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 하나님을 기쁘시게 / 전체녹취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4 -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전 4장)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서신서 말씀은 그냥 이렇게 읽고 흘려버리면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 같아서 한 번씩 끄집어내서 작정하고 정리를 좀 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학기에 공부했던 룻기와 에스더처럼 이야기가 있는 부분, 스토리가 있는 내용들은 지나가면 머릿속에 각인되고 남는 것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서신서들은 그 속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마치 열매 같으면 껍질이 좀 더 딱딱한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껍질을 깨기가 좀 힘든 열매입니다. 그런데 껍질이 딱딱한 열매일수록 그 열매 속은 달고 맛있고, 또 알맹이가 알찹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좀 더 열심히,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살펴볼 의미가 있는 책들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이야기를 공부할 때마다 한 번씩 앞의 이야기들을 되새겨 봐야 하는데, 이 데살로니가전후서 본문 이야기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큰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교회는 성장을 멈추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 하나하나가 다 교회인데, 내가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고 여기 머물러 버리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고 거기서부터 죄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교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데, 성도가 교회이니까 성도와 성도는 같은 교회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 아닌 당신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는 것이 내가 곧 기쁘고 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무엇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만약에 이 본문과 상관없이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사실은 좀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기에서는 성경적인 대답이 필요합니다. 내가 얘기하는 믿음 말고,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말입니다.

오늘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장과 4장이 아주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거기서 지난주에 얘기한 것에 의하면, 서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너희에게 아직까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부족한 것을 채워야 된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전진하라,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나아가라 했는데, 그 나아가야 될 지점을 오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장하고 나아가야 될 지점 말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하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행하며'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이 중요한 말들입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의 성장의 목표와 방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걸 채우기 위해서 조금 더 노력하고 나가야 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행함에 대해서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도덕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고 나의 업적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다,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나오는 말씀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이 말이 좀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물론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무엇인가, 구원받은 자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살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나는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을 실망시키면서 살아서 되겠습니까?

1-1. 기쁘시게 함의 의미

여기 보십시오. '기쁘시게 하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아레스코(ἀρέσκω)'라고 합니다. 아레스코가 '일치되게 하다', '즐겁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건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행위가 일치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 아무개가 이렇게 좀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우리 모두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나를 일치시키며 살면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건 우리의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 굳게 선 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 되는데, 그 성장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내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행위가 일치되는 것, "아, 쟤는 어쩜 저렇게 말 안 해도 내 마음에 쏙 들게 하나" 이렇게 하나님이 생각하실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까지 말하고 만약 바울이 끝냈다면 이건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굉장히 정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행위는 무엇이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행위가 일치되는 그 지점이 무엇이어야 되는가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3절부터 6절까지 나옵니다.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라는 말이 여기 처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서도 먼저 한번 나왔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관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시죠? 그러면 하나님이 보실 때 교회된 내가 과연 기쁜 존재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골칫덩이냐, 하나님의 염려거리냐? 우리는 나 하나로서도 교회지만, 너와 나가 공동체로 연합되고 결합되어서도 교회입니다. 그럼 우리 교회 성도들의 공동체가 하나님 보실 때 기쁨이 되느냐, 아니면 염려거리가 되느냐? 숫자가 많다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요? 사람들이 볼 때, 사람들의 눈에 화려하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요? 이제 이 두 가지를 보시면 분별이 되실 겁니다.

2. 첫째, 거룩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하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줄을 딱 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구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좀 알려주세요. 하나님 뜻을 알려주시면 제가 그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도 하나님의 뜻이 무더기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지금 반도체 주가가 엉망인데 이거 갖고 있어야 되는지 팔아야 되는지, 지금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하나님의 뜻이 반도체에 있습니까? 이차전지에 있습니까?" 뭐 이런 것, 이런 데 우리가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아이 이 직장 취직에 있습니까? 저 직장 취직에 있습니까?" 뭐 이런 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시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정말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한 시시한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무당들이나 관심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시시하고 수준 낮고 경박한 하나님으로 전락시킨 게 사실은 교회 목회자들의 탓입니다. 네,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시면 하나님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십계명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겠습니까? 사든지 팔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 하시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뭡니까?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2-1. 음란을 버리라

