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장)
데살로니가전서 1장 7-8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 2차 선교여행의 배경
이번 학기에는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지난 학기에는 룻기와 에스더를 공부했는데, 구약을 한 번 다루었으면 신약도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를 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약성경 27권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했는데, 그중에 우리가 살펴본 것이 꽤 됩니다. 이미 옥중서신 4권을 공부했고, 고린도전서와 로마서도 공부했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 서신서 중에 초기 저작입니다.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서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첫 과를 공부할 때는 2차 선교여행 이야기를 조금 하고,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배경을 한번 나눠보려고 합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는 성도들의 고난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고난은 옛날처럼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식의 고난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메시지와 은혜의 메시지가 이번 학기에 공부할 내용입니다.
1-1.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신약 공부를 예전에 했는데 기억이 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설교 때도 말씀드리고, 금요기도회 때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입체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누구와 갔다 왔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갔다 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안디옥 교회입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여 1차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는 중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마가(요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마가(요한) 문제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첨예한 이슈가 되었는데, 마가(요한)이 1차 선교여행 때 한 번 도망간 전적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한 번 용서해주고 2차 때 다시 데리고 가자는 생각이었고, 바울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한 번 도망간 사람은 두 번 도망간다. 안 된다. 저 사람 내가 잘 아는데 절대 안 된다." 이래서 서로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9-40절을 보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심하게 다투고 피차 갈라섰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렇게 점잖게 기록해 두어서 그렇지, 얼마나 심하게 다투었으면 성경이 이렇게까지 기록해 두었겠습니까. 어쨌든 마가(요한) 때문에 두 사람은 결별합니다. 바나바는 마가(요한)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렌즈는 바울과 실라를 따라갑니다. 2차 선교여행의 시작이 어떻습니까? 깔끔합니까, 찝찝합니까? 찝찝하지요. 불편합니다. 어쨌든 분쟁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니까 불편합니다. 이 불편한 감정을 안고 시작하면 중간에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듭니까? 자꾸 원점이 생각납니다. 중간에 일이 안 되거나 문제가 생기거나 갈등이 생기면, "그때 그 일 때문에 그런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그런가?" 하는 마음이 자꾸 생깁니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갈등 요소를 안고 어쨌든 2차 선교여행을 출발했습니다.
1-2. 디모데의 합류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가다가 동역자 한 사람을 픽업합니다. 누굽니까? 디모데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절을 보면,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되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해서 같이 다닌 사람이 바울, 실라, 디모데, 이렇게 세 명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원래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목적지가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그 당시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였던 에베소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6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라고 표현된 것은 에베소를 말합니다. 성령이 바울이 정한 목적지로 못 가게 합니다.
이게 되는 게 없습니다. 2차 선교여행 출발부터 서로 싸웠고, 피차 갈라섰고, 목적지는 에베소로 가고 싶은데 성령이 못 가게 합니다. 자꾸 뭔가 삐걱거립니다. 뭔가 자꾸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한 번 못 가게 한다고 포기할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집요하고 인간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7절을 보시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자꾸 성령께서 막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런 환상을 보게 됩니다.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사이에는 바다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에게해라는 바다입니다. 마게도냐는 유럽인데, 이 바다를 건너와서 유럽으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결국 순종하게 됩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 세 사람이 아시아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이제부터는 정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원래 계획한 도시는 에베소였는데, 성령께서 오라고 했으니까 그냥 가는 것입니다. 유럽으로 갔습니다. 마게도냐는 도시가 아니고 지역 이름입니다. 유럽의 북쪽에 있는 한 땅덩어리를 마게도냐라고 불렀는데, 그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거기에서 첫 번째 만나는 성이 어디였습니까? 빌립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2절에 보면,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째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성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색 옷감을 파는 장사 여인 루디아를 만났고, 거기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갖은 고생을 다 합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
2-1. 데살로니가의 특성
두 번째 성이 어디였습니까? 그것이 데살로니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절을 보면,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성, 드디어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정리를 해봅시다. 세 명이 떠났습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 원래 2차 선교여행의 목적지는 에베소였는데 성령이 유럽으로 이끌었고, 유럽의 북쪽에 있는 마게도냐라는 땅덩어리의 첫 번째 성 빌립보, 두 번째 성 데살로니가에 이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그 당시 2차 선교여행을 하던 때에 대단히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왜냐하면 마게도냐라는 거대한 지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바울이 다니고 있던 이곳은 전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가 마게도냐라는 지역의 제일 중심 도시로 데살로니가를 지정했고, 여기가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인구가 얼마나 살았느냐 하면, 약 20만 명 이상이 살았습니다. 그 당시 고대 도시에 인구 20만이 살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살면 당장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실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상수도 시설이 필요합니다. 물만 먹습니까? 먹고 배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수도 시설이 필요합니다. 상하수도 시설이 이 도시에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20만 명 정도 살면 거기에 먹거리가 있어야 하고 또 생업의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에게해 바다로 바로 나가는 배들도 있었고, 거기서 무역을 해서 육로로 운반하는 도시여서 상업도 굉장히 활발했던 도시였습니다. 돈이 돌고, 사람이 그만큼 모이면, 거기에 신앙이 없으면 그다음 사람들이 가는 단계가 어디입니까? 타락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그곳을 자유무역도시로 지정해 두었습니다. 로마가 자유무역도시로 지정한 도시들이 몇 군데 되는데, 자유무역도시가 되면 로마가 정한 세금만 꼬박꼬박 갖다 바치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안에서 자치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소요 사태가 일어나면 안 됩니다. 다투거나 싸우거나 갈등이 일어나면 로마군이 개입하게 되고, 그러면 자유무역도시의 위상이 사라집니다.
