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 그가 이루시리라 / 전체녹취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5 - 그가 이루시리라 (살전 5장)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아멘"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마지막 장인 5장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5장, 데살로니가후서가 3장으로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전후서 말씀의 주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 각 사람을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도 교회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되는데, 그 성장을 멈추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어디까지 성장해 나가야 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데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까지 성장하라 하셨고, 그 두 가지 방향으로 첫째는 우리의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음란에 물들지 않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형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장 뒤쪽에 보면 종말과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오늘 5장도 역시 주의 날이 이르는 것, 즉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재림에 대한 주제는 상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임박한 종말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곁에 계셨던 천사들이 "너희가 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날이 당장 내일 올지, 당장 다음 주에 올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분들은 항상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오실 것이다, 곧 오실 것이다'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곧 오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드러누워 있거나, 혹은 교회에만 와 있거나, 그런 문제를 지금 교회 안의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건강한 종말 사상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 5장이 말씀합니다.

1. 종말의 때와 시기

첫 번째 질문은 주의 날의 시기에 대한 것입니다. 1절에 보니까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정하고 있는 때와 시기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와 시기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 그러면 이 말은 너희가 다 알고 있다, 너희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2절에 보니까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 어떻게 온다고요? 도둑같이 옵니다. 도둑이 우리에게 연락해서 "내가 당신 집에 언제,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방문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도둑이 아니고 손님이죠. 도둑은 예고하거나 갈 때를 알리거나 그러고 가지 않습니다. 도둑은 예고 없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온다는 말은 갑자기, 부지불식간에, 불시에 온다는 뜻입니다.

3절에 보니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라는 말은 이 문맥상 보면 불신자들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안전해, 편안해, 그냥 걱정하지 말고 머물러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날 우리의 의학 상식과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이 비유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상 예정일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언제 나오는지 날짜를 다 알고 있고, 그 날짜에 맞춰서 제왕절개해서 아이를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임신한 여자가 해산하는 건 확실한데 진통이 언제 올지, 언제 산파를 집에 불러다가 아이를 낳아야 될지 그걸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반드시 옵니다. 배가 불러오면 그때가 가까이 오는데, 그때는 반드시 오고 한밤중에 찾아올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 아니십니까? 하나님만 알고 예수님도 삼위인데, 성령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정말 종말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신비롭게도 하나님만 아신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고 우리가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종말에 대해서는 그때와 시기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무조건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종말의,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감추어 두시고 부지불식간에 온다는 것만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얘기하죠. 하나는 종말은 반드시 있다, 재림은 반드시 있다. 두 번째는 그때와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만 확실한 사실입니다. 더 이상도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없습니다. 이것만이 종말에 대해서 확실한 사실입니다.

1-1. 깨어 있는 자의 자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 안전해, 평안해"라고 말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면 종말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느냐, 이 준비하는 자의 자세를 설명해 줍니다.

4절에 보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아까는 도둑같이 임한다고 해놓고서는 이제는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믿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사인을 주겠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때를 알아챌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힌트가 아주 중요한 것 같아 보이는데,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다른 이들은 누구예요? 믿음이 없는 자들, 불신자들입니다. 그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했습니다. 깨어 정신 차리라, 그게 답이에요. 깨어 정신 차리라. 어떤 시기를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징조를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지 말고 깨어 정신 차리라, 이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정신 차리다'는 헬라어로 '네포(νήφω)'라고 하는데, 술 취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분별력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술 취하는 것을 대표적으로 우리가 얘기했는데, 술 취하면 분별력이 없어지죠. 판단력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제어를 못하니까 해서 되는 말, 해서 안 되는 말, 해도 되는 행동,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막 다 해버리지 않습니까? 말이나 행동이나. 그러니 종말의 때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그 어떤 것에서도 취해 있으면 안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술을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상당 부분 중독되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취미에 중독된 사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 거기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 보면 그 중독되어 있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끌고 갑니다. 거기에 중독돼 있으니까, 거기에 취해 있으니까 분별하지 못하고, 항상 나의 시간표는 그 취미, 내가 좋아하는 것, 거기에 항상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인생의 준거가 됩니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거죠.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그래요. 어떤 분들은 내가 좋아하는 봉사에 중독되어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중독이라고 표현해서 좀 그런데, 이를테면 내가 노래를 좀 좋아하고 노래를 잘한다 그러면, 어떤 분은 교회 나오는 게 아니고 찬양대 다니시는 분들이 계셔요. 교회 오셔야 되는데, 예배드리러 오셔야 되는데, 어떤 분은 또 다른 봉사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그런데 그 봉사를 위해서 교회 오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데 그건 하다가도 그만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다가도 그만두고, 하나님께서 다른 데 가라고 하면 다른 데도 가고 그런 거지, 그거 하지 마라 그러면 마치 나의 목숨을 빼앗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게 중독에 가까운 거죠. 그래서 취하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취미에 취하든 술에 취하든 기타 등등에 취하다 보면 종말의 때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1-2. 흔적만 남은 신앙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적만 가지고 있는 사람, 신앙의 흔적만 가지고 있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인데요.