'거룩'이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들었습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거룩은 '카도쉬(קָדוֹשׁ)', 구별됨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음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음란을 한번 보세요.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죠? 포르노. 포르노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포르네이아라는 말은 우상숭배 그리고 음란한 행위, 음행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버리라'고 했습니다. 버리라. '아페코마이(ἀπέχομαι)'. 잘라내다, 끊어버리다. 자르는 겁니다. 그냥 내 코앞에 던졌다가 나중에 다시 가져오는 게 아니고, 잘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못 씁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잘라버리면 물건을 끊어내버리면 나중에 이어서 쓰겠습니까? 완전히 단절시켜라, 너의 삶에서 끊어버려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에는 대단히 폭탄 선언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5장 1절과 2절에도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나 지금 여기 데살로니가나 이방인 지역입니다. 완전히 로마 문화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로마 문화권, 로마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게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여러분들이 어릴 때 읽어보셨겠지만, 그런 순한 맛 그리스 로마 신화 말고 성인용, 그냥 원전 그대로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이건 도대체 낯 뜨거워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신들을 인간적으로 표현해 놓고, 그게 그냥 그들의 세계관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낸 세계관.

신들끼리의 음행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신들이 인간 세계를 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취해버립니다. 그러니 그런 게 그들 세계에서는 전혀 음행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닌 겁니다.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여성 노예들이 있습니다. 여성 노예들을 주인이 잠자리 대상으로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세상에서는요.

그런데 이걸 바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뜻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음란을 버리는 것이다, 포르네이아를 끊어내는 것이다 했습니다.

2-2. 가정의 원리

그럼 이 말은 무엇이냐? 구체적으로 이 말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4절을 보면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성생활은 가정의 부부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이 시절에 로마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왜? 그게 어때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얘기죠. 그 사람들은요. 그런데 성경의 원리를 얘기한 겁니다.

창세기 2장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켜 주실 때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주도권을 아담이 갖고 하와를 찾아다닌 게 아닙니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아담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설치지 말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고, 짝 찾는다고 설치지 말라고. 그게 첫 번째 원리입니다. 잠재우셨습니다. 설치면 사고 치니까요. 남자들은 설치다가 사고 칩니다. 자기 짝 찾는다고 인생 망칩니다. 그러다가요. 그래서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게 첫 번째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두 번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셔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여호와께서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누가 주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주도하신 겁니다. 그다음에 아담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고백을 하와가 받아들였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입니다.

그다음 25절에 뭡니까?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다음에 부부의, 두 사람만의 아름다운 시간이 있는 겁니다. 이게 순서입니다. 이게 가정입니다. 가정을 세운 원리, 가정의 시작,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가정을 세우고 그 안에서만 두 사람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여기서 거룩은 구별인데, 세상 사람들은 다 엉망진창으로 산다 할지라도, 가정을 깨고 시궁창으로 산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니 거기서 구별되어라, 가정의 원리를 지키고 살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에 거기에 동성애가 들어옵니까? 어디에 거기에 가정을 이룬 사람이 또 다른 사랑을 꿈꿉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건 절대로 거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행위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것의 첫 번째로 거룩을 얘기했습니다. 이거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2-3. 존귀함으로 대하라

여기 보면 4절에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할 때, '아내'가 원문에 보면 아내라는 뜻도 있고 그릇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너의 아내를 깨어지기 쉬운 그릇으로,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곧 그릇이 됩니다. 그렇다면 가정 안에서도, 가정 안에서도 아내를 어떻게 대하라고요? 거룩과 존귀함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문화권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의 소유의 개념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는 소유의 개념. 그런데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부부관계는 거룩과 존귀의 개념입니다. 서로 수평적 관계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인도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존재고, 남편도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구별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서로 존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각각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걸 잘 지켜야 됩니다. 소유 개념으로 상대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소유 개념으로, 원래 아무리 비싼 보석이라도 아무리 좋은 명품 옷이라도 입고 나서, 가지고 나서 얼마 갑니까? 유효기간이. 여성들이 이제 가을이니까 옷장 열면 "입을 옷 없다" 하지 않습니까? 옷이 천지인데 입을 옷이 없다 합니다. 제가 그걸 보니까 한철 같습니다. 옷의 유효기간은 한철. 한철 지나면 못 입는 거죠. 입을 옷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한철인데, 소유의 개념으로 상대를 보면 한철입니다. 한철 지나면 흥미가 떨어지고 사랑이 식어지고, 소유한 거니까 기쁘지 않은 겁니다. 멋있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귀하지 않고.

