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 믿음과 구원 / 전체녹취

로마서 특강 11 - 믿음과 구원 (10장)

로마서 10장 9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은 로마서 10장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9장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오늘 10장을 시작하기까지 길고 긴 길, 어려운 길을 잘 달려오셨습니다. 로마서가 쉽지 않고,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 무척 피곤하고 어려운 여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절 한 절 살펴보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헷갈리는 것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다시 곱씹어 보고 또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1. 바울의 기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바울이 자기 동족을 위하여 심히 눌리는 것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이방인을 위해서 전도하고, 복음 전하고, 교회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동족의 영혼 문제가 마음에 심히 눌리는 것이 되고 걱정거리와 염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동족을 위해서 걱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걱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1-1. 소원에서 기도로

오늘 이 짧은 1절에서 그 말씀을 하고 있는데, '원하는 바'는 헬라어로 유도키아(εὐδοκία), 마음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소원, 원하는 바를 마음에 가지고만 있으면 소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원하는 바 유도키아를 소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 소원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고, "이걸 이루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십시오.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소원이 되었다가, 이 소원이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염려가 됩니다. 소원이 변질되면 염려가 되고, 염려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불평이 됩니다. 그런데 소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입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바'는 헬라어로 데시스(δέησις), 비탄의 외침입니다. 간절하게 외마디로 외쳤다는 뜻입니다. 그냥 원하는 바를 마음의 소원으로 담아두지 않고 목소리 높여서 아버지께 부르짖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훌륭한 점입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이 구원 얻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 얻도록 하나님 모종의 조치를 취해주시고 어떤 일이든지 행해주십시오" 하고 계속 외쳤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쉬운 것 같은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걱정도, 염려도, 소원이 있는데 그것을 끄집어내서 기도의 자리로 가지고 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강력한 무기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가 세상을 싸워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면 누가 가장 방해하겠습니까? 사탄이 가장 방해하겠지요. 사탄이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기도하려고 할 때 마음에 불신도 주고, 환경도 만들지 않고, 여러 모양으로 기도할 수 없는 상황 아흔아홉 가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소원을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담아두다가 이것이 변질되어서 염려가 되고, 염려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불평이 됩니다. 비탄의 외침으로 토해내십시오.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2. 염려 대신 기도

바울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한마디로 말하면 염려하지 말고 아뢰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으로 담아두지 말고 구하는 바를 비탄의 외침으로 토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소원이 있으면 이것을 입 밖으로 토해놓는 연습을 자꾸 하셔야 됩니다. 표현하는 연습을 하셔야 됩니다. 사람에게는 잘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가서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고 때로는 저주도 하고 흉도 보고, 그렇게 해야 마음의 앙금이 좀 풀리는데 하나님께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잘 하지 못하도록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로막는데,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구하는 바를 계속해서 표현하십시오. 그래야 해결이 됩니다.

2. 이스라엘의 문제

바울이 이토록 걱정하고, 이토록 염려하고, 이토록 사랑하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문제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는데 지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면 열심은 있고 열정은 있고 에너지는 차고 넘치는데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향방을 모르고 방향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 교회 공동체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힘겹습니다. 왜냐하면 열심이 넘치는데 바른 방향을 모르고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2-1. 지식의 참된 의미

지식이라는 것은 배워서 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신 할머니 권사님들, 어르신들도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하십니까? 기도도 잘하시고, 신앙생활 멋지게 잘하시고, 봉사도 섬김도 모든 것 다 잘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그런 지식, 학교에서 배우는 세상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차고 넘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 열심으로만 가득 차면 공동체도 힘들고 본인도 힘들고 모두가 힘듭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말하면 떠오르는 사람들 얼굴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아, 내가 이런 분들을 만나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혹시 우리가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이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학교에서 제대로 못 배우면 망한다는 뜻으로 여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지식에다가 예수님이라는 말을 한번 넣어서 다시 한번 봅시다.

