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 전체녹취

데살로니가전후서 특강 8강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살후 3장)

데살로니가후서 3장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공부해 왔는데, 오늘이 후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5장까지 있고 후서가 3장까지 있는데,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후서는 전서의 요약판입니다. 이렇게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후서는 1장, 2장, 3장의 주제가 분명합니다. 1장은 고난에 대해서, 2장은 종말에 대해서, 오늘 3장은 서로를 위한 기도 제목을 나누고 교회 안에 덕을 세우는 일,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데살로니가후서 본문은 기도에 대한 아주 실제적인 교훈을 알려주고 있고, 교회 안 성도들 간의 깊은 영적 교제 그리고 교회 안의 질서를 세우는 문제를 함께 나눕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끝으로 형제들아"라고 했습니다. '끝으로'라는 말은 데살로니가서를 끝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1. 기도의 동역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부탁이 기도 부탁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고, '우리를 위하여'에서 '우리'는 교회를 함께 개척했던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곧 바울과 복음 전파의 동역자 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오해를 가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오해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시느냐는 질문이 첫 번째이고, 또 하나님께서 어차피 이루어 주실 것은 다 이루어 주시고 안 될 것은 안 되는데, 어차피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알아서 될 것이고 안 될 것은 아예 안 될 것인데 왜 기도하라고 하시느냐는 질문 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과 3절을 보시겠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여기서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라고 했고, 또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기도 하고 그것을 만들어서 성취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면,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만들어 성취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더러 부르짖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일을 성취하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큰 일을 이끌어 가시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한다고 하면 내가 몸을 들여서 일을 하고 물질을 들여서 헌금을 하는 일, 그것만을 동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동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동역은 기도가 정말 중요하고 큰 하나님과의 동역입니다. 그래서 일을 이루시고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동역하는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방식이 기도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우리는 기도할 이유를 거기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줍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실 것인데 우리가 기도를 왜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아주 못된 생각입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그런 나쁜 생각들에 빠져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동역의 기쁨을 기도를 통해서 느껴가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이 상황과 사건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그다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빠져야 할지, 내가 들어가야 할지, 내가 조금 더 노력해야 할지, 잠잠해야 할지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역의 첫 시작은 기도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어야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지,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과 어떻게 일을 합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같이 일하자는 뜻입니다. 같이 일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선교 사역을 열심히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 것입니다. 동역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일이 바울의 일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일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 바울은 기도하고 바울은 전진하고 바울은 수고하고 그렇게 일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해서 동참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동참에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동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1. 말씀 사역을 위한 기도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고"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기를, 누구를 통해서 퍼져나갑니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 사역이 퍼져나가기를 기도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탁하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말씀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이 너희에게처럼 널리널리 멀리멀리 퍼져나가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2. 악에서 건짐을 위한 기도

두 번째로 2절에 보니까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별별 사람 다 만납니다. 바울이 복음 전파 사역을 하다 보니까 별 희한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런 사람들, 악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저 같은 목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때 '하나님, 저 목사님 가정에 물질이 끊이지 않게 해주시고 먹고사는 것 걱정 없게 해주시고' 그런 것은 기도 안 하셔도 됩니다.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말씀 사역이 융성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 주시고, 동시에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사탄은 사역하는 사역자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하나를 무너뜨리는데 담임목사 하나가 무너지면 제일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큰 영향력을 가진 대형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시험에 들면 한국 교회 전체가 휘청거립니다. 그래서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바울이 그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기도 부탁을 할 때 먹고사는 문제, 물질의 문제, 이런 문제는 그다음 문제이고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1-3.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

