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5 - 등잔대와 진설병, 그리고 형법 (레24장)
레위기 24장 2-3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둘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오늘은 레위기 공부 열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열다섯 번째 시간까지 오도록 최선을 다해 경주하고 달려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지혜가 함께해야 할 이유는 들은 것, 배운 것을 계속 기억하고 되새기며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함입니다. 그저 물리적으로 단순하게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되고 유익이 되며 적용할 수 있도록 읽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시작할 때마다 레위기 전체 개관을 한번 다시 정리하고 시작하는데, 이 작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숲을 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는 1장에서 27장까지 전체로 쭉 이어지는데, 크게 나누면 1장에서 16장까지 그리고 17장에서 27장까지 두 덩어리로 나눕니다. 1장에서 16장까지는 제사법, 곧 예배를 통한 백성 공동체의 거룩을 다룹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것인지를 레위기가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 말씀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곧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17장부터 27장까지는 삶의 거룩을 말합니다. 특히 일상에서의 거룩을 말하는데, 현재 우리는 일상에서, 곧 삶에서의 거룩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의 거룩도 여러 단계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로 우리가 다루었던 것이 일상의 거룩 중 음식에 대한 것입니다. 매일 먹는 것이므로 이 음식이 우리 거룩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둘째는 성생활을 다루었습니다. 셋째는 거룩의 개념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거룩이란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폼 잡고 뒷짐 지고 목소리 점잖은 척하고 있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거룩은 이런저런 것이라는 점을 다루었습니다. 넷째는 거룩이란 곧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해 내신 것이 거룩인데, 그중에서도 다시 제사장 집단을 구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제사장이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거룩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절기들입니다. 그런데 절기는 시간의 거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편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을 딱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에 나와 만나자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시간의 거룩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시간표에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일곱 가지 절기가 있는데, 사실 그 근본 가장 기초에 있는 것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여덟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나왔으면 이제 무엇이 나올 차례입니까? 오늘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공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공간의 거룩을 다룹니다. 레위기를 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굉장히 정교하게 레위기를 구성해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 나오면 공간이 나오고, 예배의 거룩이 나오면 삶의 거룩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공간에 대한 거룩을 다룹니다.
1. 등잔대와 진설병
그러면 우리가 24장 내용을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공간의 거룩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공간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성막입니다. 성막 자체를 하나님이 공간의 거룩으로 구별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크나큰 오해를 가져올 소지가 있는데, 그 오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막을 이미 공부했습니다. 성막을 공부할 때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막 그림을 머릿속에 생각해 보면, 성막 이 천막 안은 이등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집니다. 사실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증거궤라고도 하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오늘 24장에는 언약궤를 다루지 않습니다. 왜 다루지 않는가 하면 이미 레위기 16장에서 대속죄일을 다룰 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공부했습니다. 언약궤는 싯딤나무로 만드는데, 옹이가 있고 뒤틀림이 심하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서 빠져나오면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향로가 있고 등잔대가 있고 진설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향로도 다루지 않습니다. 왜 다루지 않을까요?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하나님께 심판받아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향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10장에서 다룬 향로도 일단 빼두시고, 16장에서 다룬 언약궤와 증거궤도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빼두시고, 오늘 공간의 거룩, 성전, 성막, 성소에서 다룰 것 딱 두 가지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는 등잔대요, 또 하나는 진설병입니다.
등잔대 그림부터 한번 봅시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등잔대에 불이 지금 몇 개가 있습니까? 금으로 되어 있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가 보입니다. 7이라는 수는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더해진 7이라는 수입니다.
진설병도 한번 보십시오. 숫자가 중요합니다. 자세히 세어보십시오.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 줄로 되어 있는데, 각각 6개씩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2개입니다. 이것은 조금 뒤에 볼 텐데, 12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오늘 이 두 가지를 다룰 것입니다.
