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6 - 박해와 환난 중에서 (살후 1장)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을 진행하면서 지난 시간까지 전서 5장까지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고, 오늘은 후서로 들어가는 첫 번째 시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가서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바울의 원래 2차 선교여행 목적지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고, 그중에서도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방향을 바꾸셔서 그 순종 가운데 마게도냐 지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성이 빌립보였습니다. 두 번째가 데살로니가였고, 데살로니가를 거쳐서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를 지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아가야 지방을 만나는데, 그곳에서 아테네에 갑니다. 아테네에서 잠깐 머무르다가 다시 고린도로 가지요. 고린도에서 비교적 오래 머뭅니다.
바울은 보통 몇 개월씩 있다가 떠나는데,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가량을 머물렀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입니다. 전서를 쓰고 나서 곧이어 후서를 씁니다. 불과 이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고린도에 머무는 1년 6개월 안에 쓴 편지이기 때문에 전서와 후서의 연관성이 상당히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그 기간의 편차가 좀 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의 내용과 후서의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시차가 별로 없어서 내용이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이거 전서에서 읽었던 건데' 하는 느낌도 있고,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하시네' 하는 느낌이 있는데,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심화 학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래 중요한 내용이 전서 5장에 있었는데, 그걸 조금 더 추려서 더 핵심적이고 더 중요한 내용들을 한 번 더 집약해서 말씀하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면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 박해와 환난을 잘 견디고 이긴 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오고, 2장과 3장은 종말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전서에서도 사실 그런 내용들이 이어졌지 않습니까? 이제 구체적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1. 교회의 참된 위치
1-1.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
본문을 보시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이라고 똑같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똑같이 나와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세 분입니다.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 이분들이 2차 선교여행의 핵심 멤버들이었습니다. 이 세 분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같이 고생하고 같이 개척했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세 분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분의 이름만 들어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립고 생각이 많이 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건 많이 본 것 같죠?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거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제가 읽겠습니다. 이건 전서입니다. 1장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똑같이 세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거 찾아보세요. 똑같죠? 다른 건 이 한 절에 있던 걸 두 절로 분리해 놓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공부할 때 아주 중요하게 다뤘던 내용이 교회의 위치였습니다. 지리적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지리적 위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식당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회 위치를 따지고 있지요. 교회는 그런 공간과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교회의 위치가 중요한 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전서에도 나오고 후서에도 나오는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디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누구의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중성인데, 여기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교회의 영적 위치는 하나님,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위치됨을 확정하고 그것을 경영하고 운영하고 자리매김하게 해주는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 교회 구성원이라는 뜻입니다. 그 교회 목회자요, 그 교회 중직들이요, 그 교회 성도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야, 교회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돼. 교회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돼.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님 밖을 떠나면 되냐? 안 되지!"라고 말씀해도, 그 교회 성도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데살로니가인들이 그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교회 성도들이 자꾸 하나님 밖으로 나가고 자꾸 예수 그리스도 말씀 밖으로 나가버리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데살로니가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책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전서에서도 말했고 후서에서도 말했습니다.
1-2. 금송아지 우상의 경계
제가 밑에 적어둔 예시가 나오는데요. 역대하 13장 6절에서 11절을 적어뒀는데, 이 내용이 이렇습니다. 여로보암왕 이야기입니다. 여로보암 아시죠? 여로보암 모르시면 성경공부 한 번 더 봐야 되는데, 솔로몬의 아들이 르호보암입니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나뉘어집니다. 남쪽은 르호보암이 그대로 가지고 있고 북왕국이 나뉘어지는데, 북왕국을 가져갔던 사람이 여로보암입니다. 여로보암은 큰 죄를 짓습니다. 세 가지 죄를 짓는데, 그 첫 번째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고 이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 죄가 절기를 제멋대로 바꿨습니다. 세 번째 죄는 일반인들을 제사장으로 삼아서 제사를 드리게 해버렸습니다.
