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10: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9장)
로마서 9장 33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은 로마서 9장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오해를 풀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8장까지의 내용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마서가 정점을 향해 올라오다가 성령의 은혜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인도하심, 선하신 은총,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바울의 고통과 간절함
1-1. 동족을 향한 근심
바울은 왜 고통과 근심 가운데 있었을까요? 바울은 자기 자신이 큰 근심과 큰 고통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고통과 근심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영적인 정체성,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부르심의 정체성 때문에 그는 심각한 고민과 걱정,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택하시고 그에게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이방을 위한 사도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이방인을 위해 전도하고 복음 전하는 사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고통받고 근심하고 있었을까요? 이방을 위해서는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이방 지역에 교회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점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민족이 걸리는 것입니다. 동족인 유대인들, 이스라엘 동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들의 영혼은 누가 책임지나? 이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살고 있는데, 이들은 도대체 누가 구원하나? 이런 걱정과 근심에 그가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끊어질지라도
바울이 골육의 친족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혼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는 간절하게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가 구약 시대에 한 사람을 통해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고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난리를 피운 사건 이후의 기도입니다. 모세가 올라간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은 그가 죽었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론이 두려움을 느꼈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합작해서 금덩이와 금붙이를 가지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나는 이제 이들과 함께 다니기 싫다. 내가 이들을 다 멸해 버리고 너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아닙니다. 하나님, 차라리 제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시고 이들만은 그대로 두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동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 동족을 위한 간곡한 마음이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나타난 모세의 간절함처럼, 바울도 동족을 향한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시지 않습니까?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고 교회 곳곳을 돌보는데, 집안 식구들이 보면 집안 청소도 안 해주고 밥도 안 해주고 집안은 잘 안 돌보고 교회 일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열심히 복음 전하고, 맡은 사명이 그것이라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고통과 근심으로 눌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족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만 받으면 족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기도의 네 가지 요소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의 기도의 폭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방향입니다. 기도의 방향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하는데, 자꾸만 사람을 찾아갑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람을 붙들고 무릎 꿇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찾아와서 엎드려 기도하는 것까지가 힘든 일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방향을 우선 하나님을 향하여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거기서부터 풀려납니다.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방향을 하나님께 아주 빨리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까 하나님밖에 붙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운 것도 너무 많고 가진 것도 너무 많고 경험도 너무 많아서 하나님 붙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오래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기도할 때 꼭 구해야 할 것, 필요한 것을 짧게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시지요?" 물론 들으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의도 자체가 깊게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는 것이 싫어서,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고되고 힘들어서, 그냥 짧게 기도 해치우고 말려는 것이라면 질문 자체가 불손하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땅을 파도 오랫동안 파고 깊게 파야 하고,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깊이 뿌리 내리도록 땅을 깊게 파야 하는 것처럼, 기도도 오랫동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깊게 하는 것입니다. 깊게 하라는 뜻은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라는 뜻입니다. 나의 내면이 어떤가, 혹시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 자아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고 있는가, 부서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넓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동족을 위해서도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고, 이방인을 위해서도 애타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그냥 나 자신과 우리 식구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넓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도의 폭과 범위가 아주 넓어져야 합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북녘 땅의 동포들, 아프리카 어린이들, 지금도 굶주림에 처해 있는 아이들,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보의 기도를 해드려야 합니다.
