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 전체녹취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3 -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살전 3장)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오늘은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세 번째 시간으로, 3장을 함께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3장을 공부하면서 2장을 잊어버리고 오시면 곤란합니다. 1장과 2장에 어떤 핵심적인 내용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되새기고 오시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2장에서 우리가 공부했던 핵심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그냥 한 사람의 성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방식을 설명했는데, 권면했고 위로했고 경계했습니다. 즉 다양한 방식으로 세우고 또 키워갔는데, 그 '경계했다'는 말은 책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을 키우고 세워갈 때 중요한 것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2장을 통해서 배웠던 바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교회는 사람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우고 키워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키워내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3장의 이야기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뒤편에 가면 본격적으로 기쁨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성도는 언제 기쁜가? 우리가 언제 기쁩니까? 놀 때 기쁜가? 돈을 벌 때 기쁜가? 내가 드리는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기쁜가? 사람들이 다 기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성도가 기쁠 때가 언제인가?

이 이야기를 오늘 보고 나서 '나는 정말 이 기쁨을 누려본 경험이 있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디모데를 보내노니

1-1. 분명한 사명

첫 번째 질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여러 번 무산된 바울은 누구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하려고 했는데 사탄이 자꾸 막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이 본인이 가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자꾸 차단되고 막히니까 그중에 디모데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지금 2차 선교 여행을 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하는데, 2차 선교 여행은 유럽 지역이었고, 유럽의 북쪽이 마게도냐였고, 마게도냐의 첫 번째 성이 빌립보, 두 번째가 데살로니가, 세 번째가 베뢰아였습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테네를 지나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합류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세 분의 개척 멤버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였습니다. 그러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데살로니가의 경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인데,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기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남아있고 디모데를 파송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디모데를 지칭하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이 절에서 디모데를 어떻게 지칭합니까? 첫째는 '우리 형제'라고 그랬습니다.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그랬습니다.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수직적인 단어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길러낸', '내가 키워낸', '내가 이 친구를 루스드라에서 픽업해서 지금까지 보고 맡아서 잘 키우고 내 말을 잘 듣는' 이런 말이 있습니까? 여기 없습니다. '형제', '우리 형제요',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대단히 수평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이 세 분 사이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바울 시절의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주종 관계가 확실하지 않습니까? 주인과 종이 확실하고, 선생과 제자가 확실하고, 그리고 왕과 백성이 확실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보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수평적인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에서 제자들의 입이 예수님 앞에서 다물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있는지 복음서를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수난 예고를 하시니까 베드로가 "주님, 결코 이런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끼리 막 싸웁니다. 누가 크냐 다투기도 하고 싸우고, 그리고 예수님께도 묻습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도 묻고, "예수님, 저희들은 아내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다 버렸는데 천국에서 상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도 묻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것을 보면 그 공동체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반성을 하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역자들하고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부드럽지는 않더라고요. 편하게 이야기를 잘 안 해요. 그것을 보면 수직적인 리더십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수평적입니다.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벽들이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수직적인 '올라간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라간다'는 개념, 그것이 어떤 개념입니까? 자꾸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까? 뭘 어디로 올라가고 싶으십니까? 장로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닌 척하시는데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권사 되고 싶고 장로 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자기 암시를 스스로 주는 것이고, 교회도 계속 그것을 가지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지속적으로요. 그런데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버리면, 모든 것이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그런 부조리와 부작용들은 상당 부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1-2. 세 가지 목적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디모데가 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입니다. '굳건하게 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리조(στηρίζω)라고 되어 있고, '훈련시켜 굳게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잠깐 얼굴 보고 밥 먹고 "잘 있었네" 하며 사진 찍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훈련시켜서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도 전하고 훈련도 시키고 그 성도들을 만나고 위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니까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위로하다'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이며, '권면과 위로로 가르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고난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래서 "너희들 지금 이 고난을 잘 견디고 있구나. 정말 훌륭하구나"라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그리고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목적입니다. 굳건하게 하고, 위로하고,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이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오늘 2천 년 후 우리 시각에서 보면 출장 보내는 것 아닙니까? 출장 보내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자기는 어머니하고 외할머니, 아버지 집을 떠나서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는 입장인데, 지금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바울과 실라가 천막 깁는 일을 합니다. 자비량으로. 디모데는 여기서 소득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 고린도에 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단 말입니다. 이분들이 자기들이 낸 공적 기금, 헌금을 가지고 출장을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귀한 돈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에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공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측면에서 중요한데, 디모데에게도 "너의 임무와 사명이 이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 가서 놀러 가는 것이 아니야. 성도들을 굳건하게 하고 위로하고, 동시에 그들을 믿음 안에서 세우고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하는 것이다." 디모데에게도 이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아, 이 디모데가 왜 왔는지를, 우리 교회 와서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목적이 선명하지 않으면 가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흐리멍텅해집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복음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복음적인 일이 너무 많습니다. 복음적인지 비복음적인지를 가리는 기준이 많지만, 그중에 한 가지를 정확하게 꼽자면 '선명하냐? 선명하지 않느냐'입니다. 선명하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이제 추석이 지났으니까 다음 주에 우리 교단 총회가 있습니다. 여기 창원에서요. 왜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모여 가지고 어떤 결의를 하고 교단을 바꾸고 회복하고 어떤 대책을 세우고, 거기에서 그다음 조치가 있고 그다음 뭐가 있고 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왜 모이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노회를 합니다.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교회가 정책당회를 합니다. 정책당회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교회가, 교회 목사와 장로님들이 모여 가지고 할 일 없이 거기 모여 가지고 앉아서 하루 종일 회의하겠습니까? 왜 모입니까? 정책당회 한다고 어디 해외 놀러 다니고 어디 좋은 데, 경치 좋은 데 구경 다니고, 이것이 목적입니까? 정책당회를 하는 목적은 1년 동안의 교회 살림을 정리하고, 잘된 것은 평가하고,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내년도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하고 결의사항을 교인들에게 알려줘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하지 않으니까 안 묻습니다. 안 물어보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안 물어보니까 교회 돈 쓰면서요.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그러니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목적이 선명해야 됩니다. 왜 가는지,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목적을 세 가지로 딱 적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 이 공적 기금을 헌금을 가지고 가니까 이 일 하고 와." 이것이 하나의 자기의 미션이 되고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담을 가지고 디모데는 기도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은 사람은 디모데 선생님이 와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이것을 잘 수행하는지를 감시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금이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돈이 그냥 아무 데나 막 흘러갑니다.