그 세 가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교회됨과 성전의 성전됨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경영하는 사람이, 이것을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여로보암의 책무인데, 이 왕이 그것을 어겼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8절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신이 너희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한 짓이에요. 이것을 지금 고발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서 요즘은 이런 일이 없을까요? 우상을 만드는 일이 요즘은 없을까요? 여기 우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에 금송아지 있습니까? 우리 교회 없죠. 눈으로 보이는 건 없습니다. 금송아지가 없어요. 그런데 사실 요즘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일이 꽤 많습니다. 이를테면, 교회가 건축을 하고 건물을 짓고 헌물을 받는 일들이 있습니다. 강대상을 헌물로 받든 피아노를 받든 등등의 헌물을 교인들에게 각 가정에서 한번 작정해 보십시오. 교회 예배당은 이렇게 멋지게 지었는데 거기에 저마다 채워놓을 것들을 한번 생각해서 가정의 형편대로 해보십시오. 하고 이렇게 헌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받았다 합시다. 받았어요. 강대상을 받았는데, 강대상 이름에다가 '아무개 집사 증정'하고 이것을 씁니다. 저기 피아노에다가 '아무개 권사님 증정'하고 씁니다. 그것이 금송아지예요. 그러면 그렇게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 여기다가 내 이름 석 자를 새겨놨습니다. 뿌듯하겠죠. 교회 오면 뭐만 보입니까? 예배당에 오면 그것만 보이는 거예요. 그것만, 그것만. 그것이 금송아지예요.
교회에서 중직들을 세웁니다. 중직들이 우리 교회 이번에 42명이 세워졌는데, 이제 이분들에게 돈을 조금씩 걷어가지고, 예를 들어 교회에서 버스 하나를 샀다 합시다. 우리는 절대 그런 거 안 합니다. 일절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봤어요, 그런 교회를. 그 버스 어디엔가 그 이름들을 빼곡하게 새겨가지고 거기다가 붙여놓습니다. 동판에다가 새겨가지고 나중에 저 피아노를 처분해야 될 때가 됩니다. 팔 수 있을까요? 처분할 수 있습니까? 저 피아노가 더 이상 용도가 폐기돼 가지고 어디 갖다 버리고 싶은데, 다른 걸로 바꿔야 하는데, 허락받아야 됩니다. 그분 아들딸들한테 가서.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교회는 자기 이름을 지우는 것이 교회지, 자기 이름 새기고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겨가지고 후손 대대로 금송아지 만들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는 거지, 그것을 경영하고 그것을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것이 사람이거든요. 그것이 교회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금송아지들을 만들고 있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에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은퇴하며 금메달 드렸습니다. 그것을 왜 받습니까? 금메달? 이제 다 없어졌습니다. 금메달 집에다가 걸어놓고 후손들한테 자손 대대로 물려주려고 받습니까? 저는 그것이 섬뜩하게 무서운 것이, 기드온의 에봇 생각나야 됩니다. 기드온의 금 에봇 아십니까?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드온이 한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기드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심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니까 "저 못합니다, 못합니다"하니까 하나님이 계속 하라 하시니까 그러면 양털을 가지고 두 번이나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다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가지고 나간 무기를 보세요. 횃불 있죠? 항아리 있죠? 나팔입니다. 그 횃불을 항아리 속에 감추고, 항아리 깨고, 그리고 횃불 들고 나팔 불고, 그리고 300명 가지고 이겼습니다. 기드온이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가서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하니까 기드온이 왕이 되지 못하겠답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고 싶은 걸 말씀하시면 우리가 다 하겠습니다." 기드온이 "그러면 에봇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금으로." 금 에봇을 만들어 줬습니다. 멋진 걸 기드온이 자기 고향, 자기 집에다가 걸어둡니다. 성경에 얼마나 섬뜩한 말이 있냐면,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하게 섬기더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죽었어요. 그 후손들이 가서 그 앞에 절하고 그 앞에 제사하고, 그것을 붙잡고 좀 만지고, 나도 기드온처럼 그런 능력을 좀 드리워 보려고. 집에 금메달 걸어놔 보세요. 자손들이 그 짓하고 있을 겁니다. 음란하게 섬길 겁니다. 그래서 흔적을 없애버려야 됩니다. 전부 다, 다 없애버려야 돼요. 그것이 뭐라고!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지, 절대로 나의 공로와 나의 능력 안에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요만큼 일해놓고 이만큼 부풀리고, 요만큼 해놓고 저만큼 떠들고, 교회가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얼마나 듣기 싫어하시겠어요?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전서에서도 1장 1절의 이야기를 하고 후서에서도 1장 1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교회됨을 우리가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목사도 중직들도 성도들도, 우리가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고 금송아지 우상들을 다 치워버려야 됩니다. 전부 다 흔적도 없이 말갛게 없애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드러나지, 사람 드러나는 것, 이건 교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2. 은혜와 평강의 출처
