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1 - 일상의 거룩, 성생활 (레 18, 20장)
오늘은 레위기 성경공부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6장까지는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실제적인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의 백성들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바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공부했습니다. 17장부터는 성도의 삶에 대한 말씀인데, 그 첫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음식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음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 음식과 성에 대한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고유한 욕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말 속에는 욕망과 자유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본능이고 욕구이며 자유이기 때문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이건 내가 알아서 할 부분이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든지, 내가 어디 가서 어떤 음식으로 호구지책을 삼든지 너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마라. 이건 내 자유의 영역이다." 성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은밀한 부분을 누구도 건드리지 말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관여하지 못한다는 논리로 간통죄를 폐지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마치 선진화된 법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출발합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올 세상은 더욱 그렇겠지만,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공적인 영역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절대로 통제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법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말씀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다 통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울타리를 주심으로써, 이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고 비로소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시면서 금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도 있지만, 자유의지의 한계를 함께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자유의지가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까지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라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울타리입니다. 이 안에서의 성이 아름다운 것이지,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의 성은 어떻게 됩니까? 파괴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파괴하고, 공동체도 파괴하고, 사회도 파괴하고, 자신의 인격도 파괴하고, 타인의 삶도 파괴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레위기 전체는 예배를 다루고 있는데, 앞부분의 예배는 눈에 보이는 형식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고, 17장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삶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삶의 예배가 훨씬 더 복잡합니다. 훨씬 더 은밀하고, 사람들은 삶의 예배를 지켜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면 됩니다. 짐승을 잡으면 되고, 곡식을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면 됩니다. 어깨가 빠지고 팔이 빠지고 힘이 들어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삶의 예배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풍속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삶으로 이어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고, 이 자유야말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핵심으로 기억하고 계시면 됩니다.
1. 성생활의 총론
레위기 18장 3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따르다', '행하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따르지 말고,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절에는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르지 말고, 행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또한 따르며 행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동사가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는 하지 말고, 하나는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따르라고 하셨습니까? 법도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법도와 규례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성생활조차도 그러합니다.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니 아무도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무도 이 사적인 영역 안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라도 여기까지는 간섭하지 마십시오. 이건 나의 은밀한 영역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이미 규례와 법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주 못된 본성이 있어서, '하지 마라' 하면 더 하고 싶어합니다. 지금 여기 금지명령이 있습니다. 금지명령 앞에서 인간의 못된 본성은 그 울타리 밖으로 자꾸 뛰어넘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지켜 행하면 이 안에서 행복하고, 이 안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봐야 합니다.
1-1. 풍속의 의미
다시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풍속'을 히브리어로 마아세(מַעֲשֶׂה)라고 합니다. 마아세가 무슨 뜻입니까? 유행, 세계관입니다. 왜 유행이 세계관이 되느냐 하면, 애굽 사람들이 행하던 풍속이 있습니다. 풍속에는 유행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유행을 따라서 행하다 보면, 그 유행은 그 시대 사람들의 하나의 관점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애굽 사람들의 세계관, 즉 풍속을 따라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세계관과 풍속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음란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계명과 레위기는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서 시내산에 일단 데려다 놓고,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혹은 "이렇게 살아라" 하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간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냥 마구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생활에도 도덕과 윤리와 하나님의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1-2. 이 시대의 풍속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풍속은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마아세, 이 시대의 세계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 따라가고 있는 세계관 말입니다. 과거 20년 전, 30년 전에는 유럽에서만 동성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10년 전에는 미국에서만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이 나라에 광풍처럼 몰아닥치는 것이 동성애 문제입니다. 이제 이것을 법안으로 처리하는 데까지 우리 코앞에 와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우리 코앞에 와 있습니다. 동성애라는 것이 이 시대의 풍속이 되고, 유행이 되고, 세계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의 핵심은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성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성 정체성을 태어난 이후에 자아가 성장해 가면서 찾아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더 있으면 남자가 내 며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내 사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성경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다음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고 여성이었지, 성이 유보된 상태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성인 젠더를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학창시절을 거치고 과도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성을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 확정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이 시대가 자유라는 개념으로 그냥 풀어놓고 있습니다. 마치 동성애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유로 방목하는 것이 이 시대에 깨어있는 진보 지식인인 것처럼 여깁니다.