창세기 19장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이 롯을 방문했을 때요, 롯이 "내 주여"라고 하는 건 천사를 부르는 말입니다.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했더니, 그들이, 이 천사가 말합니다,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이렇게 하니까, 롯이 강권합니다. 그래서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왔는데, 롯이 위하여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잘 보세요. 누가 식탁을 베풀었어요? 롯이요. 롯의 아내가 없어요. 롯의 두 딸들도 집에 없어요.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었습니다. 집에 있는 게 없으니까요. 롯의 집에, 지금 한밤중이에요. 소돔 땅에 살고 있는 롯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도 없고, 두 딸들도 남자친구 만나러 갔고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그 집에 한 사람만 있는데, 롯은 신앙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브라함과 오랫동안 살았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같이 떠났던 사람 아닙니까? 과거의 옛 기억은 있는 사람들이에요.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경건의 모양이 있으니까 그래서 천사들을 모시고 자기 집에 모셔서 대접하려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부인도 없고 딸들도 없고 뭘 하겠어요. 남자가 집에 있는 무교병 구워 가지고 아무 맛도 없는 거 그거 구워서 대접한 거예요.

그런데 그 전장에서 우리가 알잖아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과 천사들을 어떻게 섬겼는지. 급히 송아지를 잡고 떡을 굽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종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열심히 천사들을 대접하지 않아요? 경건의 모양도 있고 형식도 있고 내용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롯이 살고 있는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셔서 멸망 중에 그들을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이끌어내는데 롯이 그 이야기를 듣고 사위들한테 얘기하니까 사위들이 어떻게 했다고요? 농담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롯도 문제가 많아요. 창세기 19장 15절 16절 보시면,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이제 가자"고 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이 죄악 중에 멸망할까 하노라" 그랬어요. 그러나 롯이 지체합니다. 지체했어요. 거기 머물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흔적만 남아 있는 사람이에요. 흔적만 어렴풋한 흔적은 있는데, 어디에 취해 있습니까? 소돔 성에 취해 있는 사람이에요. 롯이 소돔 성으로 갈 때 그 땅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했습니다. 거기에 부귀영화에, 돈과 권력과 세속적인 욕망을 보고 갔는데, 거기에 취해 있습니다. 흔적은 있어요. 흔적은. 예수 믿는 흔적은, 하나님 자녀의 흔적은. 그런 자들이 자는 자들이에요. 깨어 있지 못한 자들.

우리가 공간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종말은 반드시 있다 그랬잖아요. 내가 먼저 죽든지, 내가 세상 떠나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든지 둘 중 하나예요. 종말은 반드시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흔적만 가지고 이 공동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흔적만 가지고 있지 않고 내용도 함께 있고 진실로 깨어 있는 존재인가, 이것을 우리가 롯을 통해서 보셔야 돼요. 성이 멸망하도록 거기에 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흔적만 있고, 그냥 교회에, 그 공동체가 재밌어서, 거기에서 내 재능을 발휘하고 뽐내는 게 즐거워서 거기에 중독되고 거기에 발을 딛고 있는 건데, 겉모습은 알 수가 없잖아요. 목사가 압니까? 성도들이 알겠습니까? 알 수가 없고요. 하나님은 아시겠죠.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종말의 때를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 차리라고 하셨잖아요.

또 나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7절 8절, 8절에 보니까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했습니다. 정신 차리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군가에게 "야,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런 말 들으면 기분 좋아요? 기분 좋으세요? 대단히 기분 나쁘죠. "내가 왜? 내가 왜 지금?" 그런데 정신 차려야 돼요. 우리가 어디에 중독되어 있는지 스스로를 내가 보셔야 되거든요. 어디에 미쳐 있는지 정말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1-3. 가라지를 경계하라

그래서 어디에 중독되어 있고 거기에 빠져 있고 정신 차려 있지 못하면, 그러면 사탄이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 25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이 누굴까요? 예수님이 말씀의 씨앗을 뿌렸죠.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에", 잔다 그랬어요. 잔다는 말이 정신 못 차린다는 말이에요.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사탄이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라."