2절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어딥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타 종교들 보세요. 다른 종교들. 세상에 여러 잡신들은 자력 갱생과 자력 구원의 종교입니다. 은혜가 아니에요. 전부 자기 노력과 자기 수고의 종교예요.
여러분들 베데스다 연못 이야기 아시잖아요. 38년 된 병자가 거기에 38년 동안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거기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 성경에 보면 각색 병자들이 거기 있었다고 했는데, 물이 동한다 합시다. 그것이 간헐천이니까. 온천이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물이 가끔씩 동하는데, 그때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갔는지 알겠습니까? 요즘처럼 카메라로 찍어서 비디오 판독을 하면 알까?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점프해서 들어가는 사람, 어떤 사람은 발부터 집어넣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들이대는데 누가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나았다고 믿고 가는 사람, 아니라고 그냥 생각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
그런데 그것이 세상이에요. 세상은 경쟁입니다. 다른 종교 다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내가 헌신하고, 얼마나 내가 헌금하고, 얼마나 내가 봉사하고, 얼마나 내가 덕을 쌓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혜가 선행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곳이지요. 평강의 출처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여기 또 나오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강의 출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입니다. 평강의 출처는 물질로부터가 아닙니다. 평강의 출처는 내 건강으로부터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여건과 내 심리적 상태와 물질의 상태와 상관없이 평안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현실과 상황과 관계없이 내면은 평안 가운데 찬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이니까, 환경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평안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됩니다. 이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만약 내 환경에 따라서 내 평안이 있고 없고 한다면, 내 믿음을 다시 처음부터, 근본부터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그래야 정말 바른 믿음에 내가 서 있는지 아니면 가짜 믿음에 기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바울의 감사
3-1. 믿음의 성장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형제들아 할 때 형제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항상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감사의 이유가 있겠죠.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감사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자라고, 두 번째는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의 감사가 명확하죠. 왜 이 교회 성도들을 보고 바울은 감사하고 있는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장. 우리가 전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너희가 굳게 선즉 우리가 살리라"고 했습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니까 "내가 이제 좀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요? 자라가야 된다, 성장해야 된다. 어디까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영원히 지속적으로 계속 성장해 가야 하는데, 그 성장의 방향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인 거룩, 음란을 버리는 것. 두 번째는 형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서에서 공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것이 속편이라고 했잖아요. 전서를 요약한 거라고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이 성도들이 성장하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전서 이야기를 좀 봅니다. 2절과 4절을 보니까 그래요.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서에서도 감사한다고 했어요. 그때 감사의 이유가 세 가지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그랬습니다. 세 가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것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감사해요. 그럼 뭐예요? 믿음이 지금 자랐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전서에 비해서 후서가 좀 더 믿음이 자랐으면, 믿음의 역사는 점점 더 풍성해졌을 것이고, 사랑의 수고는 더했을 것이고, 소망의 인내는 더 잘 견디고 있을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감사하고 칭찬한 것입니다.