1-4. 가족을 위한 중보 기도
기도의 폭을 좁혀서 가족을 위한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바깥일 하느라 동족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을 위한 중보 기도는 반드시 열매가 맺힙니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노아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노아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를 포함한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방주에 태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원받았다"라고 단정 지으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노아를 보셔서 그들에게 방주에 다시 타게 하셔서, 하나님을 더 깊이 제대로 알아갈 수 있는 생명 연장을 통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영적 구원을 허락해 주신 것이 아니고, 사실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붙들고 그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의롭게 살았고 하나님과 늘 동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아를 보시고 그의 가족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합 한 사람 때문에 라합의 아버지와 라합의 식구와 라합의 온 친척들과 그에게 속한 가축들까지 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기회를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동족을 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든, 그들에게 기회를 무한정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조카 롯을,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과 불비로 멸망당할 때 이끌어내신 것을 보십시오.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롯이 무엇이 이뻐서 건져 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울이 동족을 위해서 이렇게 간구하고 애통해 하면서, 모세가 기도한 것처럼 그런 심정을 가지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동족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의 특권과 약속
2-1. 먼저 된 자의 축복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된 자로서 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 백성, 택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누리는지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울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받고 누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방인들은 구경도 못한 것들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한 선민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들이 선물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들, 율법을 세우신 것, 예배, 약속, 이 모든 것이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탁월한 조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런 분들만 보더라도 그렇고,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 이런 분들이 다 택한 민족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입니다. 여기서 절정이 나옵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조차 그들의 혈통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그들이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2-2. 시내 산 언약과 다윗 언약
언약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기 "언약들"이라고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 언약은 약속입니다. 약속은 일방적인 약속은 존재하지 않고, 약속 당사자, 계약 당사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었던 계약, 언약의 내용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시내 산 언약입니다.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말씀을 지키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언약 백성입니다.
두 번째 위대한 언약이 다윗 언약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보십시오. 다윗 언약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으려고 나단에게 이야기하니까 나단이 너무 기뻐하면서 그날 밤에 하나님께 아뢰었는데, 하나님이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네가 성전 짓고자 하는 마음만 가져도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입니다. 다윗은 그때 설계도도 하나 만들지 않고, 첫 삽을 뜬 적도 없고, 시공사를 선택한 적도 없습니다. 마음만 먹었는데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약속하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 하시는 것, 이것이 다윗에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고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2-3. 화석화된 믿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3대째, 4대째 신앙으로 쭉 내려오신 분들을 당대 신앙인들이 볼 때 "참 부럽다, 너무너무 부럽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태 신앙으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무엇이 부러운지 잘 모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러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계신 분들은 좀 짜릿하고 뜨겁고 완전히 내면이 뒤집어지는 그런 성령의 체험의 역사를 하고 싶은데, 그런 것은 별로 없고 뜨뜻미지근하게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당대 신앙인들은 그 신앙의 전통과 내용, 이미 몸으로 체득화되어 있는 것들이 부러운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입니다. 이미 누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그 누리고 가지고 있던 것들이 화석화된 믿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너무 많이 누리고 있어서 이것이 복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복인 줄 아는 것은 언제입니까?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내가 뒤처지고 있구나, 내가 영적으로 저 뒤에 있구나" 하고 불현듯 깨닫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들은 화석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혈통과 약속의 차이
3-1. 이스마엘과 이삭
혈통적 이스라엘과 약속의 자녀는 어떻게 다릅니까? 6절에서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우리는 누구를 떠올립니까? 이삭, 그리고 또 먼저 난 이스마엘과 이삭 두 명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삭도 아들이고 이스마엘도 그의 아들인데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왜 그랬을까요?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낳은 아들이고, 이삭은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고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8절입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왜 이런 비유를 할까요? 육신의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약속의 자녀라고 그냥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 몰라도, 말씀으로는, 약속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어떤 식으로 출생했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남자의 기력이 끝나기 전에, 사라가 여자의 경수가 끝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아들입니다. 육신으로 나온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서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사라가 하갈을 주었고, 그렇게 나서 이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까? 아브라함도 기다렸지만, 하나님도 기다리신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아브라함이 남자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사라는 여성의 기능이 끝날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이삭을 주셨으니까, 이 이삭은 육신으로 낳은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으로 낳은 능력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비교해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2. 약속의 자녀 됨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육신으로 낳은 자녀는 그러면 100퍼센트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뒤에 이어서 할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질문하면, 모태 신앙으로 5대째, 6대째 신앙인은 그러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혈통상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나 보니까 내가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는데, 그렇다면 나는 아예 버림받은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를 확정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말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이 말을 안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믿지 않음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라가 웃었지 않습니까?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 말씀대로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입니다.
