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12 남은 자 (11장)
로마서 11장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오늘은 로마서를 공부한 지 열두 번째 되는 시간으로, 로마서 11장을 함께 나눕니다. 로마서는 전체가 16장까지 되어 있는데, 1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으나,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통신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편지를 써서 교리는 이렇고, 예수님은 이렇고, 성화의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12장부터 16장까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성도들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 그리고 사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11장 말씀은 교리 부분의 마지막입니다. 어느덧 사실 로마서가 쉽지 않은 복음임은 틀림없는데, 지금 잘 따라오신 분들이라면 이렇게 이해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이해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해는 하고 넘어갔는데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어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순간 이해하셨고, 이해하셨으면 다음번에 다시 보면 또다시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리 부분의 가장 마지막인 11장, '남은 자' 사상을 살펴봅니다. 남은 자 사상은 굉장히 중요한 사상입니다. 구약부터 시작해서 바울이 말하는 신약까지, 그리고 오늘 교회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1.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유대인은 바울의 동족입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마음을 수시로 표현했는데, 지금은 바울의 마음이 아니고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펴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자기 백성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결단코 버린 적이 없다는 전제입니다.
바울이 글을 쓸 때 여러 가지를 혼용해서 쓰는데, 'A, B, C 그러므로 결론' 이렇게 말하는 방법이 있고, 지금은 결론부터 먼저 제시하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 자기 백성을 결단코 버린 적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놓으면 근거를 대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고 묻습니다. 바울은 그 근거를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1-1. 첫째 근거: 바울 자신
첫 번째 근거가 1절에 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나를 보라, 내가 곧 증거다. 나는 유대인 아니냐, 내가 베냐민 지파에서 났고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나님께 붙잡혀서 이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셨다면 나도 버려야 하는데, 내가 지금 살아서 이렇게 꿈틀거리며 말씀 증거하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유대인을 전부 다 버린 것이 결단코 아니다. 바울이 이렇게 첫 번째 증거로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쓴 서신을 읽어보면 가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나를 본받는 자들아."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 굉장히 교만해 보이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도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신다는 증거로 "내가 곧 그 증거다, 나를 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바울은 굉장히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이야기하려면 그가 진짜 하나님 앞에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임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세상 사람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예수님이 정말 지금도 역사하신다고, 증거가 무엇이냐 근거가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여러 이유를 열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보라, 나라는 존재를 보라. 그리고 나의 인생 이야기를 쭉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곧 예수가 살아계신 증거가 되고, 내가 곧 하나님이 사랑이신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고 몇십 년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의 증거조차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왔는지를 말입니다. 찬송가 288장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처럼, 이것이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요, 간증이요,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피해가고, 훈련은 받지 않으려고 하고, 섬김과 봉사는 하지 않으려고 하면 간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도 정면으로 돌파하고, 고난의 풀무도 한번 들어가 보고,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써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나다, 이것 이외에 무엇이 필요하냐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오래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르신들 장례식에 가면, 그 가족들과 그 어른의 관계를 보면 딱히 장례식에서 목사가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80, 90세까지 사시다가 세상 떠나신 그분이 곧 오늘 우리 사회 현대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겪었고, 한국전쟁 겪었고, 보릿고개 다 겪었고, 군사정권 시절도 겪었고, 민주화 시절도 겪었습니다. 이분의 인생을 보면 곧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입니다. 달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글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는 것 말고, 우리 부모님들의 인생을 보고 예수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보면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잘 살아내셔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나를 보라" 하니 얼마나 떳떳합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는 좀 모르겠고 저분을 보면 좋겠다, 이렇게 살면 우리 신앙생활이 비참하지 않겠습니까?