3-2. 형제 사랑의 풍성함
여러분, 여기 또 한 가지 감사가요,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 너희들끼리 형제들끼리 자매들끼리 형제자매 간에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어디 교회의 외형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이 있습니까? 너희들 교회가 이번에 땅을 샀다며, 너희 교회가 이번에 뭘 좀 했다며, 이것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있냐고요? 없잖아요. 바울이 본인이 개척했던 교회, 그리고 초기 교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그리고 이 신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보면 전부 다 의미를 가지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중세부터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의미의 시대가 쇠락하고 이제는 규모의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중세시대가 오면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그때부터는 대형 건물이 생깁니다. 그렇죠? 여러분들 유럽에 가보시면 전부 다 대형 예배당, 성당들이잖아요. 얼마나 압도적입니까? 그 건물들이, 거기에 있는 성화들, 그림들, 엄청난 것들 많잖아요. 대단한 것들 아닙니까? 의미는 사라지고 이제는 규모만 남은 시대가 됐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타락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시대를 중세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의미의 시대가 사라지고 규모의 시대가 된 것.
요즘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 것 같습니까? 요즘 우리 시대.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 기성세대가 볼 때는 참 모자란 것도 많고 그리고 이해 못할 부분도 많은데, 그들이 요즘 가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잘 보십시오. 전부 다 가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소비합니다. 그냥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이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전적인 투자를 합니다. 자기의 시간을 투자하든지, 이제는 학교를 가는데도 이전처럼 학벌을 보고 학교를 가지 않고, 직업을 선택하는데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직업 선택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전체를 다 겁니다.
교회도 이제는 가치의 시대로 다시 전환돼야 됩니다. 무엇이 가치입니까? 복음이 가치 아닙니까? 복음이 믿음의 성장이 가치가 되고, 형제들 간의 우애와 사랑이 가치가 되고, 그것을 칭찬하고 그것을 격려할 수 있는 것이 가치의 시대 아닙니까?
지금 우리 교회 보십시오. 시설이 많이 부족하잖아요. 이제 겨우 저기 비전센터 하나 지었지. 부족합니다. 항상 뭐가 부족해도 부족합니다. 좁고, 여름에는 또 그렇고, 겨울에도 그렇고, 하여튼 복잡하고, 예배 끝나고 나가려면 한 10분 걸리고, 다 부족합니다. 저것도 화면도 어둡고, 다 부족합니다. 불 꺼야 보이고.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가치를 두면...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가.
가치에 의미 부여를 하고 그 가치가 복음적이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고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한 것이고, 이 가치가 믿음의 어린 생명들을 길러내는 가치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것을 왜 못합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규모의 시대에서 새로운 가치의 시대로 전환해 가야 됩니다.
바울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너희들이 믿음이 자라고 있구나.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작년 결산 얼마 했다며, 헌금이 얼마 나왔다며, 두 배 성장했구나, 감사하다' 이런 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그것이 있으면 우리가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뭐 하고 하겠지만, 그런 거 없잖아요. 믿음이 성장하고, 형제 간에 사랑하고 우애하고, 그런 가치의 시대를 의미 있게 살아내야 그래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칭찬하시지 않겠습니까? 불편한 건 감수하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우리가 감수할 수 없습니다. 그건 참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가치와 믿음의 가치는 교회 공동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인내와 믿음
4-1. 인내의 말씀
4절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보십시오. 견디고 있는, 그랬습니다. 견뎠던이 아니고 잘 견딘이 아니고 '견디고 있는' 무슨 말입니까?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너희가 견디고 있는 뭐요?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은 자랑합니다. 이 교회를 뭘요? 박해와 환난 중에서 견디는 인내와 믿음을 자랑합니다.
