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장)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특강 두 번째 시간으로 2장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1장을 살펴보았는데, 사실 서신서는 스토리가 있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할 때는 이해가 되다가도 조금 지나면 그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은 기억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말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보겠지만,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가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원래 본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을 본받는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성장하여 본이 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본이 된다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믿음을 보여주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까? 첫째는 회심으로 좋은 믿음의 소문이 났고, 둘째는 섬김으로, 셋째는 종말을 기다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성장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는 내가 누군가를 본받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본받는 누군가가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교회에 대해서 대단히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믿음, 소망, 사랑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볼 2장 이야기는 바울이 "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목회할 때 이런 마음으로 목회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성도를 대하는 태도,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사도이니 우리와 다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섬기며,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를 오늘 2장 말씀이 아주 상세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헛되지 않은 복음 사역
먼저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어디서 기록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차 선교 여행 중에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떨어진 곳에서,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헛되다'는 말에 헬라어 '케노스'(κενός)라는 말을 썼는데, 텅 빈, 공허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썼을까요? 지금 바울은 이 교회를 개척해 두고 이 교회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세 도시를 다 다녔습니다. 첫 번째가 빌립보, 두 번째가 데살로니가, 세 번째가 베뢰아입니다. 여기를 다 돌고 지금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가야 지방의 아테네를 지나서 고린도에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고난을 지금 매우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고 있다는데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영적으로는 이 고난을 잘 이겨내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아픕니다.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탄이 자꾸만 바울 속에 자신감 없는 이야기를 넣어 둘 수가 있습니다. "너 그 교회 개척하고 지금 같이 있지도 않은데, 그 교회 개척하고 그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죽어야지. 넌 지금 여기 고린도에서 편지 쓰고 있고, 지금 그 성도들은 고난당하고 어려움 겪고 있는데, 그러면 네가 개척한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 아니냐?" 그것은 바울뿐만 아니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 거기를 소요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계속 혼돈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안다."
여러분, 사탄이 가끔 우리에게 속삭이지 않습니까? "열매가 어디 있느냐? 지금까지 신앙생활 오랫동안 했는데 너 열매가 있으면 한번 말해 보라고. 그냥 지금까지 왔다 갔다 하고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너의 집안이 잘 됐느냐? 네 자식이 잘 됐느냐? 네가 건강하기나 하냐? 열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를 시험 들게 하면 그러면 우리 마음속이 자꾸 공허해집니다.
그런데 그때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오늘 2장의 결론은 교회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교회는 사람입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오늘 읽었던 2장 20절 본문에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헛되다고 말하지만, 그런데 헛되지 않은 것이, 남은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그 교회 성도들이 지금 이 고난을 잘 견디고 이겨내고 어쨌든 버티고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발붙이고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온 길을, 신앙생활한 것을 볼 때 허무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남겨야 됩니다. 사람을, 사람을, 사람을 키워야 됩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을 잘 키워내고 길러내고, 이 사람들을 복음 안에서 잘 세워 보면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영광되고 보람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 이야기가 2장 전체에 흐르는 맥락이고 주제입니다.
1-1. 고난을 함께함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지난 시간에 서론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은 자기가 원해서 유럽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에 머물려고 했는데 에게해 바다를 건너와서 유럽의 북쪽 지역 마게도냐 지역의 세 도시를 갔는데, 첫 번째가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에서 지금 바울이 무엇을 당했습니까? 고난과 능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이 점치고 있는 것을 고쳐 주었습니다.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여종을 데리고 다니면서 점 보면서 이익을 삼았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바울이 끌려갔습니다. 정상적인 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옷도 벗기고 그냥 매질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감옥에 쳐넣어 버렸습니다. 감옥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 감옥에 발에는 착고를 채우고, 그리고 나서 그냥 던져 뒀습니다. 그것을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고난당했고, 데살로니가에서 고난당했고, 어려움을 수없이 많이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 디모데 이 일행을 도우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참고 구절을 적어 두었는데요. 디모데후서 2장 3절과 4절을 보시면, 3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 서신인데, 자기가 믿음에서 낳은 아들 같다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아닙니까? 