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제사장과 거룩 / 전체녹취

레위기 특강 13강 - 제사장과 거룩 (레21장)

레위기 21장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우리가 레위기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사실 요한계시록을 지난 학기에 공부할 때 한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진 목표이기도 했고, 또 여러분들이 그 목표를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란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그 목표가 지난 학기에는 상당히 이루어졌습니다. '계시록이 무서운 책이 아니다'라는 것만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면 아주 중요한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레위기를 시작할 때도 역시 제가 가진 목표가 있었습니다. '레위기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읽을 만한 책이다. 그리고 레위기는 충분히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적용 가능한 책이다.' 이것만 마음에 새겨도 성공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따라와 주셔서 레위기가 읽을 만한 책이고, 또 받을 만한 책이고,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1. 레위기의 구조

그렇게 하려면 레위기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레위기는 크게 전후로 나뉘어집니다. 1장에서 16장까지는 예배를 통한 거룩, 곧 제사의 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장부터 27장 끝까지는 일상생활에서의 거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보면 수직과 수평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위와 아래로 되어 있는데, 예배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라면, 우리의 삶은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은 수직과 수평이 함께 있어야 그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정상적인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있으면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거룩이 필요하고 일상의 거룩도 필요합니다.

예배의 거룩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들여다보았고, 일상의 거룩을 들여다보면, 17장은 음식에 대한 일상의 거룩을 다루었습니다. 18장과 20장은 성생활에 대한 일상의 거룩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19장 말씀은 거룩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거룩이 그냥 폼 잡고 목소리 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지난주에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2. 제사장의 일상 거룩

이제 오늘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의 일상 거룩입니다. 제사장들도 일상생활을 할 것 아닙니까? 제사장도 밥도 먹고, 결혼도 하고, 가정의 장례식도 가고 그럴 것 아닙니까? 이제 그런 일에 대한 일상의 거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수많은 계층들 중에 제사장을 대표로 세워서 거룩을 말씀하셨을까요? 제사장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말씀, 레위기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 아래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 복잡하고 어려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이집트에 있을 때는 중구난방으로 살았습니다. 규율이 없었습니다. 어떤 규정도, 그들의 삶에 경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집트의 법대로 살았고, 바로가 말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법이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냥 주면 먹고, 자라 하면 자고, 우상 숭배하고, 죄짓고, 그런데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그들을 거기서 딱 구별해서 거룩하게 따로 떼어놓으셨습니다. 거룩이란 중구난방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테두리 안에 넣어두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테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우리가 자유하되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자유하되 어디 안에서 자유해야 합니까? 말씀 안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선악과 금지명령 안에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먹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경계가 있습니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에게 율법 안에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이스라엘 백성을 넣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사장은 그 거룩한 백성들 중에 또 따로 구별해서 다시 거룩하게 세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인데,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아,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하는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모델을 하나님은 제사장 집단으로 세워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자들 중에 또다시 구별해서 거룩하게 기름 부어 세운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을 일상 거룩의 대표주자로 21장과 22장에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 맥락으로 21장과 22장을 접근해 보시면 됩니다.

2-1. 제사장과 장례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아주 다반사입니다.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식구가 세상을 떠나고, 친구 중에도, 동네 사람 중에도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부고가 나오곤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장례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사장의 일상 거룩 가운데 제일 첫 번째 머리가 장례 이야기입니다.

