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특강 12 - 너희는 거룩하라 (레 19장)
레위기 19장 2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아멘.
레위기 성경 공부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레위기를 지금까지 쭉 살펴오고 공부하고 있는데, 레위기를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27장까지 있는 레위기를 반으로 쪼개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16장까지가 예배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17장부터 그 이후가 삶에 대한, 생활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배와 삶은 절대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제대로 살아야 하며, 예배하는 사람의 삶이 이어져야 그 사람을 진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레위기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예배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려야 하고, 삶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레위기 19장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은 레위기의 예배와 레위기의 삶을 '거룩'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관통하고 있는데, 거룩이 도대체 무엇이냐, 거룩의 구체적인 정의를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내려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이 19장을 공부하시고 나면, 거룩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거룩이라 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목소리를 굵게 하고, 뒷짐 지고, 폼 잡고 앉아 있는 것을 거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거룩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보게 될 것입니다.
1. 거룩과 십계명
1-1. 거룩의 의미
첫 번째가 거룩과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난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거룩해져야 하는가? 난감합니다. 2절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데,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렇게 답을 하면 이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동어 반복처럼 느껴집니다. '거룩하라'는 말은 '카도쉬'(קָדוֹשׁ)인데,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법적으로 보면 미완료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문법에는 없는 것인데, 히브리어 문법의 미완료는 문법적으로 명령을 의미하거나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의 '거룩하라'는 말은 전부 다 문법적으로 미완료로 쓰여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왜 그렇게 썼을까요? 여기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명령입니다. 그런데 거룩이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거룩을 위해서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을 위해서 전심전력해서 달려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 "너희는 거룩하라"는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방향을 정해주고 달려가야 할 목표와 목적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말씀 안에 거함
거룩이 구별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뚝 떼서 구별하셨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런데 그냥 던져 두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뚝 떼서 구별하셨는데, 그들을 하나로 묶어둘 무언가를 두셨습니다. 그 안에 두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옮기면,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구별되었다. 말씀 안에 사는 자들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다가 하나님 말씀 안에 사는 자로 구별되었다는 것이 축복인가 저주인가, 속박인가 굴레인가. 사람들은 속박과 굴레처럼 생각하겠지만, 사실 따지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속박이 아니고 굴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고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고, 진리가 곧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2절 끝에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도 그러면 구별되셨는가? 하나님도 말씀 안에 묶여 계신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 안에 묶여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 밖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말씀 안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말씀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백성들,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그 사랑한다고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이 속박되어 계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 안에 묶여 계십니다. 말씀 밖으로 하나님은 절대 나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스스로도 우리와 약속한 언약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짐승을 잡아오라 하시고, 그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길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해주지 않으면 내가 이 짐승처럼 쪼개어지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고 그 언약에 스스로를 속박시킨 것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올 메시아를 예언하셨습니다. 700년 뒤에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뒷짐 지고 폼 잡고 앉아 계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자기를 속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씀 안에 계시고, 말씀 밖에 나가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너희도 하나님을 본받아 말씀 안에서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개념을 너무 자기 방식대로, 자기 임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말씀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별되어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지금 이 레위기 말씀을 주시는 자리가 시내산입니다. 출애굽하는 중에 그들을 시내산에 불러놓고, 그 자리에서 십계명도 주시고 말씀도 주시고 성막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구별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룩한 백성이 아니었다. 너희 멋대로 살았다. 430년 동안. 그런데 이제는 말씀 안에 들어와라."
어떻게 들어가야 합니까? 한 발은 말씀 안에 두고, 한 발은 말씀 밖에 두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완전하게 말씀 안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아주 세밀하게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거룩한가, 거룩하지 않은가를 무슨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까? 내가 말씀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이렇게 기도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1-3. 십계명과의 연관
이제 거룩을 실천하는 영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십계명을 살펴봅시다. 3절을 봅시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부모 공경은 몇 계명입니까? 5계명입니다. 안식일은 몇 번째입니까? 4계명입니다.
4절을 봅시다.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헛된 것들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우상입니다. 우상에게로 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것은 몇 계명과 관련이 있습니까? 우상과 관련이 있는 1계명, 2계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을 말씀하시고 바로 이어서 십계명의 1, 2, 4, 5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30절을 보면, 레위기 19장 끝날 때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4계명, 안식일 계명입니다. 31절에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신접한 자와 박수가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것도 1계명, 2계명입니다.
