면 다 자란 거지요. 더 이상 자라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많이 생겨요. 간판에 부딪친다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거나 그래요.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그다음 어떻게 해요? 성숙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도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이것은 외적인 성장과 내적인 성숙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건강하기만 하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계속해서 호르몬을 주사 놓고 성장을 위해서 다른 여타의 일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서도 안 됩니다. 건강하면 됩니다.

건강의 제1차적인 요건이 무엇입니까? 잘 먹는 거예요. 잘 먹는 것, 말씀을 잘 먹고. 먹고 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만히 있으면 돼요? 비만 되지요. 말씀을 먹었으면 이 말씀을 소화시켜서 뭘 해야 되잖아요. 행동하고. 말씀 듣고 행동하고, 그러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듣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많이 생겨요. 그때부터는 성인병이 생겨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행하셔야 됩니다. 행동하셔야, 그래야 성장합니다.

교회가 유기체라는 말의 또 다른 뜻은 병들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감기에 걸리지요. 사람도 각종 질병에 걸리지요. 교회가 유기체이기 때문에 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교회가 병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 병균을 내쫓아야 되잖아요. "누구 때문이다, 야 너 왜 맨날 병을 달고 사냐, 야 이 코야!" 코를 구박하며, "넌 코가, 코에서 콧물이 나는 거" 코 하나의 문제입니까? 순환계 전체 문제지요. 폐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기관계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어느 한 군데 문제가 생기면 그 기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교회 전체가 구조적인 문제를 점검해 보고 이 문제를 고치고 수정해서 다시는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한마음을 모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유기체라는 말에 두 가지 뜻 - 성장한다, 병들 수 있다 - 두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까 말씀드렸지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섭리가 깨달아질 때 그때 "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알게 됩니다.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말씀드렸지요.

4. 아브라함의 교회론적 모델

이제 교회를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훈련하시고, 주인을 바꾸는 신앙고백을 하고, 세상 가운데로 나가는 공동체다.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살펴본 교회론적 모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교회의 일생이에요.

4-1. 부르심과 순종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2장 1-3절을 보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불렀지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콜링(calling)이라고 하고 소명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의 집, 고향, 친척을 떠났어요. 편안한 곳, 익숙한 곳,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곳, 명예와 부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곳을 떠나서 하나님이 미지의 곳으로 가라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된 세상 가운데, 죄의 낙을 누리는 곳에서 불러낸 것과 같은 거지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교회가 된 것이에요.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거에요. 오늘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르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부르시든, 건강을 쳐서 부르시든, 어떤 환경과 여건을 통해서 부르시든 부르세요. 그런데 그 부름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까지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말씀을 따라 갔어요.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4-2. 훈련의 과정

이제 부르고 나서 그다음 순서는 무엇이에요? 상입니까? "너 내가 불렀는데 왔으니 상 주마"하고 상입니까? 훈련이잖아요. 이제 훈련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니까 "그 땅에 기근이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왔어요. 정말 멀리 멀리 끌려왔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왔는데 아브라함은 기대감이 있었을 거예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아내 사라도 큰 기대감이 있었을 텐데, 기대는커녕 큰 기근이 그땅에 닥쳐 있었습니다. 훈련이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훈련은 처음에 상 하나 주고 훈련 주고, 상 안아주고 훈련 주시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훈련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 내가 예수 제대로 믿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신다면 훈련이 나에게 주어질 때, 그때 나는 예수 제대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회 왔어요. 교회에 오면 집안도 잘 돼야 되고 돈도 잘 벌어야 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되는데, 그런데 인생의 기근이 불어닥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거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오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하나님 부르셨습니까? 상은 몰라도 평범하게는 살게 해 주셔야지 왜 기근이 옵니까?"

교회에 훈련시켜 주시고 써먹으려고,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인 아브람의 완악한 자기 중심성을 바꾸어 가지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고백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거듭나게 하려고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거예요. 그 훈련의 첫 번째 훈련이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기근의 문제. 아브라함은 믿음이 어려서 이것이 훈련인지 시험인지 뭔지 모르고 그냥 "됐다, 이집트로" 도망가 버렸어요. 첫 번째 훈련의 실패. 혼나고 올라오잖아요.

두 번째 훈련, 이 훈련은 좀 길게 가요. 두 번째 훈련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장 2-3절을 보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아, 자식이 없어." 자녀 문제 때문에 훈련이에요. 우리 인생의 문제 가운데요, 짧게 끝나는 훈련이 있고 오래 가져가는 훈련이 있어요. 오래 가져가는 이유가 있어요. 어떤 것은 약 1주일 만에 끝나고, 어떤 것은 6개월 만에 끝나는데, 어떤 것은 한 30년 40년 가는 훈련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내가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오래갑니다. 한번 해 보세요. 집착해 보세요. 오래가요. 오래 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내가 내려놓으려고 하면 그것은 의외로 빨리 끝났는데, 우리 신앙의 위인들,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이것을 내가 꽉 붙잡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훈련은 오래가요.