그런데 부부가 가정생활이 오래가는 비결은 거룩해지고 존귀해지면,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귀와 거룩의 개념으로 가면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여기서 얘기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소유의 개념으로 살아도 너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결혼의 원리, 가정의 원리 안에서만 너희의 성적 자유가 허락된다, 가정 안에서만.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운 것이지 가정 밖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2-4. 공동체의 문제

그다음 5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색욕이라 했습니다. 아주 원색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색욕, 욕망입니다. 성을 향한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그대로 사는 겁니다. 자기 욕망대로. 그걸 정당화시킨 것이 신화입니다. 자기들의 세계관,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세계관입니다.

6절,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분수를 넘다'라는 말은 '휘페르바이노(ὑπερβαίνω)'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 뻗어가서 선을 넘어서다, 선을 넘다라는 뜻인데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일이라는 게 뭡니까? 거룩을 지키지 않고 음란한 행위를 하고. 여러분, 음란이라는 것이, 간음이라는 것이 이게 개인의 문제입니까? 공동체의 문제입니까? 이게 사회적인 문제입니까? 개인의 문제입니까?

우리나라 사회를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 간통죄 폐지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성 소수자 인권 문제 가지고 와서 차별금지법 자꾸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기본 정신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까? "성은 개인의 문제다. 이건 은밀한 문제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 개인의 사생활의 문제인데 왜 국가가 이 문제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이거 가지고 계속 수십 년 동안 헌법소원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의 정신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성의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기 얘기합니다. 이 일의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단적으로 보세요. 단적으로 이웃 공동체 안에서 이 집 아저씨하고 저 집 아줌마하고 바람이 났습니다. 개인의 문제입니까? 그거 개인의 문제입니까, 그 동네의 문제입니까? 그 동네의 문제입니다. 옛날에 마을에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두 가정 박살나죠. 두 가정. 그 아이들 어떻게 됩니까? 그 아이들.

이건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전부 다. 그런데 이 사회적인 문제를 왜 개인의 문제로 그냥 묻어버리고, "그냥 그건 개인의 문제니까 우리가 터치할 영역이 아니야" 합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서 눈 감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 만약에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서 있는데 교회가 이 문제를 알고도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한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도려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금방 퍼져나갑니다. 독버섯처럼, 누룩같이 금방 퍼져나갑니다.

여러분, 신앙 공동체는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 교회입니다. 전부 다 교회이기 때문에 "나는 나만 괜찮으면 되지" 그거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그런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는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는 나와 내 자식에게까지 흘러가는 문제입니다. 이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철저하게 이건 공적으로 처리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얘기하죠. "이걸 법적으로, 법적으로 그게 밝혀졌냐?" 법이 어떻게 밝힙니까? 간통죄도 폐지된 마당에요. 그런 상황과 그런 문제들조차 교회에서 용납하면 안 됩니다. 그건 그래서 그런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심지어 그게 장로든 목사든 누구든 그건 우리가 그냥 눈 감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의 원리는 그런 겁니다. 그분의 문제가 아니에요. 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내 자식들의 문제입니다. 여기 나옵니다.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한다고 했습니다. 그 형제가 내가 되고 그 형제가 내 자식이 됩니다. 그 무서운 영적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조심해야 되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모임할 때 그냥 농담처럼 세상에서 흘러 돌아가는 음담패설 이야기들, 누가 그런 얘기하면 저한테 신고하십시오. 제가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신고하십시오. 저한테 카톡 신고하셔야 됩니다. 그런 거는 처음부터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공동체가 막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의 공동체니까요. 그게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입니다.

여기 나옵니다. 그다음,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신원하다. '에크디코스(ἔκδικος)'. 무슨 뜻입니까? 공의를 행하는, 징벌하는. 하나님이 징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징벌하십니다. 가만히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거룩 중에도 뭡니까? 성적 순결입니다. 성적 순결. 지금 이 사회적 분위기,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한 이 상황에서는 이게 가장 심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게 심각하지 않습니까? 이천 년이 지난 우리 사회, 우리 아이들이 스마트폰만 켜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음란물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인터넷의 바다에 헤엄치다 보면 항상 만나는 게 그게 다 음란물입니다.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가르쳐야 되죠. 가르치고 부모가 모범을 보이고, 지속적으로.

마태복음 5장 27절과 28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무섭죠. 음욕을 품고 대상을 보는 자.