"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말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교회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40년, 50년 하고 교회에서 직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가득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예수님을 버리면, 그리스도를 버리면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2-2. 성장의 두 요소

베드로후서 3장 18절을 보면 베드로가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하다가 제일 마지막 장 제일 마지막 절의 결론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장해야 되는데 두 가지가 성장의 재료입니다.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두 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자기의 서신서를 쓰면서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은혜와 지식이 성장하는 데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내가 은혜 달라고 달라고 해서 주어집니까? 백날 달라고 외쳐봐야 하나님 주시는 분이 안 주시면 그만 아닙니까. 은혜는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나름대로 내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하고,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하면 내 편에서부터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지식은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수직적으로 만나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지식부터 먼저 가졌을까요? 은혜부터 받았을까요? 베드로는 은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로 자기하고 상관없이 그냥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 그다음부터 예수를 지식으로, 그다음부터 계속해서 배웠던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알아갔습니다.

바울은 반대입니다. 바울은 은혜부터 받았습니까? 지식부터 가졌습니까? 구약의 율법과 가말리엘 문하에서 말씀을 배워서 지식이라는 장작을 차곡차곡 쌓았던 사람이고,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음 받았던 사람입니다. 방향이 다르고 시기가 다를 뿐, 은혜와 지식은 신앙 성장에 아주 중요한 필수 요소입니다. 지식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 헛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바울도 지식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도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믿는 것은 뜨거운 심장, 내 뜨거운 가슴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아는 것은 냉철하고 차가운 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2-3. 지식 없는 열심의 결과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는 자들의 특징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어 가지고 유대교 극단주의자로 심취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을 잡아서 옥에 넘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옥에 갔습니까? 바울이 사울 시절에 그가 얼마나 많이 교회를 박해했습니까?

지식 없는 열심에 대해 갈라디아서 1장 14절과 빌립보서 3장 4절에서 6절까지 바울의 자기 고백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입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전통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교회 안에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전통을 붙잡고 삽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고, 우리 교회에서 과거의 관습이 이랬고, 전통이 이랬고, 우리 교회가 옛날에 해왔던 관행이 이렇고. 말씀은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따라가고, 예수 따르는 제자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상관없고 전통이 최고로 중요한 가치가 되는 자들,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 빌립보서 3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두 번째 특징은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경험도, 물질도, 권력도, 명예도,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자랑해야 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올바른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옛날에 그랬습니다. 바울이 전통에 집착하고 육체를 자랑하고.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는데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2-4. 하나님의 열심

올바른 지식이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성경 안에 있고, 사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처럼 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 말은 2절과 반대입니다. 다시 2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이 있었는데, 사실 예수님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나를 향한 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이 있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열심의 산물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언하시고 보내시려고 하신 메시아이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열심이 거기에 다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작정하신 시기가 언제였을 것 같습니까?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실 때, 그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열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까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뭇잎을 가져다가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습니다. 해가 뜨고 해가 중천에 오르니까 나뭇잎이 다 말라서 올라가 버리니까 부끄러움이 또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꺾어서 또 가려야 됩니다. 인간의 열심으로는, 인간의 수고로는 자신의 수치를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더라"입니다. 가죽 옷이 나오려면 짐승 한 마리가 죽어야 됩니다. 한 마리가 죽어야 그 죽음의 대가로 가죽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아내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에 대한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장차 내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아담과 하와, 이들의 후손들을 구원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열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서 노아 시대로, 아브라함으로, 이삭으로, 야곱으로, 열두 지파로, 그리고 수없는 역사 동안 오랜 기간의 역사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열심을 다해서 나의 구원을,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지금까지 긴 세월을 참아오시고 또 참아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솔직히 내가 나를 보면 욕심도 많고 교만하고 겉과 속이 다릅니다. 그것뿐입니까? 순간순간 양심에 찔리는 것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이전의 내 행동을 기억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은밀한 곳에 숨겨진 양심의 가책이나 비밀까지 다 끄집어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감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감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원의 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 질문입니다. 3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3-1. 율법의 마침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율법에 내재된 문제점과 한계점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의입니다.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율법의 방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고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마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텔로스(τέλος)입니다. 텔로스는 "끝, 종점,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모든 노력, 즉 율법을 통해서 의를 세우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끝이 난다는 의미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행함의 의가 됩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바울이 5절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율법에 근거한 의는 율법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완벽하게 순종해서 의를 세우겠다는 것인데, 성경이 거듭 말하지 않습니까. 이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율법은 의를 얻게 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8절까지 보시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신명기 30장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율법을 가지고 오겠느냐? 누가 바다 건너 먼 곳까지 가서 율법을 가지고 오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율법이 우리 가까이 있어서 아주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씀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겠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가 올라갈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는 말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굳이 누가 음부에 내려가서 다시 올려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3-2. 구원의 조건

