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 전체녹취

교리학교 9강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들어가며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 가장 마지막에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특별히 자유의지를 주시고 하나님과 동역하게 하셔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함부로 사용하여 타락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전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선택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가장 귀하고 존귀하신 아들을 인간을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을 알려면 우리 자신을 잘 살피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원래 흙이었다는 사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동역자로 삼으셨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알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를 보면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잘 살피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

1-1. 사랑의 본성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형상이라는 말,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우리 인간에게 공유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가장 변함이 없는 본성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할 때는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때때로 나도 내가 놀랄 만큼 이타적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끔이어서 그렇지, 아무튼 우리는 가끔씩 이타적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정의로우신 하나님, 여러 가지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는데 우리 인간의 성격을 보면, 나의 특징들을 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을 닮아 있는 것입니다. 닮아 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조금씩 뒤틀려 있습니다.

1-2. 뒤틀린 속성

죄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그대로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사랑도 어긋나고 빗나간 사랑, 정의도 자기중심적인 정의, 질투도 사랑 없는 질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조금씩 뒤틀려진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제거해야, 죄를 걷어내야 그래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창조 시에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선언하신 것이 있습니다. 28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복을 주시며, 이것을 우리는 원복(原福)이라고 합니다. 원죄 이전에 원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뜻입니다.

2. 흙의 본질

2-1. 땅의 흙으로

창세기 2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재료가 나오는데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땅의 흙으로. 땅은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입니다. 여기 흙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이 흙은 먼지,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원재료가 사람들이 마구 밟고 다니는 땅의 먼지였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은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그래도 한때 잘나갔던 사람인데'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원래 내가 하나님 창조하실 때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교만은 사라집니다. 원래 내 존재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던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침도 뱉고, 함부로 했던 그 땅이었습니다. 그 흙이었습니다. 원래는 먼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2-2. 생기의 비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원래 먼지였고 흙이었는데, 흙과 먼지 같은 존재가 말도 하고 걸어 다니고 창작도 하고 돈도 벌어 오고 사랑도 하고 자녀도 낳고 가정도 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요? 원래 흙이었는데 창세기 2장 7절에 그 비밀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누가? 하나님이. 누구에게? 흙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지금 나와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아주 교만한 존재입니다. 누구나 다 저부터 시작해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다 마음속에 속 교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과거에 어땠는데'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멸시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때마다 기억하셔야 될 것은 나는 원래 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기억하시면 우리는 원래 원위치로 돌아가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이렇게 되었는데, 원래부터 우리가 잘나서 이렇게 된 줄로 착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교만이겠지요.

2-3. 창조와 죽음

이것이 창조라면 죽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조가 흙과 생기의 결합이라면 죽음은 반대로 흙과 생기의 분리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주셨던 생기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 존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밟고 침 뱉고 함부로 했던 그 흙으로 원래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흙에서 왔다가 이 껍데기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주 굉장한 인간의 비밀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모르니까 우리는 교만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3. 타락의 본질

3-1. 흙임을 잊음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타락 아닙니까? 기차가 탈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길로 가야 되는데 가다가 옆길로 빠져 나가면 그것이 탈선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흙이었고 교만하게 살면 안 되는 존재였는데, 인간의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와서 하와를 꾀고 하와가 아담을 유혹하고, 그래서 서로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먹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행위 자체가 범죄행위이지요.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이 죄가 시작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 5절과 6절을 보면 뱀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말을 하와가 듣는 순간 그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래 흙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3-2. 착각의 시작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셔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창조적으로 동물과 식물의 이름도 짓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까 원래부터 똑똑한 존재였던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뱀이 와서 유혹하니까 그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타락이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흙이라는 것, 이 사실을 까먹는 순간 그때부터 타락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타락도, 성도의 타락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타락도, '나는 원래 흙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때부터 타락입니다. 우리 존재는 정말 아무 쓸데없는 먼지, 티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만 기억하고 계시면 우리는 어디에 살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먼지였는데,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데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생업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손해보고 살아도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원래 흙이라는 것만 잘 기억하면 말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기 전 원래 인간의 재료는 흙이었습니다. 이 흙이라는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3. 선악과의 의미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요?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왕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하지 않습니까? 다스리고 정복하고 이름도 짓고 다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세워 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항상 선악과를 보면서, 저것을 보면서 '아, 저것 먹으면 하나님이 나더러 죽는다고 하셨지' 볼 때마다 누구를 기억합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면 '아,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구나, 나보다 더 높은 분이 계시구나' 이것을 기억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4. 구원의 길

4-1. 하나님과 동행

인간의 타락은 흙에서 이탈하는 것, 내가 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이제는 구원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궁극적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인데, 타락한 인간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째, 하나님 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거해야 됩니다. 노아 이야기를 보시면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다 심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 심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러면서 예배 공동체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가정에 복 주시고 그들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 비밀이 창세기 6장 9절에 나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함께 걸어 가야 합니다.