2-2. 복음 전파와 핍박
바울이 이곳에 와서 복음이라는 것을 전합니다. 일단 바울은 회당이 있으면 무조건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믿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기름을 부은 꼴입니다. 그중에 믿는 사람들도 생겼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5절을 보면,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을 소동하게 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기가 자유무역도시이기 때문에 소동하면 안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안전이 제일 중요합니다. 도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무역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장사하고 돈을 주고받고 주머니에 돈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이것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성이 소동하게 되어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 싸우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단순히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것을 노리고 일부러 소동하게 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이곳에 발을 못 붙이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떠나가도 여기에 교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남아있는 교인들은 온전했겠습니까? 여기 남아있는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등쌀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겠습니까? 바울이 그들이 당한 고난과 핍박, 어려운 점들을 고린도에 가서 다 전해 듣고 편지를 써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2-3. 베뢰아에서 고린도까지
사도행전 17장 10절을 보면,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그다음 도시가 베뢰아입니다. 마게도냐에서 세 도시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런데 베뢰아에까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3-14절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고 했습니다. 집요한 사람들입니다. 거기까지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급하게 자기 혼자 아덴으로 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남쪽으로 말입니다.
그 지역을 아가야 지역이라고 하는데, 아가야 지역에는 크게 두 도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도시가 아덴(아테네)이고, 그 옆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크게 다섯 도시를 언급했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남쪽의 아가야 지역에서 아테네, 고린도.
고린도에 와서야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한숨을 돌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3. 택하심의 은혜
3-1. 편지를 쓰는 사람들
이제 본격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사람이 누굽니까? 1장 1절을 보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고 했습니다. 실루아노가 누구입니까? 실라입니다. 실라의 로마식 표현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났던 이 세 사람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냥 바울의 이름으로 써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 세 분을 다 기억하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이름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1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허투루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이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잘 보십시오. 교회의 위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치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두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 하나는 지리적 위치입니다. 지도를 펴고 마게도냐 지도를 찾아서 거기에서 데살로니가라는 항구 도시를 찍어서 "여기에 이 교회가 있습니다" 하는 것도 답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교회의 위치가 어디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왜 중요합니까? 집합 관계로 생각해 보십시오. 항아리를 하나 그려보십시오. 제일 바깥에 있는 항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다음 안쪽에 있는 게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제일 안전한 교회입니까?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제일 안전한 교회입니다. 어떤 신앙인이 제일 안전한 신앙인입니까?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앙인이 제일 안전한 신앙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핍박당해도, 고난당해도, 우리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항아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부딪치고, 아무리 밀어도, 세 겹의 항아리 안에 있는 자를 건드리겠습니까? 못 건드립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3-2. 믿음, 소망, 사랑
3절에서 바울이 감사하고 칭찬하는 것이 나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믿음의 '역사(役事)'라고 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냥 안에만 있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믿음이 보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믿음의 역사가 전해지게 됩니다.
사랑의 '수고(受苦)'라고 했습니다. 수고라는 것은 힘들어야 합니다. 땀이 나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라는 것은 그냥 손가락으로 "나 너 사랑해" 이것이 아닙니다. 땀이 나도록 봉사하고, 힘들게 일하고, 힘들어야 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진짜 사랑은 수고입니다.