우리가 잘 때,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을 때, 술에 취해 있고, 정말 하나님 말씀에 취해서 그 말씀의 중심을 잡고 살지 못하고 다른 데 탐닉하고 빠져 있을 때, 그때 사탄이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러면 그 가라지를 예수님이 나중에 이런 말씀하시거든요. "뽑지 마라"고 해요. "뽑지 마라"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하니까,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까 하니까 뽑지 마라 그럽니다. 결국 마지막 추수 때 가라지와 알곡을 같이 뽑는데, 가라지가 알곡에게 피해를 준다는 말이에요. 알곡이 성장하는데 가라지가 양분을 다 빨아먹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 차려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내 마음속에 가라지가 뿌려지지 않기를, 우리 가정에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부모가 돈 번다고 밖으로 돌아다닐 때,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양육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 앉혀 놓고 책망하고 기도하지 않을 때, 그때 사탄이 와서 우리 자녀들 마음속에 가라지를 마음대로 뿌리고 가라지 농사 짓고 가면 어떡할 거예요? 그거 감당할 수 있습니까? 나중에 훗날 감당 안 됩니다. 절대 그거 돈으로도 감당 안 되고, 우리 능력으로도, 우리 노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매순간 깨어 있어야 됩니다.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란 말이 아니고, 항상 판단의 순간순간, 결정하는 순간순간마다 이것이 내 욕심으로 인한 결정인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인한 결정인지를 매 순간 분별해야 돼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라지가 한번 뿌려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나중에 뒷감당을 못한다고요. 우리가 종말의 시간까지 알곡이 대단한 피해를 보게 되니까, 그런 거 우리 가정에 뿌려지지 않도록, 우리 교회에 뿌려지지 않도록 해야 돼요. 이단들이 교회에 언제 들어올 것 같아요? 이단들 가라지가 교회에, 교회가 싸울 때 들어와요. 첫째 교회가 싸울 때, 둘째 교회가 말씀 공부 안 할 때 들어와요. 교회에서 말씀 안 가르쳐요. 교회에서 말씀 안 가르치는데 말씀에 대한 갈망과 열망이 있는 분들이 신천지 찾아갈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 계시록 가르치지 않고,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성경 공부하지 않으면,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말씀 공부 하지 않으면, 그때 사탄이 들어오고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되고 싸우면 안 돼요. 갈등의 씨앗이 싹 솟아나려고 할 때, 내가 누군가가 미워지려 할 때, '아이고 이러다가 이단들이 들어오겠다, 이러다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씨를 뿌리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돼요. 분쟁과 다툼, 말씀 공부하지 않는 건 가라지가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시작이 됩니다.

로마서 13장 11절 말씀 보세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또 깨라는 얘기를 또 하잖아요.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라, 성경에 이런 얘기가 너무너무 많이 나옵니다.

즉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딱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아까 얘기했죠. 제가 종말에 대해서, 때와 시기에 대해서 알 필요 없다 그랬어요.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히 종말은 온다. 두 번째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되느냐, 깨어 있어야 된다. 깨어 있는 건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고 깨어 있으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종말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2. 천국을 보장받은 자

9절과 10절 말씀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우신 이유는 구원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위함이라는 거죠. 이건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했잖아요. 이게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에요.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즉 깨어 있든지 자든지, 여기서 잔다는 말은 죽음을 얘기해요. 죽었다는 말이지, 영적으로 어두워졌다는 말이 아니고, 깨어 있든지 말은 살아 있든지, 즉 살든지 죽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런 뜻이에요.

즉 우리는 종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아, 죽을 때 겁날 것 같아. 숨 넘어갈 때 어떤 느낌일까? 어떤 느낌일 것 같아요? 편안할 거 같아요, 겁날 거 같아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갈 때 '안 돼 나 못가' 뭐 이럴 거 같아요?" 어떤 느낌일 거 같아요? 그런 분들에게 주시는 평안의 말씀이에요.