4. 에서와 야곱
4-1.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이삭과 리브가에게 주신 에서와 야곱 가운데 야곱을 택하신 것을 하나님의 주권의 측면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리브가의 남편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쌍둥이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천천히 읽은 이유는 뜻을 생각하고 음미하시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쌍둥이가 태중에서 하도 다투니까, 리브가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다툴까요?" 물어보니까, 하나님이 "두 백성이, 두 민족이 너의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누구를요? 작은 자를 택하시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서 자라는 것을 보니까 에서는 안 되겠네, 야곱은 괜찮네,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주권적 선택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 13절입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4-2. 이중 예정론의 문제
여기서 신학적인 고민이 생깁니다. 이중 예정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중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내려오는 개념인데,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이중 예정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이 구절을 가지고 옵니다.
"보라,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지 않느냐? 하나님이 에서를 선택하지 않으셨지 않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은 원래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할 사람과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을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다." 그것이 이중 예정입니다. 이중 예정은 한 무리는 천국으로, 한 무리는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중 예정의 교리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우선 전도 자체가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도가 인간이 원해서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땅의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중 예정이 진실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아도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은 알아서 구원받고, 지옥 갈 사람은 알아서 지옥 가는데, 왜 시간 아깝고 물질 아깝고 노력 아깝게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중 예정이 사실이라면 전도 자체가 이미 의미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중 예정을 받아들이면 우리 기독교는 운명론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예정 자체가, 구원과 멸망이, 구원과 유기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내 운명도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역병이 퍼질 것도 하나님은 만세 전에 예정하셨고,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와서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있을 것도 예정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운명론으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시험에 실패할 것도, 시험에 합격할 것도 다 정해져 있다면, 기독교는 다른 샤머니즘과 무속 종교와 똑같아집니다. 점 보러 다니는 것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신학적 오류에 봉착합니다.
4-3. 창세기 본문의 의미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창세기 25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이 사건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버린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버린다는 말이, 지옥 보낸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지옥 보낸다는 말도 없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만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선택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이 땅의 역사를 쭉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시면,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큰아들이라고 무조건 그를 오냐오냐 하시고 그의 제사만 받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중심, 심령 중심을 보셨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아벨은 죽어서 먼저 천국 갔고, 가인은 호적에서 파 버려졌고, 아담과 하와의 계보를 이은 자는 셋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 중에 작은 자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구원에서 배제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을 둘째로 가져가신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아버지 요셉에 의해 야곱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축복 기도 받으러 왔는데, 야곱이 손을 어긋맞추어서 축복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늙으셔서 이랬나 보다 하고 요셉이 손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다시 손을 어긋맞추어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약속의 흐름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넘게 하시고, 약한 자를 통해서 약속의 계보를 흘려보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중에 뒤에 가면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은 귀하게 쓸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천하게 쓸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그냥 목욕탕에서 바가지로 쓸 그릇으로 만드는 권한이 왜 없겠습니까? 손님상에 내놓을 좋은 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권한도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사용하시고, 어떤 사람은 저런 모양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이지, 여기서 "너를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놈이다"라고 에서를 처음부터 지옥불에 떨어질 자라고 유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그렇게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다만 에서는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고 그래서 자기 혼자 집 나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아무도 그를 교회에서 내보낸 적도 없고, 아무도 그분을 소위 말해서 왕따한 적도 없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혼자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것입니다. 에서는 그 자존심 때문에, 기분 나쁜 것 때문에, 가인도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왜 내 것은 안 받고 저 사람 것은 받으시나요?"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존심이 자기 스스로를 유기해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그를 처음부터 선택과 유기로 갈라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4-4. 예정의 참된 의미
그러면 우리는 예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만을 버리시고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만 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습니다, 작정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가렸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리고 나니까 해가 뜨니까 잎이 말려서 올라가니까,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 누군가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대신에, 아들을 죽이는 대신에,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기로, 여기에밖에 우리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이것도 정하지 못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탑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대통령이 되고, 모든 사람이 다 기업의 총수가 될 수 있습니까? 다 저마다 삶의 현장과 자기 자리가 있고, 거기에서 그 현장과 자기 그릇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영광되게 하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영광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에서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이 이런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5. 하나님의 주권
5-1. 불의 없으신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어떤 전제를 두고 있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전제를 하나 두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울의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신앙생활 할 때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 전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여기 말씀처럼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 이 기초와 전제가 흔들려 버리면 신앙생활 전체가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래 버리면 신앙생활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 믿음과 전제가 중요한데,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전제를 우선 딱 정하고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 이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온 것을 쭉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불의하게 행하신 것이 있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의롭지 않게 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있었는지, 그런 의심이 든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깊이 있게 그 시간들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의롭지 않게 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5-2.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15절과 16절을 보십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 내가 불쌍히 여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가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저요.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저 긍휼히 여겨 주세요. 제가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봉사해서 1등 하면 하나님 저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까?"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도 아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 당신이 직접 선택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간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굴에 화장 좀 하고, 이뻐 보이는 목소리 하고, 하나님 좋아하는 것 좀 갖다 드리면 하나님이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 절대 아닙니다.