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시체를 손만 대지 말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장례식에 가지 말라는 뜻인가요? 이것은 장례식에 아예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이 장례식에 가지 말아야 할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2절과 3절을 보면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가족의 장례에는 참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대제사장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일반 제사장은 가족 장례에는 참석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대제사장은 이것조차 허용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왔느냐 하면,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죽지 않습니까?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타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아론이요, 나답과 아비후의 두 동생인 엘르아살과 이다말, 이 두 사람을 포함해서 아론까지, 형 두 사람의 장례식에,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그 장례를 진행했느냐 하면, 아론의 사촌 형제들이 와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은 시체를 떠메고 나가서 장례를 진행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피붙이, 살붙이가 죽어도 장례식에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규정을 해두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6절에 보니까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면 예배를 집례하는 자이니까 장례를 통해서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부모라 하더라도 장례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요? '또 뭐 하지 말라는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느냐'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다가 생을 달리했습니다. 죽었습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이제 하나님 손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보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든지 지옥으로 집어넣으시든지,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의 믿음 여부를 보시고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이 땅에서 살아 있을 때가 중요한 것이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제사장이 가서 장례를 집례한다고 해서 지옥 갈 영혼이 천국으로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너희들은 내 백성을 돌보고, 내 백성을 양육하고, 내 백성을 먹이고, 재판하는 일에 집중하라. 하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것을 쫓아다니느라 살아 있는 사람 가르치고 돌보고 양육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하나님의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맥락은 지금 여기 있는 레위기의 말씀을 기초로 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우리가 곡하고 통곡을 한들 그 죽은 자의 영혼을 하나님이 지옥에 집어넣으셨다면, 그가 운다고 지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에 갈 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장례는 가족끼리 간소하게 하라고 하나님은 딱 정리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창세기 50장을 보시면 야곱의 장례 기사가 나옵니다. 야곱은 그 당시에 총리 요셉의 아버지입니다. 총리 요셉은 최고의 권세자였으니 그 당시에 요셉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딱 정리한 요셉이니까요. 야곱이 죽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70일 동안 곡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70일 동안, 두 달하고 열흘입니다. 두 달 열흘 동안 죽은 자를 위해서 곡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의 장례 풍습입니다.

지금 이 명령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살다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관혼상제 문화를 바꾸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산 자를 위해서 살아라, 그것이 너희가 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살아 있는 사람,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돌보라.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울지 말라, 그것은 나에게 맡겨라' 하신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을 비롯해서 고대 근동의 사람들, 모든 사제들이 죽은 자의 장례에 깊숙이 관여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몸에 문신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문신은 왜 합니까? 죽은 자의 영혼이 겁이 나니까요. 아무리 나와 살을 부대끼던 피붙이, 형제자매, 조부모가 돌아가셔도 겁이 납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겁이 납니다. 저 영혼이 나를 해코지하지 않을까 싶어서 몸에다가 무서운 짐승의 문신을 그려놓고 그 영혼이 나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문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방 종교의 사제들이 와서 죽은 자의 주검을 만집니다. 시체를 만집니다. 염을 해줍니다. 그러면 그 사제에 대한 존경심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을 찌르겠지요. 사람들이 보니까 '아니, 나는 무서워서 내 형제라도 시신 근처에도 못 갔는데, 저 사제가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염하고,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하면서, 사람들은 이 사제들을, 이방 종교의 사제들을 장례를 그들의 영적인 권위를 높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술 행위를 하고 시체를 갖다 놓고 거기서 뭐 주문도 외우고, 물도 뿌리고, 성수도 뿌리고, 향도 피우고, 별짓 다 하지 않습니까? 옛날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이방 사제들이 이 짓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인 권위를 높이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제사장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목사들은 장례식에 갑니다. 그렇게 해서 안 가야 됩니까? 구약의 율법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예수 믿는 사람의 장례는 산 자를 위한 장례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는 장례입니다. 철저하게 거기에 포커스가 맞춰져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죽은 자를 위해서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은 불교식입니다. 천도재 하고 하는 것은 이방 종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목회자들이 장례할 때, 교회가 장례하는 모든 포커스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와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슬픔을 당한 자들이라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위로해 드리고, 입관 예배 드리고, 발인 예배 드리고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가서 함께 식사도 하고 위로해주고 부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살아있는 사람 중심입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는, 세상을 떠난 자에 대해서는 우리 손을 떠난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잘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철저하게 간소해야 합니다. 길게 늘여 가지고 아주 화려하게 해봐야 지옥 가신 분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중심을 맞춘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2. 제사장과 결혼

이제 제사장의 일상생활 거룩 중에 결혼을 살펴보겠습니다. 제사장도 결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 참 재미있습니다. 제사장의 결혼이 사적인 영역입니까, 공적인 영역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라면 우리가 터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 자기가 좋아해서 자기가 따라다녀서, 저 여인이 예뻐서 결혼하는데 누가 입을 대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장 결혼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규정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결혼은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가정 생활도, 결혼도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을 따라 해야 되는 것입니다.