그런데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편지 쓰면서 "잘 먹고 잘 살아라"가 아니고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라고. 그런데 "고난을 받으라" 앞에 말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함께요? "나와 함께." 이 말이 중요합니다. '함께'라는 말이.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앞선 자가 있고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항상 멘토와 멘티가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 너희만 그냥 갔다 와라" 이런 적 있었습니까?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서 전도 훈련시켜 보낼 때 말고, 진짜 고난의 자리, 어려운 자리에 제자들을 사지로 밀어 놓고 예수님은 빠지고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적은 우리 주님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 말씀을 하셨는데, 요한복음 10장 3절과 4절을 보시면 선한 목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양들아" 아니고, 양들의 이름을 각각 다 알고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목자가 어떻게 합니까? 앞서 갑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옵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앞장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역시 요한복음 10장 11절, 12절 말씀을 보시면 역시 선한 목자 이야기인데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당연하지요. 앞장서니까, 앞서 가니까, 돌에 맞기도 하고 칼에 맞기도 하고 찔리기도 하고. 앞서 가니까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그래서 지금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난 받으라고 이야기하는데 "나와 함께"라는 말을 썼습니다. 나도 고난 받으니 너도 고난 받으라. "나는 고난 받지 않을 테니, 나는 늙고 병들고, 나는 이미 고난 많이 받았으니, 이제 네가 받을 차례야" 이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너희가 당한 고난 나도 빌립보에서 다 당했고, 지금 나도 고린도에서 고난당하는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입니다. 지도자는 함께하는 사람이지 뒤로 빠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는 그래야 사람을 길러낼 수가 있습니다. 2장의 전체 주제가 "교회는 사람이다"라고 했잖아요. 사람을 길러내는 것, 사람을 길러내려면 고생을 같이 해야 됩니다. 앞서 가고 함께해야 됩니다. 자기는 빠지고 어떻게 사람을 길러내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 길러낸 방식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말은 주님은 안 계시고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냥 무인 조종해서 따라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께서 골짜기, 산골짜기, 어려운 일도 함께 우리와 다니신다는 뜻 아닙니까? 그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을 길러내는 데는 고난을 함께 받아야 된다, 고생을 함께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바울이 먼저 이 교회 성도들에게 던져 줍니다.
1-2. 복음을 위탁받음
그다음 바울이 복음을 전한 목적과 이유를 말했는데요. 3절에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당연합니다. 복음인데요. 4절에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탁받았다, 부탁받았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께.
이 '위탁받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면 '피스튜오'(πιστεύω)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스튜오, '피스티스'라는 말은 신뢰하다는 뜻입니다. 신뢰하다. 하나님이 바울을 신뢰하시니까 복음을 위탁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복음은 절대 싸구려가 아니고 값싼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것입니다. 왜 소중하냐?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피 아닙니까? 피 흘림.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두 자로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보' 자가 무엇입니까? 보배로운 피 아닙니까? 보배로운 피, 보배로운 피가 복음의 핵심인데, 그 소중한 보혈을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아무나 그냥 전하라고 던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피스튜오 하시니까, 믿을 만하다고 여기시고 신뢰하시니까 복음을 위탁한 것입니다. 부탁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어느 한 식당이 장사가 잘됩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사람들이 줄을 막 섭니다. 그러면 그다음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체인점을 좀 해 달라고 사람들이 막 부탁합니다. 그러면 체인점 해 달라는 사람은 다 해 줍니까? 1호점 점주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면접도 보고, 또 그 사람 경영 마인드도 살펴보고, 나와 함께 이 체인을 같이 잘 키워갈 수 있는 사람인지 볼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개인 기업에서 사람을 뽑아서, 사람을 채용해서 일을 맡길 때도 아무나 뽑아서 아무나 맡깁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깁니다. 그 사람을 검증하고 또 살피고 살펴서, 정말 이 사람에게 이 중요한 일을 맡겨도 될지 맡기면 안 될지를 검증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복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맡기는데 아무나 맡기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전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보혈을 전하는 것,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무슨 총동원 집회나 이런 것 한다고 양재기 주고, 고무신 주고, 오면 국자 주고, 무엇 준다고 그냥 다리 저는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누구나 사람이라고 생긴 것은 다 데리고 오십시오 해 가지고 데리고 옵니다. 교회 한번 발을 딛게 하는 것은 너무너무 소중하고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어떤 사람은 내가 복음을 전할 자격이 안 되는데 복음이 아니라 싸구려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짜를 어떻게 전하는지 아십니까? "야, 교회 오면 한 달에 몇만 원씩 구제금 준단다. 교회 가자." 그러면 그 뒤치다꺼리 누가 다 해야 됩니까? 목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끼시는 교구 목사님들이요. 교회가 구제 기관입니까? 물론 교회가 구제하지요. 그런데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이지, 교회가 동사무소에서 줄 서서 구제금 받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우리 교회는 없는데 묘지가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묘지가요. 요즘 묘지 쓰는 데 화장 많이 하지만, 매장해서 묘지 쓰는 데 땅 사는 데 돈 많이 들지요. "야, 우리 교회 오면 너 죽어서 갈 데가 있단다. 가자." 그래 가지고 오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그런 싸구려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싸구려를. 그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신뢰한다고. 그러니까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자부심도 없고 가치도 없고, 전부 다 복음이 다 가짜 복음이 되고 싸구려 복음이 되어 가지고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가 그래 가지고 사람 숫자를 불립니다. 그것이 성장입니까? 살찌는 것이지요. 비만. 그것은. 그래서 교회가 비만한 교회가 되면 그 교회가 정상이 되겠습니까?