깨어 있든지 자든지, 즉 살든지 죽든지 뭐라고 하셨어요?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사는 존재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1절 32절 보시면,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예수님이 하신 말이거든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여기서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할 때, 이걸 다 현재형으로 썼어요. 과거형이 아니에요.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죽어서 천국에 가 있는 자들 아닙니까? 죽은 자들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나는 한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다가 야곱의 하나님이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해야 말이 돼요. 시제가.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다 현재로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문법을 몰라서 그렇게 쓰신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하셨잖아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말씀하셨잖아요. 그때도 하나님이 현재로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그 말이 뭐예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서는요. 사람들이 볼 때는 죽었죠. 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죽어 가지고 장례 지냈잖아요. 그러니 죽은 자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장소를 옮긴 거예요. 공간을 옮긴 거예요. 어디에서 어디로? 이 땅에서 천국으로. 그래서 하나님 앞에는 산 자들이라 그래요. 이분들이 지금도 살아 있고 과거에도 살아 계셨고, 이 땅에서 사느냐 천국에서 사느냐가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 된 자의 특권은 죽지 않습니다. 옮겨갈 뿐이지.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헤어짐의 슬픔은 있어요. 그런데 가슴이 미어지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먼저 가 계세요, 제가 갈게요" 이거지.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이에요. 앞의 삶은 육체로 사는 삶이고,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은 영으로 영원히 사는 삶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깨어 있든지 자든지 우리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런 대단하고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세상의 왕후장상, 세속의 권력을 다 가진 분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게 이 문제 아닙니까?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 아닙니까? 이들이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가 주와 함께 있으면 이 은혜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잖아요. 기쁠 수밖에요.

종말에 대해서 이것으로 정리하는 겁니다. 바울이 종말에 대해서 이 교회가 설레발하고 있으니까,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런데 언제 올지 모른다 그랬죠.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해야 된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너희는 지금 숨이 붙어 있든지 아니면 죽어서 세상을 떠나든지 다 살아 있는 자들이다. 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까.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깔끔하게 정리해 줬습니다.

앞으로 종말에 대해서, 내 죽음에 대한 이상한 생각이나 불안감이 드신다면 이 말씀을 또 읽고 또 읽어서 확신을 가져야 돼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의심하지 말고 확신 안에 거해야 이 세상의 삶이 가치 있고, 이 세상을 떠나도 떠나는 죽음과 헤어짐에 대해서 너무 고통스럽지 않아요.

3. 성도들의 관계

그다음 이제 삶을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항상 성도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요, 두 가지 방향에서 얘기합니다. 하나는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얘기하고, 하나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얘기해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바울은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어서 수평만 얘기하지 않고 수직적인 것도 또 얘기했습니다.

3-1. 앞선 자의 역할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이제 우리는 죽어서 천국을 보장받은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 이제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지금 너희 잘하고 있잖아.

여기 '피차'라는 말, '서로'라는 말이 중요한데요. 누구의 피차를 말하느냐, 누구의 서로를 얘기하느냐, 그다음에 나와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라고 했어요.

12절 13절 말씀이 아주 중요한데요. 교회 안에서 여러 유형의 갈등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떤 한 유형의 갈등, 많은 유형의 갈등은 교회에서 중직 있잖아요. 즉 목회자, 교회 장로님들, 권사님들, 또 집사님들, 오래 신앙생활 하셨던 어른 그룹에 속하는 분들과, 또 성도들 조금 연소한 분들 사이에 갈등이 교회 안의 갈등 중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갈등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피차'라는 말, '서로'라는 말은, 바울이 정말 말하고 싶은 건 교회의 리더들과 그 리더십에 순종하는 사람들 사이를 피차라고 말했습니다.

12절을 볼게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즉 성도들 가운데 주 안에서 "너희를 위하여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한다. 누굽니까?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들, 더 앞에 나가서 다스리는 사람들, 또 권하는 사람들. 책망을 포함하는 말이거든요. 누굽니까? 목회자, 장로님들 아닙니까? 교회 중직들. 그러면 이게 중직들이 해야 하고 있는 거예요. 세 가지 역할.