다 필요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을 필요 없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무저갱에 내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돌아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간단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 9절 말씀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마음에 믿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가 헬라어로 퀴리오스(κύριος)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적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로마 시대 때 황제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황제를 퀴리오스, 주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했던 시대입니다. "황제는 나의 주 퀴리오스다"라고 고백하면 누구든지 참새 한 마리도 살 수 있는 작은 돈을 주고 향을 사서 황제 동상 앞에 분향을 하고 "퀴리오스, 당신은 나의 주입니다"라고 하면 됐습니다. 황제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가셨을 때,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가 어떤 곳입니까? 황제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어디를 가도 황제의 동상이 있고, 황제의 흉상이 있고, 황제를 숭배하라는 문구가 곳곳에 쓰여 있고, 사방을 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황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도시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황제를 퀴리오스라고 부를지라도 나는 주님 당신을 나의 퀴리오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3-3. 목숨을 건 고백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에 지배당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말은 예수를 황제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황제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반역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사는 사람들, 로마서는 로마 본토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에 있는 사람이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읽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내가 여기 로마의 심장 로마 본토에 살면서 예수를 퀴리오스라고 시인하라고 하다니! 그것도 우리끼리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하다'라는 말을 보십시오. 헬라어로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몰로게오라는 말은 호무(ὁμοῦ)라는 말과 로고스(λόγος)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호무는 "함께", 즉 "공적으로"라는 뜻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로고스는 말, 언어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라는 뜻입니다. 너 혼자 앉아서 몰래 화장실에 앉아서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목사님 앞에 가서 "주님 그리스도시입니다"라고 말하라는 말이 아니고, 공적인 자리에서라도 너는 "주는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말은 목숨을 걸라는 뜻입니다. 네가 예수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처럼 나도 똑같이 죽겠다는 각오를 묻는 것입니다. 아주 비장한 질문이고, 이 질문 앞에 대답하는 자는 자신의 목숨과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표현입니다. 공적으로.

그런데 이 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마음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입으로 표현하는 것이 진짜 마음의 믿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핍박받는 시대가 아니니까 어떻게 알겠습니까? 집에서 "그냥 세례 받아라" 하니까, 집에서 "입교하라" 하니까, "세례받아야 뭐가 좀 된다" 하니까 그냥 가서 묻는 말에 대답 잘하고 "네,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뜨거운 믿음이 의로움이 되고, 그 마음의 고백이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처럼 죽어도 좋습니다" 하면서 호몰로게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것.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싸구려 구원, 값싼 구원, 그런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월이 지나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가져와서 그냥 공적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십니까?" "네, 시인합니다." 너무 가볍게 구원이 싸구려 취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원 자체가 값싼 구원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기고,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그 시대 사람들을 기억하며 믿음을 지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예수님을 팔아먹을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여기도 시인한다, 호몰로게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3-4. 누구든지

11절에서 13절까지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자세히 보십시오.

먼저 10절에 보면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그라미 한번 쳐보세요.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말은 누구 아무개를 특정하는 게 아닙니다. 철수가, 영희가, 영자가, 이런 말이 아니고 "아무나,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도 "애니원"(anyone), 아무나, 누구든지입니다.

12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여기도 '사람이', '누구든지'와 같은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아무나 사람이, 이런 뜻입니다.

13절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10절부터 13절까지 '사람이', 그리고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또 '누구든지', 다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혈통으로가 아니라 아무나,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나'라는 말에 꽂혔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언어를 한번 옮겨보면, 우리는 세례받을 때는 입으로 시인해서 그냥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은 내 온몸으로, 행동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표현해야 됩니다.

그것이 과연 쉽습니까? 매일같이 직장에서, 일터에서, 동네 어귀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삶을 표현하는 것이 과연 쉽습니까? 로마서에서 계속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단번에 이루신 구원이고, 칭의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감격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같이 시인해야 됩니다. 행동으로, 입으로, 삶으로 드러내고 표현해야 됩니다. 이것이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자 의무이자 목적입니다.

4. 복음 전파의 과정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말해보십시오.

14절에서 15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이렇게 읽었는데, 이렇게 읽고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한 줄로 정리를 해보셔야 됩니다.