로마서 12장 1절 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이라 했습니다. 분명히 몸이라 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몸을 주장하는 게 뭡니까? 마음입니다. 내 마음부터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 몸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2-5. 혼합주의를 경계하라

그다음,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7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거룩은 이제 배웠죠. 구별되는 것, 성적 순결함이라고 얘기했고요. 여기서 그런데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할 때 부정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완벽한 부정, 완전한 부정은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잘 저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나가면 자기도 너무 나가는 건 아닌지 아니까요. 그런데 여기 부정은 혼합주의를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혼합주의, 뒤섞여 있는 것. 이게 무서운 겁니다.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내야 되는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막 섞여 있는 겁니다. 섞여 있습니다.

섞여 있는 게 언제 어디서 나타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할 때를 보면, 출애굽기 32장 4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 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물론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 받으러 올라가서 40일 동안 안 내려오니까 한 건데, 자기들이 이때까지 보고 자란 게 그게 다입니다. 이집트에서 보고 자란 게 그게 다니까 그냥 그거 만든 겁니다. 자기들이 보고 자란 게. 그걸 못 끊어낸 겁니다.

그다음 보세요. 5절과 6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제단을 쌓는 건 언제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제단 쌓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렸어요." 번제와 화목제는 누구에게 드리는 겁니까? 하나님께. 그런데 금송아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다음 보면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화목제를 드리고 이렇게 하는 법이 있습니까? 이게 이방의 제사입니다. 먹고 마시고 뛰노는 거. 열심히 먹고 마시고 뛰노는 거.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이 한 짓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마시고 뛰어놀았습니다. 막 춤추고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불 내려 달라고, 나중에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칼로 자기 몸을 찌릅니다. 피를 봅니다. 이게 혼합주의입니다.

이 혼합주의, 이게 부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합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까? 우리 안에 거룩이 없으면 그게 혼합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동시에 세상을 향한 욕망도 있으면 그게 혼합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순수하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리와 거룩과 의를 따르고 지켜내느냐, 이걸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요.

레위기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을 또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기 말씀에서 이 거룩은 혼합주의에서 빠져나오라는 얘기입니다. 이집트의 송아지에게서 빠져나오고 번제와 화목제만 순수하게 드리지 그 앞에서 이방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것처럼 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혼합주의적 요소에서 나오라.

하나님이 이걸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9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뭡니까? 혼합시키지 마라. "또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혼합하지 마라.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니라." 우리가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물론 이제 가축이나 이런 거는 이게 더 좋지만, 두 종류로 직조한 옷까지 입지 말아야 했으니까. 이게 거룩을 얘기하면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싫어하신다고요.

그러면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교회라 했습니다. 우리가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는 우리 공동체가 교회인데, 교회 안에 혼합주의적 요소가 들어와 있는 거 싫어하십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요소가 들어와 있고, 교회 안에 순수한 복음은 사라지고, 교회 안에 자꾸 사행성이 들어와 있고, 교회 안에 장사치가 들어와 있고, 교회 안에 먹고 마시는 것이 복음보다 더 많이 들어와 있고,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혼합주의를, 이것부터 정리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다 내쫓으셨습니다. 전부 다 깨끗하게 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순전하게, 깨끗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입니다.

거룩을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한 평가가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뭘 저버리는 자일까요? 생략된 게요. 그러므로 거룩을 저버리는 자는, 즉 구별됨을 저버리는 자는, 순수함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거다. 여러분 이거 기억하셔야 됩니다.

정리합니다. 여기까지.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성장해야 된다. 어디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첫 번째가 거룩이다. 거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거룩은 성적 순결이다. 성생활은 가정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성적 죄의 문제는 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너의 개인적인, 사적인 영역이 아니다. 공동체의 문제다.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야 된다. 혼합주의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3. 둘째, 형제사랑

이제 두 번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페이지 넘기시면 9절을 보시면요.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두 번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뭡니까? 형제 사랑입니다. 형제 사랑. 우리는 교회들이라 했습니다.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는 각자의 교회들, 자기들끼리 사랑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 우리가 서로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선 더 쓸 게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잘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면 항상 끝이 아닙니다. 조금 더 얘기합니다. 조금 더 뭘 얘기하냐 보세요.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게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마게도냐라 하면 세 교회를 떠올리라고 했습니다. 첫째, 빌립보 교회,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 세 번째 베뢰아 교회.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해서 과연 이것을 행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빌립보 교회, 베뢰아 교회와도 서로 연결되고 소통되어 있고 그들에게도 형제 사랑을 전하고 베풀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이 교회는 환난당하는 교회입니다. 어려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환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을 나누고 전했다는 얘기입니다. 연결되고 결합된 교회는 하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서로 다 공동체적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연약한 교회를 보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연약한 교회 목사님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 그분을 우리가 도와야 되는 겁니다. 우린 그래도 좀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쓸 데 많아도 그래도요. 그래서 같이 세워나가야 되는 겁니다.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11절, 이제 형제 사랑에 대해서 이 교회의 플러스 알파를 원하는데요.