정치인들은 표가 아쉽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면 "차별금지법에 독소 조항이 있으니 이건 조금 더 논의해 봐야 합니다"라고 하고, 진보 인사들을 만나면,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건 당연히 해야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오늘 이 시대 성도들이, 예배당에 젊은이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젊은이들이 오지 않을까 봐, 그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그래, 너희들 성 확정성이 생길 때까지 유보해라"라고 강단에서 말해야 옳겠습니까? 틀린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시대의 풍속, 마아세를 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세계관과 이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따르라고 하신 것은 나의 규례와 나의 법도를 따르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규례는 성경에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그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논쟁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계속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독도가 우리 땅인데 바다 건너편 나라에서 이것을 계속 들쑤시고 문제를 일으켜서, 마치 독도가 분쟁 지역인 것처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시대 사탄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안에 명확하게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1-3. 과거와 미래의 풍속
다시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에서 '거주하던'은 어떤 의미입니까? 과거의 의미입니다.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출애굽했습니다. 지금 출애굽했는데 그 과거에 애굽 땅에 살던 그 지역의 마아세를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할"은 미래적입니다.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도 마아세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마아세는 어떨까요? 거기는 더합니다. 뒤에 가면 나옵니다.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풍속도 있고, 거기에도 동성애가 있고, 거기에도 신전 창기들이 있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출애굽한 그 땅도 인간의 욕망대로 사는 땅이고, 나아갈 땅도 인간의 욕망대로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 시대가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양산 땅도 그렇고, 부산도 그렇고, 서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전 세계에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를 내가 끼고 있으면, 우리 집에서 내가 가르치고 내 품에 안고 있으면 이 세상의 풍속과 풍조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살던 애굽 땅도 세상의 풍속이 있고,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가나안 땅에도 역시 그들의 풍속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가르쳐야 하고, 그것으로 우리가 먼저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총론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1-4. 예수님의 기도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에 대해 예수님도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민하시며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17절에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가십니다. 조금 있으면 십자가 지시고 승천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못 데려갑니다. 여기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16절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 사는데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살고 가나안 땅에 사는데 그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습니까? 17절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 사는데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룩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구별입니다. 따로 떼어서 구별하는 것입니다. 구별하면 그 구별된 사람들을 두르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그 울타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서 말씀의 테두리로 견고하게 둘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진으로 아주 견고하게 둘러싸여야, 어디를 가건, 어디에 살건, 미국에 살건, 유럽에 살건, 대한민국에 살건, 아무리 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아도 우리는 거기에 영향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제자들을 남겨 놓으시면서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내가 데려갈 수 없으니 이 땅에 살면서 그들이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그저 교회에 나와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견고한 진으로 둘러 감싸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자기를 견고히 지키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치고,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에게도 계속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그 아이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전승입니다.
1-5. 생사의 문제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지금 이 성생활의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냥 즐기고 혹은 즐기지 않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죽고 사는 문제로 보셨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되는 문제이지, 즐기고 즐기지 않는 쾌락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늘 이 시대의 영적 흐름을 가늠하는 아주 심각한 도전입니다. 특히 동성애 문제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생활 금지 규정의 총론인데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총론이 전부입니다. 이 총론을 잘 기억하시고, 이 테두리 안에서 그다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2. 금지된 관계
2-1. 근친 관계 금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금지한 관계가 무엇입니까? 18장 6절을 보시면,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근친과의 성관계를 금지하셨습니다.