소망의 '인내(忍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무엇입니까?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지금 버티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소망의 인내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소망이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지금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3-3. 하나님의 택하심
4절을 보면 대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택하셨습니다. 택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이쪽을 선택하면 저쪽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쪽을 택하지 않고 이쪽을 택한 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부모님을 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모님 품에 그냥 뚝 떨어진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까 태어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위해서 만나야 했던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우연히 여기저기 만나다 보니까 만났겠습니까? 세상에,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날 확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만날 확률, 그 사람들이 만나서 아버지 어머니가 태어나고, 아버지 어머니가 만날 확률, 그래서 만나가지고 내가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교회 오고, 그렇게 예수 믿고, 하나님 만나게 되고. 이것을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너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이지, 우연으로 어쩌다 보니 그냥 태어나고, 어쩌다 보니 살고, 어쩌다 보니 복음 듣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확률로 우연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던 과정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건들과 하나님의 섭리들이 겹겹이 쌓여서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지, 처음 교회 나왔을 때부터 신앙을 잃어버릴 위기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그 시간까지. 세상에 재미있고 놀 만한 것은 많은데 그것을 다 포기하고 신앙인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위로가 됩니까? 고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바울이 편지를 써주는 것입니다. "너희 지금 고난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셔서 택한 자들이야." 그것을 생각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살다가 어려운 일 겪습니다. 심적인 고통도 겪고, 힘든 일도 겪고, 하는 일이 잘 안 되어서 복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구나. 수많은 우연 같은 일들이 겹치고 겹쳐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이 자리에 오게 하셨구나. 이것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확률로 계산합니다. 몇 천만 분의 1, 몇 억만 분의 1, 지구가 먼지 알갱이에서 이 지구가 나타날 확률이 얼마이고, 하나의 생명이 이루어져서 사람이 될 확률이 얼마 분의 얼마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말들입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3-4. 말이 아닌 능력
5절을 보면,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바울이 비슷한 말씀을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한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곧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정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로만 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로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본 사람은 모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 지나가고, 레위인 지나가고,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면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데려다가 주막에 가서 뉘어서 여비를 주고 그 사람을 치료해주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사람을 잘 보살펴 주시오. 돈이 더 들면 와서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말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떠들어 놓고서는 주머니에서 돈도 한 푼 나오지 않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해놓고 얼굴에 땀도 한 번 흘리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은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도 거기서 입으로만 때운 것이 아니라 몸으로 수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갈 때, "하나님, 저 이런 수고 좀 했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고 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때우면 안 됩니다. 몸으로 수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4. 본이 되는 삶
4-1. 본받는 자에서 본이 되는 자로
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질 때, 처음 믿었던 이 사람들은 누구를 본받았다고 했습니까? "우리와 주를" 본받았습니다. 주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신앙의 초기에 그들이 모델로 삼았던 자들이 누굽니까? "우리", 바울, 실라, 디모데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은 본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초기에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초기 모델을 잘 잡아준 것입니다.
신앙을 처음 갖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더 잘 안 와닿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고 모델로 삼겠습니까? 가까이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의 자녀들은 누구를 모델로 삼겠습니까? 엄마 아빠를 보고, 부모를 보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 모델 틀이 뭔가 뒤틀려 있으면, 입이 삐뚤어져 있고, 눈이 삐뚤어져 있으면, 그것이 다인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개척 목회를 했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냥 교회를 개척하고 뚝딱 하나 지어놓고 가는 것이 아니고 본이 되어야 하니까 힘든 일입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앞에서 인도하는 교역자들, 그리고 교사 선생님들, 그것이 본입니다. 그 본을 보고 학생들이 배웁니다. 그대로 배웁니다. 선배들을 보고 믿음이 어린 성도들이 배우고, 교회 목회자들을 보고 성도들이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본이 중요합니다.