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부조리와 수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랬습니다. 그다음 무엇입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발걸음 내딛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셔서 권능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커녕 권능은커녕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전도하는 직책, 복음을 위탁받은 분들은 대단한 분들인 것입니다. 대단한 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따지면 바울이 이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런 맥락으로 한번 더 보세요. 4절에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내가 복음을 위탁받았다. 이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기의 사도 됨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분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그래서 이렇게 위탁 받았으니까 바울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함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입니다. 이분의 목적은 복음 전파의 목적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제대로 되니까 복음 전도의 방향과 목적이 딱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교회 목회의 방향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목양하는 것도,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러면 이래서 이제 바울의 모든 비밀들이 풀리는 것입니다. 바울 주변에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딴 것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되니까요. 사람에게 시험 되는 일도 없고요. 핍박한다 해서 거기 거꾸러뜨림 당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교회 사역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주께서 맡긴 일을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꾸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자꾸만 시험에 드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시험이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마음 한 가지만 있으면 시험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그랬던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24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람에게 하지 말라, 주께 하듯 하라. 왜요? 사람을 섬기지 않고 주 그리스도를 섬기니 그렇다. 우리가 섬기는 대상을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못 박아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2-1. 아첨과 탐심 없이
자 이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하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했던 것도 있고 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요.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아첨하는 말이 왜 필요하고 탐심의 탈을 왜 쓰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옮기면 성도들을 이용해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을 이용해 먹지 않았다. 성도들을 이용해 먹는 거짓 선지자들, 가짜 교사들 많지 않습니까?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도 성도들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 뭐 요즘은 그런 용어도 있지 않습니까? 가스라이팅이라는 좋지 않은 용어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 그런데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딱 방향 지워지니까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 다른 이에게서든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바울의 이런 행적이 사도행전 14장에 잘 나옵니다. 잘 아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 때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에 앉은뱅이를 고쳐 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막 격상시켜 가지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니까,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절대 이 일을 못하게 말렸습니다.
2-2. 유모 같은 마음
그다음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어떤 자세로 목회했다고 말합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목회한 목회 방향을 이야기했는데요.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8절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9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는 삯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전업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고 목양을 하기 때문에,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는 교회가 해결해 줘야 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조차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유는 왜 그랬을까요? 개척 교회니까, 처음 시작하는 교회니까요. 지금 우리 교회처럼 장로님들도 계시고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도 계셔서 교회 조직과 교회 역사와 흐름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은 이런 전통 교회가 아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막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면 그것이 혹시나 이 믿음이 어린 연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될까 봐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희들의 연약한 믿음을 내가 보살피고 돌봐 주려고 권리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모가 자녀를 보살핌같이 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모가, 혹은 아이 젖 먹이는 어머니가 자녀를 기를 때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지 않습니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어머니들이 나도 예쁘게 꾸미고, 나도 운동도 하고, 내가 가진 시간도 쓰고,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처녀 때 했던 공부도 해서 자아실현도 하고, 그런 권리들이 다 있습니다. 전부. 그런데 그것을 왜 못합니까?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갓난아이니까, 갓난아이니까 그 모든 권리들을 내가 다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2-3. 권리 포기의 상급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바울은 사역자이고 우리는 사역자가 아닙니다. 2천 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배워야 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사실 이제 교회에서, 교회가 이렇게 큰 조직 교회가 움직이다 보면 각종 권리를 주장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십니다. 각종 권리를요. 이를테면 노골적으로 말씀하는 분도 계십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는데 이것도 내가 누릴 권리가 없냐"고 그러십니다. 어떻게 대응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될지요.