인내와 믿음,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직까지 박해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자유무역지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인 유대인들이 일부러 소요사태를 일으켜서 문제를 만들어서 이 사람들을 내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그런 박해와 환난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데, 이것을 지금도 진행 중인데 이것을 인내하고 견디고 있습니다. 인내와 믿음으로.
지속되는 것을 여러분, 이 인내와 믿음이 언제까지 가야 됩니까? 끝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 견디는 것이 바울의 자랑입니다.
계시록 3장 1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해 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칭찬의 말씀인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규정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격이 뭡니까? 인내해야 얻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성경에서 때와 시를 명확하게 규정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오겠다고 했지 언제 오겠다 한 적이 없고요. 아브라함에게 아들 주겠다 했지 언제 주겠다 한 적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내입니다. 지키고 견디고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는데, 계시록 3장 12절을 보시면 이런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즉 인내하여 견디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여러분, 성전 기둥.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이 뭡니까? 야긴과 보아스. 하나님 성전의 두 기둥. 요즘은 공법이 좋아서 뭐 기둥 없이도 건물을 잘 짓지만, 기둥이 있어야 되잖아요.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성전 기둥. 하늘 지붕을 받치고 있는 성전 기둥.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성전 기둥.
그리고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의 말씀을 잘 지키고 견딘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 되게 해주겠다. 여러분, 이것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큰데, 우리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기둥 뿌리를 집에서 뽑아 와 가지고 교회에다가 헌금을 막 해야 하나님 성전의 기둥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에요. 인내의 말씀을 잘 지킨 자가, 잘 견디고 있는 자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를 보고 믿는 사람들,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견디거든요. '야, 저분도 견디는데, 저분도 오래 참는데, 저분도 저런 상황에서도 믿음생활하고, 저분도 저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믿음 흐트러지지 않고 사는데, 나도 한번 해봐야 되겠다.' 그분이 교회 기둥 아닙니까? 잘 먹고 잘 살 때 신앙생활 잘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도망가는 것, 누가 못 합니까? 인내를 해야 할 때 인내하는 자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이지, 인내하지 못할 때 인내하지 못하는 자가 그것이 무슨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인내의 말씀을 붙잡고 지키는 사람이 진짜 기둥입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그때 내가 하나님 성전에 기둥 될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납니다.
그런 말씀을 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이 자랑하는 건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뭡니까? 앞에 나왔던 믿음, 그냥 머물러 있는 믿음이 아니고요. 어떤 믿음이요? 자라는 믿음이요, 성장하는 믿음. 고난 가운데에서도, 고통 가운데에서도 믿음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은 계속 성장해야 됩니다. 지속적으로 자라야 됩니다. '야, 지금은 상황이 이러니까 이 정도만 해도 잘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좋으면 좋아서 성장하고, 환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이 있어서 그 안에서 또 성장하고 자라야 됩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됩니까?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 그는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됩니다.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나려면 멈춰서는 안 됩니다. 매일같이 매일같이 성장하고 매일같이 자라야지, 한 1년 쉬다가 또 자라고 자라고 하면 예수님은커녕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하겠습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자랑했습니다.
4-2. 고난의 의미
이제 바울이, 이제 교회 성도들이요, 그래도 좀 힘들 거 아니에요. "내가 이거 고난받는 거 너무 힘들다. 언제 끝나지? 이 고난이 언제 끝날까?"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난의 이유를.