21장 7절에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창녀를 취하지 말라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차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뭐 차별금지법 때문에 차별이 사실 시대적 이슈가 되어 있는데, 아주 예민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신명기 24장 1절을 한번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즉 여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인을 데려왔는데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대개 성적 부도덕을 의미합니다. 이 여인이 결혼하기 전에 행한 성적 부도덕,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남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편이 이해하고 그냥 기뻐하고 용납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면, 받아들일 수 없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써 주라, 보내 주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혼당한 여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 이것은 성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혼당한 여인은 취하지 말라 하는 것이니까 이해가 됩니다. 다른 사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13절에서 15절을 보면 "그는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을지니" 이것은 제사장 결혼에 대한 것입니다.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이방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백성 중에서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자손이 그의 백성 중에서 속되게 하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의 결혼이 공적인 영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나는 저 여인이 너무 예뻐요. 이방 여인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모압 여인의 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쫓아다녀서 데리고 와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슈가 될 것 아닙니까? 백성들 사이에 만약 이 규정이 없으면, 이 규정이 없으면 찬반이 나뉘어져서 공동체가 그것 가지고 시끄러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규정을 딱 정해놓고 성도들이 시험에 들 만한 짓을 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결혼도 가장 일반적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해서 성도들이 서로 의견이 나뉘어져서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제사장의 결혼 규정을 정확하게 딱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 중에 한 번 더 구별해서 거룩하게 하시고, 그것을 백성들의 모델로 삼게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사장의 가정을 보면서 '아, 우리도 이런 가정을 이루어야 되겠구나, 우리도 이런 가정을 본받고 따라가야 되겠구나'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정이 건강해야 성도들도, 보는 분들도 행복할 것 아닙니까? 보는 분들도 마음이 놓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정에서 맨날 이상한 소리가 나고, 불편한 이야기가 들리고, 그것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면 성도들 중에도 찬반이 나뉘어질 것 아닙니까? 아, 이것은 목사님이 잘했고, 이것은 사모님이 잘했고, 이래 가지고 서로 나뉘어지고 불필요한 시험에 들게 하는 짓, 그런 행동들 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정 생활도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오늘날도 공적인 영역입니다. 철저하게요.

2-3. 제사장의 육체 규정

이제 제사장 육체에 대한 규정은 어떠한가 살펴봅니다. 이것이 사실 논란의 소지가 적지 않습니다. 육체에 대한 규정을 잘 보십시오.

17절에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에 흠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18절부터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라는 것은 냄새를 못 맡는 자를 의미합니다.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가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어떤 일들이 있을까요? 우리가 이것부터 규정하고 가야 됩니다. 어떤 일이 있습니까? 제사를 직접 진행하는 일도 합니다. 또 성전에 문지기 역할도 합니다. 성전의 제반 사항을 다루는 일도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곳간을 관리하고 맡은 일도 합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십일조를 가져오면 그것을 창고에 넣고 드리고 내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배분하고, 이런 역할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라고 하셨고, 21절도 보면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몸에 흠이 있는 자는, 몸이 불편한 자는 직접 제사를 집례하는 역할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 직무 자체를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오해가 되면 곤란해집니다. 이것이 오해가 되면 왜 곤란해지느냐 하면, 오늘날 이것을 엉뚱하게 적용하면 '장애인은 목사가 되지 못하는가?' 이렇게 나갑니다. '몸이 불편한 자는 목회를 못하는가? 이것은 장애인을 심각하게 비하하고 차별하는 구약의 말씀이다. 그래서 구약은 사람을 차별한다, 버려야 된다' 왜 이렇게 갑니다. 그것이 오해라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이것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셨는가? 제사장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됩니다. 우리가 속죄제 할 때 배웠습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항상 속죄 제물로 드리고 그리고 시작해야 됩니다. 제사장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으니까요. 특히 대속죄일 제사를 드릴 때는 더 심각하게 자기를 돌아봐야 됩니다.