동행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같이 걷는 것, 하나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하나님이 뛰자 하면 뛰어야 되고, 하나님이 서자 하면 서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훈련시키신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끄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스케줄대로 가는 것이 광야의 여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가는 것이 광야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인도하시고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라, 그러면 타락한 너희들이 새로움을 입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4-2. 고난의 의미

고난의 시간을 통과해야 됩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인간이 원래 흙이었는데 저만큼 높아져 있는 것이 타락이라고 했습니다. 또 고난을 경험하면 인간이 어떻게 됩니까? 저 높이 솟아 있던 인간의 그 높은 콧대가 납작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존재가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하고 교만하고 까부는 인간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십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고난 아닙니까? 그 고난을 통해서 인간이 깨닫게 하시고, 내려앉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아, 내가 흙이었구나, 내가 원래 흙이었구나' 이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다 그런 시간과 그런 과정들을 다 겪었습니다.

4-3. 요셉의 훈련

한번 보십시오. 창세기 39장 1절과 2절을 보니까 요셉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이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감에" 여기 '내려갔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내려가다라는 표현은 지리적으로도 내려갔다는 의미이지만 성경은 항상 중의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중적인 표현을 씁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요셉의 콧대와 요셉의 교만이 20대에서 꺾이고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의 교만이 어떻게 꺾였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노예를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를 죄수로 만드셨습니다. 노예와 죄수, 이 두 가지 경험에다가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막연한 기다림. 이 고난의 삼종 세트가 요셉에게 그대로 다 다가왔습니다.

노예는 오늘날 우리는 노예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 내가 사람을 부리다가, 내가 누군가를 마음대로 하다가, 내가 누군가의 명령과 말에 순종해야 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현대판 요셉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옥에 들어 있는 죄수는 어떤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다니다가 고난을 겪으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느 한 공간에 들어가야 되지 않습니까? 노예나 죄수, 그리고 거기에서 막연한 기다림. 술 맡은 관원이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내가 나가면 너를 반드시 기억해서 건져 주마." 약속하고 나갔습니다. 나가서 몇 년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까? 만 2년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노예, 감옥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죄수, 그리고 2년 동안이나 막연한 기다림.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는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던 요셉, 그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 꼭대기에 있었던 요셉의 교만을 땅바닥에 완전히 내려주셨습니다.

그가 왜 교만한 상태에 있었는가? 아버지가 형제들보다 더 높이 떠받들어 길렀기 때문입니다. 채색 옷을 지어 입히고, 그리고 요셉에게는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산 너에게 다 상속하마" 아버지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교만의 꼭대기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형들을 통해서 그를 팔아치우고, 채색 옷을 벗기시고 죄수 옷을 입히고, 또 죄수 옷을 벗기고 노예 옷을 입혔다가, 노예 옷을 벗기고 죄수 옷을 입히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그를 완전히 내려주셨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통과해야 나중에 다시 하나님이 진짜 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대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교만하면 하나님이 흙으로 내려주신다는 것,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셨습니다.

5. 그리스도의 구원

5-1. 십자가와 세례

결국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밖에는 어떤 통로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21절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흙으로 내려가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나의 옛 모습은 다 죽고 이제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새로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입교 의식을 할 때 세례 의미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옛날 예수님 시대 때 세례는 요단강에서 받았지 않습니까? 요즘도 침례를 할 때는 사람을 물에다 이렇게 넣었다가 건져 내지 않습니까? 옛날 예수님 시대 때 세례도 침례였지 않습니까? 사람을 물에 넣어서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됩니까? 못 나오게 계속 누르고 있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건져 올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세례라는 것은 옛 자아가 죽고 새롭게 건져올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세례 받는다는 것은 이제 옛날의 나는 저 물속에 장례 지내고 사라지고 없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버리고, 나는 이제 예수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왜 흐르는 강물에서 받았느냐? 죄를 다 씻고 흘려보내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물에 나의 옛 과거를 다 보내고,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내 옛 자아가 못 박혀 죽어 버려야 됩니다.