"내가 교회에다 1년에 얼마를 헌금하는데 이것도 내가 누릴 권리가 없냐"고요. 제가 그런 분 봤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아닌데, 주차장 자기 주차장 공간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그러십니다. 미치고 팔짝 뛰지요. 이제 그런 이야기 들으면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그래도 그럴 권리가 있어도 누리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 우리가 다 그래서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아예 목사나 교회 장로님들이 중직자들이 차를 갖고 들어오면 안 되겠다, 교회에다. 교회 보면 담임 목사님 전용 주차장 자리가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것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 없어야 됩니다. 아예 주일날 되면 장로님들이 땀 흘리고 교회 걸어오셔야 됩니다. 양쪽에 가방 들고요. 부 교인들 많이 보는 데 보라고요. 자기 차도 갖고 오고 부인 권사님 차도 갖고 오고 그 집 애들 차도 교회 갖고 오고 그래 가지고, 그러니까 교인들이 생각하지요. "내가 교회 헌금을 얼마 하는데 나도 그러면 주차 공간을 달라"고요. 그 다음에 이 소리나 하지요. 이것이 보니까 윗물이 썩어서 그런 것이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요. 전부 다요. 그래서 그런 것, 작은 것 하나하나부터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지요. 왜 없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 없는 것이 많습니다. 있는 것도 많지만 없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당회실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찾아보세요. 당회실 간판 있는지. 건물이 하나 지어졌습니다. 저기 건물은 멀쩡하게 지어졌는데 당회실이 없어졌습니다. 장로님들이 회의 자주 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회의도 해야 되고요. 당회실 없으니까 이제 제 방 목양실에서 같이 당회도 하고 막 복작복작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이제 장로님 네 분이 더 생겼습니다. 이제 더 복잡하게 됐습니다. 이제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해야 될지. 그런데 당회실을 가질 권리가 없습니까? 교회 장로님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것. 가보세요. 다른 교회 당회실. 제일 좋은 데, 제일 좋은 시설에, 제가 가 보니까 어떤 교회는 마사지 의자도 있더군요.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없어도 됩니다. 그런 것. 당회실 없어도 식당에서 회의도 되고 괜찮습니다. 다요.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성도들을 위해서, 믿음이 어리고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키워내고 길러 내려면 권리 포기를 해야 됩니다. 권리 포기를. 그래야 사람이 잘 큽니다. 어떻게 잘 키웁니까? 어떻게 키울 것입니까? 무슨 수로 내가 누릴 권리 다 누리고 내가 할 것 다 하고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기릅니까?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희생을 좀 해야 나중에 할 말이 있지요. "내가 이놈의 자식,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한마디라도 좀 하지요. 뭐 하고 싶은데, 권리 포기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 말밖에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포기도 좀 하고 수고도 하고 그래야 길러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거룩한, 구별된, 옳은, 하나님 말씀에 틀림이 없는, 흠 없는, 늘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아예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흠이 없다는 말은 죄가 있어도 늘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의 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의 상은 누구에게 받습니까? 하나님에게 받습니다. 하나님에게 받는 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상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 다 써 버리면 보세요, 상이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권리, 내가 목사라고 누릴 수 있는 권리, 장로라고 누릴 수 있는 권리, 내가 교회 오래 다녔다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 받아 써 버리면 상이 없습니다. 상은 좀 남겨 놨다가 받는 맛이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중에 하나님 나라 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으로 큰 상을 받아야지요.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3.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울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목회했다고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이 중요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세 가지로 가르쳤는데요. 첫째는 권면입니다. 좋은 것을 계속 권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요. 그런데 이 '권면'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이 본뜻에, 여기에 숨겨진 뜻이 '계속' '지속적으로' 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말고가 아니고 계속 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좀 짜증을 내도 계속 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계속 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자녀가 입이 짧아 가지고 뭘 안 먹는데 엄마는 마음이 막막 다급해 계속 권합니다. 짜증을 내도, 그래도 좀 잔들어가면서도 계속 권합니다. 이것 먹으라고, 이것 해야 된다고 계속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것을 계속 권했습니다.
둘째는 위로입니다. 위로는 말 그대로입니다. 상처받고 쓰러지고 문제 있고 이러면 이렇게 세우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 셋째가 중요한데 경계라고 했습니다. 경계. 이것을 원어에 찾아보면 '마르튀레오'(μαρτυρέω)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르튀레오. 이것의 명사형이 '마르튀스'입니다. 마르튀스 들어보셨습니까? 강아지 이름 아니고요.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증인. 그래서 여기 마르튀레오는 증거를 보여 주다는 뜻입니다. 증거를 보여주다. 그러면 이 말은 무엇입니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며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자 이것은 사역자가 이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너의 민낯이 이것이야, 이것이야, 원래. 권면하고 위로도 하는데 경계도 하는 것입니다. "너 꼴이, 이 꼴이라고. 지금 잘난 척하지 마. 너 그렇게 믿음 좋은 척하지 말고. 위선 떨지 말고. 너 원래 네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너의 추하고 죄악된 모습을 좀 보라고."