자, 이것을 교회 안으로 한번 적용시켜 보십시오. 교회학교 목적이 선명합니다. 뭡니까? 교회학교의 목적은 학생들 잘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복음 안에서 말씀 잘 가르치고, 학생들을 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말씀을 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배부르게 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차적인 목적은 그들의 영혼 구원입니다. 이것이 선명해야 됩니다. 그것이 선명하지 않으면 그다음이 엉망이 됩니다.

교회 주방의 목적이 뭡니까? 교인들을 행복하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자기 솜씨 자랑하는 것이 주방의 목적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존재 목적은 교인들을 돌보고 위로하고 심방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명하지 않을 때 교회는 엉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방향과 목적이 선명한가? 나는 여기 왜 있는가? 내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하는가? 그것이 선명하지 않으면 거기 지도 교역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저의 일이 뭡니까? 저는 무슨 일을 해야 됩니까?" 그리고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 선명하지 않으면 리더십이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장로님들 그리고 목회자들은 그것을 알려주고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평가하고,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전부 제멋대로 다 돌아갑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교회는 이것을 우리는 '질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3. 질서의 참뜻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질서가 뭡니까? 고린도전서 말씀에도 있고,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라" 이런 말씀도 있고, "질서가 있어야 된다" 이런 말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느낌이 딱 드느냐 하면, '담임 목사가 말하면 순종해야 된다', 이것을 질서로 압니다. 그랬지요? '장로님들이 무슨 말을 하면 다 들어야 된다', 이것을 질서로 압니다.