살붙이 사이의 성관계를 금지한 구체적인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18장과 20장의 내용을 보면, 그중에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7절에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는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말이 아닙니까? 어머니나 아버지의 아내나 같은 것 같은데, 미묘하게 다릅니다. 어머니는 나의 친어머니이고, 아버지의 아내는 그 당시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아버지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아내를 칭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갖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것을 읽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읽으면서도 '왜 이런 말씀까지 적어뒀을까? 너무 민망하다'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율법과 하나님 말씀이라는 테두리 안을 벗어나 버리면, 폭주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다 태우듯이, 인간의 성에 대한 불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민망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적어두는 것입니다. "이건 나의 욕망입니다. 이건 나의 사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입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십시오"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2-2. 살붙이 외 금지된 관계
레위기 18장 19절을 보면, "너는 여인이 월경으로 불결한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결하다'라는 말은, 제가 지난번에 설명드렸듯이 부정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정은 정하고 부정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예배드리러 나오기에 부적합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생리 중에 있는 여성은 불편한데, 그런데 소제를 드리라고 전을 부치고 곡식을 빻고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성을 보호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출산하면 40일, 딸을 출산하면 80일 동안 부정하다는 표현을 쓴 것도, 성전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휴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리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여성을 불결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성의 착취 대상이 되는 여성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규정과 율법이 없으면, 욕망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남자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겠습니까?
20절에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함으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네 이웃의 남종이나 네 이웃의 여종이나 네 이웃의 집에 있는 모든 것 그 소유를 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 말씀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살던 그들의 풍속, 그들의 마아세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웃의 아내와 눈이 맞으면 그들과도 함께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이웃의 집에 있는 남종, 여종에 대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이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한번 이해해 보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하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르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살인하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 증거를 하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집에 있는 소유물을 탐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2-3. 동성애 금지
22절을 보십시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동성애 금지의 말씀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기서 '가증한'이라는 히브리어는 토에바(תּוֹעֵבָה)인데, '구역질 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과 비슷합니다. "토하여 내치리라" 할 때 그 토입니다. 구역질 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명령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이루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 가정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자손을 낳아서 하나님의 형상이 자손만대로 널리 퍼져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자체는 이미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자유이지, 말씀을 벗어난 자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는 그러므로 심각한 죄악의 행위이고, 이것을 우리가 그냥 풀어주는 순간 이 사회는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도 다 무너지고, 오늘 교회 공동체와 세상 전체가 다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2-4. 수간 금지
23절에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과 종 사이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기를, 인간이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해서 종과 종 사이를 건너서 사람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말씀에 보면 "각기 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원래 하나님은 종과 종을 따로따로 다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 짐승은 짐승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를 정말 싫어하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아주 정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흑암, 공허, 혼돈이었습니다. 그중에 혼돈, 하나님은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분입니다. 창조는 곧 질서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질서도 무척 중요하고, 그 영적인 질서 안에 우리가 함께 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 안에서 질서를 많이 세워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 레위기에도 나왔는데, 하나님이 항상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귀찮게 아론에게 할 말인데 그냥 아론에게 전하면 되지, 왜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최고 지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질서대로, 법칙대로, 순서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시겠습니까? 동성 간의,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살붙이 외에 금지된 관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3. 몰렉 숭배 금지
성생활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를 금지한 규정이 나옵니다. 여기서 몰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몰렉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열왕기상 11장 5절, 11장 7절, 예레미야 49장 1절을 보면 몰렉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5절에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밀곰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산에 있는 반달곰이나 큰곰 같은 동물이 아닙니다. 몰렉의 또 다른 명칭이 밀곰입니다.
7절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몰록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명칭이 세 개 나왔습니다. 몰렉, 밀곰, 몰록입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암몬 사람의 가증한 신, 암몬 자손의 가증한 신입니다. 즉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몰렉, 밀곰, 몰록입니다.