그런데 뒤에 한 가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절 끝에 보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악한 사람들, 별난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주 특이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심히 전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아,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전하는 사람은 전하는 사역만 하면 됩니다. 말씀 전하는 사람은 말씀 전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거두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요? 하나님의 때에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하는 것, 그리고 말씀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것, 그것만 우리의 몫이지 그 열매를 얻고 그 열매를 누리는 것, 거기까지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키려고 전도자로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1절을 보니까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한 자가 어떤 사람일까요?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다' 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이라고 했는데, '이에 합당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에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박대합니다. 오히려 박해하고 쫓아냅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빈 평안이 누구에게 돌아옵니까? 너희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가서 결과에 매이지 말고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일만 열심히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낙심할 필요도 없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그 일을 수고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진리인 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전도하셔도 안 받아들인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전도해도 안 되는데 우리가 한다고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도에 대해서 자꾸 낙망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수고하고 땀 흘린 다음에 거기에 대한 열매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두실 것이지 내가 거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35편 11절에서 13절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다윗 주변에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13절에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기도가 다윗의 품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끝까지 악하니까, 그들이 끝까지 다윗의 기도를 받지 않으니까, 다윗의 호의와 선의를 받지 않으니까 그 기도가 빙빙 돌고 돌아서 누구에게 돌아옵니까? 다윗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므로 기도는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헛된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기도를 받을 만한 자격이 되고 거기에 합당하면 그분이 받을 것입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기도를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내 기도가 헛됐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얼마나 했는데 너는 아직까지 그 모양이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안 받으면 내 것이 되는 것이고, 받으면 그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왜 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환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고난을 겪고 있으니까 이것을 잘 견디라고, 이것을 위해서 견디고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보라고 이런 말씀을 쭉 나열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14절을 보니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미련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절대로 어떤 미련도 갖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도하는 일이 좀 편합니다. 마음이 크게 부담도 별로 없고 편합니다.

2. 하나님의 인도하심

두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기를 간구합니까? 이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3절에 "주는 미쁘사"라고 했는데,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실하셔서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굳건하다'는 것은 어디 위에 서야 굳건해집니까? 말씀 위에서입니다. 너희들이 말씀 위에 서서 굳건하고, 그리고 악한 자에게서 너희를 지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니까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2-1.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5절에 진정으로 바울이 하고 싶은 기도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인도하다'의 헬라어가 '카튜티노(κατευθύνω)'인데, '바르게 지도하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 주님께서 너희 마음을 바르게 지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 주님께서 너희 마음을 바르게 지도하사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곧 여러분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 예수님께 잘 지도를 받고 있는가?' 이것을 분별하실 때 두 가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와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내가 나에게 와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제한 있는 사랑입니까? 제한 없는 사랑입니까? 제한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악한 자를 일곱 번 용서하면 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지라. 그것도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만 용서하면 정말 자기는 최대한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이 '오' 자를 길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도하시면, 우리를 바르게 지도하시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사랑은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여기까지'의 사랑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까요? 처음에는 한 번도 사랑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내가 그리스도의 지도를 잘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것이 좀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폭이 좀 넓어지고 깊이가 좀 깊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나에게 손해가 되고 화가 나도 바르르 떨고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격앙되고, 내가 한 대 맞으면 열 대 때려야 직성이 풀리다가 나중에는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참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에게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의 지도를 잘 받고 있구나. 좋은 학생이구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세월이 흘러가는데 참을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꾸 옛날에는 그래도 좀 잘 견디고 참았는데,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조그만한 것만 있으면 바르르 화를 내고 쏘아붙이고, 그것을 갱년기라고 몰아붙일 것이 아닙니다. 갱년기 핑계 댈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야 사춘기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사랑의 힘은 갱년기를 이깁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인도하시면,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면 갱년기 핑계대면서 자꾸 빠져나가려고 해도 그래도 우리는 다 압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거꾸로 지도받고 계시는구나.' 그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를 안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갱년기를 이겨야 합니다. 그까짓 것이 무엇이라고요?

그리고 나이 들어가서 조금 더 연세가 들고 나이가 들어가도 폭이 좁아지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지도를 받는 것이 나 칠십까지만 받고 칠십하나부터 나는 끝, 이것이 아닙니다. 학원 끊듯이 딱 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날아가는 그날까지 하나님 사랑에 대한 폭은 넓어져야 합니다. 계속 지도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직전이 제일 폭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얼마나 폭이 좁고 속이 좁은 사람이었습니까? 마가 요한을 용납 못 했습니다. 단칼에 끊어냈습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부탁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마가 요한을 데려오라 하지 않습니까?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 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폭이 넓어진 것입니다. 지도를 잘 받은 것입니다. 갱년기도 이기시고, 노년에 그런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어지는 것도 지도 잘 받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폭이 계속 넓어지셔야 합니다.