1-2. 둘째 근거: 칠천 명의 남은 자
두 번째 증거를 이야기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울, 너 하나만으로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근거로는 좀 약하지 않느냐, 다른 증거 대보라. 그러니까 바울이 열왕기상 17장, 18장, 19장에서 나오는 근거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워낙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 이런 이야기를 수시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구약 성경의 스토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도대체 이 말씀은 어디에서 뚝 떨어진 말씀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상황으로 한번 돌아가 보면,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중에 최고의 악한 왕이 아합입니다. 아합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이 아내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두로와 시돈이라는 바닷가에 살고 있었던 공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북이스라엘로 시집을 옵니다. 시집올 때 사명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마음속에 원대한 꿈을 품었는데, 그 꿈이 무엇이냐 하면 북이스라엘 전체를 바알과 아세라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시집올 때는 "내가 믿는 신을 하나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 신을 섬길 수 있는 제사장도 한두 사람 데려가겠습니다" 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합을 구워삶아서 북이스라엘 전체에 바알과 아세라 천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엘리야 시절에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가 450명이었고,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가 400명이었습니다. 합이 850명입니다. 이 850명이 북이스라엘 전체에 자기들의 신당을 하나씩만 갖고 있다 하더라도 850개의 바알과 아세라의 신당이 북이스라엘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북이스라엘에 엘리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항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 나 혼자만, 왜 나 혼자만 이렇게 저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가? 난 너무 외롭고 난 너무 고통스럽다.
열왕기상 18장 22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나는 혼자 남았다고 했습니다. 나만 혼자인데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는 400명, 합이 850명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한번 붙어보자, 850대 1로 한번 싸워보자 했는데,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450명만 갈멜산 꼭대기에 나타났습니다.
내용과 결과는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다. 그들이 아무리 뛰고 아무리 춤추고 자기 몸을 칼로 상하게 하고 피를 내도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엘리야 차례가 됐습니다. 송아지 각을 뜨고 물을 끼얹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그 불이 송아지를 다 태웠습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정도 역사가 일어났으면 엘리야가 생각하기를, 아합과 이세벨이 자기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고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정상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오히려 더 분기탱천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까지 내가 저 엘리야를 잡아서 죽이고야 말겠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엘리야는 그만 두 다리에 힘이 쑥 빠집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이제는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보십시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 사람은 생명을 거둬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 혼자 남았는데 이제 내가 끝까지 몰려 가서 죽어버리면 이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자기를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계속 이야기합니다. 19장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 이야기를 14절에서도 똑같이 합니다. 글씨 하나 안 바뀌고 14절도 똑같습니다.
지금 제가 18장 22절, 19장 10절, 19장 14절을 읽었는데 이 세 구절에 똑같이 등장하는 말이 '나만 홀로 남았거늘'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 엘리야는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 혼자 남았습니다. 나 혼자 남아서 이 악한 무리들과 어떻게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혼자 남았습니다.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기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이 시작됩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아직 남아있다. 넌 왜 너 혼자만 일하려고 하느냐.
엘리야가 정말 훌륭한 선지자임에는 틀림없는데, 이분의 단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분의 단점은 혼자 영웅 놀이하고 혼자 일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찾아보면 바알에게 아직까지 입 맞추지 않고 아직까지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의 군사들이, 아직까지도 그 영혼이 순결한 칠천 명의 백성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그들을 찾아서 함께 연대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자 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세 번이나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그렇지 않다, 너 혼자 남은 게 아니야, 아직까지 바알에게 입 맞추지도 않고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남아있다,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1-3. 함께 동역하라
오늘 이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많은 도전을 줍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혼자서는 일을 잘하는데 두 사람, 세 사람이 하는 일은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나와 여러 가지 삶의 형편이 다른 분들과 서로 부대끼면서 일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혼자 열 사람 몫을 감당하는 게 속 편하고, 몸이 불편한 게 낫지 마음이 힘든 건 절대로 못 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특별히 우리 아이들 세대로 가면 그런 경향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함께 동역하고 함께 어우러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나 혼자 남은 게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 증거를 두 가지 이야기하는데, 바울 나를 보라. 두 번째는 그 옛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칠천 명을 아직까지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유대인들에게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아직까지 표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한 사람들이 남은 자들로 분명히 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악한 세대를 살피다 보면 나 말고는 믿음이 제대로 바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을 봐도 전부 다 날라리 신자 같고, 나 혼자 제대로 믿는 사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역하라고 남겨진 칠천 명의 사람들을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겨두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대하지 못하고, 손 내밀지 못하고, 함께 동역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 그런 분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고질적인 문제가 이런 부분인데, 성도의 교제가 중요한 이유는 함께 구역 모임도 하고, 공동체 모임을 하고, 남성교회 여선교회 모임도 하고, 여러 봉사에서 모임을 하다 보면 모난 부분이 자꾸 깎여가기 때문입니다. 사각형이었는데 한 10년 지나면 둥그스름하게 되고, 20년쯤 지나면 완전히 둥근 모양이 됩니다. 둥글둥글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독불장군은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직접 연단하시기도 하고 사람들을 통해서 연단하시기도 합니다. 모세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광야에서 따로 떼서 훈련하시기도 하고, 공동체에 집어넣어서 그 공동체에서 연단되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훈련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그 훈련 방법에 순종하면 됩니다.