5-3. 바로에게 주신 기회
바울이 바로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을 온몸으로 다 받은 그 바로입니다.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주권의 경륜을 보이기 위해서 바울이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합니다. 진짜 그랬습니다. 바로, 바로의 불순종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을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해서, 바로는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내가 열 가지 재앙을 맞는 동안 한 번도 마음이 돌이켜진 적이 없다"고 하면, 바로는 죄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했으니까요. 이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면, 가룟 유다도 "어차피 예수님은 제자들 누군가에 의해서 팔릴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 지셔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해서 예정된 사람이지, 나는 죄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이 논리는 우리가 로마서 1장, 2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가 악하게 하는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거나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거나 회개의 영향을 주신 것이 아니고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심판 중에 제일 무서운 심판이 유기의 심판이라고 로마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바로에게 행한, 이집트에 행한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재앙이라는 말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의 열 가지의, 열 번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참으신 것입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이 바로를 "저놈은 유기하고, 저놈은 죽일 놈이고, 저놈은 지옥불에 들어갈 놈이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바로라 할지라도 열 번이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열 번이나! 그 열 번의 기회가 보통 기회입니까?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고, 온 이집트에 개구리가 다 뛰어다니고, 메뚜기 떼가 뒤덮였고, 악질, 독종, 우박, 흑암, 장자 죽음, 이것은 역사상 기록에 없는 무서운 재앙이고 놀라운 재앙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은 바로를 위해서, 이집트 백성들을 위해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회라고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메신저, 최고의 선지자 모세를 그에게 직접 보내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열 번이나 드나들면서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만난 어떤 성도님 한 분은 본인이 아기를 키웠는데, 아기 키울 때 참 외로웠다고 합니다. 아기 키우면서 혼자 집안에만 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전도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전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그 병원이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서, 거기 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저를, 제가 좀 교회 좀 가고 싶습니다" 하니까, "가세요. 알아서 가세요. 가시면 되죠"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나를 좀 전도해 주겠거니 하고 그렇게 말을 던져 봤는데, 그것도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주변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아도 그분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해서 바로는 얼마나 큰 특권을 받았습니까? 모세라는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그에게 갔고, 열 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라는 그릇은 이제 깨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지만 영원토록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고 또 오래 참고 또 오래 참고 기다리지만, 그 오래 참으심의 임계점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몇 년 참으셨습니까? 120년 참으셨습니다. 방주가 완성될 동안 120년 동안 참다가, 119년 동안 참다가, 120년이 딱 되니까 바로 하늘에서 문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고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임계점은 아무도 모릅니다. 심판을 언제 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열 명의 의인만 있으면 내가 이 성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아브라함이 기도했습니다.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애쓰고 할 동안 하나님은 참고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랍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 보셔야 합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5-4. 여리고 성의 교훈
여리고 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할 일 없이, 바빠 죽겠는데, 한 번에 치고 들어가서 깨부수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첫날 한 바퀴 돌 때 딱 무너지고 딱 끝나면 좋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한 바퀴 돌고 기회를 주시고, 또 한 바퀴 돌고 기회를 주시고,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기회를 주셨는데, 그들은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라합의 고백이 나옵니다. 라합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호수아 2장 9절에서 11절까지를 찾아보시면 거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걸어오는 과정을 우리가 듣고 마음이 녹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라합 한 사람만 들은 것이 아니고 수많은 여리고 성의 사람들이 다 들은 것입니다.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우리가 들었는데, 그 들었던 사람 중에 구원의 끈을 붙잡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라합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구원의 길이 다 열려 있어서 누구나 붙잡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붙잡는 사람이 누구일지 우리도 모릅니다.