보세요. 자식 문제 때문에 아브라함이 걱정했습니다. 처음에 아브람이 이렇게 생각해요. 이 자식을 하나님이 준다고 해 놓고 주지 않으니까 자기 집에 믿을 만한 종을 세워서 후사를 삼겠다 해요. 하나님이 "그것 아니다" 하시거든요. 그다음 창세기 16장 2절에 보니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해요.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 여기 성경에는요,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지 않는데, 하갈을 취하는 시기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온 지 딱 10년째 되는 시간이거든요. 10년 동안 기도했어요. 10년 동안 기도했으니까 "됐지, 이제 난 할 만큼 했지,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끝났지, 나는 이제 내 방법대로 하겠다."

아직까지 자기 방법이에요. 첫째는 자기 집에 종을 통해서 후사를 삼으려고 했고요, 그다음에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아 후사를 삼으려고 했어요. 이러니까 오래 가는 거예요. 이러니까 오래 갈 수밖에 되어 있나요? 길게 이 훈련을 가져가는 거지요. 집착하면 오래 갑니다.

그다음 하나님이 이제 이 훈련에서 스스로 낳은 것들 있잖아요,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내십니다. 하나님이 떠나보내라 하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했다. 이 하나님의 훈련인데 이제는 떠나보내는 훈련이에요. 단장의 훈련 아니겠습니까?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에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죄지만, 그러나 내 자식이고 내 자녀를 낳아 준 여인인데, 이들을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내쫓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훈련을 통해서 아브라함만 성장해 가는 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 방점을 찍는 훈련, 가장 소중한 이삭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훈련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이삭이 아브라함 마음의 중심이에요. 하나님이 마음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이삭이 자기 마음 중심에 있거든요. 이삭 전에는 누가요? 하갈과 이스마엘이 자기 마음의 주인 자리거든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세요. 그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자리 잡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들 하나하나 빼내시는 것이 훈련이에요. 왜요? 그 훈련을 해야 마지막에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시니까.

이것이 신앙고백 아닙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 훈련을 하시는 거예요.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그 훈련을 하시는 겁니다. 내 마음 중심에 누가 들어와 앉아 있는지, 내 마음 중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가 잘 알잖아요. 목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가장 잘 알지요. 그것을 빼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빠지고 나면 그러면 그때 훈련이 끝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창세기 22장에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훈련이 그때 끝났습니다.

4-3. 세상의 빛과 소금

이제 이런 훈련이 다 끝나고 나니까요, 다 끝나고 나니까 아브라함은 빛으로, 소금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갑니다. 볼까요.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이렇게 얘기해요. 헷 족속은 이방인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사라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사라를 장례할 땅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돈 주고 사려고. 그런데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 하나님을 모르는 헷 족속이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이니까 아무 땅이나 다 정하십시오, 아무 동굴이나 다 쓰십시오, 무상으로 쓰십시오"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아브라함이 빛으로, 소금으로 잘 살았기 때문에. 신앙고백하고 나서 이제는 내 마음 중심에 욕망도 욕심도 사라지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니까 내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베풀고 사니까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처음에 그는 아무것도 없이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그 땅에서 지도자로 대접받고 배려받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런 역사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가며

정리하면 교회는 이렇게 단순하지만 그러나 쉽지 않은 과정이에요. 오늘 배운 것 정리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어떻게 해요? 훈련. 훈련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훈련하는 과정이 어디까지 훈련하십니까? 주인을 바꿀 때까지. 주인을 바꾸는데, 주인을 바꿔서 그 주인이 내가 아니라, 그 주인이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릴 때까지 훈련하는 거예요. 그 훈련이 되면 신앙고백이 되겠지요. 신앙고백 되면 십자가 내 머리에다 딱 꽂아서 세상으로 내보내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훈련받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을 잘 모르겠다 하고 헤매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제 훈련이 끝나고 빛으로 소금으로 살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알 것입니다. 아직 훈련 중에 있다면 빨리 훈련 끝내고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잘 생활하시고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 통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택정하여 불러 주시고 훈련해 주시고, 주인을 바꿀 때까지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는 감사하며 감격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도 훈련받다가 인생을 끝내는 불쌍한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일생이, 우리가 이 땅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동안 훈련 끝내고 우리가 이제 빛으로 소금으로 세상 가운데 살며 많은 열매 맺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곧 교회이오니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