32절에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결국 큰 의미에서 부모 공경입니다. 5계명입니다. 11절에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 12절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9계명입니다.
그러면 이 19장에 도처에 십계명이 산재해 있습니다. 거룩하라 하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대표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거룩은 구별이고, 구별은 하나님 말씀인 율법 안에 거하는 것이며, 내가 이미 준 십계명 안에 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증하고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거룩은 우리의 행위로, 그냥 좋은 옷 입고 거룩하게 목소리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사는 것이 곧 거룩입니다.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거룩과 화목제
2-1. 공동체의 잔치
그런데 19장이 거룩의 개념을 설명하는 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화목제가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읽다가 "왜 그럴까?"를 자꾸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이 넓어지고,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룩의 개념과 화목제 제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5절을 읽어봅시다. "너희는 화목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6절에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복습을 한번 해봅시다. 화목제의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감사제는 드리는 날 고기를 다 먹어야 합니다. 서원제와 자원제는 그 이튿날까지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감사제든 서원제든 자원제든 셋째 날까지 남겨두면 절대 안 됩니다. 무조건 다 먹어야 합니다.
소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어떻게 다 먹습니까? 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오늘 하루 세 끼를 소고기만 구워 먹으면 그다음 날 먹을 수 있습니까? 물려서 그다음 날 꼬리곰탕 먹어도 또 먹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 한 마리 잡아서 이틀 안에 다 먹으려면 나눠 먹어야 합니다. 동네 사람들, 옆집, 뒷집, 이웃집, 건너집 다 나눠줘야 화목제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봅시다.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리니 그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렇게 무서운 계명이 있습니다.
화목제가 여기 들어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제사 중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 다섯 가지 제사 중에 일반 백성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여기에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를 언급하지 않고 화목제를 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거룩이라는 것은 나 혼자의 거룩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교제하고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거룩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독야청청하고, 자기 혼자 잘났고, 자기 혼자 깨끗한 것을 거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거룩은 화목제 제사의 잔치입니다. 감사한 일이 있어서, 자원하는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쁘게 서원하는 일이 있어서 소를 잡아서 온 동네가 잔치를 벌이는 것이 화목제였습니다.
이것을 여기 거룩의 개념으로 넣어둔 이유는, 거룩은 공동체가 함께 즐기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진짜 거룩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기준으로 본다면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고, 누구에게나 다가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떼어서 나누어주고, 함께 식탁 교제를 즐겨 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공동체와 나누고 살갑게 대하고, "왔느냐"고 인사해 주고, 같이 서로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거룩의 개념과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그 옛날 시내산에서 주셨던 레위기 율법에 보면, 거룩은 화목제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서 함께 먹고 함께 즐기고 함께 행복하면, 너희가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은 공동체의 개념이지 혼자의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앞으로 거룩하다 할 때는 이것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2-2. 잔치의 한계
또 한 가지, 이 화목제 제물 제사 규정에 보니까 셋째 날까지 남겨두면 그 제사가 무효라 하셨습니다. 가증한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잔칫집에 보면, 결혼식 잔치를 하건 칠순 잔치를 하건 그 잔치의 기분이 과해서, 흥이 과해서 눈살 찌푸리게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좀 보셨을 것입니다. 일가친지들 무슨 잔치 자리가 있으면 꼭 잔치의 마지막을 아주 불쾌하게 장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잔치도 그 한계와 범위와 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 잔치가 거룩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러나 그 거룩도 내가 정한 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기쁘고, 아무리 행복하고, 온 동네가 소 잡아먹고 기쁜 잔치라도 이 틀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함께 떡을 떼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러면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이 그 틀 안에서 기뻐해야 하니까요. 한계와 틀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기분 좋게 저녁 회식 시작했다가, 술자리 갔다가, 1차가 2차 되고, 2차가 3차 되고, 결국 마지막에 끝이 안 좋게 끝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하나님의 율법, 말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잔치입니다. 화목제가 거룩의 개념 속에 들어온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잔치를 하더라도 삼가야 할 때는 삼가고, 끝을 내야 할 때는 끝을 내야 하고, 그 한계와 범위가 명확해야 합니다. 자기 기분 따라서 막 끝까지 가버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또 거룩의 개념입니다.