이렇게 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보내심. 누군가가 누구를 보냈기 때문에 보냄 받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냈고, 교회가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보냄 받은 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보내셨습니다. 보내셨기 때문에 전파하는 자가 있으니까 듣는 것입니다. 전파하니까 들으니까 무엇이 생깁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무엇이 됩니까? 고백이 됩니다.

이 표를 다시 잘 보시면 교회가 해야 되는 일이 있고 개인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디가 교회가 하는 일입니까? 보내고 전파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보내고 전파하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고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교회가 아무개를 보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보냈습니다. 각 일터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에, 교회가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분이 보냄 받아서 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말로도 전하고 행동으로도 전하고 자신의 오랫동안의 삶으로도 전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듣습니다. 귀로 듣고 몸으로 듣고 존재로 듣습니다. 듣다 보면 무엇이 생깁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고백하게 됩니다.

교회는 부지런히 보내야 됩니다. 교회는 부지런히 전파해야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계속하고 교회에 속한 성도, 우리도 교회가 보내면 계속 가야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부름 받은 우리가 여기서 성장하고 자라서 은혜 받고 또 보냄 받아서 나가서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4절과 15절 말씀은 이런 하나의 표로,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불순종과 기다리심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습니다. 말씀이 있고,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은 누군가가 전해야 됩니다. 그러면 듣게 되겠지요. 듣게 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 교회의 본질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자주 말씀하셨던 것 중에 하나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사도 요한이 편지를 씁니다. 계시를 받아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이런 식으로 쭉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끝에 항상 하시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들음이라는 것입니다.

5-1. 듣는 교회

들어야 성도들이 믿음이 생길 것이고, 믿음이 생겨야 고백할 것이고, 그 고백이 되고 은혜를 받아야 나갈 것이고, 나가야 다시 또 전할 것이고, 그래야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한 것은 오늘날의 교회는 듣는 것보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만큼 말 많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말이 정말 많은 곳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도 언젠가 한번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는데, 말 많은 것까지는 괜찮은데 말이 말썽이 되면 안 됩니다. 말이 말이 모이고 모여서 말썽으로 불거지면 은혜가 없는 교회가 됩니다. 말이 있다가도 말씀이 있으면 말썽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없으면 말이 반드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또 불어나서 눈사태가 되고 산사태가 되고 결국은 말썽이 납니다. 교회의 본질은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입니다. 귀를 열고 자꾸 들어야 됩니다. 상대의 말도 경청하고 하나님 말씀도 듣고, 입을 단속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5-2.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이렇게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첫째,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레스타인에,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믿지 않습니다.

두 번째, 1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들었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귀 없는 자들입니다. 귀 있는 자들이 아니고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린 것입니다. 구약은 들음을 '청종'이라고 표현합니다. 듣고 따름이라고 표현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듣고 따라가야 들음이 완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듣고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19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알았는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알았는데, 알면 무엇합니까? 머리로만 알았는지, 알면 무엇합니까? 제대로 몰랐는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복음을 알았으나 순종하지 않고, 들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고 따르지 않고, 알긴 했으나 불순종하고. 이런 이스라엘입니다.

5-3. 두 팔 벌린 하나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어 가십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실까요? 이들을 불로 심판해버리실까요?

21절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어떻게 하셨습니까? 손을 벌리고, 두 손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종일'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종일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오랫동안이란 뜻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참으심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참으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 속에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장인데 사랑을 첫 번째로 정의하는 것이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이 오래 참고의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몇 번 참으면 될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랑은 오래 참고" 이렇게 짧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숨이 턱에 차서 막 숨 넘어가기 전까지 "오래 참고..."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성경 읽을 때도 내가 예수님이 오래 참으신 것을 기억하는 의미로 오래 참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금도 참고, 오래 참고, 종일 동안 참고, 두 손을 벌려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오기만 해라. 이렇게 지금 바울이 설득하고 외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가족 중에도 있고, 일가친척 중에도 있고, 사랑하는 분들 중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바울처럼 그냥 염려만 하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쏟아내시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품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열심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바르게 분별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로마서 10장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로마서 10장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열심이 있으셨음을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할 때도 많았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열심을 내셨는지 깨닫고 기억하는 믿음의 백성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를 시인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 옛날 로마에서 살던 성도들의 고민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내 직장, 가정, 삶의 현장에서 삶으로 예수를 시인하며 보이며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삶으로 주님 따르는 백성이 되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고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잘 전파하고 듣게 하여 주시고, 우리 또한 행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