여러분, 그것은 질서가 아니고 그것을 '위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위계. 위계 들어보셨지요? 위아래가 있는 것. 그것이 위계입니다. 그것이 개념입니다. 그런데 질서는 목적이 분명한 것이 질서입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창세기 1장을 우리가 잘 압니다. 여러 번 공부해서 압니다. 혼돈, 흑암, 어둠이 창세 이전의 상태 아닙니까?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어둠에서 빛이 생겼고, 혼돈에서 질서가 잡혔고, 그리고 공허한 데서 채움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공동체는 질서가 없습니다. 질서, 뭘 해야 될지 몰라요. 전부 다. 뭘 해야 될지 모르니까 전부 다 여기 웅성 저기 웅성, 여기 시끄럽고 저기 시끄럽고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는 방향과 목적이 분명한 것이 질서이지, 누가 한마디 하면 거기에 "예" 하고, 아닌데 "그거 아닌데, 아닙니다"라고 말 못하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것, 그것이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굴종입니다. 위계에 의한 굴종입니다.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2. 시험하는 자의 전략

2-1. 두 가지 환란

자 이제 바울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 또 염려도 있습니다. 이분이 염려가 많습니다. 4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때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고 이 성도들과 함께 목회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여러분, 이 '장차 받을 환란'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환란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목회할 때 환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진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그가 누굽니까? 디모데입니다. "참다 못해서 이들이 잘 견디고 있는지"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환란에 두 가지가 있고, 시험에도 두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첫째, 환란, 첫째 시험은 물리적인 환란, 물리적인 시험입니다. 이 당시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으면 옥에 가두고 때리기도 하고 심하면 죽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환란입니다.

두 번째는 거짓 교사들의 환란, 시험이 있었습니다. 와 가지고 자꾸 복음 아닌 이야기를 자꾸 퍼뜨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짓이라고 이야기하고, 할례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것입니다. 그 환란이 두 가지 환란입니다.

그런데 물리적인 환란에 대해서는 잡히면 죽어야 합니다.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면 고난받든지 아니면 배교하든지.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고 하는 것은 이 내적인 시험입니다. 그 안에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말씀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2. 사탄의 정체

자 여기 '시험하는 자'라고 나와 있는데, 시험하는 자,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탄 아닙니까? 사탄, 사탄 마귀. 물론 사람의 형상으로 오지만 사탄 마귀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여러분, 여기 '옛 뱀'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옛 뱀. 요한계시록 저자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했습니다. 옛 뱀은 어떤 뱀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옛 뱀. 옛날에 산에서 한번 만났던 뱀입니까? 그런 뱀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입니다. 창세기 3장의 하와를 유혹했던 그 뱀입니다. 그래서 그 옛 뱀을 사탄 혹은 마귀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사탄 마귀, 우리를 시험하는 사탄 마귀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좀 긴데, 여러분 암송 좀 하십니까? 집에서 암송 도전하십시오. 암송, 외우고 있는 암송 구절 있습니까? 성경 암송을 시도하셔야 됩니다. 열심히요. 그중에 이 한 구절을 외우시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왜냐하면 사탄의 정체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놈이다, 이렇게 설명하신 것이라서 아주 중요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됨이라"

이것이 마귀 사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거짓말이 뭡니까? 거짓말이. 거짓말이 존재하려면 참말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요? 진실이 있어야 됩니다. 진실이 있는데, 그 진실을 이렇게 꼬고 이렇게 꼬고, 아니면 완전히 뒤집고, 그것이 거짓입니다. 진실이 있는데 진실을 바꾸는 것이 거짓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2-3. 거짓말의 본질

그런데 이 사탄이 이야기하는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한번 봐야 됩니다. 창세기 3장 1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을 한번 잘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러분, 여기서 거짓말 찾아내셨습니까?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뱀이 한 말 중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진실은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분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분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탄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묶어버립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 중에 금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100가지 열매가 있었다 하면 99가지는 하나님이 다 허락하셨고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묶었습니다. 통째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 아이가 집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홉 가지가 다 좋습니다. 공부만 못해요. 아홉 가지 다 좋습니다. 착하고 건강하고 병원도 한 번 안 가고, 치아도 아프지도 않고, 엄마 말도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공부를 못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나빠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못하는데, 한 가지 못합니다.