2. 남은 자의 의미
두 가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근거를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 남은 자가 있는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
2-1. 보존된 자, 레인마
여기 남은 자를 헬라어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절에 '남겨두었다' 할 때 '남겨두다'가 헬라어로 카탈레이포(καταλείπω)라고 합니다. 합성어인데, 카타(κατά)라는 단어와 레이포(λείπω)라는 단어가 함께 결합되어 있습니다. 카타는 '따로'라는 뜻이고, '분리하다'라는 뜻이고,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레이포는 '보존하다', '잘 보존하다' 이런 뜻입니다.
'남기다'라는 말의 우리말 어감이 어떻습니까? 남기다 하는 말, 우리말 어감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남긴 음식, 남긴 밥. "엄마는 항상 너희들 남긴 밥만 먹는 사람이야." 어감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남겨두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서 떼어놓으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서 떼어놓으신 사람들, 따로 분리해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5절에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할 때 '남은 자'는 헬라어로 레인마(λεῖμμα)라는 단어를 쓰는데, '보존된 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철옹성같이 지키신 '보존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존된 자, 남은 자, 남겨두다라는 단어를 들으시니까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교회 공동체에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 세상의 진리처럼 통용되는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에 우리 성도들을 이렇게 보존하시고 남겨두신 것입니다.
2-2. 예배 공동체와 심판
성경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구약을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언제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까? 교회 공동체가 무너질 때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타락했을 때, 더 이상 이 땅에 희망이 사라졌다 할 때 하나님은 그때 완전히 이 땅에 희망이 없음을 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최초의 예배 공동체는 에노스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예배 드렸더라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그때부터 예배 공동체가 형성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작지만, 이것이 창세기 4장입니다. 창세기 5장에 가면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가 쭉 나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도 나오고 악한 사람들의 족보도 나옵니다. 악이 관영해서 악한 사람들의 족보가 얼마든지 엄청나게 크고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배 공동체가 아무리 작고 연약해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 드리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보시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가 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혼인하면서 예배 공동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 것 아닙니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까요. 소돔과 고모라 땅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이유도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숫자적으로 10명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그 땅에 예배 공동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배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가정에 희망이 있으려면 우리 가정에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지켜주십니다. 혼자 예배 왜 못 드립니까? 나 혼자 믿는 믿음이라고 해서 왜 예배 못 드립니까? 얼마든지 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몇 명이 모였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명이 모였든 그 자리에서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고 전심으로 예배 드리면,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그 성을 지키시고 그 땅을 보존하십니다. 그런데 예배 공동체가 붕괴되면, 이제는 남은 자가 없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남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북녘 땅에도 여전히 남은 자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하교회 공동체들을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저 땅을 변화시키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북녘 동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3. 성미(聖米)와 구별
'따로 보존하다'라는 말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 부모님들이 믿음의 대를 이어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부모님들이 성미를 따로 구별하는 것을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집에 식구가 다섯 식구면 성미를 다섯 번 이렇게 덜어놓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조금 더 하고 싶어서 본인은 오늘 식사를 안 하시고 한 번 더 하시고, 그렇게 해서 따로 구별합니다. 먹다 남은 쌀을 교회 가져가는 게 아니고, 먹다가 남으면 가져가는 게 아니고, 밥 짓기 전에 미리 먼저 성미를 따로 다 덜어서 거룩한 쌀을 마련합니다. 거룩한 쌀, 이 거룩한 쌀 성미의 개념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따로 구별해서 따로 떼어두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시면 어머니는 밥을 지어다가 따로 식사를 딱 덜어 아랫목에 넣어둡니다. 그런데 그 밥에 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거룩해서 거룩한 밥이 아니고, 따로 보존하고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 쌀이, 그 밥이 거룩한 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행실을 보고 거룩해서 따로 구별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정하셔서 구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순간 그것은 칭의가 되는 것이고, 그 구별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성화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진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계속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아닙니까?