5-2. 별세(別世) 신앙

그런데 한번 못 박혔다고 우리 자아가 영원히 죽고 다시는 이 더러운 습성이 소생하지 않습니까? 그렇던가요? 한번 회개했다고 그 회개가 영원히 유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솟아나고 다시 솟아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매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매일같이. 이것을 한성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돌아가신 이종표 목사님은 '별세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이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나를 죽이고 못 박아야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 정말 살고 싶으냐, 그러면 죽어라. 예수와 함께. 그 이야기를 이종표 목사님이 평생 동안 외치셨습니다.

6. 인간의 세 한계

6-1. 죄의 한계

인간이 매여 있는 한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의 한계는 죄의 한계입니다. 나는 죄 짓고 싶지 않은데 죄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성령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지 나의 인격과 내 자아는 절대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한계는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누구나 다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는 결국 마지막에 죽음이다, 이 뜻입니다.

6-2. 죽음의 한계

인간의 한계는 죽음의 한계입니다. 죄를 짓는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되니까 그 죽음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번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고, 심판이 있다는 것은 우리 영혼을 달아보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을 통해서 그 다음 진짜 무서운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계시록 2장 11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망은 우리 육체가 죽는 것이고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고 영혼의 죽음을 당하는 것,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누구나 다 첫째 사망은 겪지만 둘째 사망을 겪게 되는 것,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태어나고 한 번 죽어야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한 번 태어나고 다시 거듭나고, 두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누구나 다 정한 것이라 했으니까, 이 껍데기가 죽는 것은 당연한 죽음이지요. 이것은 언젠가는 다 벗겨줘야 되는 죽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죽습니다. 육체로만 태어나고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의 해를 다 입습니다. 숫자가 2냐 1이냐, 1과 2냐 2와 1이냐,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인간의 본질과 또 죄와 사망으로 인한 죽음의 문제까지를 기억하셔야 됩니다.

6-3. 시공의 한계

인간의 한계 가운데 시공(時空)의 한계가 있습니다.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시간 가운데 살고 있지요. 흘러가는 시간을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공간의 한계 가운데 있지요. 예배당 안에 있으면서 바로 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가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시공의 한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요한복음 4장 49절과 50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 왕의 신하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사람은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가 죽기 전에'라는 말은 시간의 한계 가운데 있는 것이고, 아이가 죽어 버리면 주님이 못 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내려오셔서 아이의 머리에 손 얹고 안수 기도도 해 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살려주십시오' 이 말은 공간의 한계 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면 저쪽에 있는 사람도 낫게 되실 것 아닙니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한계에 갇혀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믿고 가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가 살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험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한계 가운데 살아가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문제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8장 49절과 50절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고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내 딸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가서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앞장서라 가자 가셨습니다. 가는 길에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나가서, 예수에 의해서 능력이 나와서 그 여인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길을 멈춰 세우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나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사연을 묻습니다. 여인이 이런 사연 저런 사연을 다 말합니다. 시간이 계속 갑니다. 가장 답답한 사람은 야이로입니다. 지금 빨리 가서 딸을 고치고 살려야 되는데 시간이 계속 갑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주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야이로가 너무너무 답답하지만 일부러 그 이야기를 하던 중에 49절을 보십시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아직 말씀하실 때라는 것은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다가 나은 여인과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유효기간이 끝났습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이 다 지나갔구나.'

5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인간은 왜 두려워합니까? 시간의 한계가 왔으니까 두렵지요. 공간에 갇혀 있으니까, 못 보니까 두렵지요. 그런데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손 대서 고쳐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죄, 둘째 죽음, 셋째 시간과 공간.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 하나님은 죄와 죽음은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시간과 공간도 뛰어넘어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과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매여 있는데, 이것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붙잡아야 됩니까? 예수를 붙잡으면 됩니다. 주님 한번 붙잡으면 죄도 해결 받고 죽음도 해결 받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문제도 다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7. 타종교의 인간관