이 공부 못하는 것 때문에 부모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고, 남들에게 "우리 애가 대학을 여기 갔어요"라고 말하기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아이도 스트레스 주고 나도 스트레스 받고, 아홉 가지가 다 좋은데 한 가지 때문에 아이가 밉고 원망스럽고 미치도록 저주스럽고, 그것이 마귀 사탄이 우리에게 하는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분리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분리.

그러면 뭐가 분리됩니까?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 중에 한 가지만 금하셨고 나머지는 다 허락하셨다. 좋은 것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거짓말하는 것은요, 한 가지 안 좋은 것을 전체로 확대시키고 이것을 묶어버립니다.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하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다 나쁜 사람이 있습니까? 다 좋은데 한두 가지가 이분에게는 나하고 안 맞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 인간 상종하면 안 돼. 저 사람 꼴도 보기 싫어." 그러면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전부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얼마나 좋은 나라입니까? 좋은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그중에 몇 가지가 좋지 않은데, 그것 가지고 이 나라를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마귀 사탄이 거짓말하는 것.

우리 교회가 다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한두 가지가 모자라고 불편하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그것을 크게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크게. 그것이 시험하는 자가 주는 특징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어떻게 시험할까요? "바울이 너희에게 이런 말 했다고. 그런데 지는 지금 어디 가 있어? 도망갔네. 너희들이랑 같이 있지 않잖아. 고난을 지금 같이 겪지 않네." 거기서부터 이제 거짓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까 고린도에 가서 요트 타고 호의호식하고 레스토랑에서 고기 썰고 있다던데" 이렇게 말을 보태기 시작하면 거기 막 시험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런데 좋았던 것이 있습니다. 좋았던 것,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좋았던 것, 이것을 기억하면 감사한데, 여러분 이것을 분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받아야 감사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것은 기도할 기도의 제목이지, 극복해야 될 문제인 것이지, 그것 하나가 전체를 다 부정하고 뒤집어 엎어버릴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하는 거짓말입니다.

하와가 거기 속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와를 미련하고 등신 같다고 욕하는데 똑같습니다. 우리도 맨날 우리 자식 볼 때 그렇습니다. 한번 집에 가서 잠자는 아이 한번 보십시오.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좋은 점이 너무너무 많은데 안 좋은 것이 좀 있습니다. 어떡할 것입니까? 내 속에서 났으니까 나 닮았겠지요. 그리고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사탄이 하는 거짓말입니다.

2-4. 새빨간 거짓말

자 보십시오. 사탄이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만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한테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8절과 9절을 보면 보십시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런 것을 가지고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사탄이 어떻게 줍니까? 지가 주인도 아닌데. 주인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여기에 있는데, 예수님한테 이것을 가지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우리에게 준다고 하는 권세, 부귀, 영화, 물질, 그것은 믿으면 안 됩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사탄이 주는 것, 그것 믿고 신앙 부리고 그것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줄 수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3. 기쁨의 근거

3-1. 좋은 소식

자 이제 디모데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까? 디모데가 돌아왔습니다. 이 미션을 가지고 갔던 디모데가, 세 가지 자기 의무를 갖고 갔던 디모데가 왔는데요. 6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란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지금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상태가 어떻다고 말합니까?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란"이라 그랬습니다. 배고픈 것입니다. 지금. 또 환란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와서 전해준 소식에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아까 제가 서두에 이야기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의 주제는 기쁨이라고요. 언제 기쁩니까? 성도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이들이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뒤에 가면 또 나오는데, 요한3서 1장 1절에서 4절을 보면, 요한1, 2, 3서와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두 기둥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아니, 이 편지 받는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데 요한이 기쁘다고요? 나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여러분, 이런 기쁨 느껴보신 적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일확천금을 해서, 로또가 돼서, 내가 집을 사서, 차를 바꿔서 그런 기쁨, 기쁘지요.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전도하고 공을 기울여서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함께 기르고 키워냈던 사람이 정말 이제 믿음 생활 잘하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으면 그때 그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기쁨이. 교회학교 교사로서 청년 시절에 요만한 아이를 잘 가르쳤는데, 그 아이가 성장해서 훌륭하게 믿음 생활 잘하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고향 교회 방문했다가 들으면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도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쁨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울이 우리가 뒤에 살펴볼 이야기는 갈라디아 교회 이야기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전도했던 교회입니다. 갈라디아 지역 벨트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그런데 여기에 가서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이 다른 복음을 붙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다" 하는 가짜 복음을. 그래서 바울이 너무 화가 난 것입니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자괴감에 빠져서 견딜 수가 없는 이야기가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반대로 정말 기뻐하는 것은 지금 여기입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에도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3-2. 성도의 연합