3. 거룩과 이웃
3-1. 나눔의 거룩
이제 거룩과 이웃의 개념으로 넘어갑니다. 지금 19장은 거룩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개념은 거룩은 말씀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거룩은 잔치이며, 기쁨의 잔치인데 그 잔치는 하나님의 율법의 테두리와 한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9절을 봅시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밭 모퉁이를 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남겨둬야 할까요? 성경에는 없습니다. 얼마를 남겨둬야 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드라쉬라는 유대인 전승에 보면 60분의 1 정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60평 농사지으면 1평 정도, 200평이나 180평 그 이상 되면 3평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남겨두라는 규정도 굉장히 많습니다. 어쨌든 내 밭 모퉁이를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삭도 줍지 말라." 10절을 봅시다.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셔야 할 단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9절을 보시면 "너희의 땅에서," '너희의 땅'이 중요합니다. 남의 땅이 아닙니다. 너희의 땅에서입니다. 10절에 "내 포도원의 열매," "내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 내 포도원, 너희의 땅, 너희의 포도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남의 것으로 생색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할 때 가축으로 드리는 이유를 공부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다 가축입니다. 가축은 자기 것입니다. 소를 집에서 자기가 기릅니다. 염소도 기르고 양도 기릅니다. 자기 재산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야생 것을 잡아오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허락된 산비둘기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 집에 가축 한 마리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산에 가서 산비둘기 잡아와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너희 집에 풀칠할 만하면, 너희 집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부터 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고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처럼 이웃에게 나누는 것도 너의 밭에서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내 포도원에서 다 따지 말고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너의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 것은 안 나누고 남의 주머니 것 털어가지고 나누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의 것으로 막 생색내고, 남의 것으로 막 자기가 베푸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 불러다가 밥 사주면서 교회 돈으로 막 자기 인심 내고 생색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누고 베풀 때는 네 주머니 털어서 네 것으로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구제와 그 나눔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남의 주머니 털어가지고 나누는 것은 누가 못합니까?
나랏돈이 다 눈먼 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 가지고 다 나눠주고 매표 행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다 찍어주면 다 세금으로 다 돌아옵니다. 교회 공동체도 그렇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에서 구제하고 나누려거든 네 주머니 것 털어서 나눠주고 밥 사주고 인심 쓰라는 것입니다.
3-2. 불특정 다수를 향한 나눔
또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고" 돌아서서 와버렸습니다. 추수를 엉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 열매 따는 것도 엉성하게 따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뒤에 누가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가는지, 그 모퉁이에 수확하지 않은 곡식을 가져가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포도원에서 포도송이 따고 다 와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다음 어떤 사람이 가서 그것을 줍는지, 그것은 관심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와버리면 그다음 알아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누구네 밭에 어제 추수를 했다더라" 하고, 그러면 그다음 날 가서 다 주워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네가 구제하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하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까요? 내가 저 사람에게 무언가를 줬습니다.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이, "내가 너에게 이것을 베풀었는데 넌 나에게 이렇게 해. 네가 감히 나한테 인사도 대충 하고 그냥 지나가고. 너희 집안이 나한테 이렇게 해." 이런 부작용이 생깁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하지 말고, 불특정 다수가 가져가도록 너는 너의 할 일을 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갈 것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하나님이 이렇게 정교하게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진짜 믿을 만하면, 교회가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중간에서 누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교회가 정말 신뢰가 되면, 교회 헌금에서 교회를 통해서 구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지정해서 하게 되면, 이 인간의 마음이 묘해서 그런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3-3. 믿음의 표현
또 한 가지, 이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됩니다. 추수할 때 내가 정말 열심히 일해서 이 곡식을 이만큼 일구었습니다. 밀과 보리 그리고 과수를 수확했는데,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싶겠습니까? 저것이라도 전부 다 싹 쓸어서 베어서 곡식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놔야 내 자식, 내 손주, 우리 가족들 다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하지 말고 엉성하게 추수해서 그냥 와버리는 것입니다. 대충 해서 그냥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추수해도 하나님이 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고, 밭 모퉁이 그냥 남겨놔도, 어떤 사람은 4분의 1 정도 남겨놓고, 어떤 사람은 절반 정도 남겨놓고, 대충 추수해서 가버려도 하나님이 우리 식구 다 먹이시고 살피시고 돌보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헌금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 거룩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개념의 거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거룩입니다. 너의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되, 그 이웃 누가 너의 도움을 받는지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심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믿음을 하나님께 확정해서 보여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5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누구의 재산과 소유를 팔았을까요? 교회 재산, 교회 소유를 팔았을까요?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은혜 받은 성도들의 재산과 은혜 받은 성도들의 소유를 판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구제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초기교회 공동체도 이 구약의 정신, 거룩의 정신을 잘 이어받아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거룩은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룩은 나눔과 베풂, 남겨두는 것이며, 그 대상이 누군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나는 남겨두고 나머지는 그냥 던져놓는 것입니다.