2-4. 찌꺼기, 로이포이
7절에서 말하는 남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나쁜 의미의 남은 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6절과 7절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택하심을 얻은 자들이 있고,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오지 못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진짜 다 택함을 받고, 아직까지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한 남은 자들, 하나님이 따로 떼서 보관한 자들이 아니라, 따로 보존한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아직까지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한 남은 자들, 그들이 어떻게 됐다고요? 우둔해졌다고 합니다.
여기 남은 자들은 헬라어로 로이포이(λοιποί)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남은 자 레인마, 보존된 자라는 말하고는 여기 로이포이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여기 남은 자들은 '찌꺼기'라는 뜻입니다. 로이포이, 찌꺼기. 우리말에는 똑같지만, 하나님이 다 택하시고 아직까지도 하나님 은혜의 반열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 이런 자들은 '우둔하여졌다'고 합니다.
헬라어로 에포로테산(ἐπωρώθησαν)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포로스(πῶρος)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머리가 돌머리가 됐다는 말이 아니고, 마음이 돌같이 딱딱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둔해졌다는 말은 머리가 나빠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내 심령이 돌같이 굳어져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셔서 받아들인 자들이 있고, 돌같이 마음이 굳어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말씀을 바울이 지금 하는 것입니다.
3. 이사야의 그루터기 사상
이제 남은 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우리는 남은 자 사상을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한번 제대로 뿌리를 뽑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사야 6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그루터기, 이것이 남은 자 사상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그루터기 사상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 때 예언했습니다. 히스기야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여러 왕들의 시대를 예언했는데, 히스기야 왕 때 국제 정세는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시리아는 남유다를 삼키려 합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킵니다" 하면서 예언했습니다. 그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이 아무리 황폐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 땅에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그루터기가 있다, 남은 자가 있다. 그 그루터기 사상이 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10장 20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 중에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 야곱 족속 중에 피난한 자, 이들이 다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할 것이다. 종말 때 심판 때 남은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11장 11절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남은 백성,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28장 5절입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남아 있어야 영화로운 면류관도 보고 화관도 볼 것 아닙니까?
이사야가 말한 이 남은 자 사상은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큰 위로가 됐습니다. 포로 백성들이 무엇으로 버티겠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붙들고 살겠습니까? 우리가 남은 자로구나, 내가 바로 남은 자로구나, 내가 여기서 잘 버티고 이를 악 깨물고 살아남아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남은 자가 되어야 하겠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루터기가 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결단하고 버티고 또 버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남은 자가 되셔야 합니다.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세상에 악한 풍조가 마치 진보적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그것을 얘기해야 마치 지식인처럼 느껴지는 이런 사회에, 여러 가지 세상의 악한 풍조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고 우리 아이들을 집어삼키는 이런 세상에 우리가 마지막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하나님은 그 남은 자를 보시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 많은 숫자가 다 구원받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냥 허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번 비바람이 불어치면 우수수 다 떨어집니다. 광풍에 다 떨어집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남은 자가 영광을 보고 면류관을 보고 화관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견디고 남는 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4.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관계
4-1.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방인의 구원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로 차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지므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하게 함이니라"
원래 순서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먼저 구원하시고 그다음 선민들 다음으로 이방인들로 가려는 순서였는데, 이스라엘이 거기에서 배제되어 버리니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그다음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이방인에게로 가니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이 역사 받고 그들이 은혜를 체험하니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왔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할 수 있는가?" 베드로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는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아도 자기는 이방인과 상종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시므로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진 것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됐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쓰임받는 도구밖에 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쓰임이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쓰임받는 것은 불행한 쓰임 아닙니까? 바로처럼 그렇게 쓰임받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도 기회를 주셨다고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열 번의 재앙이라는 기회를요. 그 열 번째 재앙에서 그가 엎드려서 통회 자복하고 넘어갔으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열 번의 재앙, 열 번의 기회를 다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홍해를 뒤쫓아가서, 홍해를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가서 그들을 다시 잡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는 드라마틱한 역사의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쓰임받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다가 내가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그 구원받는 사람은 은혜가 되지만 나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항상 두려워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 열심히 전하다가 내가 버린 바 될까 봐 그것이 내가 두렵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고 설교 열심히 하고 믿음 생활 잘하다가 여러 성도들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다가, 자기가 타락해서 잘못된 길로 가버리고 말년이 비참해지면, 그러면 그 목사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은 끝까지 잘해야 합니다. 중간에 넘어지지 마시고 끝까지 잘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고 마지막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를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성화의 삶을 잘 살아서 영광스러운 영화의 구원에까지 이를 때까지 우리는 열심히 전심전력해서 달려가셔야 합니다.