1-1. 등잔대와 기도
교재 76쪽을 보십시오. 성소, 회막 안 등잔불을 위하여 정한 규례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둘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름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라고 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름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기름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아론과 아론의 가족, 레위 지파 제사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름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가지고 온 기름을 가지고 불을 켜는 것을 누가 합니까? 3절을 봅시다. "아론은"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아론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레위인 제사장의 대표 명사입니다. 아론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은, 곧 제사장들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읽으셔야 합니다. 증거궤는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휘장입니다. 그 휘장 밖, 곧 증거궤 휘장 밖이라고 하는 것은 성막 바깥 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 밖 성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여기서 '항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리하다'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정리하다'가 아라크(עָרַךְ)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라크의 원뜻은 '공급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공급한다는 말일까요? 마구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정리정돈한다는 말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온 감람나무 기름을 등잔불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이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넣어주는 것입니다.
4절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는, 여기서 '그'는 제사장들을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에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 어지럽혀 있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계속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등잔불 기름 그림을 다시 보십시오. 그림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불이 계속 타고 있는데, 이 불이 타려면 감람유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름을 제사장들이 계속 공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백성들이 기름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기름을 공급해서 불을 계속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등잔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등잔대는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거룩한 공간인 성소에서는 항상 백성들의 기도를 제사장이 받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나갑니까?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중재자의 역할입니다. 하늘과 땅이 있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가 있는데, 이 사이를 제사장이 연결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을 우리가 공부할 때 살펴보았습니다. 16장을 보면 대속죄일이 나오는데,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자기 죄를 가지고 감히 지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가려면 제사장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나와서, 제사장이 여기 등잔불의 기름을 공급하고 불을 계속 켜두면서 백성들의 소원과 기도를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시대입니다.
신약 시대에 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제사장의 역할이 누구에게로 넘어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실컷 기도하고, 아무개 저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합니다. 곧 그 대제사장, 제사장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가톨릭에서는 사제의 역할이 굉장히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사제에게 대신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가지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까지 찢어지고 난 이후에, 누구든지 담대하게 지성소 안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공간인 성소에서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과거에는 제사장이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대신 드렸지만, 오늘날은 어떻게 합니까? 성전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책무요, 교회의 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제사장의 역할이 예수께로 넘어갔고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러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목회자는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기도 부탁을 합니다. 목사에게 목사님 이것을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기 거룩한 공간 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런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성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거룩한 공간, 여기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멋지게 지어놓은 교회를 여러분들 많이 가보셨을 것입니다. 거기 가면 멋지게 지어놓은 교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층에 들어가면 커피 향기가 진하게 납니다. 사람들이 교회 성도나 성도 아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교회에 자유롭게 다 출입합니다. 거기까지는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커피숍에서만 와글와글 떠들고 있습니다. 기도실에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당은 굳게 잠가놓았습니다. 본당에 비싼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거기 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커피숍에서 떠들고 있기는 한데 사람들끼리 대화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한 공간의 본질 자체가 이미 사라져버린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깥에도 커피숍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 가서 마시면 되지 왜 굳이 교회까지 와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지 않고 본질을 흐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 공간, 거룩한 공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교회만 기도하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내 집에서 내가 어디든 기도하는 공간을 만들면 그곳이 곧 거룩하게 구별된 성소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제사장은 항상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성전을 떠날 수 있습니까? 성소를 떠나면 됩니까? 번을 서면서 로테이션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해도, 제사장 누군가는 그 자리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불을 꺼뜨리면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을 한번 보겠습니다. 3장 2-3절을 보시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레위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시내산 아래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세월이 한참 갔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사사 시대가 다 지났습니다. 사사 시대 말미입니다. 엘리가 제사장일 때 그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습니다. 자기 처소에 누워서 주무실 수 있습니다. 노인이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 둘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아버지 제사장이 처소에서 주무시고 계시면 아들 두 명이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소를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지켰을까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누구를 세워놓았느냐?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이상합니다. 엘리도 자기 처소에서 주무시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예 거기 관심이 없는데, 여호와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계속 등불에 기름을 공급하고 있었을까요? 누가 했을까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무엘이 어떤 사무엘입니까? 어린 사무엘 아닙니까? 아이 아닙니까? 한나가 젖 뗀 이후에 성전에 데리고 와서 엘리에게 부탁하고 맡겨놓고 내려간 아이입니다. 젖 뗀 이후 몇 살까지 젖을 먹였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나서 시간이 한참 지났겠지만, 그래봐야 열 살 내외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 사무엘이 거기서 번을 서고 있습니다. 당번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그냥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라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불이 약해지면 기름을 공급하고 또 기름을 공급합니다. 짠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복 주셨습니다. 대단한 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복을 주셨느냐? 사무엘상 3장 19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무엘의 기도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기도 응답이 100퍼센트 되었다는 뜻입니다. 대단한 복입니다.