3-4. 이웃에 대한 금지 사항
이웃들에게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 일반 성도들이 이웃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금한 것이 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억압하다, 착취하다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솨크'(עָשַׁק)가 억압인데, '찍어 누르다'라는 뜻입니다. 프레스 기계로 꽉 찍어 누르는 것처럼 아솨크입니다. 착취하다는 '가잘'(גָּזַל)인데,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끔찍합니다. 옷만 그냥 벗겨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벌거벗겨 놓고 가죽까지 다 벗겨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취입니다. 찍어 누르지도 말고 벗기지도 마라, 이웃에 대해서. 그런데 여기 이웃은 어떤 이웃일까요? 일반적인 이웃이 아니고 아주 가난한 이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찍어 누르지 말고, 착취하지 말라, 가죽을 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적어줍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품꾼을 불러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내일 와, 내일 줄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 일했으면 오늘 그 일한 값을 정당하게 치르고 돌려보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24장 14절에서 15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당일에 주라고 하셨습니다.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간절히 바람이라'는 말의 뜻이 '그의 생명을 그 위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가난하니까 그 생명이 그 품삯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받아가지 않으면 우리 식구들 다 굶어야 하는데, 그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답답하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저 놈 나쁜 놈이라고 하나님 저 놈 시켜서 나한테 품삯 주라고 말씀 좀 하시라"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니라." 그래서 결국은 그 죄를 그 사람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 불러서 일을 시켰으면 반드시 품삯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그것이 억압하는 것이고, 그것이 가죽을 벗기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찍어 누르는 것이고, 그 사람의 가죽 껍질을 다 벗기는 행위라고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은 이웃에게 줘야 할 정당한 임금과 대가를 주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값어치를 정당하게 줘야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가 "우리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라고 말하려면, 교회 공동체가 인심이 사납거나,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식구들 또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고서 교회가 "우리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 같은 것과 상관없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적어도 그 정도는 책임져줘야 그래야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이웃에게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이 있습니다. 14절에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귀가 먹었습니다. 안 들립니다. 앞에서 저주합니다.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도 그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몸이 불편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장애를 가진 분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거룩과 이웃의 개념을 보면, 이웃에게,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 거룩이고, 응당 돌아가야 할 대가를 당연히 주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거룩의 개념을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설명해 가고 계시는 과정입니다.
3-5. 공정한 재판
이제 재판으로 갑니다. 재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봅시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당연합니다. 이 재판이 여기 보면 '미쉬파트'(מִשְׁפָּט)입니다. 미쉬파트가 무엇입니까? 정의입니다. 이것이 율법적 의미에서 정의입니다.
즉, 재판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재판할 때 그 법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의 법전은 성경입니다. 율법입니다. 모세오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재판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을 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출애굽할 때 모세가 자기 혼자서 막 재판하니까 이것이 너무 고되니까, 이드로가 보고 "너 그러다가 죽는다. 백성도 힘들고 너도 힘들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세워서 중간 관리자 세워서 재판하게 하라. 그리고 백성에게 응당해야 할 것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8장입니다. 그리고 나서 19장, 20장에서 율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율법, 하나님의 말씀인 중심된 율법을 가지고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때 불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잘 읽어야 합니다. 다시 읽어보십시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라." 우리는 심정적으로 어떻습니까? 가난한 자 편들어주고 싶습니다. 가난하니까 저 사람, 저 사람 돈이 없고 가난하니까 저 사람이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마라."