중직은 뭘 해야 된다고요? 첫째 수고를 해야 돼요. 수고. 바울의 용어에서 우리가 1장에서 봤죠. 수고 앞에 붙어 있는 명사가 뭐예요? 사랑의 수고라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중직은 수고를 해야 돼요. 수고를. 뒷짐 지고 돌아다니지 말고 수고해야 돼. 권사들이 수고해야 된다고요. 뒷짐 지고 돌아다니지 말고 권사들이 더 열심히 수고하는 걸 보여 줘야 돼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러겠죠. "목사님 마음도 없는데 위선 아닙니까?" 그러면 권사 때려쳐야 돼. 마음과 몸이 같이 가서 진짜 수고해야 된다니까요. 정말 수고해야 돼. "나는 저만큼 못하겠다" 할 만큼 수고해야 돼요. 수고. 열심히 수고해야 돼요. 장로님들 마찬가지고. 장로님들이 맨날 어디 앉아 가지고 대접받고, 그게 무슨 장로입니까? 목사가 맨날 대접받고, 어디 줄도 안 쓰고 맨날 새치기하고, 그게 무슨 목사입니까?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수고하고 애를 써야 돼요. 그게 중직이 하는 일이거든요. 수고하고. 세워놨는데 종들이, 종들이 수고하는 게 종들 아닙니까? 종들이 대접받으려면 그게 무슨 종입니까? 상전이지. 종은 수고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수고를 어떻게 하라고요? 사랑으로 수고하라고. 사랑의 수고를. 그래서 중직은 열심히 수고해야 됩니다. "아 그래서 야 저러다가 저 장로님 돌아가시겠다" 할 정도까지 수고해야 되는 거예요.

두 번째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이 다스린다는 말을 우리의 동양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이 다스린다는 말을 원어에서 보면 '앞서 간다'라고 표현했어요. 앞서간다. 앞서가야 돼요. 우리 예수님께서 그랬잖아요. 목자는 양들에 앞서 가거든요. 양들 보고 "야 너들 먼저 가 봐, 저기에 뭐 있나 안전하면 내가 갈게" 이게 예수님이 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항상 앞서 가셨거든요. 그래서 책임 맡은 자들, 중직은 앞서가는 거예요. 예배에 앞서가야 되고요, 봉사에 앞서야 되고, 기도에 앞서야 되고. 그래서 피곤한 겁니다. 그래서 뭐든지 앞서야 돼요.

세 번째 권하다. 권하다 아시죠? 책망한다는 말이에요. 이거 '누테테오(νουθετέω)'예요. 책망하다. 책망도 해야죠. 수고하고 앞서서 나가는 사람이 책망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지불도, 수고도 하지도 않고, 앞서지도 않고, 일도 안 하는데 책망만 해 보세요. 말 듣는가? 분란이 만 생기지. 수고하고 앞서 나가는 자가 사랑을 가지고 경책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직들이 하는 일이에요.

3-2. 따르는 자의 태도

그러면 그런 중직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어때야 됩니까? 뒤에 나오죠. 어떻게 해요? "너희가 알고"라고 했어요. 알아 주라는 뜻이에요.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알아주라. 그들의 수고를 인정해 주라. 그들의 앞장서서 가는 그들의 고통을 인정해 주라. 그들이 권면하고 경책하는 걸 받아들여 주라.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게 상호적인 거거든요. 서로 그렇잖아요. 상호적이고. 좀 알아 줘라. 맨날 치직거리지 말고. 인정해 주고 수고한다고 격려해 줘라.

두 번째로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가장 귀히 여겨 줘라. "아 우리 장로님, 우리 목사님, 우리 권사님들" 하고 정말 귀하게 여겨 줘라. "장로님이 계셔서 우리 교회가 복 받습니다. 우리 부서가 힘이 납니다" 이렇게 귀하게 여겨 줘라. 그런 뜻이죠.

세 번째 "너희끼리 화목하라." 너희들끼리 화목하라. 행복하게 지내라. 이런 뜻 아닙니까? 그렇죠.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예요. 앞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하고. 그다음 세 가지를 하고.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들의 형제 사랑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가정의 부모들은 앞에 세 가지를 해야 되고, 이 세 가지가 되면 자녀들은 뒤에 세 가지를 따라서 할 것이고. 어디에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안 되면 그다음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 중에 우리가 부족한 게 뭔지, 내가 중직이라면 내가 앞선 자라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 앞선 분들을 어떻게 섬기고 또 따라가고 존중해야 되는지를 잘 배워야 됩니다.

3-3. 세 부류의 사람

14절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이 '형제들아' 할 때는요, 앞선 자들 교회 중직들과 또 따르는 성도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에요. 아까 앞에는 앞선 자들과 따르는 자들을 분리해서 말씀했다면, 지금은 포괄해서 하는 말입니다.

보세요. "너희를 권면하노니" 이제 세 가지를 얘기했어요.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교회에 아주 부정적인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했어요.