또 예레미야에서는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자식이 없느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라고 나옵니다. 말감이라고도 나옵니다. 네 가지 명칭을 다 정리했습니다. 몰렉, 밀곰, 몰록, 말감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면, '아, 이것은 암몬 사람이 섬기는 신이구나' 하고 아시면 됩니다.
형상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대충 상상만 하십시오. 얼굴은 황소 모양인데 아주 무섭게 생겼습니다. 몸은 사람의 몸입니다. 그런데 몰렉의 핵심은 인신제사를 즐겨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신제사가 무엇입니까? 아이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사람을, 특히 자신의 아이를 태워서 몰렉에게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에, 나에게 소원이 있는데 잘 안 되면 아들을 데리고 가서 태워서 몰렉에게 드리고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이것이 암몬 사람들의 아주 못된 풍습이었습니다.
3-1. 자녀를 넘겨주는 행위
18장 21절을 보시면,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하므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불로 통과하게 한다"는 것은,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지나갔다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에 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과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바르(עָבַר)입니다. 지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아바르의 원래 의미가 무엇입니까? 소유권을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자녀의 소유권을 몰렉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불로 태워 바치는 의미는, 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이제 몰렉 당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2장 35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역시 여기서 '지나가다'가 아바르입니다. 소유권을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이 사람들은 태워서 몰렉에게 바쳤습니다. 아바르, 소유권을 넘겨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내 자녀를 끔찍하게 아낍니다. 끔찍하게 자기 자녀를 다 사랑합니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가 우리 자식을 아바르, 그냥 소유권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지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과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로 견고하게 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냥 세상의 풍속, 세상의 마아세대로 그냥 살아가게끔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대로 너 멋대로 살아가라고 그냥 두는 것, 그것이 아바르 하는 행위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도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견고한 진을 벽돌을 하나하나 쌓는 심정으로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수능 잘 봐서 좋은 대학 가면 뭘 할 것입니까? 좋은 대학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겠지요. 돈 많이 벌어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쳐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불로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똑똑한 아이들이 전부 다 동성애를 지지하고, 성 확정성을 가질 때까지 나는 성의 정체성을 유보합니다 하고, 화장실도 남녀 공용으로 다 쓰게 하고, 화장실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 위법이라며 헌법소원하고, 세상이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쳐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그 안에서 성을 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 보십시오. 다 불행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철저하게 가르쳐놔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앙교육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재미있게 해주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고, 하나님 말씀을 계속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것, 귀에 못이 박히게 가르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3-2. 금지 규정 위반의 결과
금지 규정을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이야기했듯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그냥 즐기고 즐기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18장 25절을 보십시오.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 땅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업의 터전입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아 살면, 그 땅이 더러워져서 땅이 너희를 토하여 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면 못 삽니다. 땅이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삽니까? 아무리 농사지어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밑바닥이 뚫려 있어서 돈이 계속 새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 따라, 구름기둥과 불기둥 따라 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농사짓지 않았고 길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와서 그들을 다 먹이고 그들을 다 돌봐주셨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이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상의 풍조와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면 그 땅이 너희를 내치니까 계속 힘든 것입니다. 계속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가 아무리 많이 벌어도 왜 자꾸 부족하다고 합니까? 어디서 새는지 모르게 왜 이렇게 자꾸 힘들고 어렵습니까?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말씀의 울타리 안에 살면, 적게 벌어도 하나님이 채우시고, 먹고 살고 행복하고, 시간이 다 지났는데 우리 아이들 공부 다 잘 시켰고, 시집 장가 다 가고, 그런 신앙의 고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돌아보면 기적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이 우리를 용납해 줬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은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냥 문제가 아닙니다. 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죽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29절을 보면,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증한, 토에바, 구역질 나는 행위입니다.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잘라낸다는 뜻입니다. 양과 염소의 자리에서 염소의 자리에 그냥 두겠다는 뜻입니다.
4. 성경 인물들의 허물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살붙이 규정을 어긴 사람, 그리고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 범한 다윗 같은 인물들이 성경에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습니까?