3-1. 조용히 자기 일하기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첫째,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이게 형제 사랑이랍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여러분, 성도들 중에 일 열심히 하고 입으로 그거 다 까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딱 사람 생각나십니까? 누구? 왜 웃으세요?

일은 일대로 정말 열심히 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다 알아주는데 모릅니까? 다 알지요. 눈이 몇 개인데요. 다 압니다. 수고하는 거 다 압니다. 아무도 모르는 데서 혼자 휴지 줍고 다녀도 다 압니다. 볼 사람 다 보고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은 제가 우리 교회 와서 여기 본당 지하에 제가 7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하에 7년 살아도 다 들을 거 듣고 다 볼 거 보고 다 알 거 알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요.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다 압니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막 떠들고 나팔 불고 안 다녀도 됩니다. 그러면 그 상은 어디서 받습니까? 그거 혼자 자기 입으로 다 상 받고 다 돌아다니면요.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바울이 점잖게 표현한 겁니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일해라. 이 말을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그냥 자기 일 하면 됩니다. 조용히. 그게 형제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 가지고요, 부담스럽게 가가지고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제 개인적인 건데요, 옆 사람하고 인사하는 건 별로, 저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특히 새벽에 화장도 안 하고 왔는데 좀 그렇습니다. 좀. 그런데 막 그렇게 이렇게 막 넘치게 해서, 나는 저분한테 선물 받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막 이렇게 하는 거 말고, 진짜 형제 사랑의 한 부분이 이런 겁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거. 형제 사랑이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을 못하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일을 못할 건강 상태, 일을 못할 내 영적 상태. 내가 헌금을 마음대로 드리고 싶은데 마음껏 드릴 수 없는 내 가정 상태가 있습니다. 내가 그런 거. 그런데 누가 막 얘기해요. 우리 모임에 와가지고 막 얘기해요. 속상한 겁니다. 나는. 나 혼자 막 뒤처지는 것 같고, 나 혼자 막 못하는 것 같고, 나도 마음껏 드리고 싶고 마음껏 봉사하고 싶고 마음껏 헌금하고 싶고 교회 하루 종일 있으면서 섬기고 싶고. 그런데 아니,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합니까? 그게 형편이 얼마나 시험되겠습니까? 괜히 좌절감 느끼고, 안 그렇습니까? 그런 거 못 느끼셨습니까? 괜히 혼자 의기소침해지고, 막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짜 형제를 사랑하는 건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조용히. 다 합니다. 다.

3-2. 손으로 일하라

그다음,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잘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시키는 사람.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해야 됩니다. 땀이 흘러야 되고. 저는 우리의 클린 사역과 주방의 봉사 사역을 너무 사랑합니다. 클린 사역 너무너무 좋은 사역입니다. 그리고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그리고 주방 청소하고. 지난 주일날 저녁 예배 때 제가 예배 올라오다가 한 남자 집사님을 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옷이 여기서 여기까지가 다 물입니다. 설거지하다가 여기서 여기까지 다 물이 튀어가지고 "집사님 많이 젖으셨네요" 그러니까 "시원합니다" 그러더라고요. 시원하다고. 날도 더운데 시원하다고.

그렇게 땀을 흘려야 됩니다. 땀 흘리고 일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라. 그래서 입으로 일하지 말고.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 입은 닫고 몸이 움직이고 또 손으로 일해야 되는 거죠. 그게 형제 사랑이라 했습니다.