7-1. 힌두교

힌두교. 인도에 가면 인도 사람이 다 믿고 있는 힌두교입니다. 힌두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이 한 줄로 다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브라만(Brahman)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브라만은 우주에 충만한 범신론적 존재입니다. 즉 어디에도 다 신이 있다고 이 사람들은 믿었는데, 우주에 충만한 신이 브라만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아트만(Atman)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내 인격입니다. 나의 에고(Ego)입니다. 이것이 아트만입니다. 브라만과 합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어떤 단계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아주 극도의 자기를 극하게 하는 수련을 통해서 작은 '나'인 나의 인격 속에 우주의 신인 브라만을 모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이 다리가 머리 뒤로 넘어가고 뭐 이런 것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막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주 또 뼈만 남은 사람이 벽에 붙어있고, 공중에 떠 있고, 이런 것 보지 않습니까? 그런 극도의 극기훈련과 체험을 통해서 우주의 존재가 나의 인격 속에 거할 수 있다, 즉 나는 곧 우주요, 우주는 곧 나요, 이 말은 내가 곧 신이요, 신이 곧 나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종교적 힌두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브라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7-2. 불교

불교를 보십시오. 원래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도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불교의 인간관은 원래 인간은 청정한 불심(佛心)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인간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삼독(三毒)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삼독이 무엇입니까? 탐(貪)하며, 또 성내며(瞋), 그리고 어리석음(癡). 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이 인간 속에 들어왔다. 그래서 청정한 불심이 오염되었다, 이렇게 봅니다.

이 청정한 불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도 무엇을 하라고 했습니까? 수행을 통해서, 벽 보고 막 삼 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참선하지 않습니까? 그런 참선을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내 몸속에 있는, 내 의지 속에 있는, 마음속에 있는 삼독을 다 제거하라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여기 우리 기독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비우는 데 집중합니다. 다 비워내는 데. 그리고 그 다음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비운다고 비운 마음속에 뭔가 또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비워 내면 또 들어옵니다. 비워 내면 또 들어오고.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비워 내는 것도 중요한데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마음, 가난한 마음은 빈 마음 아닙니까? 산상수훈 팔복 말씀에 가난한 마음속에 성령을 초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속에 임해야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이끌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입니다.

보살이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상적인 인간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잘하고 그래서 삼독이 거의 제거가 되어 가는 인간을 보살, '보살님, 보살님' 하지 않습니까? 이런 보살이 행하는 행위를 뭐라고 합니까? 보시(布施)라고 합니다. 보살이 베푸는 한량없는 은혜를 보시라고 불렀습니다.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7-3. 이슬람

이슬람은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딱 짧게 한마디만 하면, '인샬라'(In sha Allah)입니다. 인샬라 들어보셨지요? 영화 여러 곳에도 있고요, 책 이름도 있습니다. 뜻이 무엇입니까? '신이 원하시면'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신이 원하시면, 즉 알라가 원하시면 나는 무조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인간관과 우리 기독교의 인간관에서 가장 큰 차이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라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조건적 복종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격한 IS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과격한 단체들이. 그 사람인들 자기의 목숨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샬라', 신이 원하시면 내 목숨 바쳐서라도 저들도 죽이고 저들도 죽이고 끝까지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타종교의 인간관 힌두교, 불교, 이슬람 세 가지를 우리 기독교와 차이를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8. 현대 과학과 인간

8-1. 심리학과 인간

심리학 하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으나 떠오르는 사람이 한 분 있습니다. 누가 떠오르십니까? 프로이트(Freud)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을 어떻게 분류했습니까? 인간의 마음을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로 나누었습니다.

이드는 원초적 자아입니다. 성욕이나 식욕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에고는 그냥 원래 내 모습입니다. 슈퍼에고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 속에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모습도 있고, 그리고 그냥 일상적인 에고의 모습도 있고, 그리고 내 욕망, 감춰진 욕망의 모습도 있지 않습니까? 식욕이나 성욕이나 소유욕이나 여러 가지 악한 감추어진 모습도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고의 역할을, 에고가 역할을 한다고 프로이트가 얘기했습니다. 에고는 슈퍼에고와 이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드가 자꾸 욕망을 얘기하면 에고가 적절하게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슈퍼에고가 보상을 줍니다. "잘했다, 넌 참 잘했다." 그래서 슈퍼에고가 보상을 주면 에고는 자기애를 가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가끔 에고가 이드에게 질 때가 있습니다. 욕망이 자꾸 말하니까 그러면 남의 물건 훔쳐 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슈퍼에고가 에고에게 벌을 주는데 그 벌이 죄책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속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그 죄책감이 인간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린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프로이트의 문제 가운데 여기에는 성령의 자리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고 즉 에고가 모든 역할을, 중재하는 중재자의 역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의 문제입니다.