5절 보시면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그다음이 중요하죠.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고난은 내 죄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받는 건 제가 구분해 드렸죠. 고생입니다. 그건 고난이 아니고, 내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거다.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 받는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빚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이렇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을, 제가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적어뒀는데요. 이 말씀이 고난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보시면 뒤쪽에 보시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고난을 줄 때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6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을 하심이라." 사랑하고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징계가 없고, 자녀가 아니면 채찍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8절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받는 이유를 10절에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징계를 하는 이유,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려고. 거룩이 뭡니까? 여러분, 구별되는 거 아닙니까? 구별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불순물을 빼기 위한 것입니다. 불순물을 다 제거해서 구별된 자로, 따로 이렇게 해도 괜찮을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에 그래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11절 마지막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를 맺습니다. 의의 열매, 평강의 열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새벽기도 시간에 살펴봤던 말씀, 시편 119편 70절, 71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거기는 고난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 그들은 고난이 없는 악인들이거든요. "마음은 살찌어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새벽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살 쪄서 기름덩이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 몸이 열심히 먹었는데 운동하지 않아서 기름이 흘러넘치는 비계 덩어리만 남은 살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얼마 살겠습니까? 여러 가지 합병증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난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우리에게 이 매끈한 몸을 만들어줍니다. 다윗이 고난당할 때 광야 이곳저곳 뛰어다녔잖아요. 그때 그의 영혼이 얼마나 군살 없이 탄력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사탄이 틈탈 구멍이 보이질 않습니다. 군살이 하나도 없으니까 영적으로. 그런데 그가 왕궁에 들어가서 고난이 없이 편안하게 계시니까, 그것이 살 쪄서 기름덩이가 돼서 그때 바로 시험이 찾아오고 연쇄적으로 죄를 지어버립니다.
여러분,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은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너희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받는 고난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해석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이 말씀을 꺼내 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지금 영적으로 살 빼고 있구나. 기름덩이 같은 내 마음을 지금 다이어트하고 있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하시면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5. 하나님의 공의
6절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즉 하나님이 결국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지금 괴롭혀서 환난을 주는 자들,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도 환난으로 갚으실 거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실 그날이 반드시 온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그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원수 갚으려고 마음 쓰지 마라. 너희들이 악한 자를 대하면 더 악해져야 되니까. 그러지 마라.
7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우리는 환난을 받았잖아요. 이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은 그 교회 성도들에게 안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뭡니까? 반드시 이 고난이 끝날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안식을 줄 테니 끝날 날이 온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불꽃이 뭡니까? 심판의 불 아닙니까? 심판하신다. 8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여러분, 이 지점을 좀 잘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왜 모를까요? 일단은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 하나님 잘 압니다. 성경 잘 압니다. 외우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거기에 잔뼈가 굵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자들, 예수님 시절에 종교 지도자들 아닙니까?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 그들은 예수님과 직접 논쟁했습니다. 자기 눈앞에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같이 논쟁하고 토론하고 계속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말씀을 모른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은 곧 말씀이신데, 예수 그리스도는 곧 말씀이신데,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수십 년 했는데 말씀을 모르니까 성물에다가 내가 헌물한 것에다가 이름 새기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수십 년 신앙생활 했는데도 교회에서 요만큼 하고 이만큼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을 모르니까.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말씀을 모르니까 엉뚱한 짓 하는 거 아닙니까?
말씀을 알아야 됩니다. 신앙생활의 연수를 자랑해야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깊이와 하나님 말씀의 넓이와 하나님 말씀의 의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능력을 경험하고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모르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형벌을 내리신다고 했잖아요. 그것을 모르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 그다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모르니까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거예요.
어디에 복종합니까? 세상의 논리에 복종합니다. 의미에 복종하지 않고 규모에 복종합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거기에 무릎 꿇고 거기에 복종하지, 가치와 의미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건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수십 년 하고, 그런데 돌아봐야 됩니다. 나는 말씀을 얼마나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고 있는가.
9절 보십시오. 이런 자들은, 이런 자들 앞에 말을 다 봤죠.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그랬습니다. 두 가지를 떠납니다. 뭘 떠나고요? 주의 얼굴을 떠납니다. 여러분, 이 주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 다윗의 시그니처입니다.
지금 다윗의 시그니처를 바울이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시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이 진짜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 제가 자주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의 얼굴과 함께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뭐가 있습니까? 능력이 있잖아요. 늘 이야기했던 것, 하나님의 권능의 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 하나님의 손에는 항상 능력과 권세와 부귀와 영화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집에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만 보는 것처럼, 세배하고 나서 할아버지 손만 이렇게 보는 것처럼, 어린 믿음은 하나님의 손만 봅니다.