간혹 하기 싫어도 좀 하는 척해야 합니다. 폼도 좀 잡아야 합니다. 하기 싫다고 너무 자유롭게 "나는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래. 교회 가기 싫으면 가지 마. 나도 안 갈래." 부모라고 다 주일날 1년 52주 컨디션이 다 좋아서 주일 성수하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자식 때문에 기쁜 척하고 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싫어도, 힘들어도 그냥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 됨의 부모 노릇이고, 신앙의 선배 된 자의 본이 되는 삶입니다. 마음이 힘들어도, 잘 안 되어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이 성장하고 자라면서 본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그들은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라고 하면 아까 세 도시를 떠올리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여기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라고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빼고 빌립보 교회와 베뢰아 교회입니다. 또 아가야 지역 하면 두 교회입니다. 아테네 교회, 고린도 교회.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것이 성장입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본받는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성장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 본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본받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를 본받아 신앙생활 했습니까? 내 신앙의 롤모델이 누구였습니까? "나는 정말 저분은 존경할 만한 신앙인이다" 했는데, 그러면 나는 이제 성장해서 누가 나를 본받고 싶어 합니까? 누군가가 "나는 정말 장로님 같은, 권사님 같은, 집사님 같은,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게 되면, 신앙생활 성공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신앙생활해도 누군가의 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신앙생활은 가짜입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본받는 자에서 본이 되는 자가 된 것입니다.
4-2. 본이 되는 구체적 모습
8절에서 어떤 것이 본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교회 성도들이 나가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그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스데반 집사는 순교당하고,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가서 거기에서 복음 전하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게 한 것처럼, 그리고 핍박받은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저 북쪽으로 올라가서 시리아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거기서 교회를 세웠던 것처럼, 지금 이 교회 성도들이 핍박당하고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빌립보 교회나 베뢰아 교회는 이런 칭찬이 한 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난당하고 핍박받았던 교회에 이런 칭찬이 있습니다.
4-3. 믿음의 소문
두 번째 칭찬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첫째는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이들의 믿음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소문,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기도 했고, 교회 공동체의 소문이 온 지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 소문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 말했습니다.
첫째, 회심입니다. 9절을 보면,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이것이 소문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소문나는데 첫 번째 소문은 이 교회 성도들의 회심이 소문나야 합니다. "달라졌더라. 이 교회 성도들이 달라졌더라." "교회 건물 잘 지었더라"가 첫 번째 소문되면 안 됩니다. "교회 성도들이 많아졌더라"가 첫 번째 소문되면 안 됩니다. 진짜 교회의 소문 첫 번째는 회심의 소문이 나야 합니다. 이 교회 와서 성도들이 변화되고, 하나님 만나고, 회심하고, 은혜받고, 매 예배 때마다 눈물의 역사가 일어나고, 삶이 변화되는 역사.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입니다.
둘째, 섬김입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라고 했습니다. 회심했으면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섬겨야 합니다. 은혜 받고 이제 제대로 살겠다고 했는데, 성도도 섬기고 교회도 섬기고 봉사하고 일해야 합니다. 일꾼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는 많은데 일꾼이 없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많아지고 회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진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일꾼이 일어나야 합니다. 서로 일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소문입니다. 은혜 받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은혜 받았는데 어떻게 엉덩이 붙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엇이라도 들고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야지요. 복음을 전하고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셋째, 기다림입니다. 10절을 보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임박한 재림 사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도들 보는 데서 구름 타고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의 말이 자꾸 회자됩니다. 천사들이 "너희가 본 대로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이 금방 오실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의 소문은 그냥 잠자코 잘 기다리는 것입니다. 회심과 섬김을 통해서, 이상한 사이비 종말론에 빠지지 않고, 이단의 종말 사상에 빠지지 않고, 잘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문입니다.
여기에 "이 교회 성도 수가 많아졌더라", "이 교회가 건물을 멋지게 지었더라", "이 교회가 무엇을 샀더라" 이런 것이 없습니다. 진짜 교회의 믿음의 소문은 이런 것입니다. 회심의 역사와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우리가 잠자코 종말의 때를 잘 기다리면서 자기 일을 하고 있더라. 이런 소문이 나야 합니다. 이런 소문은 누가 냅니까? 내가 냅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소문입니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해서 인스타도 하고 이것저것 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본받는 자에서 본이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본받았다가, 이제는 성장해서 누군가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본받는다고 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소문은 회심과 섬김과 기다림의 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고, 또 한 주간 은혜 가운데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셔서, 그 교회를 택하여 주시고 바울과 실라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디모데와 함께 세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이 세 사람은 그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어릴 때는 세 분을 본받는 자였지만, 이제는 믿음이 성장해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을 삼십 년, 사십 년, 평생 했는데 누가 나를 본받고 싶은지, 누구에게도 본이 되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받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주여 우리의 모습을 다시 정직하게 돌아봅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다시 살피고 돌이키고 돌아보며, 본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가 정말 소문나는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매일같이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고, 섬기는 자들이 많이 불일듯 일어나며,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좋은 소문, 믿음의 소문 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