4-1.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의 이복누이입니다. 아셨습니까? 창세기 20장 2절과 1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또 "그는 참으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사라가 이복누이라고 했습니다. 이복누이가 무엇입니까? 어머니가 다른 여동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 9절에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딸, 배가 달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규정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습니다.
4-2. 야곱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그의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헬 앞서서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레아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어떤 관계입니까? 자매 관계입니다.
레위기 18장 18절에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라고 율법에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투가 이 가정을 혼돈과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라헬은 자기 여종 빌하를 주고, 레아는 자기 여종 실바를 주고, 네 명의 여인에게서 열둘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야곱은 그중에 요셉을 편애했고,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버렸고, 그래서 이 가정이 고통 가운데 살았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4-3. 유다
유다는 더 가관입니다.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다말입니다. 다말은 며느리입니다.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세상에, 성경에 이런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좀 빼시지,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렸는데,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한 양반이 성경을 읽다가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롯이 그의 두 딸과 동침하는 것, 그리고 또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의 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도무지 우리 집에서 서양 귀신, 예수쟁이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냐? 이제 이 책을 여기에서 내 눈앞에서 불태우지 않으면 너는 호적에서 파겠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칭, 타칭 선비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 책 한 권도 읽어보지 않고 아버지가 나를 내치려고 하십니까? 한 번만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읽다가 이 어른이 이 부분에서 무릎을 쳤다고 합니다. "진서로다!" 하고 말했습니다. 진짜 책이라고 한 것입니다. 논어 맹자, 공자왈 맹자왈 하는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타락은 도처에 다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 숨기고 억압하고 감추고 아닌 것처럼 하고, 회칠한 무덤처럼 삽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이 그냥 그대로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전부 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선비가 "이 책이야말로 진서로다" 하고, 그도 복음을 받고 영접했다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봐도 민망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어떤 짓을 했습니까? 레위기 18장 15절에 "너는 네 며느리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이니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된 짓을 한 것입니다. 모르고 했건 알고 했건 말입니다.
4-4. 다윗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하 11장 3절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알아보긴 왜 알아봅니까?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그냥 '내가 오늘 시험에 들었구나' 하고 지나보내야지, 왜 알아봅니까? 그리고 그녀를 데려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18장 20절에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함으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 십계명도 범한 것입니다.
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해석을 잘못해버리면, "아, 이 사람들도 이랬는데 우리도 그래도 되겠네" 이렇게 가면 곤란합니다.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보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고 다윗이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족장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빛나는 왕 중의 왕이 됩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고, 야곱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 그 축복을 갈망했던 사람이고, 유다는 한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치고 걸었던 사람이고, 다윗은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이런 큰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들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보배, 질그릇은 우리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유다, 다윗 같은 존재들입니다. 질그릇이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깨지고, 이도 빠지고, 색깔도 벗겨지고, 보기 싫습니다. 때도 묻고, 허물이 많습니다. 이 질그릇 같은 인생들을 보십시오. 여기 인간들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 속에 보배를 가졌습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것을 이 질그릇에 가지면 이 보배가 너무 찬란해서, 이 찬란한 빛 때문에 질그릇의 허물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허물은 그대로 있는데, 질그릇이 깨지고 이가 빠지고 색깔이 벗겨진 것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그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인생인데, 내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모시고 있다면, 내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 때문에, 그것이 은혜가 되어서 내 허물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분들의 허물을 그렇게 보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했고, 자신의 온전한 목숨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의 테두리 안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겪은 큰 어려움들이 다 있습니다. 야곱이 그랬고, 유다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5. 벌하시는 하나님
5-1.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는 자