이것이 아까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아첨하는 말이나 탐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목회하니까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목회하면 마르튀레오 할 수 있겠습니까? 증거를 딱 들이밀면서 "너 꼴이 이 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것 저 사람 상처받을까 봐.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눈 딱 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키워내고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참 예수님도 좀 모지게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제일 모진 말씀하신 것이 "사탄아"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니까, 예수님 기뻐하셔서 "바요나 시몬아, 이를 네게 알게 한" 어쩌고저쩌고 해서 천국 열쇠도 주고, 예수님이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수난 예고 끝나자마자 베드로가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까, 돌아서서 바로 직설적으로 하신 말씀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마르튀레오입니다. 증거를 보여 준 것입니다. "봐라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조금 전에 네가 신앙 고백했는데 돌아서자마자 이따위 소리를 하는데 네가 마귀 새끼지 네가 사람 새끼냐?"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무섭습니다. 예수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런데 참 베드로도 훌륭한 것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저 상처받았어요" 그러고 막 울고 뛰쳐나가고 안 그러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혼나면 혼나는 대로. 가끔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예수님하고 한번 신나게 혼나고 싶다. 그냥 예수님에게 대려 맞는 것은 말고, 맞는 것은 좀 아프니까요. 사랑하니까 주님이 혼내시고 경계하고 하는 그런 것. 그런데 베드로가 진짜 훌륭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인간관계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관계로 받으면 얼마나 서운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관계로 받으면 "아니 나하고 예수님하고 알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내가 당신께 어떻게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서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경책하는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그냥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치지요. 그러니까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약으로 삼지요. 그 진심을 아니까요. 그런 것입니다.
3-1.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자 이렇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12절에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합당히'는 '악시오스'(ἀξίως), '어울리게'라는 의미이고, '행하다'는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 자주 나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페리'는 '아 이렇게 주위를'이라는 뜻이고 '파테오'는 '걷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합당하게 행하다'는 말은 어울리게 함께 걷다는 뜻입니다. 즉 권면도 하고 위로도 하고 증거를 보여 주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이유는 이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기에 합당하게 하려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려고, 하나님과 걷는 것이 어울리게 하려고입니다. 결국은 바울의 목적은 그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 상관없습니다. 성도들이 자기와 동행해야 됩니다. 자기와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이비 이단들, 교주와 성도가 함께해야 됩니다. 그 테두리에서, 범위에서 못 벗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성도들을 키웠습니다. 길렀습니다. 세웠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빠지는 것입니다. 세워 놓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어울리게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분의 목표였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방향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고, 내가 반드시 있어야 되고, 내가 너를 돌봐 줘야 되고, 내가 너를 책임져 줘야 되는 것" 그것이 사이비이고 그것이 이단입니다. 바울이 권면도 하고 위로도 하고 경계도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도를 같이 세우는 것입니다. 함께 동행하도록요.
여러분, 우리가 부모 아닙니까? 자녀들을 권면하고 위로도 하고 경계도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목적이 중요한데, 내가 내 자녀보다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가야 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입니다. 신앙 훈련과 신앙 교육, 교회학교 마찬가지이고,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 성도들을 훈련하고 양육하는 목적은 그렇게 걷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같은 방향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낳았으니 책임져야지요. 그렇지요. 길러야지요. 이렇게 길렀다는 뜻입니다.