이제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바울이 무엇을 확인했습니까? 8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것이 중요한데요. '너희가'라는 말과 '우리가'라는 말이 반대말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 안에 굳게 섰습니다. 그런데 누가 살아요? 우리가 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산다'는 말이요, '생기가 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제 생기가 좀 돈다. 이제 내가 숨을 좀 쉬겠다"라는 뜻입니다. 아까 그랬습니다. 우리가 궁핍과 환란 가운데 있다고 그랬지요. 궁핍과 환란 가운데 있을 때 생기를 돌게 하는 것이 뭡니까? 실제로 돈 아닙니다. 누가 고기 한 근 사다 주면 그 고기 구워 먹고 얼굴에 생기가 돌고 "아유, 이제 좀 내가 살겠다. 허리 펴겠다" 이런 것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래서 사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숨 좀 쉬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너희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와 우리는 그래서 복음 안에서 우리는 너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너희가 복음 안에서 실패하면, 너희가 복음 안에서 무너지고 쓰러지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고, 너희가 복음 안에서 제대로 말씀 전하고 지키고 행하고 살면, 이젠 내가 살겠다.

여러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진짜 성숙한 성도입니다. "야, 네가 이제 취직했으니까 내가 좀 살겠다." 그렇게 속 썩이더니 시집가니까 "내가 이제 좀 살겠다. 이제 잊어버리고." 그것도 물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 그런데 시집가면 끝납니까? 애 봐줘야지, 나중에. 명절에 오면 사위 밥 해줘야지. 갔으면 좋겠지, 이제.

그런데 진짜 사는 것은, 정말 우리의 영이 사는 것은 그렇게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나와 너의 영이 연결되어 있어서 너의 영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숨 좀 쉬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4절을 한번 보십시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다가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그랬습니다. 여기 2절, 3절, 4절에 적힌 대로 하면 빌립보 교회가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앞에 보십시오.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내가 기쁜 것입니다. 니들이 이렇게 하면 내가 기쁜 것입니다. 제발 이렇게 좀 살아서 날 기쁘게 해라. 제발 이렇게 살아서.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어디서 언제 씁니까?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로마 감옥의 재택, 거기 연금되어서, 가택연금 되어서 집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거기서 빌립보 교회 편지를 쓰는데, 빌립보 교회에서 사람을 시켜서 영치금을 보내줍니다. 먹을 것과 돈과 옷가지들을 보내줍니다. 그것 받고 기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고맙다" 그랬습니다. "너희의 수고 위로가 된다. 고맙다" 그랬습니다. "기억하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 이것입니다. 이것. 돈 보내줘서 기쁜 것이 아니고, 잘 섬겨줘서 기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복음대로 살아야 기쁜, 이 기쁨을 여러분들 느껴보셔야 됩니다. 그러면 딴 것 요구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2장 1절과 2절도 한번 보십시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도 아닙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 아닙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한 번도 못 본 것입니다. 이 교회는. "얼마나 힘쓰는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뭐라고요? "연합" 연합이라 그랬습니다. "사랑 안에서" 어떤 사랑이요? 인간적인 사랑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너희 교회 성도들과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풍성한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여러분, 성도들은 우리 교회 성도나 타교회 성도나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는 교회를 도와야 됩니다. 교회가 힘들다면 연합되어 있으니까 서로 돕고 세워주고 같이 커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연합되어 있으니까.