첫째 어떤 사람? 게으른 사람. 게으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자기 할 일 안 하고 남에게 미루고 성실하지 않은 자가 게으른 자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게으르다는 말을 보세요. '아탁토스(ἄτακτος)'라고 했어요. 정돈되지 않은, 제멋대로 하는. 이게 게으르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가지고 꼼짝하지 않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일 수 있어요. 그런 사람도 물론 게으르죠. 그런데 정돈되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 우리가 볼 때는 부지런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은 게으르다 그랬어요. 즉 하나님 말씀에 통제를 받지 않는 사람들,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좋은 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들.

힘들어요. 목사들이 너무 힘들어요. 말도 안 듣고, 성경도 안 보고, 그냥 자기 좋은 것만 하는 거예요. 그런 분들이 여기 가서 사고 치고, 저기 가서 사고 치고.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는 부지런해 보이거든요. "저 사람 성실하네, 그래도 사고를 좀 쳐서 그렇지 성실하네." 성실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제발. 진짜로. 제멋대로 하는 건 말씀에 길들여지지 않은 거거든요. 그게 게으르다 그랬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우리의 게으름. 나는 정말 내가 성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게으른 자가 아닌가. 나는 하나님 말씀에 통제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멋대로 하고 다닌 건 아닌가. 그럼 게으른 거예요. 말씀에 성실해야지. 그래서 그런 자들 어떻게 하라 그랬어요? 권계하며 훈계하라 그랬습니다. 따끔하게 훈계해야 돼요. 그런데 이 훈계는 하는 것도 어렵고 듣는 사람의 태도도 어렵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훈계하라 했기 때문에 해야 돼요.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훈계하는 겁니다.

두 번째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은 소심한 자들이에요. 여기 나오죠. '올리고퓌코스(ὀλιγόψυχος)'라고 나오죠. 겁이 많은 사람, 소심한 겁이 많은 사람. 즉 그런 거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에게 오라" 그랬어요. 베드로가 "예수님, 진짜 주님이시거든 나로 바다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배에서 내려 나에게 오라." 그런데 못 가는 거예요. 못 가는 거예요. 못 가요. 베드로는 갔잖아요. 그런데 소심하고 겁이 많으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운 거예요. 믿음의 발걸음을 한번 해보는 거, 한번 도전해 보는 거, 요게 어려운 거거든요.

그때는 어떻게 하라? 책망하지 말고 격려해 주라. 격려해 주라. 격려가 뭐예요? 이 격려는 문자 그대로 얘기하면, 여기 원어 그대로 얘기하면 함께 가는 겁니다. 손 잡고 함께 가는 거. "괜찮잖아, 나하고 함께 가 보니까 되잖아" 하고 같이 가보는 거예요. 믿음의 길을. 그냥 "너 가라"고 떠밀지 말고, 같이 손잡고 가 주는 거. 그게 격려예요.

교회 공동체에서, 가정 공동체에서, 생각보다 소심한 분들 많아요. 그런데 이때는 이렇게 세워서 함께 가는 겁니다. 혼자 가라고 하지 마. 좌충우돌 하는 사람은 책망하고, 소심해서 앉아 있는 사람은 이렇게 세워서 같이 가고.

세 번째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힘이 없는 자를 '아스테네스(ἀσθενής)',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이죠. 이게 소심한 거하고 다른 거예요. 소심한 사람은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망설임이 있는 사람이고요, 여기 무기력한 사람은 뻗어 버린 사람이에요. 번아웃돼 버린 사람. 아무것도 못해.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죠.

주로 어떨 때 이런 현상이 찾아오는가? '아스테네스', 무기력한 현상이 찾아오는가. 정말 믿었던 사람에게 시험당했을 때, 큰 시험당했을 때, 사람에게 시험당했을 때. 그때. 또 두 번째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고 섬기고 했는데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느껴졌을 때. 이걸 우리가 번아웃이라고 말하잖아, 영적 탈진이라 말하죠. 이럴 때 무기력한 상태가 돼 버려요.

그럼 이런 분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붙들어 주라 그랬어요. 붙들어 주라고. 무기력에 넘어지지 않게. 일시키라고 말 안 했어요. 일시키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그냥 붙들고 있으면 돼요. 같이 옆에서 손잡고 붙들어 주면 돼요. 더 이상 무기력에 넘어져서 사탄의 덫에 빠져서 완전히 자기 인생을 놓아버리지 않게.