3-2. 말씀으로 받음
자 13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감사 제목이 또 나옵니다. 왜 감사합니까?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 아까 위에 말을 받아 보면 무엇입니까? 권면의 말씀, 위로의 말씀, 경계의 말씀. 이 말씀을 받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사람의 말로 받으면 얼마나 원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말로 받으면 너무너무 속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가운데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서 역사하는, 움직이는 동력이 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무엇으로 받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됩니다. 사람의 말로 받으면 안 됩니다. 절대.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큰 죄를 짓고 완전 범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단이 와 가지고 신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그 앞에 무릎을 다 꿇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그때 다윗은 왕입니까, 한 사람의 성도입니까? 성도입니다. 만약 왕으로 나단 선지자의 말을 받으면 나단은 죽은 목숨입니다. "감히 이 나라의 왕에게? 왕이 여자 하나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냐? 왕이 신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데 네가 뭔데?" 이러면 나단의 목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자기는 그냥 성도였습니다. 선지자가 그 말을 할 때 그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믿음으로 역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큰 죄를 짓고도 살아난 것입니다. 용서받고 살아나고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한 종이 되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계하는 말씀 특히 받을 때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지 사람의 말로 받으시면 안 됩니다. 이것 중심 잘 지켜야 됩니다. 마음 중심 잘 지켜야 됩니다. 안 그러면 금방 서운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아니 우리 구역장님이 나한테 어떻게 해?" "아니 저 권사님이 나한테 어떻게 해?" 가끔씩 책망할 때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럴 때도요.
3-3. 신념이 우상 됨
자 그다음 유대인들 이야기를 한번 볼게요. 극단적인 유대인들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5절입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유대인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바울의 사역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여러분 유대인들, 그 당시 복음을 방해했던 유대인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던 유대인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끝까지 방해했던 유대인들을 보면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자기 신념이 우상이 된 사람들입니다. 자기 신념이 우상이 된 사람.
유대인들의 특징은 딱 이것입니다. 자기 신념을 절대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없을까요? 자기 신념이 우상이 된 사람들. 많습니다. 복음이 아무리 그들에게 문을 두드려도 복음으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 신념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신념이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같은 분들입니다. 어떡하겠습니까? 계속 두드리고 또 이야기하고 두드리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서지고 깨져야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말씀이고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를 말씀 앞에 쳐서 복종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왜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바울이 잘 안 되니까요. 나를 때려서라도, 내가 나를 때려서라도, 쳐서 나를 복종시켜야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두고 자기 신념만 붙들고 사는 유대인들 같은 사람들, 절대로 그런 사람들 되면 안 됩니다. 절대로.
4. 영광이요 기쁨이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17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지금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니까요. 그렇지요.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절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과 실라, 디모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이 세 분의 자랑,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그가 강림하실 때, 즉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요, 소망이요, 기쁨이요, 면류관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20절 말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자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쭉 한 것입니다. 자,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결국 사역자인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에게 영광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너희는"이라고 그랬습니다. "너희가 세운 건물이", "너희가 모은 헌금이", "너희가 한 일이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 자체가 곧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바울이 목회한 목회의 중심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방향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람을 기른 것입니다. 사람을 기를 때 그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도 하지 않고 탐심의 탈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랬지요.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권면했고, 그들을 위로했고, 그들을 경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잘 길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교회인 너희 성도들이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4-1. 교회는 곧 사람
그러면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건물입니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서 멋지게 지은 건물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는 곧 이렇게 잘 길러낸 사람입니다. 이 바울 신학이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요.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을 보시면 바울이 역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각 사람, 각 사람이 다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목회는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 세움은 결국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 갈라디아 교회, 빌립보 교회 하면 그 교회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 성도들. 바울은 건물 세우고 교회 세웠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 교회 성도를 세웠지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돈만 있으면 건물로서 교회는 얼마든지 짓습니다. 돈도 없어도 됩니다. 은행에서 달라면 다 줍니다. 다 줍니다. 그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건물 짓는 것은 필요하면 지으면 됩니다. 필요하면. 크게 소박하게 다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교회는 사람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 세워야 됩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 우리 교회학교 어린아이들.
그런데 그 사람을 세우는 데는 때가 있습니다. 때가. 저출산이 이렇게 심각해질 줄 알았습니까? 애들이 없어질 줄. 그나마 있는 애들, 마지막 때인 줄 알고 열심히 세워야 됩니다. 열심히 키우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세우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곧 교회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는가? 이것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다음 한 주간 이 2장의 핵심을 한번 더 잘 읽어 보시고 새겨 보시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그 교회를 바울은 건물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키웠습니다. 권면했고 위로했고 경계했습니다. 바울이 세운 성도들이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주여, 우리도 이렇게 교회가 되어 갑니다. 주여, 우리가 정말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을 받아서 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하시고 잘못된 것 있으면 고치게 하시고, 고친 대로 살아갈 용기도 결단도 능력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도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사람을 길러내고 싶습니다. 교회를 살면서 수없이 많이 기르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는데 사람이 귀찮아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여, 이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 열심히 길러내겠습니다. 사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도록 도우시고,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힘써서 훌륭한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을 많이많이 길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