하나님 성전에서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이런 복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기도 부탁을 목회자에게 합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해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오는 복을 자기 스스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권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에게 성도들이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 부탁을 받았으면 그것이 복 받는 통로라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사무엘이 이랬습니다. 그 옛날 제사장들이 왜 복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성소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새벽 시간에 기도하고,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일이 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향연이요, 향기입니다.
1-2. 진설병과 말씀
이제 거룩하게 구별된 성소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진설병입니다. 아까 우리가 그림을 보았습니다. 레위기 24장 5-7절을 보시면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여기서 '너'는 제사장들입니다.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떡 열두 개를 구웠습니다. 아까 우리가 그림에서 보았습니다. 여섯 개씩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다.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 개씩 진설하고" 아까 우리가 본 그대로입니다.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아까 유향을 보셨습니까? 다시 진설병 그림을 보십시오. 떡 위에 무언가 종지 같은 것이 하나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유향을 담은 그릇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섯 개씩 진설병을 올려두었습니다.
떡입니다. 떡은 상징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떡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8절을 다시 볼까요?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곧 7일에 한 번씩 떡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요? 이스라엘 자손, 이스라엘 모든 백성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떡이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누군가가 떡을 여러분에게 주면서 이 떡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면, 이 떡을 내가 먹어야 나를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루떡을 주는데 이 떡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해놓고 자기가 먹어버리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먹을 것이면서 왜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중보의 역할을 맡은 자가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 복이 이 어린 사무엘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엘리에게도, 비느하스에게도, 홉니에게도 다 흘러가지 않고,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입술을 복 주시고 그가 하는 모든 기도를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기도했던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라" 해놓고 9절에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먹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면 이 떡은 제사장들을 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떡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들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먹는 것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떡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먹은 값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먹은 값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제사장들이 먹는다는 의미는, 말씀을 내가 받아먹었으니 이 받아먹은 말씀을 내가 잘 소화시키고 잘 익히고 잘 배워서 백성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에게 세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의무, 둘째, 제사 예배의 의무, 셋째, 재판의 의무입니다. 후대로 갈수록 재판의 의무는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오십부장에게 넘어갔고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와 교육입니다. 신앙교육과 예배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먹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누구에게 유익입니까? 백성들에게 유익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로 이것을 가지고 오면,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익히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익히고 깨닫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묻고 또 물어서, 성경 말씀이 어려우니까 "하나님,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쉽게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해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렇게 하면 결국 그것이 누구에게 유익이 됩니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제사장들이,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습니다. 집도 주고 먹고 살게 해줍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가르치지 이않는다면 그 벌을 어떻게 다 받겠습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제사장은 가르치는 임무가 있습니다.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여기도 제사장이 중재 역할로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소화시켜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핵심과 본질이 무엇입니까? 먹는 떡입니까? 가르치는 말씀입니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중에 인용하실 때 다윗을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을 준 놉 제사장도 칭찬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1장 3-6절을 봅시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다윗이 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제사장에게 가서 떡 있으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보통 떡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떡입니다. "거룩한 떡은 있나니" 이것이 진설병입니다.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이 제사장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사울에게 지금 쫓기고 있습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군사들도 다 배가 고픕니다.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보통 떡은 없고 진설병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규정이 어떻습니까? 그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핵심 본질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본질이지, 이 떡을 누가 먹느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5절에서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절에서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들이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더운 떡을 들이는 날은 안식일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 동안 진설해놓고 다윗이 이것을 먹었습니다. 소년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본질적인 것에 신경도 안 쓰십니다. 본질만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후대로 가면 갈수록 본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제사장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제대로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않느냐, 이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 떡은 제사장만 먹어야 된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땅을 칠 노릇입니까?