2-2. 그리스도의 인내

또 주께서 우리 마음을 잘 이끌어 가시면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인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내입니다. 여기에 무게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참는데 죽음까지 참는 것입니다. 굴욕을 당하는데 옷 벗김을 당하는 데까지 굴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 때문에 내가 굴욕을 당한다면, 그것을 참아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그것을 참아서 그리스도가 높이 세워질 수 있다면 그것을 못 참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화낼 것을 참아서, 그것을 인내해서 십자가가 나타난다면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하는 것이 이 두 가지로 판가름납니다. 사랑은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지고, 인내는 갈수록 더해지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3. 하나님을 알고 섬김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역대상 28장 9절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두 번째는 '섬길지어다'입니다.

제가 이것을 왜 여기에 적어두었느냐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을 5절에 적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사랑하니까, 다윗이 솔로몬을 사랑하니까 그 사랑하는 자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여기에 적어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섬기면 자기 멋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 하나님이 행복해하시는 것 그런 것을 모르고 섬기면 자기 기준대로 자기 멋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론의 첫째 아들, 둘째 아들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 아십니다. 제단에서 불이 나와 그들이 타 죽었습니다. 아주 비참하게 심판당해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들은 제사장 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습니다. 번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서 성소의 불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번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불씨를 바깥에 있는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항상 가지고 와서 그 불씨를 성전 안에서 성소에서 불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귀찮고, 두 번째는 번제단은 번제를 드리는 제단입니다. 번제가 무엇입니까? 짐승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 아닙니까? 짐승이 타면 기름이 떨어집니다. 숯 위로 말입니다. 그러면 다 타고 나면 그 숯에 불이 남아 있는데 기름 범벅입니다. 우리가 삼겹살 좀 구워 먹어도 불판 밑에 기름이 엉망인데,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다 태우고 나면 그 기름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거기서 불씨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 자기 딴에는 이것이 좋은 불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데서 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깨끗한 불을 만들어서 피워서 성소에다가 불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그 불이 나와서 자기를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되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격하신지 아십니까? 모세가 딱 한 번 딱 한 번 하나님께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못 갑니다. "네가 백성들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한 고로 너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맨날 원망하고 맨날 물 달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씩 불뱀을 풀어서 겁은 주시지만, 그런데 그것도 놋뱀을 만들어서 보면 낫게 해주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한 번 잘못하면 불이 나와서 죽이기도 하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목사들, 앞에 계신 장로님들 두려워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모르고 자기 멋대로 섬기니까 자기 멋대로 섬기고 자기 기준대로 섬기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섬기니까 교회 질서가 무너지고 자기 인생은 자기 인생대로 무너지고 꼬이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알고 좀 섬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아주 처절한 경험에서 나오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 약속을 지킵니까? 안 지킵니다.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상숭배 싫어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호세아 6장 3절에 호세아 선지자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알자. 어떻게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최선을 다해서 알자.' 알려면 성경 공부해야 되고, 이 자리에 나와야 되고, 읽어야 되고, 암송도 해야 되고, 진짜 이 말씀이 그러한지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봐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섬겨야 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4. 교회의 질서

그다음 6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표현들을 잘 쓰지를 않습니다. '권하노니' 뭐 이런 말을 쓰지, '명하노니' 이런 말씀을 잘 쓰지 않습니다. '명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타협하지 않겠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라 하는 말입니다.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를 옮기라는 말입니까? 그 형제들을 두고 그냥 다 떠나버리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을 고립시키라는 뜻입니다. 그 형제들을 오히려 따로 묶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 '게으르게 행하고'라고 했습니다. 게으르게 행한다는 말은 몸이 게으르다는 말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실제로는 말씀에 게으른 자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행하고 지키지 않고 알고서도 자기 멋대로 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또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이라고 했는데, 바울이 가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은 바울의 전통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굳건하게 서서 어디 위에 섭니까? 말씀 위에 섭니다. 전통은 어디 위에 세워져야 합니까?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라 하는 그 전통은 말씀 위에 세워진 전통을 의미합니다. 곧 말씀 위에 세워진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을 고립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되게 강한 말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바울이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나, 교회 안에서 사람을 고립시키라니, 형제를 언제는 사랑하라 해 놓고 고립시키라니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이것이 되게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면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교회 공동체를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 위에 굳게 선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교회 근간과 질서를 흔드는 것입니다.