4-2. 바울의 사명
바울이 받은 사명을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지금 바울이 로마교회 편지 쓰고 있기에 로마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로마교회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첫 번째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두 번째 14절입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의 두 번째 사명은 유대인들, 자기 동족의 구원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을 우리는 바울이 전한 사도행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항상 다른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 가서 설교했습니까? 회당에서 했습니다. 한 곳만 빼고요. 빌립보에 갔을 때는 빌립보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회당을 찾지 못해서 강가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강가에 있는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다른 곳에서는 다 회당에 가서 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자기 동족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끔 해서 그들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당에 가서 우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얼마나 많이 고생했습니까? 그런 동족 때문에 당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항상 회당에 가서 동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3.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징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16절과 17절을 보면 이방인을 상징하는 단어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우선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부터 찾아봅시다. 16절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이것이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소제로 드리기 위해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맞습니다. 가루가 될 때까지,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그 가루가 얼마나 귀합니까? 처음 익은 곡식 가루. 하나님께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처럼 유대인들을, 이방인들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뿌리도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17절 끝에 보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 참감람나무도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다 좋은 것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뿌리, 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요? 다시 볼게요. '떡덩이',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만든 떡덩이, 떡덩이는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지', 가지도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떡덩이가 되려면 먼저 가루가 있어야 되고, 가지가 싱싱하게 뻗어나가서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존재하려면 유대인들이 먼저 존재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이 가지는 왜 꺾였을까요? 원나무에서 가지가 꺾인 이유는 말을 안 들어서 꺾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가지가 있습니다. 이 남아있는 가지는 남은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지 얼마가 꺾였고 남은 가지가 있는데, '돌감람나무' 여기서 돌감람나무가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즉 로마교회 교인들 너희들이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었다. 세 가지씩 이해가 되시죠?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들, 먼저 택한 자들과 이방인들, 나중에 택한 자들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5.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자세
5-1. 이방인에게 주시는 말씀
이방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방인, 떡덩이, 가지,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은 18절을 보면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면 안 됩니다. 이방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입니다. 접붙임 받은 가지에 열매가 아무리 많이 맺혀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원래 내 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그것 가지고 으스대거나 자랑하면 안 됩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여, 너희들은 자랑하지 말라." 바울이 복음 증거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과 가난이 닥쳤다는 사실을 듣고 다른 이방 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을 다 거두어 가지고 예루살렘 모교회를 돕습니다. 왜냐하면 원뿌리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내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니라"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1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요. 원 가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행을 행했을 때 하나님이 다 쳐버렸습니다. 그런 것처럼 너희들이 교만하게 행하면 이방인인 너희들이라고 봐주겠느냐? 다 쳐버릴 것이다. 이 말은 항상 두려움과 경외감과 떨림과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복음이 저 멀리서 전파되어서 약 130여 년 전에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 공부할 때 다 했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 말씀이 먼저 왔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성경이 먼저 번역돼 있었던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만하면 안 됩니다. 이제 교회가 많아지고 선교사 파송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교만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교만해선 안 됩니다. 원래 130여 년 전에 이 땅이 가난했던 그 시절에, 정말 지지리도 가난했고 아무것도 없었고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왔던 시절에, 아이들은 열이 태어나면 일곱 여덟은 열 살 미만에 다 죽던 그런 시절, 그 시절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랬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접붙임을 받게 하셔서 이렇게까지 부흥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정말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서 나누는 데 헌신해야 됩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애쓰고 힘쓰면 곤란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이방인들이 기억해야 될 것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엄격함을 잘 적용해야 되고, 타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보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저 형제를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자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노를 참으시고 천 대까지 인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목사를 찾아와서 묻습니다. "목사님, 이 정도는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겠죠?" 이 질문의 의도가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도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타인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합니다. "저러다가 벌 받을 텐데, 저러다가 큰일 날 텐데" 벌 내리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고 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인자하고 너그럽게, 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이방인에게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라, 하나님이 원 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도 결정적일 때 아끼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기억하라.