오늘 우리도 본질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곳 성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첫째 기도가 있고, 둘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 배우는 공간이 차고 넘쳐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경 공부가 주고받고 오고 가고, 말씀이 전해지고 계승되고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공간의 거룩입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만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가 말씀으로 소통하고 가르침을 받고 가르치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공간이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거룩한 공간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필수 요소입니다.
이 공간이 거룩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어떤 분들은 목사가 와서 한번 거기서 예배드리고 기도 세게 하고 가면 거룩한 공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여기 이 일터, 여기가 옛날에 어떤 장사를 한 곳인데 좀 나쁜 귀신이 물러가게 기도 세게 해주고 가세요." 기도 세게 하고 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곳에 그분의 기도가, 그곳에서 매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에서 나누어지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공간이 되면, 그곳이 구별된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1-2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어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여기서 '거기'는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 위에 있는 속죄소입니다.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여기서 '너'는 모세와 아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 제작을 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까 보셨습니다. 22절에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성막 혹은 성전 안에서만 우리를 만나시는구나. 성전 안에 오면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만나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룩한 척하는 것입니다. 성전 밖만 나가면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라고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 안과 밖의 인격의 이중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거기서 만난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 공동체에 내려오시고 "너희의 편의를 위해서, 너희가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이니 이곳에서 내가 너와 친히 만나주겠다. 그곳에서 너희의 예배가 있고 너희의 기도가 있고 너희의 말씀이 있으면 내가 너희를 만나겠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66장 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잘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람이 집을 아무리 지어도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이 하나님의 발판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다 모신단 말입니까? 아무리 성전을 크게 지어도, 교회가 아무리 커도,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거기에 모십니까? 하나님이 직접 거기에 임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성전도, 이 세상에 아무리 큰 교회도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착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간의 거룩이 무엇입니까? 멋지게 지었다고 이 공간이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 집이 아무리 초라하고 초가삼간이라도 이 공간이 허름한 공간이 아닙니다.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와 말씀입니다. 등잔불과 진설병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공간은 우리 일상의 공간이 거룩한 공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도망하다가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을 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가 사닥다리 오르락내리락하고 저 끝에 하나님께서 보좌 위에 계신 것을 봅니다. 꿈에서 깨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런 곳에, 이 벌판에 계신 줄 자기는 몰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십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발등상,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여러분 계신 공간을 부디 기도와 말씀으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순환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이 순환이 일어난다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파 성도가 있고 말씀파 성도가 있습니다. "나는 말씀만", "나는 기도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도 드리고 말씀도 받고, 이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거룩은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다 필요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2. 이스라엘의 형법
이제 이스라엘의 형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가 공간입니다. 공간의 거룩입니다. 일상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형법하고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습니다. 아주 놀랍게 상관이 있습니다.
2-1. 여호와의 이름 모독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자를 어떻게 다룹니까? 한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레위기 24장 10-1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3개월 만에 시내산에 왔습니다. 출애굽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혼혈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인 어머니와 이집트인 아버지, 혹은 그 반대도 꽤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같이 출애굽했느냐? 열 가지 재앙을 직접 경험했으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고 바로가 거기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느냐?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여기서 '진영 중에서'가 중요합니다. 진영 중, 진영 중이 어디입니까?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그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그 삶의 터전이 싸움으로 얼룩지면 분위기가 아주 나빠집니다. 그래서 서로가 분쟁하고 서로가 분열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사람이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어떤 짓을 했느냐?