4-1. 권징의 의미

그것이 지금 우리 장로교 전통에는 어떻게 넘어와 있느냐면, 치리와 권징으로 넘어와 있습니다. 치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당회는 치리회입니다. 당회는 교회 장로님, 목사님들로 구성된 당회인데, 교회 교인들이 말씀에 게으르게 행하고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치리와 권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하면서 제가 부목사 시절부터, 또 전도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치리하는 것 한 건도 못 봤습니다. 한 건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2024년 3월에 새문안교회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문안교회 아시지요?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세웠던 새문안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우리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전통이 제일 큰 교회이고 오래된 교회이고 그래서 그 교회를 우리 한국교회 어머니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당회록이 1910년부터 1964년, 67년까지의 당회록이 다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그것을 쉬운 한글로 만들어서 그 교회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이제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고 그 당시에 교회와 사회 전통을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거기 내용에 보면 치리의 내용이 아주 자주 나오는데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1910년도 일인데 아무개 집사가 첩을 두었습니다. 축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을 당회에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출석을 안 했습니다. 당회에 말입니다. 그래서 출교했다고 했습니다. 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무개 집사님, 여자 집사님이 며느리를 이유 없이 내쫓았습니다. 다른 며느리를 들였습니다. 그래서 또 교회에서 출교했습니다. 또 아무개 집사님이 고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또 출교당했습니다. 또 1964년도 당회록을 보면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술, 담배를 했습니다. 화투를 쳤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수찬정지를 당했습니다. 수찬정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찬 금지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술과 담배를 먹었으니 예수의 피와 예수의 살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대 자격 당연히 박탈입니다.

그리고 또 1960년대 당회록을 보면 어떤 한 성도가 자기 집에 술집이 들어오도록 세를 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기도 또 권징당했습니다. 불러서 이야기했는데 안 내보내니까 말입니다.

요즘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지나가다가 어디 슈퍼 앞에서 소주 한잔 드시고 계신 우리 아무개 집사님을 뵙고 당회에서 제가 이야기해서 이제 수찬정지를 한다고 하면 "교회가 여기밖에 없느냐, 사랑이 있니 없니" 그러겠습니다.

교회가 이제 이런 기능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기능이 왜 사라졌을까요? 과거에는 교인들이 "왜 사생활을 침범하느냐? 내가 첩을 두건 내가 며느리를 갈아치우건 내가 우리 집에 술집을 세를 주건 모여서 술을 마시건 네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방을 붙입니다. 그런 권징과 치리를 하면 교회 주보에 나옵니다. 당회록에 쓰고 교회 주보에 나오고 방을 붙이고 "이 사람 출교당했으니 우리 교회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들어오면 안 됩니다" 하고 앞에서 막아섰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은 바보라서 당하고 있었습니까?

요즘은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교회 안에 그런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왜 못합니까? 요즘은 위에서부터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목사님, 장로님들이 말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을 맑게 만들지, 윗물이 엉망인데 아랫물을 탓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말도 바울이 당당하니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게으르게 행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에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선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따로 두라, 그들을 치리하고 그들을 권징하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곳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는 것, 그 사랑 안에 징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공의가 들어 있고 심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중직들이, 목회자와 장로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첫머리에 부탁했습니다. 악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가 떳떳해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가 진짜 교회 공동체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권징을 받아도 기쁘게 받고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다시는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이 교회에서 내가 돌이키고 다시 회복되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고 성도들 앞에 미안함을 고백하겠다"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 아닙니까?