그런데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송아지를 누가 잡아 줍니까? 자기가 잡는 것입니다. 자기가 번제물 드릴 때도 가지고 나온 백성이 직접 잡습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해서 뭐 손이 부러지고, 다리가 불편하고, 다리를 절고, 냄새를 못 맡고, 몸이 아프고 하는 분들이 소를 어떻게 잡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죄제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당시 규정에 의하면 제사장의 속죄제를 제대로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대로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에 몸 불편한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를 집례하는 역할은 하지 말고 다른 것을 시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세습직이잖아요. 레위 지파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제사장인데'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몸의 지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버립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제사장으로 태어났으니 크고 성장하면서 성전의 다른,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일을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기능에 따라서요.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말씀이 아니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그 당시에 실용적으로, 기능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오늘날은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이제는 소를 잡아서 제사 드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짐승을 잡아서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단 한번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짐승 제사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다리가 불편하고 몸이 불편하고 코에 냄새를 못 맡는 분도 누구나 다 목사님이 될 수 있고, 다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을 보시면 "너희도" 여기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짐승 제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3. 제사장과 성물

3-1. 성물을 먹을 자격

이제 제사장과 성물 주제가 나오는데, 성물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가지고 나오는 것, 그것이 성물입니다. 백성들이 드리는 성물을 다루는 제사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레위기 22장 2절에 보니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그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라' 스스로 구별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 몸과 영혼과 마음을 살피라 하는 뜻입니다. 즉 성물을 먹을 만한 자격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레위인 제사장은 밭,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열두 지파냐 하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열두 지파입니다. 그것을 레위 집안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48개 성으로 다 흩어놓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을 준 적이 없습니다. 농사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대신 그들은 세 가지 직무를 해야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제사의 직무. 둘째, 일상적인 신앙 훈련 교육, 성경공부. 셋째는 재판입니다. 이것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백성들이 가지고 나오는 성물로 그들을 먹고 살게끔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설계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성물,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을 그들이 먹으므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물을 먹을 만한 자격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구별해서 너희 스스로 영적인 도덕성을 지켜라, 너희 스스로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성물을 먹을 만한 자격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못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 있는 상태에서 성물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3절에 "그들에게 이르라 누구든지 너희 자손 중에 대대로 그의 몸이 부정하면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끊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단절해 버리고 내 백성이 아니라 잘라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의미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교회 직원들도 교육전도사님부터 담임 목사까지 교회 직원들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 성물로 생활을 영위하고 먹고 삽니다.

그런데 스스로 내 몸을 구별하여 그것을 먹고 살게끔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백성 중에서 끊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그것을 먹을 만한 영적인 권위와 자격을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이 몸이 더럽혀진 상태에서, 죄 있는 상태에서 그 물질만 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2. 제사장이 먹는 제물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다섯 가지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제사가 몇 개나 됩니까? 기억이 나십니까? 즉 복습을 한번 해 봐야 되는데요.

첫 번째 번제, 번제는 어떻게 하는 제사입니까? 다 태웁니다. 완전히 태워 버리니까 기름도 껍데기도 뭐 고기도 다 태워 버리니까 그것은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나 제사장이나 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타들어가 드리니까요.

소제는 어떨까요? 레위기 2장 3절에 "그 소제의 물에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제는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셨으니 소제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제는 곡물이지요.

화목제는 어떻게 될까요? 레위기 7장 30절과 31절을 잘 보십시오. "여호와의 화제 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에 기름과 가슴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제 중에 가지고 온 제물의 가슴은 제사장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제(搖祭)라고 했습니다. 흔들 요(搖) 자를 써서 요제는 어떤 방향으로 흔드느냐 하면 앞뒤로 흔듭니다. 그래서 제물을, 짐승의 가슴 고기를 손에 얹고 앞뒤로 흔든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앞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로 당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제(擧祭)도 있습니다. 7장 32절과 33절에 "또 너희는 그 화목 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거제, 들 거(擧) 자입니다. 들어 비튼다는 뜻입니다. "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 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거제는 오른쪽 뒷다리입니다. 그러면 화목제, 소를 잡았을 때 소의 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 몫입니다.