왜 그랬을까요? 가난하다고 다 옳습니까? 가난하다고 이 사람이 다 정의롭습니까? 가난하다고 다 율법에서 완벽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다음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여기서 '세력 있는 자'는 '가돌'(גָּדוֹל)이라고 되어 있는데,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력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하다고 편들지 말고, 돈 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공의'는 '체다카'(צְדָקָ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 의미에서 공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즉, 네가 재판장인 네가 결정할 때, 가난한 자라고 그 사람 편들지 말고, 돈 있는 자라고 그 사람 편에 서지 말고, 너는 체다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씀으로만 오로지 재판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거룩은 가난한 사람 무조건 편들어주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돈 있다고 무조건 그 사람 편에 서는 것, 그것도 거룩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 16절을 봅시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우리가 물질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경제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정당한 땀 흘림의 대가여야지,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줘서 내가 먹고 산다면,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6. 형제 사랑의 실천
거룩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또 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왜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하셨을까요? 모든 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미움이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견책하라'는 말이 조금 어려운 단어인데, '단단히 책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웃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면 기도하고, 단단히 책망을 해야 합니다. 네 눈에 보였으니까요. 잠언 27장 5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면(面)' 자가 '얼굴 면' 자입니다. 면전에서 책망하는 것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면 드러내놓고 "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일러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거룩입니다.
18절을 봅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이것이 어쩌면 레위기의 아주 핵심적인 말씀 중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랑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중에 나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나 같은 게 살아서 뭐 하냐고. 나 같은 건 빨리 죽어야 해. 그래야 가족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빨리 죽어야 된다"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우선 사랑해야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말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아야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 실패했다고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그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나 자체로 그냥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사실, 나를 위해서,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그 사실을 믿고,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복음으로 거듭난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남을 사랑합니까? 내가 나를 죽이도록 미운데, 내 존재가 용서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합니까?
그래서 이것은 그 전제가 나를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세우고, 누구보다도 나를 존귀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4. 거룩과 질서 보존
4-1. 섞지 않음
이 질서 보존이 거룩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19절을 봅시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한마디로 말하면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10절에서 11절을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겨리하다'는 것은 '함께, 같이'라는 뜻입니다. 소와 나귀를 함께 갈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이것도 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11절에서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 중요한 것은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미 각기 종류대로 다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야 생육하고 번성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것 이외에 섞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4-2. 마음의 순수함
그래서 이 거룩의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만 우리 마음에 두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섞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도 있고 돈도 있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도 있고 발도 있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도 있고 내 자식도 있고, 이것을 하나님은 별로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결하고 순수한 것을 원하십니다. 지금 여기 섞어 짜지 말라, 그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하신 것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원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근본 원천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도 두고 재물도 두는 것, 그것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섞이면 그것이 거룩이 아니고 불경건입니다. 진짜 거룩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하나님만 두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4-3. 정혼한 여인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 책망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인은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꾀어서 그 여인과 동침하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뒤섞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설명할 것이 있어서 20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 곧 아직 속량되거나 해방되지 못한 여인과 동침하여 설욕하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일이니라."
그런데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여종이라 하였을까요? 과거에 지금 이 시절에 가난합니다. 너무너무 우리 집이 정말 가난합니다. 그런데 이 딸, 아들 자녀가 5~6명 혹은 7~8명이 있는데, 이 아이들을 다 먹여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아이 중에 한 아이를 아직까지 성년이 안 된 아이를 부잣집에 미리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크게 세 경우 중의 하나로 처분됩니다. 첫째는 데려간 주인이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기 아내로 맞이하든가, 두 번째는 그 주인의 아들에게 주어서 며느리로 삼든가, 세 번째는 자기 부인으로도 삼지 않고 자기 며느리로도 삼지 않으면 이제 이 아이가 다 크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주는 것입니다. 시집 보낼 때는 유대인 관습에 의하면 보낼 때 지참금을 친정이 받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도 이 여자아이를 잘 길러서 시집 보낼 때 지참금을 받고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아이는 종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이 집에 와서 결혼을 전제로 살고 있는, 신부 수업 받고 있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이런 식으로 보호해주고, 공동체를 이런 식으로 다 살게끔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이 여인은, 이 여자아이는 잠재적으로 정혼한 상태입니다. 주인과 결혼하건, 주인의 아들과 결혼하건, 다른 데 시집가건. 그런데 이 여자아이를 꾀어다가 동침해버리면 큰 죄를 지은 것 아닙니까? 그런 상태에 대한 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습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5. 거룩과 생활
5-1. 먹는 것의 거룩
과일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과수를 심으면,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 먹는 것에도 하나님이 거룩이라는 개념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23절을 봅시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라." 3년 동안은 과일 열매가 달려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겠습니까? 먹는 것도 하나님께 허락받고 먹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자기 멋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도 먹는 것도 거룩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24절에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넷째 해에 열린 과실은 하나님께 드려야지 자기가 먼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자신의 거룩함을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먹을 수 있습니까? 과일나무 심고 5년째부터입니다.