가끔 교인들이 부모님들 병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도 예수 믿지 않고 신앙 고백하지 않고 계셨던 분인데, 마지막 병상에서나마 돌이키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해서 목사가 가게 됩니다. 많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딱 두 부류입니다. 어떤 분은 끝까지 뻣뻣하신 분이 계십니다. 어르신께 "눈만 좀 깜빡해 보세요. 죄인이십니까? 죄인이시죠?" 입을 꽉 다물고 절대로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목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그냥 눈물 흘리고 고개 끄덕이고 막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목사는 그분을 오늘 처음 보지만, 가족들은 그분의 젊은 시절과 어떻게 사셨는지를 다 압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렸을 때 어떻게 우리를 대했는지,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 다 압니다. 그러니까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고 놀라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분들에게 동일하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 구원의 역사는 원래부터 멸망으로 갈 사람과 원래부터 천국 갈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보편적으로 허락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바로에게조차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이 계속한 것입니다.
6. 토기장이의 비유
바울이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제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한 사람은 에서로, 한 사람은 야곱으로, 하나님은 둘째를 택해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기로 택하실 그 권한이 왜 없겠습니까? 에서는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구나. 나는 내 동생의 그늘 아래 거하며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겠다" 이러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집 나가 버리니까,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이것이 유기구나,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었구나 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이 바로라는 그릇을 딱 보시고 "저놈은 멸망시켜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는 짓이 엉망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바로조차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오래"라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얼마나 오랜지 아무도 모릅니다. 노아 시대 사람에게는 120년, 우리에게는, 올해가 얼마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시고 주권자이시니까, 이 그릇을 딱 들고 있다가 이것을 언제 깨지, 이것을 언제 깨뜨리지, 그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돌아오면 살포시 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나는 이 그릇을 통해서 영광 받고 싶다" 그래도 천히 쓸 그릇이 무슨 말 하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주권자가 선택하셨는데 말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영광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천히 쓸 그릇이 될 수도 있고 귀히 쓸 그릇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그릇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7. 호세아와 이사야의 인용
바울이 호세아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그렇습니다. 내 백성 아닌 자, 이방인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유명한 남은 자 사상입니다. 멸망으로 가지 않고 그 구원의 끈더기를 굳게 붙들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그 남은 자가 구원받을 것입니다.
8. 믿음으로 얻는 의
오랫동안 기다려서 결론입니다. 이방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30절에서 32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은 무엇입니까?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법을 따라갔습니다. 율법을 따라간 사람들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유대인들의 잘못입니다. 행위를 의지한 것입니다.
"걸림돌에 부딪쳤느니라."
이 부딪친 돌이 무엇입니까? 33절에 설명합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온에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걸렸습니다. 그 부딪힌 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는 그 부딪힌 돌에 부딪혔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걸림돌로 생각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성전의 모퉁잇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그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을 우리가 붙들고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오늘 이 9장은 사실 쉽지 않은 장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우리가 함께 나눈 바 그대로입니다.
바울의 실존적 고민, 유대인으로서의 고민을 이야기했고, 이미 유대인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바울이 다 설명했습니다. 에서는 자기가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에 자존심 상해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동생 야곱을 통해서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를 멸망으로 버리셨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버리시고, 우리 모두는 구원으로 초대하신 것이 우리 예수님,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무시무시한 이중 예정의 교리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한 분을 버리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놀라우신 십자가 사랑의 경륜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선택의 경륜을 의지하며,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여리고 성 백성들에게도 구원받을 기회를 주셨고, 노아 시대 백성들도 120년 동안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간 자들처럼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기대하시고 오래 참으실 때 속히 돌아오는 믿음의 자녀 되기를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일가 친지들 중에, 사랑하는 친구들 중에 아직까지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열심히 복음 전하는 자 되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 전하여 그들이 마음이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귀한 역사도 일어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