거제도 들 거(擧) 자를 씁니다. 아까 요제는 앞뒤로 흔들었습니다. 거제는 올려 비틀었다가 내리는 것입니다. 든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고, 내린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다시 제사장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화목제 할 때 설명을 드렸는데, 거제든 요제든 백성들이 가지고 나와서 직접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일단 드렸다가 하나님이 다시 제사장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성도들이 '내가 드린 헌금으로 내가 목회자를 고용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성물인 헌금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다시 제사장을 먹이고 목회자를 먹이고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를 구별하고 거룩하고, 스스로 구별해서 이것을 먹고도 남음이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목회를 해야 되고 성도들을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가 드린 헌금으로 너희를 먹여 살린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양자가 서로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제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거제와 요제를 통해서요. 속죄제는 어떨까요? 레위기 6장 26절을 보십시오.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이것이 속죄제를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속죄제 물은 집에 가져가지 못합니다. 어디에서만요?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속죄제 제물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 뭐가 남았습니까? 속건제입니다. 7장 2절과 6절에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 번제 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제사장의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속건제 물도 구별된 거룩한 곳에서 먹고 집에 못 가져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번제를 빼고는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먹을 수 있다는 권리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먹을 만한 자격이 중요합니까? 자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것을 먹고도 남음이 있을 자격을 갖추라, 그 자격은 스스로 구별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을 누가 가르칩니까? 백성들은 제사장이 가르칩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누가 가르칩니까? 대제사장이 또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 대제사장은 누가 가르칩니까? 스스로 구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의 자기관리, 자기 영성 관리,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목회자도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야 되고, 엎드려 기도해야 되고, 자기 신앙생활 할 경건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야 성물을 먹을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 말씀입니다.

3-3. 말라기의 경고

그런데 이것이 지금 출애굽하고 있는 당시에 레위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포로기 끝에, 포로기 한참 지난 이후에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했던 시절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말라기는 구약의 끝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구약이 막을 내리고 430년간의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그때 레위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나님이 열받아서 하시는 말씀이 말라기 2장 1절과 3절에 나옵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제사장들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누구를 꾸짖는다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자손을 꾸짖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자손이 다치는 것, 자기 자식이 문제가 생기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것 아닙니까? 10가지 재앙 중에 가장 치명적인, 바로가 두 손 두 발 다 든 재앙이 장자 죽음 아닙니까? 그렇듯이 제사장들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살았으면 하나님이 '너희 자손을 꾸짖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똥' 똥이라 하셨습니다. 희생 제물의 똥을, 즉 소나 양이나 염소의 배설물을 너희 얼굴에 발라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 말은 제사장의 명예를 먹칠해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너희 얼굴에 똥을 발라 버리겠다' 하나님이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는가? 말라기 2장 7절과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원래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니와" 사자는 명령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의 길에서 실족하게 하였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언약을 깨뜨린 것에는 오늘 말씀, 이 언약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물의 권리만 주장하고 '소제 가지고 와, 화목제의 가슴살과 뒷다리살 가져와, 속죄제 물도 속건제 물도 가져와' 그러면서 자기는 거룩하게, 스스로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엉망진창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르쳐야 되는 사명, 말씀 가르침의 사명, 예배 인도의 사명, 재판의 사명 이 세 가지가 레위 지파에게 주신 사명인데 이것은 하지 않고 권리만 자꾸 주장하니까 하나님이 '너희 자손을 꾸짖고 네 얼굴에 똥칠을 해버리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직설적으로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서 오늘날 목회자들, 교회 직원들이 성도들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것은 달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정결하고, 믿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살아야 벌 받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삶의 윤리가 되어야 합니다.

3-4. 느헤미야의 교훈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더 살펴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입니다. 느헤미야 13장 10절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천천히 읽어 볼 테니 맥락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또 알아본즉" 여기서 나는 느헤미야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어떤 느낌입니까? 레위인들이 성물을 받고 먹고 살아야 되는데 그것을 안 준 것입니다. 공동체가 안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노래하는 자들은 성가대인데 다 밭에 일하러 가 버린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면 성도들은 영적 돌봄을 못 받습니다. 재판, 성경 교육, 제사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임으로"