이것을 보니까 우리가 누가복음 13장 6절에서 9절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3년을 와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하는데 못 먹었습니다. 이 3년이란 언제부터 3년일까요? 3년 동안 못 먹습니다. 4년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5년째부터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5, 6, 7년째 와서 구했는데 못 먹은 것입니다. 이 주인이 얼마나 열받겠습니까? 내가 이 나무 심어서 7년 동안 길렀는데 못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찍어버리겠다 하니까, "금년만 그대로 두소서 제가 두엄하고 거름을 주리니 그래도 맺지 않으면 그때 찍어버리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3년 동안만 딱 기다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최하 7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룩은 우리의 식습관과 먹는 것에도 거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5-2. 이방 풍습 금지
따르지 말아야 할 이방 풍습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26절에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이것은 하나님이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으니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점과 술법은 왜 행하는 것입니까? 미래를 알고 싶어서입니다. 미래는 누구의 영역입니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이 알고 싶어서 점치는 자에게 가서 각종 사술을 행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됩니다. 그래서 "장차 올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미래는 나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인데 내가 왜 걱정합니까?
오늘 미래 걱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특징이 오늘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실하게 살면 미래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사는데 어떻게 미래가 걱정이 됩니까? 아침에 눈 떠서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사는데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것이 거룩이라고 하셨습니다.
"머리털을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이것을 문자 그대로 보면 머리를 동그랗게 깎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보실 수 있는데, 이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이것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28절에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죽은 자 때문에'가 중요합니다. 이방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 신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고 나면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고 나서 그 죽은 자 때문에 자기 머리털을 둥글게 깎고, 수염 끝을 상하게 해서 귀신을 달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자기 몸에 문신을 놓는 것은 귀신이 자기 몸을 해하지 못하게 몸에 무서운 문신을 놔서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풍습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사야 말씀에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죽은 자의 영을 왜 두려워합니까? 걱정할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했는데 문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5-3. 거류민과 공정
거류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거류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로, 같이 섞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33절에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절에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난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류민들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라는 것입니다.
생활에서 공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라고 하셨습니까? 35절에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절에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울 속이고, 추를 속이고, 도량형을 속이고 해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받아들이고,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명확하고 정확한 기준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기준이 세워지면 장사하는 사람도 속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거룩은 장사하는 사람들도 자기 삶의 영역에서 이렇게 속이지 말고 기준을 정확하게 세워서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 거룩은 사랑
37절에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의 테두리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인데, 우리가 오늘 살펴본 이 율법, 이 거룩, 거룩의 개념, 이것은 다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해야 화목제가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이웃에게 곡식을 남겨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이웃을 압제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억압하고 착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그 여종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딸처럼 길러서 시집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다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거룩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잘 배웠습니다. 우리가 오늘 배운 것을 보면, 거룩은 폼 잡고 뒷짐 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다양하게 잘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시고, 그러면 나에게 부족한 거룩은 무엇인가 살펴보시고, 채워가시고, 잘하고 있는 것은 더 발전시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도 거룩하셔서 말씀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말씀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말씀과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여 이웃과 화목제의 기쁨의 잔치를 나누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거룩하여 곡식을 나누게 하시고,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을 구제하게 하시며, 우리가 거룩하여 이웃에게 굽은 판단을 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거룩하여 이웃을 압제하고 착취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거룩으로 수렴되오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