그럼 이런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리 어떤 곳에서 어떤 이런 분이 있다 그러면, 돌아가면서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전화해 주고, 서로 연락하고 붙들어 주는 거예요. 그냥 그의 삶을 붙들어 주는 거예요. 그의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계속 그냥 붙들어 주는 거라고. 그거 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야 사람에게 시험당한 건 사람으로 극복해야 돼, 나와서 일하자, 와서 뭐 열심히 하자" 우울증에 빠져 가지고 너무 힘들어하는데 됩니까 그게? 사람에게 시험 들어 가지고 다시는 사람 꼴도 보기 싫은데 됩니까 그게? "야 이럴 때일수록 교회 가서 금요일 날 뜨겁게 주여 부르짖고 기도해야 돼." 교회 오면은 금요일 날 오면은 찬양 소리 너무 커 가지고 그때는 공황이 올 것 같은데 그 때 부르면 되겠어요? 안 됩니다. 절대. 그냥 붙들어 주는 거예요.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은 책망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함께 걸어가 줘야 되고, 어떤 사람은 붙들고 있어 줘야 되고. 이게 지혜거든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3-4. 오래 참음의 본질

그런데 이 세 가지 부류의 모든 사람, 게으른 자, 마음이 약한 자, 힘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요? 오래 참으라. 제가 이거 읽는 방법 가르쳐 드릴까요? 이렇게 해요. 오래 참으라 그랬습니다. 숨 넘어갈 때까지.

오래 참는 게 뭡니까? 본질이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그랬습니다. 참아 줘야 되거든요. 한번 책망한다고 게으른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 말씀에 성실해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일으켜서 같이 걸어가자 해서 소심한 사람이 갑자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 붙들고 있는다고 해서 일주일 만에 무기력에서 갑자기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요? 오래 참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들이니까, 형제들, 성도의 관계에서 이거 하라고 한 겁니다. 이 일을 하라고. 그래서 교회는 이런 일 하는 공동체예요.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뭔지 제대로 알아야 일할 것 아닙니까?

어떤 분은 그런 말씀하세요. "우리 교회는 교인이 많아서 내가 섬길 데가 없습니다. 봉사할 데가 없습니다. 찬양대 꽉 차 있고 뭐 어디도 있고, 어디 가도 교사도 가보니까 너무 많고." 그런데 그런 것만 섬기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정말 눈에 보이는 거지. 바울이 어디 찬양대 봉사하라고 얘기한 적 있습니까? 바울이 어디 주방에서 밥 하라고 얘기한 적 있습니까? 이런 얘기하죠. 이게 본질적인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려면 잘 살펴야 되잖아요. 누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지, 누가 어떤 사람이 소심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쓸데없이 성실한지.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오래 참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 돼요. 그게 섬김이에요. 그게 정말 중요한 봉사입니다.

15절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선을 따르라. 원칙이에요. 원칙. 싸우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요거 잘 기억하십시오. 이제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성도들, 우리는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성도들과의 관계는 이래야 된다 했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그러면 이제 남은 게 뭐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잘 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과 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천국을 보장받은 성도는 세 가지를 해야 되는데요. 나오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4-1.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는 걸 "항상 기뻐하라" 그랬어요.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요, 항상 기뻐하는 걸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 당장 탁 튀어나오는 말이 뭔지 아세요? 저한테 질문하는 거예요. "기뻐할 일이 없는데요. 목사님,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죠. 제가 돈이 많습니까? 제가 건강합니까? 자식들이 잘돼 있습니까? 제가 기뻐할 게 뭐가 있다고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까?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막 그런 얘기 쏘아붙이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뭐라 그랬어요? "주 안에서"라면 말이에요. 항상 기뻐하는 거. 세상에서 기뻐할 거리들 많죠. 돈이 있어도 기쁘고. 그런데 그건 그냥 일시적인 거예요. 다 정말 지나가는 거고 일시적인 거예요. 진짜 기쁨은, 우리의 기쁨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주 안에 있을 때, 말씀 안에 있을 때, 은혜 아래 있을 때, 주의 진리 안에 거할 때, 그때 우리는 기쁜 거예요.

바울은 빌립보서 말씀을 감옥에서 썼거든요. 감옥에 있으면서 기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언제 끌려 나가서 죽임당할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가 기뻤던 이유는, 나는 현실은 감옥에 있지만 나의 영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기쁜 거예요.

그래서 종말을 살아가는 자가 기뻐하라, 이 말은 주 안에 있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주 안에 거하라. 기뻐할 거리들 찾아다니지 마라. 내가 기뻐할 거리가 돈이라서 돈 번다고 그거 목매고 거기 쫓아다니지 마라. 주 안에 있으면 너희의 기쁨은 보장된다는 뜻이에요.