제가 배경을 설명하면, 13장은 느헤미야의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에 옵니까? 성벽 재건하고 성 문짝 달려고 합니다. 와서 다 했습니다. 성벽도 재건하고 성 문짝도 달고 초막절 예배도 성공적으로 하고, 그리고 나서 왕이 다시 불렀습니다. 자기를 잠깐 얼굴 보자고요. 그래서 페르시아 수산궁으로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와보니까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있을 때는 잘했는데 와보니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도비야라는 도둑놈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야가 짜고 성전 곳간을 도둑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리는데 그것을 다 빼돌려 가지고 도둑질한 것입니다. 그러니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몫이 하나도 안 돌아간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굶어 죽어야 됩니까?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일터에 일하러 간 것입니다. 밭에 씨 뿌리고 노동하러요. 그러니 예배당은 엉망이 되고 제사는 엉망이 되고 백성들 신앙교육은 엉망이 되고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것을 꾸짖고 다시 바로 잡아서 백성들은 십일조를 다시 드리고, 그리고 레위인들은 생활의 안정을 잡고 성전이 다시 정상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 공동체가 성도들이 헌금을 드릴 만하게 투명하게 재정 운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야라는 도둑 둘이 백성들이 십일조 드리는 마음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이 다 도둑질하니까 누가 십일조하고 싶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재정 사용을 투명하게 해야 합니다. 단 한 푼이라도 정말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구나 하는 믿음과 신뢰를 줘야 그래야 성도들이 헌금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목회자들은 생활의 안정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목양에 전념을 하고, 그래야 교회가 건강하게 선순환이 될 것 아닙니까?

엉망진창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재정 사용은 불투명하고, 목소리 큰 사람에 의해서 함부로 돈이 막 집행되고, 이 곳간 저 곳간에서 눈먼 돈이 막 돌아다니고, 그래서 성도들은 '내가 열심히 헌금해봤자 이것은 도둑들에게 돈 갖다 주는 것밖에 안 되니까' 하고 헌금하지 않고, 그러면 목회자들은 자기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 권리만 자꾸 주장하고, 성도들 마음 안에서 빚진 것입니다. 안 되는 교회는 그런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정반대이겠지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주신 성물, 먹고 살라고 주신 것을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목양을 하고, 교회는 투명하게 재정을 잘 사용하고, 그래서 성도들은 헌금할 의지와 기쁨이 넘치고, 그래서 교회는 그것을 투명하게 잘 집행해서 교회 안과 밖을 성실하게 섬기고, 잘되는 교회는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거울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3-5. 성물의 범위

성물을 먹을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10절에 "일반인은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도 다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수 있는 범위는 11절에서 13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그의 돈으로 어떤 사람을 샀으면 그는 그것을 먹을 것이며 그의 집에서 출생한 자도 그렇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의 음식을 먹을 것이며 제사장의 딸이 일반인에게 출가하였으면 거제 성물을 먹지 못하려니와 만일 과부가 되든지 이혼을 당하든지 자식이 없이 그의 친정에 돌아와서 젊었을 때와 같으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몫의 음식을 먹을 것이나 일반인은 먹지 못할 것이니라"

14절에 "만일 누가 부지중에 성물을 먹으면 그 성물에 그것의 5분의 1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속건제를 적용시킨 것입니다.

3-6. 제물에 관한 부가 규정

이제 부가 규정이 있습니다. 짐승을 성물로 드릴 때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시리라"

왜 짐승을 7일 동안 데리고 있다가 8일째 드리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짐승을 드릴 때는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최소 일주일은 지나봐야 됩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잘 살펴보고 문제가 있는지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하나님께 드려라, 그 말씀입니다.

또 28절에 보니까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도주의적인 조치입니다. 그렇게 해서 짐승이라도 그래도 최소한의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보여 주라는 뜻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일상의 거룩에 대해서 제사장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17번의 레위기 공부 중에 오늘까지 13번을 공부했습니다. 복습도 좀 하시고, 또 우리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또 공부를 하시면 훨씬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선별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그 자유를 우리가 누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백성들이 제사장을 삶의 모델로 보게 하시고, 제사장들에게 장례와 결혼과 자신이 예배를 집례하는 이 모든 것도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회자가 아니라도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이오니 우리 모두가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룩이오니, 거룩은 말씀 안에서 자유한 것이라 하셨사오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무분별한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생명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로 이루고 만들어가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