11절에서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큰일 났습니다. 저주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했습니다.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성경은 부모의 이름을 이렇게 잘 기록합니다. 왜? 가문의 먹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이 이런 짓을 하면 부모의 이름, 지파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래서 여기 '저주하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칼랄(קָלַל)이라는 히브리어를 씁니다. '가볍게 하다', 가볍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저주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저주하면 "야 너 죽어라" 이렇게 아주 악한 말로 아주 나쁜 말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온갖 더러운 말을 다 내뱉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이 저주가 칼랄, 가볍게 여기다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한 것입니다.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깜짝 놀라서 모세에게로 끌고 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정말 그렇게 큰일입니까? 여호와 이름을 잠시 가볍게 여긴 것이 왜 그렇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교재 78쪽입니다.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이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출애굽기 20장 7절을 봅시다. 우리 교재에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십계명의 몇 번째 계명입니까? 세 번째 계명 아닙니까?
세 번째 십계명이 선포되고 바로 이어서 주신 말씀이 레위기입니다. 이미 십계명이 선포된 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굉장히 이들에게는 예민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여겼으니까, 가볍게 여겼으니까 그래서 끌고 간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13-14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아까 진영 안에서 싸웠다고 했습니다. 진 밖으로 끌어냅니다. 백성들이 사는 공동체 마을 밖으로 끌고 갑니다.
공간의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사는 곳은 하나님이 거룩한 곳이라고 이미 규정하신 것입니다. 진영 밖으로 끌고 갑니다. 끌고 가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마치 안수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 들은 사람이 그 사람을 둘러싸서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수기도 하는 것이 아니고,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는지, 하나님을 저주하고 칼랄 가볍게 여겼는지를 각 사람이 손을 얹고 "제가 증인입니다"라고 확정하는 자리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을 모함할 수도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와서 다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과정입니다.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여기 온 회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온 회중은 200만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회중의 대표들이 그를 돌로 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온 회중이 돌로 칠 정도로, 회중의 대표들, 각 지파의 대표들이 와서 그를 돌로 쳐 죽일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중요한 문제냐? 이 사람을 만약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이름을 칼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그대로 두면, 이것은 백성들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간을 완전히 뿌리째 흔드는 행위입니다. 여호와 신앙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뿌리 아닙니까? 근간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공동체 전체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징계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함께 다 퍼져버리니까 이렇게 한 일들이 또 있습니다. 간음, 살인, 십계명을 어긴 자들은 다 이렇게 했습니다. 왜? 공동체 근간 전체를 흔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서 했습니까? 진영 밖으로 끌어내서 했습니다. 왜? 백성들이 사는 공간, 공동체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공간을 이미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0장 4절에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함에" 여기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입니까?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성소에서 죽어버렸습니다. 바로 거룩하게 구별된 공간인 성소에서 죽었는데, 이들을 여기서 당장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진영 밖으로. 이 거룩한 공간을 더럽히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죽은 두 제사장을 여기에 두지 마라. 끌고 나가라. 메고 나가라. 진영 밖으로.
그러면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 공동체에서 식구들이 삽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막말을 하고 부부가 싸움을 하고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물건들이 날아다니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공간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은 교회 안에서도 대치하고 싸우고 고성이 오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여러 교회들에서 있습니다. 경찰이 출동합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구별하신 거룩한 진영 안,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간,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니까, 이곳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을 함부로 더럽힙니다. 하나님이 끌고 나가버립니다. 거기서 다 끌고 나가고 내쳐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 헌법에 보면 예배방해죄라는 것이 굉장히 큽니다. 그 죄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동체에서 어떤 식으로든 예배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재판국을 세워서 재판에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심각하게 무서운 죄입니다. 가정도 그렇고, 일터도 그렇고, 특히 예배드리는 교회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그곳에서는 삼가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기 혈기를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누구든지'가 중요합니다.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이집트 사람이니까 이렇게 죽인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16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아버지가 이집트 사람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에서 끊어내라고 합니다. 공간의 거룩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는 공간을 거룩하게 지켜나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자녀들과 룰을 정하십시오. 우리 집에서는 절대 큰소리 나지 않는다, 서로 행복하고 서로 좋은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가정에서 화목을 위한 룰을 정하십시오.