훤히 알면서도 말도 못하고, '저것이 사생활인데, 작년에 서리 집사님이었는데 이번에 집사님 빼버리면 기분 나빠서 교회 옮길까 봐 빼지도 못하고, 명색이 안수집사님인데 저러고 다니는데 불러서 한번 야단도 못 치고'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동호회 집단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강력하게 이야기했습니다.

4-2. 본을 보이는 리더십

그다음 7절에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본받아야 할지 너희 성도들이 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입니다.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횡단보도 잘 건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행했다는 뜻입니다. 질서 있게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리더들이 말입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목회자라고 해서 교인 식당에 가서 먹고 그냥 가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아주 담대하게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생업이 천막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생업이 같았습니다. 같은 일을 했습니다. 직접 돈을 벌면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헌금을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쓴 적이 없습니다.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 세워지는 교회였기 때문에, 개척한 교회였기 때문에 그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잘 전하는 도구로 자기가 쓰임받기 위해서 스스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4절에서 7절을 보면 바울이 비슷한 이야기를 또 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18절을 보십시오. "내 상이 무엇이냐?" 바울의 상, 그가 기대하는 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가 권리를 포기한 유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에 그는 자기가 쓸 권리를 다 쓰지 않습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리더들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 중직들이, 리더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 불편합니다. 권리를 포기하면 또 어떤 생각이 들까요? 일단 첫째, 불편합니다. 권리를 포기하면 두 번째 손해 의식이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본전 생각이 납니다. 그 권리 포기에 시간이 좀 오래 가다 보면 사람들이 당연히 여깁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분 원래 저래' 하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이, 어머니들이 옛날에 없이 살 때 고등어 뼈를 발라서 어머니들은 그 뼈에 붙어 있는 살 이렇게 드시고 아이들한테 살점 집어서 주셨습니다. 고등어 머리만 드시고 "나는 원래 머리를 좋아한단다. 어두육미라고 했단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가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는 줄 알고, 권리를 포기하면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왜 안 주냐'고 떼쓰고, 실컷 이때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더니 왜 계속해서 그것 안 해주냐고 떼쓰고, 세상에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에 한둘씩 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면 본전 생각이 납니다. 손해 의식이 들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위한 권리 포기는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한 것인데, 사실은 바울이 복음을 위한 권리 포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생 동안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장로님들, 어르신들 오랫동안 교회 어려울 때 봉사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한 권리를 내가 포기하는 순간,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하늘에서 큰 상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도 평생 수고합니다. 평생 수고하고 평생 애쓰고, 그런데 마지막에 내가 마땅히 누릴 권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포기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성도들 모두가 다 거기에 전염됩니다. 선하게 전염됩니다. 두 번째는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이 땅에서의 상 해봐야 기껏해야 그 돈 몇 푼 아닙니까? 하늘의 상은 우리가 감히 비교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결국 권리 포기는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포기하게 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대한 응당한 보답을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5. 노동의 축복

그다음 임박한 종말 사상을 오해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교훈합니까? 10절에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유명한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거든 굶어라" 하는데 여기에 있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이 성도들이 왜 일하기 싫어했겠습니까? 임박한 종말 사상 때문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 문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승천한 모습 그대로 오시겠다 하니까 당장 내일, 당장 모레, 당장 한 달 안에 오실 것 같으니까 일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냥 놀고 먹기만 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말이 무엇이냐면 옛날 교회는 초대 교회는 이 당시 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처럼 동그란 전병 그것 하나 주는 것이 성찬이 아니고 식사였습니다. 고린도전서 공부할 때도 우리가 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다 먹어버리고 뒤에 온 사람이 먹을 것이 없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상처받았다고 말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비교적 팔자 좋은 사람들, 일 안 하는 사람들이 일찍 와서 다 먹어치워버리고, 실컷 일하고 배고파서 온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고, 그것이 성찬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일은 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일은 안 하면서 맨날 성찬의 자리에는 제일 먼저 앉아와서 밥은 다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으니까 바울이 울화가 치밀어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마라"고 한 것입니다. 손으로 수고하고 몸으로 고생하고 그리고 나서 성찬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5-1. 에덴의 노동

여기서 우리가 노동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은 은혜입니까?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입니까? 헷갈립니다. 이 시대는 일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인 시대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것이 참 또 고역 아닙니까? 사실 일터에서 일하는 것이, 할 수만 있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축복이라면 왜 그런 마음이 매번 들까요?