하나님은 어떻게 벌하십니까?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20장 2절에서 5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녀를 그냥 아바르, 방임해버리면 우리는 죽어야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책임지지 못했으니까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공동체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자녀를 방임하는 것을 그냥 봤습니다. 몰렉에게 그냥 아바르, 지나가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뒀습니다.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옆집 자식이라고 그냥 마음대로 저 집 식구가 알아서 방임한다고 우리도 방임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는 하나로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은 내 자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우리 성인들이, 어른들이 성심껏 잘 돌보고,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5-2.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하나님은 어떻게 벌하십니까? 20장 6절을 보면,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접신한 자는 히브리어로 오보트(אוֹבֹת)라고 하고, 박수무당은 이드오님(יִדְּעֹנִי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박수무당' 하니까 우리가 아는 그 박수무당을 생각할까 봐 적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접신한 자'라는 뜻은 죽은 이의 영을 불러내어서 점치는 자입니다. 오보트는 은밀하게 말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어 점을 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드오님이라는 자는 귀신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접신하는 사람은 사울이 찾아갔던 엔돌의 신접한 여인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하라, 마라, 이길 거다, 질 거다' 하는 말씀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입을 닫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우림으로 둠림으로 물어봐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니까, 신하들을 시켜서 접신한 자, 신접한 자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엔돌에 가면 한 무당이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일까요? 사무엘은 이미 그때 세상을 떠나서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에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무엘이 오보트가 불러올린다고 올라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때 그 신접한 자가 불러올린 사무엘의 영은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사무엘이 아니면 귀신이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더러운 악령이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점치는 거 재미로 보지 뭐, 재미로 보지 뭐, 교회 와서 기도도 하고, 용하다는 무당도 찾아가고, 용하다는 점쟁이도 가고" 그런데 그것은 귀신의 영역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요? 백성 중에서 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상숭배와 금지된 성관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지금 여기 오보트와 이드오님을 통해서 점 보는 사람의 속마음이 무엇입니까? 욕망입니다. 어떤 욕망입니까? 미래를 알고 싶은 욕망입니다. "내일 수능 보는데 우리 아이 합격할까요? 내 남편 내년에는 승진할까요? 우리 아들, 우리 딸 이번에 좋은 혼처와 결혼이 성사될까요?" 이런 것을 알고 싶은 욕망입니다. "내가 주식에 어디 얼마를 묻어놨는데 오를까요?" 이런 욕망입니다.
금지된 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지된 것에 대한 불타오르는 욕망입니다. 다 욕망입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어디 아래에서 다스려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스려져야 합니다. 내가 다스린다고 생각할 수 없고,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그 욕망을 다스려서 그 안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미래를 좀 모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일매일 인도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내가 믿는데, 그것이 믿음인데,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내 미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5-3. 부모를 저주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벌하십니까? 20장 9절에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것은 십계명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을 어기면 하나님은 백성 중에서 끊어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 거룩한 백성
레위기가 추구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 23절, 24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이 누구입니까?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정복할 가나안 땅 족속입니다. 그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함으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가증히 여긴다, 토에바, 역겹다는 뜻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별, 구별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26절을 보시면,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거룩은 곧 구별입니다. 구별은 따로 떼어놓는 것인데, 그냥 허허벌판에 따로 떼놓은 것이 아닙니다. 따로 떼놓은 사람들을 안전지대인 말씀이라는 울타리 안에 하나님은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이 오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나의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절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인간의 욕망이라고 표현된, 인간의 은밀한 사생활이라고 포장된 성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자유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리고 즐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말씀 안에서 자유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시고 성별하시고 거룩하다고 하셨사오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부르신 말씀 안에서 자유하게 하옵소서. 주여, 오늘 이 세상 풍조를 쫓아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 자녀들이 이 세상 풍조를 따라 걸어가는 데 방임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그들을 말씀 안에서 철저하게 양육하고 가르치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그들에 대한 영적 책임을 다하는 믿음의 부모, 믿음의 어른, 교회 공동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가르칠 것을 가르치게 하시고, 이 시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수호하고 가르치고, 이 말씀대로 살아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을 지켜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