에베소서 말씀도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과 16절 한번 보시면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어떻게 합니까?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성도들은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제 교회에 대한 정체성을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2장 공부할 때, 지난 시간 공부할 때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 고백하면 다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혼자서도 교회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가 고통받으면 가슴 아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연결되어 있는데, 어떻게 성도가 성도를 비난합니까? 연결되어 있는데, 성도가 성도끼리 서로 다투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의 치부를 들추어냅니까? 연결되어 있는데, 다 같이 죽는 것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내가 이 사람 밀어내면 저 사람도 나를 밀면 같이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성도가 성도끼리 서로 싸우고 서로 비방하고 서로 손가락질하고 서로 잘못을 들추어내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직 교회 됨이 덜 됐다는 뜻입니다. 진짜 교회 된 성도는 덮어주고 가려주고 세워주고, 누가 비난해도 그냥 참아주고, 그렇게 해서 함께 결합되고 연합되어 가는 것이지, 입만 열면 누구 욕하고 입만 열면 쫓아와서 누구 비난하고,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연합되고 결합되어서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앙 고백한 사람으로서 하나의 교회이고, 또 다른 신앙 고백한 성도가 또 다른 교회이니,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연합은 결합하고, 좀 모자란 성도가 있습니다. 모자란 교회, 아직까지 성장해야 될 교회가 있습니다. 기다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기다려주고 비난하지 말고, 그렇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교회론의 확장을 우리가 확인했습니다.

3-3. 기쁨의 확장

이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 굳게 서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그 기쁨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아, 주 안에 굳게 섰다 그랬습니다. 기쁘다 그랬습니다. 너희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 그랬습니다. 비록 공간은 떨어져 있으나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9절, 우리가 이제 디모데가 왔으니까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모든 기쁨으로 기뻐한다'는 말, 바울이 이런 표현을 자주 했는데, "기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으로 나는 기쁘다" 이런 뜻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보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무슨 맥락입니까? 도대체. 자, 너희가 믿음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기쁘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는데, 이 사람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으니까 더 채워서 성장시키려는 것입니다.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나옵니다.

"부족한 것", 너희 믿음의 부족한 것, '부족한 것'이 뭐냐? 헬라어로 휘스테레마(ὑστέρημα), '결핍된 것'입니다. 결핍된 것을 채워주겠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상태를 완벽한 상태라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까지 성장이 필요한 상태. 지금까지 잘 따라왔는데 이제 조금 더 보충해서 성장시켜주고 싶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이 공부한 것입니다. 구원의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차원의 구원에 머무르지 말고 훈련받아서 성화의 삶을 살아내라. 그것이 너희를 채워가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준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너희 믿음에 부족한 것을 내가 보충하겠다" 그랬습니다.

4. 멈추지 않는 성장

4-1. 완전한 데로

히브리서 말씀 한번 볼까요? 히브리서 6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어디로 나아가라고요?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여러분, 우리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뭡니까?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성장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 그날 가는 그날까지 열심히 정진하고 갈고 닦고 또 갈고 닦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배워가라. 그래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담임 목회 하기 전에 부목사 생활을 오래 했는데, 목사 안수 2003년에 받고 2016년 2월까지 부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부교역자 생활은 더 이전부터 했지만. 그런데 계속해서 했던 것이 새 가족 사역이었습니다. 새 가족들을 만나는 사역을 했었는데, 만난 새 가족들 중에 여러 유형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분들이 있습니다. 절에 다니다 오신 분, 뭐 이슬람 사원에 계시다가 오신 분, 무당하다가 점치다가 오신 분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데, 그중에 제가 제일 당황스러웠던 분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이냐면, 성경 공부하자고 하니까 "목사님, 성경 다 알아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 다 아신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성경 한 번 읽었는데 다 이해되던데요?" "그래요? 한 번 읽을 때?" 한 번. 세상에, 제일 위험한 사람 아닙니까? 성경 한 번 읽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성경 한 번 읽고 다 알 수 있습니까? 매일 하고 열심히 설교 준비하고 수십 년을 목회하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고 가르치고 해도 여전히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말씀을 배우고 성장하는 데는 멈춤이 있으면 안 됩니다. 계속 가는 것입니다. 계속. 여러분, 우리 인생의 은퇴는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정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은퇴는 있는데, 성장은 내가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퇴행입니다. 그때부터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못하고.