5-2.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말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3절입니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말을 두 번 부정했습니다. 이중부정은 긍정입니다. 그럼 긍정문으로 읽어볼게요. 여기 '그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도 믿는 데 머무르면" 이해가 되시죠? 이렇게 쓰면 좋을 텐데요.
이스라엘이 잘 믿으면, 여기서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잘려져 나갔습니다. 이미 잘려 나간 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잘려 나간 가지도 다시 하나님이 덧붙여 주실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희망이 있다.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농부는 없습니다. 농부는 잘려 나간 가지를 다시 붙일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까 잘려 나간 가지인 이스라엘도 다시 접붙일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것을 믿고 다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24절입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하나님이 반드시 붙여주실 것이다.
오늘날 믿음 생활 잘하다가 실족해서 떨어져 나간 형제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그들을 향하여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잘하다가 별안간 시험에 들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우리 형제 중에도, 우리 가족 중에도, 우리 신앙의 공동체에 잘 믿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덧붙여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6. 바울의 결론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논한 후에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2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다 많이, 충분히 돌아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둔하게 그냥 하나님이 내버려 두실 것이다. 이방인들이 충분히 돌아오고 나면 그다음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예언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온 땅에 복음이 다 전파되고 결국은 유대인들에게도, 지금은 유대교에 심취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이심이 그들에게 증거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가 절대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분명히 유대인들이 결국에는 다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33절은 찬송입니다. 교리의 마지막, 교리의 결론을 바울은 찬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교리를 실컷 이야기했습니다. 충분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깊도다. 너무 깊어서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다음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한다. 그의 길은 찾지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바울이 이렇게 교리 부분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7. 결론: 계시의 한계와 겸손
저는 이 고백을 들으면서 큰 깨달음, 깊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알려주신 것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믿음 생활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로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고 평생을 목회하면서 바울처럼 이만한 지식의 절반 정도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깊은 진리를 깨닫고 고백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잘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만큼만 알 수 있고, 계시한 만큼만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 깨달아 가지고 잘못된 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항상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지금도 계시하시고 지금도 깨닫게 하시고 지금도 알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로써 우리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교리 공부를 다 마쳤습니다. 교리를 한 번 더 정리하시려고 하면 1장에서 11장까지를 꼬박꼬박 천천히, 잘게 잘게 씹어서 한 번 더 보십시오. 그러면 한 번 볼 때보다 두 번, 두 번 볼 때보다 세 번이 훨씬 더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교회 생활, 신앙생활, 사회생활, 국가와의 관계 등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남은 자 사상을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나도 남은 자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남은 자가 있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고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남은 자가 있고, 이사야 선지자도 남은 자를 노래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남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악한 풍조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다 하여도 우리가 남은 자가 되어서 이 세상의 풍조를 이기도록 주께서 도와주시고, 우리가 남은 자가 되어서 교회를 지키는 자가 되도록 주께서 축복해 주시며,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을 도마뱀처럼 물리치는 하나님의 희망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경륜과 지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