에덴동산에서 노동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창세기 2장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아담입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에덴을 경작하라고 했습니다.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죄가 나오고 타락이 나오는데, 그러면 창세기 2장은 에덴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면 에덴에 노동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경작이 있습니다.

에덴에 노동이 있으면 거기가 파라다이스입니까? 아닙니까? 지금까지 에덴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놀고 먹는 곳입니까? 놀고 먹으면 배 터져 죽습니다. 성인병 걸려서 죽습니다. 노동이 있었습니다. 에덴에 말입니다. '그런 에덴이면 난 별로 안 좋아'라고 하지 마십시오. 에덴에 노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의 노동에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수고한 만큼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노동한 만큼 정직한 결과를 내가 얻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에덴의 노동의 특징입니다.

5-2. 회복된 노동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 노동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창세기 3장 17절에서 19절을 보십시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땅이 무엇을 냅니까? 가시덤불과 엉겅퀴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곧 죄짓고 타락한 이후의 노동이 우리에게 수고가 되고 고역이 된 이유가 가시덤불과 엉겅퀴 때문입니다. 죄 지은 우리 인간에게 수고하고 열심히 일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으니까 백을 수고했는데 이십밖에 못 얻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땀 흘리고 열심히 수고했는데 거기에서 얻어가는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 문제가 해결된 우리 인간,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것이 사라진 우리 인간에게 다시 노동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시편 128편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 말입니다. 죄 지은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못하고 그의 길을 못 걷습니다. 그런데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 에덴의 복이 그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또 당첨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덴에서도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미끼요 저주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 인생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제거되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것이 사라지고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고 내가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린 대로 먹습니다. 조금 수고했으면 조금 먹고 많이 수고했으면 그만큼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노동에 관해서 다시 거듭난 사람에게 노동은 무엇입니까?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노동은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왜냐하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북한에 가시는 분들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무리 씨를 뿌리고 아무리 땅을 파도 거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거기에 수많은 병충해들이 땅을 다 뒤덮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충해에 강하고 또 비교적 재배하기 쉬운 작물들을 가져갑니다. 옥수수 같은 것 말입니다. 저 북한 땅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거기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에게 내리시는 형벌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11절에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일을 안 하면 일을 벌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자기 맡은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일을 만드는 것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몸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입으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입 닥치고 일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좀 예쁘게 표현해서 그렇지 '입 닥치고 일하라. 제발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실컷 일하고 입으로 다 말아먹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컷 일했으면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이분이 수고한 것을 다 압니다. 전 교인이 다 압니다. 모를 것 같습니까? 다 압니다.

제가 옛날에 이전 교회에 있을 때 겨울에 눈이 오면 마당이 되게 넓었습니다. 그런데 마당을 쓸어야 합니다. 누가 씁니까? 평일에 목사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마당 쓸고 있는데 아무도 안 지나가면 좀 서운하더군요. 좀 누가 좀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그렇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면 누가 좀 알아주고 봐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내가 입으로 이야기 안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일하라고 했습니다.

13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 뜻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6. 평강의 근원

16절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교회가 평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핍박하는 사람, 고난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면 평강의 주체가 누구라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상황은 평강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계속 번잡합니다. 그리고 계속 핍박이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적 평강은 누구로부터 옵니까?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조건이 우리에게 평강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평강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평강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라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이렇게 이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마쳤습니다.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주고 싶었던 말씀을 8장으로 전서, 후서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심심하실 때마다 꺼내놓고 다시 한번 보시고,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고난받는 우리에게, 또 신앙생활을 하는 기준을 잡아야 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유용합니다. 잘 읽어보시고 이대로 행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 되어 주시고 우리 인생을 선한 손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잘 깨닫고 기억하도록 도우시고,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능력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셨던 말씀이 오늘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게 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며 그 평강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 하나님 손 안에 맡겨드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언제나 주의 뜻대로 행하며 살게 하시고, 그 뜻이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 우리 인생에 또 교회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