4-2. 멈추면 쓰러진다

여러분, 출애굽 사건이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를 많이 줍니다. 보통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집트는 죄악된 자리, 죄의 자리를 벗어나서 광야 훈련을 받으면 영광의 자리,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간다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은 천국에 갈 때까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막에서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사막에서는 요단강 나올 때까지 주구장창 걸어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데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알지만, 그래도 오늘 명절 끝날에 이 자리 성경 공부하러 앉아있고, 그래도 성경 읽고, 그래도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알려고 노력하고 애도 쓰고 발버둥치고, 기도하고 매달려 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나가서 싸워보기도 하고, 그래서 넘어지면 왜 넘어졌는지 다시 돌이켜 보기도 하고,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것을 멈추는 순간 사탄이 틈탑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퇴행합니다. 엉망진창됩니다.

그 엉망진창된 사건을 민수기 기자가 설명하는데, 민수기 25장 1절에서 3절을 한번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말씀 잘 보십시오. 두 가지 죄가 나오는데, 첫 번째 음행의 죄, 두 번째 우상숭배의 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관음과 우상숭배.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그들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걸어가는데, 오직 머무를 수 있는 사인은 딱 한 가지 아닙니까? 구름이 거기에 멈춰야 합니다. 구름 기둥이. 그러면 멈추는 것, 쉬는 것인데, 구름 기둥이 멈추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이제 끝났다고 쉬니까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죽습니까? 거기서 전염병 하나님이 내리셔서 2만 4천 명이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 우리 신앙 성장과 말씀 훈련을 멈추는 순간 이렇게 됩니다. 정신 차려야 되는 문제입니다. 목회자, 중직들, 뭐 열심히 한다고 하는 분들 다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지속적으로 계속 성장이 필요합니다.

4-3. 쉬지 않는 하나님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요한복음 5장 16절과 17절을 보시면요,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이러한 일이 안식일에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 고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이 쉬셨습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이 "나 좀 쉴란다" 하고 해를 안 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이 좀 쉬겠다 하고 저 출렁이는 바다를 붙잡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엉망이 됩니다. 하나님도 일하시니까 예수님도 일하셨다 그랬고, 우리도 쉬면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5. 바울의 기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바울이 참 은혜로운 것은요, 항상 이렇게 기분이 좋으면 마지막에 기도로 마칩니다. 재밌습니다. 바울 서신 한번 읽어보십시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내 심정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줄 하나님이 아신다" 그럴 만큼 사랑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한번 보시면, 빌립보서 1장 마지막 절이 11절인데,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11절까지가 바울의 기도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면 마지막에 기도해 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돈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기도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명절에 집에 왔다가 떠날 때, 갈 때, 차비하라고 손주들한테 용돈 좀 주고 딸이 가건 아들이 가건 손 붙잡고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해 줘야 합니다.

바울이 항상 기분이 되게 좋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전서 3장이 기쁨의 장인데, 이 기쁨 마지막에는 바울의 기도가 있습니다. 너무너무 기뻐서 좋아서, 좋으면 기도하고, 기분 나쁘면 바울이 저주한다는 말도 막 합니다. 바울이 참 재밌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기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접 인도하시옵소서" 가서 만나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이고요.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옵소서"

왜 그렇습니까? 오늘 공부한 바에 의하면 각자가 교회들이니까요.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얘도 넘어지는데,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사랑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환란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절절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해 주십시오. 그분 손잡고도 기도해 주시고, 뒤통수 보고도 기도해 주시고, 잠든 모습 보고도 기도해 주시고, 그래야 서로 연결되어 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명절 끝날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시고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함께 듣고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존재 목적과 교회의 목적이 이처럼 분명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목적, 디모데는 그 목적에 의거해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돌아와서도 그들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바울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주여, 모든 성도들은 하나의 교회로 연결되어 있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자들끼리 서로 헐뜯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전하고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거기에 멈추어 있지 않도록 도우시고, 진보되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