2-2. 동해보복법
동해보복법에 대해서 말해 봅시다. 동해보복법은 같은 해로 보복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율법에 보복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낯설긴 한데, 이것은 굉장히 그 당시 상황에서 보면 선진적인 법이었습니다.
내용을 한번 보겠습니다. 24장 17절에서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절에서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절에서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실 이제 이런 율법을 보면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이 율법이 정해지던 그 당시에 상전이 있고 종이 있습니다. 가진 자가 있고 못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집안 좋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사람은 항상 상처만 받을 것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때려서 이가 3개나 빠졌는데 나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누구나 다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합니다. 동해보복법으로 그 사람에게 똑같이 해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범죄 자체를 막는 법입니다. 이런 법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앞서가는 법입니다.
만약에 이런 법이 없었다면 약한 사람은 계속 사회적으로 짓밟힘만 당하다가 볼일 다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역시 공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삶의 터전 공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하나의 방패막입니다. 이런 법이 있어야 공간이 거룩해질 것이니까, 이것이 없으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강한 자, 힘 있는 자, 권력이 있는 자들이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공동체인 가정과 사회가 그리고 동네가 다 안전하게 보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자기가 한 것대로만 비판받아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자녀들 나무랄 때 지금 그 행위만 가지고 나무라야 하는데, "야 너는 태어날 때부터 기분 나빴어. 너 얼굴 보니까 난 그때부터 별로 너 사랑스럽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상처에는 상처로만 갚아라. 예수님도 비판받을 짓 한 그것으로만 비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산상수훈 말씀에서 마태복음 5장 38-40절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말씀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예수님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그 뒤에는 "오 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가주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동해보복법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맞아도 넌 때리지 마라. 한쪽 뺨 맞으면 또 한쪽 뺨을 돌려대고, 속옷 달라 하면 겉옷도 주고,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도 가주고, 사랑으로 품어주라고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율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공동체를 사랑으로 더 만드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상의 거룩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의 거룩입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이 거룩해야 우리도 그곳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공간은 성막 혹은 성전만 거룩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가 있고 말씀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거룩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말씀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제사장이 그 중재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목사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부모가 자녀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가정의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자녀에게 전하면 그 부모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새 가족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기도 제목을 올려드리면 내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모든 공간이 다 거룩하게 구별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것, 그래서 공동체가 근간이 흔들리는 것, 하나님은 그 공간의 거룩을 위해서 그를 제거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간 안에서는 화목하고 행복하고 기쁜 일만 일어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소를 더럽힌 나답과 아비후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게 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한 자, 그 피를 진영 안에서 흘리지 않게 하시고 진영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치셨습니다.
공동체를 하나님은 세우기 위해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동해보복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아끼고 세워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 번 남았습니다. 다음 주 안식년과 희년을 살펴볼 텐데, 또 한 주간 살펴보시고 기도하시고 복습도 하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일상의 거룩에서 오늘은 공간의 거룩을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공간에 있어서든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전하는 사람 되어서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을 거룩하게 세워가게 하옵소서.
제사장만 중재,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는 다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 하나님께 올려드려서 사무엘처럼 복 받는 자 되게 하옵시고,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맡은 자가 되어서 그 말씀을 전하고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 우리도 복 받는 자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공간이 거룩한 곳이라고 하셨사오니, 우리 가정, 일터, 교회 공동체에서 거룩을 지켜가고 거룩을 회복시켜 가도록 주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