4-2. 쉬지 말고 기도하라

두 번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면 또 딱 던지는 질문이 있죠. "안 쉬고 어떻게 기도해요? 밥도 안 먹고 뭐..." 이제 그런 초등학생 같은 질문하시면 안 돼요.

빌립보서 1장 9절 10절 보세요. 9절에 보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시작했고, 10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 그랬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말은요, 선택의 순간마다 분별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올 때까지 오늘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까? 누구를 만나야 될지, 누구를 만나지 말아야 될지, 어떤 일을 해야 될지, 어떤 일은 하면 안 될지, 무슨 음식을 먹어야 될지, 먹지 말아야 될지, 이 돈을 내가 지불해야 될지, 아니면 저 사람이 돈 내게 가만히 둬야 할지, 등등의 선택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순간마다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분별을 위해서. 순간순간 기도하고, 정말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는 이 선택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결혼을 앞두고, 내 직장 선택을 앞두고, 내 인생의 정말 중요한 분기점마다, 선택의 순간마다 분별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그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후회되는 선택을 하지 않잖아요. 지극히 선한 것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알려 주시거든요.

4-3. 범사에 감사하라

세 번째 "범사에 감사하라." 이 감사에 대한 건요. 빌립보서 말씀 보시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미래적 감사입니다. 구한 것이 아니고요, 받은 것이 아니고, 구할 것을 감사하라 그랬어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미래적으로 선제적으로 감사해야 돼요.

그래서 바울이 말한 이 세 가지 하나님의 뜻, 기뻐하는 건 주 안에 있으라는 말이고, 기도하라는 건 선택의 순간마다 분별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고, 감사는 미래적으로 선제적으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4-4.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성도의 영적 생활을 위해서 권면하는 게 뭡니까? 19절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절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 그랬어요.

여기 '소멸하다'는 말은요, 헬라어로 보면 '스베니미(σβέννυμι)'라고 해서 불을 끄다는 뜻이에요. 불을 끄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그랬어요. 성령이 언제 충만해집니다? 사도행전 말씀에, 우리가 교리학교 할 때도 또 여러 번 얘기했는데, 말씀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요. 세 가지가 함께 있는 자리가 예배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즉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은, 말씀 읽는 걸 중단하지 마라, 기도를 쉬지 마라, 찬양을 멈추지 마라, 예배 생활을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하라, 이 말이죠. 이게 대단히 중요하죠.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가 성령의 불을 꺼서는 안 됩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예언은 뭡니까? 점쟁이가 던지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있는 거.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건 멸시하지 마라.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5. 바울의 기도와 인사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이 기도를 했습니다.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바울의 절절한 소원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죠? 정말 흠도 없이 점도 없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깨끗하고 정결한 상태로 보전되기를 원한다. 바울의 소원이 담긴 기도였고.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이루신다. '이루시리라'는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 활동하신다.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활동하실 것이다. 그럼 너희는 어떻게 하라? 그 활동하심에 너희를 맡기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마지막 인사입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이 참 장점이 많은데요, 이런 게 대단한 장점이에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해서, 중보 기도를,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바울이라는 사람을 위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기도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바울은 항상 기도를 부탁했다고.

그래서 목회자도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하고요, 부모도 자녀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돼요. 기도에 부담을 줘야 돼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지금 내 상태가 이러이러하니 나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나 돈이 부족하니까 돈 달라"는 얘기는 하시는데, 그런데 자녀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하셔야 돼요. "내가 기도해 줄 테니 엄마한테 기도제목 갖고 와", 이것만 얘기하지 말고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해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끝이 납니다.

5장 정리

종말은 반드시 온다. 때와 시기는 모른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된다. 천국은 보장받은 것이다. 천국 보장받은 사람은 형제 사랑을, 성도들 사이에 앞선 자와 따라가는 자 사이의 관계를 얘기했고, 교회 공동체에 이런 부류 저런 부류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이렇게 처방을 했고, 마지막으로 오래 참으라 그랬습니다. 그다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고, 그게 핵심이에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천국은 믿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은 자가 없다고 하셨고 하나님 앞에는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산 자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을 준비하는 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천국을 보장받은 우리가 형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교회에 앞선 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따르는 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따라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교회 공동체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오래 참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 우리가 그 뜻을 이루며 살도록 도우시고, 종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