8-2. 뇌과학과 인간

뇌과학과 인간에서는 두 가지 질문을 한번 해야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요즘 뇌과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뇌에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인간의 뇌를 잘 연구해 보면 신을 의식하고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뇌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인간의 뇌를 조금 더 연구해서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의 뇌 가운데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제거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신을 부인하겠지요. 인식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뇌 손상을 입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과연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지 못했느냐,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이런 얘기도 합니다. 인간의 뇌 속에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뇌에서 그 자리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폭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런 기사 자주 보셨지요, 신문기사에서.

그런데 이렇게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것은 가설이고 또 이 가설을 가지고 계속해서 뇌과학 연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왜 위험하냐 하면 인간이 짓는 모든 죄를 뇌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한 행동도 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고, 우리 인간이 악한 행동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뇌가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연쇄 살인범들도 다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생깁니다.

우리 그런 얘기 들어보셨지요. 동성애를 일으키는 인자가 뇌 속에 있다, 이런 얘기 들어보셨지요. 그러면 그렇게 따지면 동성애는 죄가 아닌 것입니다. 원래부터 뇌 속에 그렇게 있고, 생겨 먹은 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 껍데기는 물질 아닙니까? 원래 존재,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인체도 그냥 하나님이 만드신 흙에 불과한, 하나님이 만들기 전에 재료가 어땠습니까? 흙에 불과한 존재였는데,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뇌 속에 들어 있다, 현대 과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영혼을 뇌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혼의 파괴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9. 하나님을 아는 길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계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느냐?

첫째, 자연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있어야 됩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요즘 시편 119편을 새벽마다 8절씩 끊어서 아주 지루하게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시인도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온 세상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솜씨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해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아, 저 해를, 하나님이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있으라고 말씀하셨구나, 저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해를 보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도 '저것은 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나무를 봐도, 바람을 느껴도, 계절의 변화를 봐도, 그 모든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입니다. 말씀이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늘에서 떠 있고, 우리에게 해를 주고,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기록된 말씀. 기록된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을 당연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특별 계시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 수 있습니다.

10. 세 가지 신앙

그렇다면 이제 이런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10-1. 섭리 신앙

요셉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셉의 고백을 보면요, 창세기 45장 또 50장 고백을 적어 두었는데 이 고백을 보면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하는 고백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었지 않습니까? 형들이 무서울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셉이 출세하고 만나고 나니까 형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자기들에게 해꼬지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5장 8절에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50장 20절에도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우리는 이런 신앙을 '섭리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섭리 신앙.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그때는 그것이 나에게 너무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의 손 되셨구나, 아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셨구나' 이것을 고백하는 것을 섭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원래 존재가 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경륜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로 일희일비하지 마시고, 나는 지금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겠다, 이 한 가지만 결단하시고 매일같이 주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때 그 고통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섭리 신앙입니다.

10-2. 푯대 신앙

두 번째,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절에 보니까요, "푯대를 향하여." 푯대 신앙입니다. 푯대 신앙. 우리는 숨 끊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달려가야 됩니다. 우리가 숨 끊어지는 그 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의 경주를 해 봐야 됩니다.

걸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교회 출입해야 되고, 하나님이 읽을 수 있도록 시력을 주셨으면 말씀 공부해야 되고, 매일 말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셨으면 입을 벌려 전도해야 됩니다. 내 손에 힘을 주셨으면 이 손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봉사와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이제는 됐다, 이제는 쉬자' 그 순간 사탄이 달려듭니다. 우리 다음 주에 죄에 대해서 배울 텐데, 죄는 언제 오느냐, 딱 멈출 때 죄가 옵니다. 공장 돌리는 것을 멈출 때 그때 죄가 다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푯대 신앙을 가지고 바울처럼 계속해서 달려가야 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10-3. 별세 신앙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왜 죽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나는 죄인이니까 죽어야 되는 존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별세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될 세 가지 신앙이 있다면 섭리 신앙으로, 푯대 신앙으로, 별세 신앙으로.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달리고, 이 세 가지를 꼭 기억하고 목표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가며

첫 번째 과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정리해서 말해 봅시다. 오늘 배운 것을 한번 잘 정리해서 말해 보자 했으니까, 혼자 말하지 마시고 사람을 세워서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두 번째 과제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깊이 묵상하고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받은 은혜를 기록해 보시고 나는 어떻게 살겠다고 기록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흙이었습니다. 흙으로 존재한 인간 존재를 몰랐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매여서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매여서 불쌍하게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타종교를 믿지 않고 구원의 종교, 그리스도 앞에 다시 엎드리게 하신 주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앞으로 주 앞에 살아갈 때 섭리 신앙으로, 별세 신앙으로, 푯대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