그런데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의 손에 그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의 얼굴만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존재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습니다. 부귀영화 권세 아무것도 안 줘도 좋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영광, 얼굴, 존재 자체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 아닙니까?
그런데 말씀을 수십 년간 배워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얼굴을 부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 따위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이 뭡니까? 지금 그 말입니다.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하나님의 힘, 주님의 힘의 영광이 뭡니까? 주님의 힘은 어디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역설인데요.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원수를 죽이고 원수를 이기고 불로 다 태워버리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자리는 십자가인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렸습니다. 자기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은,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얼굴 떠나죠. 십자가에 죽는 것 싫어하죠. 그러니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렇게 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건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들으라고. 주의 얼굴 사모하셔야 됩니다. 자꾸 하나님 손에 있는 복, 복, 복, 그것만 자꾸 따지지 말고, 그러면 점쟁이한테 가는 것이 속 편해요, 차라리. 그런데 주의 얼굴의 영광을 보셔야 되고, 그의 힘의, 십자가의 능력을 보셔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고난당하고 힘겨워하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바울이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너희는 지금 잘 견디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있다. 너희는 지금 그 약함의 힘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그것을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편, 37편 말씀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다음,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재림,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뜻이죠.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여김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건 그냥 문자 그대로입니다.
6. 영광의 삶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제가 그랬죠. 바울은 정말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했다고. 마지막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11절, 1장 마지막에 기도했고요. 전서에서도 바울의 기도가 있고,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가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짧게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기를. 하나님이 너희를 불렀는데 후회하지 않기를. 이런 뜻입니다. '쟤들 괜히 불렀어. 부르기는 했는데 처치곤란이야.' 이런 느낌 가지지 않게.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게. 항상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기도,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누구의 능력으로요? 내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너희가 선한 마음을 품으면 그것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12절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말이 중요해요.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어디에서요? 너희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즉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건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우리를 통해서라고요. 이것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과 10절 말씀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건 기도의 부름이고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누구를 통해서요? 나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거예요.
그다음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누구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어디에? 우리 가정에, 이 나라에, 저 전쟁통이 있는 저 민족들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누구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누구를 통해서요? 나를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받는 건 나를 통해서예요. 결론은 내가 잘 살아야 되는 거예요. 잘 산다는 말이 돈 많이 벌고 잘 살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잘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잘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대로, 제대로 살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결국 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다음 보십시오.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영광받으면 나도 영광받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주일날 요셉 공부하고 있는데, 요셉을 보고 바로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았죠. 하나님이 영광받으니까 요셉이 그 영광 안에 거하는 거예요. 왕의 인장 반지 끼고, 세마포 옷 입고, 금사슬 목에 걸고, 버금 수레 타고 다니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가 영광받으려고 자꾸 설치면 그러면 있던 영광도 다 빼앗깁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 써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 다하고 내 이름을 지워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그 영광 안에 나도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예요. 금송아지 우상 치워버리고 내 이름 지우기 훈련 열심히 하시면 하나님이 우리 이름 기억합니다. 영광 가운데 우리를 거하게 하십니다. 그런 귀한 복음의 의미가 우리 삶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 전서를 쓰시고 후서를 쓰면서 다시 한번 중요한 것을 간추려주는 사도 바울의 친절함과 인내와 교회를 위한 사랑을 봅니다. 주여, 교회의 위치를 기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지혜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능력 주시고 우리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치워버릴 수 있는 은혜와 믿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을 잘 견디게 하옵시고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련들과 어려운 점들을 견디고 이겨내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 나를 통하여 영광받으신다고 하셨사오니 우리가 먼저 그 영광 위하여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도 그 영광으로 초대한다고 하셨사오니 그 영광 안에 거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