3-3. 외인에게 단정히 행하라

그다음 또 형제 사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외인은 누구냐 하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정히 행하라는 말이 뭘까요? 그리스도인답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요, 믿는 사람에 대해서 기대감이 있습니다. "좀 다르겠지? 좀 다르겠지." 그런데 똑같아. 더 넘어서 더 해. 그리고 조금 더 넘어서 상종하면 안 되겠어. 이렇게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믿는 사람답게 해야 됩니다. 단정하게. 그게 형제를 사랑하는 거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본을 보여줘야 그 사람이 교회 올 거 아닙니까? 그게 형제 사랑하는 거 아닙니까?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도 보고 베풀고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궁핍함이 없도록. 그게 형제 사랑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 정리하면요,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성장해 가야 된다. 성장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두 가지. 첫째는 거룩이다. 두 번째는 형제 사랑이다. 거룩에도 내용을 얘기했고 형제 사랑에도 내용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가, 우리 교회가, 나라는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데, 나라는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럼 우리가 이 구체적인 걸 받아서 실천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4. 재림에 대하여

이제 재림에 대해서 말합니다. 재림은 이제 5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인데요. 보겠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그랬습니다. 성경은 항상 죽음을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실 때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실 때도 예수님은 "내 친구 나사로가 잔다. 이제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또 우리 성경은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를 좀 불편해합니다. '잔다'라고 표현하지요.

"그런데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물론 이 땅에서 육신의 이별은 슬프죠. 슬플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으니까, 더 이상 대화할 수 없으니까 슬프죠. 그런데 소망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슬플까요? 천국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만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은, 이제는 영원한 이별입니다. 얼마나 슬플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우리는 만남으로 갈 수 있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 정도 슬프지 않은 겁니다. 좀 울다가 그치는 거지요. 대신에 울음 이후에는 소망이 생기는 겁니다. 마음속에 천국 소망이. 그래서 견딜 수 있는 겁니다. 가까운 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을 보시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리고 온다는 말은요, 예수님 재림하실 때를 얘기하는 겁니다. 재림하실 때.

그런데 여기 '잔다'라는 표현을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걸 잘못 이해하면 연옥, 중간기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거 '잔다'라는 표현은 바울의 전형적인 표현이고 신약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인데, 천국에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저 사람이 말을 안 하고 죽은 것 같은데, 내 사랑하는 사람이 싸늘하게 식어서 죽은 것 같은데, 예수님은 잔다고 표현하고 이미 천국에서 눈 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천국에 있는 자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뜻입니다.

그 뒤에 이제 나옵니다. 15절을 보시면요.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자는 자, 먼저 세상 떠난 자, 성도로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지금 천국에 계신 자들, 그런 뜻입니다. 그런 자들보다 우리는 결코 앞서지 못한다. 왜? 그들은 먼저 가서 거기에 계시고 우리는 아직까지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다음 이제 나옵니다. 순서를 얘기하는 겁니다. 재림의 순간의 순서.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 이 말은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10절과 11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때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사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본 그대로 온다고 하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으니까 강림하시는 겁니다. 본 그대로 어떻게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데리고 오시는 자들이 있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 했습니다. 아까 다른 표현으로 하면 자는 자들, 지금 천국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제 먼저 잠들었다가 천국에서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이 땅에서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자들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제 휴거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많은데 이건 이제 우리 계시록 할 때 좀 다뤘기 때문에 건너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재림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재림 얘기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또 후서에서도 하는데, 이걸 하는 이유가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 교회는 다 이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는 걸 직접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천사들이 "너희가 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당장 내일 올 줄 아는 겁니다. 당장 내일. 언제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항상 그걸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직 안 오십니다. 그런데 같이 살고 있던 성도가 먼저 죽어버렸습니다. 먼저. 먼저 죽었는데 그럼 이들은 어떻게 되나? 이들이 먼저 죽었는데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이들은 참 불쌍하다. 그걸 바울이 교육하는 겁니다. 그건 죽은 게 아니고 잔다. 우리가 볼 때 자는 거. 예수님도 잔다고 얘기하셨고. 이미 천국에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 예수님이. 그다음에 너희들이 들려 올려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거다. 걱정하지 마라.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함께 오실 거다. 그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뭘 위로하라는 말입니까? 먼저 세상을 떠난 자들에 대한 아픔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라. 또 임박한 종말이 아직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근심하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 그런 뜻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한 주제 잘 기억하십시오. 성장하는 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까지. 거룩과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는 이제 오늘 시작을 했고 다음 주 5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는데, 더욱더 성장하고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성장은 교회의 성장이오니, 각자 된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까지 성장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음란을 따라가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생각 없는 말과 행동들이 형제를 아프게 하고 실족하게 했다면,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